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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루카 21,20-28
희망 없는 사면초가 상황에서 영웅이 되려 하지 마라
오늘도 예수님은 ‘종말’의 상황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적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우리는 나라를 위해 끝까지 항생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살 방법을 모색해야 할까요?
만약 살 방법을 모색하다가는 나중에 나라의 큰 배신자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적군에게 포위된 상황’, 곧 ‘사면초가’에 놓이면 도망치라고 합니다.
계속 싸울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징벌’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포위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예레미야 예언자는 항복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하느냐며 예레미야 예언자를 가두고 박해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레미야의 말을 안 들은 치드키야 왕은 두 눈이 뽑히게 됩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첫 번째 멸망입니다.
상황이 더는 가망 없을 때 그것을 ‘하느님의 징벌’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 그대로 개죽음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한 항전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나라의 자존심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꼴이 됩니다.
분명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두 번째 멸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인 이들을 향한 하나의 예고된 징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끝까지 항전하였습니다.
그 항전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나라의 자존심을 위해 한 것입니다.
이들이 끝까지 항전했던 곳이 ‘마사다’입니다.
결국, 마사다에게 항전하던 이들은 모두 자살을 하게 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사다 항전을 기리며 끝까지 항전한 이들을 추켜올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위해 싸웠다기보다는 나라를 위해 싸운 것입니다.
이 세상 지나버릴 왕권을 위해 귀한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영혼을 구원해주지도 못할 것을 위해 목숨을 내어버려야 할까요?
마지막 때가 오면 분명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마지막 때는 온 세상이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지고 땅이 갈라지고 바다가 덮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완벽하게 사면초가가 되었다면 이것은 ‘하늘의 징벌’로 여겨야 합니다.
이때 반항해 봐야 내 영혼을 돌볼 기회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 뜻대로 잘살고 있는데 망하는 교회나 망하는 사회나 망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사면초가가 되었다면 그것은 전체적으로 잘못된 길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징벌은 받아야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런 때에 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말씀과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라합이 잘하였습니다.
라합은 창녀였지만 자신이 사는 예리고가 자신보다 더 썩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분명 징벌이 내릴 것을 느끼고는 징벌을 내리는 이들을 숨겨줍니다.
두 명을 숨겨주는데 저는 이 둘을 ‘은총과 진리’로 봅니다.
라합은 자기 나라에서 배신자가 되었지만,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부지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혼을 구원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식의 말로 우리를 이용하려는 세력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공산주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습니까?
그러나 그 피의 값을 하느님은 기쁘게 쳐 주실까요? 왜 그랬냐고 하실 것입니다.
일단 역전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우리 안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입니다.
1968년 북한 특수부대 124군 소속 31명 특공대원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들이 산속에서 마주쳤다가 살려준 지게꾼 형제들의 신고로 서울은 이미 경계태세에 있었습니다.
결국,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김신조를 제외한 모든 대원이 전투 중 사살되었습니다.
바위틈에 숨어있던 김신조도 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합니다.
이미 주위는 포위되어 살 가망성이 없었고,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말이 들려옵니다.
문득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집니다.
‘나는 김일성 수령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존재인가?’
그는 항복합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멈추지 않습니다.
북한은 자신들을 보낸 적이 없다고 잡아뗍니다.
분노를 느끼고 항복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는 길을 택합니다.
누가 김신조 목사를 탓할 수 있을까요? 북한은 분명 배신자라 낙인찍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영혼 구원을 책임지지도 못할 세상 권력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마치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처럼 점점 절망의 나락으로 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 속도를 늦추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이때 이 세상 편에 서서 하느님의 진노가 가까워지는 데도
이용만 당하다 죽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적들에게 포위되었다면 분명히 이 상황은 하느님의 진노 결과임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구원하러 이 감옥까지 들어온 이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비겁함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지, 이런 상황이 왜 일어나는지 묻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프리즌 브레이크에는 무죄하게 무기징역을 받은 형을 구원하기 위해 들어온 동생이 있습니다.
동생은 온몸에 탈출할 수 있는 암호가 적힌 문신을 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죄도 없이 살아야 할 감옥을 탈출한다고 비겁하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 안에서 영웅이 되려는 것이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하느님의 징벌 아니고 사면초가가 되는 상황은 거의 없습니다.
그때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십시오.
우리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독서 : 다니엘 6,12-28 복음 : 루카 21,20-28
기도, 그분 앞에 항복하고, 그분 앞에 내 모든 계획과 의지, 삶 전체를 내려놓는 것!
제 삶 속에 기도가 차지하는 비중이나 우선권이 어느 정도일까? 성찰해보며,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첫 번째 자리에 있어야 할 기도가 일이나 취미활동, 티비나 SNS에 밀려 한참 뒷쪽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틈만 나면 기도가 신앙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외치고 있고, 머리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하루일과 중에 일과 기도 사이의 균형을 자주 놓치곤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족하고 나태한 기도 앞에 스스로를 합리화시킵니다.
‘열심히 살고 열심히 일하는 게 기도가 아닐까? 한량처럼 빈둥거리면서 기도에만 충실한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존경하는 헨리 나웬 신부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서 명쾌히 정리해주시니 참으로 감사드릴 일입니다.
“악령은 우리를 정신없게 만들어, 자투리 시간이 조금만 보여도 온갖 할 일과 만날 사람과 처리할 업무와
만들어야 할 제품으로 쉴 틈을 주지 않으려 합니다.
악령은 우리에게 진정한 슬픔과 애통해할 여지조차 허용하지 않으려 기를 씁니다.
삶이 바쁘기 때문에 내면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바쁜 삶은 오히려 저주가 됩니다.
악령의 음성은 또한 우리를 유혹하여 무적(無敵)의 얼굴을 취하게 하려 합니다.
‘연약하다, 내려놓다, 엎드리다, 울다, 애통하다, 슬프다.’ 따위의 말은 악령의 사전에 없습니다.
기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기도가 아닐까요?
크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앞에 내가 얼마나 작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파악하는 것.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그분 손바닥 안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 그래서 결국 그분 앞에 항복하고, 그분 앞에 내 모든 계획과 의지, 삶 전체를 내려놓는 것, 그분 앞에 겸손되이 엎드려 눈물 흘리는 것.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구약의 인물이 한 분 계십니다.
신비로운 인물 다니엘 예언자입니다.
유달리 신심 깊고 총명했던 그는 바빌론 유배지에서도 승승장구합니다.
바빌론 왕들의 총애를 받아 셋째 가는 통치자가 됩니다.
다리우스 왕 같은 경우 총독 제도를 도입합니다.
총독 120명을 임명해 각 지역에 주재하게 하고,
총독들을 지휘할 세 명의 재상을 임명하는데, 다니엘은 세 명의 재상 중에 한 명이었으니,
그에게 주어진 권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각별한 총애를 받는 다니엘을 다른 재상들이 그냥 둘리 만무했습니다.
즉시 계략을 짰습니다. 임금을 압박해서 법령 하나를 만들어 서명하게 했습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임금 말고 다른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를 올리는 자는 누구든지 사자 굴에 던져질 것이다.”
임금이 반강제적으로 문서에 서명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집으로 돌아간 다니엘은 늘 그랬듯이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기도였습니다.
그의 집 옥상 방 창문은 예루살렘 쪽으로 나 있었습니다.
그는 습관처럼 하루에 세 번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은 기도하고 있는 다니엘의 집을 급습해서 현장을 목격했으며, 곧바로 왕에게 달려가 그가 법령을 어겼다고 고발했습니다.
다니엘을 총애했던 왕은 눈물을 머금고 그를 사자 굴 속으로 넣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사자들의 입을 막아버리셨습니다.
멀쩡한 몸으로 사자 굴을 빠져나온 다니엘을 부둥켜안은 임금은, 이방인이면서도 참으로 멋진 신앙고백과 찬미가를 불렀습니다.
“그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나라는 불멸의 나라, 그분의 통치는 끝까지 이어진다.
그분은 구해 내시고 구원하시는 분, 하늘과 땅에서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다니엘을 사자들의 손에서 구해 내셨다.” (다니엘 예언서 6장 27~28절)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11월 25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의 날을 촘촘하게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다니엘을 끌고 가서 사자 굴에 던졌다."(다니 6,17)
제1독서는 다니엘에게 닥친 위기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나라를 잃고 이방인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유배민이지만 다니엘은 하느님께 드리는 경배와 기도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건 숨을 쉬는 것과 같은 그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변함없이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는 다니엘의 모습에 분개해 임금에게 몰려갑니다. 다리우스 임금은 다니엘에게 호의적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지라고 분부하지요. 임금은 몹시 안타까워하면서 "네가 성실히 섬기는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구해내시기를 빈다."고 기원합니다.
"다니엘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자기의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이다."(다니 6,24)
놀랍게도 사자들은 다니엘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성경 저자는 그 이유를 하느님께 대한 다니엘의 믿음이라고 단언합니다.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어 보이는 고통과 멸망의 순간에도 믿음은 생명을 보증하는 신비입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루카 21,20)
복음 속 예수님의 말씀은 기원후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면서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자존심이고 정체성인 영광의 도성이 이방인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백성들은 죽음과 착취, 억압의 그늘에 놓이게 되었지요.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라칠 것이다."(루카 21,26)
세상 민족들 간의 세력 다툼과 전쟁에 더하여, 온 우주에도 표징들이 나타나 하늘의 세력들까지 흔들리면 그때 사람들은 더더욱 큰 공포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걷잡을 수 없이 닥쳐오는 일들로 마치 모든 것이 끝장난 듯
절망하고 체념하게 되겠지요.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7)
그런데 징벌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구원의 날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가 성실히 믿어온 분, 세상을 온통 둘러싼 재물과 권력과 요행의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오롯이 하느님만을 섬기는 이들은 상처 하나 남지 않고 구원될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절망과 체념으로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기뻐하며 구원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나라는 불멸의 나라, 그분의 통치는 끝까지 이어진다. 그분은 구해 내시고 구원하시는 분, 하늘과 땅에서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다니 6,27-28)
주님께서 이 세상에 "징벌의 날", "사람의 아들의 날"을 마련하신 첫째 이유는 당신께 충실한 이들을 속량하시려는 사랑 때문일 겁니다. 또 오늘 독서 속 다리우스 임금의 신앙 고백에서 드러나듯, 주님을 몰랐던 이방인들까지 모두 당신 나라로 모으시려는 하느님의 큰 그림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을 충실히 섬기는 모든 믿는 이들은 상처 없이 두려움과 공포의 그 날을 건너갈 것입니다. 삶의 순간순간 중첩된 주님과의 촘촘하고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그날을 심판과 징벌의 날이 아닌 속량과 구원의 날, 벅찬 해후와 뜨거운 일치의 날로 만들어 주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언제일지 모르는 그날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매일 지나온 하루만큼씩, 지나온 순간만큼씩 죽음과 종말에 더 가까워지는 중이지요. 어차피 닥칠 그 순간을 두려움과 공포, 회피로 맞닥뜨릴지, 그리움과 사랑으로 준비하다 맞이할지는 우리 각자에게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간이 후반부에 이르렀고, 위령성월 또한 무르익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생명을 넘겨드릴 그날, 모든 영혼들과 함께 주님 앞에 설 그날을 관상하며 몸과 마음과 영혼을 준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 그 결정적 순간까지 주님을 찬송하고 찬양하다가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기쁘게 그분을 맞이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알타반의 말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