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 종강하는 날 나는 연례행사처럼 연구실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다.
장식이라고 해 봤자 창에 크리스마스 리스를 걸고 작은 트리를 꺼내 놓는 일이지만
나름대로 다시 한 번 한 학기, 아니 한 해를 큰 과오 없이 끝낸 데 대한 감사와 자축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한 5~6년 전까지만 해도 이맘때가 되면 연구실 창틀에 갖가지 성탄카드가 즐비하게 들어섰지만
이메일 카드가 흔해지고 나서부터는 종이 카드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어 올해는 이제껏
받은 카드가 달랑 한 개다. 미국 친구 아이린이 딸 애니 소식을 전하면서 보낸 것이다.
아이린은 오래 전 내가 뉴욕 주 올바니에서 유학하던 시절 친구인데, 남편과 이혼한 해 설상가상으로
유방암에 걸려 학위가 끝나기도 전에 부모가 있는 아이오와로 갔다.
이시하기 며칠 전 아이린 모녀는 자기 집 차고에서 벼룩시장을 열었다.
옷이나 책 등 잡동사니를 파는 엄마 옆에서 당시 일곱 살이었던 애니는 자기 장난감들에
가격을 붙여 놓고 팔고 있었다. 인형, 봉제완구, 블록, 모든 것이 1달러 미만의 가격이었는데
유독 <성냥팔이 소녀> 퍼즐 박스에는 5달러라는 비싼 가격이 붙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 해 크리스마스에 애니 아빠가 <<안데르센 동화집>>과 함께 준 선물이었고
애니가 무척 아끼는 물건이라서 그렇다고 했다.
아동문학가를 꿈꾸던 아이린이 그때 한 말이 생각난다.
"안데르센은 아주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이었고 비참할 정도로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어.
<성냥팔이 소녀>는 어린 시절 가난하게 자랐던 자기 엄마를 모델로 해서 쓴 동화라잖아.
그런 환경을 극복하고 그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니.
그런데 쇼펜하우어를 봐. 국적은 달랐지만 둘은 같은 시대에 살았거든.
쇼펜하우어는 거부 집에서 태어나서 온갖 영화를 다 누리고 자랐지만
그렇게 철두철미한 염세주의자가 되었잖아.
그래도 나는 <성냥팔이 소녀>가 해피 엔딩이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얼어 죽게 만든 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 대한 안데르센의 말없는 항거였는지도 몰라."
그날 나는 5달러를 주고 애니에게서 '성냥팔이 소녀' 퍼즐을 샀고, 기숙사로 돌아와 밤새도록 퍼즐을 맞추었다.
퍼즐을 완성하자 맨발의 소녀가 성냥바구니를 옆에 두고 커다란 창문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성냥 하나를 켜 들고 몸을 녹이고 있는 그림이 나왔다.
환하게 불이 켜진 창문 안쭉에는 아름답게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리 옆에 행복한 가족이
칠면조가 놓인 식탁에 둘러앚아 있었다.
<성냥팔이 소녀> 외에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1875)은
<인어공주> <미운 오리새끼> <벌거숭이 임금님> 등 아동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130편 이상의 걸작 동화를 썼다. 안데르센 동화 속에는 늘 서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가 있고
따뜻한 인간애가 녹아 있지만, 그의 동화는 곧잘 비극으로 끝난다.
부잣집 창 밑에 앉아 성냥불로 몸을 녹이던 불쌍한 소녀는 싸늘한 주검으로 변하고,
짝사랑하는 왕자를 만나기 위해 목소리를 팔아 두 다리를 얻은 인어공주는 결국 바다의 물거품으로 변한다.
안데르센은 말년에 방대한 자서전 <<내 삶의 이야기 The True Story of My Life, 1847>>를 썼는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루소의 <고백록>, 괴테의 <시와 진실> 등과 함께
서양의 5대 자서전의 하나로 꼽힌다)
그야말로 미운 오리새끼처럼 갖은 천대와 고난 끝에 백조로 태어나는 그의 삶의 여정이 담겨 있다.
그러나 머리말에서 그는 역경이야말로 자신의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토로한다.
"내 인생 이야기는 아주 멋진 이야기다. 그 어떤 착한 요정이 나를 지켜 주고 안내했다 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좋은 삶을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때 애니에게서 샀던 성냥팔이 소녀 퍼즐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그래도 1년 내내 질곡의 삶 속에서 허우적대며 까맣게 잊고 살다가
어느새 거리에 자선 냄비가 등장하고 대림초에 불이 켜지면 그악스럽던 내 마음이 조금은 착해지는지
가끔씩 그때 그 그림이 생각나곤 한다. 그리고 문득 생각한다.
환하게 불 켜 놓은 나의 따뜻한 방 창밖에 혹시 추위에 떠는 성냥팔이 소녀가 앉아 있지나 않은지....
장영희 문학 에세이 <문학의 숲을 거닐다/샘터>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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