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는 실학은 기본적으로 한국사 교과서 또는 개설서를 통해 전달되는 조선 후기의 특정한 사상 조류에 관한 통설적인 역사 지식이다.
그 기본적인 착상은 조선 후기 유학에서 구학문과 신학문의 대립에서 비롯된다.
조선시대 주자학이라는 구학문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아와 세계에 눈을 뜬 선각자가 현실을 개혁하려는 새로운 사상을 품고 다양한 신학문을 일으키는 데 그것이 실학이라는 내용이다.
여기에 전통과 근대의 대립이 부과되어 실학에 관한 시대적인 설명을 제공해 준다.
조선 후기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근대화론을 수용하여 조선 후기 유학의 새로운 학문 경향을 적극적으로 근대 지향으로 읽어내는 방식이다.
넓게는 유교에서 공리공론(空理空論)에 기초한 헛된 학문'이라는 뜻의 허학(虛學)과 대립되고 실제의 참된 학문이라는 뜻을 지닌다. 즉 실학이란 용어 자체는 유교 내에서 쓰이는 보편적인 단어였다.
좁게는 조선 후기에 성리학을 보완하여 경세치용과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태도를 강조한 학문이라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천관우가 실학의 개념을 정립하면서 실학자들의 연구에 실사구시의 실학적인 측면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후자의 뜻으로 주로 쓰인다.
조선의 실학은 그 기원을 17세기 이수광과 한백겸에서 찾는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접했던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실학정신의 기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모습을 보였으며 한백겸의 동국지리지는 평양에 있었다는 기자의 정전 유적을 나름대로 고증하면서 토지개혁론의 시작을 열었다.
그렇게 싹이 보인 조선의 실학이 본격화된 것은 이후의 고증학과 서양학문에 대한 관심,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병자호란으로 대표되는 외부 충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18세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는 유형원, 이익, 홍대용, 박지원, 정약용, 서유구 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 서울에 주로 거주하던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이 특히 관심을 보인 학문은 북학론이다.
이 북학론이 청나라를 배우자는 뜻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청나라에 남아 있는 중화 문명을 배우자는 사조로서, 북벌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의견이 있다.
이 조선 후기의 실학에 대한 관심은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실학자들이 청나라에서 실학 관련 책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천주교에 대한 책이 같이 들어왔다. 최초로 천주교의 존재를 소개한 것이 이수광의 지봉유설이었을 정도이며, 이후 이익과 그 제자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작되었다.
실학자들은 이것을 처음에는 서학, 또는 천주학이라 부르면서 학문으로 연구하다가 이게 서양의 종교라는 것을 깨닫고 천주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실학의 전개는 크게 3기로 나누는데, 1기인 18세기 전반은 실학의 발생기로 중농학파가, 2기인 후반은 실학의 정립기로 중상학파가, 3기인 19세기 초반은 실학의 전성기로 국학파가 대두했다.
다만 실학의 분류 자체가 꽤 주관적인 것임을 명심하자.
이후 실학은 개화사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성리학과의 차이는, 실학이 성리학의 관념적인 측면을 비판한 학문으로서 시대를 개혁하려는 측면이 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정리하자면 성리학은 양반 사대부 중심, 벌열양반 중심, 관념철학, 사장 중시, 사변적이었던 것에 비하여, 실학은 민중도 연구 대상이고 기존 유학의 사변적 측면에 경험적, 실험적 방법론을 더하고 성리학 이전의 선진 시대 유학과 제자백가 유학도 포섭했다는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그동안 임진왜란 이후 적으로 얕봐왔던 일본에 대한 재인식이 있다는 것이다.
성리학 사상을 가진 양반들은 성리학을 통해서 중국을 중시하면서도 일본을 왜놈이라고 얕잡아 보며 그들의 행태를 탐탁지 않게 봐왔던 것과는 달리 실학에서는 일본의 변화를 주시하여 왔고 임진왜란 이후 조선을 처음에 압도하였던 점에서도 볼 때 고전을 면치 못한 원인인 일본의 발전에 주시를 하고 있던 것이다.
백성들의 일상적인 생활에 이롭게 쓰이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실천적인 학문의 내용이라는 뜻이다.
원래 이 말은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보인다. ‘이용’이란 백성의 쓰임에 편리한 것으로서 공작 기계나 유통 수단 등을 의미하고, ‘후생’은 의식(衣食) 등의 재물을 풍부하게 하여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유학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경세제민을 통해 백성의 삶을 풍요롭고 바람직하게 만드는 것을 정치의 이상으로 삼기 때문에,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에 못지 않게 경제적인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진다.
공자(孔子)가 교육에 앞서 백성의 부서(富庶)를 말한 것이나 맹자(孟子)가 백성에게 항산(恒産)을 마련해 주는 것을 왕도 정치 실현의 기반으로 지적한 것은 모두 그 실례이다.
후대로 오면서 유학의 관심이 윤리적·도덕적인 정덕(正德)의 측면에 기울면서, 이른바 덕본재말(德本財末)·중의경리(重義輕利) 등의 의론이 나와 재물이나 이익을 경시하는 듯한 흐름이 생겨났다.
유학의 이러한 경향은 특히 성리학에 이르러 극대화되었는데, 성리학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인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기풍은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의리와 명분을 중시한 성리학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그런 대로 생동감을 갖추고 있었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더 이상 현실 지도 이념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고 형해화(形骸化)되어 갔다.
여기에서 성리학을 대신하여 구체적인 민생의 고통과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실학 사상이 대두된다.
이용후생(利用厚生) 실학의 흐름은 그 사상적인 경향에 따라 시대별로 보통 세 단계로 구분된다.
제1단계는 이수광(李睟光)·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으로 대표되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파다.
제2단계는 18세기 후반 중국 청나라의 문물에 대한 견식을 통해 서구 문화에까지 눈을 뜨게 된 홍대용·박지원·박제가·이덕무(李德懋) 등 이른바 북학파로 불리는 이용후생학파다.
제3단계는 19세기 초반 중국 고증학(考證學)의 영향 아래 일어난 정약용(丁若鏞)·김정희(金正喜) 등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파다.
이 가운데 이용후생학파에는 앞에 적은 여러 학자 외에 이중환(李重煥)이나 유수원(柳壽垣) 및 정약용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이용후생의 실천을 통하여 부국안민을 이룩하는 것이 그 시대의 급선무임을 주장하고, 구체적으로 그 이용후생의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들이 제시한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봉건적 신분 질서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을 타파할 것과 능력에 따른 신분의 재편성, 보통 교육의 확대 등 사회 개혁을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였다.
둘째, 봉건 지배 계급인 사(士)의 타성적인 계급 의식을 타파하고 공상(工商)으로의 전환을 통해 상(商)을 중심으로 한 국가 경제 체제를 확립하는 부국을 지향하였다.
국내의 경제 유통을 위한 용거(用車)·용선(用船)과 도로망의 정비 등을 제시하고, 국부(國富)의 증진을 위한 외국과의 교역을 강조하였다.
셋째, 사회 개혁과 국민 경제를 통해 부국 강병과 이용 후생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농업·공업·방직·군사·의료·천문·수학 등 각 분야에서 선진적 기술의 습득이 필수적임을 주장하였다.
기술은 역사의 변천에 따라 진보한다는 의식과 청나라의 문물 제도를 통해 서양의 기술을 직접 체험하고,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다면 비록 그 법이 이적(夷狄)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성인이 그것을 선택할 것”
이라며, 중국과 서양의 선진적 기술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 자세를 보였다.
넷째, 청나라와 서구의 문물을 선진적인 것으로 보고 적극 수용함으로써 북학파로 불리고 스스로도 그렇게 자처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모화론자(慕華論者)들과는 달리 강렬한 민족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이익·안정복(安鼎福) 이래 실학 사상의 전통이기도 하지만, 갖가지 현실적 문제를 안고 있던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과 고통받는 민중에 대한 애정이 민족적 주체 의식으로 발현된 것이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