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 27일 새벽.
이 족자카르타 인근에서 발생한 진도 6.3의 강진으로 6,000여 명의 사망자와 3만여 명의 부상자,
그리고 20만 명에 이르는 이재민이 발생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약 한 달 전부터 족자카르타 북쪽에 위치한 해발 2,911m 머라피 화산의 활동이 왕성해지자 인도네시아
정부는 인근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계속 예의주시하던 차에 난데없이 화산과 전혀 무관한 지진이 발생 하여
피해를 준 것이다.
2006년 5월 30일(수)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을까?”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방법을 몰라 고민하던 나는 아침 신문에 실린 한 아이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지진으로 머리를 다쳐 퍼렇게 멍든 한 인도네시아 어린이의 눈망울은 기사의 제목처럼 ‘의사는 언제 오나요?’
하고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자꾸만 아이의 사진을 쳐다보며 진료를 하던 오후. 한 아가씨가 진료를 받기위해 들어온다. 이명을 호소하던
아가씨가 진료를 마치고 문밖을 나서는 순간 챠트를 들여다보던 나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직장명이 ‘국제사랑의’라고 되어있는데 뭐죠?” 그녀가 웃으면서 말한다. “봉사단이예요.
국제사랑의 봉사단. 구호와 봉사, 그리고 후원을 하는 단체이지요.”
"최근에는 무슨일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은 인도네시아 지진사태에 대해 구호팀 파견 준비하고 있어요.
그 일 때문에 너무 바빠서 몸이 좋아지지 않은 것 같애요.”
이것을 우연이라고 해야 하나? 필연이라고 해야 하나?
봉사단 사무실은 놀랍게도 우리건물 8층에 있다고 했다. 환자를 조홍래 원장님께 맡기고 나는 바로 8층으로
올라갔다.
진료실 앞에 간단한 안내 글을 써 붙이고서 나는 구호팀의 팀장을 맡은 최영락씨의 안내를 받아
팀장 1명, 의사 3명, 간호사 1명, 약사 1명, 행정 2명, 촬영 1명을 포함한 9명의 긴급구호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2006년 6월 4일(일)
지진 피해지역인 족자카르타로 가기 위해서는 발리를 경유해야했기 때문에 우리는 발리로 여행하는 신혼부부,
그리고 가족여행객들과 함께 탑승하게 되었다. 갓 결혼한 신혼부부의 들뜬 마음과 긴급구호팀의 긴장감이
혼재하는 기내 분위기.
신혼여행 온 신랑신부와의 동행이 끝나고 발리에서 1시간을 더 비행하여 족자카르타 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 내부 벽과 천장에 균열이 보이고 공항 입구에는 “We apologize for this inconvinience due to earthquake."
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어둠속의 족자카르타. 아침에 일어나 나의 눈에 들어올 그곳의 모습은 어떠할까?
2006년 6월 5일(월)
LPP convention Hotel. 족자 시내에 위치한 2층짜리 낡은 호텔이지만 정원과 식당의 분위기가 차분하고
조용한 이곳이 우리가 머물 숙소이다. 지진으로 입구의 커다란 유리창이 깨져 있었지만 텐트를 치고 야전생활을
할 것으로 생각하고 온 우리의 상상에 비하면 호화스럽기 그지없는 곳이다.
하지만 샌드위치와 사과잼, 그리고 초콜릿 조각이 전부인 아침식사는 부실하다 못해 너무 성의 없어 보인다.
먹는 둥 마는 둥 아침 식사를 때운 우리 팀은 족자카르타 재난지원본부를 찾아가 간단한 현지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들었다.
인도네시아 국영 Metro TV는 6월 3일 저녁 7시 현재 이번 지진으로 6234명이 사망한 것으로 공식 발표했다.
사건 발생 후 얼마 안가 병원은 바닥은 물론 병원 밖에까지 신음하는 환자들로 넘쳤고 미처 침대에 눕지 못한
환자들을 깔 것을 사려 했지만 가게마다 문 연 곳이 없어 환자들은 바닥에 누워있어야 했단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대통령이 집무실을 이곳 족자카르타로 옮겨 직접 진두지휘하는 등
재난에 익숙한 나라답게 정부의 신속한 지원 대책으로 수일 만에 상당 부분을 회복하였다고 한다.
브리핑이 끝나자 우리는 현지답사를 하기로 하였다.
가장 피해가 컸다는 반툴 지역의 한 마을. 마을 사람 2,000명 중 400명 부상, 3명 사망했다는 곳이다. 야자수 사이
무너진 집들. 남아있는 건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어있다.
국가에서 지원한 임시거처가 마치 야영장의 텐트를 연상케 한다.
점심시간. 밥 먹을 곳이 적당치 않아 과일가게에서 오렌지와 뱀 껍질을 닮은 ‘snake skin’이라는 과일을 사서
차 안에서 배를 채운다.
21명이 사망했다는 치토쿠 지역 현지를 돌아보던 중 땅이 흔들린다. 비록 큰 지진은 아니었지만 재난지역에서
느낀 첫 지진에 소름끼쳤다.
그리고 머라피 화산은 내일정도에 대폭발 가능성이 높다는 한국 대사관의 정식 공문이 우리 팀에게 접수되었다.
인도네시아 정부에서도 곧 대지진이 일어날 것이라고 계속해서 경고중이라고 한다.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는 저녁 미팅 시간. 팀장 최영락씨는 내일 할일을 미리 알려준다. 아직 끝나지 않은
지진과 화산 소식에 약사님은 두려움을 호소하며 내가 왜 이곳 까지 왔는지 모르겠다며 16개월 된 막내아이가
보고 싶다며 울먹인다. 독자인 조계형 선생님은 비록 두렵지만 어차피 희생을 감수하고 온 이상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며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상황이 이리 어수선하고 추가적인 지진의 위험이 있다면 공항에서 여행자 보험을 들기를 잘했다고 해야 하나?
아닌가? 잘 모르겠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2006년 6월 6일(화), 한국의 현충일.
이제 탐색은 끝났다. 오늘부터 재난지역을 순회하면서 진료를 하게 된다. 추가지진과 화산이 위협하는 등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갈 수은 없지 않은가?
핀란드 구호단체인 INSIST소속의 Henry와 인도네시아에서 영어강사를 하고 있는 아일랜드 출신의 Cal,
그리고 23세의 터키 청년 Kara도 우리와 합류하여 일을 돕기로 했다. KOICA 소속의 오선아 단원도 우리
팀으로 합류했다.
이번 강진으로 반툴과 더불어 가장 피해가 컸던 끌라덴의 작은 마을 ‘께봄 달렌 끼둘’. 우리가 첫 진료를
해야 할 곳이다. 그들의 삶의 터전은 지진으로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으며 새벽의 정적을 깨는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환자는 대부분 무너진 천장과 벽 때문에 받은 골절을 포함한 외상 환자가 대부분이었으며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소화장애, 불면, 두통, 어지러움 등을 호소하는 환자가 많았다. 우리는 112명의 환자를 진료하였으며
심한 부상이나 만성질환자 등 거동이 불편한 5명의 환자는 왕진을 하였다.
무너진 집을 치우고 상처받은 몸으로 앓아누워있는 환자들에게 진료소 하나 차려놓고 우리를 찾아오라
할 수는 없었다. 오전, 오후 계속 환자를 찾아가며 이동 진료하는 ‘찾아가는 서비스’가 우리의 모토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열심히 환자를 찾아다니면 진작 돈깨나 벌었겠다.^^
오후에는 끄와론이라는 마을로 이동하여 74명의 골절, 타박상, 열상 환자와 각종 만성질환자를 진료하였다.
정부기관에서 더 이상 도울 것이 없다고 공언하였지만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수많은 환자들이 곳곳에 신음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이 산산조각이 나도 이웃이 사고로 죽어도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았다. 어떻게
위로의 말을 전할까 고민하며 눈이 마주치면 그들은 마치 나를 위로하듯 먼저 미소를 지어준다.
이 사람들이 대지진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가족과 이웃을 잃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2006년 6월 7일(수)
곤히 잠이 들어있던 새벽 3시.
타다닥 하며 빠른 소리로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에 눈을 떴다. 순간 옆에서 잠을 자던 촬영담당 최수락씨와
나는 짧은 비명소리를 내며 문 쪽으로 뛰어나갔다. 지진이었다. 약 15초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시
침대에 누운 나의 등에는 식은땀이 젖어있었다. 이곳에 도착하고 이틀 연속 발생한 여진.
오전에 우리는 ‘쌩온’이라는 마을을 찾아가 다수의 외상 환자를 포함하여 109명의 환자를 진료하였다.
애초 공문에는 지진 지역의 피해가 커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하였지만 우리에게는 컵라면
1/2개, 참치캔, 깻잎캔 몇 장과 밥, 그리고 커피 반잔 등 부족한대로 진수성찬이 준비되어있었다.
하지만 우리 식사하는 것을 지켜보던 현지인이 불쌍하게 보였는지 구호품으로 받은 물 한 박스와 과자 두 봉지를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다더니.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는 것도 중요한 구호활동 중의 하나이다.
재난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에서 온 모든 긴급구조팀의 귀국하라고 종용하는 중이라고 한다.
재차 지진 발생 가능성이 높고 지금까지 100m를 분출하던 화산이 지금은 800m 정도를 분출하며
화산 대폭발이 임박했다는 연락이다.
또한 세계 각지에서 온 구호 팀은 화산 폭발이 임박했음에 대해 예의 주시하라는 정부의 안내가 있었다.
2006년 6월 8일(목)
아침 식사로 나시고랭(볶음밥)을 먹고 우리가 찾아간 지역은 ‘빼랭’이었다.
환자를 진료하려고 준비하는 동안 한국어가 유창한 수하르또라는 젊은이를 만났다. 그는 4개월 전만해도
한국에서 체류하였으며 한국에 있었던 3년 동안 외국인 노동자로 안산에 있는 공장에 근무했다고 한다.
그의 집 역시 이번 지진으로 모두 무너져서 지금 복구에 여념이 없다고 한다.
잠을 자고 있다가 지붕이 무너지면서 머리를 다친 70세 아마뜨비나 할머니. 할머니는 두피가 2cm이상
심하게 벌어진 채로 천막 안에 방치되어 생활하고 있었다. 수전증이 심한 할머니는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
걷기도 힘들어보였다. 이 동네역시 지진 피해가 심해 마을사람 25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가족들은 모두
밖에 나가서 일을 하는 바람에 병원에 데리고 갈 수가 없어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우리 구호팀을 만난 것이었다.
오전 11시 47분경. 그나마 무너지지 않은 건물의 좁은 처마 아래에서 환자를 돌보던 우리는 땅이 심하게
흔들리는 소리에 모두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녁에 뉴스를 보고 알게 되었지만 강도 3.8의 지진이었다고
한다. 불과 10일 전 발생한 진도 6.3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만 구호팀은 물론이고 정신적인 충격이 심한
주민들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라면과 밥, 오이, 양파, 된장 등으로 점심을 대충 때운 우리는 해발 2,911m의 거대한 머라피 화산이
폭발하는 모습을 보며 오후진료지역인 ‘곤당’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은 총 679가구 중 5채를 남기고 674채가 무너진 동네로 무려 61명의 주민이 사망했으며 아직까지
어떤 구호팀도 찾아오지 않은 곳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이곳.
하지만 모든 것이 갖추어진 나의 진료실에 있는것 보다 더 커다란 행복감을 느낀다.
이들이 진정 나를 필요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신없이 환자를 돌보던 중 팀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발에서 출혈이 있다며
할머니 댁으로 와달라는 왕진 의뢰였다.
무너진 집 골목 골목을 돌아 그 할머니의 동생이라는 할머니와 500m정도를 걸어 도착해보니 80세 하르조
수아르노라는 할머니가 불안과 통증으로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평상에서 늘어뜨린 그녀의 발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발에 감긴 허술한 붕대를 풀자 가운데
발가락 세 개의 뼈가 그대로 노출된 상태였고 주변 조직은 썩어들어 가고 있었으며 상처 주변에는 개미가
들끓고 있었다.
나는 먼저 가서 진료준비를 하기로 하고 촬영담당 최수락씨가 할머니를 업고 진료소로 후송을 하였다.
수액에 항생제를 섞어 달고 상처부위를 세척 해 보았으나 당장 병원에 입원치료를 받지 못하면 패혈증으로
수 일 내에 위험에 처할 것이 분명했다. 심하게 손상된 할머니의 발가락을 도저히 살려내기가 힘들어보였다.
하지만 역시 노쇠한 여동생은 울먹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마을의 집 거의 모두가 무너진 이곳에서
그들을 병원으로 옮겨줄 차도 없고 설사 병원에 간다고 해도 치료비를 어떻게 감당하느냐고.
저녁 늦게 숙소로 돌아오는 우리 팀의 마음은 무너져 내린다. 지진에 화산 폭발, 거기에 하르조 수아르노
할머니까지. 오늘 그야말로 ‘설상가상’ 이상이었다.
일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보니 오늘 머라피 화산의 용암이 분출하였다는 소식이 들어와 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구호 활동중인 끌라덴의 반대쪽인 마글라 지역으로 5Km 정도 용암이 흘러내려 주민들 모두 대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간신문 RADAR SOLO에 헤드라인 기사. 머라피 화산의 폭발 장면을 담은 사진을 싣고 끌라덴 지역이
패닉상태에 빠졌다(Kladen - Boyolali Panik)고 보도했다.
2006년 6월 9일(금)
아침 7:30경 숙소에서 책을 읽는 도중 우르릉 소리와 함께 TV 위의 물컵이 출렁거린다. 또 지진이다.
밖으로 나가야하나? 말아야하나? 다행히 약 15초정도 지난 후 컵에 있던 물은 안정을 되찾았다.
아침에 진료 장소로 출발하기 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서 온 구호 팀과 호텔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2004년 수마트라를 강타한 지진 해일로 22만명이 사망 했을 때 많은 NGO들에게 진 신세를 조금이라도
갚고 싶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오전 진료지역에 도착
어디를 가나 처참한 광경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엇박자였지만 지금은 진료실, 드레싱실, 약국, 보급소 차리는 것이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쌀밥, 네명 당 고추참치 한캔, 그리고 부식으로 작은 쏘세지 하나. 부실한 점심이지만 이것이라도 먹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린다.
아구스. 그는 인도네시아인 자원봉사자로 우리 팀에 합류해서 운전도 해주고 진료를 도와주는 의과대학
졸업반 학생이다. 졸업 후에는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바로 개인병원을 열 예정이란다. 헤어지던 날 그는
우리들의 구호활동에 너무 많은 감명을 받았다며 한국 사람에게 큰 빚을 졌다고 했다.
2006년 6월 10일(토), 마지막 날
머라피 화산 위험경계지역 근처에 살고 있는 어린이가 몇 일째 계속 울고 있다고 하여 그 아이와 인근
주민들을 진료하였다. 아이는 뇌성마비로 진단되었다.
마을 사람들을 진료해준 대가로 우리는 머라피 화산을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우리가 화산을 촬영했던 곳은 머라피 화산 구조대와 경찰이 머물고 있던 곳이었다. CNN 등 언론들이
이곳에서 사진을 찍어 세계 언론에 공급한다고 했다.
신문에 난 아이사진 하나를 보고 무작정 떠나왔던 머나먼 인도네시아 땅. 그곳에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우리의 지구촌 가족이 있었다. 그들을 치유하러 왔다고는 하지만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너무나도 짧고
아쉽다는 생각이다.
이들의 고통 받는 몸을 치유하면서 오히려 나 자신의 영혼이 치유되는 것을 느꼈다.
“주여 이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여주시고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처를 주소서.”
** 위험한 곳인 줄 알면서도 흔쾌히 구호활동을 허락해주신 어머니와 아내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냅니다.
갑자기 떠나겠다는 요청에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격려해주시던 선배이자 동료이며 친구인 조홍래 원장님
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촬영 : 최수락(국제사랑의봉사단), 최정철(야탑이비인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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