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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 《하얼빈》--- 김훈
《하얼빈(哈爾濱)》은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이 조선통감을 지낸 일본제국의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곳으로 만주에 있는 지명이지만, 작가 김훈의 장편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소설은 안중근 열사의 일대기거나 안중근의 기개와 대한 독립에 대한 절의를 보여 주는 것이겠으나, 구한말 대한제국의 슬픈 역사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할 것 같다. 인터넷에서 책의 서평을 통해 내용을 적고 있으므로 당시의 슬픈 역사를 더듬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오래전에 《칼의 노래》《남한산성》등을 통해 작가는 글을 ‘예리한 칼로 베는 듯하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듯이 그 작가를 다시 만나 반갑다.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세계열강들 속에서나마 나라 기틀을 바로 잡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제국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고종을 퇴위시키고 차남 이척(李拓)을 그 자리에 앉혔다. 그가 순종(純宗)이다. 순종의 이복동생 이은(李垠)은 황태제이나, 황태자가 되어 실상은 인질로 유학을 명분으로 이토를 따라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메이지(明治)천황을 알현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도쿠가와 막부를 몰아내고 1868년부터 1912년까지 이어진 메이지 시대는 ‘聖人南面而聽天下 嚮明而治(성인남면청천하 향명이치)-성인이 남면해서 천하의 소리를 듣고 밝음을 향해 나아가며 다스린다’는 『역경(易經)』의 경구를 치세의 연호로 삼은 것이다.
안중근이 ‘도마’, 그의 아내 김아려는 ‘아그네스’라는 세례를 받고 둘째 아들을 얻었을 무렵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를 누린 기간은 이제 겨우 20여 년이 지났다. 서양인 신부들은 조선 땅에서 지난 백여 년 동안 벌어졌던 천주교 박해와 순교의 역사를 거룩하고도 두렵게 여겼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 아니고서는 그토록 치열하고 순수하게 죽음에 죽음을 잇대어 신앙을 증거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 낙후된 나라에 쏟아진 축복이었다. 교회는 세속을 지배하는 거대한 외세를 포함한 세력들과 부딪치게 되는 사태를 피해 가려 했다. 순교의 역사가 주는 교훈은 성聖과 속俗에 두루 걸쳐 있었고 교회는 양쪽의 교훈을 무언중에 감지하고 있었다. 스물일곱에 상해에서 돌아온 안중근은 빌램 신부에게 아들의 세례를 맡겼다. 빌램 신부가 물었다.
“다시 대륙으로 나가려느냐?”
“………”
안중근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중근은 황해도 신천에서 빌램에게 세례를 받고 입신(入信)했다. 그때 안중근은 열아홉 살이었고 아들의 세례를 받던 날 안중근은 자신이 세례를 받던 날의 기쁨이 부활하기를 기도했다.
“너의 아이는 하느님의 자식이다. 아들을 보니까 어떠냐?”
“아들이라고 집안 어른들이 기뻐하십니다.”
1년 전 안중근이 성당으로 찾아와 상해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빌램은 왜 가는지 묻지 않았고, 말리지도 않았다. 빌램은 안중근이 세속으로 나아가려는 것을 알았다. 그때 빌램은 “너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다.
이토가 일본 추밀원 의장직에 내정되면서 후임 통감에는 소네(曾禰)가 왔다. 이토 송별연은 경복궁 경회루에서 열렸다. 이토는 연미복에 훈장을 달았고 주둔군 참모들은 군복에 칼을 찼다. 조선 대신들 몇몇의 전별사가 끝나고 이토가 연단에 올랐다.
“조선은 중국을 섬겨왔으므로 열복(悅服)이라는 말을 알 것이다. ‘기뻐서 스스로 따른다.’는 뜻이다. 이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고 동양 평화를 실현하려면 조선인들의 열복이 필요하다. 열복은 일본제국의 틀 안에서 순입되는 것이다. 열복은 문화개화의 입구고, 동양 평화와 조선 독립의 기초다.”
이토는 건배의 잔을 올리면서 “엣푸쿠, 엣푸쿠(悅服)”을 외쳤다. 이어 조선 대신들이 잔을 올리고 “카이카, 카이카(開化)”를 외쳤다.
두만강 연안에서 군대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하던 안중근에게 이토가 만주로 온다는 소식은 귀동냥으로 들려왔다. 일본신문은 조선통감을 내놓고 한직인 추밀원 의장 자리로 옮겨가서 풍류를 즐기기 위해 만주로 간다고 했으나, 러시아 신문은 만주에 철도를 시찰하기 위한 것으로 그 목적은 만주를 경영할 구도를 짜려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10월 중순 안중근은 하숙집에서 낡은 신문 조각 하나를 보았다. 1909년 2월 발행된 것으로 여덟 달 전의 것이었다. 거기에 이토와 순종이 고려 왕궁, 폐허가 된 만월대를 순행하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계단 밑 폐허가 오백 년 전이 아니라 오늘 아침의 것처럼 보였다. 안중근은 일산(日傘)밑의 이토를 유심히 살폈다.
안중근은 우덕순을 찾아갔다. 지난해 안중근이 연해주 일대에서 모집한 병력으로 두만강을 건너 조선땅으로 진공할 때 우덕순은 총을 들고 따라왔다. 그때 안중근은 의군 참모중장 직위를 맡고 있었는데, 직위가 너무 커서 민망하다고 느꼈다. 회령에서 일본군과 부딪쳐 패전할 때 우덕순은 안중근 부대의 대원이었다. 우덕순은 말이 없었고 시국담에도 끼지 않았다. 우덕순은 제 손으로 밥을 빌어먹었고 혼자 싸우는 사람처럼 보였다.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와보니 우덕순이 먼저 와 있었다. 우덕순은 기묘생 토끼띠로 안중근과 동갑이었다. 둘은 술집으로 향했다. 안중근이 주머니에서 신문을 꺼내 보여 주었다.
“이토가 온다는 애기냐?”
“그렇다. 하얼빈으로 온다.”
등대 불빛이 술집 안으로 들어왔다. 불빛이 스칠 때 우덕순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우덕순과 안중근은 삼등 객실에 나란히 앉았다. 객실 안에는 러시아인, 중국인, 일본인, 한인들이 섞여 있었다. 다들 두꺼운 중국옷을 입고 있어서 누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열차는 마흔 시간 걸려 22일 밤 9시 하얼빈에 도착한다고 차표에 적혀있었다. 열차는 어둠 속을 달렸다. 차창에 물방울이 달렸고 먼 들의 가장자리로 불빛 몇 개가 흘러갔다. 열차 안에서 안중근과 우덕순은 이토를 쏘는 일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안중근은 열차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여러 갈래의 철길이 망막에 떠올랐다. 권총은 외투 안주머니 속에 있었다. 안중근은 심장을 누르는 권총의 무게를 느꼈다. 권총은 묵직했으나 무겁지는 않았다.
둘이 하얼빈으로 가고 있을 때 이토가 탄 열차는 여순역을 출발해 봉천정류장인 요양역에 도착했다. 봉천에 주재해 있던 일본 총영사, 경찰서장, 청나라 영접사들이 이토를 맞았다. 저녁에 궁내성 비서관이 들어와 남은 일정을 보고했다.
-23일 총영사 주최 환영 만찬회 후 1박
-24일 공업시설 및 청나라 고궁 시찰
-25일 오전 11시 봉천 출발, 오후 7시 장춘 경유
-26일 아침 9시 하얼빈역 도착
이튿날 이토는 청나라 개국 초 황제의 능묘를 시찰했다. 능묘는 커서 둘레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능묘를 걸어서 한 바퀴 돌고 의자에 앉은 이토에게 청나라 황제의 치세를 청나라 관리가 중국말로 설명했고, 통역이 이를 옮겼다. 이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좋은 무덤이다. 좋은 무덤이야, 청이 큰 나라임을 알겠다.”통역이 이를 청나라 말로 옮겼다. 청나라 관리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에 이토가 탄 특별열차는 봉천을 떠나 하얼빈으로 향했다.
이토를 환영하는 주악이 울리고, 러시아 재무장관 체콥초프가 객실로 들어가 이토를 대동하고 나왔다. 하얼빈은 러시아 관할이었고, 러시아인과 일본인 환영인파 틈새로 이토가 보였다. 이토는 조준선 위에 올라 있었다. 오른손 검지 둘째 마디가 방아쇠를 직후방으로 당겼다. 손가락은 저절로 움직였다. 두 번째 총알을 쏠 때 안중근은 이토의 몸에 확실히 박히는 실탄의 추진력을 느꼈다. 가늠쇠 너머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이토의 모습이 꿈속에서처럼 보였다. 러시아 헌병들이 안중근의 몸을 덮쳤다. 안중근은 외쳤다.
“코레아 후라”
안중근은 쓰러지면서 총을 떨어뜨렸다. 탄창 안에 쏘지 못한 한 발이 남아 있었다.
“이름, 나이, 직업을 말하라.”
“이름 안응칠, 나이 서른한 살, 직업은 포수다.”
“그대는 한국 신민인가?”
“그렇다.”
“부모 처자가 있는가?”
“없다.”
“일정한 거처나 주소가 있는가?”
“없다.”
“토지나 가옥이 있는가?”
“없다.”
“학문을 배웠는가?”
“배우지 않았다.”
“글을 아는가?”
“조금 안다.”
“평소에 존경하는 사람이 있는가?”
“없다.”
“적대시하는 사람은 있는가?”
“한 사람 있다.”
“그게 누구인가?”
“이토 히로부미다.”
“왜 이토 공작을 적대시하는가?”
“그 이유는 많다. 지금부터 말하겠다.”
미조부치는 안중근을 신문하기가 수월했다. 안중근은 유리한 정황을 들이대지 않았고, 불리한 정황을 아니라고 우기지도 않았다. 간단히 묻고 짧게 답하니 말이 깔끔했다. 안중근도 대답하기 싫고 대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에 말을 아낄 수 있었다.
대련으로 가는 열차는 이토가 살해된 6일 뒤 11월 1일 아침에 하얼빈을 떠났다. 객차 안에서 안중근은 묶여 있는 우덕순과 정대호를 보았다. 정대호는 안중근이 거사 전에 가족들을 만주로 데려오라고 부탁했던 사람이었다.
미조부치는 다섯 살인 안중근의 큰아들 분도에게 안중근의 사진을 보여 주며 말을 걸었다. 분도가 말했다. “이것은 나의 아버지다. 어머니가 아버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간다고 했다.”미조부치는 이를 기록하게 했다. 이틀 후 미조부치는 다시 김아려를 불렀다.
“그대의 남편은 안응칠이 아닌가?”
“아니다.”
“그대 자식에게 들으니 아버지가 있다고 하던데?”
“내 남편은 죽었다.”
“그대 자식이 안응칠의 사진을 보고 아버지라고 했다.”
미조부치는 밧줄에 묶인 안중근의 사진을 김아려에게 보여 주었다.
“봐라, 남편이 이처럼 체포되었다. 남편이 아닌가?”
“내 남편은 죽었다. 남편은 없다.”
미조부치는 김아려가 안중근의 아내라는 심증을 굳히고 신문을 끝냈다.
법정에서 재판장 마나베가 안중근에게 물었다.
“그대는 공명정대한 일을 한다면서 어째서 검찰관 신문 때 공모자 우덕순의 일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는가?”
“우덕순이 말하기 전에 내가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일만 말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질문은 피고인에게 접수되지 않은 채로 튕겨져 나왔다. 질문이 답변을 누르지 못했다.
“어디를 겨누었는가?”
“심장을 겨누었다.”
“거리는?”
“10보 정도였다.”
“이토 공의 수행원에게도 쏘았는가?”
“누가 이토인지 몰랐기 때문에 이토의 오른쪽도, 왼쪽도 쏘았다.”
“성공하면 자살할 생각이었나?”
“아니다.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는 단지 이토를 죽인 것만으로는 죽을 수 없다.”
“범행 후 도주할 계획을 세웠는가?”
“아니다.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니므로 도주할 생각은 없었다.”
질문과 답변이 부딪쳐서 부서졌고 사건의 내용을 일정한 방향으로 엮어나가지 못했다. 피고인은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도 힘주어 말했다. 진술은 유불리를 떠나있었다.
“유리한 증거가 있으면 말하라.”
안중근이 말했다.
“없다.”
우덕순도 말했다.
“없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910년 2월 7일, 8일, 9일, 10일 12일, 14일에 열려 일주일 만에 끝났다. 넷째 날 검찰관 미조부치가 구형했고, 다섯째 날 일본인 국선변호인의 변론이 있었고 여섯째 날인 14일에 재판장 마나베가 선고를 했다. 국선변호인 미주노는 피고인의 범행은 세계의 대세를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이며, 피고인이 일본 같은 문명국에 태어나서 좋은 교육을 받았더라면 이러한 오해를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감형 사유가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판장은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우덕순에게는 3년 형에 처한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우덕순과 만나 이토를 쏠 때까지 준비도 부족했고 실수도 많았다. 어쩌자고 그렇게 허술했는지 생각하면 진땀이 나고 숨이 막혔다. 잡히고 나니 돌아다닐 일이 없어서 남은 일들을 차분하게 정리해나갈 수 있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사형 집행일이 언제인지 알 수가 없어서 조바심이 났다. ‘언제 죽일 거냐’고 묻기도 좀 그랬다. 고등법원에 항소하면 시간은 다소 연장되겠지만, 길지는 않을 것이었다.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했다. 쓸데없는 일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항소를 포기하자 남은 일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안중근은 면회 온 동생 정근에게 자신에게 세례를 준 빌램신부를 죽기 전에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다. 동생은 이 말을 황해도 신천 청계동 교회 빌램신부에게 전했다. 빌램은 이 사실을 조선천주교 대목구장 뮈텔에게 편지로 알렸다. 뮈텔은 빌램의 출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안중근은 제 발로 교회 밖으로 나가서 죄악을 저지른 자이다. 안중근은 이미 교회와 관련이 없다. 그가 정치적 명분을 철회하고 자신의 몽매함을 반성하고 그 실행의 결과를 뉘우치는 뜻을 공개적으로 표명한다면 그의 마지막을 도와줄 방도를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안중근에게 그것을 설득하려면 안중근도 괴롭고 말하는 사람도 괴로워서 될 일이 아니다. 나는 깊이 생각해서 결정했다. 출장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빌램은 뮈텔의 편지를 받고도 자신은 여순으로 가겠다고 뮈텔에게 전보 보내고 조선을 떠났다.
빌램이 다녀간 나흘 뒤 안중근은 『안응칠 역사』라는 원고를 끝냈다. 이토를 죽이는 과정과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서 빌램을 만나 고해성사를 받는 대목까지 나흘 전까지의 일들을 적었다. 안중근은 글 마지막에 “1910년 3월 15일 여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은 쓰기를 마친다.”고 덧붙였다.
옥리가 안중근의 겨드랑이를 팔에 끼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 안중근의 목에 밧줄을 걸고, 교수대 바닥을 밟았다. 바닥이 꺼졌고 안중근의 몸이 허공에 매달려서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십일분 후 검시의가 절명을 확인했다. 안정근, 안공근이 감옥 앞에서 시신을 돌려달라고 했다. 여순감옥의 전옥 구리하라는 옥리를 보내 “불가하다”고 통보했다. 옥리들이 안중근의 몸을 마차에 싣고 감옥 공동묘지에 묻었다. 하관 때 비가 내렸고 문상객은 없었다. 관동도독부는 안중근의 사형 집행날짜를 3월 25일로 정해놓고 있었으나 통감부가 25일은 한국 황제의 생일이므로 날짜를 바꾸어야 한다고 감옥에 전보로 알렸고, 집행은 하루 연기한 3월 26일이었다.
3월 25일은 서른일곱 살 생일을 맞은 순종 황제는 아침에 덕수궁으로 가서 태황제 고종에게 인사를 드렸다. 산수유와 매화가 잇달아 피어 창덕궁은 화사했다. 3월 27일은 부활절이었다. 빌렘 신부는 아침에 신도들에게 전날 저녁에 안중근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을 전했고 안중근의 유언인 ‘나의 시체를 하얼빈에 묻어달라’고 한 말도 전했다. 그러나 안중근의 시체는 하얼빈으로 가지 못하고 여순감옥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빌램은 신자들과 함께 기도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망자에게 평안을 주소서”
작가 「후기」에는 소설이 감당하지 못한 일들을 적는다고 하면서 거사 이후 안중근의 가족과 문중의 인물들이 겪어야 했던 시련과 굴욕, 유랑과 이산에 관한 이야기를 적었다. 그것을 여기에 다 옮길 수는 없어서 소설 처음에 이토를 따라 일본으로 갔던 이은에 대해 살펴본다. 영친왕 이은은 1910년 한일합병으로 국권이 상실되고 순종이 폐위되면서 황태자에서 황세제로 격하되었고, 1920년 일본 황족 나시모 토노미야의 딸 마사코(方子)와 결혼했다. 그는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장 지위에 올랐으며 1963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주선으로 이방자와 함께 귀국했다. 하지만 심한 뇌혈전증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진(晉), 구(玖) 두 아들을 두었으며 진은 어려서 죽었으나 구는 미국 여인과 결혼해 미국에 귀화했다.
대구 달성공원에는 이토와 순종이 심었다는 가이즈카 향나무 두 그루가 있다. 이것들은 두 사람이 1909년 1월 7일 대구를 방문하여 심은 것으로 이해 1월 1일 새로 개통한 경부선 철도를 타고 와서 심은 것이다. 이것을 뽑아버려야 한다. 그냥 두어야 한다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데,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는지는 전문가와 시민들 의견을 모아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전에 중앙청을 없애듯이 아주 없애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슬프고 안타까운 역사도 역사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