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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 영혼의 마지막부흥 원문보기 글쓴이: 마지막부흥
마태복음 25:1~5
주님의 열 처녀 비유는 소(小) 계시록이라 칭하는 마태복음 24장의 말세의 징조를
제자들에게 다~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에 주셨던 말씀이니,
오늘 우리로 하여금, 이 마지막 시대를 어떠한 태도와, 어떠한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 주면서, 아울러 형식적인 신앙에 이끌려서 적당하게 믿는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지 저~ 교회밖의 불신앙의 사람들에게 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 비유는 신랑되신 주님이 다시 오실날이 가까올 수록 교회안에 믿는자들의 신앙이
껍데기만 남아서 형식화 되어가리라는 주님의 예언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당신의 입으로 친히 하신 예언이니, 오늘날 봇물처럼 쏟아지는 사람들의
예언과 달리 한치도 틀림이 없는 정말 정확무오한 경고의 말씀이 될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시고 계신때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때가 가까이옴을 아시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최후로
강론하신 말씀중에 하나입니다.
사람도 죽음을 앞에놓고 유언할때에는 가장 진지하게 말하고, 가장 중요한 말을
남겨 놓으려고 할때에 듣는 유족들도 귀를 귀울여 경청합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바라보시면서 하신 말씀이니
유언의 성격이 있는 말씀이요, 예언의 멧시지로서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유대 히브리 민족의 전통 결혼식을 비유하여 재림 예수를 맞이하는
성도의 신앙자세를 말씀히고 있으니, 먼저 히브리 민족의 결혼식을 이해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기에 열 명의 처녀가 신랑을 마중을 나간다 하니 합동 결혼식인가?
일부 다 처제 결혼식인가? 싶지만 분명히 시집가는 신부는 하나입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해서 즐기는 이 결혼식에 특별히 신부의 친구들이
초대를 받아 신부와 함께 신랑을 맞이하며 혼인잔치의 즐거움을 같이 즐깁니다.
또 이들의 결혼식은 밤에 하는데 히브리식 시간 개념은, 창세기 1장에 근거하여
저녁이 하루의 시작으로 되어 있기에 결혼식을 저녁에 한다는 것입니다.
7일간 계속되는 이 잔치는 잔치의 백 가지를 다 갖추었어도 신랑이 신부의
집에가서 신부를 데려오기까지는 잔치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부의 집이 멀면 신부의 집에서 잔치를 하게 되는데, 잔치의 주인공인
신랑이 그 집에 들어서면 대문은 즉시로 닫아 버리는데, 그것은 당시에 도둑과
강도가 많아서 신부를 보쌈을 해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문을 한번 닫아 버리면
절대로 다시 여는 법이 없이 집안에서만 즐겼다고 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히브리식 결혼식을 비유하여 신부된 성도들을 데리러
오시는 마지막 시대의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1절~"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예수님께서 천국을 만드신 분이요, 천국에서 사신분이요, 주인이시기 때문에
천국을 직접 이러이러하다고 말씀하실 수 있지만, 듣는 우리가 이해하기에
너무 부족하다 싶으시니까 세상의 일들을 비유를 하여서 설명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세의 천국의 상황을 재림하실 주님과 준비해야하는 성도의 모습으로
직접 설명을 하실 수 있지만, 우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고 비유를 하셨던 것은 마치
히브리서 5:11에
"멜기세댁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는 것처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말세의 천국의 상황을 히브리식으로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한 것입니다.
혼인찬치!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들에게 가장 마음을 쓰는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신랑을 잘 맞이 할까! 어떻게 하면 신랑에게 잘 보일까!
혼인식을 앞에 두고 있는 신부와 처녀들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마지막 때에 예수님 재림을 앞에 놓고 살고 있는 성도들의
최대의 관점은 신랑되신 주님 앞에 잘 보이고, 잘 맞이 할까! 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인지해야합니다.
사업을 하고 있던지, 공부를 하던지, 직장을 다니던지, 장사를 하던지, 노동을 하던지,
주부이던지 지금 무엇을 하고 살던지간에 다시 오시는 주님을 어찌 맞이할까!
그분에게 어떻게 하면 잘 보일까! 하는 문제에다가 삶의 포커스를 맞춰야 하는 것을
설명하고자 이 비유를 쓰고 계십니다.
왜, 여기에 맞춰서 인생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신부는 신랑을 잘 만나면 그의 신분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직장도 없고, 생활력도 없는 술 주정뱅이 같은 사람을 신랑으로 맞이한다고
가정을 해 본다면, 그의 인생은 사네 못사네 싸움질이나 하다가 나중에는
그런 가정은 파경을 맞게되고 이혼이라는 아픔과 괴로움에 빠질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주 좋은 신랑을 맞이 한다면 반대로 그의 인생이 아주 달라지게 됩니다.
신랑이 부자면 신부도 부자가 되고, 신랑이 고관 대작이 되면 신부도 사모님이 됩니다.
신랑의 저택이 곧 신부의 집이 되기 때문에 여자가 시집 잘 가면 팔자를 고칩니다.
우리가 신랑되신 예수님을 잘 맞이할 수 있다면 우리는 팔자를 고칩니다.
우리의 신랑되신 예수님이 준비하신 천국이 우리의 저택이 되고 살 집이 되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그 좋은 것들이 우리 것이 되고, 우리가 영세토록 누리는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부자로 한번 잘 살아 볼까?
어떻게 하면 세상 행복을 제대로 누리면서 인생을 살아 볼까?
이런 따위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가지고 있는 소망이라면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는 세상과 달라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 앞에 이쁘게, 아름답게 보일 수 있을까?
이러한 마음 가짐으로 마지막 때를 살도록 하기 위하여 열 처녀 비유를 사용하고
혼인잔치의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절~"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마지막 때에 주님을 맞이하는 자들이 양분이 되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으로서
5대5가 아니라 신앙과 비신앙, 곧 미련한 자와 슬기있는 자로 양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다 섞여 살고 있기 때문에 다 같은 교회요, 다 같은 성도인 것 같지만
마지막때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한자들로 분리 되어 있습니다.
미련하다~는 말은 원어에 <모라이>로써 우둔하다, 얼빠졌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둔하다는 말은 어리석고 둔하다는 의미로써 구약의 엘리 제사장이 생각납니다.
엘리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사사로 40년간을 일하면서 자기의 자식들이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자와 간음을 하고,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기도 전에
재물중에서 맛좋은 부분을 가져가려고 하다가 말리면 강제로 빼앗아 갔으니
그 자식들이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으면 몽둥이로 자식들을 징계해서라도
그런 악은 목숨 걸고 막았어야 옳았을 것이지만, 회개하도록 강하게 가르쳐야 했지만
그 자신이 얼빠져 있었으니 죄에 대하여 어떻게 단호할 수 있었겠습니까!
실로에 있는 성막에서 제사장으로 있던 얼빠진 엘리 제사장의 모습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교회의 단면이기도 합니다.
잘 먹고 배불러서 아주 비둔하게 살이 쪄 있어서 죄에 대한 아픔도, 두려움도 없고
안일 무사하게 그날 그날 잘 지내고 있는 엘리의 모습이 지금도 보이지 않습니까?
이 시대의 교회들이 도무지 신랑되신 주님을 기다리는 모습이 없습니다.
죄에 대한 아픔도, 두려움도, 회개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현대 교회들입니다.
꼭 얼빠진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미련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 섯은 슬기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슬기있다~는 원어로 <프로니모이> 로써 지혜롭고 분별력과 준비성이 있어서
자신의 행동을 조절해 나갈 수 있으며 매사에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신앙양심이 날카롭게 살아있어서 죄에 대한 아픔이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늘~ 자신을 살피어 회개를 힘쓰고 죄를 멀리하는 것이
슬기있는 사람들이 늘 힘쓰는 일 입니다.
이런 슬기 있는 자들이 많지는 않지만 미련한 자들과 같이 섞여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을 해도 하나님이 남겨 놓으신 자들이 교회안에 있어서
핍박을 받는 가운데 자기의 믿음을 지키며 신앙의 정절을 지키게 될것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성령으로 사는 자들은 육으로 사는 자들에게 핍박과 조롱을
받으면서 살게 되는 것이니, 말세, 말세 하더니 오신다는 그 주님이 어디에 오고
있느냐? 고 기롱을 당하면서도 자기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인것은 슬기있기
때문입니다.
3절~"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유대인들의 등불은 두 가지인데 그릇에 심지가 있는 등불이 있고
긴 막대기에 횃불이 있는데 여기의 등불은 등잔의 등불입니다.
아무튼지 횃불이든지,등불이든지 기름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뒤에 보면 등불이 꺼져간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생각하면 처음부터 기름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불을 밝힐 수 있는 그런 기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기름을 하나도 넣지 않고 빈등만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없겠지요.
등을 가질때는 처음에는 등잔에 기름을 담았는데 계속 사용할 기름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밥 한 끼를 먹으면 3~4시간이면 소화가 되고 다시 배가 고파옵니다.
밥 한끼 먹고서 다음 먹을 양식을 준비해 놓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우리나라도 4~50년전에는 전기가 들어가지 않는 마을이 많아서
등잔의 등불을 켜고 살았기 때문에 그것을 경험한 세대는 이 비유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 처럼 들려오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얼마동안에 쓸만한 기름을 늘 준비하고 살았던 것처럼
처음 은혜받고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늘 깨어서 기도를 하여 성령의
새로운 은혜를 받아서 늘 신령한 기름을 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한번 은혜를 받고도 기도하여 새로운 은혜를 공급받지 않으면
빈등이 되고 마는데, 오늘날 기도를 힘쓰는 사람보다 기도하지 않고 믿는자들이
더 많은 것이 한국교회 실정입니다.
막연하게나마 주님이 오신다는 것을 알지만 깨어서 기도를 힘쓰지 않고
새로운 은혜를 공급을 받지 못하고 믿음생활을 한다면 빈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니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들이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입으로 신앙을 예배시간마다 고백을 한다고 하여도 믿음의 불을 밝히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는 빈 깡통 같은 형식적인 성도의 이름만 가지고서는
오히려 불없는 빈등이 부담만 되듯이,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자기 인생의 삶에
무거운 부담만 될 것입니다.
4절~"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 갔더니"
슬기있는 처녀들은 신랑이 늦게 올것까지 대비하여 등에도 기름을 채워 넣고
여분의 기름통에도 자기가 써야할 만큼을 준비해 놓았으니 얼마나 슬기롭습니까!
어릴적 우리 집은 읍내에서 멀리 덜어진 외딴곳에 살았기 때문에 전기가 없어
석유기름으로 등잔불을 썼기때문에 기름이 떨어지면 어디에 빌릴 곳도 없으므로
우리 어머니는 기름 준비할때 얼마간 쓸 수 있는 기름을 늘 준비해 놓고 살았으니
참으로 슬기롭게 우리 어머니께서 살았다고 지금도 생각이 됩니다.
실제로 우리 어머니는 믿음생활도 새벽에 그 먼길을 호롱불을 밝히면서 다녀오셨고
늘 틈만 나면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기도생활은 후에 나의 롤 모델이셨습니다.
나는 기도 없이는 못삽니다. 은혜받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계속하여 무릎을 꿇는 사람은 슬기있고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것 같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런 지혜가 않생기면
제 힘으로 사는줄 알고, 돈만 많이 있으면 잘 사는 줄로 알고 기도가 게을러지기
쉬운것이 인생이요, 그것은 미련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기도를 힘씁니까?
주님 앞에 서기 위하여 회개를 힘쓰십니까?
성령충만을 위하여 매달려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그러면 당신은 기름통에 여분의 기름을 채우려는 슬기로운 인생입니다.
미리 준비하는 이 지혜가 간단한것 같지만 아무나 갖지를 못합니다.
기도가 말은 쉽지만 자기의 진액을 짜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저마다 못합니다.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를 습관이 되도록 많이 하셨는데
겟세마네란 뜻은 기름을 짠다는 의미가 있는데 진액을 짜내는 어려운 작업이므로
말처럼 저마다 기도를 힘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겟세마네 동산으로 주님처럼 기도하러 올라가는 것도
누구나 다 할 수 없는 것은, 주님의 제자들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다 잠만 잤습니다.
오늘도 기도 통에 기도를 담고 있는 사람은 정말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5절~"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세"
주님께서 옛날의 혼인집 이야기를 하시니 오늘에는 별의미가 없지 않겠나 싶지만
그 옛날의 이야기도 오늘의 시대상에 정말로 합당한 비유일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교통이 험하기 때문에 초저녁에 올줄 알았던 신랑이 눈이 빠지게
기다려도 오지않고 너무도 더디 오는 바람에, 졸지않는 사람이 없고
어떤 사람들은 아예 발을 쭉뻗고 코를 골면서 깊은 잠이 들어버리기도 하였으니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우리 주님의 재림도 지금 더디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급한 사람들은 언제 온다고 날짜까지 밝히고 방방 뛰기도 했었지만
주님은 오늘도 오시지 않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멀쩡합니다.
혹시 저 구름 타고 오시려나 싶었는데, 요새는 구름없이 맑은 날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이 더디기 때문에 무관심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심지어 기도하고 있다는 목사 장로들이 주님의 재림은 아직도 멀었다고 말하지만
여러분, 주님의 재림은 실상은 더딘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9에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한것 처럼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주님의 재림이 더딘것처럼 보이는 것도 택하신 자녀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더 주시기 위해서 오늘도 오래 참고 인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시라는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믿고 구원을 받을 만한 공평한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죄인들이 거역하고 불순종 하는 것을 참고 인내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멸시하는 자들의 죄가 얼마나 크고 그 받을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말세, 말세 아이~ 그런 말도 이제는 지겹다~
올때가 되면 오겠지~ 에이~ 나도 모르겠다~ 이렇게 발뻗고 자 버리는 오늘의
교회 모습입니다.
여러분!
모든 계시의 주체가 되시는 주님께서 마지막 상황을 미리 내다 보시고
하신 말씀이니 얼마나 정확하고 오차가 없겠습니까!
사람들의 여론조사 같은 것들은 아무리 정확하다해도 마이너스 플러스
5% 정도는 다 틀리것으로 계산을 하고 예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재림직전의 상황을 미리 내다 보시고 하신 말씀!
"다~ 졸며 잘세~" 이 말씀은 얼마나 오차 없이 맞아들고 있는지 놀랍습니다.
아~ 정말 교회도 졸고, 목사도 졸고, 성도도 자고 있습니다.
자면서 잠꼬대까지 하고 있으니 잠꼬대를 한번 들어보세요~
"짐승 표는 상징이어~" 잠꼬대를 하고 또 잡니다.
오늘 컴을 켜니 어느 카페에 댓 글이 있다는 표시의 링크를 따라가 보았더니
거기도 잠꼬대를 하는 분이 계셨더라구요.
목사님인지 평신도인지 모르겠지만 "상징을 너무 좋아하는 한국교회"라는
나의 칼럼을 삭제하라는 것입니다.
666은 상징이요, 영적인것인데 지옥에 갈려고 헛소릴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필시 잠자는 자의 잠꼬대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꾸벅 구벅 졸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예 발을 쭉뻗고 잠을 자면서 잠꼬대까지 하고 있으니
마지막때를 내다보시고 다~ 졸며 잘것이라는 전망을 하셨던
주님의 눈이 얼마나 정확하신지 믿어지면 아멘 하십시요~
주님은 누가복음 18:8에도
"...그러나 인자가 올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목사들에게서도, 장로들에게서도, 성도들에게서도
깨어 있는 믿음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은 밤이 깊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계 역사적으로도 죄악의 밤이 깊어 갈때에
전쟁의 환란이 일어나 왔었습니다.
오늘도 죄악의 밤이 깊어 가고 있는 이 때에 벽에 기대어 졸고 있는 사람들!
쓰러져 잠이 들어 버린 사람들! 아예 불까지 끄고 잠을 자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이 밤중에 주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아멘~
계속~
마지막부흥 진형곤목사
첫댓글 귀하신 말씀 감사히 읽었습니다.
저도 퍼온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