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상촌을 떠나는 청년 유비
황건적의 난동으로 나라가 어지러움
에도 불구하고 소년 유비는 탁현 누상촌에서 낮이면 돗자리를 짜거나 무술을 연마하며, 밤이면 글을 읽으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서 어느덧 그의 나이는 스물네 살이 되었다.
이제는 소년이 아니라 체구가 늠름하고 눈이 이글거리는 당당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어느 봄날 아침.
이날도 유비가 새벽같이 일어나서 돗자리를 짜고 있는데, 언제나 일찍 일어나시던 어머니께서 웬일인지 이날따라 늦게까지 방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효성이 지극한 유비는 돗자리를 짜다 말고 방문앞으로 가서,
"어머니 오늘은 어디 몸이 불편하십
니까?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어요 ?"
하고 물었다.
그러자 방안에서는 이내 인자한 목소리로 대답이 나온다.
"현덕아 ! 이리 좀 들어오너라 !"
유비가 어머니의 부름에 따라 방안으로 들어와 보니, 아직까지 주무시고 계시는 줄 알았던 어머니가 옷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아랫목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늦게까지 방안에만 앉아 계시니 웬일이세요?"
"현덕아, 거기 좀 앉거라."
유비가 어머니 앞에 공손히 앉자, 이미 칠십이 다 된 어머니는 아들의 얼굴을 오랫동안 그윽하게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현덕아 ! 내가 너한테 한 가지 소원이 있는데, 네가 내 말을 들어주겠느냐?"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 소원이시라면 제가 무슨 말씀인들 안 듣겠습니까?"
"네 효성이 지극한 것은 나도 잘 알고있다."
"무슨 소원이신지 어서 말씀해 보세요."
"음 ......"
어머니는 사랑이 넘치는 시선으로 아들을 바라보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이제는 칠십을 바라보고 있어서 앞으로는 오래 살 것 같지도 않구나.
그래서 죽기 전에 입에 맞는 차(茶)를 한번 마시고 싶구나.
너도 알다시피 나는 젊어서부터 차를 좋아했느니라."
"네, 어머니가 차를 좋아하시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직까지는 차다운 차를 한 번도 마셔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죽기전에 낙양(洛陽)에서 가져오는 상품차(上品茶) 맛을 한 번 맛보고 싶은데, 네가 나를 위해서
그 차를 좀 구해 올수 있겠느냐?"
어려운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주문이었다.
낙양에서 가져오는 극상차는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그 값 또한 비싸기가 짝이 없어서 유비같이 가난한 사람은 도저히 손에 넣기가 어려운 차였던 것이다.
그러잖아도 유비는 어머니가 차를 좋아하시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생전에 극상차를 한 번 대접하려고 어머니도 모르게 얼마간의 돈을 모아 오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만한 돈으로 극상차를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런가?
그렇다고 효성이 지극한 유비로서 어머니의 소원을 못 들어드리겠다고
는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 ! 염려 마십시오.
제가 어떡하든지 어머니 입맛에 맞는 차를 구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고마운 일이로다. 그러면 오늘로 길을 떠나거라."
"네, 아침을 먹고 곧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
어머니는 말없이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아들을 불렀다.
"애, 현덕아 !"
"네 ?"
"너 지금 돗자리를 짜고 있었지?"
"네 밖에서 짜고 있었습니다."
"네가 짜고 있던 돗자리를 이리 들여 오너라 !"
유비는 두말없이 밖으로 나와, 절반쯤 짜다 둔 돗자리를 틀에 매어둔 채 방안으로 들고 들어왔다.
"어머니 왜그러십니까?"
"....."
어머니는 대답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벽장 속에서 검을 들어내었다.
언젠가 소년 유비에게 설명해 주었던 조상님께로부터 물려오는 유서깊은 검이었다.
어머니는 그 검을 칼집에서 뽑아내어, 앞에 놓여있는 돗자리의 줄을 말없이 <탁 ! > 끊어 버린다.
"앗 ! 어머니 ! 왜그러세요?"
유비는 깜짝 놀라며 어머니를 쳐다 보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전히 조용한 표정으로 검을 칼집에 넣어 아들에게 내어주며 말한다.
"자, 길을 떠날 때 이 검만은 꼭 차고 가거라.
너는 이 검에 달려있는 거룩한 정신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된다."
"네, 검이 가지고 있는 정신은 분명하게 잘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이 돗자리를 쓰지 못하도록 줄을 끊어버리신 뜻은 어디 있사옵니까?"
유비는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음...., 네 나이가 이미 스물네 살. 너는 이 누상촌 구석에서 돗자리나 짜고 있을 인물이 아니다.
세상이 하도 어지러우니, 이제는 그동안에 생활을 청산하고 차도 구해 올 겸 세상 구경이나 하고 돌아오너라.
다시 돌아오더라도 혼탁한 세상을 구해야 될 일이지, 행여 돗자리를 짤 생각은 하지 말거라."
유비는 어머니의 깊은 뜻을 헤아리고 다시 한번 머리를 수그렸다.
"어머니 말씀을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어서 길을 떠날 준비를 하거라."
"예, 그러면 저는 길을 떠나겠습니다
만, 제가 길을 떠나게 되면 빨리
돌아오지는 못 할것 같은데,
그동안 어머니는 혼자 어떻게 지내시겠습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다녀오너라."
유비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러면 산 너머에 사는 주랑(朱郞)
이에게 제가 없는 동안에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도록 부탁을 하겠습니다."
"네가 안심이 안 된다면 그애를 데려 오려무나... 어쨌든 너는 지체없이 오늘로 길을 떠나도록 해라."
유비의 어머니는 어째서 사랑하는 아들을 어지러운 세상으로 내보내려
고 했을까?
그는 과연 극상품의 차를 마시고 싶어서 아들에게 먼 길을 떠나라고 했을까?
아니다 ! 결코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장차 큰일을 해야 할 인물이기 때문에 세상물정을 경험하도록 길을 떠나 보내려는 것이었다.
지금 세상은 황건적으로 인해 극도로 어지럽기 짝이 없건만, 누상촌에서 돗자리나 짜고 있는 아들 유비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벌서부터 아들을 세상에 내보내려는 뜻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때마다 인정에 이끌려서 오늘날까지 미루어 오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어젯밤에는 놀라운 꿈을 꾸게 되었다.
새벽 꿈에 ....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고 깊은 산골 길을 외로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바라보니, 저 멀리 들판에서는 전쟁이 벌어졌는지 아우성과 고함 소리가 연실 들려오고 있었다.
유비가 그 소리를 듣고,
"어머니 ! 제가 저기로 달려가서 싸움을 말리고 오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을, 어머니는 아들의 손목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으면서 이렇게 꾸짖었다.
"이애야 ! 네가 이 늙은 어미를 버리고 어디를 간다는 말이냐 ! "
그러자 그때, 어디선가 우뢰 소리가 "우르르" 울리며 하늘이 진동하는 듯 싶더니, 홀연 면류관(冕旒冠)에 곤룡포(袞龍袍)를 입은 오 대 조상 경제(景帝)가 구름 속에 나타나며,
"이애, 현덕 어미는 듣거라! 네가 왜 아이의 손목을 붙잡고 놓아 주지를 않느냐.
지금은 세상이 어지러워 그 애가 나서야 할 때가 되었도다.
너는 하루라도 빨리 그애를 세상에 내보내도록 하거라!"
하고 점잖게 호령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 보니. 황망한 꿈(夢)이었다.
유비의 어머니는 새벽에 그런 꿈을 꾸었기 때문에, 한참을 생각한 끝에 드디어 오늘 아침에는 아들을 보다 큰 세상으로 내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차를 구해 오라고 한 것은 집을 떠나게 하려는 구실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지난 밤 꿈 이야기를 아들에게 하지 않은 것은 혹시라도 아들이 꿈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교만해질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을 먹은 유비는 허리에 검을 차고 조그만 보따리 하나를 등에 짊어 지고 집을 나서며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였다.
"어머니 ! 그럼 길을 떠나겠습니다. 아무리 빨라도 두세 달은 걸려야 돌아올 것 같으니 그동안 몸조심하십시오."
"오냐 ! 내 걱정은 말고 잘 다녀오너라. 한번 집을 나섰으니 세상을 골고루 돌아보고 오너라."
"그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유비는 어머니에게 두 번 절하고 누상촌을 나섰다.
이 세상에 태어난 지 스물네 해 만에 처음으로 떠나 보는 먼 길이었다.
길을 떠난 그 날은 벛꽃이 만개한 화창한 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