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마선은 달무리 얼룩진 금잔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원제 : The Effect of Gamma Rays on Man-in-the-Moon Marigolds
1972년 미국영화
감독 : 폴 뉴만
원작 : 폴 진델
음악 : 모리스 자르
출연 : 조안 우드워드, 넬 팟츠, 로버타 월락
주디스 로우리, 데이비드 스필버그, 리처드 벤추라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감마선은 달무리 얼룩진 금잔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참 놀랍게 긴 제목이죠. 적당히 줄일 수도 있죠. '감마선이 금잔화에 미치는 영향' 정도로.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유명한 제목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영화보다 연극으로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졌는데 영화로는 1981년 1월에 딱 한 번 TV 방영된 기록만 있습니다. 대신 연극으로는 꽤 많이 공연되었습니다. 연극으로 공연된 기록만 봐도 1978년, 81년, 82년, 86년, 87년, 89년, 90년에 공연되었습니다. 거의 80년대 내내 공연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렇게 오래도록 장기 공연된 원작의 우리나라 공연 제목이 10여년 이상 사용되었는데 맘대로 바꿔서는 안되겠죠.
어릴 때, 꽤 오래전에 친구에게서 들어서 알게 된 제목인데 공연 제목은 훨씬 나중에 알았습니다. 무슨 영화일까 궁금했지요. 사실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진 않습니다. 나름 유명배우인 조안 우드워드 주연이지만 그다지 좋아하는 배우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이자 50-70년대의 슈퍼스타인 폴 뉴만이 이 영화와 연관이 있습니다. 바로 이 영화의 '감독' 입니다.
배우 폴 뉴만이 아니라 감독 폴 뉴만, 이미 로버트 레드포드, 클린트 이스트우드, 워렌 비티 등 감독으로서도 배우로서도 모두 성공한 인물들이 보기 드물게 있는데 그들에 비해서 '폴 뉴만 감독'은 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TV 영화 포함 총 6편을 감독했습니다. 그런데 모두 우리나라 미개봉작입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그의 감독작품이 덜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그중 호평작들도 몇 되고, 아내인 조안 우드워드가 주연한 작품이 4편입니다. 폴 뉴만이 배우 겸 감독으로 출연한 작품은 '스탬퍼가의 대결'로 알려진(한 편으로는 "나의 푸른 대지" 로도 알려졌습니다.) 작품 포함 두 편 뿐입니다. 즉 4편은 순수 감독작품이고 그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호평받은 작품이 이 지지리도 긴 제목인 '감마선은 달무리 얼룩진 금잔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입니다.
이 작품도 아내인 조안 우드워드 주연입니다. 상당한 열연을 하지요. 사실상 원톱 주연. 폴 뉴만은 '내일을 향해 쏴라' '스팅' '타워링' 등에 주연한 할리우드의 대표적 흥행배우지만 감독으로는 전혀 흥행에 신경을 안 썼습니다. 즉 감독으로서는 하고 싶은 대로, 흥행 신경 안쓰고 만들었지요. 조안 우드워드는 이 작품으로 무려 칸 영화제 여주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미 '이브의 세 얼굴(57)' 로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은 바 있으니 상복이 있는 배우죠.
1972년 조안 우드워드는 42세였습니다. 여배우로서 중년에 접어드는 나이지요. 아무리 중년이지만 기본적으로 여배우는 아름답거나 우아하게 나오고 싶은 욕망이 당연히 있을텐데 이 영화에서 폴 뉴만은 아내인 조안 우드워드를 최대한 못나보이게 그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역할 자체가 덜 떨어진 여성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 영화에 출연 당시 조안 우드워드는 이 역할을 연기하는 걸 싫어했다죠. 이 부부가 함께 본 연극에서 감명을 받아서 폴 뉴만이 직접 연출을 한 것이고 자기 아내를 주연으로 출연시킨 겁니다. 흥행성이 있는 영화가 아니니 일급 여배우들이 출연할 리는 없고, 그나마도 여주인공이 비호감의 역할이고, 다행히 폴 뉴만은 조안 우드워드라는 아내가 있었으니 예쁘거나 우아한 역할이 아니라도 나름 이름값있는 여배우를 출연시킬 수 있었던 겁니다.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희망이라곤 안 보이는 한심한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입니다. 조안 우드워드가 맡은 배역은 베아트리스 라는 중년 여인. 혼자서 두 딸을 키우는 여자입니다. 남편과는 이혼했고 그 이후 사별했지요. 딱히 직업도 없고 집은 쓰레기통처럼 더럽고, 먹고 살기 위해서 돌보기 어려운 나이 든 할머니 하나를 자기 집에서 돌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무능한 엄마가 너무 늙어서 말하지도 걷지도 못하는 할머니를 제대로 돌볼 리는 만무하지만 그냥 최소한의 생계비 마련을 위해서 이 노인을 떠맡은 것이지요. 그 외에도 술과 담배에 쩔어사는 베아트리스는 신문 광고를 뒤지며 무슨 건수가 될만한 것을 찾으며 살지만 늘 허탕이었습니다.
엄마가 이 모양이니 큰 딸 루스도 삐딱합니다. 절망적인 자기 집의 현실을 알고 냉소적이며 엄마를 부끄러워 합니다. 그리고 간질로 발작하는 증세도 있어요. 역시나 모전여전처럼 절망적인 딸 입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둘째 딸 마틸다만 아직 순수하고 정상적입니다. 루스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마틸다는 이 더럽고 답답하고 숨쉬기조차 힘겨운 쓰레기같은 집에서 토끼를 키우고 학교 과제인 식물 키우는 실험을 하는 두 가지 낙으로 살고 있는데 이 두 취미는 마틸다에게 삶의 활력이고 꽤 열심히 집중하는 부분이기도 하죠. 하지만 이런 마틸다의 그나마의 가능성에 대해서 베아트리스는 오히려 핀잔과 면박을 주며 사기를 꺾습니다.
참 절망적이고 안쓰러운 내용이지요. 베아트리스 캐릭터는 미운 캐릭터라기 보다는 참 불쌍하고 안된 캐릭터에요. 뭔가 영화에서 새로운 희망이 샘솟는 듯 하면 바로 약한 불씨처럼 꺼저 버립니다. 이런 엄마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극을 하듯 흉내내는 루스의 모습도 딱하고, 카페를 차려서 치즈케잌을 팔겠다는 희망으로 죽은 남편의 형제를 찾아가 카페 차릴 돈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소리소리 지르는 베아트리스의 모습은 정말 안쓰럽습니다. 이렇게 답없고 불쌍한 캐릭터가 주인공인 경우도 드물지요.
그런데 식물을 키우며 감마선이 씨앗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한 마틸다는 이 과제를 학교 과학축제에 냈고, 수백명의 학생 중에서 최종 우승후보 5명에 선발됩니다. 절망스럽고 답없는 엄마와 착하고 영민한 딸, 너무 대조적이지요. 그래서 베아트리스는 그 사실을 알게 되고는 오히려 엄마 눈치보느라 안절부절하는 마틸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다른 엄마들처럼 발표회에 참석해 줄 생각을 합니다. 물론 또 다른 사고가 일어나지만.
영화제목은 마틸다가 발표하는 과제의 내용에서 따온 것입니다. 마틸다의 실험에서 감마선을 전혀 쬐지 않은 씨앗과 조금 쐰 씨앗, 그리고 감마선에 많이 노출된 씨앗이 모두 다르게 자랍니다. 감마선은 씨앗을 돌연변이 식물로 키우고 많이 노출된 씨앗일수록 더 심한 돌연변이 식물이 되죠. 마틸다는 이 실험을 통해서 좀 과장하면 일종의 '우주의 신비'를 깨우칩니다. 좀 자세히 말하면 '원자의 신비' 우리가 사는 세상, 이 우주만물도 결국 감마선과 씨앗의 관계와 같다는 것. 인간도 결국 '사랑'이라는 감마선을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서 잘 자랄 수도 있고 잘못 자랄 수도 있다, 뭐 이런 교훈을 전달하려는 내용 아닐까 싶네요. 마틸다도 아마 그런 진리 포함 상당히 많은 것을 깨달은 것 같고. 미래의 계획에 대해서도 이 실험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니.
지금 우리나라도 원전 문제로 한 때 시끄러웠고, 요즘도 후쿠시마 방류수 문제로 시끌합니다. 이 영화에서 마틸다가 발표한 내용도 연관이 있습니다. 방사능을 잘 다루면 참으로 신비롭고 아름다울 수 있지만 잘못 다루면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고. 아마도 이 작품의 원작자인 폴 진델은 원자력의 유용함과 핵폭탄의 위험, 이런 양면성을 느끼고 이 작품을 쓴게 아닐까 싶네요. 잘 쓰면 유용한 자원으로 잘못 쓰면 인류를 멸망시킬 핵무기로.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베아트리스처럼 세상을 암담하게 살아갈 수도 있고, 마틸다 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소박한 희망을 키워나갈 수 있고.
영화의 엔딩에 그마나 베아트리스가 나름 새출발을 하려고 희망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오히려 루스는 여전히 냉소적으로 엄마를 바라봅니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마틸다의 독백 "엄마, 난 세상을 증오하지 않아' 인데 연극원작은 좀 다르다고 합니다. 폴 뉴만 감독은 절망적인 연극의 결말을 살짝 희망의 씨앗을 띄우며 끝내려고 한 것 같습니다.
원작자 폴 진델은 우리나라에 개봉된 '폭주기관차'와 '마리아스 러버'를 각색했던 인물이기도 하며 1971년 발표한 '감마선은 달무리 얼룩진 금잔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로 희곡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고 합니다. 1년 뒤 폴 뉴만에 의해서 바로 영화회된 것이죠. 영화는 우리나라에 개봉이 안되었지만(보면 당연한 느낌입니다. 이 절망적인 중년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흥행성 제로의 영화가 수입될 리는 없죠) 연극은 70년대 후반부터 여러차례 공연되었으니 작품 자체는 완전 낯설었던 것은 아닌 셈이죠.
호감도 제로의 실패한 삶을 사는 세파에 찌들대로 찌든 여주인공을 연기한 조안 우드워드는 이런 아름답지 못한 역할이었지만 칸 영화제 주연상을 수상하여 그 보답을 톡톡히 받은 셈입니다. 폴 뉴만도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은 셈이고.
희곡이 원작인 만큼 대사의 중요성이 높은 영화라서 도전하기가 어려운 작품이었지만 오랜 숙고 끝에 아주 신중히 고른 영화입니다. 과연 영화의 대사를 얼마나 제 스스로 소화시켰는가는 모르겠지만 이런 고급진 시나리오와 깊이있는 내용의 영화를 보는 것도 도전이면서 행운입니다. 다 보고 나니 스스로 대견스러운 느낌까지 드네요.
이 영화는 마틸다의 '과제의 결론'으로 마무리되는 셈인데, 저도 결론을 짓는다면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자' 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상에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중년의 베아트리스보다 훨씬 철이 든 10대 소녀인 마틸다처럼. 천국과 지옥은 신이 인간을 골라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제발로 들어가는 것일 겁니다. 양쪽 다 문은 활짝 열려있을 것입니다.
ps1 : 감마선이라고 많이 들어는 봤지만 뭔지는 자세히 관심을 안 가졌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핵에서 방출되는 빛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즉 방사선의 일종이지요. 핵이라는 건 정말 인간이 발견한 오묘한 물질이지요. 에너지도 만들고 폭탄도 만들고 위험하면서도 유용한 것이니.
ps2 : 폴 뉴만과 조안 우드워드는 할리우드의 대표적 모범 부부죠. 조안 우드워드는 폴 뉴만이 첫 남편이었고 50년을 해후했으니. 폴 뉴만은 두 번째 아내가 조안 우드워드였습니다.
ps3 : 둘째 딸 마틸다를 연기한 넬 팟츠는 폴 뉴만과 조안 우드워드 부부의 친딸입니다. 그래서 본명은 엘리너 테레사 뉴만인데 배우로서는 넬 팟츠 라는 이름은 썼지요. 폴 뉴만 감독작에만 딱 두 편, 아역으로 출연했으니 뭐 정식 배우라고 할 수는 없죠.
ps4 : 확실히 여자는 꾸미기 나름이라는 것. 그것도 '헤어스타일'이 많이 좌우한다는 것을 오프닝의 가발 쓴 조안 우드워드와 캐릭터에 집중한 조안 우드워드의 모습의 차이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같은 배우를 이렇게 다르게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니.
좌측은 나름 아름다운 중년 여배우 느낌의 분위기
중앙은 평범하고 드센 느낌의 중년 여인
오른쪽은 천박하고 우스꽝스런 모습
같은 영화에서 이렇게 다른 분위기를 낸 조안 우드워드
[출처] 감마선은 달무리 얼룩진 금잔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The Effect of Gamma Rays on Man-in-the-Moon Marigolds, 72년)|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