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년. 한국 축구 최고 공격수 중 한 명인 차범근의 기록이 깨지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차범근은 25세에 독일로 건너갔다. 그가 당시 최고 수준이던 독일 분데스리가를 평정하는 데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7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차범근은 독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외국인 선수로 명성을 날렸다. 골로 수비진을 폭격한다고 해서 '차붐(cha boom)'이란 별명도 얻었다. 최전성기였던 1985~86시즌엔 레버쿠젠에서 모두 19골을 넣었다.
이후 유럽에서 그 기록을 뛰어넘은 한국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31년 후인 2017년 5월 19일 차붐의 기록이 깨졌다. 새 전설의 주인공은 잉글랜드 토트넘의 스물다섯 살 공격수 손흥민이다.
이날 경기(프리미어리그 37라운드 레스터시티)에서 시즌 20·21호 골을 뽑아낸 손흥민은 유럽 무대에서 한 시즌에 골을 가장 많이 넣은 한국인 선수가 됐다. 차붐이 독일로 건너간 그 나이에 차붐을 넘어선 셈이다.
― 손흥민 선수가 참 잘하고 있습니다.
"손흥민 선수는 원래 능력치가 좋은 선수입니다. 지금 잘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 올 시즌(2017~18) 초반에는 약간 주춤했는데요.
"초반 국가대표팀 경기가 잘 안 풀렸지 않습니까. 본인이 골도 못 넣고. 그때 의기소침했던 안 좋은 분위기가 소속팀에까지 연결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사실 손흥민 선수는 슬럼프를 금방 극복할 수 있는 스타일입니다."
손흥민은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10경기에서 단 1골에 그쳤지만 2017년 11월 콜롬비아와의 평가전에선 2골을 기록해 국제무대에서 약하다는 이미지를 지웠다.
― 슬럼프를 금방 극복할 수 있는 스타일이 무엇입니까.
"손흥민 선수는 성격 자체가 외국에서 적응하는 데 탁월합니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는 데다 성격도 좋아 동료와도 가깝게 지내지요. 사실 전 세계 모든 선수에게 슬럼프가 오긴 하지만 1년, 2년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길어봐야 한 3개월 정도 가는데, 한국 선수들의 특징이 한 번 의기소침하면 다른 나라 선수들보다 슬럼프가 깁니다. 대신 기분파들이 많아서 한 번 터지면 무섭죠. 손흥민 선수는 성격이 좋아 슬럼프가 길지 않은 데다가, 한국 선수 특유의 기분파 기질이 있어 무섭게 질주하는 것입니다."
― 이천수 해설위원도 손흥민 선수와 성격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 제가 스페인 가서 잘 적응 못 한 것을 말씀하시는 거군요.(웃음) 저는 솔직히 스페인에 가기 전 K-리그에는 저보다 잘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월드컵도 뛰었고, K-리그에서 신인왕도 차지하고 했기 때문에 외국, 특히 세계 최고의 리그인 스페인에 가고 싶었죠. 스페인은 음식 맛있고, 날씨 좋고, 사람들 인심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외국은 외국이더군요. 언어가 쉽지 않았어요. 말이 통하지 않으니, 볼 한 번 못 잡을 때도 있었죠. 축구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 손흥민 선수가 과거보다 슛 시도 횟수가 많아진 것 같은데, 자신감 때문일까요.
"제가 분석한 결과 토트넘에는 덴마크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선수 크리스티안 에릭센(Christian Eriksen)과 '잉글랜드 축구의 미래'라 불리는 델리 알리(Dele Alli)가 미드필더를 보고 있는데, 손흥민 선수에 대한 이들의 믿음이 더욱 커진 것 같습니다. 사실 공격수는 골입니다. 골을 넣어야 동료, 특히 공격수에게 패스를 해주는 미드필더들에게 신뢰를 주죠. 계속 골을 넣으니까, 자연스럽게 미드필더들이 손흥민 선수에게 눈을 돌리고 패스를 해주는 것이죠. 패스가 많아지니, 찬스도 자연히 늘어나고 슛 시도도 증가하는 것입니다."
― 미드필더들이 본인한테 기회가 와도 손흥민 선수에게 더 좋은 기회가 있는지 한 번 더 살핀다는 이야기죠.
"그렇죠. 자기네한테 기회가 와도 손흥민 선수를 한 번 더 쳐다보는 거죠. 저도 외국 생활해봤지만, 공격수는 풀어가는 과정보다 결국 골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합니다."
― 사실 손흥민 선수 포지션에 경쟁자들이 많았는데, 요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에릭 라멜라(Erik Lamela)라고 있었죠. 한때 제2의 메시(Lionel Messi)로 불리던 선수인데 손흥민 선수보다 득점력이 떨어져 사실상 경쟁에서 밀렸죠. 남미 선수들이 개인기가 좋긴 하지만 마무리 능력이 좀 미흡하거든요. 게다가 경쟁자 중엔 손흥민 선수 같은 양발잡이가 없습니다. 유럽, 남미 선수들은 거의 본인 주발만 사용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