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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 인터넷 종친회
 
 
 
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 스크랩 북청 김해김씨
김영광 추천 0 조회 1,221 13.11.26 13:10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내 아버지는 함경남도 북청군 북청읍 출신이다. 金자庾자南자를 쓰신다. 조국전쟁 당시 고등학생이셨고, 원산탈출로 남하하여 부산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한국외국어대 1회 졸업생이라고 들었고, 4개국어를 하셨단다. 러시아어가 전공이었고, 정보사에서 원사 제대하고 군무원으로 근무하다 순직하셨다. 지금 동작동 국립묘지에 계신다. 국민학교 입학 전에 돌아가신 탓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아버지와 살던 공군본부 뒤의 아담한 집만을 기억할 따름이다. 


김해김씨라고만 알던 집안의 항렬이 궁금했던 것은 오래되었지만, 두어번 인터넷을 뒤져 항렬자를 맞춰본 적이 있으나 도대체 김해김씨 항렬 중에 맞는 것은 없었다. 아버지 쪽 친척은 내려온 분이 아예 없었던 탓에, 철없을 적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를 탓하고는 말았다. 아버지의 파를 잘못 기억하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어제 형이 전화해서 우리가 무슨 파인지 알아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미 찾아봤노라고 하고, 김해김씨는 아닌 것 같다고 하고 말았다. 하지만 찾아야 할 이유도 생기고, 몇가지 정보도 더 생겼다. 


우선 예쁜 조카가 알고 싶다는 것이다. 학교 숙제거나 아니면 개인적인 관심이겠지만 진솔이가 알고 싶다면 좀더 조사해볼 이유가 되었다. 또한 형은 아버지 옆동네에서 남하한 분에게서, 아버지 동네가 아예 김해김씨 집성촌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 집안은 북청 김해김씨다. 우리 집안은 김해김씨로 자청하고 있기는 하지만 김해 김수로왕의 자손으로 생각하는 그 김해김씨와는 다른 성씨다. 경주 김알지왕의 후손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김자 희자 갑자를 쓰시는데 한자는 알지 못한다. 다만 어머니는 할아버지 집에 관복과 복대가 있었다고 들었으니 가까운 선대에 벼슬을 하거나 급제한 분이 계셨던 모양이다. 이는 통일 후에 아버지 고향에 가 보거나 하면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 형제들의 머리가 좋은 것은 모두 조상의 덕일 것이다. 어머니도 총명하신 분이나, 아버지가 정보사에서 박학다식하여 별명이 박사였다고 하셨고, 형제들 모두 박학다식에, 아는 척 장군들이니, 다소 아버지의 피를 받은 결과리라.


다만 항렬 등을 조사하기에는 다소 자료가 부족하다. 김해김씨 북청파는 북한에 더 많은 것으로 생각되며, 풍문으로는 양근 김씨 종친회에 속하지 않고  김해김씨 북청파 종친회를 따로 꾸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해김씨 북청파 종친회는 네트웍 상에서 홈페이지 등이 없어서 알지 못하고 다만 양근 김씨 종친회와 경주 김씨 익화파가 있다.


북청 김해김씨의 시조는 김인찬(金仁贊)으로 경주김씨이다. 자는 의지(), 호는 의암()이다. 태어난 해는 미상이며 1392년에 죽었다. 1376년(고려 우왕 2년)에 북청천호(北靑千戶)가 되었다. 1383년 이성계가 동북면에서 안변으로 오던 중 밭 가운데 있는 뽕나무 위의 새 두마리를 활로 쏘아 떨어뜨리자 밭에서 김을 매다 이를 보고 감탄하여 한충과 함께 이성계(李成桂)의 부하가 되었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용병의 재능이 있어 위화도 회군(1388년) 등에서 공을 세웠고, 1390년(고려 공양왕 2년) 밀직부사(使), 1392년 밀직사 동지사에 올랐다. 조선개국 후에는 중추원사(中樞院使),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義興親軍衛同知節制事)가 되어 태조의 친병을 통솔하는 책임을 맡으나 곧 죽었다. 죽은 후 개국공신 1등으로 익화군(益和君)에 추봉되었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추증되었다. 호는 충민()이다. 


김인찬은 신라(新羅) 경순대왕(敬順大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 김은열(金殷說)의 14세손 전서공 김존일(金存一)의 네 아들 중 막내다. 익화군(益和君)에 추봉된 후 후손들이 분관하여 본관을 익화로 하였다. 이후 익화군은 양근군이 되며, 크게 보아 북청 김해김씨는 양근김씨에 속한다. 실제로는 그 후손이 그대로 김해김씨 익화파(양근 김씨)로 유지하기도 하고, 일부는 김녕김씨에 족보를 합쳤으며, 제주 지역의 후손은 경주 김씨로 부른다(경주 김씨에서 부르는 바, 경주김씨 익화군파). 양근이 오늘날 양평이므로 양평 김씨와 혼동할 수 있으나 시조가 다른 양평김씨가 있어 양근 김씨와 구분하여야 한다.


김시흥은 신라제56대 경순왕의 제4자인 대안군 김은열의 증손인 김염의 6세손이다. 동정공(同正公) 김봉기(김鳳麒)의 넷째아들이다. 그는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 명종 때는 조위총의 난에 공을 세워 김녕군에 봉해졌다. 김녕군에 추봉된 후 후손들이 분관하여 본관을 김녕으로 하였다. 후에 김녕군이 김해군으로 바뀌어 가야계 김해김씨와 경주계 김해김씨가 혼동되었다. 조선 시대 내내 선김(가야계)와 후김(김해계)로 구분하다가 후손들이 그 구분을 혼동함에 따라 조정에 상소하여 고종2년에 가야계 김해김씨의 본관을 김녕으로 하였다. 크게 보아 북청 김해김씨는 이 김녕김씨에 속한다. 


김알지는 기원후 65년 봄 음력 3월에금성 서쪽의 계림(鷄林)의 숲에서 발견되었다. 탈해 이사금이 밤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새기를 기다려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고 한다.  밤에 호공이 돌아와서 아뢰자,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어 보았더니 조그만 사내아기가 그 속에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컸다. 탈해 이사금이 기뻐하며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귀한 아들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거두어서 길렀다. 이에 알지(閼智)라 이름하고 금궤짝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金)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탈해왕이 김알지를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후에 파사 이사금에게 양보했다고 한다. 그의 7대손 미추 이사금이 김씨 최초로 왕에 즉위하였다. 추존하여 시조대왕(始祖大王)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56대) 경순왕의 아들 중 넷째인 대안군 김은열은 경주김씨 은열공파의 시조이며, 크게 보아 북청 김해김씨는 이 경주김씨 은열공파에 속한다. 참고로 경순왕의 아들은 다음 성씨의 시조가 되었다. 


첫째 마의태자 - 후손없음

둘째 김굉 - 나주김씨

셋째 김명종 - 경주김씨 영분공파

넷째 김은열 - 경주김씨 은열공파

다섯째 김석 - 의성김씨

여섯째 김건 - 강릉김씨

일곱째 김선 - 언양김씨

여덟째 김추 - 삼척김씨

아홉째 김덕예 - 울산김씨


김해김씨 북청파의 시조 김인찬의 제사를 지내는 곳은 다음과 같다. 


삼의사(三義祠)는 光武 5년(1901) 고종황제(高宗皇帝)의 황명(皇命)으로 함경남도 북청군 북청읍 동리(東里) 동덕산(東德山) 기슭에 창건되었다. 여기에는 전주리씨, 청해이씨, 김해김씨 3성(姓)의 북청(北靑) 입북(入北) 분파시조(分派始祖)를 봉안(奉安)하고 3성(姓)의 후손들이 매년 춘추 3월과 9월 첫 정자일(丁字日)에 향사한다. 여기 봉안(奉安)된 삼위신(三位神)은 전주 리씨 완풍대군(完?大君) 양평공(襄平公) 리원계(李元桂)(1330~1388), 청해 이씨(靑海李氏) 청해백(靑海伯) 양렬공(襄烈公) 이지란(李之蘭) (1331~1402), 김해김씨(金海金氏) 익화군(益和君) 충민공(忠愍公) 김인찬(金仁贊)(1337~1392)이다.


근성서원(芹城書院) 내  內元勳祠 : 근성서원은 창건연대를 확인할 수 없으며, 1634년(인조 12)에 비안군 외북면에서 송리동으로 이건(移建)하면서 이각서원(泥各書院)이라고 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毁撤)되었으며, 1922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근성서원으로 개칭하였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김인찬(金仁贊;?∼1392)과 김이갱(金以)을 배향한 서원이다. 현재 매년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益和祠 - 경기도 화성군 장안면 소재 

- 경화사 내 충현사(景和祠 內 忠賢祠)

- 모현사(慕賢祠) 내 충현사(景和祠 內 忠賢祠)

- 충익재(忠翊齋)


김해김씨 북청파가 이렇듯 근원을 찾기 어려워진 이유는 조선시대와 근대의 복잡한 사정에 기인한다. 우선 경주 김씨가 단종복위에 가담하다가 세조 이후에 드러내놓고 지내지 못하면서 수백년간 김해김씨로 행세한 바 있다. 조선 후기에야 경주를 본관으로 다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별도로 김녕김씨가 선김, 후김으로 구분하여 김해김씨와 잘 구분되지 않았던 바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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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3.11.26 14:06

    첫댓글 경주김씨가 본관을 김해로 쓴건 아니고 김녕김씨가 1884년까지 김해로 혼용

  • 13.11.26 14:31

    마의태자의 후손이 없다면 부안김씨 상계는 어떻게 되는것인지 궁금합니다. 이래저래 뒤죽박죽 만들어놓으신 저의가 무엇인지도 뻔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진것이 족보인데 그 후손중에서 인물이라도 하나 나오면 명문이 되기도 하고 잘난체하고 위세도 부리고 하지요. 고모는 00김씨인데 조카는 xx김씨인집도 있고 이리가고 저리가고 참 족보는 위대한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김씨가 어떻고 저리박씨가 어떻고 그렇게 포장해서 잘난체하고 기고만장하면 됩니다. 뒤죽박죽 족보 만세! 자랑하는놈들만 투탁하는놈들한테만 해당됩니다.

  • 작성자 13.11.26 14:36

    조선조에 경순왕후손은 군역면제 혜택을 주니 신라김씨중에서도 경순왕계열이 다수가 된거고~ 최근 고려묘지명 연구결과 여러 본관이 선대상계가 혼란에 빠진 상태입니다.

  • 작성자 13.12.01 08:50

    마의태자후손도 부안김씨와 경주김씨 태자파가 재판까지 했지만 결론은 미궁입니다.기타 울산김씨와 나주김씨,삼척김씨와 선산김씨,안산김씨,경주김씨 영분공파,대안공파와 의성김씨도 논쟁중입니다.

  • 13.11.29 22:38

    북청김해김씨? 이나라 최대의 성씨가 김해김씨인데 왜 김해김씨라는 성이 있는데도 김해김씨란 말이냐? 투탁의 온상인가? 그런 개수작은 아니겠지요.
    질서를 흐리고? 그래 뭘 어쩌겠다는말씀이신지? 참 가지가지하시네요

  • 작성자 13.12.01 09:00

    2000년 통계 김해2 (59,880가구 인구199,544명 남자 93,918명 여자 105,626명) 소위 법흥파,북청파,우록계등 후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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