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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박중언의 《노후 수업》에 이어 읽게 되는 이 책은 인생 후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지침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194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철학가이자 소설가인 「파스칼 브뤄크네르」의 지성서로 소개한 책 표지에는 ‘세계적 지성이 전하는 나이듦의 새로운 태도’라고 했다. 내 경우도 그렇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는 나이 든다는 생각 없이 불혹을 넘기고, 지천명과 이순을 넘겨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세월이 그렇게 빨리 흘러왔듯이 나이듦이 무엇이고 또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해야 하는지 책은 잘 설명해 주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사람은 50세를 넘으면 이런저런 욕구가 샘솟아 마음이 급해진다. 언제 병이나 사고로 세상을 떨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데카르트는 “지금의 나는 다음 순간에도 자신이 이러할 것이라고 보장하지 못한다.”고 했다. 의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은 17세기보다 결코 덜 비극적이지 않으며, 매일매일의 덧없음을 상쇄해주지도 않는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것은 통계적 사실이나 이것이 개인의 장수를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지금 우리는 양쪽을 다 내려다볼 수 있는 능선에 올라와 있다. 문법적 범주의 미래와 실존적 범주의 미래를 구별해야 하고 실존적 미래는 우발적이지 않은, 다시 말해 원하고 욕망했던 미래다. 어떤 미래는 감당해야 하는 것이지만, 다른 미래는 만드는 것이다. 전자는 수동적이고 후자는 의식적이다. 어쩌다 보니(?) 우리에게 주어진 앞으로 20년, 30년 동안 무엇을 해야 하나? 우린 이미 제대했는데 또다시 동원된 병사들과 비슷한 신세가 되었다. 할 일을 얼추 다 했고 결산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 같은데 그래도 무엇을 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다. 길의 끝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약속의 땅이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늙었다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위로가 된다. 그들은 쉬기를 원했는데도 버티라고 한다.
현대는 자연의 우발성에 아무것도 맡기지 않는 ‘제2의 창조’ 생명의 지배라는 거짓 희망을 품게 한다. 그런 희망은 미친 사람이나 갖는 것이 아니다. 단지 실현이 지체되고 있다던가 걸림돌이 있다는 식으로만 생각한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참을 수 없게”(카를 마르크스)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다음은 혁명을 일으킬 수도 있고 생산성 없는 불평만 늘어놓을 수도 있다. 오래 사는 것이 절대 규범이 되면서 문명은 노쇠, 기력 상실, 의존을 더욱더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가 늙어가고 또 죽어간다는 사실을 참아주지 않는다. 생물학과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생명을 리모델링하겠다는 트랜스 휴머니즘의 눈부신 약속들은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듣기 좋은 공론이자 디지털 언어로 다시 쓴 《파우스트》에 불과하다.
철학적이기도 하고, 문학적이기도 한 이런 표현들은 책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 같다. 트렌스 휴머니즘과 바이오 데크놀로지는 우리의 증오와 정신 나간 희망을 다시 깨운다. 진척되고 있는 연구를 처음부터 비난할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자세를 보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주장도 있고 보면 이번 세기 중반이면 노화 세포 연구성과 덕에 150세까지도 살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지 못하고 나는 그때까지 못 살아도 우리 후손들에게는 기회가 올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영생을 살 수 있다고 하는데 침울한 영혼들은 죽음의 죽음을 애통해한다. 우리는 공표된 야심과 기록된 성과 사이의 깊은 골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불가피한 것들은 미뤄졌을 뿐 기피되지는 않았다. 독일과 일본에서는 유아용 기저귀보다 성인용 기저귀가 더 많이 팔린다고 한다. 늙는 것도 서러운데 노화의 슬픔을 부정하거나 노화를 없앨 수 있다고 약속하는 부조리까지 범하지는 말자.
이상을 (1)「포기」에서 인용했다면, (2)「자리」에서는 우리가‘아직은 퇴장할 때가 아니다’라고 한다. 인간은 점점 더 잘살게 되었고 점점 더 오래 살게 되었다. 조상들이라면 진작 죽었을 나이에 우리는 불안하나마 아직 큰 병 없이 살아 있다는 기쁨을 느낀다. 몸은 예전만 못하지만 살아 있다는 부조리한 기쁨으로 뭐든지 다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직 할 수 있는 게 많다. 20대에는 졸업장을 따느라, 취직하느라, 실력을 입증하느라, 초보 딱지를 떼느라, 애숭이 태를 벗느라, 첫사랑의 아픔을 이겨내느라, 새로운 자유를 홀로 감당하느라, 젊음을 누릴 수가 없었고, 허구한 날 불려가고, 실수를 저지르고, 마음에 들지 않는 선택지 중 뭔가를 고르고, 매일 아침 “우리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아느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악몽이 따로 없었다.
서양에서 삶은 딱 한 번이다. 불교나 힌두교와는 달리 만회할 수 있는 보충수업이 없다. 동양의 종교들은 카르마(karma)라는 개념에 따라 시험적인 운명을 고안했다. 이번 생에서는 전생의 과오를 갚고, 그렇게 생을 거듭하면서 미약함을 정화하다가 열반에 이른다. 동양은 ‘생으로 부터’해방되고자 하고, 서양은 ‘생 안에서’해방되고자 한다. 동양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 구원이라면 서양에서는 동일한 시간 동안에 여러 번 거듭나는 것이 구원이다. 그리스도교는 영생을 걸고 단판 게임을 하고, 힌두교는 존재라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혼이 정화될 때까지 윤회라는 긴 게임을 하게 된다.
한 인간의 생애는 여러 가지 삶이 있고 삶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지만 서로 비슷하지는 않다. 그 삶들이 한데 모여 연속성을 띠고, 운명이라는 모양새로 쌓이고 겹친다. 과오를 저지르고 만회하고 다른 과오와 실패를 거듭하면서 멋지게 완주하려고 한다. 60세 이후 아름다운 삶에 대한 모델이 별로 없기 때문에 각자가 삶을 만들어 가야 한다. 우리는 피터팬처럼 어른이 되기 싫은 어린이, 늙기 싫은 늙은이다. 나이 먹는다고 모두 철이 드는 것은 아니다. 늦바람이 죽을 때까지 갈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무덤이나 소독약 냄새 나는 병실로 들어가는 것보다 낫다. 세상에 관습에 도전하는 것보다 짜릿한 것은 없다.
도널드 트럼프처럼 70대에도 여전히 나르시스트 악동이 있고, 열정은 여전히 번득이고 영혼과 마음은 불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다. 정신적 나이와 감성적 나이는 생물학적 나이와 일치하지 않는다. 50세, 60세, 70세가 넘어 겉보기는 진중할 뿐 알맹이는 그렇지 않다. 나이에서 황폐한 장식을 벗겨내고 노년을 유머와 멋으로 갈아엎어야 한다. 한계는 밀어내기 위해 존재한다. 생은 어떤 단계에서든 불가역성에 반발할 수 있다. 심연으로 가라앉기 전까지는 언제라도 그럴 수 있다.
매일 아침 거울 속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그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게 되어버리면 그 사람에게 묻는다. “넌 누구냐?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거야?”나이는 예고 없이 우리를 덮치고 우리가 아닌 또 다른 자아가 우리에게서 태어나게 한다. 게오르크 헤겔은 그런 게 ‘운명’이라고 했다. 타자의 모습을 한 나 자신 말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일생을 빨리 돌리기로 보여준 광고가 있었다. ‘아기의 배냇짓부터 해변에서 서로 손을 꼭 잡은 등 굽은 노부부까지의 모습에는 죽음의 무도와 동화는 섞여 있다. 사람의 평생을 몇 분으로 압축해 보여주니 무섭다. 인생의 단맛, 쓴맛을 겨우 음미하는가 싶었는데 한순간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버렸다.
(3) 루틴(반복, 습관)에서는 19세기 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시대 골수 애연가였던 ‘제노’이야기를 들려준다. 기침과 가래로 이골이 난 그는 건강에 집착해 의사와 정신분석가를 만나고 치료소에서 전기요법까지 받으면서 담배를 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다시 담배에 손을 대고 마는데, 그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더 맛 있다”고 하면서 마지막 한 개비에 또 한 개비로 넘어가기를 54년 동안이나 거듭하였고, 우울하지만 재미있는 결론을 내린다. “내 인생은 이런 반복이었다”라고…. 습관은 우리의 행위에 입히는 옷, 우리를 구조화하는 집, 우리들 일상의 정신적 소재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 된 기질로서 심리적 낭비를 크게 막아 준다. 우리는 늘 습관의 피조물일 수밖에 없다. 신념보다도 더 뿌리 뽑기 힘든 게 습관이다.
우리의 삶은 소설이 아니다. 늘 그날그날 똑같다.
뭐 새로운 것 없나?
별일 없이 사는 거지 뭐.
그런데 인간은 일화 형식의 일상을 소재 삼아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살아간다.
평범함의 과제는 폭풍 같지 않은 폭풍의 일상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시시해 보이는 폭풍이 계속 이어지면
가장 강인한 마음도 무너뜨릴 수 있다.
아침의 아름다움은 세상과 다시 맺은 결합의 아름다움이다. 이런 아름다움은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가는데 필요한 여권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커피나 차를 마시는 이 단순한 몸짓들이 사물과 내밀한 연대를 맺고 우리를 다시 세상으로 내보낸다. 가끔은 정신 나간 사람들이 잠은 시간 낭비라고, 잠이 없으면 좋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꿈 꾸는 힘이 사라지고 우리 몸은 생물학적 주기에서 벗어날 것이며, 갈마듦의 환상은 희미해질 것이다. 프랑스 낭만파 작가 스탈 부인은 책과 사상에 관심이 남달랐지만, 죽기 전 몇 주 동안에 계속 잠을 자지 못하자 작게 신음했다. “잠이 없는 삶은 너무 길다. 24시간을 때우기에는 너무 지루하다.”단 하루가 매일매일이고 새벽부터 석양까지 단 하루가 한평생이다. 니체는 우리가 영웅처럼 “매일 저녁 황혼에 죽고 이튿날 다시 태어난다”고 했다.
50세, 60세, 70세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20세, 30세, 40세 때와 똑같다. 삶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자에게 달고, 저주를 퍼붓는 자에게는 매섭다. 갑자기 태도가 달라지고 어느 날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 갈 수 있다. 어느 나이에나 열의와 피로의 싸움은 있다. 인생사는 그저 부조리하고도 멋진 선물일 뿐, 아무 의미도 없다.
어딘지 모를 곳에서 와서
누구인지 모를 자로서 살며
언제인지 모를 때 죽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가는데도
나 이토록 즐거우니 놀랍지 않은가.
- 마르티누스 폰 비버라흐(16세기 독일의 성직자) -
(4)는 「시간」이다.
“자기 삶 외의 다른 삶을 두루 살펴보지 못한 사람은 결국 자기 삶도 살 수 없을 것이다” - 폴 발레리(프랑스 작가, 시인, 철학자) -
“아무리 힘들고 벅찬 삶이라 해도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추가되면 한결 가볍게 느껴질 것이다” - 헨리 제임스(미국 모더니즘 소설가) – 로마황제 아우렐리우스도 이런 취지로 말했다.
“인간이 아이를 스승으로 삼는다면 형이상학적으로 얼마나 위대해질까?”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슬라르가 한 말이다. 이제 막 시작하는 생, 이제 막 피어나는 영혼, 이제 막 열리는 정신의 가르침이 실로 간절하다. 유년에게 배운다는 것은 60세, 70세가 되어도 20세 때보다 경험만 많았지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상황을 바로잡을 가망은 오히려 더 줄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들 모두는 시간의 연안에 헐벗은 채 떠밀려왔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순결한 눈, 놀라워하는 능력을 되찾아야 하는 늙은 어린애들이다. 쓸데없이 지식만 꾸역꾸역 머리에 처넣은 어른들의 애매한 앎보다는 철저하게 직관으로 가득한 무지가 나아 보일지 모른다.
아무도 다시 젊어지지는 못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도 탐구와 관찰의 정신을 유지함으로써 의식을 풍요롭게 채울 수는 있다. 망가지기 쉬운 상태로 추락한다고 해서 사유의 깊이까지 달라지지는 않는다. 사유는 자기만의 노선을 따라간다. 성 프란체스코는 ‘어린아이처럼’살라고 했다. 생의 초년처럼 살면 늙어버린 자아의 한계를 깨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샘에 뛰어들어 몸은 비록 늙되 마음은 늙지 않는다. 세상에 쾌락에 대한 감각을 지키고 걱정 많은 속내와 혐오라는 이중의 함정을 피해야 한다. 영국의 소설가 새뮤얼 버틀러는 “인생은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마지막 날까지 연습해야 하고 유년은 노년의 주책맞은 노망이 아니라 다시 한번 최초의 순간에 훔뻑 빠지고 싶은 자들의 보완책이 될 것이다.
독후감을 쓰는 것이 저자의 언어를 옮기는 것인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몇 구절로 들어가 보자.
인간이라는 동물은 30세까지 자기는 늙지도 않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느낀다. 그에게 생일은 재미있는 형식상의 절차, 무해 한 표시일 뿐이다. 그다음부터는 10년 단위로 30대, 40대, 50대가 이어진다. 늙는다는 것은 달력 속으로 편입되는 것, 지나간 시대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이는 세월을 공감하게 하지만, 세월을 비극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공통의 조건으로 한데 묶이고 그대로 휘둘리는 신세는 서글프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내가 꼭 그 나이인 것은 아니다. 서류상의 내 나이와 스스로 느끼는 내 나이 사이의 간극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요즘 시대에는 이 간극이 너무 크다.
이제 원숙기와 노년기 사이에 새로운 인구층이 나타났다. 라틴어로‘시니어(senior)라고 부르는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나머지 인구보다 가진 것이 많은 세대다. 이 시기에는 애들도 다 키웠겠다 부부의 의무를 마감하고 이혼이나 재혼을 택하는 사람이 많다. 이러한 변화가 서양 사회에만 퍼진 것은 아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에도 출산율 저하와 인구 고령화가 진행 중인데, 이러한 상태의 물질적 조건들은 미처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고 있다.
100세 이상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 70세는 버릇없는 어린애 취급을 당할지 모른다. 요즘 젊은것들은 존중이고 뭐고 모른다니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연령층이 전부 일을 하지 않고, 즉 생산은 하지 않고 소비만 하게 된 것은 최선의 의도가 빚어낸 재앙이다. 경험치와 통찰력은 대개 나이가 들수록 두터워진다. 노인들이 하던 일을 계속하거나 새로운 일을 찾으면 관계를 되찾고 봉사활동을 하고 완전한 의미에서 활동의 주체가 될 것이다. 그러면 노인들을 빨리 꺼져야 할 기생충처럼 바라보는 편견도 사라질 것이다.
(5) 「욕망」이라고 할 때는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이 많이 생긴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여성에게는 사랑의 기술, 부부 생활이 가로막혀 있고 세상을 만회할 기회가 없는 듯이 보인다. 많은 이들이 고발한 대로 늙수그레한 남성들은 젊은 여성들과 노닥거리는데, 또래 여성들은 ‘늙은 마녀, 폐기물, 상하기 쉬운 먹을거리’로 취급당하는 현실이 불공평하다. 여성에게 연애 시장은 인생의 중반부터 벌써 닫혀 버리고 나이 많은 여성은 자기를 밀어내는 젊은 여성을 적으로 생각한다. 간혹 예외가 있다고 하나 두 번째, 세 번째 기회는 없다. 버림받은 아내들은 분노한다. 고독만 남는다. 이 고독은 1960년대 성 풍속 혁명 이후에 등장한 것이다. 해방은 쾌락의 평등을 약속했지만 실상은 불평등이 지속되고 있다. 차고 넘치는 관능이 모두에게 약속되었으나 대다수에게 위험하기 짝이 없는 파행 아니면 처절한 사막밖에 없다.
이런 여성들은 이미 연애 시한이 지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혼자 살려고 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평균 5년을 더 살고, 혼자 사는 여성의 수는 남성보다 실제로 훨씬 더 많다. 여성은 더 오래 살고 자유롭게 혼자 사는 편이지만, 남성은 혼자는 도저히 못 사는지 사별 후에도 재혼을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고 있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자기보다 스물네 살이 많은 여성과 결혼했다. 이제 나이 차이가 아무리 많이 나는 커플이라고 해도 도리에 맞지 않는다며 연애를 금지할 수는 없다. 우리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쾌락이 우리가 죽고 난 후에는 아예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그래도 위로가 된다. 노인은 나쁜 본보기를 보이든가 좋은 조언을 많이 해주든가 둘 중 하나다.
나이 듦을 생각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인생을 뛰어내릴 수밖에 없는 절벽처럼 생각하든가, 천천히 끝으로 나아가는 비탈길로 생각하든가, 물론 천천히 내려가는 데는 기복이 있다. 어떤 노인들은 단순히 오래 살아서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이유로 존경받기도 한다. 창작의 영역에서도 놀라운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는, 영화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90대에도 왕성하게 작업하며 클리셰(진부한 생각)를 박살 내고 있고, 에드가 몰랭은 98세에도 새 책을 냈고,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포르투칼) 감독은 100세를 넘겨서도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김형석 교수가 있다. 그들은 단지 존재만으로 허다한 말을 무색하게 하며 우리에게 노년도 썩 괜찮다는 생각을 불어넣는다. 대륙의 밀사인 그들은 그곳에서 생을 맥없이 늘어지기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전히 생은 가능하고 예측불허라는 것을 보여준다.
(6) ‘죽는 날까지 사랑할 수 있다면…’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이다. 「사랑」이란 묘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여러 위기를 겪으면서도 헤어지지 않고 오랜 세월을 함께 사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헤어진 뒤 재혼도 나이를 먹으면서 더해지는 가치라고 할 수 있는 너그러움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의 불완전한 모습을 너그럽게 봐주겠다는 의미다. 신체적 기대보다는 정신적 기대, 허영보다는 따뜻한 정과 공감이 있어 가능할 것이다. 소셜네트워크는 다방면에서 사고방식을 급격히 바꿔놓았다.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궁극의 방종에 빠지려면 빠질 수도 있다. 그들은 매력을 발휘할 줄 알고 비호감 요인을 색다른 욕망의 자극제로 둔갑시킬 줄도 안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당신의 발목을 잡는다. 누구나 겪는 일을 어찌 혼자 피해 가겠는가. 극단적인 음란과 극단적인 수줍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어질어질할 일은 없으리라. 목숨도 아깝지 않았던 모든 것들은 떠나보냈다. 기다림, 미소, 흐느낌, 경련, 흥분, 절망까지도 이제는 안녕이다. 절정의 짧은 순간 시간이 할퀸 상처도 추방의 표시가 아니었건만, 이제 다시 그 표시가 뼈저리게 다가온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가능한 세계라면 마지막 남은 사랑은 가능한 모든 세계가 끝났다고 쐐기를 박는다. 떠난 사람은 구체화된 불가역성이다. 당신은 순진하게도 운명을 이겨 조금만 더 전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잉걸불(이글이글한 불덩이, 장작)은 재가 되어 버렸다.
(7) 「기회」란 사람의 일생 동안에 얼마나 많이, 자주 찾아오고 또 놓치는 것인지. 두려움, 수줍음, 충격 때문에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순간들을 놓치지는 않았을까? 대신에 기회를 용감하게 잡는 사람들이 원망스럽다. 그토록 심약했던 자신이 용서가 안 되고 다음에는 절대로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속에 있는 말을 꼭 전하고 말 테다고 다짐하기도 하지만, 종종 놓친 고기가 크게 생각되기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자기 앞에 걸어가는 한 여인을 보고 이렇게 노래했던 보들레르는 “오, 내가 사랑할 수 있었을 그대여! 오, 그것을 알고 있던 그대였거늘…!”미지의 상대와 험난한 시련을 겪지 않았으니 뜨겁게 끌리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런 사람도 세월이 지나면 귀찮은 거머리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언뜻 스쳐 가는 사람은 또 하나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멈추지 않는 초침을 따라잡으려면 숨이 찰 수밖에 없다. 정확하다고 하는 시각도 사실 정확 하지가 않다. 시간이란 어차피 매 순간 우리 손아귀에서 달아나고 있다. 시간 엄수는 16세기 제네바에서 처음 등장한, 유럽 사람들에게 뒤늦게 조성된 생활 태도이다. 제네바는 칼빙주의(장 칼빙의 사상이 중심이 되는 기독교 운동으로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하여 쯔빙글리가 1519년 취리히에서 개혁주의 교리의 첫 번째 형식을 설교하기 시작한 스위스 종교개혁에서 기원한다)의 고향이자 시계, 즉 시간 측정 도구의 정밀한 기술이 발달한 곳이다. 때를 맞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시대를 앞서가야 할까? 시대의 흐름을 타야 할까? 일부러 천천히 가야 할까? 혹은 이 셋을 겸비해야 할까? 때로는 자기 시대, 자기 세대에 뒤처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다.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는 형제가 많은 집안의 막내였는데 “늦둥이로 태어난 것이 복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가장 늦게 진학, 결혼, 출산을 경험했다. 다른 형제들의 삶을 먼저 지켜볼 수 있었고 나중에 태어난 이점을 당당히 누렸다. 때로는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역사적인 혹은 역사와의 만남을 놓치기도 하지만….
50세가 넘으면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곤 한다. 결혼식, 세례식 못지않게 장례식에 갈 일이 많아지기도 한다. 우리는 때때로 망자들을 소환하지만 언젠가는 우리도 그렇게 소환당할 것이다. 신문 부고란을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묘해진다. 누군가 실수로 거기에 내 이름을 집어넣을 것만 같다. 또 누가 죽었구나. 죽기에는 아직 너무 젊은데? 지병이 있었나? 마지막에 무슨 말을 남겼을까? 장례는 정해놓고 죽었을까? 종교의식으로 치르나, 일반 장례로 하나? 화장일까, 매장일까? 남들은 불행한 와중에도 나는 운이 좋았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장례식 만찬은 원기를 재충전하는 자리가 될 수 있다. 산 자들은 그곳에서 먹고 마시며 죽음의 신을 쫓아낸다. 신이 얼씬도 못하도록 젓가락을 빼 들고 술잔을 부딪친다. 여전히 살아 있다는 조심스러운 자부심은 다음 차례는 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상쇄하기에 충분하다.
우리에겐 마지막 임무가 있다. 이제 사라진 그들을 이 땅에서 대변해야 하고 그들의 중인이자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우리들 가슴 속에, 우리가 하는 말속에, 우리의 추억 속에 산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말함으로써 그들을 소생시킨다. 그들은 우리의 망자이고 우리는 고인인 그들과 한 가족이 된다. 우리 안에서 사는 망령들의 무리는 우리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결코 떠나지 않는다. 죽을 날이 가까워지면 또 하나 해야 할 일이 있다. 퇴장을 확실히 할 수 있도록 윤리적이거나 의학적인 결정을 가급적 모두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한 생존에는 궁극적 가치가 없다. 자유와 존엄이 중요하다.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능력이 사라지면 먹고, 자고, 숨 쉬는 것이 고문처럼 된다. 그러면 사라질 때가 된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우아하게 모두와 작별할 때다.
(9) 「한계」라는 말은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라는 의미를 담는다. 유한성인 인간은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 고대 그리스의 서정시인 판다로스는 “너 자신이 되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를 보완한 것이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이다. 나는 이미 나인데, 너 자신이 되라는 건 무슨 뜻인가? 고대인에게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기의 한계를 깨닫는다는 것이었다. 대우주 속에 소우주에 불과한 개인은 자신의 고유 영역을 넘지 않고 전체의 흐름에 자신을 맞추어야만 죄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현대인은 반대다. 계몽주의 이후에 자아는 스스로 능력을 널리 계발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의 신탁은 자신의 잠재력과 한계를 알라는 뜻으로 ‘너 자신을 알라’고 했지만 내가 무엇을 하든 내 안에는 나밖에 없다. 나는 실존하기 위해 늘 나의 존재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내가 자신이 되고 내가 나 자신을 알거나 잘못 알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는 내가 뭔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아는 것이 아니다”고 독일의 신비주의자 안젤루스 실리시우스가 말했다. 프로이트가 여기에 보태 “나는 내가 나라고 믿는 그 사람이 아니다. 자아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자아는 무의식과 초자아, 욕망의 태풍과 검열재판소에 해당하는 거대한 힘에 의해 변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개인이 대타자(代他者)나 뭔가 심오하고 기이하기 짝이 없는 존재가 되지는 않는다.
자신을 다른 누구로 착각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자신의 유일무이성에 갇혀 늘 똑같은 인물을 계속 재생산하는 것도 위험하다.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데는 거의 반세기가 걸린다. 답을 찾았다 싶으면 곧바로 자기를 조금씩 잃어버린다. 미성숙을 허락한 시기, 이상을 연장하는 것도 팁이라면 팁이고 나이 들어서까지 세상에 대한 놀라움을 간직하는 비결이다. 당장 자기 안에서 벗어나야 한다. 행동과 일과 사랑에 몰두하면서 자기 자신을 잊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주체로 만든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보전이라는 경향에서 빠져나가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불륜을 일삼는 남편이 아내와 취하는 거리는 늘 일정하다. 통제 가능한 선에서 자아를 벗어버리고 싶은 꿈, 자아이기를 그치지 않은 채 사람이 한번 되어보고 싶은 꿈이다. 자기에게서 도망치고 싶지만 무슨 말을 하든 자기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람됨을 바꾸고 싶은 이 바람은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 또는 처음부터 정해진 배반과 비슷하다.
모든 사람이 자기 뜻대로 살아갈 권한인 자유는 반항, 구속, 고독이라는 세 단계를 거친다. 이것은 늘, 쭉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유년기를 벗어나면 자유는 일단 가족, 스승, 기성 질서에 대한 반항으로 표출된다. 교육받은 청소년은 그 교육의 사슬을 끊고자 하며 나는 나의 주인이라고 고함친다. 그러다가 자유는 책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고, 우리는 자신을 제한하는 동시에 규정하는 빡빡한 굴레 안에서만 자유롭다. 자유의 대가, ‘나’라고 일인칭으로 말할 권리 그로 인한 실존적 고독은 자칫 절망으로 치달을 수 있다. 나 혼자 괴로워하고 나 혼자 죽을 것이다. 나 자신에게 얽매인 채, 나에게 굴러들어온 육신에 영원히 갇힌 채, 제자리 걸음을 하고 실패를 맛볼 때 툴툴댈 수 있겠는가? 나 자신을 벗어난다는 생각만이 흥분을 안겨준다. 후천적으로 획득한 자유는 실망스럽기만 하다.
우리는 자유롭기 때문에 어떤 운명이 있는 것이다. 소외된 인간에게는 운명이 없으며 단지 나아갈 방향만 있다. 빽빽이 무리 지어 목적지를 향해 걸어갈 뿐이다. 민주적인 인간은 이런 부화뇌동에 분개한다. 자기 자신만이 유일한 주인이고자 한다. 그러나 자기 희열, 자기 주권자로 사는 즐거움 때문에 우연이 가져다주는 행복한 사건들에 무심해지지는 않는다. 자기를 벗어던지는 꿈은 여전히 남아 있다. 사랑이 그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를 통제하지 않고, 기꺼이 자기를 내놓은 일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고 가변적이라는 사실은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도 전에 없던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대단한 행운이다. 언제라도 새로운 운명을 향하여 장비를 챙기고 나설 수 있다. 그렇지만 위험 요소를 잊어서는 안 된다. 평생 몸을 안 쓰다가 갑자기 격렬한 스포츠를 시작하고 결국 사달이 나는 사람들, 자기가 곡예사라고 착각하고 번지점프를 하는 노인들, 자기가 무슨 오지 전문 특파원이라도 되는 줄 알고 사막으로 훌쩍 떠나질 않나, 늙어서 가사노바 노릇을 하다가 영악한 어린 여자에게 탈탈 털리질 않나, 이런 일들은 희극에서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모든 것이 모든 나이에 가능하지는 않다. 신체적 역량에도 염치라는 것이 있다.
만약에 성공한 인생이라면 생은 이윤 혹은 손해의 논리에서 벗어난다. 그러한 생은 도전, 패배의 극복,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끄러움, 그것으로 만들어낸 정반대의 면모로 점철되어 있다. 인생이란 50세쯤 정상을 찍고 그다음부터 석양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 슬슬 내려오는 걸까? 이 은유도 썩 괜찮아 보이지만, 은유는 은유일 뿐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실현하지 못한 모든 것을 우울하게 조사하는 과정일 수 있다. 우울은 개간해야 할 광대한 땅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아직도 탐험하고 개간해야 할 곳은 많이 있다. 다채로운 삶을 추구하려면 서로 모순되는 명령을 따라야 한다. 지속의 행복과 유예의 행복, 집중의 행복과 확장의 행복, 평온함과 도취, 익숙함과 도피 같은 명암의 대비를 황홀한 노년에 불러올 수 있다.
과거는 우리가 되살려야 할 보물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후세는 과거를 박탈당한다. 후세에게 열쇠를 건네준다는 것은 우리를 모방하기를 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유를 제대로 알고 반박해 보라고 권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마 이 자유를 거스르는 방향으로 사용할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나는 너에게 내 언어를 가르쳤다. 그리하여 너는 날 미워할 수 있게 되었구나.”고 했다. 핵심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느냐이다. 계승은 이루어져 혈통은 완성되고, 우리는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무장시키고 아이들에게 삶과 인류에 대한 혐오만을 들먹이지는 않는다는 조건으로 말하는 것이다. 자기 소임을 다했다면 기꺼이 퇴장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10),(11)에서는 「죽음」과 「영원」을 말하는데, 나이 든 사람에게는 꼭 와 닿는 주제다 싶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하지만 개인에게 죽음은 큰 사건이고 비록 다 알고 동의했다 하더라도 부당한 폭력이다”시몬 드 보브아르가 한 말이다. “우리가 죽음을 경험하는 마지막 세대가 되지는 않을지 두렵다.”인공 지능 전문가이자 MIT(1861년 설립,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수인 제럴드 제이 서스먼이 한 이 말은 인간이 죽음을 겪지 않을지 모른다는 의미로 한 말이다. 죽음과의 싸움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중대한 목표다. 세계 최고의 부자들은 인간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을 죽음의 신이라는 저 평등주의를 피해 가고자 한다. “물리적 신체 따위는 악마가 가져가라지. 그딴 걸 뭐에 쓴다고!”하고 외치는 세상이다. 죽음은 신체의 생물학적 과정으로 우리는 포스트 바이올로지 시대, 즉 썩지 않는 복합체인 사유하는 로봇의 시대로 넘어가 신체를 생체공학적 구조로 대체할 것이다. 인공 장기 등이 결합한 우리 인류에게 새로운 얼굴을 줄 것이다.
정신은 질병과 죽음을 없애고 자연을 이기려 하고 있다. 억만장자들은 장차 그러한 기술이 실현되면 기계 몸에 옮겨 심을 수 있도록 자기 뇌를 당분간 모셔놓을 첨단 설비를 만들고 있다. 우리는 흥분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120∼150세까지 완만한 연장, 나노기술과 로봇공학과 유전자공학의 결합으로 질적 개선으로 폭발적인 수명을 연장할 것이다. “나는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중에도 1,000세까지 사는 사람이 나올 거라 믿습니다.”- 2011년 출간된 책에서 로랑 알렉상드르는 메시아적 어조로 죽음을 이렇게 선언했다. 세포를 다시 젊게 함으로써 노화를 되돌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죽음 자체를 없애는 것도 시간문제가 되었다.
죽음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예고는 –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는 와중에 – 당황스럽다. 별을 바라보다 시냇물에 빠져 죽는다는 헤겔의 말처럼 요란하게 떵떵거리는 예언은 위험하다. 모두가 1,000년을 살 수 있게 되면 다들 그렇게 살고 싶어 할까? 존재하기를 고집하며 수백 년 동안 행성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들기 전에 무엇을 하셨습니까?”라고 변덕의소유자가 묻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런 질문은 말이 안 된다고 쏘아붙였다. 하나님은 시간을 포함한 모든 것의 창조자이므로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에게는 시간이라는 관념이 없으므로 ‘그때라는 것도 이후도 없다’하지만 질문이 부조리한 것만은 아니다. 전능자는 영원을 바라고 우리가 아는 우주를 창조했다. 신은 피조물들에게 온 힘을 다해 천국으로 들어오라고 하고 정작 자신은 사랑에 빠지지 않았던가? 신의 전능이야말로 그의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의무는 신이 죽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닐까? 진짜 복은 우리에게 온갖 환상적인 종교적 구성물이 아니라 확실한 끝이 있는 생이다.
신의 절대적인 한 수는 그리스도가 한창일 당시 33세에 죽었다는 설정이다. 성부, 즉 아버지는 무섭고 근엄한 노인의 이미지인 데 반해 팔팔한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놀라운 서사적 발상인 것이다. 복음서들은 영원한 젊음의 신화에 종교적 기초를 제공했다. 역설적이지만 영생을 얻으려면 일단 죽어야 한다. 그러면 신은 영혼들의 죄과를 살피고, 증보자들이 그들을 변호한 끝에 지고의 심판이 떨어진다. 죄를 짓고 방황하는 인간도 속죄를 할 수 있다는 점에 의미가 생긴다. 죽음은 부수적인 것은 버리고 본질만 남기는 정화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불멸은 가설에 불과하겠으나 즐겁지는 않다. 영생의 약속도 저주에 가깝다. 죽음이라는 지평이 없는 삶은 기나긴 악몽이다. 모든 권태를 통틀어 불멸자의 권태는 최악이다. 불멸자는 영원한 벌을 받거나 받을 자일뿐이다.
수 세기 동안 무병장수를 꿈꾼 예언자들은 오만 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젊은 피 수혈, 영약, 칼로리 섭취 제한, 완전 채식, 마법의 혈청, 불가리아 요구르트, DHA 등등. 모든 사람에게 세포 재생이나 저온 요법으로 100세 수명을 보장할 수는 없다. 19세기 실증주의 창시자 오귀스트 콩트는 스스로 정한 엄격한 생활 수칙에 따라서 술, 담배, 커피 등 자극적인 음식을 삼가고 식사량을 제한하고, 본능 가운데서 가장 우리를 교란하는 섹스도 삼갔다. 그러나 그는 59세에 세상을 떠났다. 노력에 비해 보잘 것 없는 결과였다. 건강을 지키려 애쓰고 죽지 않으려 발악하다가 사는 법을 잊어버린다는 반작용이 돌아오곤 한다. 그렇게 해서 번 시간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접시가 가벼울수록 명줄이 길어진다.’고 하는데 소식을 하고, 비타민 등 건강보조제를 챙겨 먹고, 생존하기 위해 스스로 삶을 금하는 형국이다. 우리들 모두 좀 더 솔직해지자. 다들 짧고 굵게 누리고 싶은 마음과 가늘고 길게 살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지 않는가? 오래 살고 싶은 사람이 있고, 제대로 느끼며 살고 싶은 사람이 있지만 대다수는 양쪽 다를 원한다.
키케로가 말했다. “짧은 생도 충분히 아름답고 좋을 수 있을 만큼은 지속된다.”우리는 100세 넘게 장수한 이들에게 도대체 장수의 비결이 뭐냐고 묻는다. 그들 대답은 비슷비슷하다. 많이 웃고 잘 먹고, 많이 마시고, 왕성하게 사랑하고, 담배도 피우고 아무것도 금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나하고는 정반대라는 생각에 마음이 점점 불편해진다. 주치의가 그것들을 당장 끊지 않으면 올해를 못 넘길 거라고 했는데? 사랑도 그렇지만, 인생은 마라톤 경주처럼 잘 조절해 오래 버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관계, 감정, 참여의 질이 중요하다. 인생이 신체 기관들을 꼼꼼히 살피고 계속 수리하는 과정일 뿐이라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요양기관에서 추억을 곱씹는 일이 전부거나 늙고 노망이 나서 아기처럼 남들이 먹여주고 입혀주는 대로 살아가며 끝을 기다리는 일처럼 애처로운 일은 없다.
치열함인가, 버티기인가 분명히 성가신 양자택일의 순간이 분명히 찾아온다. 무미건조한 삶을 오래오래 살 것인가? 진짜 부딪치고 느끼는 시간의 충만함을 누릴 것인가? 오래 살면 대신 점점 쇠약해진다는 위험요소가 분명히 있다. “나는 왜 몸에 나쁜 담배를 계속 피울까? 죽지 않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프랑스 가수 세르주 쟁스부르가 네 번이나 심장마비를 겪고도 끝까지 하루 두 갑에서 다섯 갑의 담배를 즐겼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자. 그는 1991년 다섯 번째 심장마비로 죽었다.
우리는 간혹 떡갈나무처럼 단단해 보이던 이가 하찮은 타격에 쓰러지는 경우를 보기도 하고, 이미 송장이 된 것 같던 사람이 모진 고비를 넘기고 끈질기게 건재함을 과시하는 경우도 본다. 현대인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자신의 고통에 반항하는 주체다. 공동체 안에서 그의 연약함은 다른 사람들과 다시 연결될 수 있는 으뜸패이다. 어느 연령대에서나 사람은 그가 뿜어내는 에너지, 그를 떠받치는 에너지로 차별화된다. “나는 죽을 때까지 살고 싶다”는 이 말은 울림을 주기도 하지만, 과거 소비에트연방의 반체제 인사들의 한탄을 생각하게도 한다. 공산당은 ‘죽음 이후의 생은 없으며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다. 그러면 죽음 이전의 생은 과연 있는가? 지하디스트(이교도, 성전주의자)들은 죽음 이전의 생을 믿지 않는다. 예측이 안 되는 생을 그들은 혐오했다. 그들은 속히 생에서 벗어나고 싶고, 그럴 바에는 무고한 자들을 최대한 많이 죽여 피에 주린 신에게 풍성한 수확을 바칠 작정이었다. 그들은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자폭한다. 불확실성의 이름은 자유라는 것이다. 오늘날 정말로 무서운 것은 신체와 정신의 기능을 하나하나 잃으면서도 남의 도움을 받아 병원 침상에 누워있는 삶이다.
나의 죽음은 당연히 끔찍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보다는 차라리 나을지 모른다. 그들을 전부 떠나보내고 나 홀로 세상에 남아 있고 싶지는 않다. 나의 죽음은 잔혹한 공식적 사실이고 다른 사람들의 죽음은 존재론적 재앙이다. 나이가 들면서 사랑하는 이들이 하나둘 사라지면 세상이 쓸쓸해진다. 살아남은 자는 텅 빈 세상에서 시대착오적인 존재일 뿐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다. 남들은 아직 멀쩡한데 자기만 죽음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생각은 견디기 어렵다. 정말로 이승에서 충만하게 ‘살 만큼 살면’편안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을까? 살만큼 충분히 살았다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죽음을 이기려면 타자성(alterite)을 유지해야 한다. 좋은 말이긴 하지만,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타자성에 대해서는 소용없다. 이런 말도 있다. “죽음이 무슨 대수랴. 우리가 피한 죽음은 생의 옆으로 비껴감에 불과하거늘!”본질적인 것을 비껴갔다는 점은 애석하지만 충만한 생을 살아냈다는 생각이 최후를 덜 가혹하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생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생은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번성하는 자손들을 통해서 영속되기를 원한다. 신앙이 있는 이들에게도 내세는 1차적으로 자손이다. 우리를 성장시키는 모든 것은 불멸을 누린다. 실제로 경험한 우정, 사랑, 열정, 참여, 선행이 모두 그러하다. 더 넓은 영역을 포용하고 사랑, 진실, 정의 같은 상대적 절대성들과 만났던 생은 분명히 살 만한 가치가 있다. 인생의 정수는 자기 야망을 채우는 데 있지만, 자기를 뛰어넘어 인류 전체의 원대한 모험에 참여하고 적어도 한번은 무한을 감지하는 데도 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의 점이자 가교고, 닫힌 전체이자 통행로다. 이 불완전한 전제는 언젠가 사라질 테고 레지스터의 흔적, 모니터의 알고리즘, 무덤의 비석으로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오래 산다는 것은 많은 이를 먼저 보내는 것”이라고 괴테가 말했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찰나의 영원뿐이다. 사랑하는 동안, 창조하는 동안, 우리는 불멸한다. 생이 언젠가 우리를 떠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다음 세대에게 희열을 넘겨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생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고 찬양하고 섬기라”는 말은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한 말이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운 것이 있다. 생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값지다는 것! 우리는 어둠에 길을 잃은 채 이성과 아름다움의 빛이 비추는 곳을 더듬더듬 나아가는 존재다. 우리는 형제, 친구, 동지, 가족이라는 타자들 속에서 호기심을 잃지 않고, 체념도 하지 않은 채 살아갈 때만 자유롭다. 결국 우리는 육신의 껍데기를 벗고 거대한 흐름 속에서 사라져 티끌로 돌아갈 것이다. 원래부터 우리는 잠시 스치는 존재, 우리를 초월하는 전체의 한 파편이었다. 그동안 잘 버텨왔으며 세상의 호의를 느낄 수 있음에 기뻐하자.
우리는 상처받았지만 충만함도 얻었다.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참 많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올리지 않았던 기도가 100배로 성취되기도 했다. 우리는 악몽을 관통했고 보물을 선물받기도 했다. 삶은 참 잔인하거나 지독할 수도 있고 풍성할 수도 있다. 매일 아침 받은 바에 감사하며 입 밖으로 소리 내어 “고맙습니다”라고 말하자. 세상에 태어나 당연히 받아야 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