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날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은 시부모님 추도일로 형제들이 다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교제합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형제들이 우애 있게 지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오늘도 저희들의 모든 대화에 주님께서 주인공이 되어 주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자기주장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주님 앞에 겸비한 마음이 되어 엎드립니다.
오염된 영혼을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7.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8.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11.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12.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본문 주해)
7~8절 : 구속자는 자기 신을 보아스에게 벗어줌으로써 구속의 권리를 양도한다.(이것은 또한 기업 무를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에 수치스러운 일이 되기도 한다)
이스라엘에는 구속절차나 매매과정에서 어떤 일을 확정짓고자 할 때에 신 벗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보아스는 합당하게 룻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9~10절 : 신을 전해 받은 보아스는 10명의 장로 증인들과 백성들에게 공포한다.
“그러자 보아스가 원로들과 온 마을 사람들에게 선언하였다. "여러분은 오늘 이 일의 증인입니다. 나는 엘리멜렉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과, 기룐과 말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사겠습니다.
나는 말론의 아내인 모압 여인 룻도 아내로 맞아들여서, 그 유산이 고인의 이름으로 남아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고인의 이름이 그의 고향 마을에서도 끊어지지 않고, 친족들 사이에서도 끊어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일의 증인입니다."”(새번역)
보아스는 자기를 위한 기업을 포기하고 룻을 맞아들임으로써 엘리멜렉과 그의 후손들의 기업을 세우고자 한다.
보아스의 자기희생적 ‘인애’(헤세드)가 소망이 끊긴 비참한 자의 기업을 다시 일으킨 것이다.
11~12절 : 장로들과 백성들은 보아스의 기업을 위해 축복을 한다.
축복의 내용으로 첫째, 야곱이 라헬과 레아를 통해 이스라엘을 세웠듯이 보아스가 룻을 통해 이스라엘 다윗의 집을 세울 것을 축복한다.
둘째, 다말의 목숨 건 희생으로 베레스를 낳아 유다의 씨를 이어준 것처럼 하나님께서 룻에게 상속자를 주실 것을 축복한다.
이방 여인 룻이 보아스를 만나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과 그의 아들 말론의 대를 이어주는 것은 다말과 같은 축복의 자리라는 것이다.
보아스의 이어준 엘리멜렉의 기업은 곧 보아스 자신의 기업이 되고, 그 기업을 통해 영원하신 기업인 예수께서 오시니 장로와 백성들의 축복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나의 묵상)
보아스의 자기희생적 ‘인애’(헤세드)가 소망이 끊긴 비참한 자의 기업을 다시 일으키는 장면이다.
보아스는 자신을 다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 주신다.
그것은 엘리멜렉의 가문이 아니라, 보아스의 가문으로 인정해 주신 것과, 그 가문을 통해 영생을 주시는 예수께서 오심으로 보아스 자신 역시 영원한 생명(기업)을 얻게 된 것이다.
영원한 기업을 가지게 되었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자기 생명을 버림으로써 영원한 기업으로써의 자기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본다.
내가 버릴 생명은,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세상적 가치와 사람들의 인정이다.
내가 얻을(얻은)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움켜쥐려 하고 또 그런 것들에 목을 매는 자기들과 닮은꼴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 온 힘을 다해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에 본 인상 깊은 드라마가 그것을 나타낸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라는 제목이다.
현재 한창 진행 중인 드라마라서 결말은 나지 않았지만, 인정에의 욕구에 시달리는 인간의 내면을 진솔하고 특별한 대사로 표현해서, 말초적이고 흥미 위주의 여느 것과는 차별된 그 무엇이 있는 드라마라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 본연의 깊은 감정을 건드리는 드라마이다.
이런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등장인물에게 없는 예수님을 생각했다.
그들이 추구하고 열망하는 그 간절함에는 예수님이 없다.
‘엄청난 대성공은 바라지도 않으니 한 편만이라도 제대로 된 (영화)작품을 내고 싶다’는 주인공의 간절한 열망을 ‘순수한 인간의 욕구’로 표현하기도 한다.
만약 예수님이 없다면 그것은 어쩌면 순수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엄연히 빛 되신 주님이 계신다.
아무리 ‘순수하고 진솔한 인간의 생각’이라는 평을 인간들끼리는 하고 있을지라도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표현한다.
나는 이 드라마를 끝까지 다 볼 예정이다.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는 이 드라마가 얼마나 헛것이고 허무한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지만 그 결말은 궁금하다.(아마 흔한 ‘주인공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고, 무슨 특별한 결말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하늘 아래 함께 숨을 쉬며 살아가지만, 완전히 딴 세상을 사는 두 부류이다.
한 편은 영원한 하늘의 호흡을 하는 자들이고, 한 편은 유한한 땅의 호흡을 하는 자들이다.
나는 하늘의 호흡을 하는 자로서 오늘도 나의 영원하신 기업인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한다.
인간이 가지는 그 열망이란 것-고상한 예술이든, 대단한 학문이든-이 진정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것들에 몰입함으로 예수님과 멀어진다면, 그것은 무가치한 정도가 아니라, 무서운 죄이기 때문이다.
과녁을 벗어난 화살은 죄이다.
오늘도 보아스와 모압 여인 룻을 가치있게 쓰시는 하나님의 기가 막힌 연출을 보며, 나를 가치있는 통로로 쓰시고 또 쓰실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하늘을 향해 벅찬 감격의 큰 숨을 들이키며.....
(묵상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 보아스와 룻이 영원한 기업의 통로가 되게 하십니다.
그렇게 됨으로 그들 역시 영원한 기업을 가지는 자가 됩니다.
수많은 세월이 지나고
이제 그들을 통해 예수께서 저의 영원하신 기업이 되셨으니
저도 그 기업을 알리고 전하는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인간사에 가치있는 자 되려고 애쓰지 않고
주님 나라에 가치있게 쓰임받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