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미나는 악천후로 비행기가 결항되어 푸에르토 말도나도市에서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비행기로 한
시간 반 걸려 도착한 옛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는 인디오어로 배꼽을 뜻한다. 페루지도를 보면 인체
형상을 하고 있는 국토의 딱 배꼽 부분에 쿠스코가 위치해 있다. 쿠스코는 남아메리카의 현존 도시들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도시 전체가 퓨마의 형상으로 설계되었다. 기계문명의 도움 없이 해발 30
00미터의 고지대에 거대한 석조건물을 지은 잉카인들의 기술은 인류 최고의 미스터리다. 이들은 수
톤 내지 수십 톤의 화강암을 마치 두부모 자르듯 정교하게 다듬어 담장과 벽을 쌓았다. 이처럼 고도
의 문명을 이룩한 잉카제국 정규군 3만 명이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끌고 온 180명의 용병 선원들에
게 패배했는데, 그 이유는 멸망하던 1532년 현재 잉카제국이 상굿도 석기문명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돌칼과 돌도끼로 유럽인들이 무장하고 있는 대포와 총을 대적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상공에서 내려다본 쿠스코는 환상 그 자체였다. 그러나 여기는 해발 3000미터의 고지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심한 두통이 몰려왔다. 전형적인 고산병 증세였다. 여행사 직원은 일행에게 즉각 작은 산
소통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손미나는 지금까지 이러한 물건이 존재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손미나
와 레이나는 택시를 타고 마추픽추 행 기차가 출발하는 우루밤바로 향했다. 도중에 쿠스코보다 더 높
은 3800미터의 고개에 이르자 다시 고산병 증세가 나타났지만, 장터에서 산 코카 잎을 씹자 금세 누
그러졌다. 택시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지나갔다. 산소통도 코카 잎도 효험이 없었는
지, 뒷좌석에 널브러져 있던 레이나도 벌떡 일어나 탄성을 내질렀을 만큼 아름다운 계곡은 바예 사그
라도(인디오어로 성스러운 계곡)였다.

쿠스코에서 마추픽추에 이르는 험로는 그 예날 잉카인들이 가장 자주 내왕하던 성스러운 길이었다.
가는 내내 시공을 초월한 듯한 느낌을 받은 그 길은 손미나가 지금까지 여행한 어떤 곳보다 신비하게
느껴졌다. 가는 도중에 산사태로 길이 막혀 자칫 기차를 놓칠 뻔했지만, 달려오는 택시를 발견한 기
관사가 출발을 늦춰준 덕에 무사히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차창 밖에서는 짙은 흑갈색 강물이 넘칠 듯 흐르는 우루밤바강이 계속 기차를 따라왔다. 반대쪽에서
는 압도적인 산세를 자랑하는 페루 특유의 안데스 암벽이 동행했다. 하늘은 파랗게 개어 있다가도 각
중에 흐려지면서 폭우를 쏟아내는 등 변덕 심한 시어머니처럼, 느린 걸음으로 달려가는 기차를 내려
다보며 따라왔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잉카인들은 이 길을 걸어서 마추픽추를 왕복했다. 이따금 강을
건너다니는 풀로 엮은 출렁다리가 다가왔다가 휙 지나가곤 했다. 대부분 외국에서 온 승객들은 기차
가 구비를 틀 때마다 탄성을 내질렀다.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환상적인 풍광에 저도 모르게 환호성
이 터져나오는 것이다. 오양타이탐보를 출발한 지 3시간, 드디어 마추픽추를 업고 있는 아구아스 칼
리엔테스 마을에 도착했다.

손미나는 숙소인 잉카테라 리조트로 갔다.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마추픽추의 잉카테라는
단연 최고였다. 손미나는 마추픽추고 뭐고 잉카테라에만 머물고 싶을 정도라며 반 페이지에 걸쳐 리
조트 시설을 장황하게 묘사해놓았다. 그녀는 내일 사용할 마추픽추 입장권과 입구까지 올라갈 버스
표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아구아스 칼리엔테스는 마추픽추 관광객들을 위해 축조한 계획도시지
만, 해발 2000미터가 넘기 때문에 쪼매만 걸어도 숨이 가쁘다. 입맛마저 떨어져 손미나와 레이나는
푸짐한 음식을 몇 술 깨직거리다 숙소로 돌아왔다.

고산지대인데다 습도까지 높아서 밤은 불쾌하게 추웠다. 페치카에 불을 피워놓고 한쪽에 빨래를 널
었다. 습도가 높다고 불평을 하면서도 빨래를 늘어야 하는 두 여인네의 깔끔함이란. 마추픽추의 날씨
는 사시사철 햇빛이 쨍쨍 나거나 비가 퍼붓거나 하는 두 가지 모델밖에 없다. 손미나는 수백 년 전부
터 안데스人들이 변함없이 추앙해온 산신들에게 일생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기도를 올렸다. 다
음날 날씨가 좋게 해달라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아가씨는 수천 년 인디오의 역사를 모조리 ‘수
백 년’으로 단축해놓았다. 손미나는 부엉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일기장에 페루 여행에 대한 소회를
피력해놓고는 까무룩 잠으로 빠져들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잉카제국의 여행기를 소중히 읽고 있는것은 문명 뿐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로 유산이 지금껒 잘 보존 되었다는 점 입니다. 많은 여행객에 걸맞는 연관 영업의 흥행으로 자칫 손상주기 쉬운 위상 이지만 전혀 그렇지를 않은 자연 그대로 이기 때문입니다. "쪼매만(조금) 걸어도 숨이 가쁘다" 라는 작가의 양념도 재미 있어서 입니다. 좋은 하루 맞이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