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제1독서
<딸 시온아, 즐거워하여라. 내가 이제 가서 머무르리라.>
▥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14-17
14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15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그때에 너는 만군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 보내셨음을 알게 되리라. 16 주님께서는 이 거룩한 땅에서 유다를 당신 몫으로 삼으시고, 예루살렘을 다시 선택하시리라. 17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6-50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
예수님의 족보를 다루고 있는 마태오 복음 서두에 마리아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가
언급되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의 정경에 들지 않은 야고보 원복음서는 요아킴과 안나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이야기(1사무 1,9-20)와 비슷하게 안나와 요아킴은 오랫동안
아기를 얻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늘그막에 자식을 얻는데 바로 딸인 마리아였던 것입니다.
성 안나에 대한 공경은 마리아 공경과 연관 되어 6세기에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로마와
유럽으로 퍼져나갑니다.
2세기 말 경에 이집트에서 쓰여 졌다고 보는 원야고보 복음서는 모두 1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서방 교회보다는 동방교회에서 이 복음에 대해서 주로 관심을 가졌는데, 주 내용이 마리아
부모 이야기, 마리아와 요셉, 즈카리야와와 엘리사벳에 대해 전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을 중심으로 하는 복음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마리아의 부모 요아킴과 안나가 그들의 딸인 마리아를 성전에 봉헌한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마리아는 성령의 감도로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고 요셉과 함께 나자렛에서 성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공생활로 가정을 떠나 지내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성모님과 예수님의 형제들과 함께 길을
나섭니다.
마침 군중과 함께 계시던 주님을 만나고 싶다는 기별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
너무 뜻밖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그리고 이어서 당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49-50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얼핏 느끼기에는 마치 형제들이나 어머니를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좀 더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가족들, 특히 어머니가 중요하지만 사실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뜻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당신 자신이나 사랑하는 가족들은 낮추시고 의인을 올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우리’와 ‘저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어느 수도회에서 장상 수녀님이 인사말 중에서
‘우리 수녀님들이’이라는 말을 썼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 식구와 같은 수녀님들은 아무리 사랑스럽고 소중해도 낮추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바르게 잡는다면 ‘저희 수녀들이’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녀님들이라고 해도 원장 수녀님은 스스로 낮추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라고요.
교회의 역사에서 갈라져 나간 형제들은 큰 집의 것들이 마음이 들지 않았는지 사사건건
시큰둥한 표정들입니다.
하기야 갈라져 나간 것은 다른 살림을 차렸다는 것인데 이들을 가리키는 말도
‘개신’ ‘프로테스탄트’라고 해서 그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 육백년 동안 기껏 성모님을 같은 마음으로 사랑과 공경을 하다가 신앙의 역사를
부정하는 데에 성모님도 끼어 넣는 것입니다.
성모님 공경을 구약의 배경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라는 것과 얼버무려 어머니라고 하지도 않고
‘마리아’라고 격하시켜 표현하는 인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실컷 잘하다가도 심통이 나면 딴 소리는 하는 자녀들처럼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트집 잡는 것이 오늘의 복음 중에서 예수님의 ‘형제와 어머니’라는 것을 내세워
예수님께서 외아들이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잡아 더 나아가서 성모님께서 ‘동정녀가 아니다’라고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마태오 13장 55-56절과 마르 6장 3절에서 형제들의 이름이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그리고 누이들‘의 구절을 내세워 이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외아들이다 아니다’라는 논쟁은 끝이 나지 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개신교에서는 성경의 ‘글자그대로’를 원칙으로, 동방교회에서는 원아고보 복음서에 근거를 두고,
가톨릭에서는 ‘형제’라는 것은 사촌형제도 똑 같이 형제라고 부른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고
확대해서 에우세비오스의 ‘교회사 Ἐκκλησιαστικὴ ἱστορία; Historia Ecclesiastica/Historia
Ecclesiae)’에 근거를 두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우리의 정서와 비슷해서 아버지 형제들의 자녀들인 사촌도 같은 가족의 형제자매로
꼽는 것이지요. 삼촌 사촌도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던 우리의 이제까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야기가 좀 더 확대되어 나갔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소중한 가족들을 낮추시고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군중을 높이 올리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사명은 가정에 머물리 않으시고 세상구원을 향해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자꾸 가정의 소중함과 안주에만 눈길을 두려는 나이 먹어가는 우리의 삶에 교훈을 주시는
말씀이십니다.
출처: 구름 흘러가는 원문보기 ▶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