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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는 전쟁에 이기고 왜 승리한 장수들을 다 죽였는가?
한과 위만조선
사기(史記) 조선전에 보면 한무제는 양복으로 해군을 이끌고 제(齊 : 산동반도)로부터 발해를 건너고 순체는 육군을 거느리고 요동(요동)으로부터 위만을 쳤다. 이 당시 발해(渤海)란 현재와 같이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를 말하며 요동은 난하와 만리장성 사이로 산해관에서 출발했고 위만의 도읍지인 왕검성은 발해의 북쪽과 만리장성과 요하 사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왕검성은 패수의 동쪽에 있었는데 이 패수는 대동강이 아니라 대능하(大凌河) 이며, 왕검성은 대청일통지(大靑一統志)에 광녕현(廣寧縣) 동남에 있다고 하였다.
전쟁의 결과
전쟁의 결과에 대하여 사마천은 <사기>에서 "우거는 지세가 험하고 견고한 것만 믿다가 나라의 대가 끊어지게 하였고, 섭하는 공을 도둑질했다가 적의 군사에게 머리를 잃었으며 누선(樓船 : 양복)은 장졸이 적은 것을 가지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 제 허물을 벗어나려 했다. 그리하여 번우를 잃고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손수와 더불어 전공을 다투다가 둘 다 함께 죽임을 당해서 양쪽(한과 위만)의 군사 모두 욕되었으며 장수로서 후(侯)에 봉해진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섭하 : 전사 ㉡위산 : 사형 ㉢공손수 : 사형 ㉣순체 : 사형 ㉤양복 : 서인(庶人)이 됨
***고조선을 침략한 한<漢>나라 장수와 신하들의 비참한 최후 http://dok.do/eU4sTd
승리자는 누구인가?
전쟁의 결과를 보면 한(漢)도 우거(위만의 손자)도 모두 패한 전쟁인 것이다. 그렇다면 승리자는 누구일까? 여기에 대한 답을 <북부여기 상편> 4대 단군 고우루 13년조에 "한의 유철(무제)나 평나를 쳐들어와 우거를 멸하고 사군을 두고자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동명 고두막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의 침략군을 연파하자 그 지방의 유민들이 사방에서 응하여 도우므로 군보가 크게 떨쳤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자 동명(東明) 고두막이 군사를 일으켜 유민(번조선의 백성)을 이끌고 한의 세력을 격파한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를 쓸 때 , 한무제가 동명왕 고두막한에게 대패한 치욕을 숨기고자 의도적으로 북부여사를 누락시켜버린다. 그후 중국의 대부분 사서에서 북부여 역사가 사라지게 되었다. 고려와 조선의 사대주의 사가들이 이것을 그대로 모방하였고 일제 식민사학자와 국내 주류 강단사학자들이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였다. 338
조선 역사를 부활시킨 동명성왕, 고두막한
한 무제는 그 여세를 몰아 고조선의 뒤를 이은 북부여로 쳐들어온다. 그런데 당시 북부여의 4대 고우루(高于婁) 단군은 워낙 심성이 유약하여 제대로 맞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 조선 민족이 다 넘어가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는데, 이를 지켜보고 있던 고조선 47대 고열가 단군의 후손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한 무제의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다.
고두막한은 기원전 108년, 졸본(卒本)에서 나라 이름을 ‘북부여’에서 동방의 대광명이라는 뜻의 ‘동명(東明 : 동명부여, 또는 졸본부여)’이라 바꾸고 동명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기원전 87년에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조선 역사 부활의 푯대를 다시 세우니, 이분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다.
이 때 본래 북부여 4대 단군의 승계자인 해부루(解夫婁)가 동쪽으로 가서 가섭원(迦葉原) 땅에다 나라를 세우는데, 동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으로 동부여(東夫餘)라 했다. 해부루는 북부여 4대 단군의 동생이다.
그리하여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5대 고두막 단군이 되는데, 그때부터 북부여의 후기시대[後北夫餘]라고 한다. 북부여는 시조 해모수(解慕漱) 단군으로부터 6대 만인 고무서(高無胥) 단군 때에 막을 내린다.
6대 고무서 단군은 딸만 셋이었다. 그 둘째딸이 소서노(召西弩)인데, 고주몽과 혼인을 시켜 사위로 삼아 주몽으로 하여금 북부여를 계승토록 한다. 그리하여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었으며, 그 후 기원전 37년에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로 변경하여 고구려 700년 역사의 창업 시조가 된 것이다.
이것이 고조선이 멸망한 후 열국시대로 들어서는 과정이다.
대단군의 통치권이 약화되고 부단군과 지방 군장들의 목소리가 커지던 고조선 말기에 한민족의 새 역사를 개창한 분이 바로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이다. 해모수는 요하 상류에 위치한 고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 출신으로 BCE 239년 웅심산(지금의 길림성 서란)에서 기두하였다. 그 후 백악산 아사달을 점거하고, 당시 고열가 단군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던 오가五加 부족장들의 공화정을 철폐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해모수를 단군으로 추대함으로써, 북부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BCE 232).
‘북부여’는‘ 북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이다. 고조선의 제3왕조 시대인 대부여의 북녘 땅을 중심으로 나라를 열었기 때문에,‘ 대’자를‘ 북’자로 바꾸어 북부여라 한 것이다. 그것은 망해 가던 대부여의 정통을 계승하겠다는 해모수단군의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렇게 북부여가 고조선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을 때, 고조선의 양팔인 번조선과 막조선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고조선 개국 이래로 서방 진출의 교두보이자 외부 침략으로부터 민족을 수호하는 방파제 구실을 하던 번조선 땅은 이 무렵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을 피해 넘어온 한족 난민으로 넘쳐났다. 그 난민 중에 한 고조 유방의 죽마고우이자 연나라 왕이었던 노관의 부하 위만이란 자가 있었다. 위만은 한 고조의 숙청을 피하여 조선인으로 변장한 뒤 부하 1천 명과 함께 번조선의 준왕에게 투항하였다(BCE 195). 준왕은 그를 받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쪽 변방인 상하운장을 지키는 장수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위만은 그곳에서 몰래 세력을 길러 이듬해에 왕검성을 쳐서 한순간에 준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BCE 194).『 삼국유사』와 현 역사학계는 위만이번조선을 탈취하여 세운 정권을 위만조선이라 부른다.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또 다른 조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민족의 서쪽 영토 한 모퉁이를 잠깐 강탈하여 지배한‘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북쪽에 북부여가 열리기 전부터 이미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땅이던 막조선에도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요서지역(번조선)에 살던 대부호 최숭이 백성과 함께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발해 바다를 건너 막조선으로 넘어왔다. 최숭은 오가의 부족장들에게 거금의 재물을 주고 왕검성(지금의 평양)을 넘겨받아 낙랑국을 세웠다(BCE 195). 강력한 한나라의 출현으로 요서지역에 위기감이 팽배한데다 위만을 비롯한 수많은 한족이 망명하여 오자, 어수선한 정국을 피해 최숭이 한반도 지역으로 와서 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처럼, 북부여가 세워진 후 만주의 진조선은 북부여에 흡수되고, 한반도의 막조선에는 낙랑국이 들어서고, 요서의 번조선은 위만이 차지함으로써 고조선의 역사는 완전히 문을 닫게 되었다.
준왕이 망하고 위만정권이 들어선 사건은 한민족에게 또 다른 역사 개척의 계기가 되었다. 번조선 땅이 위만에게 강탈당하자 상장군 탁卓이 사람들을 이끌고 한강 이남으로 이주하여 새로이‘ 마한’을 세웠다(BCE 194). 옛 진조선과 막조선의 일부 백성들도 한강 아래로 남하하여 각기‘ 진한’과‘ 변한’을 세웠다. 마한은 호남의 익산을, 진한은 경북 경주를, 변한은 경남 김해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비록 불의한 위만정권 때문에 남하한 것이지만, 한강 이남에서 새로운 삼한시대를 연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전후삼한설前後三韓說’을 주창하여 한반도에 형성된 삼한을‘ 후삼한(남삼한)’이라 부르면서, 고조선 시대의‘ 전삼한(북삼한)’과 구별하였다. 이 남삼한이 바로 강단사학계가 말하는 삼한이다. 고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읽는 핵심 코드인 삼한관경제를 인정하지 않는 한, 어떻게 두 가지 삼한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만주대륙의 북삼한이 부정되고 한반도의 남삼한만 거론됨으로써 우리 역사는 소한사관에 찌들게 되었다. 작은 삼한의 시야로 역사를 보는 것을‘ 소한小韓사관’이라 한다. 하지만 한민족사는 대륙을 누비던 큰 삼한의 관점‘, 대한大韓사관’으로 보아야 그 본연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북부여는 4세 단군에 이르러 역사적인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BCE 109년, 한 무제가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이 다스리던 위만조선으로 쳐들어왔다. 한나라는 초기에 연신 패하였으나 이간책으로 위만정권 지도층을 분열시켜 결국 우거를 죽이고 왕검성을 점령하였다(BCE 108). 이때 한 무제는 새로운 점령지에‘ 한나라의 군현[漢四郡]’을 설치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우거 제거에 공을 세운 한민족의 강한 저항에 부딪쳐 고조선 유민들의 자치를 인정하는 데 그쳐야 했다.
위만정권을 무너뜨린 한 무제는 요동을 넘어 북부여까지 침공하였다. 그런데 당시 북부여의 4세 고우루단군은 워낙 심성이 유약하여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고 말았다. 이때 이를 지켜보던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였다. 그러고는 졸본卒本에서 나라를 열어(BCE 108) 졸본부여라 하고, 스스로 동명왕東明王이라 칭하였다. 고조선을 계승한 북부여가 자칫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한민족 상고사 최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동명왕은 구국영웅으로 추앙받아 북부여의 5세 고두막 단군으로 즉위하였다(BCE 86).
원래 북부여의 4세 단군을 계승하여 잠시 보위에 있던 해부루는 동쪽의 차릉(가섭원)으로 이주하여 동부여를 세웠다. 이로써 부여는 동서로 나뉘게 되고 후기 북부여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두막한의 등장으로 전기 북부여 시대가 끝나고 새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북부여는 고두막 단군의 다음 대에 이르러 182년(BCE 239~BCE 58)의 짧은 역사를 끝내게 된다.
‘ 북부여가 고조선을 계승하였다’는 사실은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 맥을 바로잡는 핵심 요체이다. 그런데 한국의 강단사학계는 위만정권을 고조선의 계승자로 앉혔을(BCE 194) 뿐 아니라,‘ 위만정권이 한나라에게 망한(BCE 108) 후 고조선이 있던 그 자리에 한나라가 네 개의 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라고 가르친다. 북부여는 온데간데없고, 중국의 식민지인 위만조선과 한사군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강단사학자들은 또한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근거로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를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아버지로 설정하였다.‘ 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 고주몽이 태어나 고구려를 열었다’라고 하여, 해모수와 주몽을 거의 동시대 인물로 만들었다. 180여 년에 걸친 북부여 6대 단군의 역사를 완전히 증발시켜 버린 것이다.
왜 북부여사는 이렇게 난도질되었는가? 그것은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한 무제가 동명왕 고두막한에게 대패한 치욕을 숨기고자 의도적으로 북부여사를 누락시킨 데서 비롯된다. 그 후 중국의 모든 사서에서 북부여 역사가 사라졌다. 고려와 조선의 사대주의 사서들이 이것을 그대로 모방하고, 일제 식민사학자와 국내 강단사학자들이 다시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였다.
강단 사학계는 부여 역사를 외면하지만, 부여사는 단재 신채호가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를 정도로 한민족사의 골간을 이룬다.
몇 안 되는 부여사 연구가 중에 신용하 교수는, 부여가 최소한 BCE 5세기부터 CE 5세기까지 약 천여 년 동안 만주 일대에 존재하였으며 CE 4세기 전반까지 동북아의 최선진국이었다고 말한다. CE 5세기라면『 환단고기』가 전하는, 북부여에서 분파된 마지막 부여인 연나부부여(서부여)가 멸망한 때(494)와 일치한다.
신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4세기 말경 부여족의 일파가 중앙아시아의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지방으로 이주하였고, 그 후 5∼7세기 초까지 돈강 유역과 북캅카스 지역으로 계속 이주하였다. 7세기의 서양사에서부터 불가Bulghar족의 역사가 나오는데, 이 불가족이 곧 부여족이다.‘ 불가’란‘ 부여(불)의 가加’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635년 불가족은 족장 쿠브라트Kubrat의 지도력 아래‘ 대大 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하였다. 하지만 몇 년 후 그가 사망하였고(642), 그의 다섯 아들은 격심한 권력싸움으로 불가리아를 해체시켰다. 그 중 세 아들이 이끈 불가족은 결국 주변 민족에 복속되고 말았지만, 둘째와 셋째 아들은 독립국가를 세웠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Kotrag가 세운 나라,‘ 고추불가Kotchou-Bulghar국’은 14세기까지 번성하였고, 현재는 타타르 자치공화국(1920년 소비에트연방의 자치 공화국으로 성립됨)으로 존재한다. 타타르인의 언어 구조는 한국어와 동일하고, 생김새도 동양인의 모습이다.
셋째 아들 아스파르흐Asparukh가 이끈 불가족은 오늘날의 발칸 반도로 남하하였다. 당시 비잔틴 제국의 로마군 장교의 기록에 의하면, 불가족은 로마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하늘을 향해 조상신 단군Tangun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이것은 환단 시대 이래로 동방 한민족이 일관되게 거행해 오던 천제 풍속을 서방으로 이주한 부여족도 그대로 따랐음을 보여준다.
이 불가족은 마침내 로마군을 물리치고 불가리아 제1제국(681∼1018)을 건국하였다. 불가족은 귀족 계층이 되어 보야Boyar(부여의 유사 발음인 부유의 모음조화에 따른 변음)라 불렸고 슬라브족을 농민으로 삼아 다스렸다. 황제 크룸Krum에 이르러 주변의 로마군을 대부분 추방하고 수도를 옮겨 소비(또는 사비, 지금의 소피아)라 불렀다. 황제는 소비의 산에 올라 단군에게 제사를 올리고, 그 산 이름을 발칸산으로 정하였다. 신 교수는‘ 발칸산’을‘ 밝안산’‘, 밝산’‘, 백산白山’등의 우리말 지명과 동일한 것으로 보며, 한민족은 고대로부터 백산(밝은 산)에 올라 제천 의식을 행하였다고 말한다. 지금도 크룸 황제의 제천 유적이 일부 남아 있다는 이 발칸산에서 발칸 반도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크룸 황제가 병사한(814) 후 불가리아는 국력이 점점 약화되었다. 12세기에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을 세웠지만 그 지배층은 제1제국 때와는 많이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다. 소수 불가족과 다수 슬라브족 사이의 혼혈로 슬라브족의 생김새를 많이 띠게 되었다.
그렇지만 발칸 산, 발칸 반도, 소비 등의 지명 속에 부여의 자취가 남아 있고, 불가리아 말의 문법 구조와 풍습(정월 달집놀이, 굿거리 등)에서도 한민족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불가리아인은 백인 세계에서 유일하게 갓난아기의 엉덩이 반점, 일명 몽고반점이 나오는 민족이다. 이 모든 것은,‘ 불가리아는 동방에서 온 부여족이 세운 국가’라는 신 교수의 주장처럼, 불가리아의 원 조상이 바로 부여족이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후한서』,『 삼국지』 등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부여사는 모두 서부여의 역사이다. 서부여는 동부여가 망한 후 요서에 생긴 망명부여로서, 서부여사는 부여의 끝자락 역사이다. 예를 들어『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울구태蔚仇台, 간위거簡位居, 마여麻余, 의려依慮 등은 모두 서부여의 왕이다. 그런데도 강단사학계에서 나온 책과 논문들은 서부여를 부여의 원래 모습인 양 그리고 있다. 그 이유는 부여에 대한 단편적이고 왜곡된 정보를 담고 있는 중국 사서의 기록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부여의 원형이 처참히 파괴되고 한국사의 허리가 잘려 버렸다. 한국사의 국통 맥이 어지러워지고 뿌리 역사가 소멸되었다. 북부여라는 잃어버린 고리가 고조선과 고구려 사이에 제대로 연결되는 그날이 바로 동방 배달민족사의 9천 년 국통 맥이 온전하게 똑바로 서는 역사 광복의 날이 될 것이다.
종합 정리 영상
한사군 전쟁의 조작과 진실, 한나라와 북부여 전쟁 https://youtu.be/T97fmqMp-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