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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이 시기를 알라 (롬13:11-14절)
어떤 사람이 갑자기 시력이 나빠져서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고 시력은 다시 회복이 되었으나 이상하게도 기억 상실증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지난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의사는 당황해서 재수술을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억은 되돌아왔으나 또 다시 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어 의사가 환자에게 물었습니다. “양자택일을 하여야겠는데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시력입니까? 과거에 대한 기억입니까? 그 환자는 깊이 생각하고 나서 대답하기를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기에 잊어버려도 괜찮소.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회복시켜 주시오“ 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대한 것을 너무 많이 압니다. 쓸데없는 기억들이 우리 마음을 어지럽게 합니다. 현재에 대해서도 지나칠 정도로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 정보 지식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것은 미래에 대한 지식입니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나 자신을 아는 지식입니다. 내가 나를 모를 때 남을 알 수 없으며, 세상을 알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먼저 나를 똑바로 볼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밝은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나를 알되 나의 과거가 아니고 나의 갈 길과 미래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나의 나아가는 방향과 선택이 앞으로 전개될 나의 미래에 결정적 영향을 줄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나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구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기대하고 계시는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륜이 어디에 있는지, 나의 생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어떻게 끝내실 것인지,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나의 현주소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가진 소유의 현주소, 능력의 현주소, 지식의 한계 등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날 많이 소유했던 것이나 좋았던 것은 오늘 나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내 손에 있는것, 지금 내가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재물, 지금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생활의 영역이 얼마나 되는지, 그 현실의 현주소와 한계를 분명히 파악해야 합니다. 내 인생의 현주소를 똑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이 시기를 바로 알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의 율법을 실천할 것을 강조한 바울은 이제 시대의 위기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시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로스는 단순한 시간인 크로노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특정한 때, 의미 있는 시간을 말합니다. 시간은 모든 공식에 적용되는 인수입니다. 가치의 기본입니다. 자본이나 지식, 경험, 노력, 능력--이런 것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가치가 시간 안에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 역시 이 시간, 이 시기라는 점에서 생각할 때 그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시간은 수직적입니다. 시간을 안다는 것은 수직적 지식입니다. 그 외에 얼마나 가졌느냐? 얼마나 많이 아느냐? 하는 것은 수평적입니다. 우스운 이야기로 우리가 편지를 쓸 때 처음에 “부모님 전상서” 혹은 ‘사랑하는 당신에게’ 라고 쓰고 내용을 전개한 후 마지막으로 날짜와 시간을 씁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우리와 반대로 먼저 날짜와 시간을 쓰고 받는 이를 쓰고 내용을 적습니다. 이 문제에서는 서양 사람들이 더 합리적입니다. 우리는 모든 문서에도 먼저 내용을 쓰고 맨 나중에 날짜와 시간을 씁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시간이 우선입니다.
오늘 이 시기는 어떤 시기입니까?
1. 자다가 깰 때가 된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카이론’ 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연상시키는 데 그 종말의 때가 벌써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종말은 매우 중요하며 소망의 날입니다. 그런데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사라지고 무감각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고전7:29-31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는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현세의 삶에 도취 되어 영적인 잠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현세 지향적인 종교가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기’라는 말은 어떤 특별한 시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기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가 대단히 위기적인 때라는 것입니다. 자칭 그리스도라 하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며 난리와 난리 소문이 들리고 민족과 민족이, 나라와 나라가 대적하며 일어나며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고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어지는 때인 것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서 ‘잔다’는 것은 늦어지고 부주의하며 무관심한 것을 말하는데 즉 영적 나태함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은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잘 믿었지만 신랑이 더디 오니까 그만 영적으로 나태해지고 무감각해진 것입니다. 요즈음 지구촌에는 얼마나 많은 기상 이변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이는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움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생활 속에서 주를 바라보고 의를 행하며 주의 날을 기다리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운 시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로 주의 재림의 시기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명확한 사실이지만 그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졌다고 함으로 매일 매일의 한순간이 지나면 재림도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구원에 관한 인식입니다. 이 구원은 세 가지 국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과거적 구원인데 이것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생명의 구원입니다. 즉 예수를 믿는 순간에 이미 구원이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둘째는, 현재적 구원인데 구원의 주를 믿을 때 의롭다함을 인정받아 날마다 성화의 단계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구원은 점진적입니다. 즉 구원은 이루어진 것임과 동시에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빌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셋째는, 미래적 구원인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성도의 육신의 구속까지 포함하는 영화의 단계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 미래적 구원의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된 구원입니다.
*벧전1: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의 구원의 체험과 날마다 혅재의 구원을 이루며 동시에 구원하는 자 곧 그리스도 예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만이 완벽하게 구원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항상 깨어 기도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3. 밤이 깊고 낮이 가까운 시기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합니다. 이 어둠이 온 천지를 덮고 있는 때를 바울은 ‘밤이 깊었다.’고 표현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밤의 개념은 무엇입니까? 밤은 악한 시대를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시대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와 의혹을 의미합니다. 가장 깊은 밤은 의인의 고난입니다. 왜 악인은 형통하고 선한 사람은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왜 의인이 짓밟히고 무참하게 당해야 합니까? 왜 죄 없는 우리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합니까? 이것이 깊은 밤이기 때문입니다. 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도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밤, 이 깊은 밤에도 하나님의 질서,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사랑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아침을 믿습니다. 우리는 밝아오는 그 빛을 믿습니다. 성경에서 밤은 불신앙과 죽음의 때를, 낮은 구원과 기쁨의 때를 상징합니다.
*살전5:5-8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밤이 깊고’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그것은 죄악의 밤, 핍박과 고난의 현시대가 급속히 그 종말을 고하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낮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아직 어두운 밤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거룩함과 빛과 기쁨의 영원한 시대, 곧 구원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망스러운 상황이요 기대하던 상황입니다. 과연 지금의 시대는 자다가 깰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둠에 머물고 있다면 빛이 비출 때 그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빛을 기쁘게 맞이하지 못하고 어둠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4.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는 시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는 그러한 빛의 자녀로 나타나야 합니다. 과거에 매이지 맙시다. 과거는 좋았던지 싫었던지 이미 지나갔습니다. 또한 현재에 깊이 빠져들지 맙시다. 이것도 곧 지나가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삽시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살아갑시다. 아직은 어두움이 우리의 현실 깊숙이 스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의 아침을 바라보면서 오히려 새벽을 깨우고 밤을 낮같이 살아야 합니다.
*롬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먼저 어둠의 일을 벗어야 합니다. 낮이 되었는데 밤에 입는 옷을 입고 다닌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밤의 옷 어둠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어둠의 일은 죄 된 행동과 그 습관들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교회에 이 같은 질문과 대답을 던졌습니다.
*벧후3:11-12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밤의 옷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롬13:13-14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쉽게 유혹 받고 저지르기 쉬운 죄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물리치지 않고는 우리에게 생명은 없습니다. 어둠의 옷을 벗은 사람은 이제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 옷을 ‘빛의 갑옷’이라고 했습니다. ‘갑옷’이란 군사 용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둠과 싸우는 빛의 군사들이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군사들이 입는 갑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이 갑옷을 에베소서에서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악한 날에 신자가 능히 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특히 ‘단정히 행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신중하고 가치 있는 행동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3가지 경고를 합니다. 첫째, 방탕과 술취함을 금해야 합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술취하는 사람, 방탕한 사람, 호색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술취함은 밤에 속한 자의 행동이요 영적 취함의 반대입니다. 성령 충만의 반대입니다. 둘째, 음란과 호색하지 말라고 합니다. 음란은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께 대항하는 자들은 음란한 세대로 분류되었고, 세상과 짝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음탕한 눈짓도 죄악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성도는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순결해야 합니다. 셋째, 쟁투와 시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사탄에 속한 것입니다. 본문의 이 구절은 방탕했던 어거스틴을 회개하게 한 결정적인 말씀이 아닙니까. 그가 “펴 보라” 하는 말씀을 듣고 펴본 말씀이 바로 이 본문입니다. 이 본문을 읽고 한 사람이 구원을 얻었을 뿐 아니라 그의 인생관, 역사관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고래는 한 번의 작살을 맞고는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로마 역시 한 가지 원인만으로 패망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몰락 원인은 ’경솔한 결혼관과 이혼으로 가정의 신성미가 파괴되었으며, 상류층의 사치와 낭비, 그로 인한 고액의 세금 징수, 유혈적인 운동 경기로 국민성이 잔인해졌으며 외부의 적에만 관심을 고조시키고 내부의 적은 의심하지 못했고 종교가 부패되어 특권층의 독점물이 되었으며 술취함과 방탕과 음란과 호색, 시기와 쟁투가 사회 전반을 물들였습니다. 거기에 독재자들의 횡포와 주변국들의 반란이 결국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로마 제국을 파멸시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대 역시 당시의 로마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상 숭배와 부도덕, 폭력, 전쟁, 질투와 시기, 음란과 호색, 떳떳하지 못한 부끄러운 일이 너무나 난무한 온통 캄캄한 시대입니다. 요즈음 미국에서는 연예인들의 그릇된 윤리를 인정하여 생겨난 연예인 교회, 동성연애자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게이 교회가 생겨났고 교회의 본질을 왜곡하는 각종 사이비, 이단들이 판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어두운 시대가 이대로 흘러가야 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밤은 밤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밤으로 계속된 시대는 없습니다. 밤은 반드시 아침을 부릅니다. 밤의 끝은 태양이 떠오르는 새벽이 있습니다. 밤이 깊다고 하는 것은 다시 새로움이 시작됨을 알려줍니다. 인생의 깊은 밤, 인생의 궁극에서 하나님의 아침, 구원의 아침이 도래합니다. 우리는 지금 점점 어두워지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갈수록 힘이 더 들고 살아갈수록 기운이 빠지는 어려운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위대한 선교사요 탐험가였던 데이빗드 리빙스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의 항로를 항해하는 우리의 배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배 밑에 있는 바닥 짐 때문입니다.” “바닥짐”이 무엇입니까? 배가 뒤집히는 것을 막기 위해 배 바닥에 채워 넣는 돌이나 물 같은 것입니다. 리빙스턴은 그의 바닥짐이 된 것은 집을 나가버린 방탕한 그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아들이 있었기에 그는 기도할 수 있었고, 겸손해야 했고, 그래서 그 엄청난 아프리카 선교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어두운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엄청난 희생과 무서운 고통, 뼈를 깎는 아픔과 고난이 바닥짐으로 깔려 있을 때 우리의 탄 배는 무사할 것입니다. 이 어둠의 때에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맙시다. 밝아오는 새 아침을 바라보면서 더욱 근신하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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