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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짐과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
행 8:1-13
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그 날에 예루살렘 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 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 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13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행 8:1-13 / [교회를 박해하는 사울]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그날부터 신도들을 박해하는 모진 강풍이 일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휩쓸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사도들을 제외한 신도들은 모두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피난을 떠나야 하였다. 2) 그러나 그런 중에도 몇몇 경건한 사람들이 와서 슬퍼하며 스데반을 장사하였다. 3) 사울은 야수처럼 날뛰면서 교회를 휩쓸고 다녔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신도들을 끌어내 감옥에 가두었다. 4) [복음이 사마리아에] 예루살렘에서 피난 간 신도들은 어디를 가나 예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5) 빌립은 사마리아로 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6) 많은 이적을 베풀었다. 그러자 그 이적을 본 사람들은 너나없이 모두 그가 전하는 말씀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7)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서 많은 귀신들이 큰소리를 지르며 쫓겨 나갔고 많은 중풍병자와 불구자들이 고침받았기 때문이다. 8) 온 도시가 기쁨에 넘쳤다. 9-11) 그런데 이 도시에는 여러 해 동안 마술을 부리며 살아온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신기한 일을 사람들에게 행해 보임으로써 자기가 꽤 대단할 인물인 것처럼 행세하였다. 때문에 그는 그 도시에서 매우 큰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때때로 그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대단한 능력을 받은 사람' 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12) 그러나 이제 빌립이 와서 예수께서 메시야라는 것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전하여 많은 사람이 믿고 침례를 받게 되자 13) 시몬도 믿고 침례를 받았다. 그리고 빌립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니며 빌립이 베푸는 많은 기적들을 보고 놀라워하였다.
박해 후 흩어진 그리스도인은 각자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를 발견합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1-3)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 말씀대로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과정이 우리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될 때가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죽고 그의 죽음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통분을 갖게 됩니다. 또한 이어지는 큰 박해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공의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양이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방식과 모양을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향하신 사랑과 권능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4-8) 청년 사울과 공회의 박해를 받아 흩어지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폭넓게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길이 됩니다. 빌립 집사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사마리아 성에 가서 그리스도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 성은 큰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비록 사울과 공회의 박해로 인해 예상치 못했던 곳으로 밀려갔지만 그 떠밀림은 성령의 이끄심을 믿는 섭리의 사건이었습니다. 나를 부인한 역사의 현장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9-13) 사마리아 성에는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있었습니다. 그 성의 백성들은 그의 마술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빌립이 들어가 복음을 전하며 보여주는 이적은 마술로 눈속임을 해오던 시몬 조차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그래서 시몬도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참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 시몬이 보여주었던 마술과 같은 거짓된 영의 미혹된 것으로 진리의 것을 채워 넣을 수 있습니다. 거짓은 참된 진리 앞에 정체가 폭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적용: 당신은 하나님의 역사를 당신이 바라고 기도하는 모양으로 나타내 주시길 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C.S. 루이스는 “고난은 주님이 주시는 변장된 축복이다”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잘 감당하면 그 고난 때문에 잃는 것보다 은혜 가운데 얻는 것이 훨씬 더 많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고 그 한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겸허히 의지하게 되면 그 한계와 약함은 진정한 축복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됩니다. 우리는 고난을 맞이했을 때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나아감으로 새로운 변화와 성숙의 축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 설 교 >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행 8:1-3 / 양향모 목사
긴 스데반의 설교와 그의 죽음이 기록된 7장이 끝나고 이제 8장이 시작됩니다. 8장은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여러 의미로 볼 수 있는데 그 중에 하나님 예수님께서 하신 복음전도의 말씀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을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대로 복음이 이제 예루살렘을 지나서 온 유다와 사마리아까지 전파되고 있는 과정을 8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8장을 시작하면서 빌립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스데반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꺼내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었다고 했습니다. 여기 경건한 사람들이란 베드로사도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참한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가 설교 했을 때 이미 5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유대교에 대한 그들의 열심 때문에 혹은 그들이 가진 기득권 때문에 복음을 거부했지만 많은 유대인들이 이미 복음을 받았고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지내고 귀한 복음의 전도자가 세상을 떠났음을 슬퍼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스데반은 더 고생을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서서 기다리시는 천국에 올라갔으니까 슬퍼할 일이 아니라 기쁜 일일 것입니다. 그래도 세상에 남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특별히 복음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복음을 잘 알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걸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세상을 떠난 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도 이런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반갑게 맞으시고 사람들은 그가 떠남을 슬퍼하는 그런 죽음이어야 하는데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외면하시고 사람들은 잘 죽었다고 기뻐한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신다고 했습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시 116:15)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죽음을 헛되어 이 세상을 마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죽음을 더 좋은 세상으로 인도하는 관문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성도들의 죽음을 헛된 것이 아니고 귀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성도들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를 위해서 귀하게 쓰고 계십니다. 스데반이 이 세상을 떠났고 그로 인해서 복음에 대한 핍박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지만 그것이 복음 전파를 막는 것이 아니라 박해로 인해서 흩어진 성도들이 유다전역에서 그리고 사마리아와 세계만방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이야기가 끝났고 빌립의 이야기가 시작이 되는 이 시점에서 한 사람이 이 이야기에 슬며시 끼어들고 있습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7장의 끝에 그리고 8장을 시작하는 순간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이 앞으로 이방세계에 복음을 맡아서 전하게 될 바울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눈여겨보는 것이 사도행전 후반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배운 로마서나 에베소서의 이신칭의의 진리를 이해하고 따르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사울이라는 사람이 바울이 되어서 복음을 전하고 또 복음의 진리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는 로마서나 에베소서 같은 서신서들을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이야기는 이미 많이 들었기 때문에 오늘은 이 사울의 이야기에 중점을 두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유명한 바울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우리는 7장에서 사울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모습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스데반이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스데반의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까 사울의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지나쳤습니다. 7장 57절과 58절에 사울의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 장면이 사울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사도 바울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나를 알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사울의 이런 모습을 소개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어서 자기 과거의 야야기를 본인 스스로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역사의 현장에 등장하는 그의 모습을 소개함으로 더 확실하게 알게 했을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스데반을 끌고 성 밖으로 와서 돌로 쳐 죽일 때 증인들이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가진 구약성경에 기록된 율법 외에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만든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에 율법이 있으면 그 율법을 지키는데 필요한 세부 시행규칙을 만들어서 사용하듯이 유대인들도 성경에 기록된 율법 외에 미쉬나나 탈무드 같은 다른 시행규칙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들을 우리가 상세하기 잘 모르기 때문에 본문을 이해하는 데 좀 어려운 장면들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다른 신을 섬기라고 유혹을 하거나 또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두세 사람 이상의 증인을 세우고 증인이 그의 죄에 대해서 증언을 하고 먼저 손을 대서 치고 그 후에 거기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습니다.(레24:13-14, 신 17:6-7)
그런데 증인이 옷을 벗어서 어떤 사람 앞에 두고 어떤 사람이 그 옷을 맡아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성경에 기록이 없어서 잘 모릅니다. 아마도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가지고 있던 시행규칙에 이런 내용들이 기록이 되어서 그 시행규칙대로 하나하나 잘 진행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증인들을 통하여 증언하게 하고 그 증인들이 자신들의 증언이 참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옷을 벗어서 형 집행 책임자쯤으로 보이는 사람 앞에 맡기고 증인이 먼저 돌로 치고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돌로 쳐서 죽임으로 스데반을 사형시키는 것이 합법적으로 사형시켰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증인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그 증인들이 재판을 하는 과정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다 똑바로 율법을 행하고 율법에 명시되지 않는 세행규칙까지도 다 잘 지켜서 정말로 합법적인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합법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합법적인 행동만 볼 뿐이지 그들 마음속에 있는 것은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증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합법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위장된 행동을 하는 거짓증인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사도행전 6장에서 이들이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제거하기 위해서 매수된 거짓증인들입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니까 유대인들이 능히 당하지를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매수해서 거짓증인으로 세워서 스데반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전과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이라고 증언을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서 스데반을 붙잡아 오게 하고 공회에 세운 거짓증인 매수된 증인들입니다.
자기들의 자리가 없어져서 밥 먹고 살기가 힘들어질까 염려하고 또 자신들이 누려온 온갖 영화와 권력의 기득권을 빼앗길까봐 염려한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들에게 돈을 받고 매수된 거짓증인들이 합작하여 벌린 이 재판이 아무리 절차가 합법적으로 똑바르게 진행이 되었다고 해도 이 재판은 엉터리 재판이고 불법에 의한 재판일 뿐입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거짓 증인들과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그들을 매수한 종교지도자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인용하고 합법이라고 강조하지만 그들 속에 숨은 거짓 때문에 욕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범죄자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저급한 신비주의를 동원합니다. 그리고 거기 매수된 거짓 증인들도 동조를 합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고 싶어 하는 욕심이 성경을 가장하여 합법을 가장하여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이 세상의 축복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거기 거짓 증인들도 동조를 합니다. 나는 기도를 많이 해서 복을 받았다. 나는 헌금을 많이 해서 복을 받았다. 나는 충성을 많이 해서 복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물론 그 복들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세상의 욕심을 채우는 복을 복이라고 충동하여서 사람들이 세상의 복을 소중하게 여기게 만들고 그로 인해 자기 자신도 세상 재물을 차지하려는 거짓 증인들입니다.
참된 기도는 다른 사람들이 더 잘되게 하는 것입니다. 참된 헌금과 참된 충성은 그로 인해서 이 세상에서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충성할 때 참된 기도요 헌금이요 충성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율법을 행하고 선을 행할 것을 강조합니다. 많은 거짓 증인들이 거기 동조를 하여서 자신은 마치 모든 율법을 다 잘 지키고 선을 행하면서 사는 사람처럼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면 똑바로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만 똑바로 살 수 없는 우리들에게 율법을 강조해서 위선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가 되심을 고백하지 못하게 하는 아주 악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그런 악한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이익을 탐하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들에게 매수된 몇몇 거짓 증인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받는 것을 방해하는 엄청난 비극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울의 시작은 여기서 부터입니다. 이악한 일에 동조하는 것으로 바울에 관한 기록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물론 사울이 처음부터 증인을 매수할 때부터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사울이 청년이라는 것을 강조함으로 아마도 그 사실을 모르고 동조한 사람인 것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젊은 혈기 때문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전후좌우도 살펴보지 않고 무조건 따르는 청년 시절이었기 때문에 증인이 매수된 증인인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은 없는지 살펴보지 못하고 그냥 사람들의 주장에 따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울이 교회를 진멸할새
본문 3절 말씀에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잔멸”이라는 말은 우리가 잘 쓰지 않는 단어입니다. 잔멸(殘滅)이란 잔인할 잔(殘)자와 꺼질 멸(滅)자를 써서 “쇠잔하여 다 없어짐”이라는 뜻이라고 국어사전은 설명합니다.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교회를 다 없애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헬라어에서는 뤼마이노마이(λυμαίνομαι)라는 단어를 쓰는데 “난폭한 짓을 하다, 심하게 해치다”라는 말로 번역이 되는 단어입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기 이전에 기독교에 대해서 이런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조금 반대하고 조금 미워하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맹렬하게 교회를 반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나운 맹수처럼 달려들어서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집집마다 찾아가서 거기 모인 사람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끝까지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사람입니다. 사울도 바울이 되기 이전에는 유대교 지도자들처럼 진리를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가 배운 곳이 유대교였고 그의 스승이 유대교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대교 지도자들이 하는 말이 모두 옳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고 거기에 반기를 든 사람들은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이나 이단으로 간주하고 죽여 없애야 된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서 배우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젊었을 때에 엉뚱한 곳에 가서 잘못된 것을 배운 사람은 평생 그 잘못된 것이 바른 것처럼 착각을 하면서 잘못된 일에 열심을 내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은 정말로 열심입니다. 바른 진리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열심도 내지 않고 그럭저럭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은 정말로 열정적으로 전도도 하고 자식도 남편도 다 버리고 전 재산 다 팔아 바치면서 충성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에게 우리가 모르는 그 무엇이 있구나. 그러기에 저렇게 열심이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있기는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기꾼들이 이용해 먹으려고 온갖 감언이설로 세뇌를 시켰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로 믿고 열심을 내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과거에 유대교에 이렇게 헌신적인 사람이었음을 공개하는 것은 당시에 그것이 교회에 큰 어려움이었지만 나중에 유대인들로부터 교회를 방어하는데 크게 사용을 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이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나도 옛날에는 당신들처럼 생각한 사람이다. 당신들보다 훨씬 더 기독교를 반대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다가 감옥에 넣고 그들을 죽일 때에 찬성표를 던진 사람이었음을 이야기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본문 1절 말씀에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스데반의 순교를 시점으로 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박해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극심한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도저히 거기서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되자 성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온 유다와 사마리아로 흩어져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순교를 각오한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끝까지 남아서 그들이 받은 복음이 진실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증언을 하였습니다. 그들마저 도망을 가버린다면 유대교 지도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격이 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남아서 모진 박해를 견디며 끝까지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핍박을 피해서 온 유다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된 것은 예수님의 예언이자 명령인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일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부인하고 도망을 간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믿고 따르기 위해서 이주를 했고 거기서 그들이 가진 복음을 전함으로 복음이 세계만방에 펴져가는 이 귀한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복음만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가진 사람들이 전 세계로 흩어져 살면서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설교하면서 제목으로 잡은 것이 1절의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입니다.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게 정당한 일로 생각했더라는 것입니다. 그가 사형을 당하는데 찬성표를 던졌고 조금도 안됐다거나 그런 생각이 없이 잘한 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하고 그 복음을 전하는 정말로 바르고 선한 사람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서고 그런 악한 일을 마땅한 일로 여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악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지도 그 일을 잘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사라지고 있는데도 그것을 안타까워하지 않고 마땅하다는 듯이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과 반대되는 이 세상의 복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도 그것을 안타까워하지 않고 슬며시 따라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둥 예수님을 믿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선을 행하여야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도 그것을 반대하지 않고 따르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 진리를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따르고 있는 사람들은 사울과 같이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거짓선생들에게 잘못 배워서 엉터리로 알고 있는 것을 진리로 착각을 하고 따르는 사울과 같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여기면서 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영생을 얻는다는 이 진리를 마땅히 여기고 이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스데반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마땅한 일로 여기며 살고 있습니까? 세상에 사니까 세상에서 잘 사는 일에 더 열심을 내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사시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아는 이 진리 우리가 받은 이 복음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영원한 천국을 향해서 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먼저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성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함
행 8:4-8 / 양향모 목사
7장이 스데반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장이라고 한다면 8장은 빌립이라는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기록한 장입니다.
성경에는 빌립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세 사람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열두제자 중 한 사람인 빌립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제일 먼저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스데반과 함께 사도들을 도와서 일을 하기 위해서 뽑았던 일꾼 일곱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빌립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구제를 위한 일꾼 혹은 집사라고 부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집사보다는 훨씬 더 많은 일들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7장에서 살펴본 대로 스데반도 구제의 일보다는 유대교 지도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빌립이 사도 빌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앞서서 본대로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교회에 핍박이 시작될 때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고 다른 성도들은 흩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로 내려온 사람은 사도가 아니라 집사 빌립이라고 생각합니다.
빌립이 그리스도를 전파할 새
본문 4~5절에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흩어진 사람들이란 스데반의 사건으로 인해 교회의 박해가 시작이 되자 예루살렘을 떠나서 온 유다와 사마리아지방까지 흩어진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흩어져서 숨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가서도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여기 ‘흩어지다’라는 말은 좀 특별한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헬라어에서 ‘디아스페이로(διασπείρω)’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에서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이방 나라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이 디아스포라의 특징은 이방나라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이 디아스페이로라는 단어는 스페이로(σπείρω)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이 스페이로는 “씨를 뿌리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마13:18)를 말씀하실 때 거기서 씨를 뿌린다는 말이 바로 이 ‘흩어지다’로 번역한 스페이로라는 단어입니다. 누가는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이 온 유다와 사마리아에 흩여져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마치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을 하셨던 그 복음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과 같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렇게 모이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영광을 돌리고 흩어지면 복음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로 하나님께 특별한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곡식의 씨를 뿌려 추수를 해서 감사를 드렸지만 오늘 신약교회의 성도들은 복음의 씨앗을 뿌려서 그 복음을 듣고 알곡이 된 성도들을 보고 감사를 드리는 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감사할 일이 적습니다. 추수감사주일에는 이 복음의 열매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복음의 씨를 뿌리시기 바랍니다.
1.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빌립이 사마리아에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했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온 유다로사마리아로 흩어질 때 빌립은 사마리아 성으로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이 사마리아성은 이상한 성입니다. 유대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방인도 아닌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성은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으나 이방나라의 침공으로 인해서 이방인들이 들어와서 살기 시작하여서 혼혈족이 되어버렸고 유대인들은 그들을 이방인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유대인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혀 유대인과 관계없는 이방인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성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비록 모세오경만 가지고 있었지만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성에 들어가셨을 때 우물가에 있던 한 여인을 만난 이야기가 성경 요한복음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여인 역시 어디서 예배를 드릴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때 그들도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도 유대교 지도자들도 하지 않은 선한 일을 사마리아인이 했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긴다고 하는 유대인에게도 필요한 것이고 어중간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마리아인에게는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는 더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복음을 전해야 하고 또 어중간하게 그냥 교회에 왔다가 갔다가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성경을 알고 믿고 따른다고는 하지만 십자가의 복음을 전적으로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오랫동안 다니지만 아직 복음의 진리를 모르고 교회에 다니기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면서 전한 것은 ‘복음의 말씀’이었고 빌립이 사마리아성에 내려가 전파한 것은 ‘그리스도’였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복음의 말씀이 결국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교회의 성도들이 전하고 전파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누가가 사도행전을 쓴 이유에 대해서 기록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먼저 쓴 글에서 즉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일과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일과 부활 승천하신 일을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어 나가는가를 사도행전을 통해서 기록하겠다는 의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사도행전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이 세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나라의 일이라고 하셨는데 그 하나님나라의 일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년에 우리교회 표어로 쓰고 있는 6장 7절의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라고 할 때 여기 하나님의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점점 왕성해져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 또 성경 말씀을 읽고 상고하면서 그리고 설교의 말씀을 들으면서 꼭 생각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교회의 핵심이 성경의 핵심이 진리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이 한마디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얻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인지 그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복음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져 나가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이 사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나가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역사 속에서 그 증거들을 충분히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복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살펴볼 마음만 있다면 성경의 역사 곳곳에서 교회가 흘러내려온 역사 곳곳에서 또 우리 인간이 사는 역사 현장에서 이 증거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또 하나는 그 복음이 나와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복음을 믿고 그 복음과 함께 살고 있는가 아니면 복음을 알기는 하는데 그 복음과 관계가 없이 사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문제를 놓치면 교회에 다니나 마나입니다. 성경을 읽으나 마나이고 설교를 들으나 마나입니다. 그것을 놓치면 수십 년의 신앙생활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무리가 듣고 보고 따르더라.
본문 6절 말씀에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라고 했습니다. 빌립의 말을 들은 무리들이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리가 들은 것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대로 복음의 말씀이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복음의 말씀을 전하고 빌립이 그리스도를 전할 때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따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고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할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예루살렘이 살기가 어떻고 거기서 무엇을 하면서 살았으며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이런저런 할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빌립이 예루살렘교회에서 경험했던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자신이 일꾼으로 뽑힌 일 일꾼으로 뽑혀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한 일이나 스데반이 붙잡혀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한 일 등 얼마나 말하고 싶은 자랑거리가 많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전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빌립이 복음을 전하면서 말로만 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표적도 행하였다고 했는데 그 표적이 시시한 표적이 아니라 더러운 귀신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쫓겨나가고 중풍병자와 걷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걷게 되는 표적을 행하였습니다.
사마리아에 사는 무리들이 빌립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또 표적도 보았는데 무엇을 따랐다고 했습니까? 복음을 잘 몰랐다면 복음을 시시하게 여겼다면 또 복음의 소중함을 알고도 세상의 욕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면 복음을 따르기보다 표적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표적을 더 보여 달라고 하든지 그 표적만 요구하지 않고 표적은 복음이 진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임을 알고 표적을 따르지 않고 복음을 따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날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세상 욕심 때문에 복음을 무시하고 표적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복음을 전하기보다 자기 경험을 세상이야기를 하기를 좋아합니다. 성도들은 복음을 따르기보다는 자기 삶에 기적이 일어나서 세상에서 잘 살고 싶어 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고 저급한 신비주의자들은 기적을 일으켜서 세상에서 복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할 수 있다고 외치는 성공주의자들은 성경 말씀을 따라서 이 세상에서 성공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로 왜 그런 것을 거부하느냐고 항의 합니다. 성경에서 기도해서 죽은 사람을 살리고 중풍병자나 앉은뱅이 같은 중환자를 살렸다고 하는데 왜 우리는 따라하지 말라고 하느냐고 항의 합니다. 이런 표적이 있어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것이 아니냐고 복음만 전해야 한다고 하는 우리들을 비웃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기적을 일으킨다고 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가를 살펴보십시오. 복음은 그저 하나의 들러리에 불과하고 기적을 일으켜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많은 기적적인 일들을 행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충분히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수많은 표적들을 남겨두고 계십니다. 과거에는 성경이 완성되지 않아서 진리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말씀이 완전히 완성이 되어서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믿는 표적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전하다가 전 재산을 잃고 전 가족을 잃고 목숨까지 잃는 순교를 당하면서도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듣고 새 사람이 되어서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수많은 신학자들이 종교개혁자들이 바른 복음을 위해서 연구하고 연구해서 오늘날 우리가 쉽게 예수님을 알고 믿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통해서 우리가 오늘 여기 이렇게 앉아 있고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들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알 수 있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기적적인 역사가 아니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귀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이런 모든 일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따르게 하기 위해서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것은 다 이 복음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본문 7~8절 말씀에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의사입니다. 의사의 눈으로 볼 때 귀신이 들어서 생긴 병이 있고 귀신과 상관없이 생기는 병이 있음을 알고 구별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사탄의 졸개들이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와서 귀신들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귀신들이 쫓겨나가고 정상적인 사람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또 당시의 불치의 병인 중풍이나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낫는 것을 보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환자들이 다 낫는 것도 아니었고 병에서 나았다고 늘 건강하게 사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정말로 기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기뻐한 것입니다. 이런 죄와 사망이 있는 세상에서 그래서 늘 아프고 늙어가는 세상에서 영원히 구원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절망에서 소망을 보았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도저히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절망적인 인생에서 소망의 빛을 보았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읽어도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뜻을 이제야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오경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가서나 역사서나 선지서를 다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했는데 모세오경만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성경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알고 기뻤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동안 만족주지 못할 것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우물가에 있었던 사마리아의 여인처럼 그들도 만족주지 못할 이 세상의 일에 매달려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이 그들에게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기쁨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습니다. 성경의 핵심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이 기쁨이 이 은혜가 여러분의 삶속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복음을 듣고 따랐으며 그로인해 그 성에 기쁨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여 복음을 듣는 사람과 전하는 우리들의 삶에 기쁨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시몬이 마술을 행하여
행 8:9-13 / 양향모 목사
오늘날의 교회 교인들은 교리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교회에만 다니면 좋은 줄 알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왜 믿어야 하는지 믿으면 무슨 복을 받는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교리라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교리는 성경전체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잘 정리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라고 하면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올 때 마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려고 하면 성경 전체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기록하고 있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해서 엉뚱한 하나님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단들은 성경 한 곳만 가지고 말하니까 잘못된 교리를 말합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예수님, 성령님, 우리 인간, 교회, 그리고 종말 이런 주제들에 대해서 말을 할 때도 성경전체를 살펴보고 성경전체가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발로 알고 말을 해야 합니다.
이런 교리를 잘 모르고 이런 교리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 때문에 엉터리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교회에 다니기는 하는데 차라리 안 다니는 것만도 못하는 엉터리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이라고 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냥 비슷하게 믿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흉내라도 내면 좋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것이라도 있으면 없는 것 보다 낫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슷한 것은 진짜가 아닌 것입니다. 비슷한 것은 가짜입니다.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그런 것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없는 사람은 억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슷한 가짜를 가지고 진짜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마리아성에 사는 시몬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비슷한 것 때문에 끝까지 진짜를 따르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또 그가 행한 표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빌립이 표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빌립이 전한 복음을 믿고 따랐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몬이라는 사람은 복음을 듣고 복음을 따른 것이 아니라 빌립이 행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듣고 놀란 것이 아니라 행하는 표적을 보고 놀랐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따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표적행하는 것을 보고 따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아시니까 복음이 귀합니까? 병든 사람 한 두 사람 고치는 것이 귀합니까? 복음의 능력이 그런 표적보다 수천수만 배 더 귀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제 예로살렘에서 온 유다와 사마리아로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시몬의 이야기를 여기에 기록해 둔 것은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것을 진짜로 알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생길 것이기 때문에 복음을 놔두고 엉뚱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이 기사를 통하여 교훈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시몬이 마술을 행하여”입니다. 마술사 시몬의 잘못된 행동이 오늘날 교회에도 많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전철을 밟지 말고 진리의 복음을 따라 바르게 가야한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것이 오늘 제 설교의 목적이고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귀한 교훈입니다. 우리는 비슷한 것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진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진짜 복음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 성에 시몬이라고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본문 9절 말씀에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시몬이라는 이름이 많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두 사람이나 있는데 베드로가 된 시몬과 가나안 사람 시몬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도 시몬이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간 사람도 시몬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몬이라는 사람은 이 사람들과 다른 사람으로 오늘 본문이 기록된 사도행전 8장에만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시몬은 마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마술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가 어디서 누구에게 마술을 배웠는지 성경에 기록이 없어서 잘 모릅니다.
초대교회의 몇몇 기록에 의하면 이 시몬이 애굽에 가서 철학과 마술을 배워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경에 기록된 애굽은 온갖 잡신들을 섬기는 나라였고 그 잡신을 섬기며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요술사 혹은 마술사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팡이를 던져서 뱀이 되게 할 때 애굽의 요술사들도 지팡이를 던져서 뱀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출(7:8절 이하) 뱀을 만든 것뿐만 아니라 몇몇 가지 이적들은 그들도 따라 했습니다.
시몬이 애굽에서 마술을 배워 왔다면 아마 이런 잡신들의 능력을 빌려서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배워왔을 것입니다. 이런 잡신들의 능력을 빌려서 기적을 일으키고 또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서 이상한 현상을 보게 하고 눈을 속여서 놀라운 일을 행하는 것처럼 보여주는 이런 일들을 마술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능력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었습니다. 시몬이 귀신을 섬기는 애굽 사람에게 귀신의 능력을 받아가지고 와서 그것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속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이 하나님의 능력인지 귀신의 능력인지 잘 구별을 하지 못합니다. 그냥 우리가 지금까지 한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거나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면 다 놀랍게 여기고 하나님이 하신 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귀신들도 그런 일을 행하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신 일인지 귀신의 속임수인지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시몬은 마술을 행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했습니다. 마술을 행한 목적이 사람들을 놀래게 해서 자신을 주목을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몬은 자칭 큰 자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그 일을 행한 자신을 높여서 자기 자신을 아주 대단한 사람이라고 자랑을 했다는 것입니다.
현대어 성경은 이 부분을 좀 더 실감나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는 전부터 마술을 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 양 떠들어댔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을 놀래게 해서 자기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사람들에게 떠들어댔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적을 행한 사람들은 그 이적이 마치 자신이 잘나서 그렇게 한 것처럼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고 기적을 행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 것이라고 하며 자신이 영광을 받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그 능력을 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능력을 받았거나 사람의 눈을 속이는 속임수로 하는 마술들은 전적으로 자기 자랑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오늘날 교회 내에도 이런 시몬과 같이 마술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속여 놀라게 하고 귀신의 능력을 빌려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그로 인해서 자기 자신을 높이고 자기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몬의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일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도 깜짝 놀랄 만한 엄청난 일이 일어나도 마치 지금 막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것 같은 신비한 일이 일어나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무관하거나 복음보다도 그 자체를 더 귀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사탄의 능력이고 속임수이며 마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사람을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본문 10-11절에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시몬의 마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마술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시몬이 오랫동안 마술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속인 것은 거기에 진짜 하나님의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가짜가 진짜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사마리아에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닌 혼혈족들이 살았기 때문에 유대인이 선기는 하나님이 이방인들이 섬기는 잡신들과 혼합이 되어서 바른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이상한 마술을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떠들어대니까 사람들이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가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 그냥 이상한 마술을 하는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았다고 하니까 그대로 믿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들이 믿고 따랐다고 했습니다.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 머리가 좋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존경을 받을만한 선한 일을 많이 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높은 사람 똑똑한 사람 훌륭한 사람들이 다 시몬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고 따르니까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나 좀 못난 사람들도 당연히 그 사람들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진리도 모르는 거짓 선생이고 또 그 거짓 선생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사람을 속이고 신비한 마술을 행하니까 그냥 그 사람 하는 말이 옳거니 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단들 집단에 가보면 자기들 속에 국회의원이 있다. 장관이 있다. 또 일류 대학생들이 자신을 믿고 따른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장관이라고 국회의원이라고 또 일류대학을 다닐 정도로 머리가 좋다고 진리를 바르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가 똑똑하다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배운 박사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바르게 아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다 어리석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잘 분별하지 못하고 그 사람이 좀 특별하게 행동하고 신비한 일을 하는 것 같으면 그냥 믿어버리는 것이 인생들입니다.
옛날 이단들은 신비한 능력을 일으킨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유혹했습니다. 기도만 하면 모든 병이 다 낫는다고 큰 소리를 치면서 사람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신유은사 집회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불치의 병이 나았다고 하면서 간증을 하니까 자기도 나을 줄 알고 기도원에서 죽치고 기다리다가 죽은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자기는 신유은사가 있어서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고 자랑을 합니다. 제가 농담으로 목사님 그러지 마 하나님께서 세상고생 그만하고 천국으로 데리고 가신다고 하는데 왜 목사님이 자꾸 방해를 놓아 죽을병에 걸리면 얼른 천국 가시라고 해야지.
그런 신유은사가 잘 안 나타나니까 요즘 이단들은 좋은 일 많이 한다고 소문을 내고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우리 교회는 양로원에 가서 노인들 발 마사지를 해 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교회라고 자랑을 하면서 기성교회들을 비웃습니다.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도와주는 곳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전도를 위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기도 하지만 교회가 구제단체이거나 사회사업을 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바른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랑해야지 그런 것을 자랑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큰 능력을 행한다, 신비한 마술 같은 일을 행한다, 선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고 따라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일 이용해서 우리를 속이는 거짓 선생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특별히 조심을 해야 합니다.
여기 마술사 시몬을 등장 시켜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후세에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이런 엉뚱한 일이 많을 것을 아시고 미리 조심하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엉터리 이단들에게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짓선생들의 속임수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바로 알고 진리를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이 십자가의 복음이 성경진리의 핵심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본문 12-13절에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라고 했습니다.
가짜가 진짜노릇을 하고 있는데 진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진짜 복음이 전해지니까 시몬을 따르던 사람들도 다 빌립의 말을 듣고 따르게 되었고 심지어 자기가 진짜라고 큰 소리를 치던 시몬도 그 나타나는 표적을 보고 놀라서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사마리아 사람들은 어렴풋이나마 하나님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도 이스라엘 사람들이고 또 일부이기는 하지만 성경도 가지고 있었고 가짜였지만 시몬의 마술도 하나님의 큰 능력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세우신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비밀을 그들이 듣고 가슴에 맺힌 의문들이 시원하게 뚫렸을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시는 분이시구나 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랜 세월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신 분이시구나 이런 놀라운 사실을 듣고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알고 싶어 했던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고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가 누구이신 것을 알았고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 것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들의 기쁨은 말로 할 수 없는 큰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 마술을 행하여 사람들을 속이던 시몬도 끼어 있었습니다. 시몬도 자신이 행하는 일이 진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가짜라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진짜를 접하게 되었으니까 놀라는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빌립이 행하는 표적도 자기의 마술과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기적이었고 빌립이 전하는 복음도 자신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말씀이었기 때문에 그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녔다고 했습니다. 빌립을 따라 다니면서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냥 이 말씀을 언뜻 보면 아 시몬이라는 사람이 변화되어서 전에 행하던 남을 속이는 마술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랐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진짜 회개를 하고 진자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전심으로 라는 말은 진짜 진심을 가지고 따랐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의 뜻은 고집을 세우고 집착하고 몰두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몬이 진짜 돈이 되는 확실한 것을 만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끈질기게 빌립을 따라다니면서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 배우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시몬이 따른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빌립이었습니다. 시몬이 따른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나타나는 이적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빌립이 행하는 이적을 배워야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 시몬처럼 복음이 아니라 나타나는 이적을 따르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신비한 일을 행하는 인간을 따르려고 합니다. 원래 교회에 온 목적이 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교회의 직분을 맡은 것이 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교회에 온 사람은 늘 그런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런 일에만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따로 칠십 인을 세우시고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나가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자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를 합니다. 예수님 우리가 가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니까 귀신들도 놀라서 항복을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귀신이 항복하고 사탄이 떨어져나가고 이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된 것이 진자 기뻐할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나라에 의인으로 이름이 기록되고 하나님 백성으로 이름이 기록되어서 우리가 그 나라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온 유다로 사마리아로 전파되어 나갈 때 사마리아 성의 시몬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셨습니다. 가짜를 가지고 진짜처럼 우리를 유혹하는 이단 거짓선생들이 많을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이상한 마술을 행하여 그것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우리를 속이고 유혹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박해 아래 확산되는 복음
사도행전 8:1-8 / 이수영 목사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교인이 급증하는 가운데 구제 문제를 둘러싸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에 불만과 원망이 일어났습니다(행6:1). 열두 사도는 이 돈 문제를 다루느라고 하나님의 말씀 사역에 전념할 수가 없었습니다(행6:2). 그래서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다른 일들을 맡을 사람 일곱을 택하여 세웠습니다(행6:3-6). 그 일곱 사람 중 하나가 스데반이었습니다. 그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고(행6:5)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행6:8)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했을 뿐 아니라(행6:8) 논쟁에서 그를 당할 자가 없을 만큼 지혜가 있었습니다(행6:9-10). 이렇게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에 전념할 수 있게 된 결과를 행6:7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이렇게 교회가 놀랍게 성장하고 있을 때 스데반이 죽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의 설교에 마음이 찔린 이들이 이를 갈며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이 스데반의 순교는 기독교에 대한 본격적 박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물론 사도들이 붙잡혀 투옥되기도 하고 공회에 불려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경고를 받으며 채찍질을 당하고 풀려나는 일들은 이미 있었지만 이렇게 무참하게 사람을 죽이는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한 그날부터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도들만 남고 예수 믿던 사람들은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본문 1절). 기독교가 탄생하자마자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한 때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후로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약 300년간 박해의 역사는 계속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국가로 돌아선 이후에도 오늘날까지 회교권 국가를 비롯한 일부 타 종교 국가들 그리고 공산권 국가들에서의 기독교 박해는 계속되어왔고 불행하게도 그 가장 심한 기독교 박해가 바로 우리의 북한 땅에서 지금도 행해지고 있습니다.
다시 본격적이고 조직적인 박해를 받기 시작한 초기 예루살렘 교회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박해는 분명 교회의 위기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박해는 언제나 성장의 기회였음을 교회역사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예를 바로 예루살렘 교회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의 박해는 사도들만 남기고 교인들을 유대와 사마리아 땅 사방으로 흩어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붕괴나 소멸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진 사람들은 무서워서 숨어 산 것이 아니라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본문 4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첫 번째 사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로 가서 거기 백성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한 일입니다(본문 5절). 열두 사도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볼 때 이 빌립은 예수님의 직제자 빌립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에만 전념하게 하기 위해 세운 일곱 사람의 명단에 스데반 다음으로 그 이름이 오른 빌립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빌립 또한 스데반처럼 말도 잘하고 표적 행하는 권능도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서 그들에게 붙어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게 했고 많은 중풍병자와 걷지 못하는 사람을 낫게 했습니다(본문 7절). 빌립이 행하는 표적을 보고 또 그가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하는 것을 들은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믿었으며 세례를 받고 따르게 되었습니다(본문 6절, 행8:12). 사마리아에 큰 기쁨이 찾아왔습니다(본문 8절). 예루살렘에서의 박해는 이렇게 복음이 예루살렘 밖으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주님께서 예고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냈습니다(행8:14). 두 사도는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그곳의 새 신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안수했으며(행8:15, 17)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동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행8:25). 그곳 신자들에게도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행8:17). 성령께서는 빌립을 또 다른 이방전도에 사용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인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빌립을 이번에는 남쪽으로 보내셔서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 길로 보내신 것입니다(행8:26). 거기서 빌립으로 하여금 한 에디오피아 사람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였는데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행8:27-28). 빌립은 성령의 지시에 따라 그에게 접근해서 그가 일고 있던 이사야서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습니다(행8:27-35). 그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는 자원하여 빌립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쁘게 길을 갔습니다(행8:36-39). 빌립은 계속해서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행8:40). 성경상의 기록은 없지만 빌립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복음을 전해 듣고 세례를 받아 귀국한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는 자기 나라에서 복음의 증인이 되었을 것이고 복음은 또 거기서도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박해 받는 복음을 더 널리 퍼뜨리시고 박해 아래 있는 교회를 더 성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놀랍게 이루어져 갔습니다. 열두 사도 못지않게 훌륭한 일꾼 스데반이 너무나 일찍 순교한 사실은 교회의 큰 손실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교는 결코 헛될 수 없는 일입니다. 스데반 대신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가장 큰 타격과 손실을 입히던 열혈파 박해자를 기독교 최대의 선교사요 신학자로 만드셔서 교회를 더욱 크고 견고하게 세워나가시는 훨씬 더 큰 이득을 취하셨습니다. 사울을 바울로 만드신 일입니다.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은 교회를 박해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크고 통쾌한 복수였습니다.
사울은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 그들이 벗어 놓은 옷을 지키고 있었습니다(행7:58). 그는 스데반이 죽은 것을 마땅한 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본문 1절). 그가 기독교 박해의 선두주자로 나선 것입니다. 그는 집집마다 뒤져 남아있던 그리스도인들을 남녀 할 것 없이 다 잡아 옥에 가두도록 넘기는 일을 했습니다(본문 3절). 그는 그러고도 여전히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행9:1). 그는 예루살렘의 신자들을 잡아 가두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했습니다(행9:1-2). 그것은 그가 그곳에서도 기독교를 따르는 사람을 보게 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올 권한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행9:2). 사울은 그가 원한 공문을 받아 가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 바람에 그는 땅에 엎드러졌고 거기서 다음과 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놀라 반문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그때 그가 들은 것이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9:3-6)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두 눈을 뜨고 분명히 보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고 그 앞에 엎드려졌다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게 되었다면, 사울은 눈으로 보지 못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났고 다메섹에 있던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는 그릇이 되는 것이고 그 일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었습니다(행9:15-16). 사울은 여기서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되었고 육신의 눈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행9:18).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고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행9:18, 20). 이렇게 돌변한 사울 앞에서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은 의심했고 유대인들은 당혹해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더욱 힘을 내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했습니다(행9:21-22). 예루살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음을 믿지 않으려 했지만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난 일과 주님께서 그를 당신의 그릇으로 택하신 사실과 그가 다메섹에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한 사실을 전해들은 후 그를 받아들였습니다(행9:26-28).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도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행9:29).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는 유대인의 선두주자에서 단번에 유대인들이 죽이려 하는 첫 번째 그리스도인으로 바뀌었습니다(행9:23, 29). 사울을 자기편으로 얻은 교회는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서 든든히 서 갔고 주를 경외하며 성령의 위로를 받는 가운데 수적 성장을 더해갔습니다(행9:31).
한편 베드로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그 또한 사방으로 다니며 침상 위에 누운 지 팔년 된 중풍병자를 고쳐주기도 하고 병들어 죽어 다락에 누어있던 시체를 향하여 “일어나라!” 말해 살리기도 하는 등의 놀라운 이적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로 수많은 사람이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행9:35, 42).
오늘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1.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 출발부터 박해를 받아왔다는 사실입니다.
2. 그러나 교회에 가해지는 박해는 결코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일시적으로 교회가 위축되고 흩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흩어놓으면 그만큼 더 많은 교회가 생기게 됩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주의 몸 된 교회를 진멸할 수는 없습니다. 혹독하기 이를 데 없는 박해를 받은 북한의 교회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땅 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3. 교회는 순교의 피를 흘리면 더 성장하고 확장된다는 사실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는 이들에게 놀라운 권능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병 고치고 죽은 사람까지 살아나게 하는 권능은 본래 제자들에게 있었던 능력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의 전도를 도우시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5.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가장 해로운 것조차도 가장 이로운 것으로 돌려놓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초기 교회에 가장 해롭고 위험한 존재였던 사울을 교회의 가장 유익하고 위대한 인물 바울로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역사가 그것을 증언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실 앞에서 우리가 지킬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교회는 전도하기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여건이 안 좋다고 전도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역사고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명령이며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성령의 사역의 도구가 되는 것뿐임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하다면 우리에게 우리가 상상도 못 할 놀라운 능력을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총회의 뜻을 따라 예장 300만 성도운동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그 운동을 [새문안 새생명 운동]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이미 신년도 예산이 다 편성된 후에 하는 일이라 예산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그 어떤 사역보다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고 행하면 하나님께서 다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새문안 새생명 운동]의 연차적 목표를 정하고 “전진0960”, “도약1070”, “비상1188”이라는 구호를 내겁니다. “전진0960”이란 금년 2009년 안에 출석교인 6000명대로 확실히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도약1070”이란 내년 2010년에는 출석교인 7000명대로 올라서자는 것입니다. “비상1188”이란 2011년에 가서는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을 맘껏 하며 팔팔 날 수 있도록 출석교인 8800명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계획과 실천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인들 가운데는 전도하는 것 자체에 반대하거나 또는 무관심하거나 또는 냉소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과 주님의 명령과 성령의 역사에 대해 반대하고 무관심하고 냉소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새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새 성전 건축이 이 운동에 소극적이어야 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운동은 새 성전 건축에 힘을 더하는 일이 되고 새 성전을 건축해야 하는 더 절실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온 교우들이 이 [새문안 새생명 운동]에 적극 동참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온 교우가 중지를 모으고 관심과 기도의 손을 모아 [새문안 새생명 운동]에 힘쓴다면 역사적인 새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어떤 곳인가? (7)
"환난과 순교를 표지로 지닌 신앙공동체“
행8:1-4, 계2:8-11 / 김명혁 목사
지난 주일 우리는 독일에서 오신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을 통해서 매우 귀중한, 통찰력이 있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부흥 10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가 회복하여야 할 것은 회개라고 지적했습니다. 지난 50여 년 동안 환난을 모르고 지내온 한국교회가 이번 아프간 사태로 환난과 순교의 의미를 되 새겨야 한다는 의미 심장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바이어하우스 박사님의 설교의 일부를 다시 인용합니다.
“2007년은 한국교회에 있어 의미 있는 해 입니다. 평양에서의 100년 전 부흥운동은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부흥이란 무엇입니까? 한 장로님이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한 것입니다. 이 죄 고백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쳐 많은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가운데 한국교회 전체에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백 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부흥을 원한다면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한국교회가 참된 부흥을 원한다면 백 년 전 한 장로님이 죄를 고백했던 것처럼 죄를 고백하는 참된 회개가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벌써 2007년이 지나가고 있는데 괄목할 만한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즉 23명 한국의 젊은이들이 아프카니스탄 탈레반에게 잡힌 일입니다. 이것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를 뒤흔든 사건입니다. 이번 아프간 사태는 1907년 평양대부흥 1백 주년을 맞는 한국교회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준다고 생각합니다. 1백 주년을 맞는 한국교회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환난과 순교의 축복을 기억하시라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평안한 삶을 살고 있는데 이때야 말로 갈보리의 주님을 바라보고 따라가야 할 때이며 주님의 고난에 부분 부분 참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교훈은 우리가 환난과 고통을 당할 때 우리의 삶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중요한 교훈을 2007년에 터득한다면 한국 교회는 새로운 갱신, 새로운 부흥을 체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바이어하우스 박사님의 통찰력 있는 말씀을 들으면서 한국교회가 지난 50여 년 동안 교회 성장과 교회 부흥에 눈이 어두워서 참된 교회가 항상 지녀왔던 교회의 표지인 환난과 순교의 덕목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교회는 “환난과 순교를 표지로 지닌 신앙공동체”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1. 예루살렘 교회는 환난과 순교를 교회의 표지로 지닌 신앙공동체였습니다.
물론 예루살렘 교회가 지녔던 표지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하나의 표지였고, 서로 교제하한 것이 하나의 표지였고, 기도하기를 힘쓴 것이 하나의 표지였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구제하며 봉사한 것이 하나의 표지였고, 전도하고 선교한 것이 하나의 표지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어버리기 쉬운 또 하나의 중요한 표지를 예루살렘 교회가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 시초부터 환난과 순교를 교회의 표지로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은 예루살렘 교회가 그 시초부터 환난을 교회의 표지로 지녔던 것을 기록했습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나”(행4:1-4).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23-31). 예루살렘 교회가 표지로 지녔던 환난이 예루살렘 교회에 가져다 준 것은 뜨거운 기도와 담대한 전도였습니다.
사도행전 5장도 예루살렘 교회가 환난을 교회의 표지를 지녔던 것을 기록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당파가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저희가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 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5:17-41). 예루살렘 교회는 환난으로 인해 더욱 더 뜨겁게 기도했고 더욱 더 담대하게 전도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은 예루살렘 교회가 환난과 순교를 교회의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운 표지로 지녔던 것을 기록했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4-60). 예루살렘 교회는 환난과 순교로 인해 천국의 주님을 영광스럽게 증거하는 가장 거룩하고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8장도 예루살렘 교회가 환난과 순교로 인해서 사마리아와 가사 광야와 아소도와 가이사랴 등 이방의 땅으로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한 일을 기록했습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행8:1-4).
사도행전 9장 10장 11장은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난 환난과 박해로 인해서 복음이 가이사랴와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까지 전해진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11:19-21).
사도행전 12장은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난 환난과 박해와 순교로 인해 교회가 더욱 더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손길을 더욱 강하게 체험했던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행12:1-5).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행12:16-17). 결국 예루살렘교회는 그 시초부터 그리고 그 성장 과정에서 환난과 박해와 순교를 교회의 표지로 지니면서 전도하고 봉사하고 선교하는 참 교회로 발전했습니다.
2. 서머나 교회도 환난과 순교를 교회의 표지로 지닌 신앙공동체였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계시록 2장과 3장에 기록되어있는 일곱 교회들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교회였고 주님으로부터 가장 큰 칭찬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돈이 많은 부자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사데 교회처럼 크고 화려한 교회당 건물을 가지고 있던 교회도 아니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가난한 교회였고 궁핍한 교회였습니다. 환난과 박해를 받던 교회였습니다. 즉 가난과 궁핍과 환난을 교회의 표지로 지니고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게 칭찬과 권면과 축복의 편지를 써서 보내셨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8-10).
여기 묘사된 서머나 교회의 표지는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옥에 던짐과 죽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주후 155년경 서머나의 투기장에서 가장 위대한 순교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폴리캅이 순교의 형장에서 남긴 마지막 고백과 기도의 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을 새롭게 불러 일으키곤 했습니다. “나는 86년 동안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섬겨왔소. 그리고 그 분은 나에게 한번도 잘못하신 일이 없소.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분을 모독할 수 있겠소. 당신은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들의 수에 참예하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잔에 참예하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인하여 그리고 모든 것을 인하여 나는 당신을 찬양하며 당신을 송축하며 당신께 영광을 돌립니다.” 서머나 교회는 교회 역사상 가장 이상적이고 가장 모범적인 교회로 존재했습니다. 환난과 순교를 교회의 가장 뚜렷한 표지로 지녔기 때문이었습니다.
3. 이 세상에 존재했던 참된 교회들은 환난과 순교를 그들의 표지로 지녔습니다.
교회사가들은 이 세상에 존재했던 가장 이상적인 교회는 처음 300여 년 동안 로마 제국 안에 존재했던 초대교회와 16세기와 17세기 영국과 미국에 존재했던 청교도들의 교회라고 말하는데, 초대교회와 청교도들의 교회의 특징은 환난과 순교를 저들의 표지로 지니고 있었던 점이었습니다. 처음 300여 년 동안의 초대교회의 역사는 환난과 박해와 순교로 이어진 역사였습니다. 열 번의 대 박해가 있었고 수 십만 명의 순교자들이 순교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서기 203년 북아프리카 칼타고에서 순교한 페르페투아의 순교의 이야기는 가장 감동적인 순교의 이야기들 중의 하나입니다. 페르페투아의 순교의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합니다.
로마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의 치하인 서기 203년 북아프리카 칼타고에서 두 젊은 여성이 기독교인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페르페투아(Perpetua)라는 26살의 여성과 그녀를 돕는 펠리키타스(Felicitas)라는 여성이 함께 투옥되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결혼하여 아직 젖을 떼지 못한 어린 아기의 엄마였습니다. 감옥에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 페르페투아의 아버지가 찾아와서 딸에게 기독교의 신앙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간곡하게 권면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아버지에게 꽃병을 가리키면서 저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꽃병’이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아버지에게 “꽃병을 꽃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기독교인인 나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기독교의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아버지는 다시 찾아와서 아직 젖을 떼지 못한 갓난 아기를 생각해서라도 신앙을 버릴 것을 간곡하게 울면서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페르페투아의 신앙을 움직일 수는 없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당하는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천국을 위한 기쁨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기도 속에서 환상을 보고 감사하면서 그의 신앙을 지켜나갔습니다. 드디어 페르페투아의 처형의 날이 왔습니다. 미친 소가 그녀의 옆구리를 들이박아 많은 피를 흘렸지만 그녀는 곧 죽지 않았습니다. 페르페투아는 피를 흘리는 다른 여인들을 돌보아 주려고까지 하였습니다. 다시 표범을 풀어 물게 하였습니다. 표범의 공격에도 살아남게 되어 결국 군인들의 칼에 찔리게 되었습니다. 갈비뼈를 심하게 찔려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어진 그녀는 검투사에게 목을 쳐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손을 떨고 있는 검투사에게 목을 내밀어 최후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페르페투아의 순교는 한 사람의 순교로 허무하게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순교의 피를 흘린 칼타고에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앙의 스승인 터투리안과 어거스틴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터투리안은 다음과 같은 위대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된다.”
조선의 교회를 가장 거룩하고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었던 것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지녔던 환난과 순교의 표지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은 성경 말씀 중에서 그 어느 말씀 보다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인 계2:10 말씀을 가장 보배로운 말씀으로 붙들고 환난과 순교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조선 교회를 가장 거룩하고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 반대로 감옥에 투옥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1939년 2월 첫 주일 산정현 교회로 달려가서 엎드려 기도한 후 주일 예배를 인도하면서 환난과 순교에 대한 마지막 설교를 했습니다. 그날 산정현 교회에서 주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에는 조만식 백인숙 안이숙 유계준 방계성 같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날 주기철 목사님은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그것이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가 되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위하여 열백 번 죽음은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년, 천년 산다 한들 그 무슨 삶이리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주님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을 모르는 체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 요한은 33세, 스데반은 청장년의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의 제단에 제물이 되어지이다. 장기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두 번에 주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일 년, 십 년, 계속되는 고난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말 한 마디만 타협하면 살려 주는데, 용감한 신자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이 연약한 약졸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할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 십자가! 오직 내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우상 때문에 정절을 잃어버리지 못합니다.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에 내 예루살렘아! 영광에 네게서 떠나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에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 끊어질 때에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길을 걷게 하옵시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조건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께 부탁하나이다. 아멘.”
이것은 설교라기보다는 한 영혼의 처절한 부르짖음이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이것은 스데반의 영광스러운 기도였고, ‘쿠오바디스 도미네’라고 질문하던 베드로의 참회의 기도였고, 사도 바울의 승리의 고백이었습니다. 이것이 조선 교회가 지녔던 환난과 순교의 표지였습니다. 바로 그 뒤를 손양원 목사님이 따라가셨습니다. 1950년 9월 28일 밤 11시 공산당에 의해서 총살당해 순교하신 손양원 목사님의 시신을 바라보면서 정양순 사모님은 다음과 같이 흐느끼면서 속삭였습니다. “오 당신 소원대로 되셨군요. 평소에 주기철 목사님을 그렇게도 부러워하셨는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평생 동안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시고, 손양원 목사가 소원하시던 순교를 허락해 주신 은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지녔던 신앙의 표지였고 조선교회가 지녔던 교회의 표지였습니다. 조선교회는 그 시초부터 1950년대 까지는 그래도 환난과 순교를 교회의 표지로 지니고 있었습니다. 회개도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부터 지난 50여 년 동안 한국교회는 환난과 순교를 모르는 세속화된 모습으로 변질해갔습니다. 회개도 점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부흥과 성장에만 모든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자기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회 자본주의가 등장하게 되었고 기업의 확장과 같은 지 교회 또는 지 성전의 확장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세속화 및 기업화 되어가고 있는 한국교회에 하나님께서 아프간 사태를 일어나게 하신 것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회개를 되찾고 환난과 순교의 정신을 되 찾으라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부족하고 부족한 사람이지만 아프간 사태가 일어난 후부터 아프간의 가즈니로 달려가서 고통 당하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 인질들과 고통을 함께 하가 싶은 간절한 마음을 품게 되었는데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탈레반들에게 인간적은 호소를 하다가 제가 대신 인질로 붙잡힐 각오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정부가 허락하지 않았고 말 못할 사정 때문에 그 일이 실행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 사태를 통해서 환난과 순교의 정신을 되새기게 되었는데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환난과 순교에 대해서 고백한 말씀들을 생각하면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환난과 순교를 가장 높이 예찬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후1장에서 사도 바울은 환난의 의미에 대해서 진술했는데 환난에 대해서 진술을 하면서 제일 먼저 사용한 말이 괴롭다는 말도 아니었고 싫다는 말도 아니었습니다. ‘찬송하리라’는 말이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1:3-9).
사도 바울은 여기서 자기가 받는 환난의 의미 네 가지를 진술했습니다. 첫째로 환난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된다고 진술했습니다. 둘째로 환난을 받으므로 환난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된다고 진술했습니다. 셋째로 환난을 받으므로 그리스도의 환난에 참예하게 된다고 진술했습니다. 넷째로 환난을 받으므로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된다고 진술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환난을 싫어하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환난을 좋아하고 즐거워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롬5:3).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구핍과 핍박과 곤난을 기뻐하노니”(고후12:10). 그리고 환난을 당당하게 맞았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 사도 바울은 환난을 당하는데 그치지 않고 순교를 사모하기까지 했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2:17).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
오늘 아침 참된 교회의 표지가 무엇인가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참된 교회가 지녀야 할 표지가 무엇인가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참된 교회가 지녀야 할 여러 가지 표지를 말할 수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표지는 주님 자신이 지녔던 표지인 십자가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지니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고후4:10). 여러분 모두가 문자적으로 다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여야 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죽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스데반 집사가 되어야 하고 페르페투아 여 성도가 되어야 하고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최소한 오늘의 한국교회가 환난과 순교의 정신을 되 찾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최소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가 지녀야 할 표지가 부와 명예가 아닌 환난과 순교라는 사실을 바로 가르치고, 최소한 한국교회의 몇몇 지도자들이 그 길을 걸어가므로 본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문자적으로 고난과 환난에 당하지 않는다면 지금 세계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난과 환난과 순교를 당하는 형제 자매들의 고난과 환난에 동참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너무 무정하고 너무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감사한 것은 저는 이번 아프간 사태로 인해서 우리의 지체가 당하는 고난과 환난과 순교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가슴으로 받으므로 말씀을 맺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하나님의 고난 프로그램
사도행전 8:1-8 / 이정익 목사
저를 농촌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제가 태어날 때는 우리집안의 가세가 한창 기울어 갈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린 시절을 부족한 것이 많은 채 살았습니다. 꿈도 제대로 피우지 못했고 꿈도 크게 갖지를 못했고 그래서 한때 방황도 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시고 어른들이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오늘 와서 생각해 보니 제가 농촌에서 태어나고 어려서 부족함을 경험하였고 또 한때 방황했던 기회를 가졌던 것들 모두가 다 제 인생에 유익하게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날의 고난의 삶들을 참 고맙게 생각하고 아주 유익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오늘 생각이 많은 사람이 되었고 마음에 여유가 많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그런 경험들이 오늘 남의 입장을 많이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지난날의 고난들은 생각해 보면 참 유익한 고난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고난이나 아픔 그리고 부족함은 때로 사람을 성숙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개인이나 교회나 기업이나 민족이나 신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난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저 개인의 경험에 비추어서 우리민족의 지난날의 고난도 똑같은 관점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민족도 지난날 고난을 많이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약하고 무지하고 힘이 없어서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날 역사를 보면 우리역사가 한스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왜 우리민족은 이렇게 당하기만 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좀 조용히 그리고 깊이 생각해 보면 여기에도 하나님의 깊으신 경륜과 뜻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읽어보면 더욱 그 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스데반이 무참하게 돌에 맞아 죽임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데반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뽑은 7집사 가운데 한사람입니다. 이 스데반이 돌아다니며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사도행전6장8절을 보면 “성령이 충만하여 다니며 큰 기사와 표적을 일으켰다”고 했습니다. 그 전도에 당시 제사장들도 개종하여 넘어왔습니다. 당시 레위인은 18,000명 정도였고 그중 제사장이 8천명 정도였습니다. 제자들과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전도하고 설교했을 때 제사장들이 개종하여 넘어올 정도였으니 일반인들은 얼마나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그때 바리새인들이 큰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스데반을 유인하여 회당에서 논쟁을 벌이게 하였고 그때 사람을 매수하여 스데반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위증(6:11)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을 끌고 죽이려 성 밖으로 나가 약 4m 되는 낭떠러지에서 밀쳐 떨어뜨렸으나죽지 않으니까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사도행전 8장1절을 보면 그 사건을 주동한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사도들과 기독교인을 핍박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사울의 핍박은 곧 바로 기독교인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고 그때부터 기독교인들의 수난이 시작되었고 피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수난은 기독교의 운명처럼 나타납니다. 기독교의 고난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환경이 바뀔 때마다 새 왕이 나타날 때 마다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가정에 기독교 들어갈 때에도 이 점이 나타납니다. 어느 집단에 기독교가 들어갈 때에도 어느 나라에나 기독교가 들어갈 때에는 통과의례처럼 고난과 핍박과 수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얼마나 저항이 심하고 수난이 심했습니까. 한국에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때 천주교에서는 제사문제만 가지고도 2만 명 여명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너무 많이 순교를 당하니까 천주교가 제사제도를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천주교가 제사제도를 그냥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동네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우리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1910년대 초 감리교 권사 딸로 우리 집에 시집을 왔습니다. 유교로 찌들은 우리집안을 하나씩 변화시켜 나갔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보니까 참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제사를 추도식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난리가 났습니다. 온 씨족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맞았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적당한 시점에 우리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안을 복음화 하는데 크게 기여를 해 주셨습니다. 오래 사셨으면 아마 어려웠을 것이고 아니면 훨씬 세월이 더 흘러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60년 만에 온 가문 전체가 복음화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도저히 믿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들이 다 복음화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단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그 죽음 후에 심한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3절을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야밤을 틈타 도망가기 시작하였고 전국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맨 정신으로는 갈 수 없는 사마리아 땅으로 도망간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너무 급하니까 사마리아 땅으로 가서 숨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생리는 어딘가에 가면 그냥 있지 않고 반드시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웁니다. 그것이 순서입니다. 오늘 세계 여러 나라로 퍼져나간 그리스도인들이 가서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웁니다. 그렇게 교회를 세운 것이 155개국에 약 5천여 개 교회가 됩니다.
스데반이 죽은 후 곧 바로 고난과 수난과 검거선풍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모두 전국으로 흩어졌습니다. 언뜻 보면 그냥 고난과 불행인 것 같이 보였는데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 결과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그리고 전국으로 또 이방 땅으로 전파되는 효과를 자져 온 것입니다. 그 고난이 없었더라면 유대인들은 오늘까지도 사마리아 땅에 전도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모여 안주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평안하면 움직이지 않고 주저앉아 뭉개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적당한 때에 이 세상에 사람들로 하여금 움직이도록 아픔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날 우리민족의 아픔의 역사도 좀 깊이 바라보면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고난의 역사 때문에 오늘 우리나라가 형성된 것입니다.
시대마다 지도자 나라들 활용
성경에 보면 큰 나라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 애굽이 나오고 바벨론이 나오고 메데와 바사가 나오고 헬라와 로마가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러시아와 미국과 중국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들을 예민하게 한번 눈여겨보면 하나님은 이 나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가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이 지도자 나라들을 통해서 복음의 흐름이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아득하지만 애굽, 바벨론, 메대와 바사, 헬라, 로마로 이러져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 섭리가 로마에서 영국을 중심한 구라파로 또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그리고 아시아로 와서 오늘 아시아 지역에서 복음과 하나님의 섭리가 멈추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여러분, 아시아를 보십시오. 지금까지 복음의 흐름이 줄기차게 전 세계를 한 바퀴 돌게 하시더니 오늘은 그 복음이 아시아 지역에서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합니다. 그리고 계속 앞으로 흘러가야 하는데 앞에 복음화가 되어야 할 여러 나라들 앞에서 그냥 멈추어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그리고 중국 신장지역인 티베트, 몽골, 위그루지역의 중국 남부지역, 또 알타이와 튜바 지역인 시베리아 전 지역,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등 모슬렘지역, 또 인도등과 같은 힌두교 지역들이 앞으로 복음이 뚫고 들어가야 할 지역들입니다. 그 지역을 동경 105도 지역이라고 부릅니다. 복음의 흐름이 계속 흘러오다가 그 지점을 앞에 두고 지금 멈추어있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지역들 중간지역에 우리 한국이 자리를 잡고 있고 그 한국이 오늘 이상하게도 복음의 강국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이 앞으로 뭔가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한국의 역할이 주어져 있다고 들 말하는 것입니다.
21세기 한국의 역할
앞으로 한국이 이들 나라들에게 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나라를 오래 전부터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지난날의 고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점을 발견하기 위해서 지난날의 우리민족의 역사를 한번 훑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난 한국민족의 발자취를 훑어보면 하나님이 우리민족을 훈련하시듯 훈련하셨구나 하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는 이스라엘민족이 세계에 가장 많이 퍼져 살아가는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의든 타의든 전 세계로 퍼져나가 살고 있는 민족입니다. 그렇게 퍼져나가 흩어져 살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그렇게 퍼져나간 이스라엘 민족은 나름대로 전 세계에서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으로 할 일을 다 해 왔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이 오늘 이스라엘 땅에서만 모여 살았더라면 오늘 원대한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파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도 한곳에 모여살기를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넓게 흩어져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데 한곳에 머물러 안주하니까 하나님은 환란을 통해서 세상에 흩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날의 환란도 고난도 알고 보면 하나님의 섭리의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은 우리 한국민족이 이스라엘민족을 제치고 가장 많이 세계로 흩어져 살고 있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21세기의 세계를 이끌고 갈 나라들을 사람들은 미국과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이라고 지칭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 네 나라에 가장 많이 퍼져서 살아가고 있는 민족이 한국민족으로 자그마치 540만 명입니다. 중국에 220만 명, 미국에 200만 명, 일본에 70만 명, 러시아에 50만 명이 나가 살고 있습니다. 그 정도의 숫자라면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정도의 인구라고 합니다. 효과적으로 인류를 위해 사랑하고 봉사를 실천할 수 있다면 대단한 파워가 될 수 있다는 숫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점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난날 역사에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민족을 강제로 세상에 흩어 놓으셨습니다. 고난이 아니면 흩어지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처럼 무서운 환란을 통해서 흩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민족이 반만년동안 조용히 살아왔습니다. 세상을 모르고 울안에 갇혀 있는 사람처럼 작은 나라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으로부터 36년 동안 식민지 생활을 하며 주권과 나라도 잃고 이름도 다 빼앗긴 채 살았습니다. 그 일본의 지배가 너무 고난스러우니까 견디다 못한 일부 사람들이 울타리를 넘어 북쪽 간도로 갔고 일부는 중국에 정착하여 살면서 민족을 형성하여 살았습니다. 그들을 오늘 우리는 조선족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지금 220만 명이나 됩니다. 그곳 북간도에서 살다가 더 북쪽으로 올라가 러시아에 정착한 사람들도 있고 그들이 다시 강제로 이송되어 거기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 사할린에서 혹은 중앙아시아에서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우리는 고려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지금 50만 명이나 됩니다. 또 6․25로 고난의 삶이 또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양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고아들이 또 세상으로 입양되어 흩어지기 시작하여 미국, 캐나다, 호주, 스위스, 스웨덴, 프랑스, 덴마크 등 15개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이 지금까지 14만 명이나 됩니다. 지금도 매년 3천 명씩 해외로 입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 희망이 없음을 알고 일찍 눈을 세계로 돌려 나가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미로 하와이로 미국으로 캐나다로 구라파 등 오늘 세계 150여 나라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의 수가 300여만 명이나 됩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으로 흩어진 우리민족의 디아스포라들이 자그마치 600여만 명이나 됩니다. 이들 대부분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작은 우리민족을 이 세상 150여 나라에 왜 이렇게 흩어놓으셨을까요. 평안하게 살면 흩어지지 않으니까 이 나라에 숫한 고난과 전쟁과 가난을 통해서 강제로 이 백성들을 흩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들이 눈을 좀 크게 뜨고 세상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고난 프로그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날 큰 핍박과 수난의 역사와 고난들이 왜 우리에게 주어졌는가라는 의문이 이렇게 풀리게 됩니다.
본문 사도행전 8장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니라,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여기 “흩어지니라”라는 말씀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핍박으로 흩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언뜻 볼 때는 재수 없어서 스데반이 죽임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받고 도망 다니는 신세처럼 보였지만 그 흩어짐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곳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이 흩어짐으로 인하여 넓은 지역에 복음이 확장되고 전파되었습니다. 사도행전8장4절을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말씀을 전하였다”고 했습니다.
복음이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30년 만에 예루살렘이 복음화 되었고 그 후 400년도 안되어 로마가 복음화 되었습니다. 그 복음이 한국에 들어와 100년 만에 천만 그리스도인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 흩어진 우리민족이 전 세계로 나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한국민족의 복음화로 현재 세계 180여 개국에 복음을 수출하고 있습니다.
지난 역사의 고난도 하나님 주신 선물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뒤를 돌아다보니까 “아 그랬구나”하는 깨달음이 주어집니다. 36년간 아픔을 당할 때는 “우리에게 무슨 죄가 있나”를 생각했었습니다. 아픔을 당할 때에도 “우리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를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극심한 가난 시대를 살아갈 때에도 “우리들이 무슨 악을 저질렀는가”라는 의문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그 환란의 역사가 지나고 난 오늘 생각해 보니까 그 고난들이 오늘 우리나라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60년 만에, 50여년 만에, 우리나라는 세계 12번째 무역대국으로 성장하였고 전 세계 180여 개국에 2만여 명의 선교사를 보내게 되었고 또 앞으로도 할 일이 너무 많이 주어진 우리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살아가면서 당하는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를 발견하고 해석하는 삶이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삶입니다. 지난날 역사를 잊을 만도 한데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은 거기에 그런 뜻과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난날 우리민족에게 뼈에 사무치는 고난을 주셨습니다. 그 고난의 역사 때문에 오늘 우리민족이 이렇게 세계화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며 순응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때 우리민족도 할 일을 다 하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 결과
행 8:1-3
스데반의 순교에 대한 두 가지 반응
스데반이 순교하자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❶ 슬퍼하고 애도하는 교인들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스데반을 장사지내고 크게 울었습니다. “크게 울었다” (loud lamentation)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의 미쉬나에 의하면 사형수의 시신을 장사하는 것은 허용되었지만 애도는 금지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이 스데반을 위해 크게 애도한 것은 스데반의 사형이 잘못된 것임을 드러낸 일입니다. 애도에 앞장 선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아마 예수님을 장사지냈던 아리마대 요셉이나, 공회원 니고데모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부활을 목격하고 함께 기도했던 오순절 교인들도 애도에 참여했을 겁니다. 슬플 때 함께 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입니다. 성경은 잔칫집보다 초상집을 찾으라고 합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전 7:2,4)
❷ 반면에 스데반이 순교하든지 말든지 무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순교가 감동만 주리라는 기대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신앙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내가 순교했기 때문에 신앙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감동받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마세요. 적대적인 사람들은 사람이 죽든지 말든지 여전히 적대적입니다. 기독교인이 순교했다고, 알카에다가 감동 받는 일은 없습니다. 북한에 국수 공장, 수액 공장 지어주고, 쌀과 비료를 주고, 현찰을 줬다고 감동받습니까? 밤낮 남한 사람 욕하고 멀쩡한 관광객에 총질하지 않습니까? 진실을 드러냈다고 마귀가 회개하지는 않습니다.
순교의 현장에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사울이 스데반을 죽이는 데 가담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 사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세상적으로 많이 배운 엘리트요 지식인입니다. 학자입니다. 로마 시민권자로 집안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는 종교인으로 당대 최고의 랍비였던 가말리엘의 제자입니다. 그럼에도 스승의 충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교양 있는 사람의 행동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성도 없는 사나운 승냥이처럼 사람을 사냥하러 다닙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악한 영에 사로잡히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희생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희생했으니 무슨 대가를 받게 될까? 내가 고난당하고 손해 봤으니 무슨 보상이 있을까? 전혀 기대하지 마세요. 그것에 불신 세상입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을 위해 순교할 뿐입니다.
확대되는 박해, 확산되는 복음
스데반의 순교로 박해는 더 심해졌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한 바로 그날에(on that day) 온 예루살렘 교회가 공격을 받았습니다. 왜 순교까지 했는데 더 박해가 심해지느냐고 질문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 내가 큰 고난을 당했는데 아무 결과가 없는가?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가?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뜻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미 이런 박해에 대해서 열두 제자들에게 예언하신 바 있습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10:17-23)
공회원들은 스데반을 죽인 기세를 몰아 즉시 예루살렘 교회 말살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스데반이 속한 교회는 예루살렘에 있는 헬라파 유대인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자연히 박해의 주된 대상도 헬라파 유대인 출신의 교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다시 각처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사도들 이외에 남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최후의 전사로써 예루살렘을 지켰습니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1세기 교회에서 근 100년 간 유대인의 교회는 존재가 미미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박해 때문에 교회가 무너졌나요? 정 반대입니다. 박해 때문에 교회는 확대되고 복음은 확산되었습니다. 박해가 더해졌다고 복음이 막히는 것은 아닙니다. 박해를 받는다고 하나님의 일이 막힌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은 확산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박해를 피해 흩어진 사람들은 사방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마리아에서, 안디옥에서, 소아시아 유럽까지! 전도의 주체는 사도들이 아닙니다. 스데반이나 빌립 같은 평신도들입니다. 사도가 막힐 때에 연약해 보이는 평신도들이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복음의 일군은 제한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무식한 사람이든 유식한 사람이든, 부자든 가난하든, 강자든 약자든 하나님은 누구나 들어 쓰십니다.
내 형편이 어떻게 되든지 하나님의 일은 계속됩니다. 이점을 잊지 마세요. 내가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주님은 성공하십니다. 내가 평안하든지 고생하든지 주님의 일은 진행됩니다. 요셉을 보세요. 요셉은 형들에게 배반당했습니다. 노예로 팔렸습니다.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셉의 고난 중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착착 진행하셨습니다. 야곱 가족을 애굽에 이주시켰습니다. 애굽에서 400년 간 번성할 수 있는 거주지를 준비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이주시킬 하나님 백성을 키워내셨습니다. 삼손은 살았을 때보다 죽을 때에 더 많은 적을 죽였습니다. 요셉이 실패하든지 성공하든지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이루어졌습니다. 삼손이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들을 징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편 때문에 주의 일을 포기하지 마세요. 주님의 일은 주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가족 구원 하는 일, 예배드리는 일, 기도하는 일, 전도하고 봉사하는 일 멈추지 마세요. 무슨 일 생겼다고 그만두지 마세요. 내 형편과 상관없이 주님은 주님의 일을 하십니다.
사울이라는 청년
마지막으로 주목할 것은 사울입니다. 사울은 교회의 박해자로 사도행전 초반에 등장합니다. 오늘 말씀에도 사울은 박해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3) “잔멸하다”는 말은 교회를 없앤다는 뜻입니다. 사울의 목표는 교회를 유대 땅에서 없애는 겁니다.
사울이 누구입니까? 사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입니다. 다소는 지금으로 말하면 터키 남부 지중해변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유다지파와 더불어 유대인의 순수성을 보존한 양대 지파중의 하나입니다. 북쪽의 열 지파는 주는 722년에 앗시리아에 멸망당하고 사방에 흩어졌습니다. 이방인들이 그들의 땅에 이주하여 혈통과 신앙이 흐려졌습니다. 남쪽의 유다 왕국 역시 주전 586년에 바빌론에게 멸망당했습니다. 그러나 앗시리아와는 달리 바빌론은 피정복민의 문화와 종교를 보존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지만 여호와 신앙을 보존했습니다. 이들이 바빌론에서 연구하고 만든 것이 바로 탈무드와 회당 예배입니다. 사울이 베냐민 지파인 것을 자랑한 것은 유대인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뜻입니다. 사울은 율법 수업을 철저히 받았습니다. 사울의 스승은 당대 제일의 랍비였던 가말리엘입니다. 사울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집안이 로마 사회에서도 꽤 부유했던 것 같습니다. 사울은 성격이 곧고 직선적이며, 민족의식이 투철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그럴듯한 사울이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악랄하게 탄압하는 데 앞장섰을까요? 몇 가지 추측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가 대단한 민족주의자였다는 점입니다. 그는 유대 민족에 애착을 가진 선민주의의 신봉자였습니다. 사울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독교는 유대 민족을 분열시키는 범죄자로 보였습니다. 둘째는 그의 율법주의입니다. 사울은 바리새파 유대인으로 율법에 익숙했습니다. 그의 눈으로 본다면 기독교는 유대교를 위협하는 이단이었습니다. 셋째는 그의 과격한 성격입니다. 그는 가만히 보고만 있는 관찰자가 아닙니다. 과격한 행동주의자입니다. 그는 스승인 가말리엘의 충고를 무시했습니다. 가말리엘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냥 놔두고 관찰하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막아도 소용없고,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아니면 놔둬도 소멸한다.”(행5:34-39)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는 것을 가만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붙잡아 가두는 일에 산헤드린의 위임장을 받았습니다. 그는 집집이 다니면서 남녀 불문하고 믿는 사람들을 색출하여 가두었습니다. 6.25때 완장 찬 공산당원들 보셨습니까? 이성을 잃고 아무나 끌어내 죽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사울은 공포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울이 잠시 후에 사도 바울로 변합니다! 교회를 없애려던 사람이 갑자기 사방에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됩니다. 사도행전은 전체가 28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이 순교할 때에 처음 등장합니다. 8장에서는 박해의 앞잡이로 열심히 뛰어다닙니다. 9장으로 가면 사울은 유대 땅을 떠나 시리아의 다메섹(다마스커스)까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갑니다.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서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압송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다메섹이 가까이 갔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강렬한 빛이 내려옵니다. 사울은 땅에 엎드러져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9:4-6) 사울은 사흘 밤낮을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를 통해 안수를 받고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그 때부터 사울은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가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가던 사람이 돌아올 때는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급격한 변화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도 놀라고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변화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13장 이후에는 전부가 다 사도 바울 이야기입니다.
사울은 바나바와 함께 최초의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를 세우고 부흥시키는 지도자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최초의 선교사가 됩니다. 바울은 세 차례에 걸쳐 전도 여행을 합니다. 제1차 여행은 구브로(지금의 키프로스 섬)를 거쳐 소아시아의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지역을 지나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제2차 여행은 1차에 방문했던 지역을 거쳐 유럽의 관문인 빌립보와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 베뢰아, 고린도, 아테네에 이르는 긴 여정이었습니다. 특히 고린도에서 오래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제3차 여행은 1차와 2차에 전도했던 지역을 방문하고 에베소에서 오래 머물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제3차 전도 여행 외에도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압송되어 로마에서 옥중 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네로 황제 때에 참수형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 기독교는 팔레스틴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의 업적은 그 뿐만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 27권 중에 사도 바울이 쓴 책이 절반에 이르는 13권입니다. 분량도 그렇지만 내용도 그렇습니다. 로마서부터 빌레몬서까지 바울이 쓴 성경은 가장 중요한 교리 책입니다. 구원론, 교회론, 기독론, 생활편의 모든 내용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어떤 비판 신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 가르침을 예수님보다 더 깊이 해석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바울은 기독교 신앙의 중요하고 깊이 있는 체계를 세웠다는 뜻입니다.
극단적인 박해자가 극단적인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있는 박해자들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즘 불교인들은 기독교가 편애를 받는다고 야단입니다. 종교 평등법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정말 대한민국에서 기독교가 불교보다 편애를 받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할 말은 많지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수많은 안티들이 덩달아 알지도 못하면서 교회를 욕합니다. 혹시 개인적으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가족들에게 압력을 받지는 않으십니까?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직장에서 오해를 사고 불이익을 받지는 않습니까? 염려 마세요. 하나님은 그런 상황에서 변함없이 복음을 전하십니다.
우리 교회 초창기에 어떤 분이 남편 모르게 교회에 출석하셨습니다. 남편이 알면 큰일이 난다고 했는데 정말 큰 일이 났습니다. 남편이 알고 노발대발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남편이 저를 만나자고 합니다. 저는 교회 개척을 하면서 무서운 사람들을 여러 차례 만났습니다. 한 밤중에 술 먹고 사택에 찾아와서 문을 발로 차면서 열어 달라고 소리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늘이 순교하는 날인가보다” 생각하면서 문을 열고 보니, 해병대 장교 출신이란 사람이 건장한 남자 둘을 거느리고 서 있습니다. 알고 보니 서로 포장마차에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이런 저런 경험을 가지고 교회를 반대하는 남편을 집으로 찾아 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내가 어떻게 하면 예수를 믿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런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어떤 남편은 아내가 교회에 다닌다고 새벽에 우리 교회 마당에 와서 성경책을 박박 찢어 수북이 쌓아 놓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믿을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 분은 예수님을 믿고 우리 교회 주보의 “성덕중앙교회”라는 제호를 써 주셔서 “정윤교회”로 바뀔 때까지 여러 해 동안 사용했었습니다. 반대자라고 미워하지 말고, 반대자라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변하여 예수 믿게 하십니다. 믿게 하실 뿐 아니라 전도자가 되게 하십니다. 오늘 내 주변에 있는 많은 반대자들이 사울처럼 바울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참고 인내하여 좋은 결과를 보게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