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락은 2009년 10월 31일 토요일에 노환으로 인하여 사망했다.
‘향년 85세’.
‘학성 이씨’.
-‘시월의 마지막’ 날에 죽었다.
-시월의 마지막 밤.
-슬픈 계절에 만나요 - 이용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어요.
......
-‘잘 죽었다.’ 자알 죽었다!
죽기 잘 했다.
‘죽어도 싸다.’
나쁜 사람인데도 너무 오래 살았다.
진작에 죽었어야 했다.
-‘이후락이 김일성의 친동생인 김영주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장과 서명(수표)한 7.4 남북공동성명은 분단 이후 남북한 당국간 최초의 합의문이었다.’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을 조국 통일의 기본 원칙으로 내세웠다.(사실 그 3대 원칙은 김일성의 제안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
‘그러나 박정희는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이후락을 희생양으로 삼아 안팎으로부터의 비판들로부터 벗어나려고 해임시겼다.’
‘이 때부터 이후락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했다.’
‘전두환의 군사 쿠데타 이후에는 이후락이 부정 축재자로 낙인 찍혀 공직에서 추방 당하여 경기도 이천으로 낙향해서 도자기 제작에만 몰두했었다.’
-‘이후락 전 부장은 1973년 12월에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박정희의 후계자는 이후락”이라고 밝혀 파문을 일으킨 소위 ‘윤필용 사건’, 일명 용팔이 사건, ...으로 숙청된다.’
-‘Daum 통합 검색 이후락 별세검색’
-‘경희대 동서 신의학 병원은 밝혔다.
이후락 전 부장이 5월부터 뇌종양 증세로 170여일 동안 치료를 받아오다가 최근에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이 날인 10월 31일 토요일 오전 11시 45분 숨졌다.’
-‘이후락은 1924년에 경남 울산에서 태어났다.
이후락 전 부장은 울산 공립 농고를 나와 1946년에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 영어 학교를 1기생으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로 육군 정보국 차장과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 박정희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쳐 1970년 12월에 중앙정보부 부장을 맡는 등 박정희 정권의 실세로 활약했다.’
-‘‘유신시대 풍운아’ 이후락 씨 별세’
‘권력의 화신으로 영욕의 세월을 보냈다.’
-‘유신의 풍운아 이후락 별세’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의 화신도 세월의 흔적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아무튼. 올해에는 많은 정치인들이 생을 마감했다.’
-‘이후락 별세 … 박정희 절대권력 탄생 도운 ‘유신의 2인자’. 091101일1049.35. 인터넷 뉴스 팀. ggamnews@hkn24.com’
‘권위주의 정권의 절정인 유신 체제 탄생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DJ(김대중) 납치 사건은 이후락의 책임 하에 진행되었다.’
‘이후락의 별명은 제갈조조(諸葛曹操)였다.
제갈공명과 조조를 합친 것 같다는 얘기이다.
치밀하고 지략이 뛰어난 전형적인 모사 스타일이란 평을 받았다.
통치자와 주파수를 맞추는 데에 비상한 재주를 발휘했다.
70년에 주일 대사 시절에 이후락은 도쿄 대사관 근처 일식집에서 생선 초밥을 비행기편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공수할 정도였다.’
‘이후락에 대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임은 두터웠다.
이후락 전 부장이 친미 정보통이란 점도 발판이 되었다.’
‘‘제갈조조’ 이후락은 ‘피스톨 박’ 박종규 당시 경호실장과 끊임없이 부딪혔다.
두 사람들은 치열한 충성 경쟁을 벌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용인술이기도 했다.
두 사람들의 충돌에는 성격 차이도 작용했다고 한다.
책사형(이후락 전 부장)과 행동파(박종규 전 실장)의 대립이었다.
이후락이 이끌던 청와대 비서실은 ‘소내각’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이후락이 권력의 정점에 선 때는 72년 남북 공동 성명을 이끌어낼 무렵이다.’
‘하지만 윤필용 수도 경비 사령관이 “박정희의 후계자는 이후락”이라고 말한 ‘윤필용 사건’으로 위기를 맞는다.
윤필용 사령관은 이후락 전 부장의 심복이었다.
윤필용 사령관은 이후락 전 부장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노쇠’를 입에 담았다.
이 사건으로 윤필용 사령관은 옷을 벗었고, 이에 다급해진 이후락 전 부장은 김대중 납치 사건을 주도하여 박 전 대통령에게 충성심을 보이려 했다는 것이 유력한 분석이다.
98년에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는 홈페이지에서 ‘1973년 비밀 외교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이후락 전 부장이 ‘김대중 납치 사건’을 주도했다고 밝혔다.
이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하여 이후락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고 눈을 감았다.’
-‘DJ 납치 사건의 진실 끝내 침묵 …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별세. 091101일1052.15. 인터넷 뉴스 팀. ggamnews@hkn24.com.’
‘뇌종양과 노환이 겹쳐 숨졌다.’
‘70년 1월’. ‘이후락은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후보가 맞붙은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총지휘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72년 5월에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 7•4 남북 공동 성명을 이끌어냈다.’
‘73년 4월에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사석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는 이후락’이라고 말한 것이 밖으로 알려지면서 중정부장에서 물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윤필용 사건’ 후 DJ(김대중) 납치 사건을 주도했다.
이후에는 정계를 물러났다 79년에 제10대 국회의원이 되지만 80년 6월에 신군부에 의해 고 박종규 전 대통령 경호실장 등과 함께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지목되었다.’
‘유족은 이동훈 전 제일화재 회장 등 4남1녀이다.’
-‘유신 실세, 이후락 별세…영욕의 85년’
‘이제 하나씩 사라져주는군요~’
‘김대중 대통령 납치 사건을 주도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당선시키려고 야당 테러를 주도하고’
‘오죽했으면 김대중 대통령께서 나는 박정희에게 진 게 아니고 이후락이에게 졌다고까지 하셨을까요~’
‘그나저나 전대갈님은 언제 가실려나~’
-‘“이후락 자녀 美 부동산 다수 소유”. 연합 뉴스. 091031토1816에 입력. 091031토2233에 수정.’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자녀들이 미국에 최대 5천만달러(≒500억원) 규모의 부동산들을 소유하고 있다.’
‘재미교포 블로거 안치용 씨는 이날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사이트 '시크릿 오브 코리아'를 통해 주장했다.
부동산 규모가 3천만~5천만달러에 달한다.’
‘전국민이 죽어라 일해도 거지 소굴을 면치 못 했던 이유golf님 | 091101일0330
박괴수, 김종필, 이후락, 박종철, 김현옥, 정일권. 우선 요놈들 재산들이 어느 정도인가 한번 파헤쳐 보라.
기가 막혀서 숨도 제대로 못 쉬게 될 것이다.
장면 내각이 국제 법에 따라 수년에 걸쳐 받기로 일본과 협상을 끝낸
천문학적 일제 36년 피해 보상금까지 국민들이 모르게 쓸어먹었던
아주 더러운 똥물 놈들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보상을 받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어떤 깡통이 박괴수 시대를 깨끗하다고 말했는가!
위 아래가 온통 썩어서 부패 공화국이라고 했다.
얼마나 썩었는가 하면,
그ㅤㄲㅏㅈ 초본 한장을 떼려고 해도 일명 급행료를 찔러줘야 했다.
급행료다 없이는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난한 서민들이 울기도 많이 울었다. 추천 6’
=제1편. 제6편. 한국의 수구 꼴통 군벌 가문들. 이후락. 정일권.
-‘이것이 박정희가 제시한 국가 비전이었고, 이후락은 이 국가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충직한 개 노릇을 마다하지 않은 자였던 것이다.’
‘... 이후락은 이 국가 <.span class="__mozilla-findbar-search" style="padding: 0pt; background-color: yellow; color: black; display: inline; font-size: inherit;">비전<./span>을 달성하기 위해 충직한 개 노릇을 마다하지 않은 자였던 것이다.’
[12/73]쫄빙 (hanpedro) IP 121.151.61.x 작성 일 2008년4월20일 03시37분 망박이 탄핵 때까지 이곳에 걸어 두길 바랍니다.
[3/79]아네모네 (clear) IP 116.45.126.x 작성 일 2009년6월26일 16시59분 ......
사람의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지요.. 가능하면 살아서 이기고 싶지 않은 사람 누가 있겠어요...
그러나 희생 없는 제사 없고, 지혜만으로 이루어진 혁명 또한 없습니다.
명예 혁명 같은 것도 필요한 피는 흘리겠다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가능했을 뿐입니다.
......
[1/12]서영석 (du0280) IP 59.187.238.x 작성 일 2008년6월21일 12시04분 원문도 한번씩 눌러주는 센스를... ㅋㅋㅋ
한국의 명문 가문 제 1편 “이후락 가”
번호 626362 글쓴이 쩜억개 조회 28889 누리 20 (20/0) 등록 일 2005-9-22 17:06 대문 추천 7
대한민국에 수많은 명문 가문들 가운데 왜 하필 맨 첫번째로 후라이 이후락의 집을 들먹이는가?
대머리 까진 놈도 있고, 귀 늘어진 놈들도 있는데 왜 하필 이후락이냐?
그 이유는 길이길이 남아야 할 이후락의 업적이 역사 속에 묻혀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후락은 수 많은 업적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평가를 못 받고 있다.
대머리 까진 놈은 그래도 국회에 출석하기도 하고, 절에 좀 가 있기도 했다.
귀 늘어진 놈은 추징금이나 많이 냈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민중들이 대머리 까진 놈하고 귀 늘어진 놈은 때려죽이라고 난리이다.
그런데 여기에 반해 박정희 정권을 사실상 세우고 지탱해 온 부정축재자 이후락에 대해서는 조용하다.
내가 친구들을 붙잡고 무작정 물었다.
“혹시 이후락을 아느뇨??”
역시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설령 이름 석자는 어디서 들어봤더라도 구체적으로 이후락이 어떤 인물이며, 그 인물이 어떤 업적을 통해서 오늘날 자신의 가문을 한국의 명문가문 반열에 올려놓고 지금도 대한민국 주류로서 떵떵거리고 사는 건지 잘 모르고 있었다.
울산을 대표하는 인물로 울산 시민들이 선정하기도 하는 등 아주 가관이다.
우선 이후락이라는 사람은 박정희 밑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호가호위했다.
대통령 비서 실장,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사람으로써 대한민국에 “떡값”이라는 말이 처음 회자되게 만든 사람이다.
“떡을 들고 다니다 보니 떡고물이 묻었다...”
이 천인공노할 말을 스스럼없이 한 분이다.
그런데 이 분이 받아쳐드신 떡고물이 무려 194억원이다.
70년대 초에 194억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알아보기 위해 당시 서울에 그래도 사람이 살 만한 집 한칸을 마련하신 나의 모친에게 물었다.
“당시 얼마 주고 집을 사셨나요?”
“200만원.”
요즘 서울의 웬만한 집값이 2-3억 간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후락은 떡고물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조원에 가까울 만큼 쳐 잡수신 것이다.
이것은 대머리와 귀 큰 놈의 수준에 거의 근접하는 것이다.
당시 김종필, 이후락을 비롯해 전두환 신군부에게 박정희 정권 하 부정 축재자로 몰린 사람들이 해먹은 돈이 밝혀진 것만 총 887억원이었다.
지금 돈으로 치면 10조원이다.
이후락 이분은 얼마나 낯짝이 두꺼우신 분인가?
우리는 이런 배짱을 배워야 한다.
혼자서 2조원을 쳐 잡수시고도 떡고물이라고 말하는 저 배짱...
다들 알다시피 이후락은 박정희 시절 공무원이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할 공직자가 떡고물을 직무 중에 2조원씩이나 쳐 잡수신 것이 과연 자랑할만한 명예인가?
그것이 대가성이 있는 뇌물이든, 어떤 덜떨어진 놈들이 그냥 갖다 쳐 바친 것이든 이후락 같은 공무원들 10명만 있으면 대한민국은 거덜난다.
또 상식적으로 어떤 미친 놈이 대가 없이 이익을 수수하게 해 주겠는가도 한번 생각을 해 봐야 한다.
그 이익과 대가성을 명확하게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 수사 기법 상의 어려움일 뿐 공무원 이후락에 대한 민중들의 도덕적 평가는 그와는 별개이다.
미국 의회의 보고서에도 이후락은 스위스에 비밀 정치 자금을 예치하고 관리하는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락 아들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가 스위스에 예치한 비밀자금이 60억 달러. 당시 수출 100억 달러 달성 어쩌구 떠든 것과 비교한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후락이 관리한 박정희의 스위스계좌는 박근혜로 명의가 바뀌었다고 한다.
전두환이 10, 26 이후 박근혜를 스위스로 보내 돈을 찾아와서 민정당 창당 자금으로 썼다는 설도 있다.
그 때 따라갔던 보안요원이 수고 비로 5만 달러를 받았다고 고백한 바도 있다.
▲ 이후락
ⓒ엠파스 이미지 검색
어쨌든 이후락이 검은 돈을 얼마나 많이 받아먹었는지 이후락의 부인과 자식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쳤던 사람의 말에 의하면 집에 돈 봉투를 들고 오는 사람이 하도 많다 보니 집주인이 내방객으로부터 받은 봉투를 소파 밑에 밀어 넣어 두었다가 깜빡 잊어 버려 청소하던 식모가 당시 돈 수백, 수천만원짜리 수표가 든 돈 봉투를 주운 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코흘리개이던 이후락의 셋째 아들 이동욱이 모씨의 집에 놀러왔다가 모씨의 어린 딸에게 돈 세는 법을 가르쳐 준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폐를 한 장씩 넘기면서)”돈은 1억, 2억, 3억... 이렇게 세는 거야”
박정희가 뒈지고 나서 전두환이 껍죽거리면서 조사 좀 하는 것 같더니 어느새 유야무야 다 처리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구렁이 담 넘어가듯 종결지어졌다.
큰 깡패들이 나타나면 동네 양아치들이 숨을 좀 죽이고 사는 그 정도였을 뿐이다.
공무원이 2조원이나 처먹은 사건에 대해서 아무런 단죄도 없이 그 불법적인 이익을 그대로 인정한 채 대중의 망각을 틈 타서 도리어 그 막강한 금력과 배경으로 명문가문 행세까지 하게 됐다.
그 엄청난 돈으로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초월읍 도평리, 기가 막힌 명당터에 대저택을 지어놓고 왕처럼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 아닌가? 별장과 그 부지가 무려 9000평이다.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해수욕장에도 붉은 지붕과 크림색 외관, 1층의 고급스러운 테라스와 2층의 이국적인 인테리어를 갖춘 무지하게 예쁜 별장을 지어놓고 있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고 한다면 이게 말이 되느냐 이 말이다.
김재규의 옥중 수양 록에 보면 이렇게 나온다.
혁명적 방법이 아니고 무엇으로 시정할 것인가. 지금도 천하를 활보하고 있는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정렴, 오정건, 장동운, 길재호 등 수많은 부정치부자의 재산을 혁명적 방법이 아니고 무슨 방법으로 환수하겠는가.
지금 참여정부의 이병완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김승규 국가정보원장이 이후락의 1000분의 1이라도 뇌물을 먹었다면 과연 조중동은 가만히 있겠는가?
왜 이후락이 뇌물 처 잡수신 건 용서가 되고, 이병완실장이나 김승규원장은 안되는 거지? 조중동이 그 이후라도 이후락의 비리나 부정에 대해 무섭게 질타하고 심층취재한 적 있나?
천문학적인 돈만 받아먹은 게 아니라 한승헌 사법개혁위원장에 의하면 “김대중 납치사건”도 이후락의 작품이라고 한다.
야당의 대통령후보이자 정치지도자인 김대중 씨를 일본 동경에서 백주대낮에 납치하여 국내로 끌고오는 황당한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던 것이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박정희에 대한 이후락의 과도한 충성이 빚은 참극이었다.
물론 박정희의 암묵적인 동조 내지는 방관이 있었겠지.
그 뿐이 아니다.
71년도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에게 패배하고 김대중 후보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박정희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 이후락에게 졌다.”
당시에 이후락은 관권, 금권 선거의 총 책임자였다.
이런 짓거리까지 하고도 그 패거리들이 뚫린 입이라고 민주주의 운운하는 꼴을 보면 기가 차다.
최종길 교수 의문사에 대한 진상조사가 활발하지만, 나는 불만이다.
당시 이후락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고방식을 가진 부도덕한 인간들에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어디 최종길 교수 뿐이겠는가?
최종길 교수는 서울 법대 교수이고, 그 가족들도 어느 정도 사회적인 지위가 있으니 이나마 진상규명의 노력이 있는 것이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은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그 정점에 박정희가 있고, 그 밑에 HR이라고 불리던 이후락이 있는 거 아닌가?
그 끔찍한 국가적 폭력 “실미도 사건”의 책임도 이후락에게 있다.
경향신문을 강탈한 것도 이후락이다.
평생을 남 뒤나 캐고, 약점이나 잡아서 공작하고, 대한민국을 우간다같은 나라로 만들기 위해 헌신했다.
국가의 녹을 먹는 민주공화국의 공직자가 국민들은 어떻게 보든지 말든지 박정희 눈에만 들면 된다는 식으로 온갖 아부를 하였다.
이후락은 교활한 인물로 매우 유명하다.
그의 교활한 삶을 자세히 보면 기가 차다.
김정렬은 이런 말을 했다.
“이후락이는 말이오, 국군 창건 당시에 대위로 시작한 놈이오.
그보다 나이도 위고 계급도 위였던 박정희가 소위로 시작했는데 말이요.
해방 직후 귀국한 일본군 장교 출신들은 모두 군사 영어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거기를 수료하면 일본군 시절의 계급을 참작해서 국군 장교로 임관시켰거든.
그런데 이후락이는 끝까지 자기가 일본군 대위였다고 우긴 거야.
하도 우기니까 미군 측에서도 사실을 뻔히 알면서 대위로 임관시켰지.
사실상 그 때부터 이후락이는 미군 측과 거래가 있었겠지.”
박준규는 이후락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다.
“5.16 후 감옥에 잡혀 들어갔을 때 이후락이가 내 옆방에 있었는데 이 자가 얼마나 약던지 삽살개처럼 굴더니 먼저 빠져나가더구먼.”
물론 박정희라는 사악한 인물이 부하들을 그렇게 만들어 이용한 측면이 많다.
또 사람을 써먹고는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식으로 용도 폐기하는 것도 물론 박정희의 특기이다.
어떻게 보면 이후락은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정을 해 주기에는 죄악이 너무 크다.
또 이후락은 미국 CIA가 박정희 주변에 심어놓은 첩자라는 얘기가 있다.
게다가 이후락은 박정희의 반민주적 행각을 앞장서서 도와준 악질 앞잡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국적 민주주의를 주창하며 민중의 인권을 짓밟았다.
그들이 말하는 한국적 민주주의는 대통령을 욕하면 중앙정보부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다가 죽여버리기도 하고, 각종 죄목을 붙여서 간첩으로 만들기도 하는 그런 민주주의였다.
그들이 말하는 한국적 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노동조합 만들려고 하는 사람을 잡아다가 가두어 버리는 그런 민주주의였다.
그들이 말하는 한국적 민주주의는 국가 정보 기관이 정치인들을 시도 때도 없이 도청하고, 약점들을 잡아 협박하는 그런 민주주의였다.
그들이 말하는 한국적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지성인이라는 대학교수나 대학생들이 자기 생각을 담은 글 한 줄 발표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체제였다.
그들이 말하는 한국적 민주주의는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긴급 조치로 처벌할 수 있게 하고, 긴급조치를 위반한 사례를 허락 없이 발표하거나 신문에 보도하면 다시 긴급조치 위반이 되도록 만들어 놓은 체제였다.
이것이 박정희가 제시한 국가 비전이었고, 이후락은 이 국가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충직한 개 노릇을 마다하지 않은 자였던 것이다.
물론 개 노릇을 하면서도 한눈을 팔면서 열심히 떡고물을 주워먹었던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좋다.
개 노릇도 좋고 떡고물 주워먹었던 것도 좋다.
그러나 이 대명천지에 뻔뻔스럽게 한국의 명문 가문 행세를 하는 꼴만은 제발 보고 싶지가 않다.
이후락과 형님 동생 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신진자동차의 김창원, 극동건설의 김용산, 대농의 박용학, 한국화약의 김종희, 호남정유의 서정귀 등이 소위 말하는 이후락 5인방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화 그룹의 창업자 일명 “다이너마이트 김” 김종희이다.
SK 창업자 최종건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이들은 모두 이후락과 사돈을 맺게 됐다.
이후락에게는 세 아들이 있다.
큰 아들 이동익은 박정희의 고교동창이자 당시 끗발 좀 날리던 호남정유 사장 서정귀의 딸과 결혼했다.
작은 아들 이동훈은 한화 창업자 김종희의 딸 김영혜와 결혼했다.
그러니까 현 한화회장 김승연과 처남 매부지간이다.
막내 아들 이동욱은 SK 그룹 창업자 최종건의 딸 최예원과 결혼했다.
이렇게 보니까 무지하게 그럴싸하지 않은가?
박정희 치하의 최대 이권이 무엇이었는가? 미국 석유회사 칼텍스와 유니언 오닐사의 한국 내 합작선 선정이 가장 큰 이권이었다.
결국 이 엄청난 이권은 이후락 큰 아들의 처갓집인 호남정유와 이후락 둘째 아들의 처갓집인 한화그룹 계열사 경인에너지가 먹었다.
게다가 막내아들의 처갓집인 SK는 유공을 먹었으니... 헐
요즘 종이 신문들이 이후락에게 치매기가 있다는 둥 말년이 불행하다는 둥 하면서 연막 작전을 펴고 있다.
좆을 까라, 씹쌔들아... 이후락이는 젊을 때부터 바둑을 많이 두고, 비상한 두뇌를 지닌 인물이라서 내가 보기엔 절대 치매 안 걸린다.
이제 겨우 여든인데 벌써 엄살은... 요즘에는 교통 사고만 안 나면 90세까지는 다 살 수 있다.
그리고 젊을 때부터 그렇게 잘 쳐먹고 살았는데 뭘 죽는 시늉을 하나?
그 죄값을 다 치루고 가야지, 그냥 편안하게 가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후락에게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라야 말이지.
이후락의 사돈인 SK 그룹 창업자인 최종건과 조선 일보의 방일영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물론 이후락도 방일영과 깊은 관계였다.
방일영만?? 동아일보 김상만과도 깊은 관계였다.
“형님의 형님은 형님이다”라는 공식이 있지 않은가?
설마 그런 깊은 관계를 가진 조선일보, 동아일보에서 이후락 아직도 잘 먹고 잘 사니까 얼른 조지라는 칼럼을 쓰지는 못할 것이 아닌가?
이후락 둘째 아들의 처남이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인데 굶어 죽게 내버려두기야 하겠는가?
게다가 이후락 둘째 아들의 처남 김승연의 장인어른이 얼마 전까지도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있던 5선 의원 서정화이다.
지금도 한나라당 고문으로 있다.
서정화가 중정 차장 출신이니 이후락을 모를 리 없다.
이후락에 대한 진상조사라도 하겠다고 하면 아마 쌍심지를 켜고 덤벼들 것이다.
게다가 이후락의 사돈인 서정귀가 서정화의 6촌형이다.
게다가 김승연의 동생 김호연을 통해서 대한민국 모든 재벌이 또 다 얽히게 된다.
또 이후락 아들의 처남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의 큰아버지 김종철이 국회의원을 여섯 번이나 해먹은 사람이다.
김승연의 작은 아버지 김종식도 국회의원이었다.
내가 요즘에 숙명 여자대학교에서 서정화를 왜 이렇게 특별 대우하는가를 의심스러워서 알아봤더니 얼마 전에 죽은 윤덕주가 숙명 학원 이사로서 자랑스런 숙명인 상을 비롯해서 숙명 학원에서는 거의 영웅으로 취급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숙명 학원 발전 기금도 심심하면 내고, 한국 농구 계에서도 알아주는 인물이었다.
대한 농구 협회 명예 회장이다.
윤덕주는 이후락의 사돈 서정귀의 마누라이다.
껄껄... 신문쪼가리들, 윤덕주가 박정희의 절친한 동창 서정귀의 마누라이며 그 덕분에 끗발 좀 날렸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농구 계의 대모이며 숙명의 큰 별이 떨어졌대나 뭐래나..... 헐
내가 눈여겨보는 것은 대한농구협회 회장이 열린 우리 당 이종걸 의원이라는 사실이다.
이후락의 사부인 윤덕주가 죽었을 때 조사를 낭독하기도 했다.
실눈을 뜨고 계속 지켜볼 것이다.
어쨌든 또 이후락의 막내며느리 최예원의 사촌 오빠가 SK 최태원 회장이다.
사촌 올케가 바로 그 악명 높은 노태우의 딸 노소영이다.
이 노소영의 동생 노재헌의 부인이, 그러니까 노태우의 며느리가 신동방 그룹 신명수회장의 딸 신정화이다.
신명수는 노태우의 비자금을 관리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신정화의 이모가 송원자이다.
이 송원자의 남편 이봉서, 그러니까 노태우 며느리 신정화의 이모부 이봉서가 요즘 이회창 정계 복귀를 위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으로 우리 민주개혁세력은 보고 있다.
이봉서는 이회창의 경기고등학교 후배이다.
그 주변에는 아남 그룹 회장 김주진과 한국유리공업 회장 이세훈 등이 있다.
이 이봉서의 딸 이원영이 이회창의 군대 안 간 큰 아들 이정연과 결혼을 했다.
이로써 이봉서와 이회창은 사돈지간이 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후락의 영향 력이 건재하다는 증거가 된다.
이후락 - 전두환 - 노태우 - 이회창은 한 통속이라는 강력한 증거이다.
노태우의 며느리 신정화 쪽으로 가다 보면 전두환이 또 나온다.
신정화의 아버지 신명수의 동생 신영수의 아들, 그러니까 신정화의 작은 아버지의 아들이 이희상 한국제분 회장의 딸 이유경과 결혼을 했다.
이유경의 형부가 전재만이다.
재만이 아버지가 바로 전두환이다.
전두환 아들 전재만의 마누라 이윤혜의 동생 76년생 이미경의 시어머니가 송광자이다.
송광자의 조카가 이원영이다.
이원영의 시아버지가 이회창이다.
이회창의 구기동 자택이 전두환의 며느리 이윤혜의 명의로 되어있던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렇듯 이후락 가는 여전히 막강하게 대한민국 명문 가문 행세를 하며 여전히 대한민국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내일은 한국 명문가문 제 2편 “홍진기가”에 대해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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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니빠님이 위의 쩜억개(피투성이)님의 글을 도표로 정리해주심
한국의 명문 가문 제 6편 “정일권 가”
번호 629407 글쓴이 쩜억개 조회 11122 누리 15 (15/0) 등록 일 2005-9-28 18:47 대문 추천 3
<개에 물린 적이 있다> 유용선
내 나이 여섯살 적에
아버지와 함께 간 그 냄새나는 식당,
그 옆에 냄새나는 변소,
그 앞에 묶여 있던 양치기,
는 그렇게 묶인 채로 내 엉덩이를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안 물어.
그 새끼 그 개만도 못한 주인새끼의
그 말만은 믿지 말았어야 했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
는 말이 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는 번번이 짖는 개에게 물렸다.
사랑을 부르짖는 개,
는 교회에서 나를 물어 뜯었다.
정의를 부르짖는 개,
는 내 등 뒤에서 나를 덮쳤다.
예술을 부르짖는 개,
는 백주대로에서 내 빵을 훔쳐 달아났다.
괜찮다, 괜찮다,
는 개소리는 지금도 내 엉덩이를 노린다.
괜찮아, 괜찮아, 물지 않을 거야.
저 새끼 저 개만도 못한 새끼의
싸늘한 속삭임을 나는 도시 믿을 수 없다.
사실 이 시의 제목은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가 아니라 “우리는 지금도 개떼들한테 물리고 있다.”라고 해야 맞다.
오늘은 한국의 명문가문 제 6편 “정일권가”에 대해 알아보자.
어 릴 때부터 내 머리 속에는 정일권의 이름 석자가 뱅뱅 돌았다.
왜냐하면 내가 어린 시절 “多景峰”이라고 스스로 이름을 붙이고 놀던 산이 있었다.
어두컴컴할 정도로 울창한 숲 속에 진달래가 활짝 핀 산길을 따라 가다보면 갑자기 전망좋고 양지바른 곳에 그야말로 호화찬란한 묘가 하나 나오는데 내가 세상 태어나서 본 적이 없을만큼 삐까뻔쩍한 묘였다.
바로 그게 나의 어린시절 놀이터, 정일권가의 묘소였다.
넓직한 잔디밭이 있어서 참 좋았다.
1980 년대 초반이었으니까 당시 대다수의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을 때였다.
내가 오죽 아름다웠으면 그 산을 다경봉이라고 불렀겠나? 그 아름다운 산에 봉분을 만들어서 호석을 그야말로 휘황찬란하게 둘러 감아놓고 표석도 참 아름답게 해 놓았다.
그 주변에 수많은 무덤들이 있었지만 호석은 태어나서 처음봤고 그렇게 아름다운 고급석재로 된 상석이며, 표석 또한 그 처음 봤다.
해가 넘어갈 즈음 빽빽한 숲 사이로 햇살이 비치면 정일권 집안 무덤만 환하게 빛나는 경이로운 모습을 보고 감탄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대리석에 햇살이 반사되면 어두컴컴한 숲 속에 광채가 났다.
어린 마음에도 정일권이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 집 무덤을 보고 느꼈다.
정일권은 1917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났다.
지도를 보면 한반도의 최북단이다.
어쨌든 한반도의 최북단에서 태어난 정일권이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다.
정일권은 이 일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상으로 일본 군부대신의 군도를 선물로 받았다.
정일권 집에 놀러온 일본군 장교들조차 이 군도에 거수경례를 하고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고 한다.
그 후 번뜩이는 예복을 차려 입고 자신의 모교 광명 중학교로 가서 일본군에 입대할 것을 선동하고,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 입교를 위한 진학지도를 했다.
정일권은 그야말로 그 당시 선망의 대상이었다.
일본 육사 수석졸업에, 일본 관동군 사령관 전속부관으로서 화려한 견장을 하고, 허리에는 일본도를 찬 채 백마를 타고 출근하는 모습이 왜 부럽지 않았겠나?
오로지 조선인 가운데 정일권만이 누리는 영광이었다.
이런 영광을 누리고 싶었던 조선의 젊은이들이 정일권의 언변에 혹하여 줄줄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을 했다.
만주군관학교에 그 해(1938년)에 입학한 조선 젊은이들이 13명인데 그 가운데 11명이 정일권의 광명중학교 후배들이다.
이 자들이 해방 이후 정일권을 정점으로 대한민국의 군을 지배했는데 소위 말하는 관북파, 또는 “알래스카 부대”라는 군벌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모조리 대한민국 군내에서 장성급의 요직을 담당했다.
정일권은 어쨌든 일본 관동군 헌병대 대위로 근무하면서 제국주의의 압제에 시달리는 조국과 민족의 비참한 현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침략자의 주구로서 활동하며 일신의 안위만을 누렸다.
그러다가 미군과의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정일권은 바빠졌다.
소련군이 선전 포고를 하고 곧 일본군이 미군에게 항복하자 정일권은 재빨리 변신을 꾀하기 시작했다.
만주 지역의 한국 교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을 추종하는 일본 관동군 출신의 조선인 간부들을 모아 “만주교민보안대”라는 것을 만들어 스스로 사령관에 올랐다.
소련군이 밀려온다는 소식을 접한 정일권은 즉시 “만주 교민 보안대”를 잽싸게 독립군의 모습으로 변신시키고 “동북지구 광복군 사령부”로 이름을 바꿨다.
▲ 정일권 전총리
ⓒ엠파스 검색
심지어 독립군 가까지 만들어 불렀다.
이 노래는 후에도 계속 애창되었다.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혈관에 파동치는 애국의 깃발, 생사도 다 버리고 공명도 없다, 보아라 우리들의 힘찬 맥박을 가슴에 울리는 독립의 소리”
어쨌든 친일 반민족 행위자가 느닷없이 광복군 독립 투사로 극적으로 둔갑하였으니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곧 정일권의 사기 행각은 소련군 보안 부대에 의해 발각되고 말았다.
“동북 지구 광복군 사령부”는 곧 무장 해제되고 강제 해산 명령을 받았다.
또 일본 관동군 헌병대 대위 정일권은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정일권은 소련군에 체포된 후 소련군 수사관으로부터 소련 유학을 권유 받아 유학을 결심하였으나 불합격하였다.
그 이유는 소련군 보안부대에서 정일권을 떠보기 위해서 친구 최 모를 시켜 “소련군 보초를 죽이고 도망치자”는 제안을 하게 했는데 정일권이 덜컥 수락함으로써 반동분자로 몰리게 된 것이다.
즉 소련군 보안부대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반동 분자로 몰린 정일권은 시베리아 행 숙청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드라마틱하게도 시베리아 행 포로 열차에서 탈출, 죽기 살기로 월남하였다.
월남에 성공한 정일권은 즉시 미군이 운영하는 군사 영어 학교에 입학하였다.
우수한 일본군 장교에서 독립군으로 변신하고, 소련군에게 체포되자 소련 유학을 결심하고, 극적으로 월남을 하여 영어 학교에 입학하는 과정을 한번 보라!!!!!
변신의 대가 살아 있는 꺼삐딴 리를 보는 듯하다.
정일권은 충실하게 미 군정의 일제 잔재 부활 정책에 편승하여 미군의 신임을 얻고, 지리산에 은거하는 좌파들을 소탕하는데 앞장서서 이승만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5일 뒤, 1950년 6월 30일 불과 32살의 나이에 정일권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 된다.
사단과 군단을 지휘해 본 적도 없는 자가 느닷없이 육군 참모 총장이 된 것이다.
전쟁 중 소위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나 정일권은 군복을 벗게 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이란 군 윗 대가리 새끼들이 전쟁 중에 군인을 양성하라고 국민방위군에 배정된 예산과 물자, 보급을 빼돌리고 죽자 살자 달리기만 시켜 부지기수로 굶어 죽이고 병들어죽이게 한 사건이다.
무려 젊은이들 천 수백명이 죽었다.
정일권은 이 사건으로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 미국 참모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것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 실로 다행이었다.
훗날 정일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만주의 숨통을 따라 30~50발의 원자탄을 줄줄이 던졌을 것이다.
그리고 50만명에 달하는 중국 국부군을 압록강에 투입하고 우리의 뒷편인 동해에서 황해까지에는 60년 내지 120년 동안 효력이 유지되는 방사성 코발트를 뿌렸을 것이다”
그 후 주불 대사로 근무할 때 드골에게도 핵전쟁을 대찬성했다고 고백했다.
한마디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일권의 몰상식한 성품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민족의 고통, 국토의 황폐화를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승리만을 꿈꾸는 승리지상주의의 전형이다.
어쨌든 정일권은 1957년 합참의장, 육군대장으로서 22년간의 군생활을 마감한다.
그 이후 이승만의 궁정외교의 앞잡이가 되어 터키대사, 주불대사, 주미대사를 맡게 된다.
▲ 한일협정 서명 장면. 왼쪽 끝이 정일권.
ⓒ엠파스 검색
주 미 대사 직에 있을 때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게 되었다.
5.16 군사쿠데타 나흘 뒤 정일권은 하버드대 연구실에서 혁명을 도와달라는 박정희의 전화를 받게 된다.
정일권은 동분서주하며 군사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미국의 각계인사를 접촉한다.
물론 본국에서 김활란, 한경직 따위의 기독교 인사들을 비롯한 각계인사들이 또 박정희를 선전하기 위해 날아와서 정일권을 도왔다.
이 때 정일권은 박정희의 깊은 신임을 얻었다.
제 3공화국이 시작되자마자 외무부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처음부터 국무총리를 시키려고 했으나 모두 군 출신인 것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한일회담 반대집회가 거세지자 정일권이 국무총리로 올랐다.
이로부터 무려 6년 7개월 동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리직을 수행하였다.
정일권은 운 좋게 영국의 처칠 수상의 장례식 장에서 기시와 가까이 앉아 대화할 수 있었다.
기시는 A급 전범으로서 사실상 만주국의 실권자였으며 한일 인맥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일본 관동군 헌병대 대위 정일권과 만주국 실력자 기시는 금방 친밀감을 느꼈다.
게다가 정일권은 만주 관동군 출신 장교들의 모임인 난성회 회원이었으므로 더욱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로써 순탄하게 굴욕적인 한일 회담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정일권의 내각을 소위 불도저 내각이라고 한다.
이것은 정일권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는 실상 박정희의 지시를 그대로 수행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일권은 무색무취한 스타일로서 철저한 yes 맨이었다.
청와대에서 국정 보고를 할 때도 자신의 의견을 내세운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만년 마담”이었다.
바로 이런 식의 처세술로 박정희를 신처럼 떠받들며 무려 6년 7개월간 최장수 총리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총리직을 6년 7개월간 수행한 후 물러나며 천하의 아부쟁이 정일권은 이런 말을 늘어놓았다.
“박 대통령 각하는 정말 진실한 분입니다.
그분의 영도 력과 애국 심은 언제나 나의 거울이 되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자애로운 인간성은 번번히 저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총리직은 물러나지만 그 분을 언제 어디서나 성심 성의껏 보좌해서 이 나라의 국력이 더욱 신장되는 것을 바랄 뿐입니다.”
총리직을 마친 아부쟁이 정일권은 박정희에게는 유신 헌법을 옹호할 국회 의장으로서 적격의 인물이었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를 “통법부”, “행정부의 시녀” 노릇이나 하며 만족하게 할 수 있는 적임자였다.
국회가 “어린 아기나 보는” 무위도식 국회의 표상이 된 것이 바로 정일권이 국회의장이 된 9대 국회부터였다.
정일권은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헌법기관을 비방, 모독하는 것을 처벌토록 하는 형법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질의도 없고, 찬반토론도 없고, 심지어 의원 수조차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통과시켰다.
김옥선 파동이 일어났을 때도 낼름 처리했다.
그래서 국회의장 정일권의 일 처리를 사람들은 “동사무소 직원이 사망신고서에 도장 찍듯”이라고 표현했다.
심지어 정일권은 사초에 손을 대기도 했다.
심심하면 속기록을 삭제하는 일이 정일권 국회의장의 취미였다.
이런 탁월한 능력 때문에 최장수 국무 총리 기록과 더불어 최장수 국회 의장의 기록도 보유하게 되었다.
자유와 인권은 엄청나게 손상시키면서도 외유나 세미나만은 매우 풍성하게 했던 국회 의장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최장수 국회 의장이면서도 가장 적은 회의일 수를 기록한 국회 의장으로도 역사에 남아있다.
정일권은 이외에도 숱한 의혹을 지닌 인물이다.
사생활도 상당히 문란했던 모양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정인숙 사건이다.
그러나 나는 공적인 영역이 아닌 부분에 관해서는 별로 파헤치고 싶지 않다.
또 정일권 스스로 딱 한번 밖에 안 잤다고 하니 이 부분은 생략한다.
이 위대한 과업은 여성지들에게 부여한다.
박동선 사건과도 연관이 있고, 통일교 문제도 정일권과 연관이 있으나 다 뻔한 얘기이다.
자유총연맹 초대 총재와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 고문을 역임하다가 임파선 암에 걸려 지난 1994년에 죽었다.
정일권이 죽을 때 유언은 이것이었다.
“전두환만큼은 정말 나쁜 놈이다.”
어쨌든지 간에 이 정일권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한국의 주류로 행세하게 되었는데 정일권가의 후손들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가 않은 일이다.
일단 정일권의 후손이 누구인지 몇 명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문명자씨가 쓴 글을 보면 정일권은 70년대 중반에 현숙한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새장가를 들어 3남매를 또 두었다고 한다.
70년대 중반이면 예순의 나이인데... 헐.
어쨌든 내가 거금을 투자하여 각 신문 인물 정보까지 뒤져보았으나 도대체 정일권의 자식들이 누군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이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순전히 정일권 책임이다.
정일권의 부인도, 며느리도 모르는 일을 내가 어떻게 아나?
파악되는 것은 정일권의 딸 정희경이 코오롱 그룹 창업자 이원만의 동생인 이원천의 아들과 결혼하였다는 사실이다.
▲ 이동찬 코오롱 명예 회장
ⓒ엠파스 검색
이원천의 조카가 일본 와세다대를 나온 이동찬 코오롱 명예 회장이다.
이원천의 형, 이원만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동찬, 이동보가 그 들이다.
물론 이동구라는 아들을 나이 일흔 세살 때 낳았다고 한다.
참 그 기구한 얘기를 들어보면 아기가 불쌍하다.
그러나 사생활에 해당되는 얘기이기 때문에 옮기지 않겠다.
이원만의 아들 이동보는 김종필의 딸 김예리와 결혼했다.
곧 파경에 이르고 말았다.
어쨌든 이원만은 상당히 정치지향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이원만의 둘째 딸 이미자는 포항의 대지주 박문학의 큰 아들 박성기와 결혼했다.
박성기는 한국 바이린 사장이다.
한국 바이린은 부직포 산업의 선두주자인 다국적 기업이다.
막내딸인 이미향은 삼립 식품 창업자 허창성 집안으로 출가했다.
태인 샤니 그룹 회장 허영인이 이미향의 남편이다.
베스킨 라빈스니 던킨 도너츠니 하는 것들이 다 이 집의 것들이다.
코오롱 설립자 이원만의 큰 아들 코오롱 명예회장 이동찬의 장녀 이경숙은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의 세째 아들 이문조와 결혼하였다.
이동찬의 사돈 이효상, 대구 출신으로 동경대를 졸업한 이 자는 정말 악명 높은 반민주 인사다.
신라 왕조 부흥 운운하며 영남 공화국을 부르짖던 자이다.
선거 때 지역주의를 최초로 부추긴 자이다.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국회에 똥물을 뿌린 김두한을 앞장서서 제명하라고 요구했던 인물이 바로 이효상이다.
이효상은 선거 유세 때마다 이런 개소리를 하고 돌아다녔다.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
이효상은 1963년부터 이런 말도 떠들고 다녔다.
“대구는 신라 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지만, 임금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 고장 출신의 박정희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 임금님으로 모시자.”
정말 이 나라를 위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물이다.
이효상은 이 따위 국민 분열 획책으로 출세가도를 달리며 코오롱 재벌과 사돈까지 맺은 것이다.
이효상의 세째 아들 이문조는 현재 영남대 교수이다.
이문조의 처가 코오롱 그룹 현 회장 이웅렬의 큰 누나이다.
나는 이효상의 또 다른 아들인 이문희를 눈 여겨 보고 있다.
그는 신부로서 천주교 대구교구 대주교이다.
현재 김수환의 바통을 이을 천주교 차기 추기경 물망에 올라있다.
말이 되냐??
코오롱 이동찬의 차녀인 이상희는 고홍명 한국 빠이롯드 회장 집안으로 출가했다.
고홍명의 장남 고석진과 결혼한 것이다.
고석진은 코오롱 제약(옛 삼영신약) 사장을 거쳐 에나멜 동선 전문 업체인 빠이롯드 전자 회장을 지냈다.
코오롱 이동찬의 세째 딸 이혜숙은 이학철 고려해운 창업자의 장남인 이동혁과 결혼했다.
코오롱 이동찬의 넷째 딸 이은주는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 박정희 경제특보를 지내고, 한국은행장을 거쳐 전두환 신 군부 하에서 상공부 장관, 경제 부총리를 지낸 신병현의 며느리가 되었다.
남편 신영철의 의사이다.
그런데 이 신병현이 봉명 그룹 회장이자 문경학원 이사장인 이동녕과 사돈이다.
이동녕은 영남 학원 이사장을 지낸 사람이다.
신병현의 딸 신수연이 이동녕의 아들 이승무와 결혼을 하였다.
이승무는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에서 국회의원을 하였다.
이동녕의 아들인 아세아 시멘트 회장 이병무의 둘째 아들 이인범이 얼마전 삼양통상 허정구의 아들 그러니까 GS 칼텍스의 회장 허동수의 막내 딸 허지영과 결혼하였다.
허씨집안하고 맺어졌으면 만사 끝난 것이다.
이동녕은 동양 화학 그룹 회장 이회림과도 사돈관계를 맺었다.
▲ 이웅렬 코오롱 회장
ⓒ엠파스 검색
현 코오롱 그룹 회장 이웅렬은 그의 동선이나 그의 배경을 볼 때 민주 개혁 세력이 의심의 눈초리를 결코 거둘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은 여러번 강조해 왔다.
결혼은 비교적 평범하게 하였다.
한 때 대한민국 고급벽지시장을 좌지우지 하던 동남 갈포 공업의 서병식의 딸 서창희와 결혼하였다.
다시 원 위치하여 정일권 쪽으로 되돌아가자.
정일권의 아들 정세훈은 영풍 그룹 창업자 장병희의 딸 장현주와 결혼하였다.
그의 처남 장철진, 장형진 등이 요즘 영풍을 주무르고 있다.
요즘은 31살짜리 정형진의 아들 장세욱이 전면에 부상하고 있다.
나보다도 어린데 재산이 몇 백억원이다.
영풍의 장병희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김세련과도 사돈 관계를 맺고 있다.
일제 침략 기에 화려한 견장을 하고, 일본도를 허리에 찬 채 백마를 타고 위세를 부리던 정일권, 그의 후손들이 지금도 그 못지 않은 금력과 권력을 자랑하며 얽키고 설켜서 일제 시대와 다를 바 없이 행세하며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우리는 지금도 개떼들한테 물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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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니아빠님께서 그려주신 정일권가 혼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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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개색키~~~~~~~~~~~~~~~~~~~~~~~~~~~~~~~~~~~~~~~~~~~~~~~~~~~``````
고정하셔요. 이렇게 달랑 욕 한마디만 담긴 욕플이 달리면 글쓴이인 저도 처음에는 저에게 하는 욕인가 싶어서 당황스럽잖아요. 글에는 욕들보다는 좋은 생각들을 담아야 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