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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묵상글 (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 잘 결합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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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0.28 05:31
- 잘 결합된?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에 듣는 에페소서 독서는 에페소 교회가
예수님이라는 모퉁잇돌과 사도라는 기초 위에 세워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건물이라는 뜻으로 얘기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열두 사도 명단을 보면 열두 사도는 기초로서 부실하고,
그들의 결합은 잘 이루어지기 어려운 엉성한 공동체였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주님을 배반할 유다 이스카리옷이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구성원이 서로 삐걱거릴만한 구성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눈여겨보는 것은
오늘 축일로 지내는 열혈당원 출신의 시몬과 세리 출신의 마태오 관계이고,
잘 아시듯이 이들의 출신 곧 열혈당원과 세리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였지요.
그런데 출신으로만 보면 엉성하고 삐걱거릴 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잘 결합된 주님의 거처로 자라난다고 얘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적인 출신으로만 보면 잘 결합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뒤 그리고 성령으로 변화된 뒤
이들은 든든한 기초가 되었고 그 위에 전체 교회는 잘 결합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개성이 강하고 이질적인 이들이 그리스도라는 용광로에서
성령이라는 불에 정련되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개성이 강하고 이질적인 우리도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서로 잘 결합되어 하느님의 거처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정련돼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같이 이루는 것이 목적이 돼야 하고,
경쟁적이고 분열적인 개성이 조화롭고 통합적인 개성으로 바뀌어야 하며,
나만 정의롭고 너는 불의하지 않고 같이 하느님의 정의를 이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 축일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 공동체이고 오늘 에페소 말씀대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룩한 거처로 지어지고 있는가?
아니면 사랑 특히 성령의 사랑은 눈곱만큼도 없고,
그래서 한 번도 그리스도 공동체다운 적이 없거나,
모래 위에 세워져 서서히 무너져가는 공동체는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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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제가 좋아하는 노래를 보면, 대체로 80년대의 노래입니다. 당시에는 라디오를 통해, 아니면 엘피판이나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음악을 들었습니다. 특히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테이프에 담아서 들고 다니며 들었습니다. 음질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다양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당시에 들었던 것들입니다. 지금 훨씬 더 좋은 음질과 멋진 사운드 그리고 다양한 노래가 있음에도 잡음이 잔뜩 들어가 있는 노래에 감탄사를 내뱉었고 지금도 좋아합니다. 부족한 삶에 대한 낭만일까요? 부족했기에 더 집중했고 그래서 사랑했던 것입니다. ‘찌지직’ 거리는 잡음 소리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긴 영상을 보는 것도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튜브의 짧은 영상만 보고, 책도 두꺼운 것이 아닌 얇고 글씨 적은 것을 본다고 하더군요. 집중하지 못하게 된 것은 그만큼 풍요로움 속에서 보고 들을 것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요?
부족함이 있어야 작은 것의 소중함도 알게 되고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부족함보다 풍요로움을 미덕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부족함 속에 있으면 불행한 것으로 단정짓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을 지냅니다. 열두 사도의 일원인 두 사도의 축일이기에,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지금 이 장면을 보면 얼마나 영광스러울까 싶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의심도 들었을 것 같습니다. 놀라운 기적을 볼 수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셨고 먹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빴기 때문입니다. 바쁘고, 배고프고, 그리고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이시니 분명히 풍요로움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부족함 투성입니다. 이 부족함 안에 계속 머물라고, 전교 여행을 보내실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부족함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부족했을 때 행복의 이유를 더 많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모범을 직접 보여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삶은 풍요로움이 가득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삶도 부족함 그 자체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부족함으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이런 모범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우리는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하려고 할까요? 부족함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었습니다.
오늘의 명언: 멀쩡한 신체를 가지고도 꿈을 위해 도전할 줄 모르는 것이 바로 장애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도전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승리자입니다(레나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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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사도 시몬과 유다(타대오)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열두 사도를 뽑으신 장면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이는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올리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분께서는 먼저 부르시어 뽑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선발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그들이 사도로 뽑힐만한 충분한 조건들을 갖춘 자들로 보이지 않습니다. 곧 신분이나 능력이나 지위에 있어 사도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름 없는 무명인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뽑힌 후에도 여전히 특별한 내력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거룩한 이들이었기에 뽑힌 것이 아니라, 뽑히었기에 거룩한 이들이 된 것입니다. 거룩한 분에 의해 뽑히었고, 거룩한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 유다와 시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도 시몬이 카나 출신으로 열혈당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뿐, 다른 내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단지 타대오, 곧 “용감한 자”라고 불렸다는 사실 뿐, 다른 내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치, “사도”란 모름지기 ‘이름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한 ‘건물’이 되고, 거룩한 분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모퉁이 돌이십니다.”(에페 2,20)
사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령스럽게도 이 “건물”(집)은 “자라납니다”. 곧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에페 2,21). 그렇게 자라나면서 신령스런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집니다.’ 그렇게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2,22).
참으로 신령스런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있다’는 이 사실 말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다’는 이 사실 말입니다! 이토록, 우리 안에 당신의 신비가 살아있다니, 헤아릴 수 없이 크나 큰 분이 나보다 작아져 내 안에 들와 있는 이 사랑의 신비 앞에 그저 어안이 벙벙하고 경탄할 뿐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뽑으신 다음,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에 녹아, 세상에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가정’을 건설합니다. 바로 내가 그 나라의 백성이요, 그 집의 건축자재요, 그 가정의 식구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3)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 뜻의 실행이 제 양식이 되게 하시고,
제 몸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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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스승과 제자
축일을 맞이한 모든 이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굳건한 믿음과 사도적 열성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는데 그냥 뽑으신 것이 아니라 밤을 새우시며 기도한 다음 뽑으셨습니다. 그 기도의 열매는 확실했습니다. 열혈당원이라 불리는 시몬과 세리 마태오를 비롯하여 배신자 유다까지도 그 대열에 속해 있었습니다. 시몬과 마태오는 서로의 위치가 대립적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군과 친일파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26,33).하고 장담했지만 죽음 앞에서는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26,72).하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개별적으로 볼 때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뽑혔습니다. 이것이 밤새껏 기도한 결과입니다. 그냥 뽑았으면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뽑혔을 텐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렸기에 장차 당신을 배신할 배반자들까지도 뽑으셨습니다. 그분의 품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내가 그분의 품을 떠날 뿐입니다. 예수님은 잘나고 똑똑한 사람을 뽑은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을 선택하여 당신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한눈팔지 않는 이들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스승의 참모습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제자들은 부족함이 많았지만,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잘못을 범한 베드로는 으뜸 제자로서 역할을 다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열혈당원 시몬은 늘 투쟁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투쟁과는 상관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살았고 또 전했습니다. 죄인 취급 받던 마태오도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세관장 자캐오를 생각하면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남을 속여먹은 것은 네 곱절로 크게 갚아주고 구원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세리 마태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는 잘못은 뉘우쳤지만,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변화된 삶을 살면 행복이 오고, 변하지 않으면 끝이 불행합니다. 주님의 자비를 믿으면 미래가 열리고, 믿지 못하면 그 자체가 영벌입니다.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변하되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고 나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합니다. 세례 전이나 세례 후나 변한 게 없으면 불행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예수님과의 만남이 깊어져야 행복합니다. 사도들이 주님을 만나 새 삶을 살았듯이 우리도 새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스승 앞에 참된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쇄신을 갈망하는 우리를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필리3,21).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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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91년 8월 23일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9월 5일에 첫 본당인 중곡동 성당의 보좌신부로 발령받았습니다. 약간의 두려움과 설렘이 있었습니다. 처음 만난 본당 신부님이 앞으로의 사제 생활에 큰 영향을 준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처음 만난 본당 신부님의 세례명은 오늘 축일로 지내는 ‘타대오’였습니다. 타대오의 이름은 ‘유다’였는데 예수님을 배반했던 이스카리웃 유다와 구별해서 ‘타대오’라고 부릅니다. 저는 본당 신부님에게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신부님에게서 ‘자유’를 배웠습니다. 신부님의 자유는 두 개의 날개를 타고 날았습니다. 하나는 ‘기도’였습니다. 신부님은 하루에 3시간 이상씩 기도하였습니다. 신부님 방의 기도 초는 신부님의 기도와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성당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순수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어린이처럼 순수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이제 막 새 사제가 된 저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매일 동네 산책을 같이하였습니다. 보좌신부가 더 필요하다면서 용돈도 넉넉하게 주었습니다. 33년 저의 사제 생활에 큰 힘이 되어주셨던 타대오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게 영적으로 큰 도움을 주는 동창 신부님이 있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오늘 축일로 지내는 ‘시몬’입니다. 제가 예수님 시중을 들며 분주했던 마르타와 같았다면 그 친구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었던 마리아 같았습니다. 제가 눈에 띄는 ‘꽃’을 지향했다면 그 친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양분을 찾는 ‘뿌리’와 같았습니다. 제가 소리만 요란한 ‘빈 그릇’ 같았다면 그 친구는 속이 꽉 찬 ‘그릇’이었습니다. 저는 활동과 만남을 통해서 힘을 얻는다면 그 친구는 홀로 있음에서 힘을 얻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뭔가 한 것 같은데 내세울 것이 별로 없었는데, 그 친구는 침묵 중에 뭔가를 만들었습니다. 2년 전입니다. 저는 북미주 파견 수도자들을 위한 ‘피정’ 지도를 제안받았습니다. 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난감했습니다. 그때 제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동창 신부였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매년 수도원 피정 지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피정 자료를 보내 줄 수 있는지 부탁했습니다. 친구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귀한 자료를 보내 주었습니다. 저는 친구의 도움으로 북미주 파견 수도자 피정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 친구를 보면 산해숭심(山海崇深)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산과 같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부족한 저를 위해서 그런 친구를 보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타대오와 시몬 사도는 기도와 겸손으로 악의 유혹을 이겨냈고, 천국에서 빛나는 신앙의 별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와 겸손으로 살아가면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입니다.”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내 주변에 있는 분, 나와 함께 일하는 분, 내 가족들의 강점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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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지면으로 들려드릴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만 저에게는 한가지 습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긴 문장을 암기해야 할 때 노래로 만들어 외운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적 주일학교에서 12사도의 이름을 외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외국 사람 이름을 그것도 12명이나 한꺼번에 외우는 것이 제게는 어려웠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짧은 노래를 들려주셨습니다.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토마와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되는 야고보와 시몬과 타데오, 이스카리옷 유다다.
위의 12사도 노래를 들려드리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저는 이 작은 사건 이후로 외워야 하는 것은 대부분 노래로 외웠습니다. 예를 들어 국어 시간에 배우는 ‘청포도’(이육사) 시를 노래로 불러 외웠습니다.
사실 주님께는 수많은 제자가 있었습니다. 복음은 주님의 제자들만으로 군중을 이루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12명의 사도를 뽑으셨습니다. 어떤 기준에 의해 뽑혔는지 사실 가늠하기 힘듭니다. 12사도는 다른 이들보다 월등히 명석하지도, 잘나지도, 부유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발의 기준은 모르지만 유다 말고 모든 제자가 하늘나라를 전하다 순교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선발의 기준이 아니었을까요? 하늘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칠 수 있는 마음 말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제자군을 이루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군중을 이뤘던 주님 시대처럼 우리도 주님 앞에 군중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때 제자들처럼 지금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12사도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 안에 주님 사랑이 자리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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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깡
황태채가 들어있는 봉지가 냉동실에 있습니다.
구수한 황태국도 끓여먹고
새콤달콤한 황태 무침도 해먹었습니다.
커다란 봉지안에 얼마남지 않은 황태채를 보면서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황태깡’을 만들었습니다.
간단합니다. 넉넉한 기름에 황태채를 넣고 튀기면 됩니다.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소스를 준비합니다.
첫 번째 소스는 간장에 식초, 설탕을 넣습니다. 청양고추를 썰어넣고 후추도 톡톡 뿌려줍니다.
두 번째 소스는 5:5 비율로 마요네즈와 고추장을 섞습니다.
이렇게 두가지 소스 앞에 ‘황태깡’을 배치하고 즐겨보세요.
자매품 ‘북어깡’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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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교회 공동체
“주님의 제자, 주님의 사도”
교황청 소식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교황님의 주일 강론과 삼종기도후의 강론주제가 신선했습니다. “우리 모두 복음의 기쁨을 나누는 움직이는, 선교하는 교회가 되도록 하자”는 주일 강론 주제 였고, “믿음과 희망을 지니고 예수님께 향하자”라는 삼종기도후 강론 주제였습니다.
두 강론 모두 눈먼 거지 바르테매오가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리고 이어 주님을 따르게 된 내용을 깊이 다뤘던 강론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를 찾는 바르티매오였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중심은 예수님이요 우리는 모두 제자임을 확인시키는 강론이었습니다.
오늘은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입니다. 크게 알려진바 없는 두 사도이지만 예외없이 순교로서 주님께 생명을 바친 사도들이고 예수님의 친척으로 추측하기도 하지만 확실치 않습니다. 오늘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복음에서 역시 두 사도 이름이 나옵니다. 배반자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 유다 대신 타대오로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대한 일에 앞서서 반드시 기도하셨습니다. 바로 이점을 우리는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제자들중 12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우며 산에서 기도하십니다.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로 성서 곳곳에서, 시나이산, 갈멜산, 타볼산, 시온산등 유명한 산이름이 나옵니다만 오늘 산이름은 알수 없습니다.
여기서 잠시 산에 관계된 일화를 소개합니다. 조선시대의 집 중 최고는 지리산 천왕봉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있는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뤘던 남명 조식의 산천재(山天齋)라 합니다. “산속에 하늘이 담긴 집”이라는 뜻의 산천재입니다. 새삼 불암산을 배경으로 불암산 기슭에 자리잡은 요셉수도원 역시 산천재라 불릴 수 있겠고 이 또한 거룩한 축복이다 싶습니다. 10월 한달 내내 계속 저를 행복하게 하는 ‘산앞에 서면’고백시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예수님께 불림받은 12사도 공동체는 그대로 교회공동체를 가리킵니다. 12사도처럼 우리는 모두 교회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주님의 제자이자 주님의 사도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모두가 주님의 제자지만 모든 제자가 사도는 아니었습니다만, 그러나 이제 우리 세례받은 교회의 신자들은 주님의 제자도 되고 주님의 사도도 됩니다.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사도이자 선교사가 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복된 신원입니다.
제자(disciple)의 어원은 라틴어 ‘배우다(discere; to learn)’입니다. 바로 배우는, 공부하는 제자들입니다. 하루이틀이 아니고 평생 배우고 공부하는 제자들입니다. 이런 면에서 평생배움과 공부를 제공하는 매일미사가 신자들의 평생교육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공부에서는 예나 이제나 동서방이 공통적입니다. 모두가 성인이 되는 공부, 군자가 되는 공부, 참사람이되는, 참제자가 되는, 바로 사람이 되는 평생 공부였습니다. 오늘의 실용적인 공부와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바로 이런 옛 공부전통을 고스란히 전수받고 있는 가톨릭교회입니다.
어제 “자신을 속이지 않는 공부, 공자부터 정약용까지 위대한 스승들의 공부법”이란 책을 감명깊게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와 구별되는 것이 공부만 있고 기도와 선교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오늘 복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도로서 탄생한 공동체요 예수님 중심의 다양성의 일치 공동체입니다.
새삼 주님의 제자이자 주님의 사도인 우리의 일은 “기도, 공부, 선교”로 크게 셋으로 구분됨을 봅니다. 선교의 사도직에 앞서 제자로서의 기도와 공부가 본질적임을 배웁니다. 기도와 공부는 선교를 통해 완성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열두 제자이자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치유활동을 하면서 선교활동에 돌입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 중심의 거대한 교회공동체 모습입니다.
기도하고 공부하는 주님의 제자이자 주님의 사도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제1독서 에페소에서 교회가 무엇인지 배웁니다.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의 한가족으로서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바로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그 건물의 모퉁이돌이 됩니다. 이어 우리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는 살아 있는 유기적 역동적 공동체이자, 영원한 현재진행형으로 자라나는, 지어지는 성전임을 배웁니다. 바오로 사도가 잘 요약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교회 공동체임이 잘 드러납니다. 바로 이런 바오로의 교회론을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공부하고 확인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제자로서 기도하고 공부하는 미사시간이요, 이어 주님의 사도로서 선교하라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인 우리들의 평생 일인 “기도하라, 공부하라, 선교하라” 셋을 다시 확인하는 미사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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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름>
바로 그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하여
홀로 산에 올라
밤을 새워
갈림 없는 하느님께
오롯이 기도합니다
나와 함께 걸어야 할
그대이기에
마침내 내가 되어야 할
그대이기에
나 스스로
부르기에도 때론
부끄럽기 그지없는
나의 이름을
당신께서
그리 불러주시니
당신과 함께 걷는
나이렵니다
당신이 되어가는
나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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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7-9)
비전한 자들을 고쳐 주려고 내려오신 예수님
모든 것을 삼가 눈여겨보십시오 그분은 사도들과는 올라가시고 군중에게는 내려오십니다. 낮은 곳에서가 아니면 군중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보겠습니까? 군중은 그분을 따라서 높은 곳으로 향하지 않고 장엄한 장소에도 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어 거기서 약한 자들을 만나십시다. 약한 자들은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하니까요. 마태오가 병자가 낮은 곳에서 고침을 받았다고 알려 줍니다(마태 8,1-4 참조). 사람은 누구나 먼저 고침을 받고 조금씩 조금씩 덕을 쌓음으로써 산 위로 올라갑니다. 다시 말해, 무모한 행실로부터 돌아서도록 부르시어 맹목의 해를 피하게하십니다. 이렇게 우리 상처를 치료하러 내려 오시어, 효과적이고 풍요로운 방식으로, 우리가 당신의 하늘 본성에 참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폐 4,23).
여러분은 영혼의 고차적인 기능들에도 금가락지를 끼워야 합니다. 영혼의 고차적인 기능들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기능은 기억의 능력이라고 불립니다. 이 기능은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와 짝을 이룹니다. 여러분은 이 기능에다 보존이라는 이름의 금가락지를 끼워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영원한 것들, 곧 사물의 영원한 관념들을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기능은 지성을 이룹니다. 여러분은 이 기능에다 지식이라는 이름의 가락지를 끼워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언제나 하느님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이미지 - 표상 - 를 여의고, 매개자를 여의고, 닮은 것을 여의어야 합니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알려면, 내가 하느님이 되고, 하느님이 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이 내가 되고, 내가 하느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내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그분”과 이 “나”가 하나의 “존재”를 공유하고, 이 “존재” 안에서 영원토록 한 가지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그분”과 이 “나’, 곧 하느님과 영혼은 영원토록 한 가지 일을 함으로써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여기를 떠올리거나 단 하나의 지금을 떠올리는 순간,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영원한 행위를 중요시하지 않는 순간, 이 “나’와 이 “그분”은 결코 무언가를 함께할 수 없을 것이며, 하나가 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268)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2코린 13,1-13
마지막 경고와 인사
나는 이제 세 번째로 여러분에게 갑니다. “모든 일은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합니다.”
내가 두 번째로 방문하였을 때 전에 죄를 지은 이들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이미 경고한 것처럼, 지금 여러분과 떨어져 있으면서 다시 경고합니다. 내가 이번에 다시 가면 그냥 너그럽게 넘겨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증거를 여러분이 찾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대하실 때에 약하신 분이 아니라, 여러분 가운데에서 힘을 떨치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이제는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 계십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약하지만, 여러분을 대할 때에는 하느님의 힘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믿음 안에 살고 있는지 여러분 스스로 따져 보십시오. 스스로 시험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까? 깨닫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실격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어떠한 악도 저지르지 않게 되기를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합격자임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격자처럼 보일지라도 여러분만은 선을 행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무엇이든지 진리를 위해서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약하더라도 여러분이 강하면 우리는 그것으로 기뻐합니다. 바로 여러분이 자신을 바로잡기를 우리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떨어져 있는 동안에 이렇게 편지를 써 보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가서 곁에 있을 때,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권위를 가지고 여러분을 준엄하게 다룰 필요가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권위는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장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럼 형제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자신을 바로잡으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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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마르 10,46ㄴ-52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우리는 삶에 어렵고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 하느님께서 그것을 해결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내가 지닌 부족함과 약함을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당신 능력으로 채워 주시기를, 그래서 내 뜻과 바람을 이뤄주시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없애 주시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그런 기대는 예수 그리스도께도 그대로 투영되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르티매오도 초반엔 예수님께 그런 기대와 바람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구약 시대부터 메시아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자주 불리던 것으로, 다윗 임금이 이루었던 부강한 이스라엘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습니다. 즉 유다인들은 다윗 임금이 이루었던 위대한 성공과 업적을 그의 자손이 재현해 주리라고 믿었는데, 그런 믿음과 기대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 안에 담겨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던 그가 예수님께 가장 먼저 청한 것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자비’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만 했던 다른 이들과 달리, 바르티매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명확히 꿰뚫고 있었지요. 병을 치유해 주시는 것도,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도, 빵의 기적으로 궁핍한 이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것도 모두 우리를 보살피시고 살리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음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하느님의 그 자비를 온전히 믿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분 손길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한 채 하느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명하고 따를 수만 있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것들을 받아누리게 될 터이니 굳이 다른 걸 청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지요. 그래서 큰 소리로 반복해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만 청합니다. 하지만 그런 의중을 알 리 없는 이들에게는 그 외침이 그저 의미없고 시끄럽기만한 ‘소음’으로 들렸기에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반면에 예수님만은 그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기에 제자를 시켜 그를 당신 앞으로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말을 들은 바르티매오는 겉옷을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갑니다. 겉옷을 벗어 던지는 행동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그의 비장한 각오가 분명히 드러나지요.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에게 겉옷은, 특히 가진 게 별로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재산이었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따가운 햇볕을 가려주는 천막이 되고, 밤에는 매서운 추위를 견디게 해주는 이불이 되는, 어쩌면 바르티매오에게는 ‘전부’나 다름 없었던 것이 바로 겉옷이었을 겁니다. 그런 겉옷을 버리고 주님께 간 것입니다. 얼마 안되는 그 겉옷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데에 걸림돌이 될까봐, 겨우 천쪼가리에 의지하려는 마음 때문에 자기 마음이 주님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향하지 못하고 갈라질까봐 과감하게 내던져 버린 것이지요. 그에게는 이제 아무 것도 없지만 그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닙니다. 과감한 비움을 통해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잘못된 욕망을,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앉아서 남들 위에 군림하고 대접 받으려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쉽고 편한 것만 찾으며 ‘십자가’를 외면하려는 나약한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르시면 지체 없이 ‘벌떡’ 일어나 그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당신 앞으로 나아간 바르티매오에게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르셔서 물으신 게 아니라, 바르티매오가 마음 속에 품어야 할 참된 갈망이 무엇인지를 일깨우시기 위한 질문입니다. 바르티매오의 소망은 ‘다시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아나블레포’는 ‘위’라는 방향을 뜻하는 전치사 ‘아나’에 ‘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블레포’가 합쳐져서 ‘올려다보다’라는 뜻이 됩니다. 바르티매오는 잃어버린 시력을 회복하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시력을 회복한 그 눈이 다시 그전처럼 세상의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하늘을,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삶과 세상을 통찰하며 그 안에 깃든 하느님의 섭리와 신비를 알아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야 힘들고 괴로운 순간이 찾아와도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희망하며 끝까지 힘을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도 이 바르티매오처럼 ‘다시 보기 위해서’입니다. 세례 받고 난 후에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새로워진 시선으로 세상과 삶을 다시 보지 못하고, 욕망과 집착에 얽매인 세속의 시선으로만 바라보려고 하면 아무리 성당에 열심히 다녀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먼저 내가 바라보는 시선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 안에서 새로워져야 내 삶도, 내가 사는 세상도 그분 뜻에 맞게 변화되는 것이지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세상을 다시 보고자 했던 바르티매오는 그 믿음을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듯, 바르티매오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덕분에 구원받을 기회를 얻었지만 그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리기 전까지 그의 구원은 아직 ‘미완성’의 상태인 겁니다. 그 구원을 완성시키는 것은 머리로 이해한 계명과 주님 말씀을 삶 속에서 행하는 ‘실천’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라가야만, 주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그 과정에 따르는 고통과 시련을 기꺼이 감내해야만, 그에게 열린 구원의 가능성이 ‘하느님 나라’라는 완성된 상태로 실현되는 겁니다. 바르티매오도 그것을 알았기에 시력을 회복한 뒤에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합니다. 어렵사리 얻은 은총과 구원이라는 ‘새 술’을 ‘새 부대’에, 즉 주님 뜻을 충실히 실천하는 새로운 삶 속에 담은 것이지요. 그 ‘새 부대’ 안에서 주님께서 주신 ‘새 술’이 맛있게 익어갈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바르티매오를 본받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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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오직 주님만을 보아 온 열두 사도 /
박윤식 [big-llight] 241027. 19:04 ㅣNo.177116
‘예수님께서는 산에 가시어서 밤새워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중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는데, 베드로라고 불리는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던 무리 중, 당신 도구이자 하느님 나라의 일꾼으로 쓰시고자 열둘을 뽑으셨다. 사실 이들을 뽑기 전 밤새워 기도하셨단다. 사실 기도가 우리들 신앙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만 보아도 충분히 알게다. 아무리 많은 활동을 할지라도, 기도 없이는 사상누각일 수도. 어쩌면 불행할뿐더러 그 활동이 핀잔 받을 수도 있다. 사실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바쁘면 바쁠수록 혼자 조용히 하느님께 다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 내 삶과 신앙의 의미가 분명해질 수 있고, 내가 갈 방향을 찾을 수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주춧돌로 삼고자 제자들은 꼭 필요했을 게다. 그러기에 당신 도구이자 하느님 나라의 일꾼을 뽑으시려고 밤새워 가시면서 산에서 기도하셨다. 그리고 열둘을 정성껏 부르셨다. 그들의 출신과 성분을 보면 잘 알게다. 그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이들이다. 돈 많은 부자도, 잘 배운 지식인도 아니며, 고관의 자리를 차지했던 이는 더더욱 아니다. 유명세를 탄 이도 아니며, 사회의 지도자들도 아니다. 탁월하지도 특출하지도 않은, 그저 보통의 인물이다.
다만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모든 걸 버리고 맨몸으로 그분 따라나선 것뿐일 게다. 암튼 그들은 부활하신 그분 곁으로 다시 모여들어 끊임없이 회개하며 스스로를 정화해 나갔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한 이들에게 말씀 전하고자 목숨까지 내놓으며, 마침내 교회의 든든한 초석이 되었다. 알고 보면 예수님 부르심을 받는 것 자체는, 세속적으로 보면 기구한 운명의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부르심 받은 그들 대부분이 순교했고 비참한 최후였기에.
이렇게 그들은 자신의 평범한 삶을 포기하고 떠돌이로 살다가 순교를 해야만 했다. 교회의 역사는 어쩌면 이러한 부르심으로 시작되어, 지금도 계속 이어진다. 교회에 한 발 더 깊이 봉사하도록 부름 받은 우리들은, 당연히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부름을 받은 몸이다. 부르심 그 자체가 의미 있고 소중한 것은, 바로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려는 하느님의 큰 계획이 숨어 있기에.
사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을 손수 부르시고는 하늘의 별만큼 많은 후손을 약속하신 건, 세상의 모든 이가 어떤 차별도 없이 하느님 구원 계획에 초대되어 있음을 알려 주신 것일 게다. 그래서 그 많은 이들 가운데에서 열두 제자는 바로 우리 교회의 초석이다. 예수님 부르심에 직업과 온가족을 떠는 그들은 사도로 시작해, 오늘의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우리도 그들의 후예이다. 그러기에 오직 그분만을 염두에 두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향해 관심을 갖자.
열혈당원 시몬과 용감한 타대오 두 성인은 예수님의 친척일 가능성도 있다. 사실 이들을 포함해 제자들에 대해 우리는 그다지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은 삶 그대로 예수님 모습을 지녔지만,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업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별로 알려지는 것에는 관심 없이 스승님만을 바라보았기에. 그들은 다만 모든 이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자신을 바쳐진 이들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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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언젠가 성공회에서 옮겨 온 분의 세례와 견진 문제로 이리저리 알아본 적이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세례와 견진에 대한 증명이었습니다. 세례는 간단하였습니다.
누가 세례를 주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공회에서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는 양식을 사용하고 있으니 문제가 없었습니다.
가톨릭 교회로 일치되는 예식도 이미 거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견진은 어떻게 될까요?
의문스럽기는 한데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할 수는 없어서 교회법, 교리, 전례 전공자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교회법을 전공한 분이, 교황청에 있는 친구에게까지 물어 답을 주었습니다.
견진을 준 주교의 성품이 사도 계승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 견진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이천 년 전에 살았지만 우리와 동떨어져 있는 이들이 아닙니다.
사도 계승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집니다.
우리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오래전에 살았던 조상이 있고 우리가 그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듯이,
그렇게 우리는 사도들에게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에페소서는 우리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2,20)이라고 말합니다.
족보에서 첫 조상이 다르면 다른 집안이 되듯이, 하나의 집안인 교회는 모두 사도들을 기초로 하고,
그 기초는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습니다.
사도들에게서 전하여 오는 신앙을 잘 간직하면서,
모퉁잇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기초인 사도들과 결합하여 “하느님의 한 가족”(에페 2,19)인 교회의 일치를 지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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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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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도
제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군중을 이루었다'는 것으로
제자는 우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온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말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두
예수님의 제자라고 부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도라는 단어는 다릅니다.
우리말로 사도라고 변역된 단어는
'보내다', '파견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사도란
보내진 사람, 파견된 사람을 뜻합니다.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들을 말한다면
사도는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둘을 뽑으시어
이제 그들을 당신의 협력자로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당신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파견되신 분이 이제 또 다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 같이 부족한 인간들이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하느님의 일을 하기에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당신 일의 동반자로 삼으십니다.
그것은 그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들이
그들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을 파견하신 예수님에게서
더 나아가 예수님을 파견하신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계신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음이 알려집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우리 역시 사도들만큼이나
부족한 모습을 가지고 있고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기에도 부족한 모습이
많이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뜻을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우리를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통해 드러나시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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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간절한 기도와 그 기도에 걸맞은 과감한 결정, 그리고 단 한 치 오차도 없는 실행!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을 지속해나갈 직제자 선발이라는 큰일을 앞두시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큰 영감과 교훈을 선물합니다.
혹시 지금 인생의 중차대한 일을 앞두고 계십니까? 결혼이나 새로운 출발, 중요한 결단이나 큰 수술 앞두고 계십니까?
아니면 견딜 수 없는 큰 고통이나 시련 앞에서 서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잘 따라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중요한 일을 목전에 두셨을 때는 어김없이 외딴 곳으로 가셔서 홀로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기 위해 피땀까지 흘려 가시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입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기로에 서 있을 때, 사방이 적군으로 둘러쌓여 있다고 느껴질 때, 아무리 생각해도 빠져나갈 탈출구가 없다고 여겨질 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집중적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과정은 과감하고도 용기있는 결단과 실행입니다.
간절한 기도와 신중한 식별 작업 끝에 이루어진 결정이라면 흔들리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결정한대로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새워 기도하신 후 발표한 사도들의 명단을 들은 군중은 아연실색했습니다. 다들 예상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기본 교육을 잘 받은 엘리트 중에 제자들을 선발하리라는 것을. 적어도 당대 ‘인싸’ 그룹이었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을 중심으로 제자단을 구성하시리라 추측했습니다.
그런데 선발된 이름 하나 하나가 호명될 때 마다 다들 뒤로 넘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의 어부들, 열혈당원, 세리, 죄인....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번 선택하신 결정을 뒤엎지 않으셨습니다.
그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선발된 열두 사도들과 함께 평지에 내려서시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장엄하고 멋진 장면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갖가지 질병과 악령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말끔히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떨어지셔서 간절히 기도하신 다음, 그 기도에 걸맞은 과감하고도 단호한 결정, 그리고 단 한 치 오차도 없는 실행, 바로 예수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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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제자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두 사도는 열두 사도 중의 두 사도로서, 시몬은 사도들의 이름 목록에서 열한 번째에 놓인 사도이고, 가나 출신으로서 유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혁명당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성 유다는 타대오라고도 하며 최후 만찬 때 주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요한 14,22) 여쭈어본 사도였다.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계속할 제자들을 선택하신다. 제자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항상 사람들과 사귀시며 함께 일하시고 하시는 일에 사람들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의 모습들을 보면 서로가 완전히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모두가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한 공동체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신다. 이것은 각자가 모두 다르지만, 주님 안에, 주님의 사랑 안에 하나가 되어 당신을 각자가 처한 삶의 장에서 증거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사도로 선택받은 이들이 그렇게 특별한 교육도 받은 일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것을 보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인간의 힘과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심으로써, 인간이 하느님과 같이 되게 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이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인간의 신분으로 당신을 낮추셨기에, 인간은 하느님의 아들과 동등한 자격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이 이미 하느님의 크신 은총인데, 그것이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것으로 증명이 된 셈이다. 예수께서는 당신 사업의 중책을 맡기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13절). 제자는 본시 배우는 사람이요, 스승이란 가르치는 분이다. 제자의 본분은 스승에게 배우고, 스승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말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언제나 배우고 따르며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오늘날 부름을 받은 우리의 할 도리이며, 예수님께서 오늘의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다. 예수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란 예수에 대해서 언제나 더욱더 배우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뵐 때까지 언제나 신앙의 진리를 들으려고 하는 배우고자 하는 제자의 자세를 항상 가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열두 사도가 믿음에 있어서 또 실천적인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훌륭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흠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 자신에게도 그런 결점은 있다. 그러나 나를 선택해 주신 그분께 감사드리며 우리도 사랑의 삶을 산다면 우리도 그분을 닮을 수 있다. 주님의 제자의 삶이란, 우리 신앙인들의 삶이란 바로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함께 생활하고 “그분처럼”(1요한 3,2) 되는 것이다. 항상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제자로서의 신앙인이 되기를 힘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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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왜 위대한 성인들은 책이 아니라 제자를 남기려 했을까?
오늘은 성 유다 타대오와 성 시몬 사도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12명의 사도를 뽑으시고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시는 내용입니다.
중요한 점은 사도를 뽑으시고 복음 전파를 시작하셨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이 살다 보니 생긴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제자들을 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셨던 것입니다.
복음을 더 많이 전파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유럽이나 아시아처럼 더 넓은 곳으로 가셨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가 중요한 이유를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마리나 채프먼은 딸 바네사 제임스(Vanessa James)와 ‘이름 없는 소녀’(The Girl with No Name)라는 책을 공동 집필하였습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유괴범들에게 버림받은 후 콜롬비아 정글에서 꼬리감는원숭이 무리에서 살았습니다.
그녀는 원숭이 그 자체였습니다.
사냥꾼들에게 발견되고는 사창가에서 살았습니다.
나중엔 탈출하여 결혼하고 정상적인 가정을 꾸렸습니다.
누구나 성장은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냐에 따라 그 사람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가톨릭교회 공동체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 우리가 구원에 이르도록 처음부터 교회를 만들 생각으로 열두 사도를
뽑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가 된 싯다르타도 모두 책을 한 권도 쓰지 않고 제자 공동체를 만드는 데 생을 바쳤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이 알았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깨달음을 책으로 전달하는 것보다 제자 공동체를 통해 전달하는 게 더 유익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제자 공동체를 세우려 했던 더 큰 이유는 그들 자신의 이익 때문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2015년에 방송된 KBS 인생극장 ‘뇌 병변 장애 부모가 삼 형제를 키우는 방법:
그렇게 부모가 된다’라는 내용은 많은 시청자에게 큰 감동을 안겼습니다.
자기 한 몸조차 가누기 힘든 두 장애인이 결혼하고 아기를 낳겠다는 꿈을 가졌을 때
가족들도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삼 형제를 낳았고 누구보다 자녀들을 잘 키우고 있습니다.
이들은 나라에서 나오는 돈으로 살아도 어느 정도는 살림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부는 함께 일합니다.
아버지는 말합니다.
“나중에 아이들이 ‘우리 아버지는 백수였어!’라는 소리를 하지 않기를 바라요.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훌륭한 분이셨어.’라는 소리를 듣기를 원해요.”
어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내가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키우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천덕꾸러기로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이들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어요.”
공동체를 낳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면 둘이 사랑을 해봐야 그렇게 남자와 여자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녀를 낳아도 그렇습니다.
자녀를 낳지 않으면 사람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꼭 결혼해야만 자녀를 낳는 게 아닙니다.
제자들도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아이들아!”라고 부르기도 하셨습니다.
자녀를 낳음, 곧 제자들의 공동체를 세움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성 베네딕토는 세상에 사는 의미가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라는 것을 3년 동안 굴에서
기도한 끝에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그 이전부터 그러한 공동체를 낳으려는 이유로 자신을 갈고닦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첫 정식적인 수도회가 탄생합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는 결혼하기 전부터 자녀를 정신적으로 잉태하고 자녀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려고 준비합니다.
그런 부모와 그냥 살다가 우연히 결혼해서 아기를 낳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부모는 다릅니다. 낳으려는 목적으로 살아야 나도 성장하고 완성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어떤 공동체를 낳고 기르고 파견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살아갑시다.
나의 성장과 완성이 굉장히 빠르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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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열정>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루카 6,12-19).”
1) ‘열혈당’은 로마제국을 상대로 독립투쟁을 했던 단체인데, 우리나라의 의열단과 비슷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열혈당원으로 기록되어 있는 시몬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열성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다가 그 열성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으로, 또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변화된 사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 ‘열정’(뜨거움)입니다.>
열정은,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는 ‘일편단심’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오로지 예수님의 뒤만 따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래서 실제 삶에서 그대로 실행하면서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인의 열정입니다.
열정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헌신’입니다.
모든 것을 다 바친다는 말에서 ‘동전 두 닢을 봉헌한 가난한 과부’가 연상됩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3-4).”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내는 것은 ‘미지근한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바치는 것은 ‘뜨거운 것’입니다.
열정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인내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이 말씀에서 ‘끝까지’는 ‘죽을 때까지’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인은 가다가 힘들면 중단하지만,
진짜로 뜨거운(열정적인) 신앙인은 힘들어도 끝까지 갑니다.
2) 사도들이 처음부터 완벽했던 것은 아닙니다.
미숙한 점도 있었고, 부족한 점도 많았고, 흔들리기도 했고, 흩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계속 단련되었고, 강해졌고, 결국 신앙과 충성심과 열정과 사랑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는데, 그 모습은 오히려 다른 사도들의 신앙과 충성심과 열정을 부각시키는 일이 되었습니다.
<등불 빛을 더욱 밝게 보이게 하는 그림자 같은 일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사도들의 명단 뒤에 기록되어 있는 군중의 모습을 보면, 병을 고치려고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쓰는데, 그 ‘간절함’도 겉으로는 열정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병을 고친 다음에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신앙인이 된 사람도 분명히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병의 치유에만 만족하고서 그냥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간절함’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열정이 아니라, 병고에서 해방되기만을 바라는,
단순한 소원일 뿐입니다.
<물론 그 ‘간절함’ 자체를 무시하거나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희망이고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신앙인은 거기서 멈추지 말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완성이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입니다.>
4) 주님께서 에페소 신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버리겠다(묵시 2,3-5).”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겉으로는 여전히 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는 한데, 생동감도 없고, 활기도 없고, 기쁨도 없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의 사랑도 식고 열정도 식었기 때문입니다.
습관적으로, 또는 의무감으로, 그 동안 하던 대로 하면 잘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그것을 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기쁨이 없다는 것은 억지로 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모두 ‘순교’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은, 주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끝까지 식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식어버린 사랑과 열정을 다시 뜨겁게 하는 방법은 ‘회개’, 그리고 ‘다시 뜨거워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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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6,12-19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어떤 대상의 외적인 모습이 극적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두고 ‘탈바꿈’했다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말로 ‘가면’을 뜻하는 ‘탈’에 ‘바꾸다’라는 동사가 붙어서 배우가 탈을 바꿔쓴 것처럼 외형이 극적으로 변화되었음을 뜻하는 겁니다. 탈바꿈하기 전에는 여러가지로 미숙하고 불완전한 모습이었지만, 탈바꿈을 통해 변화되고 성숙해져 완전해졌다는 것이지요. 가톨릭 교회는 오늘 성 시몬과 성 유다 두 사도의 축일을 함께 지냅니다. 두분의 축일을 함께 기념하는 것은 두 분 사이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두 분이 함께 페르시아로 선교여행을 떠났다가 함께 순교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 분이 예수님의 친척이었다는 점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 두번째 공통점을 가지고 ‘탈바꿈’이라는 주제로 묵상해볼까 합니다.
두 분이 예수님의 친척이었다는 점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제자로서 사는데에, 더 나아가 그분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도’로서의 소명을 다하는데에 플러스 요소였을까요? 아니면 마이너스 요소였을까요? 아마 제자로서의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에는 꽤나 큰 마이너스 요소였을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유년시절을 보내며 쌓인 기억들 때문에 마음 속에 ‘인간 예수’의 이미지가 깊이 각인되었을 것이고, 거기에 유다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그리스도’에 대한 고정관념이 더해져 자기 친척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받아들이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쓴 적 없는 새하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이미 진한 유화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 가득차 있는 캔버스에 새 그림을 그리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먼저 흰색 물감으로 캔버스 전체를 여러 번 덧칠하여 다시 새하얀 상태로 만들어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시몬과 유다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자 사도가 되기 위해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했을 겁니다. 자기 마음 속에 이미 진하게 그려져있는 ‘혈연’이라는 그림을 믿음이라는 흰색 물감으로 여러 번 덧칠하는 동안 여러 의구심과 회의, 질투와 편견 등으로 마음이 심란해졌겠지요. 그런 힘들고 괴로운 과정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기도’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혈연으로 엮인 자신들을, 여러 구설수와 논란에도 불구하고 ‘사도’로 뽑은 것은 밤을 새워 하느님께 기도하시면서 그분 뜻을 마음에 받아들였기 때문임을 자기들 두 눈으로 직접 보아서 잘 알았기에, 자기들도 예수님을 사촌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사람이 아니라 주님으로 받아들이게 해달라고, 내적으로 치열하게 싸우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힘으로 사도로 탈바꿈 할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혈연에 얽매이지 않고 시야를 영적인 관계로까지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참된 관계를 인간적인 기준과 조건 안에서 맺으려 하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에서 제자로, 제자에서 사도로 탈바꿈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도 이렇게 탈바꿈해야 합니다. 주님을 알기 전에는 세속적인 성공에 얽매여 살았다면, 그분을 알게 된 후에는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복음에 기대어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알기 전에는 하느님께 받을 벌을 두려워하는 종처럼 살았다면, 그분을 알게 된 후에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릴까봐 염려하는 그분 자녀로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통해 조금씩 하느님을 닮아감으로써 그분을 닮은 거룩한 존재로 탈바꿈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이자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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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으시는 큰 일을 두시고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리고 제자들 가운데 열둘을 뽑으시지요. 예수님께서 새로 뽑은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시니 많은 군중이 모여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루살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도시에서도 사람들이 왔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당신의 소명인 말씀선포와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루카 6,18)
병자들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러한 그들도 그들의 원대로 병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의 이러한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는 제자들은 훗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것들을 그대로 이행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미래 교회를 내다보시며 당신을 협력할 제자들이 필요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선포를 하는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 위에
세워진 교인들의 위치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에페 2,20-21)
이 건물을 성령을 통하여 성장하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신비체입니다.
로마를 중심으로 성장해온 교회는 이 신비체를 라떼란성당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의 바티칸으로 옮기기 전까지 라떼란 대성전은 로마교구의 중심이면서 또한 전 교회의
중심이기도 했습니다.
성당 건물의 골조가 되는 기둥들은 12사도들로 되어 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 대신 사도 바오로가 들어 있습니다. 제대의 성체를 중심으로 천정은
주님의 십자가와 심판자로 오시는 예수님의 재림의 모습이 모자이크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열두 사도들 기초 위에 세워진 교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기 전에 밤 새워 기도하신 것을 우리도 본받아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도록 간절한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만지려고 모여드는 군중은 우리에게도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때로 지치고 흩어지는 우리 자신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주님을 만지고 또 주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적으로 한계와 부족함을 담고 있는 사도들을 당신의 협력자로 뽑으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부족한 나 자신을 부르시고 교회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를 또한 원하십니다.
주님과 일치하며 멋진 하루를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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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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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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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우리의 날들을 새롭게 하는 삶
<2024.10.28> 아침을 여는 묵상 (애 5:11~22절)
❝우리의 날들을 새롭게 하는 삶❞
❚ 고통을 겪는 원인이 범죄에 있음을 깨달아 회개하며, 자신들의 날들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 새롭게 하여 회복되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여 영적 질서를 회복해야 합니다(11~14절).
예루살렘은 모든 질서가 무너지고 극심한 혼란과 함께 무법천지로 변해 버렸습니다. 거룩한 성 시온에서 부녀자들은 겁탈을 당합니다. 청년들과 아이들은 중노동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장로들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노인은 더 이상 대접을 받지 못하며, 청년들은 노래를 부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사람들의 삶은 황폐해졌습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해 거룩함을 잃어 버리고 세상의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귀를 닫아버렸고, 교회 성장이라는 명목 아래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던 것입니다. 정말 교회 안에 소망이 있는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이제라도 주님의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여 회개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말씀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뒤죽 박죽 되어버린 교회의 영적 상태를 다시 새롭게 질서를 세워가야 합니다. 비단 교회뿐만 아니라 작금의 사회적 분위기를 통해 이 나라와 민족 가운데에도 공의와 정의 그리고 순결이 바로 세워져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여 영적 질서를 회복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여 영적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15~18절).
그들의 범죄 함의 결과 기쁨이 사라졌고, 춤은 슬픔의 통곡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15절). 아울러 과거에 남유다가 누렸던 찬란한 영광을 상징하는 면류관이 떨어졌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의 원인에 대해 시인은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16절)이라고 인정합니다. ‘이러므로...’(17절)... 희망을 잃고 낙담하고 좌절하여 감당하지 못할 슬픔의 눈물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예루살렘은 황폐해졌습니다(18절).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요, 바로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한 만큼 이제는 현실을 원망하거나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소망을 가지고 새롭게 세워가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적 기쁨을 되찾아야 합니다. 순종의 자리로 나아갈 때, 우리 교회에 주시는 기쁨과 영광을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나 역시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주님의 다스림 앞에 순종함으로 삶의 기쁨을 회복하여 주의 영광을 누리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여 영적 소망을 회복해야 합니다(19~22절).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참담한 심정을 가지고 있었던 예레미야는 이제 현실을 직시하며, 하나님은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영원무궁함을 송축합니다(19절). 비록 현실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의심이 되고, 소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20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들을 다스리고 계심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민족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돌이키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스라엘이 옛적 같이 새롭게 회복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 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22절). 예레미야는 예전과 같이 새로워지기를 간구하면서 하나님께 돌아가겠노라고 결단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회개를 통해서만이 지금의 현실의 상황을 바꿀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죄악을 버리고 돌이키는 참된 회개만이 무질서하게 변한 우리의 영적 상태와 소망이 사라진 것 같은 암담한 현실을 딛고 회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과거에 열정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던 때를 추억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제는 추억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열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온 마음과 뜻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을 찢는 회개를 통해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여 영적 소망을 회복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죄악으로 인해 주어진 하나님의 징계임을 인정하여 진정한 회개를 통해 회복시킬 것을 기대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마음을 찢는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므로 영혼을 새롭게 하는 영적 소망을 꿈꾸며 살아갈 수 있기를(애 5:11~2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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