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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서 종은 소유물이었습니다. 재산이기에 사고팔 수 있었습니다. 목숨까지도 주인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 종을 벗으로 삼는다면 획기적인 일입니다. 종의 위치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의 신분은 바뀌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세상도 바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평등 사상이 모든 조직의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늘의 기운’은 가까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원 사업을 ‘사후 세계의 보장’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은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진정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남은 일은 그분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분처럼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그 친구는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맡겨진 사람들입니다. 먼저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첫길은 ‘소유의 시각’으로 보지 않는 일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어찌 ‘내 것’이 될 수 있을는지요? 소유하려 들기에 고통이 함께합니다. 내어놓지 않기에 고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희생 없이는 깨달음도 없습니다. 참는 희생이 있어야 ‘사랑의 울타리’는 견실해집니다. 아픔 없이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산다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말씀(15,1-8)이 전체의 흐름을 주도한다. 복음의 주제는 어제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열매를 맺는 것이다. 즉, 가지가 열매를 맺음으로써 농부에 의해 잘려나가지 않고 계속 나무에 붙어있게 되며, 역으로 계속 나무에 붙어있음으로써 열매를 맺게 된다. 열매는 가지와 나무의 기쁨이요, 동시에 농부의 기쁨이며, 농부의 지속적인 손질을 유발한다. 따라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곧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며,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동시에 계명을 준수하는 일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1차 고별사의 대의(大意))였던 “서로 사랑하여라.”(13,34)는 새 계명이 두 번이나 반복된다.(12절, 17절) 이는 후기편집자의 의도를 역력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 반복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발설이기보다 요한복음 공동체 안에 발생한 ‘서로의 불신과 반목’ 등을 경고하는 후기 편집자의 의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반복되는 계명은 곧 ‘서로 간의 사랑’으로서 이 사랑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모범적 사랑에 근거한다.(12절) 사랑에도 등급(等級)이 있으며, 사랑도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사랑은 자칫 추상적인 것이어서 “사랑한다.”는 말만으로는 가장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사랑은 구체적인 옷을 입고 드러나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사랑으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며 잘라 말씀하신다. 그렇다고 사랑이 벗을 위한 목숨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주인이 종에게 명령하거나 강요하여 얻어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랑은 자유로이 이루어지며 가장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침’으로 드러난다. 이것도 예수님께서 오늘 고별의 밤을 지낸 다음 날 실제로 보여주실 모범적 사랑에 근거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들로서 아버지와 공유하는 지식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다는 이유로 제자들을 ‘종’이 아닌 ‘친구’로 부르신다.(15절) 물론 예수님과 제자들의 ‘친구관계’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에 충실한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의 계명에 충실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성립된다.(14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상기시키신다. 가지가 나무를 선택할 수는 없다. 당연히 나무가 가지를 선택하는 것이며, 가지는 철저하게 나무에 종속된다. 즉 나무와 가지는 ‘주인과 종’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가지가 사랑의 계명을 통하여 영원히 남을 열매를 맺는다면 이 관계는 ‘친구와 친구’의 관계로 전환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 앞에 ‘예수님의 이름을 통하여’ 구할 수 있는 최고의 값진 것이 아니겠는가?(16절)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7절) 사랑은 자칫 추상적인 것이어서 “사랑한다.”(I love you!)는 말만으로는 가장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말보다 조금 더 큰 사랑은 옷을 입고 육화되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너를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구체적인 사랑은 어떤 것일까? 영어 문장의 스펠링으로 운을 띄워보자.
?I : 실제로 따뜻함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L : 혼자서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남의 말도 듣는 것이다.
?O : 누구도 열 수 없는 마음의 문을 열어 남에게 공간을 주는 것이다.
?V : 우정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다.
?E : 신뢰심과 믿음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다.
?Y : 좋은 분위기를 배려하고 조성하는 것이다.
?O : 타인의 잘못을 한 번 이상 눈감아 주고 덮어주는 것이다.
?U : 서로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구체적인 행동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나은 사랑이며, 결국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다.
“저는 최대한 인생을 즐기며 살고 싶습니다. 즐긴다는 게 맨 날 논다는 뜻이 아니라 일을 해도, 공부를 해도 즐겁게 하고, 되도록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때하며, 언제든지 뒤돌아서면 후회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그런 저를 만들어 갈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안 될 때도 있고 힘든 날도 있겠지만, 그 까짓것 때문에 피해가고 뒤로 물러서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고난과 역경도 저의 인생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죠. …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고 헤쳐 나갈 용기가 있습니다. …”
[이 글은 1974년 7월 13일 울산광역시 우정동에서 출생, 일본 유학 중이던 2001년 1월 26일 도쿄 신오쿠보 지하철역에서 철길에 뛰어든 취객을 위해 목숨을 바친 고(故) 이수현님의 생각이다. 고인(故人)은 부산 시립공원(금정구 두구동) 7묘원 39블록 1106호에 잠들어 있고, 추모기념비는 부산 어린이대공원 내 학생교육문화회관 앞뜰에 세워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