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단 한명의 아들 순조가 불안하여, 안동김씨 김조순에게 아들을 부탁한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 후기 안동김씨 세도 정치의 단초가 되었다.
정조의 업적은 세도 정치로 많이 가려져 있다.
김조순 조선 후기의 문관, 정치가, 소설가이다.
종묘의 정조실에 배향됨으로써 배향공신이 되었다. 순조의 국구로, 본인이 의도했든 아니든 본인 집안인 안동 김씨의 세를 끌어올려 세도정치의 문을 연 인물로 알려져 있다.
효명세자는 조선 제 23대왕 순조의 아들로 19세기 초 안동 김씨 세도정권에 맞서 개혁을 추진한 인물.
안동 김씨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조선의 현실은 암울하기 짝이 없었고 양반들의 도덕성은 미로에 갇혔고 관리들의 탐학이 극에 달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연재해와 사회불안이 겹치면서 백성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유랑자가 되었다.
망국의 징조였다. 그런 상황에서 무기력한 국왕을 대신해 정사를 도맡은 효명세자는 정조시대의 영광을 꿈꾸며 다양한 방법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효명세자는 1827년(순조 27년) 2월부터 1830년(순조 30년) 5월까지 약 3년 3개월 동안 대리청정에 임하면서 조선을 경영했던 실질적인 국왕이었다.
그는 세도정권의 일방독재로 유명무실해진 왕권을 되살리기 위해 탐관오리의 징치, 과거제도의 정비 등 다양한 개혁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평범한 방식으로는 고착된 현실을 타파할 수 없음을 깨닫고 예악(禮樂)이라는 기발한 무기를 꺼내들었다.
19세에 건네받은 나라의 효명세자의 운명, 3년간의 대리청정, 그리고 급작스러운 죽음,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 효명!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이곳 지하 수장고에는 조선 왕조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한 청년의 유품이 보관되어있다.
한국전쟁 중 어진의 절반이 불타버려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할아버지 정조를 닮아 이마가 반듯하고 눈은 용의 형상이었다고 한다.
4살 되던 해 왕세자로 책봉된 효명세자는 아버지 순조를 대신해 3년간 대리청정을 했던 실질적인 국왕, 하지만 그는 스물 두살에 요절하고 만다.
그는 대리청정과 함께 춤에 빠져들었다.
그에게 춤은 세도 정치를 견제하면서도 가장 날카로운 무기였다.
춤을 통해 정치 개혁을 시도했던 효명세자!
연암 박지원의 손자였던 박규수는 개화 사상가.
박지원의 손자로 개화파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75년 최익현 등의 척화 주장을 물리치고, 일본과의 수교를 주장하여 강화도조약을 맺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박귷수는 자주적 근대화를 주장한 개화 사상가였다.
19세기 중엽의 선진 사상가였던 박규수는 박지원의 손자로 실학적 학풍을 계승하면서 사회를 개혁하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박규수는 실학 사상의 연장에서 개국통상론(開國通商論)을 적극적으로 주장해 초기 개화 사상이 형성되는 데 교량 역할을 했다.
박규수는 박종채(朴宗采)와 유영(柳詠)의 딸 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조선 시대만도 유명한 학자와 관료를 배출한 집안이었다.
그는 일곱 살에 이미 《논어》를 읽고 시를 지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총명했다.
자라면서 아버지에게서 할아버지인 박지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스스로도 박지원의 글들을 정리하면서 영향을 받았다.
효명세자는 박규수를 만나 세도정치를 개혁을 이루고자 했으나, 요절하는 바람에, 일본 보다 40년 앞선 개화의 자본주의화에 실패한다.
효명이 살았다면, 일본의 메이지 유신 보다 40년 앞선 선진국이 되었고, 일본의 지재를 받지 않았을 것이고, 동아시아의 강국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