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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 『평생 걱정 없이 사는 법』
제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 걱정 없이 사는 법』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면서 걱정 없이 살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렇게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힘이 들고 즐겁지 않은 일일지 모른다. 일과 책임, 부와 가난, 사랑과 명예, 미움과 권력, 건강, 죽음 등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짓누른다. 감옥처럼 느껴지는 이런 현실 속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은 《반야심경》을 빌어서 우리가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한다.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존재의 모습을 진정한 마음으로 똑바르게 바라볼 수 있다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하고,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도 있다고 한다.
여기까지 읽고 마음이 평온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평온을 얻었다고 생각되면 - 마음에 깊이 간직할 수 있다면 - 아마도 이 책을 굳이 읽을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모두 260자로 된 《반야심경》을 읽고, 듣고 들여다보고 그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책은 설명해 주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반야심경》의 핵심은 공(空)이다. 공은 ‘없다’거나 ‘텅 비었다’는 것이 아니다. 색즉시공에서 공은 없다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물이 인연 따라 생기고 또 사라지는 것이어서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당나라 때 협산선사는 “중생은 색만 보고 심(心)을 보지 못한다”고 했고, 협록선사는 ‘해변의 돌사자’가 무상불(無相佛)이라고 했다. 이것은 마음이 있으면 물 위의 파도나 모레가 무섭지 않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욕망이란 게 있어서 분노와 기쁨을 느낄 수가 있다. 그것은 유심(有心), 즉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욕망으로 인해 불안하게 흔들린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내 마음은 가을달 같고 푸른 연못은 티 없이 맑구나. 어느 것도 비교할 수 없는데, 내 마음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라고 한산 선사가 말했다. 마음은 어느 무엇과도 비유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것을 말하려고 해도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말로는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가장 심오한 존재이고 가장 강한 힘의 원천이다. 이제 그 마음을 따라 가보자. 그전에 《반야심경》의 원문부터 보자.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수상행식 역부여시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불구부정 부증불감 不垢不淨 不增不減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의반야바라밀다 依般若波羅蜜多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故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能除 一切苦 眞實不虛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이 《반야심경》을 이해하기 쉽게 해석하면 이렇다.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할 때에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고 고통과 액운을 넘어서게 된다.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니 수·상·행·식도 그러하다.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여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눈·귀·코·혀·몸·마음도 없고, 색·소리·향기·맛·촉감·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다.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고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다. 고(苦)·집(集)·멸(滅)·도(道)도 없고 지혜도 얻음도 없다. 얻을 것이 없으므로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간다.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呪文)이며 위가 없는 주문이고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제 반야바라밀다주를 말할 것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는 불교는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그러기 위해서 계율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계율이란 무엇이고 또 정진이란 무엇인가. 석가모니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고뇌를 겪게 되므로 이를 해결할 목적으로 출가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석가모니처럼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노력하는 것으로 불자의 몫을 다하는 것이 될지 모른다. 초기 불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계(戒)·정(定)·혜(慧)를 통해 현실을 넘어 해탈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뒤 여기에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靜)·반야(般若)라는 육도로 확대되고 이것이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는 여섯 가지 방법이라고 하여 ‘육바라밀(六波羅密)’이라고 하였다.
반야바라밀은 육도 중에 여섯 번째다. 《반야심경》의 첫 구절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할 때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고 고통과 액운을 넘어서게 된다’고 한 것은 육도의 수행을 통해 현실의 현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 것이다. 그렇다면 육도는 어떻게 수행할 수 있고 또 수행해야 하는 것인가.
육도에서 ‘보시’란 남의 슬픔에 주의를 기울이고 남을 도와주는 것, ‘지계’는 계율을 지켜 나쁜 일 하지 않고 좋은 일을 하는 것, ‘인욕’은 참는 것, ‘정진’은 나태하거나 게으름 피우지 않고 타락하지 않는 것, ‘선정’은 마음을 조절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선정을 통해 성불했다.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선정인 것이다. 선정에 대해 육조 혜능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선이고 마음이 어지럽지 않은 것이 정이다.”라고 했다. 선정은 형식이 중요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야심경》의 핵심이기도 한 ‘반야(般若)’는 지혜를 말한다. 우리가 아는 지혜가 아니라 속세를 벗어난 지혜, 부처가 선정한 후에 삼지(三智)에 들어갔다고 하듯이 이 삼지가 바로 반야이며 속세를 벗어난 지혜이자 번뇌를 철저히 떨쳐 낸 지혜인 것이다. 부처의 성불 과정에서 최종적인 반야는 윤회, 업력, 사성체 등 몇 가지 지혜를 깨달은 때문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의 첫 구절에 나오는 ‘깊이 행한다(行深)’는 선정을 의미한다고 하기도 한다. 관자재보살의 깨달음은 부처가 성불한 과정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 관자재보살은 반야로 오온이 공함을 비추고 자신과 중생을 고통에서 해탈시킨 것이다.
그렇지만 해탈하지 못한 우리들의 현실은 냉혹하다. 부모를 바꿀 수도 없고, 동료를 바꿀 수도 없다. 시험 규정이나 경쟁 규칙을 바꾸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골치 아픈 인간관계, 일하고 있는 환경에 염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을 원망하면서 한평생 살아갈 수밖에 없다. 결국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남는데, 그것은 앞서 말한 육도를 지키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세상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고 나아가 우주까지 꿰뚫어 보게 된다면, 무엇이든 다 꿰뚫어 보게 된다면 우주 전체가 공이 되고 그렇게 되면 무엇을 하든 자유로울 수 있다. 온 우주를 자유자재로 종횡할 수 있는데 어떤 현실이 나를 옭아맬 수 있을까 그런 말이다.
그런데 우주, 아니 세상의 모든 것은 나로 인해 존재한다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이 ‘나는 누구인가’다.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하는 문제도 내가 누구인가를 알면 풀릴 수 있는 문제다.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이 바로 ‘나’이고, 미인을 보고 구애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바로 ‘나’이고, 남에게 칭찬받고 기뻐하는 이가 바로 ‘나’라고 생각한다. 선생, 교수, 사장 등 사회가 부여한 신분이 ‘나’라고 생각하고 날마다 ‘나’를 위해 싸우고 또 타인과 경쟁하고 세상과도 싸운다.
한자의 아(我)는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 형상이다. 폭력적으로 세상의 분쟁은 ‘나’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므로 ‘나’또는 ‘우리’는 너무 내세울 것이 못 된다. 부처님은 ‘아집’을 깨뜨려야 한다고 했다. ‘자아’라는 의식에 집착하지 말고 ‘타인’과 대립하는 자아의식에 집착하지 말며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자아의식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불변하는 자아는 없으며 시시각각 바뀌고 있고, 실재하는 사물도 없음을 아는 것이 “오온이 공함에 비추어 보고 고통과 액운을 넘어서게 된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온(五蘊)과 공(空)’함을 알아야 할 것인데, 오온은 물질과 정신을 오분(五分)한 것으로 색·수·상·행·식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오온은 다섯 가지 집합으로 첫 번째 집합이 색온(色蘊), 두 번째 집합이 수온(受蘊), 세 번째 집합이 상온(想蘊), 네 번째 집합이 행온(行蘊), 다섯 번째 집합이 식온(識蘊)이다. 모든 생명의 모습이 이런저런 모습이기도 한 것은 이 다섯 가지 요소의 집합 때문이다. 다섯 가지는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섯 가지 요소가 모이면 공이 된다는 것이다.
색은 몸, 수는 감각, 상은 느끼는 대상, 행은 업을 지을 때의 심리적인 활동, 식은 의식으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그것이다. 색수상행식 이 다섯 가지는 어떤 것이 생겨나든 의식이 동시에 나타난다. 의식은 추상적 개념을 인식하는 것이다. 말라식과 아뢰아식이라는 것도 있는데, 불교의 매우 독특한 관찰법으로 말라식은 ‘아집’, 아뢰아식은 여래장(如來藏)이라 하고 우주가 처음 생겨난 그 순간의 의식을 포함하여 모든 의식의 씨앗을 말한다. 이것들을 팔식이라 하며, 《반야심경》은 “식은 공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관자재보살은 현재 내를 움직이고 있는 의식은 자신의 두뇌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아주 복잡한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했다. 인연의 시작은 우주가 처음 생겨난 그 순간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우주의 형성도 어떤 인연이 조합된 것이라고 한다. 시시각각 하나의 우주는 사라지고 또 다른 우주가 탄생한다. 의식이 생겨나는 순간 의식을 만들어 낸 인연을 생각하고, 작은 인연에도, 작은 변화에도 의식은 사라질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아란 무엇인가?’영원히 해답이 없는 질문으로 부처는 자아에 관한 해답을 추구하지 말라고 했다. 자아가 무엇인지 탐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숲속에서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것을 탐구하려고 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자신에게 어떤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되기를 애쓰는 순간 스스로를 어떤 울타리 안에 가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는 자신을 누구라고 하지 않고 각자(覺者), 즉 ‘깨달은 자’일 뿐이라고 했다.
자신을 각자라고 한 것은 우리도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인연에 대해 잊지 않으면 우리도 부처처럼 각자가 될 수 있다. ‘오온은 공이다’라는 말은 허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재자가 없고, 운명으로 정해진 것도 없으며, 신이 결정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인연에 대하여 아는 것이다. 인연과 업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요인이다. 노력하면 바꾸지 못할 것이 없다. 누구나 세상에 오면 독특한 인연을 갖게 되고, 자기만의 길을 걷게 된다. ‘오온은 모두 공이다’라는 부처의 말에 표준 답안은 없다. 사람마다 제각각이며, 모두에게 적합한 길이란 없다. 누구든 자기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
쉬운 듯하면서도 어렵다. 불교가 심오하기 때문일까? 흔한 예로 죽음 앞에서 죽기를 거부하고,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믿거나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며, 연애할 때 그 사랑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집착하기도 하지만, 일단 만남이 있었다면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람들은 사라진다는 것을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헛된 꿈속에 살면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잡으려고 애를 쓰지만, 어느 것도 붙잡을 수 없다. 붙잡으려고 하면 무한한 번뇌에 빠질 뿐이다.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개인의 관점에서는 물론 생사가 있다. 가족이 죽었을 때 우리는 몸시 슬퍼한다. 하지만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개인이 죽어도 인류는 여전히 건재하고, 인류 전체가 사라져도 지구라는 행성은 건재하다. 또 언젠가 지구도 사라지겠지만 은하계는 존재하고 은하계가 사라져도 우주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고, 우주가 사라져도 허공은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생겨남도 사라짐도 없는 것이다. 단지 인류가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허공에 살면서 자기 세계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수많은 생멸현상이 있다고 착각할 뿐이다.
우리는 착각과 관념 속에서 산다. 남의 아내가 되어 아내로 살다 보면 자신을 아내로 생각한다. 아내이기 이전에 한 인간, 한 여자이며 아내는 그다음 역할임을 잊어버린다. 고위 공무원이 되면 자신이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자신이 고위 공무원으로 생각한다. 중국 고승 태허대사는 “한 인간이 되기만 하면 성불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지금 나는 인간이 아니란 말이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많은 이들이 점점 사람의 말을 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하지 않고 살아갈수록 짐승으로, 괴물로, 전략하고 있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이 이름 지어준다. 하지만 그 이름은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동명이인이 있을 수 있고, 지금은 아니라도 옛날에 살았던 사람이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 나의 똑같은 이름을 가졌다니 이상할 것이다.
지금의 문명사회는 이런저런 신분을 얻고 살고 성性 뒤에 직함을 붙여 호칭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이름들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오늘은 과장이지만 내일은 거지가 될 수도 있다. 세상과 인생 전체를 두고 보면 한두 가지 이름으로는 비교 판단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하고 다채롭다. 붙여진 모든 이름을 다 합쳐도 인생의 오묘함을 표현할 수 없다. 신분 자체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생활방식 중 하나일 뿐, 어떤 명분이든 그저 환상일 뿐이다. 형형색색 명분을 꿰뚫고 늘 한결같은 자기만의 자성(自性)을 발견해야 한다.
인간이 갓 태어났을 때는 분별심이 없어서 누구나 똑같다. 하지만 산부인과를 퇴원하는 날 누구는 부잣집으로 누구는 가난한 집으로, 그때부터 구별되는 것이다. 국장, 과장, 실업자, 스타, 교수, 남자, 여자 등. 수많은 사람과 천차만별의 신분, 생김새, 피부색을 헤치고 속에 있는 생명 자체를 보아야 한다. 남들은 우리에게 꼬리표를 붙여서 이런 저런 울타리에 가둔다. 하지만 신경 쓸 필요까지는 없다. 그것은 남들의 일일 뿐 우리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에게 꼬리표를 붙이거나 울타리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 나를 부르는 명칭이 무엇이든 그것은 내 인생의 아주 작을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사람들은 운명을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으로 여긴다. 그래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언제 죽는지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으므로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무엇을 해도 가난한 사람도 있고 무엇을 하든 부자인 사람도 있다. 이 역시도 운명으로 여겨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운명을 받아들인다 해도 원망하는 마음은 생긴다. 어째서 나의 운명은 남들과 다른가? 원천우인(怨天尤人)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한다’는 뜻이다. 불행이 닥쳤을 때 가장 쉽게 빠지는 감정이 원망이다. 어째서 이런 불운이 내게 찾아왔을까? 하늘이 불공평하다고 원망하면서 살아간다.
문제는 운명이라는 것이 정말로 있느냐는 것이다. 정말로 있다면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것에는 운명이 정해져 있고 모든 사람은 운명 앞에서 원망하고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후에는 신에게 도와 달라고 기도한다. 풍수지리가 유행하는 것도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절에 가서 향을 피우고, 불전을 내고 절을 하는 것도 해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운명이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인과경》에 “지금의 결과를 보면 과거의 원인을 알 수 있고, 현재 만들어내는 원인을 보면 미래의 결과를 내다볼 수 있다”고 했다. “착한 일이나 악한 일에 대한 결과는 마치 그림자가 형태를 따르는 것처럼 반드시 오기 마련이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인과는 계속 순환한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인연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알아야 하고,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그 속에 숨겨진 원인과 인연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탄생에 대해 다른 대부분의 종교는 조물주가 인간을 창조했다고 하고, 과학은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생명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불교는 어떤 외부의 것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한다. 나 자신이 욕망에 사로잡혀 타인?의 정자 속으로 파고 들어감으로써 누군가의 아들과 딸이 되었고 나는 어머니가 임신하기 전에 이미 존재했으며, 나의 식(識) 안에서 내가 과거에 쌓은 업력이 축적되었고 그 업력이 최초의 마음으로 변하고 은밀한 통로를 통해 모태에 도달했다는 것으로, 탄생이란 정신과 물질의 결합이자 영혼과 육신의 합일이다.
미혹(迷惑)이 생기면 업을 짓게 되고 업을 지으면 그에 대한 과보가 나타나는데 이 과정은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걸쳐 계속 윤회한다고 한다. 이 윤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미혹에서 벗어나 무명을 떨쳐내는데 있다. “명도 무명도 다함까지도 없고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다”는 《반야심경》의 말은 미혹하지 않고 무명이 사라지면 늙고 죽음이 없다는 것이다. 어리석음을 떨쳐내고 세상의 진실한 모습과 오묘함을 알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불생불멸의 청정한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불운이 닥치면 불운에 빠뜨린 사람이나 일에 증오한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타인 아닌 자기 자신에 집중한다. 타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다.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내 자신뿐이다. 번뇌에 빠지는 대부분 원인은 타인을 원망하는 데서 시작된다. 남을 원망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원망한다고 해서 그가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스스로 짊어지고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남에게 책임을 미뤄서는 문제를 영영 해결할 수 없다. 계속 원망만 할 뿐이다.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세상에 왔다면 이 삶을 온전히 살아야 한다. 삶을 끝까지 살아도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고, 세상을 위해서 나 자신을 바꾸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세상을 초월할 수는 있다. 관자재보살이 말한 오온, 십치처, 십팔계로 이루어진 인간의 경험 세계를 초월해야 한다.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초월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넓은 곳을 볼 수 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더 넓은 곳에서 인간을 굽어보아야만 인간의 문제가 무엇이고 출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의 감각기관과 마음으로 경험한 세계를 초월해야만 미혹되지 않고, 세상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
세상을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고통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고통도 즐거움도 내 삶의 일부라고 한 부처는 ‘고통이 곧 진리’라고 했다. 고통에 대해 부처는 생고(生苦), 노고(老苦), 병고(病苦), 사고(死苦)와 원증회고(怨憎會苦), 애별리고(愛別離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온성고(五蘊成苦)를 합쳐 팔고라고 했다. 생로병사는 알겠는데, 나머니는 무엇인가. 원증회고란 싫어하고 원망하는 사람을 만나는 고통, 애별리고는 반대로 좋아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이별하는 고통, 구부득고는 갖고 싶은 것을 얻을 수 없는 고통, 오온성고는 오온을 통해서 느끼는 고통을 말한다. 팔고는 우리가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들은 피할 수 없으므로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통증과 추위 등은 제3자적 관점에서 이를 관찰할 수 있다. 그것을 없앨 수는 없지만 그것에 매몰되지는 않을 수 있다. 그것이 초월하는 것이다.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동료와 일하면서도 회사를 떠날 수 없고 상대를 바꿀 수도 없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자기 마음뿐이다. 미움에도 배신에도 그렇다. 자기 기분이 좋으면 누구를 만나든 호감을 느낀다. 그것이 바로 초월의 자세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다. 즐거움도 마찬가지다. 즐거울 때 즐거움을 누리되 즐거움이 계속되기를 바라지는 말아야 한다. 즐거움은 건강에도 좋지만, 그것을 끝없이 추구하는 것은 병이 될 수 있다. 회피와 저항은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킨다. 세계를 초월한다는 것은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그것이 삶에서 반드시 겪어야 하는 수많은 경험들 중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불교에는 과거불, 현재불, 미래불이 있다. 부처가 세상에 있을 때 부처는 현재불, 미래는 미륵불, 가섭은 과거불이다. 또 세상에 출현했던 일곱 부처를 과거칠불이라고 하는데, 비바시불(毗婆尸佛), 시기불(尸棄佛), 비사부불(毗舍浮佛), 구류손불(拘留孫佛), 구나함불(拘那含佛), 가섭불(迦葉佛),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 그들이다. 이 모든 부처가 반야바라밀다로 수행하여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에 도달했다. 아뇩다라라삼막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아누다라라는 산스크리트어를 음역한 것으로 ‘위가 없는, 초월할 수 없는’이라는 뜻이고, 삼먁은 ‘철저하게, 정확하게’ 삼보리는 ‘지혜를 깨우치다’는 뜻이다. 모든 의미를 합치면 무상정등각이 되는 것이다.
흔히 “현재를 살라”고 하는데 이 말은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지금 현재를 즐겁게 누리며 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잘 못 이해한 것이다. 이는 마음 속 스트레스를 떨쳐내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이 말은 진정한 모습을 깨닫고 즉시 멈추라는 의미를 담았다. 무엇을 멈추라는 것인가? 관습에서 나타난 버릇과 욕망을 멈추고 자신의 본성을 되찾아 본성대로 살라는 것이다. 본성에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흔들림 없이 지키며 관조해야 한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헛된 생각을 떨쳐 무엇을 해도 걸림이 없는 경지에 올라선다면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으랴’고 한 시도 있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이제 《반야심경》의 마지막 주문을 외워볼 차례다.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가 없는 주문이고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게 허망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제 반야바라밀다주를 말할 것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하바!”(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揭帝揭帝 波羅揭帝 波羅僧揭帝 菩薩 婆娑訶!)
불교에서 ‘주문’은 부처의 심인(心印-언어를 떠나 마음으로 전해진 깨달음)의 은밀한 언어다. 우주 깊은 곳에서 울리는 부름이다. 그 소리는 어떤 곳으로 돌아오라며 우리를 부르는 것 같다. 미국의 불교학자 에드워드 콘즈는 이 주문을 “가자! 가자! 건너가자. 다함께 건너가자! 위대한 깨달음이여! 모든 것을 위해 박수치자!”라고 번역했고, 중국 학자 멍상썬은 “깨달음의 마음이여! 떠나자. 떠나자. 피안을 향해. 피안으로 건너가자. 하하하! 이 얼마나 기쁜가!”라고 번역했다.
해석은 조금 다르지만, 우리에게 떠나라고 외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멀리 떠나라는 주문이 어떻게 고통과 불행을 없앨 수가 있을까? 해답은 쉽게 찾을 수 없다. 아니 해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읽고(외우면) ‘내면에 희열을, 마음에 강인함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