횟집에서 광어를 보면서 미술계의 대부이자 거장 파울로 루벤스의 <십자가에 올리심>을 떠올렸다. <플란다스의 개 >의 주인공 어린 네로가 죽기 전 보았던 바로 그 그림이다.
광어가 우뭇가사리 위 아스파라거스를 장식으로 식탁에 올라왔다. 연등을 닮은 핑크빛 꽃모양의 무도 같이 따라왔다.
바닷가, 횟집에서 광어가 큰 눈알을 굴렸다. 물고기는 눈물샘도 눈꺼풀도 없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데 난 보았다 울먹이다, 울먹이다, 눈물을 흘리는 광어를!
그들만의 언어인 주파수로 나 몰래 비명도 질렀다. " 남의 생살 먹으니까 좋냐?"라고 악다구니를 쓰고 대드는 독립투사 같은 광어를 난 분명 보았다. 물고기들의 최고난도 육두문자를 쓰는 걸 입모양을 보고 읽었다. 그들만의 숫자인 열여덟(18)을 보았다.
진득한 눈물을 흘리는 광어대가리에 상추잎을 얹어두고 미친 듯이 흡입하다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냥 신의 상차림에 오른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더는 먹고 싶지 않았다. 내 앞의 신과 광어 앞의 내가 뭐가 다를까? 내 타는 심장을 차라리 달라고 했더라면 뜯어 주었을 것이다. 생심장을 뽑아 달라고 했더라면 그게 더 쉬웠을 것이다. 찐득하게 꿈까지 따라와 눈물을 흘리고 갔다.
내가 광어를 보고 안타까워하듯 신도 양심이 있으면 날 좀 안쓰럽게 봐줬으면 좋겠다. 숨쉬기도 힘든데 감사하라고 하는 미친 인간들이 주변에 넘쳐 난다. 뇌에서 공감을 느끼는 부분을 신이 푸딩처럼 떠먹었나 보다. 차라리 광어보고 마지막 생살이 뜯기는 순간 감사하라고 하는 게 더 공감이 간다. 미국에서 온 제니퍼가 광어 도다리 우럭이 영어로 뭐냐고 해서 사전을 찾으니 다 FLAT FISH였다. 전부다 납작 물고기였다. 영어 이름도 제대로 가지지 못한 우리 광어, 자신의 마지막 헌신을 용광로 같은 매운탕 냄비에서 마친다.
신의 만찬에 질퍽하게 차려진 내 살을 그들이 뜯어먹고 있었다. 늙어서 눈물샘이 막힌 나는 눈물대신 피눈물을 흘렸다. 고통이 나를 지배하는 밤들, 심장은 광폭하게 길길이 뛰고 펄떡이는 생선의 아가미처럼 난 헐떡거렸다. 난 평생 철들지 않으련다. 철들면 불행해지니까, 중2병 환자처럼 그냥 살아가련다.
황폐해진 광어가 퇴장할 때 예수의 <십자가에서 내리심>이 떠올랐다. 이제 광어는 매운탕으로 부활해서 나타날 것이다. 광어, 우럭, 도다리는 눈물샘도 눈꺼풀도 없어서 눈물 흘릴 일이 없어 좋겠다. 울어도 울어도 물속이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니까 좋겠다. 화장실이 없어서 더 좋겠다. 치매 걸려 아무 데나 싸도 눈치 볼일 없어서 좋겠다. 나이 드니 별게 다 부러워진다.
생선회가 식탁 위에 우뭇가사리를 깔고 올라가는 순간 예수의 <십자가의 올리심>이 보였다. 뼈만 앙상하게 남아 내려오는 순간에는 <십자가에서 내리심>을 보았다.
도마 위 광어가 난도질당하면서 삶을 감사했을까? 광활한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며 죽어 갔을까?
솔직히 말할까요? 조금도 살고 싶지 않아요. 이게 정답이에요. 주어진 삶이라 성실한 학생처럼 견디지만 왜 태어났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저주받은 인생인 듯!!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난 오늘도 공부를 한다.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