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창가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니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다. 손미나는 여행 내내 운이 없다고 투덜거렸는데, 안개가 짙게 끼었다는 것은 비가 오지
않는다는 뜻이고 안개는 해가 뜨면 저절로 물러갈 터이니 실인즉 운이 좋았던 것이다. 손미나는 간단
하게 식사를 마친 뒤 배낭을 짊어지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입석승객까지 초만원을 이룬 대형버스는
우리가 다큐멘터리 프로에서 자주 보는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길을 꼬불꼬불 올라가기 시작했다. 코
너를 돌 때마다 우루밤바계곡의 우람한 연봉이 나타나 가는 내내 보는 이들을 압도했다.
종점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마추픽추 국립공원 입구에는 이미 전 세계에서 모인 관광객들이
인종박람회를 펼치고 있었다. 마추픽추로 오르는 산길에도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끊이
지 않고 이어져 있었다. 고지대에다 경사도 심하여 몇 발짝 떼기도 전에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주변 경관에 압도되어서인지 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한 걸음씩 뗄 때마다 안개가 점점 얇아지더니,
이내 마추픽추의 감동적인 장관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해발 2450미터의 마추픽추는 인디오語로
오래된 봉우리라는 뜻이다. 오랫동안 존재 자체가 잊혀져 있었기 때문에 잃어버린 도시라고도 한다.
마추픽추의 장관은 1911년 미국 탐험가 하이럼 빙엄(1875년~1965년)이 우루밤바 탐험 중 우연히 발
견하여 외부세계에 널리 알렸다. 물론 인디오들은 처음 건설될 때부터 지금까지 죽 알고 있었지만 외
부에 알리지 않았었다.
마추픽추는 탄소연대측정법에 의해 15세기경 잉카인들이 건설했을 것으로 추정될 뿐 누가, 언제, 무
슨 목적으로, 어떻게 건설했는지는 여전히 밝혀내지 못했다. 이처럼 웅장하고 정교한 도시에서 언제,
왜 사람들이 일제히 사라졌는지도 역시 수리치기다. 한 사람이 걷기에도 비좁은 비탈길을, 무슨 도구
를 이용하여 한 덩어리가 수십에서 수백 톤에 이르는 저 무거운 바위들을 운반해왔는지에 이르면 더
욱 신비하다. 더구나 거대한 바위는 정교하게 다듬어져 이가 어긋난 곳이 한 군데도 없이 아귀가 딱
딱 들어맞게 조립되어 있다. 현대의 강철 도구로도 깎기 힘들었을 바위를, 멸망하던 그날까지 석기시
대를 살고 있던 잉카인들이 어떻게 저처럼 정교하게 깎아냈을까? 모든 건축물은 상굿도 허물어진 곳
이 한 군데도 없다. 게다가 신비한 영약이라도 발라둔 듯 수백 년이 지나도 전혀 풍화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가장 신기한 점은 인공위성 촬영에 의한 마추픽추의 위치는 정확하게 거대한 잉카제국 영토
의 한복판이라는 사실이다. 측량시설도 없던 시절, 그들은 어떻게 이처럼 정확하게 위치를 설정했을
까? 이 모든 비밀은 아마도 타임머신이 일상화될 다음 세기에 가서나 밝혀질 듯.
사진이나 영상으로 이미 수십 차례 마추픽추를 본 손미나도 실제로 보니 더욱 놀랍다며 감탄사를 몇
줄이나 쏟아놓았다. 손미나는 마추픽추에서 다시 전의를 가다듬고 위로 걸음을 떼놓았다. 유적은 간
데없고 푸른 숲이 우거진 오솔길이 나타났다. 경사가 가파르지 않은데도 워낙 고지대라 숨이 찼다.
그러나 이내 시야가 탁 트이며 발아래 마추픽추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여기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은 그 장엄하고 예술적인 건축미에 감동하여 약속이나 한 듯 탄성부터 내지
른다.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가보니 거기가 바로 마추픽추의 포토 존이었다. 손미
나도 한 식경이나 기다린 끝에 포토 존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서도 가장 신비로운 풍광을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는 일은 나머지 전 여정보다 비중이 컸다.
바로그때, 저만치서 이야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 마추픽추에서 만나자고만 했는데도 두 절친 간의
텔레파시는 정확하게 시공을 일치시켰던 것이다. 스페인에서 유학을 할 때도, 파리에서 같은 방을 쓰
며 일할 때도 손미나에게 자주 ‘너를 페루에서 볼 수 있으면 울매나 좋겠노’ 하던 이야가 멀리서 온 옛
친구를 만나기 위해 회사에 휴가를 내고 와준 것이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두 여인은 파리에서 하던
것처럼 한적한 바닥을 찾아 결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평온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공중 도시’ 마추픽
추는 한결 고요하고 옛스러워 보였다. 손미나는 결가부좌를 한 채 마추픽추를 내려다본 소회를 ‘무엇
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것’이라고 자신 있게 피력해놓았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만리장성보
다 훨씬 정교하고 거대한 석조문화를 꽃피웠던 잉카문명이 그처럼 쉽게 소멸된 것은 문자가 없었기
때문인데, 불과 50년 만에 안데스산맥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는 80여 개의 부족들을 통일하여 유럽대
륙보다 더 큰 제국을 수립했던 그들이 문자를 만들지 않았다는 점도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다.
“사람들이 감동하여 바라보는 마추픽추는 전체 모습의 40%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
이야는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나머지 60%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해주었다. 잉카人들은 마추픽추의
맨 아래쪽부터 차근차근 계단식 논을 만들었다. 흙을 다지고 그 위에 작은 돌을 깔아 다시 한 번 다지
고, 그 위에 좀 더 큰 돌을 깔아 다시 한 번 다지는 식으로 산 정상까지 계단식 논을 만들었다. 계단식
논은 산 정상에서부터 한 계단씩 빗물이 적절한 유속을 유지하며 흘러 내려가도록 하여 아무리 폭우
가 쏟아져도 산이 무너지지 않도록 정밀하게 설계되어 있다. 마추픽추는 어떻게 수백 년이 지나도 허
물어지지 않았을까 하던 의문이 일시에 해소되었다.
감동이 가장 컸다는 의미일까? 손미나는 마추픽추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찾아갔던 태양의 신을
모시던 신전 얘기를 맨 끝에 기록해놓았다. 태양은 잉카문명의 핵심이다. 북아메리카의 마야人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잉카人들도 절대적으로 태양신을 숭배했고 태양력을 썼다. 반원형으로 쌓아올린 신
전의 벽에는 동쪽과 남쪽에 창을 만들어놓았는데, 남쪽 창은 동짓날 아침에 뜬 태양의 빛이 통과하도
록 설계되어 있다. 잉카人들은 양쪽 창 밑에서 태양신에 대한 제사를 비롯하여 중요한 제례의식을 치
르고 천문을 관측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잉카人들은 삶과 죽음을 하나로 봤으며, 죽음을 통해 자연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주간 날씨 예보에도 눈내림이 없어 설산을 볼 기회가 아직은 없지만 겨울이 다 가기전 기회가 있으리라 여깁니다. 겨울산행 역시도 제멋을 가지고 있지만 추위가 먼저생각나는 탓으로 선듯 동네산도 오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년과 다른 생각이 올해는 가득이니 열정이 그만큼 식었나 싶습니다. 근교산을 부지런히 다니며 겨울 풍경을 선사하고 있는 동우회 회원님들의 행보가 왕성해서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