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00
6월26일[연중 제1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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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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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2idEg4V6wx0
[한국외방선교회 이성규 대건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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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비정상의 정상화를 배격합시다!>
우연히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북한 방문 장면 관련 뉴스를 보았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두 정상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나와 환호성을 올리고 손을 흔들고...정말이지, 끔찍했습니다.
이 지구상에 아직도 저렇게 한 사람을 우상화시키고, 강제동원령을 내리고, 꼭두각시 쇼에 동참하지 않으면 엄청난 불이익이 뒤따르고, 운집한 군중은 영혼 없는 얼굴로 환호를 하고, 그런 모습에 독재자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오늘 하루 온종일 참담한 심정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우리 민족에게 이토록 가혹하신지? 하는 탄식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 남북한 동포들 사이에 만연해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남북 분단의 고착화를 너무나도 당연히 여기는 태도입니다. 평화 통일은 이제 완전히 물 건너간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입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만 해도 학교에서는 학생들에 대한 체벌이나 구타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지금은 큰일 날 일이지만, 당시 선생님이 때리면 당연히 맞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찍소리 못하고 때리는 데로 맞았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지금은 그 누구도 용납 못하지만 군부 독재자 시절, 천상천하유아독존인 그의 한 마디면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체포영장도 없이 어딘 지로 모르는 장소로 끌려갔고, 변호사도 없이 별의별 형태의 고문을 당하고...그야말로 비정상의 정상화 시대를 살아온 것입니다.
남북 분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 너무 오랜 세월 분단되어 살아오다 보니, 이게 비정상인데, 정상처럼 착시 현상을 느끼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갈라서 있는 것이 편하니, 괜히 통일이나 왕래다 하다 보면 세상 복잡해지고, 그냥 이대로 쭉 갈라서서 가는 것이 더 낫다는 비정상적인 생각이 정상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남북한 동포들이 어떠한 희생과 노고를 다 치르더라도 반드시 일궈내야 할 과제요 숙명이 곧 통일입니다.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아예 포기하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예측을 훨씬 능가합니다.
함께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노력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남북 사이의 관계가 화사한 봄날처럼 풀릴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굳게 가로막혀 있는 철조망도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서로서로 부둥켜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각자 삶의 자리에서 지금까지 해오던 노력을 계속해나가야겠습니다. 매일 밤 9시 알람이 울리면 온 정신과 마음을 모아 한반도 평화와 남북통일을 위한 주모경 바치기를 계속해나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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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s_bRKFLB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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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이비가 나쁜 나무임을 알기 위한 나쁜 열매는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사람을 속이는 종교들, 거짓 예언자들이 많습니다. 이 열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면 사이비에 빠져 인생과 영혼을 망치는 일이 벌어집니다.
많은 이들은 이단이나 사이비의 잘못된 성경해석이나 교리가 그 열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이비들의 잘못된 성경해석과 교리를 공부하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교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교리까지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사실 진실보다 거짓말이 더 논리적입니다. 보이스피싱을 생각해보십시오. 매우 논리적으로 다가옵니다. 속이기 위해서는 논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 시대에 살았다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말하는 경비병들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여인들의 말 중에서 누구의 말을 믿겠습니까? 그들의 교리로는 그들을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교리가 만들어내는 ‘행동’이 그들을 알게 합니다.
한국 사이비의 시초는 1930년대 김성도라는 여인이 만든 성주교입니다. 17살 때 평북 철산군의 돈 많은 관리 세 번째 첩으로 달려가다시피 시집을 갔습니다. 그리고 내리 딸을 셋이 낳았습니다. 구박받았겠죠. 그러다 힘겹게 얻은 막내아들이 1년 만에 죽었습니다. 엄청난 충격으로 정신 이상이 왔어요. 근데 동네 어떤 교인이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 해서 기도했더니 병이 나았습니다. 둘째 아들이 또 병이 들었어요. 매일 열심히 기도해서 또 병이 났습니다. 그러니까 소문이 난 거예요.
그렇게 유명해지자 이젠 예수님을 직접 만나 계시받았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예수님은 실패하였고 자신이 그것을 완성할 것이라 주장합니다. 또한 창세기에 보면 뱀이 하와를 유혹해 선악과 따먹은 얘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을요 성적 타락으로 봅니다. 뱀과 하와가 성행위를 했으면 그 후손들은 사탄의 피가 흐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면 깨끗한 피를 가진 이가 이 사탄의 피로 정결하게 해서 거룩한 피로 바꿔줘야 한다는 사상이 나옵니다. 이것이 성적인 타락으로 이뤄지고 뒤이어 나오는 모든 사이비 교주들은 이를 이용해 신도들을 자기 성적 착취물로 여기게 됩니다.
이후에 나온 백백교라는 사이비는 여기서 더 나가서 돈과 폭력까지 사용합니다. 백백교가 일제히 경찰에 의해서 조사가 되고 재판이 진행되는데 1937년까지 무려 80여 차례에 걸쳐서 백백교 신도 350명을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이후에 오대양 사건도 돈과 성과 폭력이 있었고 현재 허경영 씨도 똑같습니다.
이들의 교리는 볼 필요가 없습니다. 열매가 비윤리적이면 그 삶을 보증해주는 교리는 올바른 교리일 수 없습니다. 나무를 살피는 게 아니라 열매만 보면 됩니다. 나무를 보면 헛갈립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톨릭교회에는 이단이나 사이비가 없을까요? 그들의 논리보다 그들의 삶을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제는 독실한 가톨릭신자라고 알려진 바이든 대통령이 미사에 참석하여 성체를 영하려 하자 성체를 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낙태를 찬성하는 이단이자 사이비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톨릭 교리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비윤리적이면 사이비입니다. 윤 대통령이 탄 전용기가 추락하기를 바란다는 발언을 한 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가톨릭 정통신학을 공부하였다고 하더라도 사이비입니다. 열매가 비윤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청빈하고 정결하고 온순하고 겸손한 이가 있다면 그가 어느 종교를 믿던 그는 정통입니다. 우리 열매가 무엇인지 살피고, 또 이론만 거창한 거짓 예언자에 속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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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거짓 예언자: 양의 옷차림을 한 게걸든 이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란 어떤 말씀을 전하여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넓게는 우리가 모두 예언자들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말과 행동으로 타인에게 분명히 영향을 주고 살기 때문입니다.
어떤 유명한 야구선수가 은퇴한 후 강연을 다닐 때 교도소에서도 강연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강연 중 야구를 하다 남의 집 유리창을 깼을 때 힘이 좋아 훌륭한 메이저리거가 될 거라고 칭찬 받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한 수감자가 “저희 아버지도 언젠가는 제가 감옥에 갈 것이라고 하셨죠.”라고 말했습니다.
피카소는 어머니에 대해 “저희 어머니는 ‘네가 성직자가 되면 교황이 될 것이고, 군인이 되면 장군이 될 것이며, 정치인이 되면 대통령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저는 화가가 되었고 피카소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각자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예언해 준 말을 믿고 그 예언을 성취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거짓 예언자가 아니라 좋은 예언자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주위에 강력한 좋은 예언자들이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 예언자들을 어느 정도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런 거짓 예언자들을 감당할 힘이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이상한 예언을 하는 이들을 빨리 떠나야 합니다. 아니면 그 이리들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람을 굳이 선별해서 만나야 할 때 선별기준이 될 것입니다.
2015년 6월 14일 사람들의 관심 속에 애정과 후원을 받아 오던 한 모녀의 페이스북 계정에 이상한 게시물이 포스팅됩니다. “그녀는 죽었다.” 딸이 엄마를 살해했다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의 내막은 이렇습니다. 지난 2005년 8월 미국 남동부에 초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상륙했습니다. 가장 큰 손해를 입은 지역은 뉴올리언스였습니다. 폭우로 제방이 붕괴하면서 도시 대부분이 물에 잠겨 1,800여 명이 목숨을 잃은 정말 대참사였습니다. 이 모녀도 피해 이재민 중 하나였습니다. 이들은 뉴올리언스 정부 임대 주택에서 살고 있었는데 허리케인으로 집이 파괴되면서 갈 곳을 잃게 된 것입니다.
엄마 디디 블렌챠드는 24살의 나이에 남편을 만나서 임신과 함께 결혼하였지만 딸 집시가 태어나기 한 달 전 이혼을 합니다. 결국, 엄마 혼자 양육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딸이 태어난 지 3~4개월쯤 됐을 때 엄마 디디가 보니 아이가 잠을 잘 때 이상 증상을 보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병원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그때 이후 집시는 잘 때마다 산소마스크를 착용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지만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집시가 7살이 되었을 때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근육위축증이라는 장애를 얻게 됩니다. 아이는 걷는 것을 포기하고 늘 휠체어를 타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시는 백혈병, 천식, 간질 같은 크고 작은 질환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청력에 시력까지 좋지 않아서 항상 보청기와 안경을 착용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음식마저 삼키지 못해 소장에 연결된 호스를 통해서만 겨우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병약하게 아이가 성장하다 보니 엄마 디디는 딸이 10대가 되어서도 정신연령이 약 7살 수준이라면서 딸에게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위급상황이 생길 걸 대비해서 약 꾸러미를 들고 다니며 정말 헌신적으로 아이를 돌봤습니다. 그러다 보니 엄마는 당연히 직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에 이전 남편이 매달 보내는 양육비를 가지고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허리케인으로 집마저 잃어버린 겁니다.
이 모녀의 안타까운 소식이 알려지면서 각종 구호단체의 러브콜이 쏟아졌습니다. 특히나 그중에 일명 사랑의 집짓기로 유명한 한 단체가 손을 내밀게 되면서 모녀를 위해 미주리에 작은 집을 하나 마련해 줍니다. 몸이 아픈 집시를 위해 휠체어가 갈 수 있게 경사로도 있고 또 따뜻한 목욕을 할 수 있는 욕조까지 집안에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모녀는 감사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뉴스 인터뷰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엄마 디디는 누구보다도 딸을 자랑스러워했고, 집시 역시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는 엄마밖에 없다면서 인터뷰 내내 서로를 향한 애틋함이 넘쳐흘렀습니다. 이런 모습의 모녀를 향한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여졌고 선행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2015년 페이스북 계정에 난데없이 올라온 포스팅이 바로 “그녀는 죽었다!”였던 것입니다. 결국 경찰이 밤 10시쯤 모녀의 집안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경찰들이 침실로 들어선 순간 엄마 디디가 잔인하게 칼에 찔린 채 침대에 엎어져 있었고 휠체어만 덩그러니 남은 채 딸 집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경찰이 들이닥친 곳은 집시의 남자친구 닉의 집이었습니다. 이때 집시는 놀랍게도 두 발로 걷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정밀진단 결과 집시는 어떤 건강상의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집시가 남자친구 닉에게 더는 못 견디겠다며 엄마를 죽여달라 사주한 것입니다.
닉은 종신형을 받고 집시는 10년 형을 받았습니다. 왜 그런 사실을 알리지 않았냐고 묻는 경찰들의 말에 집시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말했다면 누가 믿어줬을까요?” 무려 20년간 이어진 엄마의 폭력을 통한 사기극은 그렇게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출처: ‘14년간 장애인 딸과 엄마의 애틋한 '거짓사랑'’, 유튜브 채널, ‘디바제시카’]
집시의 엄마는 좋은 예언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딸을 이용해 돈을 벌었습니다. 돈에 미치면 딸까지 그렇게 이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짓 예언자를 알아보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면 그 사람은 100%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딸의 처지에서는 엄마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세속적인 사람인지 아닌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잘 모르겠다면 나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살피면 됩니다.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이 “넌 모든 것을 할 수 있어!”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참 예언자입니다. 하지만 나의 능력을 규정해버리고 “넌 나 없이는 안 돼!”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것을 통해 상대를 이용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 말에 속아서 그 사람에게 의지하게 되면 안 좋은 결말을 맞게 됩니다.
예수님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할 때 그 ‘열매’를 보고 구별하라고 하십니다. 열매는 마지막에 맺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맺으려는 목표입니다.
지금 나에게 해 주는 것을 보지 말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 보라는 말입니다. 그저 나를 사랑해주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인지 그것을 통해 어떤 다른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인지 보라는 말입니다.
거저 주며 행복한 순수한 사랑이 목적이 아닌 모든 말과 행위들은 늑대의 꾐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거짓 예언자에 속지 말고 거짓 예언자도 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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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제복’을 주로 입고 다닙니다. 아침에 산보할 때도, 마트에 갈 때도, 식당에 갈 때도 사제복을 입고 다닙니다. 산보할 때는 마주치는 사람들이 ‘Father'라며 인사하곤 합니다. 본인도 가톨릭 신자인 경우에는 더욱 반갑게 자신도 가톨릭 신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식당에서도 주인이 신자인 경우는 반갑게 인사하고, 덤으로 반찬을 주기도 합니다. 며칠 전입니다. 마트에서 ’떡‘을 사는데 주인이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얼마 전에 새로 온 본당신부냐고 물었습니다. 본인은 최근에 교통사고가 나서 한동안 성당에 못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자매님의 본명을 물으니 ’헬레나‘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아침에 저는 떡을 주로 먹는다고 말하니 이것저것 덤으로 싸주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사제복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사제복이 저를 지켜주는 것 같았습니다. 사제복을 입으니 행동을 조심하게 됩니다. 사제복을 입으니 가지 말아야 할 곳은 알아서 안 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치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아닐지라도 나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서울에 있는 동창 신부님이 ‘Facebook'에 본당 가두선교에 대한 글과 사진을 올렸습니다. 개신교회는 가두선교를 적극적으로 하지만, 성당은 가두선교를 자주하지 않는 편입니다. 저도 2번 정도 교우들과 가두선교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본당에서는 3번에 걸쳐서 가두선교에 대한 교육을 마친 후에, 가두선교를 나섰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준비해간 선물도 나누어주고, 예비자 교리 신청서도 받았다고 합니다. 100여명의 사람들이 기꺼이 신청서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쉬는 교우들도 인사하면서 다음부터 성당에 나가겠다고 인사했다고 합니다. 가두선교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공동체에 도움이 됩니다. 하나는 선교를 통해서 새 신자를 공동체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선교를 통해서 공동체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내가 했던 일의 결실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이 있었지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마귀들을 물리쳤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제자들은 자신들이 한 일을 예수님께 보고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고 있었던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리에 관하여 거기에 쓰여 있는 그대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거슬러 타오르는 주님의 진노가 크오. 임금은 기둥 곁에 서서,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지켜, 그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자 온 백성이 이 계약에 동의하였다.” 화려한 성전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국과 맺은 동맹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우리들에게 ‘나무와 열매’를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가 열리고, 나쁜 나무에서는 나쁜 열매가 열린다고 하십니다. 좋았던 나무도 거름을 주지 않고, 관리를 소홀히 하면 나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나빴던 나무도 정성을 다하고, 거름도 주고, 잡초를 뽑아주면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밀은 계속 밀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지는 늘 가라지가 아닙니다. 밀처럼 자란 사람이 가라지와 같이 변할 수도 있고, 가라지같이 자란 사람이 밀처럼 변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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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7,15-20: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15절) 우리 신앙인은 일반 대중의 유행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닌, 그 반대로 세상을 거슬러 살아야 한다고 하신다. 신앙인은 돼지와 개로부터 만이 아니라, 이리로부터도 자신을 지켜야 한다. 이리는 개나 돼지보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개와 돼지는 잘 보인다. 그러나 이리는 어둠 속에 숨어 지낸다. 이리는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고 하신다. 이리의 공격은 그것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시나무에서는 포도를 거두지 못한다. 거짓 예언자들은 덕의 가면을 쓰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기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20절) 하신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힘들고 고생스러운 길이다. 위선자는 수고하려 하지 않고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려고 한다. 그러므로 가면을 보지 말고 좁은 길을 따라가는 이들의 행실이 맺는 열매를 보아야 한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17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악인은 변화할 수 없다거나 선인은 결코 나쁜 길로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사람이 타락한 생활을 하는 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이다. 악하게 살았더라도 선으로 돌아설 수 있지만, 악하게 사는 동안에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어떤 열매를 맺으며 살고 있는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19절)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거둘 수 없고, 가시를 맺는 나무에서 포도나 무화과를 거둘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이 악한 사람은 좋은 말씀을 듣지 못한다. 훌륭한 교사가 나쁜 것을 가르칠 수 없다. 자신의 입으로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벌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분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면서 그분께 나아가도록 하여야 하겠다.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 안에 참된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거기에 우리의 삶도 참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좋은 열매를 맺는 생활을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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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를 식별하는 기준을 일러 주십니다. 그 기준은 바로 그들이 맺은 “열매”입니다.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식별 기준으로서 열매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의 ‘행실’과 ‘업적’에 따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사람이 자신이 가르치는 것들을 삶으로 옮기는지 그의 ‘행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의를 부르짖지만 정의롭지 않게 살아가는 모습, 가난의 가치를 열심히 말하지만 소유에 자유롭지 못한 모습, 겸손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 비천한 곳에 오신 예수님을 전하면서 안락함을 추구하려는 모습들은 참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인지를 가려내는 기준입니다.
둘째, 그 ‘행실’이 맺고 있는 ‘업적’을 보아야 합니다. 참예언자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에 꼭 맞는 삶은 세상에 주님을 드러내고 사람들 마음을 움직일 것입니다. 물론 참예언자들도 그들의 행실이 가르침에 못 미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 살펴야 합니다. 지향은 올바르지만, 인간적인 부족함과 나약함에서 오는지, 아니면 자신의 말과 전혀 다른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지향과 목적에서 오는지는 그가 맺는 열매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지향이 올바른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부족함을 채워 주시고,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은총을 베푸실 것입니다. 만일 지향이 올바르지 않다면, 그 지향을 아무리 숨기려고 하여도 오직 자신을 위한 열매로서 올바르지 못한 의도가 드러날 것입니다.
날마다 묵상하고 선포하는 하느님 말씀이 내 삶으로 드러나는지, 그리고 그 삶이 주위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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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짜가 너무 많은 세상입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5-20)
1) 이 말씀은, ‘종말 전의 재난’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누구에게도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이를 속일 것이다."(마태 24,4-5)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 또는 ‘아니, 여기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큰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해 둔다."(마태 24,23-25)
<오늘날에도 ‘재림 예수’라고, 또는 ‘메시아’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사람들을 속이는 일이 자주 생깁니다.>
사도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여러분 가운데에도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을 끌어들이고, 심지어 자기들을 속량해 주신 주님을 부인하면서 파멸을 재촉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들의 방탕한 행실을 본받아, 그들 때문에 진리의 길이 모욕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또 탐욕에 빠져, 지어낸 말로 여러분을 속여 착취할 것입니다."(2베드 2,1-3ㄱ)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위장한 거짓 사도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실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2코린 11,3-4.13-15) <거짓 예언자들도 자기는 진짜 예언자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자기 입으로 ‘나는 거짓 예언자다.’라고 말하는 거짓 예언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는 것인데, 속는 사람이 있으니까 속이는 자들이 계속 나타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을 ‘속이는 자들’은 범죄자들이고, ‘속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2)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라는 말씀은, 거짓 예언자들을 식별하는 방법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고, 그들이 거짓 예언자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면 적극적으로 물리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맺은 열매’ 라는 말은, 여기서는 ‘그들의 활동 결과’를 뜻합니다.
어떤 예언자의 활동으로 사람들이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가게 되었다면 그 예언자는 진짜 예언자입니다. 반대로, 어떤 예언자 때문에 사람들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다면, 그 예언자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활동 결과를 보고 나서 거짓 예언자인지 아닌지를 식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입니다. 결과가 분명하게 드러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운 경우에는, 너무 쉽게 속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거짓 예언자, 또는 사이비 종교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자들에게 속으면 그자들의 탐욕과 착취의 피해자가 된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고, 그자들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점 때문이기도 합니다.>
3)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라는 말씀은,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가 좋은 나무일 수 없고,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나쁜 나무일 수 없다.”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를 보면, 신자들이 처음부터 그를 사도로 믿어 준 것은 아니었는데(사도 9,26), 바르나바 사도가 바오로 사도를 위해서 증언하는 등의 중개를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떻든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사도라는 것을(좋은 나무라는 것을) 증명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즉 좋은 열매를 많이 맺은 그의 선교활동입니다.
4) ‘열매’에 관한 말씀은 각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적용됩니다. 그 경우에, ‘열매’는 ‘구원’을 뜻하는 말이 됩니다. 신앙인은 ‘자기 자신의 구원’이라는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노력하는 나무입니다.
그 열매를 완전히 맺을 때까지는 아무도 방심하거나 자만하면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위대한 사도이고 선교사인데도, 자만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실격자가 될 수도 있음을 두려워했습니다.(1코린 9,27)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그런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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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먼저 자신의 열매를 보라>
어제 복음에서 산상설교의 결론이자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으로 “너희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황금률이 선포되었다.
사실 황금률은 행동함에 있어서 최소한의 규범이다. 사실상 요구되는 것은 그 이상이다. 그래서 의인(義人)의 길은 외롭다고 했던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옳게 산다는 것, 나아가 남보다 더 옳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의인의 길은 좁고 외롭다. 그러나 이 길을 걷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된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바로 이 생명의 길을 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소중한 삶의 지침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행동의 지침만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니다. 행동이란 경우에 따라 많은 변수를 가져오기 때문에 행동지침에 대한 늘 새로운 해석과 응용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거짓 예언자들을 경계하고, 그들을 참 예언자들로부터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을 가르치시는 대목이다. 속에는 사나운 이리를 품은 거짓 예언자가 겉으로는 양의 탈을 쓰고 나타나기 때문에 한눈에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겉포장이 화려하고 요란할수록 내용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겉모양이 양처럼 부드럽고 고울수록 그 마음도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만약에 그러한 겉과 속이 다르다면 실망 또한 클 것인즉, 그것이 거짓 예언자라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참 예언자가 공동체에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효과보다 거짓 예언자가 가져오는 부정적인 효과가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거짓 예언자에 대한 구별은 참으로 중요한 사안이다. 예수께서는 나무와 열매의 비유를 통하여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원리를 구별의 기준으로 내세우신다.
즉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보다 행위의 과정과 결과가 구별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는 언제나 함께 있어왔고 지금도 그렇다. 예수님 당대에도 그랬고, 마태오복음 공동체 안에서도 그랬다.
구약시대의 예레미야 예언자도 일생 동안 전문적인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을 벌였다. 예레미야는 야훼께서 보여주시는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의 구별을 통하여 자신을 참 예언자(예레 26,1-24)로 거짓 예언자(예레 23,9-40; 특히 거짓 예언자 하나니야: 28,1-17)와 구별하였고, 거짓 예언자와 섞은 사제들이 한 통이 되어 이스라엘 전체를 그릇 인도하고 있음을 통탄하였다.
예레미야에 의하면 참 예언자는 백성을 일깨워 회개하도록 하지만, 거짓 예언자는 자신의 이익을 좇아 권력에 아부하느라 정신을 빼앗긴다고 하였다.
아모스 예언자도 거짓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꾸짖지 않고 오히려 원수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그들의 멸망을 예언하지만, 참 예언자는 이스라엘 자신의 죄를 고발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한다고 하였다.(아모 1,3-2,16)
신약성서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결성된 초대교회에 대한 연구 자료로 빼놓을 수 없는 문헌은 단연 100년 이후에 집필된 ‘디다케’로 손꼽힌다.
《12사도의 교훈》으로 통용되는 디다케는 총 16장으로 구성된 초대교회 규율에 관한 지도서로서 신약외경(新約外經)에 속한다.
예언과 복음의 수용자세를 다루고 있는 11장에 다음과 같은 거짓 사도와 예언자의 식별 기준이 들어있다.
“사도는 하루 동안만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이틀을 머물러도 된다. 그러나 사흘이나 머물면 그는 거짓 예언자이다.
사도가 떠날 때는 다음 머물 곳을 찾을 때까지 필요한 빵밖에는 더 가지지 말아야 한다. 만약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이다.
영(靈)으로 말한다고 모두가 다 예언자인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생활태도를 지녀야만 예언자이다.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는 그 생활태도로써 밝혀진다.
진리를 가르치는 예언자라도 가르치는 것들을 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짓 예언자이다. 누구든지 영으로 말한다면서 돈이나 다른 어떤 것을 달라고 한다면 그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빈궁한 이들을 위해서 달라고 한다면 아무도 그를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디다케 11)
예언서와 디다케를 근거로 참된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식별하는 방법을 요약한다면, 참 예언자는 주님의 양떼를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바치지만 거짓 예언자는 생명은커녕 자신에게 손해 될 일은 하지 않는다.
참 예언자는 하느님나라를 구현하기 위하여 자신과 공동체의 끊임없는 쇄신과 회개를 촉구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고 필요하다면 쓰레기로 여기지만(필립 3,8), 거짓 예언자는 되도록 남의 잘못을 꾸짖고 남의 불행을 축복하면서 개인의 이익과 명성을 도모하고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학식과 견해에 더 의존한다. 이러한 기준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행실을 보고 아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도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는 공존한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통하여 얻은 식별의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여야 한다.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일은 공동체의 사랑과 일치를 쉽게 깨뜨릴 수 있다. 따라서 남보다는 우선 내가 스스로 맺는 열매에 따라 주님의 ‘참 제자요, 참 목자’인지를 물어보고 점검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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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최성우 세례자 요한 신부님]
‘열매’란 말이나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구체적 품행을 드러내고 활동의 진실성 여부를 식별하게 해준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 보니 내 삶에 크고 작은 흔적을 남겨놓은 이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으로 삶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고 사는가를 나에게 알려주었다.
교통사고로 다친 불편한 다리로는 일상조차 살기가 어려울 주 선배는 절망에서 빠져 나오려고 몇 년 동안 애쓰며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다른 이에게 부정적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자존감을 지키는 모습은 아름답다.
자신을 바로 보기 위해선 날마다 시간을 내어 걷거나 앉아서 명상하며 경험하는 모든 것을 아주 찬찬히 살펴보아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선택이란 사실 얼마나 단순한가.
‘깨달음에 도움이 될 일들을 하고 그렇지 않은 일들은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또 하고 있는 그 일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영적 성장을 위한 첫번째 단계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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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제1독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을 쇄신하고자 한 요시야 임금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분열된 유다 왕국의 16대 임금이 된 요시야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서의 내용을 듣고서, 그들의 조상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제대로 실천하지 않았기에 주님의 진노가 내렸음을 선언합니다.
이어서 모든 백성을 데리고 성전에 올라가 계약 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주고,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습니다. 온 백성도 이 계약에 동의합니다. 이후 요시야 임금은 하느님 말씀을 충실히 따르며 이스라엘의 종교 개혁을 이룹니다.
이렇게 하느님 생명의 말씀은 언제나 그것을 새로이 듣고 실천하도록 우리를 다그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고 하시며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하고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과 행동은 좋은 열매를 맺으며 사람들을 생명으로 이끌지만, 악하고 거짓된 마음에서 비롯하는 말과 행동은 나쁜 열매를 맺고 사람들을 파멸로 이끕니다.
그런데 우리 삶은 과연 주님께서 바라시는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하느님의 좋은 열매를 풍성히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4.5)
하느님과 나누는 친밀한 기도 안에, 말씀과 성체 안에 깊이 머물 때, 우리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그분을 닮아 형제들을 더 사랑하여 좋은 열매를 더욱 풍성히 맺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또한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갈라티아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5,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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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7, 16. 17)
오늘 복음의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는 말씀을 요한복음에 나오는 ‘포도나무의 비유’와 연관해서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나무는 예수님이시고 좋은 열매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의미한다고 말입니다. 이미 요한복음 15장을 묵상하면서 나눴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하느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지향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느님의 존재이고, 하느님으로부터 존재이고 하느님을 위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떨어져서는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좋은 나무인 예수님 안에 살아갈 때, 그 나무의 가지인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 항구히 머물 때 자연스레 때가 되면 탐스러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저는 참으로 가장 적당한 때 수도 생활을 시작해서 참 다행이었다, 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느끼는 것처럼 참으로 심각하면서도 신속하게 변하는 세상을 보면서 앞으로 수도 생활할 후학들이 걱정스러울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는 모든 사람에게서 떨어져 있는 존재이며, 또 모든 사람과 함께 있는 존재이다, 는 관점에서 볼 때 수도자의 이중적 삶의 운동의 균형 감각을 유지하고 살아가기가 예전처럼 쉽지 않으리라 봅니다. 예전엔 모든 것이 확실하고 분명했지만, 다원화된 세상에서는 어느 것도 확실한 게 없는 듯싶습니다. 수도자의 청빈, 정결 순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세상은 예전보다 더 많고 그럴듯한 갖가지 감언이설로, 진리와 오류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미묘한 요구들로 말미암아 수도자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수도자는 본디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는 하느님께 속한 자이고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세상의 풍조에 맞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요구와 유혹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보조를 맞추려는 저 자신을 볼 때, 분명하고 확고한 성소의 동기가 없다면 자신의 신원을 유지하고 살아가야 할 후학들이 걱정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성소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7,15) 하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연유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물론 저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주님이란 좋은 나무에 붙어 있은 지 벌써 50년이 훨씬 지났건만 아직도 제대로 익은 열매가 열리지 않은 듯싶어 자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열매가 지금은 익어가는 시기이지만 아직 수확의 때가 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안하면서, 수확의 시간까지 꿋꿋이 예수님의 나무에 붙어 있으려고 합니다. “너희들은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7,20)라는 말처럼 혹자는 저를 보고 그토록 오랜 시간 수도 생활을 했으면서도 달린 열매마저도 볼품도 없고 향기도 나지 않는다고 실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저도 저 자신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이야 더더욱 실망이 클 것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처럼, 너무 많이 기대하지 마십시오. 물론 지금껏 저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부족한 게 아니었습니다. 다 저의 노력 부족이고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임을 인정합니다.
고려 때 지눌 선사가 표현하길 "소는 물을 먹어서 젖을 내고, 뱀은 물을 먹어서 독을 냅니다."라고 했습니다. 같은 물을 먹는데 소는 사람을 이롭게 하는 젖을 내고, 같은 물을 먹어 뱀은 사람을 해치는 독을 낸다는 뜻입니다. 존재가 바뀌지 않는 한 그 존재에게서 다른 것이 나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저는 분명 제 존재를 바꿀 수 없지만,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은총에 온전히 의탁하고 봉헌하는 존재를 내치지 않고 항구하게 머무는 그 열정과 열성을 보시고 그 나무에 맞은 열매를 맺도록 바꿔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사이비’라는 단어를 알고 자주 사용합니다. 그 뜻은 닮은 듯하지만, 닮은 게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이비가 무서운 이유는 진짜와 거의 흡사하기에, 누구나 쉽게 속아 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사이비는 자신도 거짓 속에 살지만, 속아 따라오는 사람들도 거짓의 수렁에 빠뜨립니다. 가짜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면 아무도 속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사람은 이미 가짜가 아닙니다. 가짜(=작퉁)이면서 진짜(=명품)인 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거짓 예언자를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저는 이 지면을 통해 고백합니다. 저는 거짓 예언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이비 수도자는 아닙니다. 다만 익어가는 과정에 있고 미처 열매를 맺지 못했을 뿐입니다. 다만 저는 저의 실패와 실수에 연연하지 않고 꿋꿋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려고 몸부림치고, 예수님의 은총을 붙들고 살려는 제 마음만은 의심하지 말아 주시고 판단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주님, 우리 모두 당신 안에 항구히 머물면서 언젠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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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9세기에 수십 명의 아기가 오늘날 영아 돌연사 증후군이라는 증상으로 죽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들은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죽은 아기들을 부검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가슴샘이 크다는 것을 발견하지요. 하지만 사실은 정상이라고 합니다. 의사들이 이제까지 봤던 아기의 가슴샘은 가난한 가정의 아기였기 때문입니다. 19세기에 부검할 수 있는 아기 시신은 모두 가난한 가정에서만 가능했고, 대부분 설사나 영양결핍으로 가슴샘이 이미 위축된 상태였습니다. 이제까지 위축된 가슴샘을 정상으로 생각했으니, 영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죽은 아이의 가슴샘이 크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즉, 가슴샘 비대로 아이의 기관이 눌러져서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부유한 집에서는 아기 때 가슴샘을 키우려고 조치했습니다. 가슴샘에 방사선을 쬐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아기가 화상을 입거나 가슴샘이 위축되었고, 그 결과로 암까지 생겨 결국 1만 명이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과학 연구가 오히려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생각이 이 세상에 큰 상처와 아픔을 낳을 수 있습니다. 맞는다고 생각하고 또 다른 사람도 역시 모두 맞다고 하더라도 틀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습니다. 주님만이 진리 그 자체임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거짓 예언자를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다가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라고 하시지요. 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 그들이 맺은 열매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의 상태와 가치를 알 수 있듯이, 그들이 맺는 열매가 하느님의 뜻과 다르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거짓 예언자라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는 하느님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교회는 세상에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라고 합니다. 이 교회에 속해 있는 우리는 하느님 뜻을 따르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 속에 숨어있는 거짓 예언자의 모습을 따를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면서, 하느님의 뜻을 외면할 때가 바로 그런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을 알려고 노력하기보다, 주님을 알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이 세상에서 예언자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잘 전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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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령의 열매를 갈망합니다>
시골 사제관 앞 텃밭에 토마토, 오이, 고추, 상치, 가지, 파를 심었고, 좁은 공간이지만 농사짓는 형제님의 도움을 받아 아주 알뜰하게 가꾸어 제법 식단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작은 정성이 있으면 신선한 맛을 느낄 수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제때에 거름을 주고 잡풀을 뽑으며 가꾸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사제관 뜰에는 무화과나무가 있었는데 많이 열렸고, 그래서 늘 기대되었습니다. 여러 새 들과 너구리, 스컹크들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좋은 열매는 그들에게 맛있는 음식입니다. 그들은 단맛을 용하게 알고 무화과를 찾아왔습니다. 매서운 눈을 가지고 다가오던 그들이 구경거리였습니다. 잘 익은 좋은 열매는 사람의 손이 닿기도 전에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사람이나 과일, 채소에 이르기까지 잘 익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햇빛과 비, 그리고 밑거름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보면 필요한 것들을 제대로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면서 그 사람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이 큰 사람이었는지는 입술로 하는 말에서가 아니라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도 그 끝을 보면 놀라워할 사람도 있습니다. 또 그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를 기다리며 햇빛과 비, 거름을 주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고 괜찮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에는 멋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매력이 없어지면 힘이 듭니다. 따라서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어야겠지만 기왕이면 갈수록 깊어지는 멋을 담아야 합니다. 겉은 화려하고 속 빈 강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이 갈수록 경륜이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저를 무서워합니다. 눈이 무섭다고 합니다. 제가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남의 속을 볼 줄 모릅니다. 다만 알고 보면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저를 무섭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뭔가 켕기는 것이 있지 않은지…… 따뜻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외견상으로는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겉만 보아서는 그 사람이 사심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선적으로 사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속이 훤히 드러나게 됩니다. 더군다나“사람은 속여도 하늘은 못 속입니다.” 그러므로 눈속임으로 하지 않고 생각과 말과 행동의 일치를 통해서 좋은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육의 열매를 지향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갈망합니다.
성 그레고리오 주교는 “우리의 전체 생활은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합니다. …… 자기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 이 세 가지 각각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지 또는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 있는지 판단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할 때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집니다.’ 결국, 신앙과 사랑으로 무르익은 삶만이 심판의 불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 익은 좋은 열매가 되십시오! 혹 시들한 열매가 보이거든 햇빛을 보게 하고 비를 맞을 수 있게 하며 그리고 거름을 주십시오. “열매를 보면 나무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 자녀를 보면 부모를 짐작하여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참 아버지는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부끄럽게 하지 않기를 다짐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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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에게 달렸다>
마태오 7,15-20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나에게 달렸다>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마태 7,17)
내가 밝아야
나의 얼굴이 밝다
내가 고와야
나의 말씨가 곱다
내가 맑아야
나의 눈길이 맑다
내가 부드러워야
나의 손길이 부드럽다
내가 발라야
나의 발길이 바르다
내가 따뜻해야
나의 마음이 따뜻하다
내가 올곧아야
나의 삶이 올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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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과 넓은 문’ ‘비좁은 길과 널찍한 길’을 대조시키면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 7,15)
예수님께서는 ‘양’과 ‘이리’의 표상으로 대비시키면서, 참 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하십니다.
곧 ‘거짓 예언자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니 겉의 옷차림을 보지 말고 속마음을 보라 하시면서, 거짓 예언자를 알아보는 기준을 ‘행실로 맺는 열매’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5)
사실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리는 ‘양과 이리’, ‘나쁜 열매와 좋은 열매’의 표상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줍니다. 당신이 ‘참된 목자’로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고, 또한 ‘구원의 열매’라는 좋은 열매를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서 '참 예언자'로 제시하고 있는 맥락에서 보면,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 7,15)라는 말씀은 곧 '참 예언자'이신 예수님 당신을 따르라는 반어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나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는 ‘뿌리’가 튼튼한 나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뿌리를 어디에 박고 있는가는 중요합니다.
만약에 세상에 뿌리를 박고 있다면 세상이 원하는 열매를 맺고자 할 것입니다. 곧 세상의 평가와 명예를 얻고자 할 것입니다.
만약에 자신에 뿌리를 박고 있다면 자신의 능력과 힘을 이루고 자신을 실현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성취와 자기 기쁨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 하느님께 뿌리를 박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바칠 것입니다. 좋은 나무의 두 번째 특성은 잘 받아먹는 나무입니다. 곧 양분을 잘 받아먹는 일, 하느님의 은총을 잘 받아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은총을 건네주는 타인을 위한 자신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받아먹은 줄을 알아야 잘 베풀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열매’란 무엇일까요? 세상의 명예나 자신의 성취일까요?
우리가 하느님께 뿌리를 박고 있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 좋은 열매일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처럼, 자신을 훼손시킬 수 있는, 곧 자신을 손해 볼 줄 아는 행동이요, 옳으면서도 질 줄 아는 행동이라 할 것입니다. 늘 아버지 앞에 겸손한 행동일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곧 저희의 삶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나는 참 예언자인지, 나는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지, 혹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기보다 풍성한 잎이나 아름다운 꽃으로 치장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헛열매를 맺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사실 저는 거짓 예언자이고 싶지는 않지만, 거짓 예언자처럼 겉모양을 꾸미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저는 참된 예언자는 아니지만 참된 예언자 행세는 곧잘 합니다. 제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들여다보며, 그래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여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자신의 화려함을 버릴 때 열매는 맺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마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맺는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열매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자신이 따 먹으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은 바로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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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 볼 수 있다.”(마태 7,17)
주님!
잘려 불태워지기 전에, 가지를 자를 줄을 알게 하소서!
위선의 껍데기 옷을 벗고, 기만의 숨겨둔 살을 도려내게 하소서!
치장하여 꽃을 피우기보다, 행실로 열매 맺게 하소서!
그럴싸하게 때깔을 꾸미기보다, 속이 꽉 찬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늘 당신께 붙어 양분을 얻고, 당신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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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은, 행복은 선택이다!>
“참사람이 됩시다”
“주님, 당신의 길을 가르치소서. 저는 끝까지 그 길을 따르오리다. 저를 깨우치소서.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여 지키오리다.”(시편119,33-34)
오늘 화답송 시편이 참 좋습니다. 이런 배움의 여정에 항구할 때 주님을 닮아 참사람이 됩니다. 참으로 깨달음의 여정에 충실할 때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에 이르고 참사람의 자유인이 됩니다. 공부중의 참 중요한 평생 공부가 참사람이, 참내가 되는 공부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갈길이 멀다는 것’은 나의 의지와 한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다.”<다산>
“짐은 무겁고 길이 멀기에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논어>
그러니 하루하루날마다 좋은 선택과 훈련 및 습관화가 참사람이 되는데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요! 천리길도 한걸음부터입니다. 하루하루 좋은 선택, 훈련, 습관을 통해 운명도 바뀝니다. 어제 어느 자매와의 면담에서 저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고 받은 대화의 요지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과거의 아픈 추억에 사로잡혀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들이 악의 유혹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의식적으로, 의지적으로 행복을 선택하여 좋은 추억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운명의 질곡에서, 악순환의 늪에서,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다는 것은 구원을, 행복을 선택했음을 뜻합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날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빛이자 희망이요 행복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행복은 선택이다! 정말 마음에 와닿습니다. 늘 잊지 않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래서 즉시, 늘 붙여놓고 보라고 “행복은 선택이다”라는 말마디를 붓펜으로 A4용지에 선명하게 써드렸습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바로 여기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이 됩니다. 오늘 복음의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는 주제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말을 바꾸어 “말과 글과 행실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해도 그대로 통합니다. 오늘 복음 서두 말씀이 아주 강렬합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전혀 자기 성찰이 없는, 자기 공부가 없는 참 어리석은 무지의 사람들이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오늘도 이와 유사한 사람들 참 많습니다. 적반하장, 내로남불, 표리부동,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거짓 예언자들로 진실과 겸손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언행을 보면 금방 거짓 예언자들임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너무 자명하여 설명이 불필요할 정도입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이와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무가 문제입니다. 나무가 좋으면 열매도 좋듯이 사람이 좋으면 말과 글도 행실도 좋습니다. 나무가 나쁘면 열매도 나쁘듯이, 사람이 나쁘면 말도 글도 행실도 나쁩니다. “사람은 고쳐쓰지 못한다”, “원판 불변의 법칙”이란 비관적 말마디도 회자됩니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속담도 기억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날마다 참된 회개의 삶이, 참된 깨달음의 삶이, 참 좋은 선택과 훈련의 삶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나무는 바꿀 수 없어도 사람은 바꿀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 바로 이런 부단한 공부와 노력의 수행을 통해서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의 은총입니다. 이런 노력이 주님을 감동시켜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는 변화의 은총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날마다 참 좋으신 주님을 선택하고 사랑할 때 우리 삶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 되고 주님을 닮아가면서 참 좋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주님 사랑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사랑뿐이 답이, 길이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듯 선택한 수행들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계명을,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코 이런 사랑의 수행에 지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그 예전 유다 임금 요시야요 그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는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으며, 자기 조상 다윗의 길을 그대로 걸어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았다.”(2열왕 22,2)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습니다. 이런 임금은 희망의 표징이요 백성들은 그대로 보고 배웁니다. 바로 요시야 임금의 진면목이 오늘 독서 후반부에 잘 드러납니다.
‘임금은 기둥 곁에 서서,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지켜, 그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자 온 백성이 이 계약에 동의하였다.”
이렇게 임금과 백성이 모두 하나가 되어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말씀, 계약을 충실히 지킬 때 참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누가 저에게 무슨 맛으로, 무슨 기쁨으로, 무슨 재미로 사느냐 묻는 다면 저는 지체없이 대답할 것이며, 게시판에 써서 붙여 놓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맛으로, 기쁨으로, 재미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하루하루 날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하느님 중심의 삶의 선택보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선택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습니다. 바로 다음 좌우명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도반들과 더불어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날마다 주님을 닮아갈 때 가면은 저절로 벗겨지고, ‘정직(integrity)’하고 ‘투명(transparency)’한 참 나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더도 덜도 아닌 그대로의 나일뿐입니다. 속이 깨끗하면 저절로 겉도 깨끗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 탐욕이 아니라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헛된 것을 보지 않게 제 눈을 돌려 주시고, 당신 길을 걷게 하시어 저를 살려 주소서.”(시편 119,36-3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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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달고 단 포도나무는 못되어도>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걸까요? 아니면 ‘너희는 저들처럼 거짓 예언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겉모양은 양 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실은 이리들이라고 하시는 것으로 보아 속지 말라고 하시는 거지만 오늘 저는 거짓 예언자가 되지 말라고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저를 성찰하고자 합니다.
나는 참 예언자인가? 거짓 예언자는 아닌가?
열매를 보면 안다고 하시는데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아니 그전에 나쁜 열매와 좋은 열매를 가르는 기준은 뭣인가?
우선 행실을 뜻하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 선한 행실과 악한 행실. 이웃 사랑의 행실과 욕심 채우기 행실.
이것을 기준으로 보면 제게는 두 가지가 다 있고 그러니 이 기준에서 저는 참과 거짓 둘 다입니다.
그러니 저는 거짓 예언자이거나 위선자이고 적어도 참 예언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음으로 열매란 주변 사람을 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내 주변 사람을 보면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이지요.
이것을 기준으로 보면 제 주변에는 참 좋은 분들이 대부분이고, 그러니 이 기준에서 저는 잘 산 것이요 참 예언자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제가 나쁜 짓, 제 욕심 채우는 짓만 했다면, 그래서 덕을 보게 하지는 않고 피해만 보게 했다면 제 주변에 좋은 분들이 없을 것이고 있다면 성인들 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 주변엔 나쁜 분들이 하나도 없고 저를 속여먹거나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도 없고, 어떻게든지 저를 도우려는 분들만 계시며 그래서 오히려 제가 여러분을 이용해 먹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참 예언자는 못 됩니다.
그리고 제가 참 예언자가 못 된다는 것은, 참 예언자가 되려고는 하나 못 되었다는 뜻이며, 의도와 의지는 참 되려고 하나 불순물이 있고 불완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가시나무는 아니고 포도나무입니다. 그러나 달고 단 열매를 내는 포도나무는 못되고 신 포도 열매를 내는 포도나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저는 찔러서 아프게 하는 가시나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영적 단맛을 오로지 느끼게는 못하는 신 포도나무이고, 반대로 저에게 여러분은 신 포도를 드시면서도 영적인 단맛을 가려서 취하시는 분들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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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6ㄱ.20)
<참예언자가 되자!>
오늘 복음(마태7,15-20)은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5-16ㄱ)
'참예언자!'
예언자(豫言者)의 사전적 정의는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해주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참예언자의 정의'는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예언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는 '모세'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참예언자인 모세의 모습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었다."(신명 34,10)
오늘 복음의 말씀이 꽤나 뜨끔한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무 대리자'입니다. 때문에 사제는 누구보다도 먼저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사도직의 현장에서, 특히 본당 사도직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말씀(뜻)을 말과 행동으로 전하는 참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이루카 사제는 참예언자인지 깊이 성찰해 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모두 예언직의 소명을 받은 예언자들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ㄱ)
지금 여기에서 행실과 업적으로, 곧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전하는 참예언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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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ZEDCDw4iS4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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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 16)
뿌린 대로
거두는 삶의
이치입니다.
살아 있는
나무에서
살아 있는
열매가
맺어집니다.
사람 속에서
맺어지는
열매는
그 나무를
정확히
드러냅니다.
사람의 마음이
사람의 열매가
됩니다.
하느님을 품고
사는 나무는
하느님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자신은
어떤 열매를 맺고
어떤 선한
영향력을 서로
주고 받는지를
반성합니다.
수확한 열매를
바라보며
수확한
농부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서로를 향한
감사가
깊어갈수록
우리의 어리석은
교만과 이기심은
사라집니다.
하느님을 위한
이웃을 위한
하느님의
열매입니다.
좋은 나무는
그만큼
좋은 열매로
말을 합니다.
좋은 나무를
끝까지
믿어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사람들 속에서
맺어지는
열매를 보고
우리자신과
그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맺으신 열매가
우리를
위로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열매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열매를
하느님 안에서
맺고 있는지를
묻는 오늘의
우리들입니다.
좋은 나무로
좋은 열매를
맺는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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