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 인천의 추억이다. 광역시로 발돋움하기 이전인 그때는 경기도청이 인천에 있었기에 그만큼 인천의 존재감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1960년대 초반까지 인천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동란 때 나라를 구한 인천상륙작전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 무렵 서민들의 팍팍한 삶을 위무하고 싶었던지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란 생기발랄한 유행가가 등장했다. 나라의 산업시설이라곤 거의 바닥수준이었던 때라 경인공업지대에 공장들이 들어서자 자연스레 그런 노래들까지 등장했을 것이다.
그러고는 ‘인천 앞 바다에 사이다가 많아도 컵 없인 못 마신다’는 개그까지 유행했다. 그러고 삼면이 바다인 국토에서 왜 하필이면 인천사람들만 가리켜 ‘짠물’이라고 불렀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발령지가 인천이었다. 고학으로 학업을 마친 곳이 서울인지라 지척인 인천이야말로 이웃 동네처럼 포근하게 느껴지는 도시였다. 당시 우편으로 도착했던 사령장에 대한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한통의 등기우편이 날아들었다. 이번엔 발령지가 대전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인천에서 대전으로 근무지가 바뀐 사유는 붙어있질 않았다.
아마도 기성 직원들 중에서 누군가 인천을 희망하여 아직 연고가 생기지 않은 신입사원을 동일부로 취소하면서 그쪽을 배려한 것으로 이해하고 말았다. 그때로부터 반세기도 더 지난 지금 인천을 다시 떠올려 본다. 첫 발령대로 인천에 발을 디뎠더라면 지금의 난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적어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나 숱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또 다른 은인들을 만날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는 기아와 절망에 허덕이던 보릿고개 시절이라 세상인심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입사 초년 햇병아리 시절, 대전에서 1년 4개월 동안 참으로 많은 걸 배웠다. 대전 시내에서 서대전을 지나 유성까지 이어지는 열악한 배전설비의 승압공사를 맡았던 선배는 나에게 업무를 하나하나 자상하게 가르쳐주었다. 선배는 거의 한 세대 정도나 연령차가 있었으니 지금쯤 저승에 먼저 안착해 있을는지도 모른다. 선배의 배려로 함께 일할 수 있었던 나는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일에 매달렸다. 그는 늘 까마득한 후배를 격려하기 위해 애썼다. “미스터 강, 당신은 내 정도 나이가 되면 나보다 훨씬 나은 위치에 있을 거요.”
훗날 선배가 정년까지 기다리지 않고 해외이민에 나섰다는 말을 듣고서야 ‘미스터 강’이란 당시로선 익숙지 않은 호칭을 자주 사용한 것도 외국말을 익히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대전에서 옮긴 부산에서 지낸 1년여 세월은 꿈만 같았다. 오매불망 꿈꾸어왔던 야간대학에 들어간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감수성 예민한 청년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아름다운 항구도시의 풍광이었다.
나이 칠팔년 위 선배는 나를 동생으로 맞았다. 친형제인 남동생들이 있는데도 그는 날 남포동 허바허바 사진관으로 데리고 갔다. 의형제로서 연을 맺는 의식을 그렇게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했다.
그런데도 군에 입대하느라 선배와 헤어질 때까지 난 단 한 번도 선배를 형으로 부르질 못했다. 하숙방에 밤손님이 들어 학교 등록금과 옷가지까지 몽땅 걷어가는 바람에 출근을 못하고 있을 때 선배가 하숙으로 사람을 보냈다. 그 덕분에 국제시장에서 당시 유행하던 ‘재건복’ 한 벌을 사서 출근할 수 있었다. 백세인생이 요란한데 쉰 중반에 떠난 선배가 새삼스레 그립다. 제대 후 복직하여 만난 또 다른 선배와도 함께 지낸 기간은 고작 1년여였다. 통영이 고향인 선배는 서른 중반이었다. 도수 높고 테가 검정색인 안경 때문인지 처음 얼마간은 선배에게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겉으로 봐서 그는 무뚝뚝한 경상도 사내였다. 난 늘 사무실에 붙박여 그 이전 이삼년간 실태조사를 마친 배전선로의 장표를 정리하고 있었다. 선배를 통해 술을 배웠고 혈혈단신인 후배를 아끼는 마음이 커서 나의 결혼을 성사시키는데도 발 벗고 나서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역시 쉰 중반에 생을 마감한 선배를 배웅하려 당감동 화장장까지 갔었다. 확대하여 희미해진 가죽점퍼 차림의 선배가 영정사진 속에서 무심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반백년도 더 지난 일들을 반추하며 연을 맺은 인연들을 그리게 되는 것은 어쩌면 나에게도 떠날 날이 가까워진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먼저 떠난 얼굴들 중엔 꼭 선배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떠날 때는 그 순서가 없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인명은 재천'이라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창 풋풋한 시절에 떠난 후배들도 한둘이 아니다. 그들도 지금까지 이승에 머물렀다면 예순은 넘겼을 터이고 그랬다면 자연스레 은퇴도 맞이하였을 것이다. 결혼 44년을 맞아 부부가 인천을 밟았다. 한국군에서 미군부대로 옮기느라 이삼일 머문 부평 ‘에스캄’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고 미군들이 주둔했던 월미도는 놀이공원으로 변해있었다.
인천 발령이 전격 취소되었던 1963년 봄을 떠올릴 때마다 도시의 크기에 따라 배치했다면 71명 중 상위 2명은 적어도 인천이 아닌 한국 제2의 도시 부산이라야 맞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라의 모든 흐름은 수도 서울이 중심이었다. 그래서 서울과 거리가 가까운 곳을 우선으로 꼽았던 것이다. 젊은 날 1년여를 빼곤 줄곧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은퇴할 수 있었으니 부산은 제2의 고향이나 다름이 없다. 훈훈한 부산 사람들의 인심은 가끔씩 다른 도시를 찾았을 때 느끼게 된다. 만약 첫 발령대로 인천에 발을 디뎠더라면 십중팔구 난 서울사람이 되어 세파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랬으면 난 부산을 몰랐을 것이고 지금 알고 있는 사람들과도 만나지 못했을 터이다. 젊은 날의 직장 발령지는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첫댓글 존경하는 회장님 결혼44주년 축하드립니다~
저는 인천에는 한번도 못가봤습니다만
회장님이 첫발령 받으신곳 이라고 하시니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추억속에 계시는 그때 그 선배님의
따뜻한 정을 회장님의 글을 통해서 충분히 느낄수가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인천은 관광명소가 한두 군데가 아니고 중국과 가까워 요우커들이 많이 찾기도 합니다. 차이나타운 코스엔 중식당 맛집들도 추천할 만한 곳이 많답니다. 승용차를 가지고 가도 되지만 서울역에서 1호선 전철 1시간이면 바로 닿습니다. 꼭 한 번 다녀오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