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스타일 [1]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가 4년간의 대학 공부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는 이 대학 교육으로 내가 보여줄 것은 별로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전공이 문예창작과 영화였는데 딱히 이들 분야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대신 세군데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리틀 빅 리그'라는 무명 록 밴드에서 기타와 노래를 맡고 있었다.
당시에 필라델피아의 노스 필리라는 구역에서 300달러짜리 월세 방을 얻었는데, 곳은 아빠가 자란 동네이기도 했다. 어버지는 내 나이쯤 됐을 때 이곳을 떠나 한국으로 갔다. 내가 필라델피아로 가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소도시에 갇힌 여느 아이들처럼 나 역시 유진에서의 삶이 너무 지루한 나머지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고등학교르를 졸업할 무렵에는 독립에 대한 열망이, 소리 없이 증식해 있던 호르몬 부대를 출동시켜 엄마 없이는 잠도 못 자던 아이를 엄마 손끝이 닿는 것조차 못 견뎌 하는 10대로 바꿔놓은 터였다. 엄마가 내 스웨터에 묻은 보풀을 뜯어내거나, 견갑골 사이를 손바닥으로 꾹 눌러서 구부정한 등을 펴려 하거나,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질러 주름을 없애주려고 할 때마다 마치 뜨겁게 달군 다리미가 살갗을 누를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딴사람이 돼버린 것 같았다. 엄마가 사소한 제안만 하려 들어도 신경질이 팍 났다. 나의 분노와 예민함은 갈수록 심해져 틈만 나면 부글부글 끓다가 폭발하기 일쑤였다. 엄마가 다가오면 나는 단박에 진저리를 치면서 소리를 꽥 질렀다. "만지지 좀 마!" " 나 좀 내버려둘 수 없어?" "주름 좀 있으면 어때,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걸 상기시켜 주는 건데."
대학 진학은 부모님에게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처럼 뵤였다. 그래서 대부분 동부에 있는 학교에만 지원서를 넣었다. 대학 징원 상담 선생님은 작은 문과대학, 특히 여자 대학이 나 같은―사사건건 따지기 좋아하고 과도할 정도로 관심 받기를 좋아하는― 학생에게 잘 맞을 거라고 행각했다. 우리는 대학 몇군데를 탐방하러 갔다. 그때 동부의 초가을 날씨를 배경으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던 브린모어대학의 석조 건물을 본 순간, 이곳에서라면 내가 늘 상상해온 대학 생활을 너끈히 경험할 수 있겠다 싶었다.
사실 고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한 내가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고등학교 졸업반이었을 때 나는 신경쇠약에 걸려 무단결석을 밥먹듯 했고 상담과 약물치료를 병행하고 있었으며, 엄마는 이 모든 것이 내가 작심하고 자신을 심산으로 벌이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대행이도 어찌어찌 이 컴컴한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브린모어대학은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선택이었다. 심지어 나는 우등 졸업까지 했고, 우리 직계가족 중 대학 학위를 취득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당분간 필라데피아에서 계속 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고 행활비도 적게 들 뿐 아니라 우리 리틀빅 리그가 언젠가 성공할지 모든다는 믿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언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벤드는 성공은커녕 무명을 탈출할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몇 달 전에는, 1년 넘게 종업원으로 일한 메기칸 퓨전 식당에서 잘리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