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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9일(토)
* 시작 기도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시험(미혹, temptation)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말하지 말라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 누구도 시험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란 파멸을 목적으로 하는 시험 곧 미혹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시험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 시험은 파멸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영적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시험(the test)입니다.
하여 사람들이 시험 곧 미혹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니라 자기 욕심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 욕심은 죄를 낳게 되고 그 죄는 또한 사망으로 이끌어갈 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미혹하여 파멸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 하나님은 좋은 은사 곧 더 이상 목마르지 않는 생수인 온전한 선물을 주십니다(요 4:10).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 성 여인에게 이 생수를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전혀 엉뚱한 말을 합니다.
이 물(야곱의 우물)은 길을 그릇도 없고 또 깊은데 어떻게 그 생수를 얻을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 때 주님께서 가장 확실한 선물을 말씀하십니다.
이 물 곧 야곱의 우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를 것이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며 영생으로 인도하는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요 4:13-14).
나는 주님과 함께 영적 시각을 맞추지 못하고 내 욕심에 이끌려 사물을 바라보는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내 안에는 수가 성 여인의 모습이 여실히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난 이 여인이 더 이상 야곱의 우물에 천착하지 않는 것 곧 욕심을 내려놓은 것은 진짜 생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생수이신 예수님을 만나면 이렇게 한 순간에 변합니다.
나 또한 그랬습니다.
하여 오늘도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주시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옛 사람 곧 욕심으로 점철된 내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렇게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룻 4:13-22
제목 :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18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 나의 묵상
하나님의 역사의 도구로 쓰임 받은 나오미는 룻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어쩌면 나오미의 마지막 사명은 그의 며느리 룻을 보아스와 결혼시키는 것이었던 것 같다.
나오미의 인생을 보면 그야말로 마라(쓰다)의 인생이다.
룻을 알지도 못할 때 모압에 가서 남편을 먼저 잃고 룻을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10년쯤 되었을 때 두 아들을 잃고 힘이 없는 여자들만 남게 되었다.
그는 룻과 함께 이스라엘 베들레헴으로 역이민을 온다.
그리고 베들레헴에 와서 자기 며느리인 룻을 시집보내려고 작정하고 이를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
나오미의 입장에서는 며느리 룻과 함께 살면서 룻의 섬김을 받으면 그의 여생이 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 편안함을 포기하고 며느리를 시집보내어 인생을 새출발하게 하려는 것이다.
나오미에게 있어서 룻은 며느리를 뛰어넘는, 딸 이상이다.
오늘 본문에서 룻은 보아스와 결혼을 한다.
이로써 나오미의 사명은 끝이 난다.
아마도 그는 뿌듯했을 것이다.
그러나 뿌듯함도 잠시, 그는 곧 허탈해지고 쓸쓸함과 외로움이 그의 노년을 장식할 것이다.
어제가 어버이날이었다.
나의 인생은 나 스스로 여기까지 온 것이 결코 아니다.
나오미와 같은 부모의 돕는 손길, 희생적인 손길이 있었기에 내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잘 나서 여기까지 온 줄로 착각한다.
나를 나 되게 하신 부모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나는 봉양할 육신의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다.
2015년 5월8일 어버이날에 육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지금부터 11년 전의 일이다.
묵상을 하면서 생전의 아버지를 또한 잠시 묵상하였다.
성격이 엄하시고 곧으신 아버지는 결코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셨다.
아버지의 손 아래서 자랄 때는 무척 엄하고 무섭게만 느꼈지만,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뵐 수 없는 아버지를 생각하니 지나간 일이 다 나의 부족함과 잘못으로만 다가온다.
그렇다 한들 내가 돌아가신 아버지께 무엇을 어찌하겠는가?
어제 어버이날을 맞아서 우리 처가 형제들이 다 함께 장인장모님을 모시고 점심식사를 하였다.
장인장모님도 어느새 연세가 80대이시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카네이션도 선물해 드렸다.
식사를 하면서 마음으로 다짐을 한다.
내 육신의 부모님은 아니지만 처부모님도 나의 부모님이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부모님의 남은 여생을 잘 모실 것을 다짐하였다.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았다.
이제는 시어머니 나오미와 전혀 상관없는 인생이 되었다.
그러나 룻은 그의 아들 오벳을 나오미에게 맡긴다.
이처럼 나오미를 오벳의 양육자로 삼음으로써 단절된 관계를 다시금 회복하는 계기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룻은 늙어서 힘이 없는 나오미에게 진정한 나오미가 되어 참된 기쁨을 안겨 드린다.
룻은 나오미에게 있어서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친 딸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 룻이 보아스와 같은 유력한 자에게 시집가는 것만으로도 나오미에게 있어서는 기쁨이요 영광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룻은 나오미에게 있어서 영광의 면류관이었다.
그러나 룻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실 룻이 낳은 아들 오벳은 그녀에게 있어서 인생의 전부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 생명과도 같은 존재 아닌가?
생명 아닌 자식이 있겠냐마는, 모압에서는 남편을 잃었고, 이스라엘에 와서는 남의 밭에서 이삭이나 주워야 하는 비참한 인생이었던 그가 이제는 어엿한 가정을 이루고 게다가 아들까지 낳았으니 그 아들이야 말로 그의 생명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룻은 그 아들에게 집착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땅히 자신이 써야 될 영광의 면류관을 그의 어머니 나오미에게 양보했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오미는 룻도 얻고, 오벳도 얻는 엄청난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된 것이다.
이는 그들의 가족 관계를 전혀 새롭게 설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의 모자 관계를 요한과 마리아의 전혀 새로운 모자 관계로 설정해 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요 19:26-27)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는 십계명 중에서 제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다.
이는 단순히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부모를 비롯한 땅 위에 있는 모든 어르신들을 포함하는 것이며, 이것을 넘어 부모와 어르신들에게 아들의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마23: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나를 낳아주신 육신의 아버지, 곧 부모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만 부모요 아버지이다.
그 시간은 모두가 다 같지 않지만, 길어야 100년이다.
따라서 육신의 아버지는 완전한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요 그림자인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개념을 이렇게 온전히 세우지 못하면, 결국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시작해서 자녀들로 이어지는 가족 관계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의한 공동체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예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가족의 현실에서 충분히 경험하고 있지 않는가?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통하여 가정을 이루셨을 때, 이들 가정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세우신 것이다.
그 관계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복종과 사랑의 존재법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교제해야 할 이들이 하나님 외에 다른 그 무엇과 관계를 가질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게 되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지음받았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하여 하나님이 아닌 다른 그 무엇과 관계하기를 쉬지 않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니까 하나님이 세워 주신 가정도 불의한 집단이 되고 만 것이다.
가족끼리는 불의한 것도 눈 감아 주면서, 그것이 마치 감동적인 사랑인 것처럼 호도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중요한 것은 이 땅 위에 세워진 가정은 완전하지 않다.
오늘 룻기를 통하여, 또한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요한과 마리아 곧 모자지간으로 확장시키는 것을 보면서 진짜 부모요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임을 다시 한 번 확증하게 한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룻은 그의 아들 오벳의 양육권을 나오미에게 주므로 해서 그의 영광의 면류관을 다 잃어버렸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결국 룻기는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길고 긴 이야기를 써 내려 온 것이다.
오벳을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넘겨주었을 때는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룻에게 엄청난 복을 주신다.
그것은 바로 다윗의 조상이 되는 복이요, 우리의 구원자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게 된 것이다.
룻은 이방 여인이요 하나님의 역사에 전혀 존재감이 없는 자였다.
그러나 나오미와 보아스를 통하여 하나님은 룻을 사용하셨고 그 룻을 통해서 사사시대의 가장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한 가닥 빛으로 다윗을 드러내신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자였으며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성취하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게 된 것이다.
(행 13:22)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나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자였다.
그저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고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은 확실히 인정하고 믿었다.
하지만 그런 내가 이 세상에서 주인공이 되어 더 크게 더 높이 더 넓게 두각을 나타내면서 살아야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였다.
그런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미명 하에 극히 이기적인 신앙과 나 중심적인 삶을 살아왔다.
내가 잘 돼야 내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오미나 룻과 같이 자신을 희생해서 상대를 높여주는 것은 언감생심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있고 남도 있는 것이지, 나는 빈털터리가 되면서 남을 높여준다는 것은 내 사전에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러니 나의 신앙은 지극히 인간적이요 세상적이며 심하게 말하면 마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앉아 있는데 하나님의 의가 드러날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자리에는 오직 나의 의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 내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고, 나는 완전히 죽었다.
그동안 내가 신앙하던 만물 안에 갇혀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 창세전부터 이런 나를 택하시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을 신앙하게 된 것이다.
내 인생의 패러다임, 신앙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이는 나의 가치관이 바뀐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의 생명, 아들의 생명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육신의 아버지를 넘어 온전하신 하나님이 나의 진짜 아버지가 되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불신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믿는 자들도 불효막심한 자라고 손가락질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다.
이 진리 안에 거하지 않으면 더 큰 불의를 자행하는 가족공동체만 만들어질 뿐이다.
이런 진리의 복음 안에서 행할 때 그 안에 아들의 생명으로 사는 귀하고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게 될 줄 믿는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그동안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잘 되는 나, 이 세상에서 보란 듯한 나를 만드는데 예수를 이용했을 뿐, 참된 복음을 모르니 끊임없이 헤매고 혼미해서 이러저리 흔들리기만 했나이다.
그러나 이제 나의 참 아버지가 누구이신지 알았기에 모형과 상징으로 주신 육신의 아버지와 자녀들에게서 자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나 자녀들에게 소홀할 수 없는 것은 모형과 상징이지만 그 삶에서 진리를 보고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거짓말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하물며 부모요 자녀들이겠습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이 이 땅에서부터 확증되게 하시고 그 사랑은 아들의 생명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삶이게 하옵소서.
나의 결단이나 의지에서 나오지 않게 하시고 내 안에 있는 아들의 생명으로부터 흘러나오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