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古都 부여.
백제의 숨결 탐방 및 트레킹
►트레킹 일자 : 2024. 12. 07.~8.
(토,일) 1박 2일
►숙소 : 부여서울농장
►참가자 :
고딩교 동창 9명
►탐방지 : 백제의 古都 부여 일대
►탐방 코스
◌12월7일(토)
▻서울 신도림역 출발
▻부여 백제문화관
▻점심식사 (백제해장국)
▻부소산 트레킹
<부소산문-삼충사-사자루-
백화정-낙화암-고란사-백화정-
반월루-주차장>
▻서동공원. 궁남지
▻에어로포닉스 친환경 채소재배
농장 견학(인당 1박스씩 선물받음)
▻저녁식사(석촌회관 : 삼겹살)
▻부여서울농장(숙박)
◌12월8일(일)
▻롯데 리조트 사우나
(부여시민. 경로우대 40% 할인)
▻아침식사 (부여 해장국)
▻비닐하우스 농장 관람
▻금강 갈대밭 탐방
▻국립부여박물관
▻정림사지 박물관.
정림사지5층 석탑 탐방
▻백제문화단지 탐방
▻점심식사 (사비아구 식당)
<뽈 해장국>
▻부여 무량사 탐방
▻서울로 출발
►날씨 : 7일→약간 흐림, 8일→맑음
►트레킹 스케치
▷백제(百濟)는
한국의 고대 국가 중 하나로,
고구려, 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를
구성하였다. 부여· 고구려에서 남하한
온조왕이 세운 국가가 기원이며,
초기 명칭은 십제, 백제국 등 다양한
명칭이 있었다. 백제는 원래 마한의
54소국 중 하나였으나 온조왕 이래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고이왕 시기 백제는
중앙집권을 위해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들여왔으며, 백제는 이에
힘입어 4세기 근초고왕 때
전성기를 맞아 가야를 복속하고
황해도로 진출했으며
고구려와 평양성에서 전투를 벌여
고구려 국왕 고국원왕을
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한강 이북을 상실하고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하남
위례성을 빼앗기고 475년
개로왕이 살해당했으며, 차기 국왕
문주왕 원년에 웅진성(지금의 공산성)
으로 쫓기다시피 천도하였다.
►웅진성은
사비성 (부소산과 그 일대)으로 다시
도읍을 옮기는 538년까지 63년 동안
백제의수도로 기능을 하였다.
►사비성
웅진성에서 천도한 백제 왕조
마지막 수도. 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성 과 나성
그 일대를 말한다. 도심부는 부여
나성으로 둘러 쌓여있고, 안쪽에는
부소산성이 자리잡은 2중 성곽
구조이다. 부산성과 청산성 등
부속 산성이 있다.
▻사비성은 5세기 말-6세기 초에
건설되어 제26대 성왕이 천도하여
제31대 의자왕까지 538년부터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백제
최후의 수도로 기능했다
▻660년 당나라의 대군을 맞아
백제 주력군은 백강에서의 요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당나라군은
배를 타고 사비성으로 진격한다.
8월 20일, 처절하게 싸운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자만 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계백의 결사대가
전멸하였다.
의자왕은 홀로 배를 타고
웅진성으로 달아났고, 23일엔
문무왕의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점령하였다.
▻백제의 마지막 군주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을 피해서 웅진성으로
피난 갔지만 웅진성의 방어를 맡은
방령 예식진이 의자왕을 체포해서
나당연합군에 팔아넘기고 그 대가로
당나라에서 대당좌위위대장군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사비성이 함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7월 18일
웅진성으로 달아났던 의자왕과 태자
부여효는 항복하여 백제는 개국
677년 만에 멸망했다
백제 제31대 마지막 왕 의자왕은
소정방에 의해 중국으로 끌려갔다
▻660년 9월 3일 의자왕은
왕후인 은고부인과 아들인 부여융,
부여효, 부여태, 부여연, 대좌평
사택천복 이하 신하 및 장수 93명과
백성 12,00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어 수도인 장안에 이르렀다.
660년 11월 1일 장안에 도착한
의자왕은 부여융을 비롯한 왕자
13명, 대좌평 사택천복과 국변성
등 37명 등과 함께 조당에 나아가
당고종과 측천무후를 만났다.
당고종은 이들의 잘못을 크게
꾸짖은 후에 이들 모두를 사면
하였다. 그 뒤 그는 나라를 잃고
심한 충격을 받아 망국의 회한에
괴로워하며 며칠 만에 머나먼
이역 땅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중국에서 죽은 의자왕과 그의
후손들은 낙양 북쪽의 북망산에
묻혔다. 오나라 마지막 황제
손호와 남북조시대 남조.
진나라의 마지막 황제 진숙보와
함께 묻혔는데 이 묘역에는 망국의
군주들만 모아서 매장했다.
<참고문헌 : 나무위키>
►부여 궁남지
부여군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조경이다. 1964년 사적 제135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 35년(634)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이 연못은 백제 무왕 때
만든 궁의 정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못의 동쪽 언덕에서 백제 때의
기단석과 초석, 기와조각, 그릇조각
등이 출토되어 근처에 이궁(離宮)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궁남지는
백제 무왕의 출생설화와도 연관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못가에서 홀로 살다
용신(龍神)과 통하여 아들을 얻었다.
그 아이가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결혼한 서동(薯童)이며, 아들이
없던 법왕의 뒤를 이은 무왕이
바로 이 서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화는 이곳이 별궁터였고
궁남지가 백제 왕과 깊은 관계가
있는 별궁의 연못이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신라의 인공호수
월지(안압지)보다 40여 년 먼저
만들었으며, 신라 안압지 조경
역시 궁남지로 대표되는 백제식
조경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부여 정림사지
▻1983년 사적로 지정되었다.
백제 성왕이 538년 봄,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안을 중앙 동·서·
남·북 등 5부로 구획하고 그 안에
왕궁과 관청, 사찰 등을 건립할 때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정림사가 세워졌다.
정림사와 왕궁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北魏) 낙양성(洛陽城) 내의
황궁과 영녕사(永寧寺)의 관계와
흡사하여 사비도성의 기본구조가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1층 탑신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어, 정림사는 백제 왕실 또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은 백제인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진 석탑이지만,
초층 하부에 있는 소정방(蘇定方)의
평제기공문(平濟紀功文), 즉
소정방이 백제를 멸한 기념으로
새긴 글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평제탑(平濟塔)’으로 불렸다.
그러나 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가즈오(藤澤一夫)가 절터 발굴조사
중에 발굴한 기와조각에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란
명문이 적혀 있어, 태평 8년인
고려 현종 19년에 정림사로
불리웠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정림사지’와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1979년과 1980년 2년에 걸쳐
충남대학교박물관에서 전면
발굴조사하여 가람(伽藍)의 규모와
배치, 1028년에 중건된 사실 등이
드러났으며, 다수의 소조인물상편
(塑造人物像片)과 백제시대 ·
고려시대의 막새기와편 및
백제시대의 벼루 · 삼족토기
(三足土器) 등이 출토되었다.
2008년∼2010년에는 국립부여
문화재연구소가 사역(寺域) 전체를
다시 발굴하여 기존의 조사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회랑 북단의
동서승방지와 강당지 뒤편의
북승방지를 확인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여 무량사
충남 부여군 외산면에 자리한
천년고찰 ‘무량사’는 만수산 자락에
있다. 신라 문무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몇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국내 제일의 아미타 기도 도량으로
사천왕문을 지나면 정면에 보물로
지정된 무량사 극락전이 보인다.
사천왕문은 무량사의 멋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위치로, 층 구분이
없는 2층 극락전과 오층 석탑(보물),
석등(보물)이 일렬로 장관을 이룬다.
극락전 소조 아미타여래삼존좌상
(보물)도 위용을 자랑한다.
무량사는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이
입적한 곳이다. 경내에 그의
부도와 초상화가 있다. 행정구역 상
부여군에 속하지만 보령 시내에서
더 가깝다.
2024. 12. 10. (화) 아침
최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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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등산)사진
①백제의 古都 부여 탐방 (2024.12.07.-8)
최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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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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