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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묵상글 (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어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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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0.29 05:34
-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어도
오늘 겨자씨의 비유를 읽자니
전에 저희 식당에 찾아오신 할아버지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연세도 구순 가까이 되어 보였고 행색도 초라한 할아버지였는데
식사하신 뒤 보답하는 마음으로 무슨 씨앗을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차로 달여 먹으면 몸에 아주 좋은 것이니 꼭 씨를 심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제가 미심쩍어하는 태도를 보이며 선뜻 감사히 받지 않으니
그 할아버지는 큰 소리로 제발 믿으라고 그리고 받으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호의와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받긴 하였지만
저는 그것을 까맣게 잊어버렸고 오늘에서야 그것이 생각났습니다.
오늘 주님 말씀에 대비하면
저는 그 씨를 제 정원에 심지 않은 그 ‘어떤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지금까지 씨를 한 번도 심지 않았습니다.
모종이나 묘목을 사서 심은 적은 많았어도 씨는 심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왜 그런 사람일까요?
하느님 나라의 씨도 이렇게 심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아무래도 저는 여간해서는 잘 믿지 않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특히 약이나 건강식품 같은 것은 효능이 전혀 없다고 생각진 않지만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으며 그리 큰 믿음을 두지 않는 편입니다.
그것은 아마 제가 건강이 매우 안 좋은 사람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런 말을 믿을 텐데 제가 건강하기 때문이고,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지 않겠다는 그런 믿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그럴 수 있지만 문제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불신의 관성이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까지 불신하는 것으로 이어지면 어떻게 되느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 같다고 오늘 주님도 말씀하시잖습니까?
보잘것없어 보이는 거기에도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고,
우리가 가능성 없다고 믿는 거기에도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은 있을 수 있잖습니까?
씨앗이란 겨자씨만이 아니라 모두가 작고,
작지만 거기에 엄청난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씨를 심어도 나지 않을 수 있고,
자라기 전에는 그것이 어떤 씨인지 모를 수도 있지만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을 믿고 씨를 내 정원에 심습니다.
하느님은 가장 보잘것없는 것을 가지고도 무엇을 하실 수 있고,
우리 눈엔 가능성이 없어 보여도 하느님께는 가능할 수 있지요.
Nothing is impossible to God!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가능한 하느님을 믿고
오늘도 우리 정원에 가능성의 씨를 심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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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류학자인 메리 캐서린 베이트슨은 사람들이 더 오래 사는 반면 사람들의 생각은 더 짧아지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햇수로는 훨씬 더 이 세상에 머무르고 있지만, 실제로 사람들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생각은 짧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짧은 삶을 살았지만, 세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 사상 등이 현재까지 이어져 누구보다 길게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몇 년 전, 피정 중에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다가 지금의 제 모습을 크게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겨우 33년의 세상 삶을 사신 예수님보다 훨씬 더 인간 세상에서 오래 살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짧은 시간을 정말로 길게 사셨습니다. 얼마나 긴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의미와 영향이 이어져 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많은 이가 순간의 욕심과 이기심에 집중해서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 생각이 짧아질 뿐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그래서 그 삶을 통해 오래 살 수 있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단순히 오래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예수님처럼 긴 삶을 살 수 있도록 사랑의 삶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삶에 초점을 맞추면 초조해 하지 않습니다. 여유로움 속에서 묵묵히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씨를 정원에 심었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었고 이 나무의 가지에 하늘의 새들이 깃들였다고 하십니다. 사실 겨자씨는 정말로 조그마한 씨로, 유다 문학에서는 ‘작은 것’의 상징입니다. 이 작은 것의 상징을 하느님 나라에 비유한다는 것이 이상하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거창하고 화려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당시의 사람들은 정치적 의미의 메시아가 와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전해주시는 기쁜 소식인 복음을 듣고서 변화되면서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길 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몫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위대한 정치적 메시아가 나타나 자기들을 끌고 갈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대신 스스로 사랑의 삶을 살면서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듯, 또 누룩이 부풀어 오르듯이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길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의 가치를 모른다면 다른 사람이 그걸 알려줄 것이고, 그건 실제 가치보다 더 저렴할 것이다(버나드 홉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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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한 쌍의 비유를 전해줍니다. 곧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9)
‘겨자씨’는 유다문학에서 ‘작은 것’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그것은 ‘정원’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아무 데나가 아니라 ‘정원’에, 그것도 “자기 정원”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라는 말에서, “깃들다”는 단어의 뜻은 “밑에 거주하다” 곧 “장막에 들어가다”,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날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안전하고 영속적인 거처를 마련하고 지속해서 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교회’라는 혹은 ‘가정’이라는 생명의 말씀나무에 한 둥지를 틀고 사는 새 떼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미 한 그루의 생명나무입니다. 당신께서 뿌려진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 사랑으로 피어난 나무입니다.
한편, ‘겨자씨의 비유’가 하늘나라의 외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누룩의 비유’는 내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들어가 자기의 능력을 전체에 돌려줍니다. 그러나 반드시 먼저 반죽되어야 하고, 섞여야 됩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속에 묻혀 보이지 않지만, 결코 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 섞여서, 부풀리고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을 밀가루 “속에” 집어넣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이 ‘누룩’을 우리 ‘속에’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적은 양의 ‘누룩’이 자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갈라진 우리의 내부를 통합할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룩’이 되어 세상 속으로, 형제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하여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하늘나라의 복음은 세상을 해방하는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말입니다.
또한 “집어넣다”(εγκρυπτω)는 동사는 “숨기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밀가루 서 말 속에 숨긴 ‘누룩’이 온통 부풀어 오르듯이, 하늘나라도 현재 숨겨져 있는데 미래에 엄청나게 확장되리라는 전망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겨자씨’가 이미 ‘우리’라는 밭에 뿌려졌고, ‘누룩’이 이미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라는 밀가루 안에 넣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맘껏 자라나고, 맘껏 부풀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안에 넣은 누룩이 제 속을 파고들게 하소서!
제 안에 뿌려진 씨를 묻어두고만 있지 않게 하소서!
섞여들지 못한 까닭에 부풀어 오르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죽지 못한 까닭에 싹을 피우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9)
주님!
사랑하는 이는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에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낮아지는 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이신 까닭입니다.
주님! 사랑하는 까닭에 형제들 앞에서 낮아지고 작아지게 하소서!
사랑이, 제가 형제들 앞에 낮아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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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소리 없는 변화
“하느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하셨을까?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입니다. 오늘 그 씨를 보여드립니다. 얼마나 작은지 보십시오. 그런데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새가 깃들일 만큼 우거집니다. 누룩 역시 밀가루 반죽 속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입니다. 누룩도 밀가루 양에 비하면 아주 보잘것없을 만큼 적은 양이지만 밀가루 반죽에 들어가서 밀가루 전체의 성질을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한 사람이 내 삶의 자리와 머무는 곳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겨자씨와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 서면 지금은 미약하지만 분명 큰 변화가 올 것입니다. 한 사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큰 나무 역할을 하게 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그늘의 고마움을 느끼게 될런지요.
콩나물을 키울 때 콩나물에 물을 부으면 물이 다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콩나물은 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성장과 변화는 드러나지 않게 이루어집니다. 실망과 좌절 안에서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역경과 시련도 믿음의 사람에게는 은총의 기회요, 희망입니다. 따라서 순간순간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왔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완성을 향한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시작과 완성 사이의 긴장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을 스쳐 가는 순간순간의 생각, 꿈같이 왔다 갔다 하는 우리의 상상, 마음속 깊이 숨은 티끌 같은 비밀 하나까지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신 눈앞에 숨겨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그러므로 내 생활의 동작 하나하나가 천상으로 치닫는 하나의 몸짓이고 자세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로마2,6). 이 말씀은 믿는 이들에게는 두려움보다는 기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성장을, 그리고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자연스러운 변화를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의 가르침이 마음 안에 새겨져서 자연스러운 삶의 변화를 통해 증거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17,21) 고 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내 안에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지 따지지 마십시오. 자동차 운전을 하든지, 부엌일을 하든지, 짐을 나르든지 상관없이 마치 사제가 성체를 모시고 가듯이 하십시오. 매 순간마다 이렇게 ‘천국을 위하여 일하십시오”(알베리오네). 내 몫을 충실히 하는 가운데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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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중남부 사제 모임을 다녀왔습니다. 칸쿤에서 있었습니다. 9개 주의 사제들이 모였습니다. 숙소에서 미사를 봉헌하다가, 마지막 날에는 근처 성당을 찾아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서울 교구 5명, 마산 교구 2명, 청주 교구 2명, 부산 교구 2명, 인천 교구 2명, 전주 교구 1명, 수도회 1명, 이렇게 15명이 모였습니다. 저는 회의 중에 신심 단체의 담당 사제를 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꾸르실료, 성령기도회, 레지오, 엠이의 담당 사제를 정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이미 꾸르실료의 담당 사제를 맡고 있었고, 신부님 한 분이 성령 기도회 담당 사제를 맡아 주기로 했습니다. 엠이와 레지오 담당 사제는 추후에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담당 사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동북부에 있을 때는 담당 사제가 있었습니다. 저는 3년 동안 엠이 당당 사제를 맡았습니다. 엠이 봉사자들과 주말을 함께 했고, 코로나 시기에도 피정을 했습니다. 함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제 중남부에도 성령기도회 담당 사제가 정해졌으니, 내년에 성령 대회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엠이와 레지오도 담당 사제가 정해지면 더욱 활성화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사제들이 겨자씨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는 말씀의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는 복음의 줄기를 뻗어야 합니다. 사제는 미사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공동체는 말씀과 복음 그리고 미사를 통해서 성장하고, 열매 맺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는 말씀의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부부는 복음의 줄기를 뻗어야 합니다. 부부는 기도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자녀들은 말씀과 복음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열매 맺습니다. 사제가 권위만 내세우려 한다면, 한국에서 했던 방식으로만 사목하려고 한다면 공동체는 갈등과 상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부부가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복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가정에도 갈등과 상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번 사제 모임을 통해서 충전의 시간을 가졌으니, 중남부 한인 공동체가 큰 나무가 되어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가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부부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훈아의 ‘사랑’이라는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나훈아의‘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 보고 또 보고 또 쳐다봐도/ 싫지 않은 내 사랑아/ 비 내리는 여름날에/ 내 가슴은 우산이 되고/ 눈 내리는 겨울날엔/ 내 가슴은 불이 되리라/ 온 세상을 다 준대도/ 바꿀 수 없는 내 여인아/ 잠시라도 떨어져서는/ 못 살 것 같은 내 사랑아/ 행여 당신 외로울 때/ 내가 당신 친구가 되고/ 행여 당신 우울할 때/ 내가 당신 웃음 주리라” 참 아름다운 가사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전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교회가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같은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안에 감추어졌던 놀라운 가능성을 보았고, 제자들에게 믿음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비록 시작은 12명이었지만,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수많은 결실을 보고 있습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조건을 보시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데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을 배반했음에도, 다시 악의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지었음에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비록 현실은 작고 초라할지라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큰 결실을 볼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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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퍼즐을 하나 샀습니다. 어릴 적을 생각해서 1,000조각짜리 퍼즐을 사면서 속으로 ‘이것쯤이야 금방 맞추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쉽지 않았습니다. 1,000조각이 모두 달라서 잘못된 것을 끼워 넣을 염려는 없지만 모두 다르므로 비슷하게 생긴 것은 다 넣어봐야 한다는 단점도 있었습니다. 특히 제일 어려웠던 것은 검은색 바탕을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온통 다 까매서 정말로 검은 것은 모두 넣어봐야 했습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매일이 똑같게 여겨지지만, 사실은 모두 다른 하루고 그 하루하루를 잘 엮으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인생 그림이 되겠군. 또 검은색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검은색이 없으면 그림은 완성될 수 없는 거야. 우리 삶에 고통이 없으면 좋겠지만 고통이 있어서 인생이라는 그림이 완성되는 것처럼.
주님께서 ‘하늘나라는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관해 물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왜 하늘나라에 관해 물었을까요? 고통 때문에 물었습니다. 이 세상 삶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늘나라에 가면 이렇게,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시면 좋은데,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또 누룩과 같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무엇인가에서 시작되는 것이 하늘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억하십니까? 주님께서 요르단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하늘나라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작디작은 한 인간, 세상에 비하면 겨자씨만하지만 죽어서 큰 나무가 되고, 사람들을 신앙으로 부풀린 누룩과도 같은 역할을 하신 그분, 그분이 주님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를 찾고 있다면 그것은 작은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것. 작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하늘나라일 것입니다. 고통이 우리 삶에 있지만 그 안에도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그림 안에 화려한 색도 어두운 색도 함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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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과 복
‘운’은 무엇이고 ‘복’은 무엇일까요?
‘운’은 그저 우연을 말하고 ‘복’은 기도에 대한 응답일까요?
혹자는 이렇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운’은 쌓아온 공덕(선행)이고 ‘복’은 노력의 대가이다.
뭐든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모두 선함에서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대와 그대의 가정에 ‘운’과 ‘복’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그대가 행했던 모든 선한 것들을 하느님께서 ‘운과 복’이라는 은총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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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실현
<내 고향집>
“구암리카페에서의 축제 음악회”
어제는 참 행복하고 만족한 하루였습니다. 100% 충만한 하루를, 하느님 나라를 살았던 날이었습니다. 과정마다 목적지였고 과정마다 만족했습니다. 어디서 마쳐도 완성된 하루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다음 행복기도 내용 그대로 였습니다. 늘 자주 외어보며 지금 여기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임을 확인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발견이자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역시 기상하자마자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 만세칠창중 네 번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를 힘껏 외쳤습니다. 평화로운 하루 순례여정중 또렷히 부각되는 깨달음은 ‘결코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는 것입니다. 일어나서도 안되겠고 일어나지도 않겠다 하는 생각을 평화로이 살아가는 분들을 볼 때 저절로 드는 확신이었습니다.
“산에
산을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깊은 산같은 분이예요.”
늘 산이라 자부하며,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산처럼 머물러 살다가 어제는 참 오랜만에 움직였습니다. 함께 했던 분에게 산을 움직였다며 믿음을 격찬했습니다. 산아래 모두 바뀌어도 늘 그 자리에 한결같은, 변함없는 산이 있어 전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말에 늘 거기 그 자리에 산처럼 정주해야겠다는 다짐을 새로이 했습니다.
어제 하루 휴가를 내어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같은 분들과 참으로 오랫만에 충남 예산 봉산의 고향집 순례를 했습니다. 하루 거룩한 순례피정을 다녀온 느낌으로 참 충만한 하루였습니다. 두분 자매님의 생애가 그대로 하나의 “살아 있는 성경책”과도 같다 생각되는 분들이었습니다. 명실공히 다음 다산 어른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분들이었습니다.
“내가 가진 지식은 입으로 하는 자랑이 아니다. 본보기가 되고 싶다면 거쳐 온 세월로 증명하라.”
살아 온 생애 자체가 본보기가 되는 분들이었습니다. 어제 하루 저에겐 ‘신의 한 수’ 같은 하느님의 선물같은 분들이었습니다. 함께 편안히 나눈 식사도 좋았고 고향집 예쁜 구암리카페에서 머물렀던 시간도 참 평화로워 시간 가는줄 몰랐습니다. 마냥 평화로워 마냥 머물고 싶었습니다. 참 아담하고 아름답고 평화롭고 아기자기한 카페로 평화로운 분위기에 저절로 젖게 하는 느낌이었고 함께한 자매님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했습니다.
고향집 근처에서 만난 분은 오직 한분이었지만 오랜만에 충청도 사투리로 친근한 대화도 나눴습니다. 제 고향집 구암리카페 집자리가 좋다는 말도 다시 확인했습니다. 이건 어머니도 살아 생전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여긴 좋은 집자리니 절대 움직이지 말라는 어머님 말씀을 들었다며 형수님은 좋은 집자리에서 제가 태어났다며 저를 지목했습니다.
태어나서 20년간 고등학교 시절까지 살아온 고향집입니다. 저의 정서 8할은 여기 고향집 환경 영향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주마등처럼 무수히 떠오르는 그리운 고향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어제의 절정은 구암리카페 뜨락에서 즉흥적으로 열린 음악회였습니다. 함께한 한분은 교대1년 후배인 70대 자매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을 지냈던 재원으로 연민과 정의의 사람이자 관계의 달인이요 노래와 기타에 능숙한 분이었습니다. 새삼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열정에 있음을 확인시켜 준 분이었습니다.
두분 다 공통적으로 뛰어나게 좋은 분들이고, 한분은 겸손과 진실, 한분은 순수와 열정으로 요약할 수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수도생활을 그대로 보답받고 있다는 느낌의 하루였습니다. 참 무수한 동요들을 함께 즐겁게 열창했고 그대로 지금 여기가 하느님 나라임을 실감했습니다. 문득 떠오른 ‘일터로 가자’ 노래를 약간 개작해 불러도 봤습니다.
“낙원이 어디냐고 묻지 말게나
웃으며 노래하는 여기가 낙원이로구나
내 가슴엔 비가 개어 하늘 푸르고
내 가슴엔 언제나 본바람 분다
어화 어화, 어화디야 일터로 가자
이 나라의 주인이 너와 나로구나”
함께 한분들이 하느님 나라의 일꾼 자매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참 기이할 정도로 카페에서 만났던 몇분의 손님과 초등학교에서 만났던 분 한분외에는 면소재지에서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할 정도로 텅빈 시골 땅에 건물들이었습니다. 그래도 구암리카페에 손님은 계속된다하여 기뻤고 친절한 분들이라 잘 될 것이란 예감도 들었습니다.
후에 자생 음악회 동안 카페는 비어 있었지만 비어 있는 그 모습도 참 평화로웠습니다. 카페처럼 지친 분들에게 늘 편안한 빈자리를 마련해 드리고 싶은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두 비유입니다. 오늘의 은혜로웠던 추억에 잘 맞는 비유임을 깨닫습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두 비유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관계의 그물망입니다. 성장하는 겨자씨 나무처럼 오늘의 보물같은 추억은 끊임없이 섬기고 나누는 풍부한 관계의 그물망으로 확장될 것이라 믿습니다. 더불어 내 자신이 성장하는 겨자씨처럼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 되길 바라는 마음 역시 간절합니다. 이어지는 또 하나의 비유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 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바로 어제 함께 했던 분들이 사랑의 누룩과 같은 분들었고, 그리하여 기쁨으로 부풀러 올랐던 하느님 나라의 분위기를 체험했습니다. 누룩은 참 좋은 효소입니다. 부패인생을 향기로운 발효인생 하느님 나라로 변모시켜주는 성령의 효소, 사랑의 효소입니다. 건물이나 자연환경이 만드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성령의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 만드는 하느님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사람이 희망이요 참보물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으로 끊임없이 성장하는 겨자씨 나무같은 사람이, 성령의 효소가 되어 안팎으로 발효시켜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 사람이 희망입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하느님 나라입니다. 부부공동체나 수도공동체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아내와 남편으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 원리는 다음 두 구절이면 충분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여기에 무수히 덧붙일 수 있습니다. 서로 섬기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서로 나누십시오, 서로 존중하십시오, 이럴 때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 공동체입니다. 이어지는 마지막 구절도 소중합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중해야 합니다.”
상호사랑, 상호존경의 하느님 나라 부부공동체입니다. 부부뿐만이 아니라 제가 몸담고 살아가는 요셉수도공동체 역시 그대로 하느니 나라의 실현입니다. 성규 72장은 사랑이 그대로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 수도공동체 묘사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자들은 지극히 열렬한 사람으로 이런 열정을 실천할 것이다. 즉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를 것이며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고 하느님을 사랑하여 두려워할 것이며, 그리스도보다 아무 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이다.”
명실공히 그리스도 중심의 사랑의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얼마전 바티칸 고백사제들에게 주신 교황님의 당부말씀도 좋은 깨달음이 됩니다.
“언제나 모든 것을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은 용서하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논의하구요! 하느님의 부드러움을, 겸손을 배우고, 심리분석가가 되지 말고 연민의 경청자가, 용서와 자비의 사람이 되십시오.”
이런 사제들과 이런 사제들을 보고 배운 이들의 공동체라면 그대로 하느님 나라 실현의 공동체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의 겨자씨와 누룩의 효소가 우리 모두 사랑으로 성장하는 하느님 나라를, 발효로 숙성해가는 하느님 나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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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 그것은 누룩과 같다.”(루카 13,19.21ㄱ)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날마다
믿음을 먹어
믿음이 되고
날마다
믿음으로 먹혀
믿음을 돋웁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날마다
희망을 먹어
희망이 되고
날마다
희망으로 먹혀
희망을 피웁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날마다
사랑을 먹어
사랑이 되고
날마다
사랑으로 먹혀
사랑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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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루카 13,18-19)
하느님 나라가 겨자씨와 같은 이유
본문이 이야기하듯이,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습니다. 그 나라가 하늘의 말씀 한마디로 왔기 때문이지요. 그 나라는 들음으로써 받아들여지고 믿음으로 씨 뿌려집니다. 믿음을 통하여 뿌리내리고 희망으로 자랍니다. 그 나라는 신앙 고백으로 퍼져 나가며 덕행으로 넓어집니다. 그러면서 많은 가지로 뻗어 나갑니다. 그리고 영적 통찰력을 지닌 권능들인 하늘의 새들을 그 가지들로 부릅니다. 제 가지들을 그들의 아늑한 보금자리로 내주는 것입니다.
-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폐 4,23).
셋째 기능은 의지라고 불립니다. 이 기능은 성령과 짝을 이룹니다. 여러분은 이 기능에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금가락지를 끼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이 사랑스럽지 않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실로 사랑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랑과 사랑스러움보다 빼어 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하느님을 무심코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영혼이 마음을 여의고, 모든 사고 활동을 여윈 것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마음처럼 작동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은 표상들과 상들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표상들을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은 매개물들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매개물을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은 하나가 되지도 못할 것이고, 단순해지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영혼은 마음을 여의고, 무심의 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하느님이나 마음이나 사람이나 심상으로 여겨 사랑하고 있다면, 그 모든 것을 엎어버리십시오.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그분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 아닌 분으로, 마음 아닌 분으로, 사람 아닌 분으로, 표상이 아닌 분으로, 심지어는 모든 둘 됨과는 거리가 먼 순수하고 맑은 한 분으로 사랑하십시오. 우리는 유에서 무에 이르기까지 이 한 분 안으로 영원히 가라앉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게 되기를. 아멘. (269)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이 평화로운 날에 당신을 흠숭하나이다. 이 세상에 평화가 오게 하시고 분열과 갈등과 전쟁 속에 깊이 스며들게 하소서. 평화를 주려고 이 세상에 오셨으니 오늘 모든 이가 평화를 받이들이고 모든 총성을 멈추게 하시며 모든 반목이 그치게 하소서. 모든 사람 · 가정 · 공동체 · 나라 · 온 세상이 정의와 평화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목에 대해 생각하고 교회와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봉헌한 후 평화를 위한 기도를 바친다.)
축복기도
예수님, 당신은 오늘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저와 함께 계시나이다. 저를 축복하시고 제 영혼을 치유해 주소서. 평화와 선한 의지로 저를 가득 채우시어 저로 하여금 당신의 평화 계획에 참여하게 하소서. 불안에 떠는 사람들을 진정시켜 주시고,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소서. 외로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소서. 저희 가정과 공동체와 교회를 축복하시어 성탄의 성령, 평화와 기쁨의 성령께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소서. 당신은 성부와 성령과 함께 세세에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아멘.(292)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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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9)
요즘 어떤 도시에 있는 어떤 빌딩이 더 높은 가에 관심이 쏠리듯, 세상은 갈수록 더 높고 더 넓고 더 큰 것에 관심이 집중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크고 높은 것이 참으로 완벽하고 완전하며 아름다운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예전에 틈을 내서 제 고향에 있는 선암사를 다녀왔는데, 예전과 달리 공사를 너무 많이 한 탓인지 공간이 협소해져서 열림보다 닫힘, 편안함보다 답답함을 느끼며 돌아왔습니다. 오늘 복음의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듣자마자 먼저 다가오는 책 제목이 있었습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 표현은 이젠 일반적인 관용어가 되었습니다. 광고를 비롯해 눈길을 끄는 표제어로 즐겨 사용되고 있으며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상징하는 문장으로도 자주 인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1973년 E.F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 Small is Beautiful.」라는 책을 내기 전까지는 어떤 누구도 이 표현을 당연하다, 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핵심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열심히 선포하셨지만, 시간이 지났음에도 눈에 보이는 결과도 미미하고 사람들의 변화 곧 회개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 역시 자신들이 생각했던 하느님 나라와 다르다는 생각과 함께 차츰 낙담하고 실망하는 기색이 농후해지는 것을 예수님께서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 初心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되잡으시기 위해 오늘의 비유를 말씀하신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13,18.20)라고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시면서 오늘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겨자 나무는 팔레스타인 지방에 많이 나는 일년생 식물이며 본디 들판에서 자랍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13,19)라는 표현에서 들판에 자라는 겨자를 자기 텃밭에 의도적으로 심었다고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는 들판에서 제멋대로 자라는 겨자 나무가 아니라 농부, 곧 예수님 당신과 복음 선포자들이 정성 들여 자신의 정원에서 가꾸는 것이라는 점을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하늘나라는 마치 농부가 정성 들여 가꾸고 돌볼 때,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 자라나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13,19) 성장한다는 것을 또한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거대하고 거창한 삼나무가 아니라 시작에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 1mm도 채 되지 않지만, 정성을 들여 가꾸다 보면 2m가 넘는 큰 나무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루카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씨앗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작은 씨 안에 생명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입니다.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면, 햇빛과 물 그리고 거름이 주어지면, 자기의 본래의 모습으로 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침내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가지에 깃들이는 새들은 굳이 추리해 보자면, 그늘이나 쉼터가 필요로 하는 곧 하느님 안에서 평화와 안정을 찾는 세상에서 작은 자와 버려진 사람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부류의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느 성서학자는 겨자씨의 비유는 남성적이며 일반적인 외적 노동으로, 누룩의 비유는 여성과 일상적인 가사 활동에서 차입했다고 강조하더군요. 이로써 예수님은 상당히 여성 친화적인 분으로써 여성의 가사 활동을 잘 알고 계신 것뿐만 아니라 이를 중요시한 증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누룩의 비유의 메시지도 겨자씨의 비유와 동일합니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13,21) 사실 적은 양의 누룩을 밀가루 서말 속에 집어넣으면 처음엔 전혀 보이지도 않지만, 누룩이 발효하기 시작하면 밀가루 서 말이 점차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도 처음에는 미미해서 보이지 않지만, 차츰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 속에서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철저하게 퍼져나가고 확장해 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이는 낙담과 실망에 빠진 제자들을 혼란에서 일으켜 세우는 희망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겨자씨는 외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성장을, 누룩은 내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를 통해서 교회는 어렵고 힘든 세상에서 쉴 곳을 찾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육신과 영혼의 쉼터가 되기 위한 겨자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세상에서 살아야 할 이유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참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희망을 품고, 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도록 우리가 먼저 세상의 누룩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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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작은 희망을 열정으로 완성을 /
박윤식 [big-llight] 241028 20:50 ㅣNo.177143
영국 출신의 찰리 채플린은 젊은 시절 철공소에서 일했다. 어느 날 사장은 그에게 빵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는데, 그는 빵과 포도주 한 병이 들어 있는 봉투를 내밀었다. ‘여보게, 이게 웬 건가?’라고 사장이 묻자 그가 답했다. “사장님께서 일이 끝난 다음에 언제나 포도주를 드시면서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포도주가 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 뒤 사장은 그의 월급을 올려 주었을 뿐 아니라, 완전히 다른 태도로 그를 대했단다. 그는 남들이 무심중 지나친 것에 대해 대단히 성실했던 거다. 이렇게 작은 일에 충실했기에, 그는 세계적인 배우가 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시작은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는데 결과는 정말 놀랍기 그지없다. 비록 그 시작이 작더라도, 그 자체가 지닌 역동성 때문에 커다란 결과를 낳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그 나라의 비결은 작은 겨자씨와 같다. 그것을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더니,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가지에 깃들였다.” 그분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크게 부풀었다.”
믿음은 처음부터 풍성한 나무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여정을 보면, 그들의 믿음은 그야말로 겨자씨나 누룩처럼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 작고 보잘것없는 믿음의 씨앗을 성령의 도움으로 성장시키시어, 새들이 깃들이는 나무가 되고, 부풀어 오른 큰 빵을 만들어 주셨다. 교회가 그렇듯이 인간관계도 작은 일에서 신뢰를 지키면서 상대방의 숨겨진 상처를 치유해 주고, 작은 기대들을 채워 주는 희생적 사랑에서 성장한다.
지금 자신이 부부간에, 자식 간에, 형제간에 힘든 관계에 있다면, ‘겨자씨와 누룩’을 헛된 곳에 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되돌아볼 일이다. 겨자씨만 한 작은 씨앗도 그 안에는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이 숨어 있다. 그러니 꾸준하게 잘 가꾸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변화를 선물할 게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내 것이라고만 여긴다면 심지 않은 겨자씨에 불과한 삶이리라.
그렇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과 함께 부풀은 누룩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 작은 씨앗 안에서 큰 나무를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이웃과 나누는 사랑도 외적인 화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어려운 시절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내적인 교감에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그 작은 겨자씨와 누룩에다 비유하신다. 지금은 비록 작은 하찮은 씨앗이지만, 하늘의 새들이 깃들만큼 크게 자랄 것이고, 보잘것없는 누룩이 밀가루 속에 들어가서 온통 부풀어 오르는 그 가능성이 바로 하늘 나라의 출발이니까.
사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며 살아간다. 그 나라가 지금 우리와 함께 있고, 또 자라고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도달할 때를 기다리면서. 그리고 그 희망은 외적으로 얻어질 게다. 이렇게 자신을 온전히 빠지게 한다. 그 완성이 언제 올지 안달할 필요는 없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작용하고 있으며, 결국 그렇게 꼭 대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약속이니까. 그러니 다른 무엇보다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하루가 되도록 하자.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희망으로 시작되고 작은 열정으로 완성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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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겨자씨와 누룩은 계속 자라났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복음이 점점 많은 이에게 전파되는 것이 그래도 눈에 보였을 것이고,
사도들 시대에도 그러하였습니다.
초기 교회에서 박해를 받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뒤 중세와 근대에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교회가 점점 확장되었고,
아프리카(고대부터 복음이 전해진 지역들도 있다.)와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으로도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물론 지금도 선교 지역들이 있고 외적으로 교회가 성장하는 지역들이 있지만,
그러지 않은 곳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유럽을 보면서 성장을 말하기는 어렵고, 아시아는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통계상으로는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계속 있어도
실제로 느껴지는 교회의 활기는 수십 년 전보다 못하여 보입니다.
그러면 겨자씨는 자라나고 있을까요? 반죽은 부풀고 있을까요?
그런데 사실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하느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게 커져 가고 있을 때 필요한 말씀들이 아닙니다.
그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그 나라가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하지 않게 여겨질 때 필요한 말씀입니다.
흙 속에 묻혀 있는 겨자씨는 눈에 보이지 않고, 반죽 속에 섞여 있는 누룩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그래도 씨앗이 있고 누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씨앗들은 박해 속에서도 살아 있었습니다. 무관심과 실망과 불신이 하느님 나라를 위협합니다.
그러나 아직 씨앗들이 살아 있으니 희망을 가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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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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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그 비유에 나타난 표현은 하나같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라고 말하는 겨자씨와
밀가루 속에 들어가면
더 이상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없는 누룩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시작은 작고 보잘 것 없지만
그 결과는 하늘의 새들이 깃들일 정도로
온통 부풀어 오를 정도로 커졌습니다.
우리 각자가 생각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 모습은 서로 다를지라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곳은 좋은 곳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생각했을 때
내가 원하는 좋은 모습을
그 안에 다 담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생각하다보면
지금의 나의 삶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마냥 행복한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 우리의 삶은
항상 그렇지만은 않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즉 우리의 삶 안에서 우리는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느낍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도 비유를 통해
그 차이를 인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시작은 작고 보잘 것 없습니다.
그 시작을 보면서
큰 나무나 온통 부풀어 오르는 것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상상하기 어렵다고 생각할수록
우리는 스스로 희망을 꺾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우리의 작은 노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의 그 작은 노력이 소중함을 일깨워줍니다.
씨앗이 없으면 나무도 없으며
누룩이 없으면 밀가루는 부풀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마음이 있고
그 노력이 아무리 미소한 것일지라도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노력이 있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삶의 순간마다 드리는 짧은 기도들
주위 사람들의 필요에 손 내밀어주는 마음들이 모여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서 만들어 갑니다.
지금은 잘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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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더 작은 것들 안에, 더 낮은 장소에 당신의 현존을 더욱 크게 드러내십니다!
이스라엘은 겨울이 우기인데, 비가 내리고 난 후,
2월 말이나 3월 초가 되면 갈릴래아 호수 인근에 노란 겨자꽃이 여기저기 예쁘게 피어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작다는 표현을 할 때, 좁쌀만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겨자씨만하다고 합니다.
좁쌀도 작지만, 겨자씨도 실제로 보니 참 작더군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그 나라른 겨자씨만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8-19)
바꿔 말하면 그 작디작은 겨자씨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 작은 씨앗 안에도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작고 보잘 것 없는 나, 죄투성이인 내 안에도 하느님 나라가 들어있고,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보다 더 보잘 것 없어 보이고, 더 작아 보이고, 더 큰 죄인처럼 여겨지는 이웃 안에도 당연히 하느님 나라가 들어있고,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작고 낮은 이를 총애하시고, 그들을 선택하시고,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의 협조자로 부르십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 시선으로 볼 때 작고 낮은 곳에서 일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하루 온 종일 중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저녁이면 온몸이 녹초가 됩니다.
강도 높은 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형제자매들의 처지와 마음을 백퍼센트 이해하게 됩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을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체험하지 못할 작은 삶의 기쁨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 있다가 넘어지면 상처나 충격이 만만치 않은데, 낮은 밑바닥에 있다 보니 웬만한 넘어져도 그다지 충격을 입지 않습니다.
손님들을 위해 바비큐 기계를 열심히 돌렸습니다. 기계를 본격적으로 돌리기에 앞서 대대적으로
숯불을 피워야 하는데,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어찌 어찌 하다 보면 손이나 팔, 얼굴에 숯칠을 하게 됩니다.
이런 모습을 서로 바라보며 깔깔대며 웃습니다.
한푼이라도 절약하겠다며 이런 저런 수리나 공사를 직접 하다가 비전문가이다보니 완전 엉뚱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헛수고를 되풀이하면서도 참 많이 배웁니다.
그 삶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더 작은 것들 안에, 더 낮은 장소에 더 당신의 현존과 사랑, 자비를 크게 드러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더 작은 자가 될 때, 더 밑으로 내려갈 때, 더 확연히 우리에게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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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하느님의 나라가 겨자씨에 비유되는 것은 씨앗이 뿌려져 싹을 틔우고 자라나는 모습이 믿음이 커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하느님의 말씀 한마디로 왔고, 들으므로 받아들여지고 믿음으로 씨가 뿌려진다. 믿음을 통하여 뿌리내리고 희망으로 자란다. 그 나라는 신앙고백으로 퍼져나가고 덕행으로 넓어진다. 그러면서 많은 가지로 뻗어 간다. 그리고 그 가지들을 하늘의 새들의 보금자리로 내어 준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있다. 주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 말씀하셨다. 겨자씨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겨자씨처럼 아주 작고 낮게 겸손한 모습으로 인간으로 태어나셨고, 하늘에 오르심으로 나무처럼 커지셨다. 고난을 겪으실 때는 씨앗이시고 부활하실 때는 나무이시다. 복음에서 그분은 당신을 씨앗으로 표현하신다.
누룩은 조금만 넣어도 금세 반죽 전체에 퍼져 제 역할을 한다. 하느님의 말씀도 우리 안에서 이렇게 작용한다.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이면, 말씀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게 만든다. 이 값지고 거룩하고 순결한 누룩 덕분에 하느님 자녀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적인 누룩이시다. 반죽 속의 누룩이 겉모양이 아니라, 능력으로 반죽을 능가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으로서 모든 인간을 능가하신다. 복음에 나오는 여인은 교회를 의미한다. 우리는 여인의 반죽이며, 여인은 하늘 지혜의 빛이 우리의 영을 속속들이 모두 덮을 때까지 우리 마음속 깊숙한 곳에 주님을 숨겨 둔다. 우리 인간의 뜻과 욕망이 성령을 거스르지 않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이 육을 거스르지 않을 때(갈라 5,17 참조), 우리 안에 변화, 즉 발효가 일어난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행위를 죽이면(로마 8,13 참조), 우리는 하느님의 숨을 통해 생명의 숨을 얻었음을 알게 되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잘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여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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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 나라: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 (시 46,1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습니다. 잘 자라서 새들이 깃들이게 하고 잘 부풀게 해서
부드러운 빵이 되게 합니다.
이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말씀, 혹은 성체라 한다면 그 씨와 누룩이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작용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은 휴식 같은 친구, 군고구마처럼 맛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 모습을 닮아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며 자신도 행복하게 되어있습니다.
며칠 전에 20년 전 제가 보좌를 할 때 중고등부 교감 선생님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에게 왔을 때 병자성사도 주고 기도도 해 주었지만, 그 이후엔 연락을 못 했습니다.
마지막 때도 바빠서 임종 직전에도 볼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나니 그동안 전화도 한 통화 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정말 한 가지 확실한 건 나 때문에 누군가 고통스러워지면 나도 고통스럽고 나 때문에
누군가 행복해지면 나도 행복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려면 그게 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겨자씨가 뿌려질 필요가 없고 누룩이 넣어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34회에는 공부하기 싫은 11살 아이에게 계속 공부를 강요하며 아이를 못살게 구는 엄마가 나옵니다.
엄마는 아이를 위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4살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엄마의 뜻이 살아있다면 자녀를 쉬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면 자기 뜻을 누군가에게 강요하면서 그것이 상대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대신해 누군가에게 휴식이 되고 양식이 되게 해 드려야 합니다.
바쁘다, 바쁘다만 하고 살다가 아플 때 연락도 못 하고 그냥 떠나보낸 나에게 다시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 46,11: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이희윤 마리 스텔라 수녀님의 서울대교구 주보에 게재한 글을 그대로 올립니다.
어느 날 저에게 예비자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던 자매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반갑게 전화를 받았는데…. 자매는 남편과 한 달 전에 이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황스러워 “이혼을 결정하기 전에 나와 좀 만나서 이야기 좀 하지…” 하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때 그 자매의 대답이 “수녀님 늘 바쁘시잖아요. 안 그래도 바쁘신데 저희 일로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머리를 한 대 쾅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바빠도 난 너희가 더 중요하고, 너희가 원하면 언제든지 시간을 낼 수 있었는데…”
하고 대답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
“바빠… 바빠서…” 하면서 늘 동동거리는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신호등의 초록 불빛이 멀리서 보이면 숨이 차도록 뛰어가서 건너고, 전철이 출발할까 봐 계단을 허둥지둥 오르내리고, 빠른 환승 게이트가 어디인가 찾아보고.
사실은 그렇게 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바쁘게 사는 일’에 길들어있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바빠 보이는 저의 모습이 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을 주저하게 하고야 말았으니 이 바쁜 마음과 몸 또한 죄악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했던 연피정이 생각납니다.
지도 신부님께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녀원 밖으로 나가서 모르는 사람들도 만나보고
사람들 사는 모습도 보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7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저는 천천히 걸으면서 하늘도 바라보고, 하늘 위에 흐르는 구름도 가만히 보았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아주머니를 따라가서 짐을 함께 들어주기도 하였습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작은 꽃을 보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추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 곁을 스쳐 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멈춰 서서 그분들에게 관심을 보여주면 그분들은 고마워도 하고 행복해하기도
하였습니다.
평상시와 같았다면 무심코 지나갔을 많은 것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어루만지는 저 자신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내가 멈춘 그 자리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느꼈습니다.
어떤 분이 “수녀님 바쁘지 않으세요?”라고 질문했을 때 제 대답은 “저요… 있는 거라고는 시간밖에 없습니다”였습니다.
시간과 바쁨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지내면서 제게 가만히 속삭이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4년의 일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날, 독일군과 영국군이 서부 전선의 참호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독일군은 '고요한 밤'(Stille Nacht)을 부르기 시작했고, 곧 영국군도 자신들만의 캐롤을 부르며 참호에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에는 양측 군인들이 참호에서 나와 '무인의 땅'에 모여 음식, 담배, 기념품 등 작은 선물을 교환했습니다.
그들은 전사한 군인들을 위한 합동 장례식까지 거행했으며, 인류애를 공유하는 이 순간에 양측은 서로를 존중했습니다.
1914년의 크리스마스 휴전은 희망과 선의의 강력한 상징이 되었으며, 가장 암울한 시기에도
공유된 인간의 가치와 연결이 갈등을 초월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수많은 책, 영화, 노래를 통해 기념되며 지금, 이 순간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제목의 책을 쓴 스님도 있습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게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휴식도 되어주고 빵도 되어줍니다.
저는 심지어 기도 시간에도 머리로는 강론 준비로 분주합니다.
그러나 잠시 멈추고 하느님께서 모든 일을 하심을 알아들읍시다.
그제야 비로소 휴식 같은 생명의 빵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만히 있을 때 저절로 자라나고 저절로 부풀게 하시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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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바로 ‘내가’ 겨자씨이고 누룩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루카 13,18-21)”
1) ‘겨자씨의 비유’에서 연상되는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1-3)”
인간의 눈으로 보면, 아브라함은 보잘것없는 떠돌이 유목민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를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또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모든 신앙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작은 겨자씨 하나가 ‘큰 나무’로 자란 것입니다.
2) 신약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연상됩니다.
“주님께서 그에게(‘하나니아스’에게) 이르셨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사도 9,15-16)”
이 말씀에서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를 “내가 선택한 겨자씨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열두 사도에 속한 제자도 아니고,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박해자였던 바오로 사도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꾼이 된 일은, 글자 그대로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란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 자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5-16ㄱ).”
이 말을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하느님께서는 바오로 사도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를 뽑으셨고, 그의 영혼 안에 하느님 나라의 겨자씨를 심으셨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씨에서 싹이 자라기 시작한 때는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인데, 그때까지 바오로 사도 자신도 자기 안에 무슨 씨가 심어져서 자라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지만,
하느님에 대한 그의 열성을 생각하면, 그는 이미 사도로 일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신앙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부르시기 전에 이미 그 안에 겨자씨를 심어 놓으셨고, 아브라함은 아직 하느님을 모르던 때에도 하느님을 찾으면서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3) 사실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겨자씨로 뽑으신 사람들입니다.
겨자씨로 뽑힌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신앙인은 아브라함과 바오로 사도처럼 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하느님께서 각자의 영혼에 하느님 나라의 겨자씨를 심으신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종교와 신앙을 갖고 싶다고 소망할 때,
또는 신앙인이 되기를 희망할 때, 그때가 바로
숨어 있던 겨자씨에서 싹이 자라기 시작할 때입니다.
우리는 “내가 바로 겨자씨다.”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중에 어떤 나무로 자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 ‘큰 나무’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앙여정의 끝은 인간의 눈으로 판단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판단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자신 안에 심어진 겨자씨를 잘 가꾸는 일이고, 자신이 받은 겨자씨라는 사명을 잘 수행하는 일입니다.
4) ‘누룩의 비유’에서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라는 말은,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크게 감화시켰고, 변화시켰음을 나타냅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선한 누룩’의 영향력입니다.
<우리는 ‘악한 누룩’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태 16,6).”
만일에 교회가, 또는 신앙인이 세상을 복음화 하기는커녕 세속화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선한 누룩’의 힘을 버리고,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따라가는 일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버리고 멸망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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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3,18-21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여 설명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란 하느님의 뜻과 다스림이 실현되는 상태를 가리키지요. 그리고 그런 상태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 하느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믿음, 하느님께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신다는 믿음. 그런 믿음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우리 가운데에 있게’ 하는 원동력인 것이지요. 그렇기에 오늘의 비유는 곧 ‘믿음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됩니다. 참된 믿음을 마음에 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면 큰 결실이 맺어진다는 진리를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겁니다.
먼저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내 마음의 정원에 심고 실천으로 잘 가꾸면 그것이 ‘큰 나무’로 자란다고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기도와 희생, 나눔과 봉사라는 거름입니다. 그 거름을 충실하게 주신 분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믿음이 크고 깊어집니다. 그리고 삶이 힘들고 괴로울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혼란스럽고 답답할 때 그 믿음이라는 나무가 나를 단단하게 지탱해주는 버팀목이자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이정표가 되지요. 그것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들에 깃들이는’ 상태입니다. 반면 세상 것들에만 관심을 두고 욕심과 집착이 이끄는 대로 사는 이들은 마음에 심은 믿음의 나무가 무관심 속에 메마르다가 시들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힘들고 괴로운 순간에 기댈 곳이 없어져, 실패나 절망에 맞닥뜨리게 되면 그대로 무너져버리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다음은 누룩의 비유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누룩은 밀가루 반죽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부풀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반죽이 부푼다는 것은 발효되어 새로운 성질로 변화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그 내부 공간이 넓게 ‘확장’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세상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들만 가득하면, 삶이 내 뜻과 계획대로 안되는 순간 마음이 걱정과 근심으로 잔뜩 쪼그라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도무지 ‘살 맛’이 안나고 뭘 해도 기쁨이나 보람이 없지요. 그러나 마음 속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으면, 삶을 바라보는 내 관점이 변화됩니다. 굳이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시고 섭리하시는 특별한 계획 안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알기에, 실패나 좌절을 겪어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평정심’을 지니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도 삶의 참된 맛을 느끼며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씨앗을 내 안에 받아들이고 잘 가꾸기 위한 ‘노력’이 그것이지요. 하느님 말씀을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버린다면,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겨자씨는 썩어버리고 누룩은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세상 사람들은 작아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겨자씨를, 눈에 보이지 않는 누룩을 무시하며 소홀히 여기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겨자씨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순명으로 누룩이 우리 삶에 미치는 큰 영향력을 알아보는 사람들입니다. 당장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당장 내 삶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아도, ‘그럼에도불구하고’ 마음 속에 굳은 믿음을 간직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풍성한 결실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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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사도 바오로는 가정의 기초인 부부에 대한 관계를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정 만큼 소중한 것이 있겠어요?
하느님께서는 이 가정을 사랑의 관계로 맺으시기 위해서 남녀의 사랑을 기초로 삼으시지요.
그래서 결혼 전에 남녀가 서로 자기의 배우자를 찾는 사연들을 갖게 해 주십니다.
부부가 오랜 세월 함께 생활하다보니 시들해지기도 하고 또 결별의 위기를 맞기도 합니다.
그것은 태어나면서 생면부지의 배우자를 만난 것이고 또 함께 공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사실 불가능한 것이지요.
그래서 결혼은 사랑을 전제로 하는 신비요 선물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보는 연애의 드라마는 각양각색으로 펼쳐지고 배우자들에게는
각자의 삶에서 최대의 선택을 펼쳐보입니다.
배우자를 내가 선택한다는 것은 특권이면서도 가슴 떨리는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일단 선택이 이루어지면 천생연분으로 연결되고 각자 삶의 새 장을 여는 것입니다.
남녀가 서로 만나면 사람들은 ‘눈에 콩까지가 씌운다.’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씁니다.
상대의 결점도 그 순간에는 다 장점으로 보이고 서로 무지개 빛을 드리워서 무엇이든지
아름답고 희망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의 선택은 서로의 사랑의 고지인 칠 부나 팔 부 선에서 대부분 결정되는
것입니다.
부부의 삶이 언제나 연애하던 ‘설레임’과 ‘콩깍지’의 눈먼 시기이면 얼마나 좋겠어요?
서로 살다보면 성격과 사고의 차이가 솔솔 불거지 지작하고 갈등이 꼬물꼬물
커지기도 하지요.
어떤 부부는 황혼기에 들어서서 ‘이혼’의 이야기를 들먹이고 여차하면 나이에 걸맞지도 않는
위기까지 몰고 갈 기세도 펼칩니다.
그런데 참 사람 사는 것이 묘해서 이런 위기를 소중한 자녀들의 사랑이 해결해 줍니다.
부부가 일치하고 서로 사랑한다면 구태여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까지 부부의 사랑과
일치를 호소하겠어요?
소중하게도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리스도가 가정과 부부의 중심이 되게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 대한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에페 5,21-23)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25절)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부부의 사랑과 일치를 이렇게 마무리하는 말씀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31-32절)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물’로 ‘조미료’로 비유해서 표현하기도 하지요.
아무리 밀가루가 질이 좋고 풍부하다 해도 물이 없으면 반죽을 못하듯이 인간조건이
완전한 것 같아도 사랑이 없으면 그 관계가 다 무산되고 말지요.
아무리 일류 요리사가 음식을 잘 장만해도 거기에 맛을 나게 하는 소금이나 조미료가 없으면
맹탕이 되고 말지요.
적은 물, 소금, 조미료도 전체에게 큰 의미를 줍니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아무리 작게 보여도
삶의 전체에 일치를 맺어주고 삶의 큰 결실을 보게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대해서도 씨 중에 제일 작은 겨지씨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작은 겨자씨가 땅에 묻혀서 싹이 나면 그것이 점점 자라나 큰 나무가 됩니다.
밀가루에 작은 누룩이라도 반죽을 부풀려서 크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도
각자의 삶에서 작은 사랑, 믿음이 자라나서 종말의 완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도 믿음도 그것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다 해도 부부나 공동체에 들어가면
그리스도가 중심인 살아 있는 신비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체는 점점 성장해서 풍성하고 놀라운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루카 13,19)
오늘도 우리 각자는 복된 하루를 맞으며 겨자씨와 같은 믿음, 사랑을 이웃에게 성실히
뿌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큰 나무로 만드시고 새들이 날아 오듯이, 행복이 우리의 삶에
깃들이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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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소한 것도 소중히 여기며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다가도 나와 무관하거나 강한 자극을 주지 않는 일은 무심하게 지나쳐버리곤 합니다. 평범한 일상사나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조차 일시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만족하곤 합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가시적인 능력이나 성과를 내지 못하면 불만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비추어 이런 삶을 조명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로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좁쌀보다 작은 겨자씨가 1.5-3미터 크기의 큰 나무로 자라는 것과, 누룩이 백 명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많은 빵을 구울 수 있는 밀가루를 부풀리게 하는 이 엄청난 변화 안에 하느님 나라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통치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 작용이 지금은 비록 하찮아 보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작용하여 마침내 종말에는 엄청난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에서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는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하느님 뜻과 힘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사는 이미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고 있는 장이기에 평범한 일상의 흐름 속에서도 재창조를 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미세한 변화 속에 담긴 하느님과 그분의 힘을 알아보는 영의 눈을 지니도록 해야겠습니다.
다음으로 하느님 나라의 변화는 겨자씨가 썩어 없어지고, 누룩이 밀가루를 부풀리고 흔적없이 사라지는 과정 속에서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변화는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고, 생명은 죽음에 이어지는 사랑의 연장선입니다. 우리의 삶도 하느님이 드러나도록 내가 죽어 사라지는 사랑의 과정이어야 할 것입니다. 나의 드러남이 아니라 사라짐을 통해 다른 이가 생명을 호흡하게 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끝으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눈에 가치없어 보이고 사소한 것을 이용해서도 엄청난 선과 사랑을 이루시며,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사소한 일상, 나의 작은 생각, 하찮아 보이는 사람, 평범한 말과 행동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작고 하찮아 보이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해야겠습니다.
이제 우리의 시선을 안으로 모으며, 사소한 일상사와 하찮아 보이는 이들 안에 숨어있는 하느님의 씨앗을 발견하도록 해야겠습니다. 나 자신의 보잘것없어 보이는 현재, 가진 것없고 능력 없으며 기댈 곳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께 시선을 고정합시다.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변화되고 희생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누룩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는 은혜를 구하여야 되겠습니다.
세상살이가 녹록치 않지만 그럼에도 작은 것을 통해서도 위대한 일을 이루시는 주님을 굳게 믿고 사랑 안에 기다리며 희망을 키워갔으면 합니다. 평범한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흔한 일상사도 무심코 보아넘기지 않으며, 나와 관계없어 보이는 사람과 일조차도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친밀하게 대할 때 하느님 나라가 바로 거기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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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 이야기입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9)"그것은 누룩과 같다."(루카 13,20)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비유로 든 사물들은 참 작고 미소합니다. 흔하기도 하고요. 혼자서는 무엇도 될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혼자만의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 제국이 아닌, 함께함이 만들어 내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정원에 심었다."(루카 13,19)"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루카 13,21)
겨자씨는 정원 안의 흙 속에 심겨야 제 생명을 튀우고, 누룩은 밀가루 속에 합쳐져야 비로소 먹거리를 위해 제 구실을 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알맞은 환경 안에 스며들어 본 모습을 형성하며 확장됩니다.
작고 미소한 존재의 특징은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느님 나라도 그렇습니다. 조심조심, 소중히 다루어야 하지요. 게다가 힘과 능력이 중시되는 세상에서는 쉽게 간과되거나 무시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믿고 희망하는 이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지만, 작은 씨앗이나 누룩처럼 아무나에게 굳이 자신을 뽐내고 강요하지 않는 신비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 곧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교차해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에페 5,21)
성령의 영감으로 쓰인 성경 말씀이지만 시대와 문화 안에서 쓰였기에 집필 당시의 "지금 여기"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 관계를 서술한 성경의 대목들이 종종 논란거리가 되는 이유는 지금보다 훨씬 더 철저한 가부장적 부족사회의 정황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위의 이 말씀이 부부 간의 사랑 관계의 대전제임을 인식한다면 이어지는 내용들을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중해야 합니다."(에페 5,33)
남편과 아내 서로에게는 사랑과 존중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오가는 사랑과 존중처럼 말입니다. 사실 아내와 남편, 두 존재 모두는 겨자씨나 누룩처럼 약하디 약한 존재들일 겁니다. 각자는 존재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이룰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아직 그 힘이 드러나지 않은 미약한 볼모지입니다.
겨자씨인 남편에게는 품어주는 정원의 흙 같은 아내가 필요하고, 누룩인 아내에게는 섞여서 한 몸이 되고 함께 확장될 밀가루가 필요합니다. 서로 만나 하나가 될 때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지요. 혼자서는 그저 개별의 물질이지만, 함께할 때 새들이 깃들고 타인을 배불리는 새로운 지평이 열립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신비이고, 남편과 아내, 또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입니다.
혼인 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각자에게 와준 인격의 신비를, 독신 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관상하는 오늘 되시길 바랍니다. 바로 그들이 함께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가고 있는 소중한 파트너지요. 우리에게 온 하느님 나라는 아주 작고 미소하고 약하기에 소중히 대하고 정성껏 품어야 합니다. 그래야 너와 나의 신비가 합쳐져 모두가 깃드는 하느님 나라, 모두를 흡족히 배불리는 하느님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입당송)
이 말씀은 남편과 아내,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느님 나라를 이룰 수 있는 팁을 제시합니다. 언제나 상대에게서 그분의 얼굴을 찾는 것! 흠 많고 부족하며 죄인인 실수투성이 파트너, 공동체,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보다 수려하신"(시편 45,2 참조) 주님의 얼굴을 찾으라고 오늘의 말씀은 초대합니다. 아름다우신 주님의 얼굴을 담고, 하느님 나라의 충만함으로 피어나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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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주님과 동행함을 찬미의 제사로 삼는 삶
<2024.10.29> 아침을 여는 묵상 (시 107:1~22절)
❝주님과 동행함을 찬미의 제사로 삼는 삶❞
❚ 우리의 삶의 매 순간이 찬송이 끊어지지 않을 때, 주님과 동행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우리가 찬양해야 할 제목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인자와 기적을 찬양해야 합니다(1~9절).
시인은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인해 여호와께 감사할 것을 촉구합니다(1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것은 그들의 구원을 완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원수의 손으로부터 구원받은 사실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심판의 결과로 인하여 사방으로 흩어진 백성들을 그곳들로부터 모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2~3절). 절망의 시기에 있던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또한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 포로 생활의 어려움을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후 40년간 광야 생활 당시 겪었던 어려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4~5절).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으셔서 구원해 주셨고, 바른 길로 인도하셔서 정착하여 살만한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6~7절). 그리하여 시인은 목마른 자를 만족하게 하시고, 배고픈 자를 좋은 것들로 채우시는(9절)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을 찬송하라(8절) 선언합니다.
구원은 고통 받는 자를 그 고통 가운데서 분리시키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통으로부터 분리 시켜 주심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심을 입증해 주십니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대상으로서 인간의 상상을 넘어서는 기이한 일을 통하여 구원을 받음으로써 오로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지금 우리 자신들이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와 기적이 함께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와 기적을 소리 높여 찬양해야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알아 감사의 찬미를 드릴 때 하나님의 영광은 더 놀라운 축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아울러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넘치도록 채워 주실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함을 찬미의 제사로 삼아 하나님의 인자와 기적을 찬양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구원과 자유를 찬양해야 합니다(10~16절).
시인은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곤고와 쇠사슬에...’(10절) 매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11절)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고, 모든 책망을 업신여기며(잠 1:30), 훈계와 꾸지람을 거절함(잠 5:12)으로써 그들의 어리석음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쓰라린 괴로움 속에 처넣으셨고, 그들이 넘어져도 돕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하셨습니다(12절,쉬운성경). 그러나 그들이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자, 고난 가운데서 구원하셨고, 끝없는 어둠 속에서 이끌어 내시며, 그들의 쇠사슬을 끊으셨습니다(13~14절). 그러므로 시인은 놋문을 부수고, 쇠빗장을 깨뜨리심으로(16절)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 여호와께 감사하며, 사람들을 위해 행하신 그분의 놀라운 일들에 대해 감사하라(15절) 선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이 고난을 겪는 원인과 이유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고난과 환난을 통하여 우리 자신들이 겸손해 지도록 하시고, 하나님만이 의지의 대상이 되심을 깨닫도록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헤쳐 나아갈 수 없어서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을 간구할 때, 하나님은 그 간구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리하여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우리를 인도해 내시고, 영적으로 묶여 있던 쇠사슬을 끊어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겸손하게 낮아진 자, 부르짖는 자에게 역사하십니다. 무엇보다 미련하고 아무 공로 없는 우리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자유하게 하신 하나님을 그래서 찬양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과 자유함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가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는 이유가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함을 찬미의 제사로 삼아 하나님의 구원과 자유를 찬양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을 찬양해야 합니다(17~22절).
하나님 앞에 끝까지 반항하다가 결국 ‘사망의 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17~18절). 이제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그대로 죽는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아무도 그를 죽음에서 건질 수 없는 상황이며,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을 맞는 상황을 시인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죄를 지음으로써 고난을 자초하여 스스로 비참한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사망의 문’은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자들의 절망적인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그들이 괴로움 가운데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그분이 그들의 괴로움으로부터 구해 내셨습니다(19절). 또한 말씀을 보내서 그들을 치료하셨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셨습니다(20절). 이에 시인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에 감사(21절)하라 말합니다. 그리고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기쁨의 노래로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할 것(22절)을 선언합니다. ‘감사제’는 화목제의 일종입니다. 이 제사의 특징은 제사를 드리고 제사장에게 준 몫을 제외한 나머지를 이웃과 나누는 제사입니다.
인간에게 질병과 죽음이 찾아온 것은 죄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것은 병과 파멸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죄는 건강을 잃게 하고 생명을 위태롭게 만듭니다. 병든 사람은 생활 전반에서 의욕이 떨어지고, 음식도 달갑지 않습니다. 이처럼 질병이 중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납니다. 현대 의술의 도움으로 고쳤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고치신 것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주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병 중에서도, 극심한 고통과 아픔을 겪는 그 순간에도 찬송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찬송에는 분명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영과 육의 질병으로 고통 중에 있다면 치유의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매순간 찬송이 끊어지지 않을 때 주님과 동행함을 삶 가운데서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함을 찬미의 제사로 삼아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을 찬양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아 감사와 찬미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는 기쁨과 은혜를 찬양하며 영과 육의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시 107:1~2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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