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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1948-1991)
온몸으로 시를 살다간 페미니스트
1948년 전남 해남 출생
1970년에 광주에서 나오는 <새전남>
<주간 전남> 의 사회부 기자로 활동
1975년 박남수 추천, <현대문학> 에 <연>, <부활과 그 이후>를 발표하며 문단 활동
1984년 - 기독교신문사, 크리스찬아카데미 출과 간사,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
1988년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 대학의 여성학 교수들과 결성한 여성문화운동 동인 '또 하나의 문화' (또문)에서 활동
/ 1991년 6월 9일 지리산 등반 도중(실족사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1979), <실락원 기행> (1981)
<초혼제> (1983), <이1 시대의 아벨> (1983), <눈물꽃> (1986), <지리산의 봄> (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1989), <여성해방출사표> (1990)
<광주의 눈물비> (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 (1991)
유고시집 -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1992)
초기시 - 기독교, 종교적 경향의 시
증기시 - 민중성과 여성성을 드러내면서 약자들에 대한
억압과 슬픔, 고통을 노래한 시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을 그런 사회로 향한 시
후기시 - 더불어 여성해방으로 시각을 넓힌 시
타자의 사랑에 대한 시 등
위기의 여자
-여성사연구 6
고정희
여자식으로 바둑판을 놨다가
남자식으로 수를 두는 날들이 있었다
여자식으로 씨를 뿌렸다가
남자식으로 추수하는 날들이 있었다
여자식으로 뿌리를 내렸다가
남자식으로 꽃피는 날들이 있었다
남자식으로 또 여자식으로
커다란 대문에는 빗장을 지르고
담장을 넘어가는 가지를 잘랐다
이 온전한 평화
이 온전한 행복
그러나 어느 날
여자식으로 사랑을 꿈꾸며
남자식으로 살아가는 날들이
우아한 중년의 식탁 위에
검고 무서운 예감을 엎질렀다
어둡고 불길한 예감 속에는
산발한 유령들이 만찬을 즐기고
사랑의 과일들이 무덤으로 누워
피묻은 달을 하관하고 있었다
먼데서 어른대는 황혼의 그림자
적막 속에 흔들리는 지상의 척도……
왜, 왜 사느냐고 메아리치는 강변에
여자 홀로 바라보는 배가 뜨고 있었다
여자가 뭉치면 새 세상 된다네 / 고정희
남자가 모여서 지배를 낳고
지배가 모여서 전쟁을 낳고
전쟁이 모여서 억압세상 낳았지
여자가 뭉치면 무엇이 되나?
여자가 뭉치면 사랑을 낳는다네
모든 여자는 생명을 낳네
모든 생명은 자유를 낳네
모든 자유는 해방을 낳네
모든 해방은 평화를 낳네
모든 평화는 살림을 낳네
모든 살림은 평등을 낳네
모든 평등은 행복을 낳는다네
여자가 뭉치면 무엇이 되나?
여자가 뭉치면 새 세상 된다네
매맞는 하느님 / 고정희
ㅡ여성사 연구 4
깡마른 여자가 처마 밑에서
술취한 사내에게 매를 맞고 있다
머리채를 끌리고 옷을 찢기면서
회오리바람처럼 나동그라지면서
음모의 진구렁에 붙박여
증오의 최루탄을 갈비뼈에 맞고 있다
속수무책의 달빛과 마주하여
짐승처럼 노예처럼 곤봉을 맞고 있다
여자 속에 든 어머니가 매를 맞는다
여자 속에 든 아버지가 매를 맞는다
여자 속에 든 형제자매지간이 매를 맞고 쓰러진다
여자 속에 든 할머니가 매맞고 쓰러지고 피를 흘린다
여자 속에 든 하느님이 매맞고 쓰러지고 피를 흘리며 비수를 꽂는다
여자 속에 든 한 나라의 뿌리가
매맞고 피 흘리고 비수를 꽂으며 윽 하고 죽는다
깊은 밤 사내는 폭력의 이불 밑에 잠들고
세상도 따라 들어가 잠들고
오뉴월 한 서린 여자의 넋 속에서
분노의 바이러스가 꽃처럼 피어나
무지개 빛깔로
이 지상의 모든 평화를 잠그고 있다
아아 하늘의 씨를 말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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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사랑 / 고정희(1948 ~ 1991)
그 한 번의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 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그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시평]
고정희 시인은 참으로 불꽃 같이 살다가 짧은 생을 마친 시인이다. 시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시인으로서의 책무와 시인으로서의 포부를 하루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산 시인이다.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한신대 본교가 있는 수유리 일대를 떠나지 않고, 한겨울에도 단칸방에 머물며, 치열하게 사유하고, 책을 읽고, 시를 쓰던 시인이었다.
사람의 삶이란 늘 이별이라는 현실과 조우하며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별’이라는 아픔을 겪으며, 그러나 그 아픔이 궁극적으로는 엄혹한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하는 힘으로 우리의 내면을 지켜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별의 아픔은 때로는 힘겹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을 허물기도 하고, 마음과 마음을 헤집기도 하며, 소백산 한쪽을 들어 올릴, 그러한 포옹을 하며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그윽한 진실을 가슴에 지니고, 이러함이 일생을 버티게 할, 그러한 힘이 됨을, 우리 모두 내면에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음이 우리네의 삶인지도 모른다. 그 삶이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슬픈 것이지만, 우리가 감내해야 할, 그런 몫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으며 사는 것, 이가 바로 우리네 삶 아니겠는가.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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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aver.me/FXwI1NvU
1948년 전남 해남 출생
한국신학대학을 졸업
교수 잡지사 기자 등을 거쳐 『또 하나의 문화』 창간 동인
『여성신문』초대 편집주간을 역임
1991년 6월 지리산에서 불의의 사고로 아까운 나이에 타계
1975년 『현대시학』 추천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광주의 눈물비』(1990) 『여성 해방 출사표』(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
강가에서 / 고정희
할 말이 차츰 없어지고
다시는 편지도 쓸 수 없는 날이 왔습니다
유유히 내 생을 가로질러 흐르는
유년의 푸른 풀밭 강둑에 나와
물이 흐르는 쪽으로
오매불망 그대에게 주고 싶은 마음 한쪽 뚝 떼어
가거라,가거라 실어보내니
그 위에 홀연히 햇빛 부서지는 모습
그 위에 남서풍이 입맞춤하는 모습
바라보는 일로도 해저물었습니다
불현듯 강 건너 빈 집에 불이 켜지고
사립에 그대 영혼 같은 노을이 걸리니
바위틈에 매어놓은 목란배 한 척
황혼을 따라
그대 사는 쪽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관계 / 고정희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 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번째 회신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거다 천기를 누설하고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횡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을 가질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 여든 아홉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 가끔
들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히끗히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다.
땅의 사람들 1 / 고정희
겨울 숲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도시에서 지금 돌아온 사람들은
폭설주의보가 매달린 겨울 숲에서
모닥불을 지펴놓고
대륙에서 불어오는 차가움을 녹이며
조금씩 뼛속으로 파고드는 추위를 견디며
자기 몫의 봄소식에 못질을 하고 있다
물푸레나무 숲을 흔드는
이 지상의 추위에 못질을 하고 있다
가까이 오라, 죽음이여
동구 밖에 당도하는 새벽 기차를 위하여
힘이 끝난 폐차처럼 누워 있는 아득한 철길 위에
새로운 각목으로 누워야 하리
거친 바람 속에서 밤이 깊었고
겨울 숲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모닥불이 어둠을 둥글게 자른 뒤
원으로 깍지낀 사람들의 등뒤에서
무수한 설화가
살아 남은 자의 슬픔으로 서걱거린다
꿈꾸는 가을 노래 / 고정희
들녘에 고개 숙인 그대 생각 따다가 반가운 손님 밥
을 짓고 코스모스 꽃길에 핀 그대 사랑 따다가 정다운
사람 술잔에 띄우니,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늠연히
다가오는 가을 하늘 밑 시월의 선연한 햇빛으로 광내
며 깊어진 우리 사랑 쟁쟁쟁 흘러가네 그윽한 산그림
자 어질머리 뒤로 하고 무르익은 우리 사랑 아득히 흘
러가네 그 위에 황하가 서로 흘러 들어와 서쪽 곤륜산
맥 열어 놓으니, 만리에 용솟는 물보라 동쪽 금강산맥
천봉을 우러르네.
위기의 여자 / 고정희
여자식으로 바둑판을 놨다가
남자식으로 수를 두는 날들이 있었다
여자식으로 씨를 뿌렸다가
남자식으로 추수하는 날들이 있었다
여자식으로 뿌리를 내렸다가
남자식으로 꽃피는 날들이 있었다
남자식으로 또 여자식으로
커다란 대문에는 빗장을 지르고
담장을 넘어가는 가지를 잘랐다
이 온전한 평화
이 온전한 행복
그러나 어느 날
여자식으로 사랑을 꿈꾸며
남자식으로 살아가는 날들이
우아한 중년의 식탁 위에
검고 무서운 예감을 엎질렀다
어둡고 불길한 예감 속에는
산발한 유령들이 만찬을 즐기고
사랑의 과일들이 무덤으로 누워
피묻은 달을 하관하고 있었다
먼데서 어른대는 황혼의 그림자
적막 속에 흔들리는 지상의 척도……
왜, 왜 사느냐고 메아리치는 강변에
여자 홀로 바라보는 배가 뜨고 있었다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 고정희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 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지요
지울수 없는 얼굴 / 고정희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와 사는 일인가 / 고정희
―외경읽기
어린 딸들이 받아쓰는 훈육 노트에는
여자가 되어라
여자가 되어라…… 씌어 있다
어린 딸들이 여자가 되기 위해
손발에 돋은 날개를 자르는 동안
여자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발톱이 된다
일하는 여자들이 받아쓰는 교양강좌 노트에는
직장의 꽃이 되어라
일터의 꽃이 되어라 …… 씌어 있다
일터의 여자들이 꽃이 되기 위해
손톱을 자르고 리본을 꽂고
얼굴에 지분을 바르는 동안
꽃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이빨이 된다
신부들이 받아쓰는 주부교실 가훈에는
사랑의 여신이 되어라
일부종신의 여신이 되어라 …… 씌어 있다
신부들이 사랑의 여신이 되기 위해
콩나물을 다듬고 새우튀김을 만들고 저잣거리를 헤매는 동안
사랑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기상이 된다
철학이 여자를 불러 사자가 되고
권력이 여자를 불러 사자가 되고
종교가 여자를 불러 사자로 둔갑한다
그리하여 여자가 되는 것은
한 마리 살진 사자와 사는 일이다?
여자가 되는 것은
두 마리 으르렁거리는 사자 옆에 잠들고
여자가 되는 것은
세 마리 네 마리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새끼를 낳는 일이다?
그러니 여자여
그대 여자 되는 것을 거부한다면
사자의 발톱은 평화?
사자의 이빨은 고요?
사자의 기상은 열반?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 고정희
고요하여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무심히 지나는 출근버스 속에서도
추운 이들 곁에
따뜻한 차 한잔 끓는 것이 보이고
울렁거려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여수 앞바다 오동도쯤에서
춘설 속의 적동백 화드득
화드득 툭 터지는 소리 들리고
눈물겨워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중국 산동성에서 날아온 제비들
쓸쓸한 처마, 폐허의 처마 밑에
자유의 둥지
사랑의 둥지
부드러운 혁명의 둥지
하나 둘 트는 것이 보이고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게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低音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그리움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이 되어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 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꿈의 해저로 내려가는 사다리
그 어딘가에 너는 산다고 했다
그곳에 카메라를 내리고
나는 수백 번의 셔터를 눌렀다
너의 가슴을 담기 위하여
너의 아픔에 가까이 가기 위하여
물푸레 사이에서 셔터를 누르고
돌고래떼와 암초 사이에서
찰칵찰칵 셔터를 눌렀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수없는 나날이 셔터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꿈의 현상소에 당도했을 때
오오 그러나 너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
것이다
겨울 사랑 / 고정희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강물에 빠진 달을 보러 가듯 / 고정희
강물에 빠진 달을 보러 가듯
새벽에 당신 사는 집으로 갑니다.
깨끗한 바람에 옷깃을 부풀리며
고개를 수그러뜨리고 말없이 걷는 동안
나는 생각합니다.
어제 부친 편지는 잘 도착되었을까
첫 줄에서 끝 줄까지 불편함은 없었을까
아직도 문은 열어두지 않았을까
아예 열쇠 수리공을 부를까
아니야, 그건 일종의 폭력이야
새벽에 어울리는 단정한 말들만이
내가 그에게 매달리는 희망인가?
신은 그 희망으로 목걸이를 약속하셨지
눈물로 혼을 씻는 자에게만 주시는 목걸이
아침이슬이 몸에 오싹하도록 걷고 또 걸어
나는 당신 집 앞에 발걸음을 멈춥니다.
골목은 고요하고 문은 굳게 닫겨 있습니다.
삼백여든아홉 번째 부자를 누르지만
아무 인기척도 들리지 않습니다.
품속에 간직한 초설 같은 편지 한장
문틈에 꽂아놓고 하늘을 봅니다.
쓸쓸한 날의 연가 / 고정희
내 흉곽에 외로움의 지도 한장
그려지는 날이면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봄 여름 가을 겨울 편지를 쓰네
갈비뼈에 철썩이는 외로움으로는
그대 간절하다 새벽편지를 쓰고
간에 들고나는 외로움으로는
아직 그대 기다린다 저녁편지를 쓰네
때론 비유법으로 혹은 직설법으로
그대 사랑해 꽃도장을 찍은 뒤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부치네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소리 편에
바람 부는 날은 바람 부는 소리 편에
아침에 부치고
저녁에도 부치네
아아 그때마다 누가 보냈을까
이 세상 지나가는 기차표 한 장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네
포옹 / 고정희
사랑하는 사람이여 세모난 사람이나 네모난 사람이나 둥
근 사람이나 제각기의 영혼 속에 촛불 하나씩 타오르는 이
유 올리브 꽃잎으로 뚝뚝 지는 밤입니다
지리산의 봄 / 고정희
남원에서 섬진강 허리를 지나며
갈대밭에 엎드린 남서풍 너머로
번뜩이며 일어서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 한자락이 따라와
나의 갈비뼈 사이에 흐르는
축축한 외로움을 들추고
산목련 한 송이 터뜨려 놓습니다
온몸을 싸고도는 이 서늘한 향기,
뱀사골 산정에 푸르게 걸린 뒤
오월의 찬란한 햇빛이
슬픈 깃털을 일으켜 세우며
신록 사이로 길게 내려와
그대에게 가는 길을 열어줍니다
아득한 능선에 서 계시는 그대여
우르르우르르 우뢰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앞서가는 그대 따라 협곡을 오르면
삼십 년 벗지 못한 끈끈한 어둠이
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내리고
육천 매듭 풀려나간 모세혈관에서
철철 샘물이 흐르고
더웁게 달궈진 살과 뼈 사이
확 만개한 오랑캐꽃 웃음소리
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갑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합니다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 고정희
고요하여라
너를 내가슴에 품고 있으면
무심히 지나는 출근 버스 속에서도
추운이들 곁에
따뜻한 차 한잔 끓이는 것이 보이고
울렁거려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여수 앞바다 오동도쯤에서
춘설속에 적동백 화드득
화드득 툭 터지는 소리 들리고
눈물겨워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중국 산동성에서 날아온 제비들
쓸쓸한 처마,폐허의 처마밑에
자유의 둥지
사랑의 둥지
부드러운 혁명의 둥지
하나둘 트인것이 보이고
당신 가슴에 내 목을 묻을 때 / 고정희
아아 당신 가슴에 내 고단함 묻을 때 나는 천국의 사과꽃밭을
지나가네 첫 동트는 햇살에 두 팔을 벌리듯 그 맑고 밝은 믿음
에 기대어 나는 애틋하고 아련한 추억의 강기슭을 내려가네 닻
을 내리는 편안함으로 당신 목이 내 목에 감기고 내 목이 당신
목에 감길 때 아아 날개 흰 새떼들 날아올라 천국의 사과꽃밭과
수선화 꽃밭에서 사랑의 명주실을 나르는 모습 황홀하네
묵상 / 고정희
잔설이 분분한 겨울 아침에
출근버스에 기대앉아
그대 계신 쪽이거니 시선을 보내면
언제나 거기
적막한 산천이 놓여 있습니다
고향처럼 머나먼 곳을 향하여
차는 달리고 또 달립니다
나와 엇갈리는 수십개의 길들이
무심하라 무심하라 고함치기도 하고
차와 엇갈리는 수만 가닥 바람이
떠나라 떠나거라 떠나거라....
차창에 하얀 성애를 피웁니다
나는 가까스로 성애를 긁어 내고 다시
당신오는 쪽이거니 가슴을 열면
언제나 거기
끝 모를 쓸쓸함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운무에 가리운 나지막한 야산들이
희미한 햇빛에 습기 말리는 아침
무막한 슬픔으로 비어있는
저 들판이
내게 오는 당신 마음 같아서
나는 왠지 눈물이 납니다
사랑법 첫째 / 고정희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멩이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이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안 되겠기에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르는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 복판에 매달이 놓습니다.
생명 / 고정희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 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 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돗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천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 고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가을 편지 / 고정희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읍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읍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홀할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해 열린 문 닫아버렸읍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읍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버렸읍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읍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
북한강 기슭에서 / 고정희
위로받고 싶은 사람에게서 위로받지 못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의 두 눈에서는 북한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로 등을 기대고 싶은 사람에게서 등을 기대지 못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의 두 눈에서는 북한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건너지 못할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미루나무 잎새처럼 안타까이 손 흔드는 두 눈에서는 북한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상에 안식이 깃드는 황혼녘이면 두 눈에 흐르는 강물들 모여 구만리 아득한 뱃길을 트고 깊으나 깊은 수심을 만들어 그리운 이름들 별빛으로 흔들리게 하고 끝끝내 못한 이야기들 자욱한 물안개로 피워올리는 북한강 기슭에서,
사랑하는 이여 내 생애 적셔줄 가장 큰 강물 또한 당신 두 눈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꿈꾸는 가을 노래 / 고정희
들녘에 고개 숙인 그대 생각 따다가 반가운 손님 밥
을 짓고 코스모스 꽃길에 핀 그대 사랑 따다가 정다운
사람 술잔에 띄우니,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늠연히
다가오는 가을 하늘 밑 시월의 선연한 햇빛으로 광내
며 깊어진 우리 사랑 쟁쟁쟁 흘러가네 그윽한 산그림
자 어질머리 뒤로 하고 무르익은 우리 사랑 아득히 흘
러가네 그 위에 황하가 서로 흘러 들어와 서쪽 곤륜산
맥 열어 놓으니, 만리에 용솟는 물보라 동쪽 금강산맥
천봉을 우러르네.
서 시 / 고정희
제 삶의 무게 지고 산을 오른다.
더는 오를 수 없는 봉우리에 주저 앉아
철철 샘 솟는 땀을 씻으면, 거기
내 삶의 무게 받아
능선에 푸르게 걸어 주네, 산
이승의 서러움 지고 산을 오르다.
열두 봉 솟아 있는 서러움에 기대어
제 키만한 서러움 벗으면, 거기
내 서러움 짐 받아
열두 계곡 맑은 물로 흩어 주네, 산산
쓸쓸한 나날들 지고 산에 오르다.
산꽃 들꽃 어지러운 능선과 마주쳐
네 생애만한 쓸쓸함 묻으면, 거기
내 쓸쓸한 짐 받아
부드럽고 융융한 품 만들어 주네, 산산산
저 역사의 물레에 혁명의 길을 잣듯
사람은 손잡아 서로 사랑의 길을 잣는 것일까
다시 넘어가야 할 산길에 서서
뼛속까지 사무치는 그대 생각에 울면, 거기
내 사랑의 눈물 받아
눈부신 철쭉꽃밭 열어 주네, 산,산,산
독신자 / 고정희
환절기의 옷장을 정리하듯
애정의 물꼬를 하나 둘 방류하는 밤이면
이제 내게 남아 있는 길,
내가 가야할 저만치 길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크고 넓은 세상에
객사인지 횡사인지 모를 한 독신자의 시신이
기나긴 사연의 흰 시트에 덮이고
내가 잠시도 잊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달려와
지상의 작별을 노래하는 모습 보인다
그러므로 모든 육신은 풀과 같고
모든 영혼은 풀잎 위의 이슬과 같은 것,
풀도 이슬도 우주로 돌아가, 돌아가
강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어라
강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어라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이어라
잊어야 할까봐
나는 너를 잊어야 할까봐
아무리 붙잡아도 소용없으니까
하느님 보시기에 마땅합니까?
오 하느님
죽음은 단숨에 맞이해야 하는데
이슬처럼 단숨에 사라져
푸른 강물에 섞였으면 하는데요
뒤늦게 달려온 어머니가
내 시신에 염하시며 우신다
내 시신에 수의를 입히시며 우신다
저 칼날같은 세상을 걸어오면서
몸이 상하지 않았구나, 다행이구나
내 두 눈을 감기신다
쓸쓸함이 따뜻함에게 / 고정희
언제부턴가 나는
따뜻한 세상 하나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추운 거리에서 돌아와도, 거기
내 마음과 그대 마음 맞물려 넣으면
아름다운 모닥불로 타오르는 세상,
불그림자 멀리멀리
얼음장을 녹이고 노여움을 녹이고
가시철망 담벼락을 와르르 녹여
부드러운 당물로 깊어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대 따뜻함에 내 쓸쓸함을 기대거나
내 따뜻함에 그대 쓸쓸함을 기대어
우리 삶의 둥지를 따로 틀 필요 없다면
곤륜산 가는 길이 멀지 않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내 피가 너무 따뜻하여
그대 쓸쓸함이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쓸쓸함과 내 따뜻함이
물과 기름으로 외롭습니다.
내가 너무 쓸쓸하여
그대 따뜻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따뜻함과 내 쓸쓸함이
화산과 빙산으로 좌초합니다.
오 진실로 원하고 원하옵기는
그대 가슴속에 든 화산과
내 가슴속에 든 빙산이 제풀에 만나
곤륜산 가는 길 트는 일입니다.
한쪽으로 만장봉 계곡물 풀어
우거진 사랑 발 담그게 하고
한쪽으로 선연한 능선 좌우에
마가목 구엽초 오가피 다래눈
저너기 떡취 얼러지나물함께
따뜻한 세상 한번 어우르는 일입니다.
그게 뜻만으로 되질 않습니다.
따뜻한 세상에 지금 사시는 분은
그 길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