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추위에 쌩 고생 - 막내가 무슨 죄?

[이남주]

대개 막내는 동네 북인데, 영비(내 동거인)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오빠, 언니 마음 놓고 부려먹었다. 7남매 막내였던 영비는 아버지 생전에는 제일 귀염둥이였는데 잘 나가시던 아빠가 너무 술을 좋아하시다가 지금 우리 나이도 되기 전에 돌아가신 후에는 응원군이 없어 졸지에 힘없는 심부름꾼으로 변했는데, 이날 이때 까지도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영원한 막내에게 오더가 내려온다.

년초에 큰언니 부부가 미국 여행을 갔다. 딸 둘, 아들 하나 모두 미국에 거주하는데, 올 겨울은 미국에서 지내고 온다고 한다. 미국 간다는 날 새벽에 전화가 때르릉. 집에 오는 전화는 대개 영비가 받는데 큰 언니한테서 온 전화. 인천공항에 나와 있는데 새벽에 경황이 없이 급히 나오다 보니 아파트 문을 잠그고 왔는지, 그냥 나왔는지 걱정이되니 자기 집에 가서 확인해보고 연락하라는 분부. 두 달이나 집을 비우는데 문을 열어두고 나왔으면 그것도 큰 일은 큰 일이다.

나는 별 심부름 다 시킨다고 옆에서 방방 대면서 아파트 경비실에 연락해서 확인하면 되지 뭐 하러 가느냐고 공연한 심술을 부려보았지만, 막내는 결국 다녀온다. 자물통이 하나도 아니고 번호로 여는 것 하나, 열쇠로 여는 것 둘, 모두 꼭 꼭 잠궈놓고 나와서는 이 노인네들 노파심이 애를 먹인 것이다.

칼바람이란 말은 나는 금년에 처음 들었다. 새로 만들어낸 말은 아닐터인데, 그동안 흘려들은 모양이다. 설날에는 용평에 있었는데 정말 살을 에이는 칼바람이 불었다. 한강에 둘러 쌓인 여의도에도 그런 칼바람이 씽씽 불고있는 설 다음날 밤 11시에 영비 핸드폰에 전화가 온다. 어느 대학에서 교수하는 친구가 부탁했던 합격을 알려주는 기다리던 전화말고는 예고없이 늦은 밤에 오는 전화(특히 회장님이나 사무총장님 전화)에 희소식은 없다.

핸드폰 전화는 때르릉이 아니다.
멜로디가 흘러나오는데 같은 멜로디이지만 잔뜩 긴장하게 한다.
이 한밤중에 무슨 사건?
별 재미도 없는 TV 프로를 보고 있었지만 영비는 전화기를 들고 조용한 곳으로 간다.

무슨 일인가 귀를 기울여보니 심상치 않다.
“네, 맞는데요.” “어머, 그래요.” “어떡하죠.”
이 추위에 어느 분이 돌아가신 모양이다.
“미안합니다.” “지금 시간이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
어, 누가 돌아가신 것은 아닌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일?
집을 비워둔 큰 언니 아파트 아래층에 사는 사람인데 거실과 작은방 천장에서 물이 샌단다. 수도 계량기 동파된 집이 서울에만 7000가구나 된다는 뉴스 들었는데 7001가구로 증가하는 순간.
우와, 미치겠네. 아니, 우리 보고 어떡하라고.
그러나 저러나 이 엄동설한에 어느 집은 난데없이 물 벼락.

지난 번 아파트 문이 잠겨있나 확인하러 갔다가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영비가 핸드폰 번호를 경비실에 남기고 왔다고 한다. (솔직이 덜렁 덜렁한 것이 좋을 때도 있는 것 아냐? 그냥 오지 뭐 잘났다고.) 그래서 우리 집으로 긴급 연락.
이후 한 시간 정도 미국에 전화하고, 114에 방배3동 신동아아파트 관리실 전화번호 알아내서 연락하고, 물 난리난 집에서 전화가 다시 오고 그리로 전화하고 또 백배사죄하고 쌩 난리를 쳤다.

우리 아파트는 보통 3중 주차를 한다. 지은지 30년이 넘어 녹지는 축구장보다 더 넓지만 주차장은 1가구 0.5대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이 되면 세배가는 사람들 보다, 집에서 세배받는 나이 든 사람들이 더 많이 살고 있다. 지방에서 부모님 뵈러 올라온 사람도 있어 주차장에 차도 많을 텐데. 내일 (1/24) 아침, 9시에 열쇄수리공이 큰 언니네 아파트 문을 따기로 했으니 8시 반에는 나가야 하는데 차를 뺄수가 있을까? 일단 오늘 밤에는 여기 까지만 걱정을 하기로 하고 잠을 자기로.

이 보세 친구들, 집 비우고 어디 갈 때, 문 잠그는 것 잊지말고, 겨울에 오랫동안 집을 비울때는 수돗물도 조금 틀어놓아 수도파이프 터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이웃집 잘 사귀어두어서 애꿎은 막내 동생 쌩 고생시키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dkyoon]

사랑하는 젊은 여왕(영비)께서 쌩 고생하시는 것이 마음아파 하소연하는 모양인데... 안다, 다 알아. 이 학장이 애처가인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아. 그나저나 손윗 동서들이 해도 너무하는구만... 그래도 있을 때 잘해드려. "막내가 무슨 죄?" --- 동네 북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