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나무 축제, 돌아보니
홍성란
창립 20주년, 어느 새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이어 회원님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러고 보니 문학회와 나의 만남에도 어느 새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저 책을 좋아해서 찾아 간 곳이 2000년 여름 충북대 평생교육원 수필 반이었고 2001년 제1회 도민 백일장(회장 김정자)을 계기로 문학회 회원이 되었던 게 십년을 훌쩍 넘었으니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러나 그 짧지 않은 시간을 돌아보니 부족함 투성이다. 2010년 2월 생각지도 않은 문학회(회장 류기학) 일을 보게 되었다. 누구든 단체 일을 본다는 건 두렵고 조심스럽고 무거운 일이다. 그 때 문학회에서는 송강 문학제가 있었고 잠시 중단되었던 도민 백일장이 다시 이어지게 될 시점이다. 더구나 그 해 제 1회 버드나무 축제 개최는 깜냥이 안 되는 나로서는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버드나무 축제하면 초창기 일이 기억에 짙게 남아있다.
제1회 버드나무 축제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두 분이 있다. 김홍은 교수님과 이미화 회원이다. 이유가 있다. 버드나무 축제가 탄생하는 데 처음 구상하시고 계획과 방향을 세워주신 분이 교수님이다. 그리고 이에 적극적으로 지원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분은 이미화 회원이었다. 정말 애를 많이 쓰셨다. 초창기, 어떻게 낯선 주민들과 만나고 소통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다가감에 이 두 분의 인내와 수고가 없었다면 어쩌면 이 축제는 태어나지 못할 수 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어떻든 버드나무 축제는 상생문학을 기조로 세워진 결국 사람과 사람의 일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축제가 되기까지 제일 어려웠던 점도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초창기이니 더욱 그러하였다. 일단 사람을 만나야 대화가 이뤄지고 소통의 기회도 갖게 될 일이었다. 2010년 여름이다. 교수님, 류기학 회장, 이미화, 사무국장등이 처음 문의 장자 골을 찾았던 날이 생각난다. 살기 바쁜 세상에 무슨 문학이며 혹여 당신들에게 피해나 있지 않나하는 의심의 눈빛이었으니 주민과의 만남이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만남의 자리를 주선하고 이어주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해 주신 분이 교수님과 이미화 회원이다.
말이 쉽지 두 분이 동향(同鄕)이라고 무조건 만남이 쉬운 게 아니다. 게다가 인식의 변화를 꾀한다는 게 한두 번에 될 일인가. 수차례 동네방문이 이어지고 현 주민뿐 아니라 친척 동향인 선후배 기관장 이장 부녀회장 시장번영회장등 사돈의 팔촌까지 누구라도 문의와 연이 닿아 있는 분이면 언제고 찾아가서 만났다. 아니 만나야했다. 그뿐이 아니다 두 분은 뒤에서 더 많은 만남에 애를 쓰셨다. 그렇게 시간이 가면서 지역민들과 조금씩 낯이 익어갔다. 멀뚱했던 주민들도 얼핏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문학회와의 만남이 당신들의 생활에 피해가 없다는 걸 인식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드디어 2010.9.8일 제1회 버드나무 축제는 이런 과정을 거쳐 교수님과 이미화 회원의 적극적 지원 아래 문의 장자 골 300년 된 버드나무 앞에서 축제가 열렸다. 이날 축제의 특색은 버드나무와 지역의 발전을 위한 기원제로 시작되었다. 문학회를 알린 첫 행사였던 셈이다. 지금의 여러 행사와 달리 일단 문의라는 곳에 푸른 솔 문학회를 알린 상징적 행사라고 본다.
이렇게 문의에 푸른 솔 깃발을 올리게 된 버드나무 축제는 그간 지금의 둥지인 향교에 자리 잡기까지 많은 어려움과 시행착오를 거쳤다. 그 흔적으로 제2회 버드나무 축제는 문의 농협에서, 3회부터 2019현재까지 문의 향교에 자리 잡기 까지 과정에 있다. 특히 향교로의 이동은 어려웠던 것으로 알고 있다. 향교를 사용함에 따른 절차와 조건이 까다롭고 무거웠다. 뿌리 내리는 일이 얼마나 녹녹치 않은 일인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면서 지금까지 향교관리 대부분을 교수님께서 맡아 하시니 이 부분은 문학회에서 고민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런 과정을 통해 조금씩 지역민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내용으로 발전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된 것도 사실이다. 농협2층에서의 무료 수필 강좌(이미화 엄금순 고승희 최종희 김도환 김영수 등)에도 수강생이 늘어나면서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이 청남문학회도 결성하였고 교수님의 청소년 백일장이 구상되었다. 그러다 향교로 자리를 옮기고 명륜 대학도 개설하여 지역민들과의 교류가 증가한 점이다. 특히 교수님이 관사에 숙식하시면서 분위기도 익어갔고 서서히 안착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회원들의 발길도 잦아졌고 지역민들이나 유림회 등의 방문도 이어졌다. 푸른 솔 간판도 세우고 도서관도 만들어지고 향교경작지에 고구마 마늘등을 경작하였다.
행사내용면에서도 점차 변화가 있어 청소년 백일장과 호드기 불기대회 동화구연대회는 주민과의 거리를 좁히는 직접적인 소통의 장이 되었다고 본다. 물론 준비과정에서 어려움도 있었다. 백일장은 장소와 날자 잡는 게 쉽지 않았다. 문의초등학교와 분교로만 시작된 범위가 중학교 까지 범위가 넓혀짐에 따라 학교마다 행사가 다르니 전체가 모여 할 수 있는 날짜를 맞추기 어려워 부득이 찾아가는 백일장으로 방식을 변경하였다.
임원 몇 분이(임미옥 엄금순 이미화 사무국장) 각각의 학교로 출장해서 백일장이 치러지고 끝나면 원고를 가지고 다시 향교로 와서 그날 심사를 하였다. 그러다보니 어정쩡한 시간에 심사를 하게 되니 심사위원위임부탁도 편치 않았다. 이렇게 주최 측의 불편함이 있는 반면 참가 학생들은 먼 거리를 오지 않고도 자신의 학교에서 안정된 글짓기를 할 수 있었던 점도 있다. 그러다 번거로운 운영방식은 2016년에 수정이 가해졌다.
호드기 불기 대회도 준비단계에 수고로움이 따른다. 호드기를 채취하는 적합한 시기와 보관하는 문제다. 그러다보니 적정한 시기에 채취해야 하는 수고가 따른다. 직접 하지 못하면서도 행사 날까지 신경이 갔었다. 그럼에도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잊지 않고 이미화 회원이 호드기를 준비 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따듯한 마음은 호드기를 부는 사람에게도 전해지는 듯 보인다. 잊혀 져 가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소박함 정을 불러일으키니 말이다.
아무튼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쳤다. 아니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발전 된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드는 생각이 있다. 모든 일에 어려움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도 제일 인상 깊은 얼굴들은 백일장이나 호드기 불기대회에 참가했던 학생들이다. 당시 초‧중등학생이었던 참가자들은 의젓한 청년이 되었을 게다. 그들은 그 때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어쩌면 지금 생각이 나지 않더라도 훗날 자신의 고향에서 치러진 그날을 기억하리라 생각한다. 그들이 백일장을 계기로, 호드기를 불어봄으로써 메마른 현대에서도 바르고 고운 인성을 지닐 수 있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을 지도, 유명한 작가로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어찌 보면 버드나무 축제는 그런 미래를 위한 씨를 뿌리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다. 지금 우리 문학회 회원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지원하고 참여해서 그걸 해 왔고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지난날을 돌아본다는 것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의 시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도 비록 서투르고 부족함 투성이었지만 지난 시간들이 그 나름의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문학회 창립부터 2019 오늘에 이를 수 있도록 미래 지향적 방향제시와 절대적 지원, 조언을 해 주시는 김홍은 교수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