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자, 원소, 원자는 무엇이 다른가?
분자와 원소, 원소의 원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원자는 물질이라 할 수 있는 최소의 것으로.. 낱낱의 수소, 산소, 탄소 같은 것이고,
원소는 원자의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이 되며,
분자는 다른 원자 둘 이상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나?..^^
내가 과학 전공자가 아니라 이 셋을 정확히 밝혀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 셋은 확실히 나눌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어물쩡 설명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있다.
불교에서는 물질의 기본으로 지, 수, 화, 풍을 말하는 데.. 그것은 고대인들이 생각한 물질의 최소 단위 또는 성질이 된다.
이때 최소 단위라 하면 원자가 되고, 성질이라 하면 원소가 된다. 그런데 우리가 인지하는 최소 물질은 분자라고 했다.
그러니까 원자가 원소, 원소가 분자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수화풍은 원자인가.. 원소인가.. 분자인가?..
왜 이런 횡설수설을 말의 시작으로 삼고 있는걸까요?..
지금 [열토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의 핵심은 어느 쪽이 일방적으로 틀렸다 기보다..
자기 입장에서 바라보는 주장만 너무 고집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제, 오늘 시작된 게 아니라.. 부파의 출발이라 보면서..
하여 자기 주장을 확실히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는 어떤 관점에서 주장을 펼치는 것인지?.. 알아 본다면..
상대에 대한 비난은 줄고 상대와 자신은 무엇이 다른지.. 오히려 더욱 뚜렷이 드러나면서..
분쟁(分爭)이 아닌 화쟁(和諍) 화합(和合)으로 나아가는 길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저는 혜여님과 그 친구들을 비판합니다. 그들이 틀렸다고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관점이 너무 좁다고 하면서..
그러나 비방은 자제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은 기존의 불교를 비방하지만, 그 착각은 그들 견해 부족이라 보면서..
저의 비방이 보이면 질책을 바랍니다..^^()..
비방은 본인은 물론 상대에게도 도움이 아니! 됩니다.
첫댓글 제가 보는 혜여님의 기본은..
5취온이라 알려진 [나].. 그것은 정신적인 취착일 뿐이다.. 를 멸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3독을 멸해야 한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틀렸습니까?..
아니! 라고 봅니다. 이런 주장은 널리 전해야 할 것으로 초심은 봅니다.
혜여님의 문제는 그런 기본 자세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주변에있는 불교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모순이 발생합니다.
혜여님은 상좌부의 3세설을 비판합니다.
전생, 현세, 내세는 없다는 겁니다. 오직 현세만 있다는 거지요.
그 주장을 세우려다 보니 초기 경을 억지로 해석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대승불교를 힌두교의 아류로 분류하여 힌두교와 함께 비판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혜여 님이 비판을 넘어 무시할 수 있을 정도 힌두교가 만만한 종교가 아니라고 봅니다..
힌두교인 가운데 정말 무식한 자들이 굉장히 많겠지만.. 힌두교의 기본 사상은 혜여 님 수주을 훨씬 넘어서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힌두교를 심심풀이 땅콩정도로 생각하는 혜여님은 시작부터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거지요.
혜여 님 뿐 아니라 대승불교를 한두 불교라 하면서 무시하고 있는 불자들은 스스로 무지를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대승불교가 힌두교만큼 기본이 튼튼하다면 세계 어느 곳에 내어 놓아도 그곳 기존의 종교나 사상을 덮을 수 있을 겁니다.
단지 힌두교가 아무리 심오한 철학과 원리와 논리가 투철하다고 하여도..
힌두교의 브라만과 아트만으로 불리는 실재론은 불교의 [무아]에서 보면 중등 정도 수준이라는 겁니다.
하여 불교 교리를 깊이 몰라도..
무아를 알고 있다면 힌두교를 비판할 수 있는 무기를 하나 갖추고 있는 게 됩니다.
그런 것이지만 힌두교는 불교에 무시당할 종교는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대승불교와 대승불자가 동일이 아니듯,
대승사상을 담고 있는 대승경전이라 하여..
경의 내용이 같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특히 대승 사상(=보살)의 시각은 상대 능력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대승 사상을 잘 담고 있는 경전이라할 수 있는 <반야경>과 <법화경>, <화엄경>이지만..
그 내용 전개는 많이 다르게 보인다는 겁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어느 경은 맞지만, 어느 경은 틀렸다고 할 수 없다는 거지요.
왜냐면.. 상대 입장을 고려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럼에도 대승 불교가 불교일 수 있는 까닭은..
무상, 무아, 공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틀림없어야만 합니다
탄생이나 생멸이란 일단 기존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을 경우 생각할 수 있는 말이지요.
그런 존재가 실재하는 게 아닌 현상적인 존재라면.. 곧 스크린에 나타난 장면이란 뜻인데..
장면 속의 일체에게 생멸이란 말이 타당할까요?..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인데.. 생이니 멸이니 하는 말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혜여 님처럼 대승불교를 비판.. 아니 비방하는 자들은..
대승불교가 진여, 유식.. 하면서 실재를 주장한다고 하는 겁니다.
만일 대승불자라고 하면서 진아를 실재하는 무엇으로 알고 있다면.. 그는 邪道를 행하고 있는 거지요.
예를 들어 성철 스님께서 [참나]를 강조하셨는데.. 참나란 실재하는 자아다 라고 믿고 계셨다면..
스님은 사도를 행하고 있는 게 된다는 겁니다.
저는 스님께서 참나를 실재로 생각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
만일 실재하는 걸로 믿고 계셨다면 스님의 그 [참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어디선가 스님은 다음 생을 가난한 집의 아이로 태어나 득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한 말을 들었습니다.
이 생에서 성불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애둘러 말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무아를 철저히 이해해도(=깨달음) 투철하게 깨치지 못하면..
다음 생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거지요.
초심님이 언급하신 무아를 투철하게 깨치지 못하면 다음생이 있다는 말은 육체적 다음 생을 말하고 계신건지
아니면 생을 존재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인지요. 몸을 받지 않는다면 색 즉 외형을 갖는 어떤 탄생만 없다는 의미인가요?
제가 아는 불교는 생명 현상과 의식 현상을 전제하고..
부처님은 먼저..
그 가운데 후자를 제자들이 여실히 이해하고 깨치도록 가르쳤다고 봅니다.
즉 범부들은 3세를 윤회하는 데. 그때 윤회의 주체는 [자아]라고 이름한..
저 의식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무의식에 가까운 잠재의식]이라는 겁니다.
그 잠재의식을 멸하지 못하면.. 그 넘이 주인이 되어 윤회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게 제가 보는 불교입니다..^^()..
범부들의 특징은 존재를 실재하는 것으로 당연히 인다는 것입니다.
숨 쉬는 것은 그렇다 해도..
매일 먹는 밥이나 물이 사실 실재하는 게 아니라고 의식하고 있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부처님의 몸은 전신이 사리가 되었다는 데.. 사리는 불멸하는 존재인가요?..^^
보통 인간(=5온)의 몸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순환하는 거지요?..
성철 스님 몸도 이미 자연의 순환을 겪으면서 다른 몸의 일부분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부처님 몸도 그래야 하는 게 아닙니까?)
이렇게 이(우리) 몸이 인연을 다해 다른 몸으로 순환해 가는 것을 보면..
이 몸만이 나가 아닌 자연인 우주가 곧 나의 몸임을 본다고 했습니다.
그럴 경우 자연을 실재하는 존재나 물질이라고 하십니까?.. 그러나 실재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물론 우주도 잠시도 쉬지 않고 변하고 있다(일체무상)는 거지요.
저도 대승경을 읽으면서 많이 놀랬던것이 힌두교의 참나(진아)와 다른게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무아를 부정하고 진아를 설하고 있는것 처럼 느꼈습니다. 전변설과 비슷하게 보였지요. 현상의 바탕이 되는 진아 즉 불성은 불변이다는 가르침은 힌두교와 다른게 뭐지? 이런 의문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결국 진아 불성은
성품을 표현한것이지 존재를 말하고 있는것이 아니다는 개인적 결론을 내렸습니다. 진아 불성을 존재화 시켜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그것도 하나의 방편이 될거라 생각합니다. 무아라 하면 단견이나 허무로 이해하는 혜여님이나 무아님과같은 단견론자가 있듯이 불성이라 하면 상견으로 오해하는 분도 있겠지요.
무아는 존재적 측면에서 작자를 말하고 있고 진아(불성)은 현상적 측면에서 작자를 말한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의 견해는 어떠하신지요.
현대 과학에서 물질의 최소 단위는 진동하는 끈이고 이끈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가에 따라 다른 성질을 가진다고 합니다. 진동하는 끈은 어디서 온것일까? 누가 최초로 종을 울렸기에 진동하는 끈이 나타난것일까 하는 의문은 아직 답이 없네요 --;
12연기법은 고의 생멸을 다룬 연기법이라 했는데..
일반 연기법은 자연(=우주) 법까지 포함한다고 봅니다.
이 존재가 생길 때 저 존재가 생깁니다.
이 존재가 멸하면 저 존재가 멸합니다.
그러니 최초의 누구라든가.. 原動者라는 것을 상정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 초심님 견해에 동감합니다. 그건 부처님도 알수 없다 하셨지요 세상의 시작 무명의 시작은 부처님도 알수 없다 하셨습니다. 고의 멸의 입장에서는 상정할 이유가 없겠지만 과학하는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타임머신이나 현대의 우주론 양자론 등을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이 존재가 생길 때 저 존재가 생기고 이 존재가 멸할면 저 존재가 멸한다는 것은 요즘 양자론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모든 존재는 파동으로 설명이 되는것 같습니다. 홀로그램 이론을 보면 일즉다 다즉일 표현과 같습니다. 홀로그램은 일부분이 전체의 이미지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사과 홀로그램 일부분을 뜯어내 빛을 비추면 온전한 사과 모양이 나타남
0001. 투덜이77 : 1 단멸론 : 죽은후 누구든지 몸을 받지 않고 단멸한다. 즉 이어지는 어떤것도 없다.
2 윤회론 : 번뇌를 다 끊은 아라한 이상은 미래에 몸(육체적)을 받지 않지만 즉 윤회하지 않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은 몸(육체적)을 받고 윤회한다.
3.상견론 : 몸은 사대로 흩어지지만 정신은 남아 업보에 따라 다른 몸을 받는다.
즉 몸은 이어지지 않지만 정신은 이어진다.
-> 라고 하셨는데.. 단멸론, 윤회론, 항상론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무엇가를 [실재]로 전제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그것이 단멸한다고 하는 것이고, 그것이 윤회한다고 하는 것이고,
그것이 상주한다고 하는 거지요.
0002. 만일 단멸적인 주장이든, 윤회적인 주장이든, 상주적인 주장이든..
실재하는 것 없이 그렇게 실재하는 것 같은 게 단멸하거나, 윤회하거나, 상주한다고 하면..
그래도 역시 잘못된 견해일까요?..
투덜이님은 이렇게 설명했지요.
4.무아(중도)론 : 이후 이것은 나의 몸이다고 여기는착각이 더이상 일어 나지 않는다.
라고..
물론 흠을 잡기 어려운 문장으로 잘 이해하고 있는 게 되지만..
이것이 나의 몸이라고 할 게 없기에 [내 몸]이라 하지않는 것과
내 몸이라고 할 게 있지만. .무아이기에 집착이나 착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완전히 [무아]를 이해한 게 아니지 않나요?..^^
0003. 혜여 님과 그 친구들의 주장은 몸과 정신에 집착하면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몸과 정신은 죽으면 볼이 꺼지듯 사라지는 것이기에.
그 말은 나의 몸이라고 할 만한 게 있으나..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게 되지요.
하여 그것은 진정한 [무아]가 아니라는 겁니다.
초심님 설명을 들으니까
그전에 청정도론에서 보았던 이야기가 생각 납니다.
어여쁜 아낙네를 보고
그 외모에서 해골과 같은 것을 연상하면서
취착하지 않는 것을 해탈이라 했는데,
약간 부족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 아릿다운 아낙네 자체에서
아릿다움이라는 것이 나오는 게 아니라
아릿다움이라는 생각 자체가 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라고 여기는 것이 해탈이다,
라 하고 싶은데요.
청정도론의 해탈은 그래서 약간 부족한 느낌이었습니다.
잘 지적하셨어요.
그들이 잘못보는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그래서 몸둥이 없이 수상행식이 나오냐? 하는거지요.
그래가지고 몸둥이가 사라지면 정신도 사라진다는 야릇한 연기법이 나오구요.
^^ 어여쁜 아낙네를 해골로 보는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게 아닌것 같은데요.
어여쁜 아낙을 해골로 보아야 한다면 끔찍한 해골은 어여쁜 아낙으로 보아야 하나요?
그리고 단멸 견해를 가진 불자가 단멸견을 주장할때 경의 장작불 비유를 갈대경의 갈대가 서로 의지하는 비유를 많이 사용하는데 장작이 다 타면 불은 어디로 간것인가. 장작이 계속 공급되는 동안만 불은 존재하는것이다는 예를 들며 단견을 주장합니다. 즉 장작이 불이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이런 이해는 전혀 그 비유를 이해 못하는 것입니다. ^^
갈대의 비유도 2개의 갈대가 서로 의지한다 한개만 없어도 쓰러진다 는 것을 2개의 갈대가 있어야 갈대는 존재 가능하다 여기에 몸과 정신을 대입하여 연기법이라 하는데 이것도 갈대의 비유의 진정한 의미를 전혀 이해 못하고 존재론적으로 해석해 버린 오류가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