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braham Lincolon(에이브라함 링컨)
"We will visit the Holy Land and see those places hallowed by the footsteps of the Savior. There is no place I so much desire to see as Jerusalem."
“우리는 이제 성지(聖地)에 가서 구세주의 발자국으로 성스럽게 된 곳들을 보게나는 예루살렘만큼 그토록 보고 싶은 곳이 없다오.“
이 말은 링컨 대통령이 암살되기 직전에 부인에게 한 말이랍니다
.
. 그는 평생 교회에 나간 적이 없고 하나님에게 늘 부정적이었는데 생애 말년에 구주 예수의 발길을 따라 가고 싶다고 말한 것은 잠시 뒤에 올 자기의 죽음에
대해 무슨 예시를 받은것 같다고 후세의 평자들은 말합니다.
링컨이 나이 56세 까지 살있는데 그처럼 인생의 고초를 겪은 사람도 드믈 것입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1809년에 태어나서 1865년에 죽습니다.
1865년이면 우리나라는 흥선대원권이 집권하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경북궁을
복원하던 해입니다. 그는 켄터키주의 방 하나 짜리 오두막에서 태어나서
부모님과 누나와 형과 함께 살게 됩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인디언들에게
습격당하여 별세합니다. 링컨이 8살 되던 해 이모네 식구가 와서 함께 사는데 그
다음 해 그의 어머니와 이모네 식구 3명이 모두 목숨을 잃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상한 우유를 마시고 중독되어 사망한 것입니다. .
살림은 누나가 했는데 누나마저 얼마 있다 병사하였습니다. 링컨이 어려운
환경에서 큰 것은 어려서부터 대강은 알았지만 이렇게 비참한 줄은 몰랐습니다.
이 정도 되면 집안이 해체될 것 같은데 용케도 해체는 면한 모양입니다.
갔습니다. 1819년 아버지는 아이가 둘 있는 사라(Sarah)라고 하는 여자와
재혼했는데 링컨에게 친 아들처럼 대하여 주었습니다. 10살 전후하여 일하기를
싫어하여 마을 사람들이 ‘게으른 녀석’이라고 손가락질했는데 커가면서 아무리
힘든 일도 스스로 다 할 줄 아는 모범 청년이 되었습니다. 링컨의 학력은
기껏해야 초등학교 1년도 못되지만 그는 독서광 이었습니다; 성경, 천로역정,
섹스피아 작품, 이솝우화, 로빈슨 크루소, 프랑크린 자서전등.
닥치는대로 읽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좋은 대학 아니면 사법고시 합격한
사람들인데 책을 안 읽는 것 같습니다. 책은 마음의 양식일 뿐 아니라 짧은 세월
속에서 이거 저것 다 경험 할 수 없으니까 책으로로서 남의 경험을 간접으로
체험 하면서 지혜의 지평을 열어 가는 것 인데 아무리 훌륭한 대학을 나와도
책을 안 읽으면 머릿속이 녹이 습니다.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재임 중 TV로 철학 강의를 하였고 20세기 마지막
영웅이라고 하는 드골 대통령은 당시 가장아름 다운 글을 쓴다고 했습니다. 처철
수상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얼마 전 별세한 싱가포르의 이광요 수상은
켐브리지 법대를 수석 졸업하였습니다.
지적 소양을 갖추면 재벌과 결탁하여 사욕을 채우는 일을 잘 못합니다. 그들의
지성이 준엄한 감시기능이 되기 때문입니다.
링컨은 훗날 성인이 되어 대화할 때나 연설할 때 적당한 때에 적당한 구절을
인용을 잘하여 그는 대단한 지성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링컨의 아버지는 일은
안 하고 책만 읽는 다고 야단만 칩니다.
링컨 부친이 가족을 데리고 이곳저곳으로 이사 다니다 일리노이주의 콜스라는
곳에 정착했을 때 링컨은 어느덧 22세의 청년이 되어 혼자서 뉴 살렘(New
Salem)이라는 곳을 향하여 집을 떠납니다. 아버지와 관계가 점점 멀어 집니다.
1851년 아버지가 임종에 임박하여 그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그는 가지도 않고
아버지가 별세한 후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조선 조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의 장례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는 대원군이 자기 아내 민비를 죽인 것에
대한 한이 맺혀 안 간 것인데 링컨은 아버지와 어떻게 불화를 겪었는지 훗날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될 사람이 아버지 장례 에 안 갔다는 것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결혼을 약속한 여인의 죽음 다른 두 여인과의 파혼이 그를
괴롭힙니다.. 어느 물류회사에 취직하여 평저선(平底船...바닥이 평평한 화물선)에
물품을 싣고 미시시피강을 흘러 뉴올리언즈까지 가서 올 때는 걸어서 오는
일이었습니다. 1842년 그는 부유한 집안 출신인 매리 토드(Mary Todd)라는
처녀와 결혼했습니다. 링컨은 변호사일도 보고 정치도 하느라고 몇 달 씩 집을
비우는 것이 일수였고 매리는 아이며 가장을 돌보느라 무척이나 고생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아들을 넷을 낳았는데 셋이 죽고 아들 하나만
살아남았습니다. 이 상실의 충격으로 링컨도 그의 아내도 우울증에
걸리고 링컨에겐 건강염려증이 더해지고 그의 아내는 기분이 기복이
심하고 신경질, 충동 구매하는 등 그녀의 증세로 보아 조울증이라고 훗날의
의사들은 단정합니다.
링컨의 재앙은 그칠 줄 모릅니다.
링컨은 장사도 해보았지만 실패하고 빚만 젖습니다. 이어서 일리노이주 주의회
의원 출마했으나 역시 실패합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그는 돈을 대 주는 강력한
후원자도 없었고 정기 교육도 못 받았는데도 비록 낙선은 했지만 선전했습니다.
링컨은 뉴 살렘의 우체국장을 지냈고 이어서 독학으로 변호사가 됩니다. 1834년
두 번 째로 도전하여 주 의원으로 당선됩니다. 그는 유능하고 성공한 변호사로
명성을 얻었고 일리노이주 주 하원의원을 네 번 임하게 됩니다. 이 기간 중 그는
노예해방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1846년 링컨은 임기 2년의 미연방하원의원으로
당선됩니다.
하원의원직을 그만두고 그는 스프링필드(Springfield)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변호사 업무를 개시했습니다. 서부 개척지역에서 일어나는 많은 송사를 맡아서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평원 변호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1850년 때는 미국 남부 여러 주에서 노예 제도가 합법인데 반해 북부에서는
불법 이었습니다. 1854년 그는 노예제도 폐지를 위하여 다시 정계로
돌아왔습니다. 같은 해 그는 일리노이즈주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하고
낙선합니다. 그러나 1858년 공화당 공천으로 상원후보로 출마했는데 민주당의
현역 더글라스 의원과 일곱 번에 걸친 토론회를 가졌는데
링컨은 노예제도 폐지를 상대방은 노예제도 유지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투표결과는 더글러스의 승리였습니다.1860년 9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링컨은
3차 투표 끝에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습니다. 민주당에서는 일리노이즈 출신의
더글러스 상원의원이
지명되었는데 노예제를 유지하는 것을 정강으로 삼았습니다.. 대통령 선거전이
시작되면서 공화당은 그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유권자들에게 부각 시켰고
결국 링컨은 1860년 제 16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다음해 2월 링컨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남부군의 발포로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초기의 전황은
불리했고 국론은 사분오열(四分五裂)되면서 대통령을
하야 시키자는 운동까지 벌어졌습니다. 군인 민간이 할 것 없이 대통령에
불복하는 하극상이 심했고 심지어 어떤 세력들은 북군 장병들 보고 탈영하라고
설득하기도 하였습니다.
링컨은 전례가 없는 정치적 군사적 위기에 봉착했습니다만 그는 군통수권자로
결연한 의지로 전쟁을 수행했고 북군 해군은 남군의 모든 항구를 봉쇄하여
외부와의 교역을 차단했습니다. 영국과의 충돌도 간신히 피했고 국방장관은
정적인 민주당 출신인물을 임명했습니다. 정적이라 하더라도 유능하면 기용하는
링컨의 아량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북부의 신문들은 90일내에 전쟁이 끝나기를 기대했지만 전쟁은 점점 길어지고
치열해 졌습니다. 전세가 호전 되면서 링컨은 1863년 1월 “노예 해방선언”을
공표합니다. 우선 북군이 장악한 지역부터 노예를 전면으로 해방시킨다는
내용입니다. 1965년 4월 남군의 총사령관인 리(Lee)장군이 항복함으로서 5년에
걸친 전쟁은 끝납니다.
전쟁수행 하는 중에 링컨은 미국에 처음으로 소득세를 도입하는 등 경제를
현대화 했고 추수감사절을 미국 전체의 공휴일로 정하는 등 이 전쟁을 미국이
도약하는 발판을 만들었습니다.
전쟁 중인 1864년 북쪽 국민의 압도적 지지로 재선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참모들이 남군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아주 관대하게 다루라고 명령했습니다. 승자로서의 아량을 보여 패퇴한 남부
사람들의 비통한 마음을 어루어 주는 대목입니다.
전쟁이 끝나면서 링컨의 남부 재건 계획이 실천에 옮겨졌습니다. 통일이 되면서
“The United States(합중국)”명칭이 정식으로 국호로 채택되었습니다.
링컨은 1865년 4월 11일 연극 관람 중 부쓰(Booth)라는 자객에 의하여
암살당했습니다.
1948년 이후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링컨은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 매리는 자기 아들이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 시킸는데 10년후에 친지들이 퇴원시켰습니다.
생전에 아들 셋을 잃고 남편의 힘든 정계의 뒷바라지 전쟁 그리고 남편이
바로 옆자리에서 암살당한 것 ...참으로 견디기 어려움이 응축되어 머리에
병이 난 것입니다. 남편이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되는 동안 매리 링컨은
심신이 차례로 녹아내린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미국국민이 가장 싫어하는 대통령 4위에 올라있는 접입니다.
남북전쟁에서 진 남부사람들의 한과 증오가 아직도 인기투표에 반영 된것이지요
1위가 트루만 대통령입니다. 625나자 즉각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결정.
미국국민들은 들어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엄청난 인명과 물자
를 희생하는 것을 못 참았습니다. 하도 인기가 내려가 두 번 째 출마를 포기.
그 다음은 닉슨 대통령입니다. 워터게이트 거짓말 때문이지요.
그 다음은 부시 대통령입니다.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국력을 약화 시킨 과오
☆ 무엇이 링컨을 위대한 대통령으로 만들었나?
1. 링컨은 가장 유능한 사람들을 뽑아 정부 요직에 임명한다. 유능하면
정적(政敵)까지도 임명한다.
2. 역경에 잘 견딘다. 그리고 전진한다.
3.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한다
4. 실수를 솔직히 인정한다. 그리고 거기서 문제를 풀어나간다.
5. 성공과 공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
6. 감정 조절을 잘 한다(때로는 성질도 부리긴 했지만 감정조절을 잘 한 편임)
☆ 다음은 링컨의 유명한 연설의 일부입니다.
1.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결코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 우리나라도 링컨에 버금가는 대통령을 한 번 만났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끊임없이 소통하고 농담도 잘하고 상대방 마음을 편히 해준 링컨.
어느 부하가 편지를 가져왔답니다. 어느 장군이 대통령을 씹는 내용인데
링컨은 그 편지를 보지도 않고 불속에 던지라고 하였답니다.
“이 편지를 읽고 나는 유능한 장군 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소.”
삼국지의 한 대목 같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