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여성시대 피비 콜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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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따분한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일요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침대로 되돌아갔고, 베개에서 마리가 남기고 간 소금냄새를 찾다가 10시까지 잠이 들었다.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해야 합니다."하고 살라마노 영감이 말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방인 / 알베르 카뮈)
'세상은 환幻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라고 보르헤스가 구술한 문장 바로 아래였다.
그 꿈이 어떻게 이토록 생생한가. 피가 흐르고 뜨거운 눈물이 솟는가.
당신은 아마 짐작하지 못했을 테지만, 이따금 나는 당신과 긴 대화를 나누는 상상을 했는데.
내가 말을 건네면 당신이 귀 기울여 듣고, 당신이 말을 건네면 내가 귀 기울여 듣는 상상을 했는데.
텅 빈 강의실에서 희랍어 수업의 시작을 기다리며 함께 있을 때, 그렇게 실제로 당신과 대화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하지만 고개를 들어보면 당신은 절반, 아니 삼분지 이쯤, 아니, 그보다 더 부서져버린 사람처럼, 무엇인가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남은 벙어리 사물처럼, 무슨 잔해처럼 거기 있었는데. 그런 당신이 무서워지기도 했는데. 그 무서움을 이기고 당신에게 다가가 가까운 의자에 걸터앉았을 때, 당신도 문득 몸을 일으켜 꼭 그만큼 다가와 앉을 것 같기도 했는데.
(희랍어 시간 / 한강)
그는 길에 도착했다. 그는 길을 뛰었고 더 멀리, 그리고 더 멀리 도망쳤다. 그는 더 먼 곳으로 도망쳤고, 다시 도망쳤다. 끝없이 도주했다. 남자는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절망을 피해 도망쳤다. 이것은 남자의 도주에 대한 기록이다. 남자는 도망친다.
(절망의 구 / 김이환)
오늘은 정말 많이 맞았다. 특별히, 많이 맞는 날이 있다. 한달에 두세 번은, 꼭 그렇다. 어쩔 수 없다. 간단히 넘어가려 해도 이유가 내게 있는 게 아니니까. 끼익. 다시 쇳소리가 났다. 녹이 슨 소파의 스프링은, 그 자체로 천식을 앓는 노파의 기관지 같다. 기침이나 골골거리게, 나도 빨리 늙었으면 좋겠다. 확 늙어버리면, 따 같은 건 당할 일도 없겠지. 아니 마흔살만 되어도, 서른살, 아니 스무살만 되어도 좋아지겠지. 스무살. 스무,살. 스무살까지, 그런데 살아 있기나 할까? 제발, 살았으면 좋겠다. 높고, 원대한 꿈.
혹시 핼리혜성이 온다는 뉴스는 없었나요?
몰라, 방학 때 탁구 배웠댄다. 묻지도 않았는데
모두가 힐끗 돌아볼 정도의 목소리로 안경잡이가 얘기했다. 킥킥킥킥 하는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조례가 끝나자 다수의 아이들이 안경잡이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장난을 치며 아이들은 교실을 향했다. 텅 비어가는 운동장의 한편에서 나는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이 시작된 하늘은 허무할 정도로 높고, 깊고, 비어 있었다. 우주의 대부분은 빈 공간, 인간과 인간의 사이도 대부분은 빈 공간이야. 결국 스스로에게 말을 걸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실로 돌아가는 길이 은하와 은하 사이처럼 멀고도 아득했다.
(핑퐁 / 박민규)
나는 가끔 당신의 하얀 생일에 초대받는 꿈을 꾼다
(흰 버티컬을 올리면 하얀 / 성동혁)
나는 책상에 이마를 대고 엎으렸다. 양팔 사이에 귀를 묻고, 질끈 눈을 감고, 휘파람이 끌고 온 것들을 모질게 밀쳐냈다. 아버지와 나, 꿈결 속 삽화 같은 우리의 추억.
(7년의 밤 / 정유정)
그 집 아이들의 흐리멍덩한 퍼런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지. 캐서린의 아름다운 얼굴이 희미하게나마 비쳤을 테니까. 보아하니 둘 다 캐서린을 보고 홀딱 반했더라. 캐서린은 그런 애들 따위와는, 이 세상 사람들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잖아, 그치, 넬리?
( 폭풍의 언덕 / 에밀리 브론테)
하여 꿈으로만 그리던 류 옆에 있으면서도 조각은 그와의 밀착에 충분히 반응할 수 없었다. 익지 않은 감정은 진혼과 함께 영원히 봉인되리라는 걸 그녀는 예감했고, 그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류에게 나눠주는 체온으로써 자신의 한 시절을 종결되리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잠든 무용의 목에 손가락을 대고 깊이 파고들어보다가, 무용 앞에 퍼더버리고 앉아 한참을 그 자세로 손가락만 대고 있다. 슬며시 흔들어보는 무용의 몸은 무겁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 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파과 / 구병모)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7.11.12 20:54
첫댓글 잘봤어 여시야 ㅠㅜ 다시 완전히
전권을 읽어보고싶게 만드는 글이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