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울렸다
이윤학
제법 덩치가 큰 쥐였으리라
사료 한 알 주워 먹으려다 그만,
끈끈이와 한몸이 되었으리라
끈끈이를 뒤집어쓰고
데굴데굴 굴렀으리라
구멍 앞까지 굴렀으리라
구멍 속으로 기어들었으리라
털이 뽑히고 가죽이 늘어나
몸이 헐렁해질 때까지
울음소리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끈끈이로 구멍을 틀어막았으리라
자신의 구멍으로 사라진 쥐들을 떠올렸다
다시는 그 구멍으로 나오지 않은
쥐들이 눈빛을 떠올렸다
어디론가 맞구멍을 뚫고 나갔을
끔찍한 쥐들의 기억을 더듬었다
-출처 : 시집『나를 울렸다』(문학과지성사, 2011)
-사진 : 다음 이미지
--------------------------------------------------------------------------------------
풍경의 불가능성을 기입하는 풍경
-이윤학의 시「나를 울렸다」를 읽고
우리는 그 동안 이윤학 시인의 시가 폐허의 풍경이라고 말해왔으며, 그것이 어떤 기억의 이미지일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윤학 시인의 풍경은 이제, 다만 하나의 내면이 생산하는 추억의 이름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소망적 이미지들이 만드는 가정법적 풍경으로, ‘너의 부재’가 만드는 다시 태어나는 풍경으로, 그리고 끝내 ‘나’를 익명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풍경의 불가능성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의 시를 불가능성의 풍경을 기입하는 풍경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읽히는 끈끈이가 쥐의 사체와 뒤엉켜 쥐구멍을 막고 있는 이미지는 아름답지도 않고, 각별한 시적 의미를 부여받기도 힘들다. 더구나 이 시에는 2인칭 ‘너’의 존재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소망적인 풍경은 여기에 등장할 여지가 없으며, 그래서 이미지는 좀더 그로테스크해진다. ‘너의 부재’가 만드는 풍경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가 전혀 등장하지 않은 풍경 속에서 이미지는 보다 더 건조해지고, 날것의 누추함을 드러낸다. 이 불편한 이미지에서 이 시의 주체가 만나는 것은 현재의 이미지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진 사건으로서의 시간이다. 이 누추한 이미지 속에 들어 있는 사건을 추측하고 상상하는 것은, 풍경을 공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탐색하는 것이다.
이 시의 후반부의 이미지들은 현재의 장면을 만드는 것으로 추측되는 상상적 장면들이다. ‘∼으리라’의 장면들은 현재의 이미지로부터 추측된 상상적 기억이다. 이 시에서 “쥐들의 눈빛을 떠올”리는 그 상상적 기억은 더할 나위 없이 어둡고 쓸쓸하다. 그 “끔찍한 쥐들의 기억을 더듬”는 것은 ‘나’의 시선과 ‘쥐의 시간’이 시적으로 만나는 일이다.
여기서 ‘나를 울렸다’라는 이 시의 제목에서 왜 1인칭 ‘나’는 ‘울렸다’라는 동사의 목적어의 위치에 머물러 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상상적 기억의 풍경 속에서 ‘나’는 그 장면을 장악하는 유일한 초월적 주체가 아니라, 다만 그 기억을 더듬는 존재, 오히려 다른 존재들의 기억을 만나는 존재이며, 그래서 ‘나’는 ‘기억하는 자’이며, 동시에 기억 ‘당하는’자이다.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이 피동태의 문장은 그 풍경의 주인이 다만 ‘나’일 수 없음을 그렇게 암시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광호 님이 쓰고 詩하늘이 엮음
첫댓글 고정관념을 깨는 시 한 편 고맙고 읽고 갑니다. 시는 꼭 아름답고 고운 말로만 쓰야 한다는 그런 고정 관념을 뛰어 넘는 시를 쓰고 싶은게 저의 희망사항이기도 하니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