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계절의 이 시집
우리는 모두 뒤돌아보는 사람
- 이돈형 시집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한 보 경
시인들은 어떠한 ‘한계’가 걸림이거나 견디기 힘든 압박감만 주는 것이 아니라는 걸 시작의 체험을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한계‘를 스스로의 미숙함을 깨닫는 시간으로 받아들일 때가 있다. 그래서 미숙함을 인정하는 순간의 좌절보다 ‘한계’ 뒤에 숨은 성장을 기쁘게 수용한다.
이돈형시인의 두 번째 시집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을 읽으며 우리가 살아갈 터전을 탐색하는 물리적 공간이 ‘경계’라면 ‘한계’는 감당하기 힘든 자신의 미숙함을 깨닫는 성찰의 시간이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그의 시작에도 접목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하며 ‘한계’와 ‘경계’의 모호한 차이에 대해 생각한다. 어쩌면 ‘경계’는 ‘한계’를 사랑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종종 시인은 만행의 길동무가 될 수 있는 ‘한계’와의 점진적인 합의에 이를, 적절한 자리에 ‘경계’를 설정한다. 시에서 ‘경계’는 ‘한계’를 뒤돌아볼 수 있는 다양하고 개성적인 시적 장치로 묵직한 무게 중심을 가진 환유다. 그러므로 시적 ‘경계’를 설정하는 것에도 사유와 상상을 바탕으로 하는 시인의 창의적 사고는 필요하다.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창의성은 시인에게 ‘한계’이기도 하지만 또한 아무나 함부로 가질 수 없는, 시라는 소중한 브랜드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계’는 시의 퀄러티를 높이고 ‘경계’는 시라는 브랜드를 강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시를 읽는 입장에서는 시인의 ‘경계’를 찾아 읽는 일이 읽기의 또 다른 ‘한계’가 될 수 있다. 엉뚱한 ‘경계’에서 헤맬 수도 있고 ‘경계’의 원관념을 이해하지 못해 시인과 완전히 다른 길로 들어설 수도 있다. 다름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공감을 주고받는 읽기는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시를 읽는 시간이 마치 시를 쓰는 시간처럼 다가올 수 있다면, 독자들에게도 시인처럼 상상과 사유를 확장할 수 있는 경험을 주는 시라면, 아마도 괜찮은 시가 아닐까.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경계’를 찾는 일은 이돈형 읽기를 위해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나의 ‘경계’이기도 하다. 의도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숨겨둔 경계, 지뢰처럼 널린 상투성과의 선긋기를 위한 경계, 잠재된 삶의 트라우마를 허물기 위한 경계, 감각적안 시어의 운용으로 맛을 낸 언어의 경계, 나는 시집 속에서 다양한 환유로 변주되고 있는 그것들을 모아 ‘경계’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돈형 읽기의 한계’로 삼아 보았다.
시집에 실린 51편의 시적화자는 거의 1인칭 ‘나’로 보아도 상관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굳이 시적화자라고 하지 말고 ‘시인’이라고도 하지 말고 ‘그’라고 지칭하기로 한다. 시집 속의 시들은 한결같이 나의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기만 하다가 어느 순간 뒤통수를 치며 지나간다. 까끌까끌한 모래바람처럼 흩어지며 지나가는 것들을 뒤돌아본다. 균등한 이질감이 ‘경계’와 ‘경계’를 이루며 다가온다. 그것들은 점점 끈끈한 연대감으로 뭉친다. 까슬까슬 겉돌던 모래알갱이 같은 ‘경계’는 묵직한 바위처럼 중심을 잡는다. 지나간 이질감의 ‘경계’들을 뒤돌아보는 동안 ‘경계’의 나들목 같은 ‘문턱’이 보인다. ‘문턱’을 지나간 ‘경계’와 ‘경계’처럼 나도 지나온 사람이 되는 순간, 우리 모두는 뒤돌아보는 사람들이 된다.
시 밖에서 만나는 시인은, 단순한 일면이 있다. 그런 그가 무슨 일을 벌인 것일까. 그 단순함이 시를 읽고 나면 단순하다는 말만큼 복잡한 말이 없다는 뜻으로 바뀐다. 먼저 그를 붙잡고 있는 삶의 근원적인 문제들, 그 ‘한계’는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그가 간절히 얻고 싶었고 이루고 싶었고 다다르고 싶었을 그것, 부정하고 포기하면서 상처로 남은 불능과 불통의 그것들은 층층이 쌓이고 쌓여 고스란히 ‘뒤’에 남아있어 그를 뒤돌아보게 한다. 때론 유물처럼 고색창연한 기품이고 끝까지 안고가야 할 상처이고 부정하고 불통하느라 남은 미련과 후회와 반성이고 무능과 결핍이 초래한 실수와 실패인 것들이 ‘뒤’에서 그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가 어쩔 수 없어 포기했지만 끝내 포기할 수 없는 미완의 꿈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뒤’는 그가 뒤돌아보아야 하는 이유 그 자체이다. 가슴 졸이는 안타까움이고 되돌려 보내고 싶은 ‘빌려온 슬픔’이다. 나는 숱한 실수와 실책들, 아픈 실족과 실명의 시간들이 실패한 혁명처럼 남아있는 그의 ‘뒤’를 뒤돌아보며 그의 ‘한계’를 추슬러 보기로 한다. 제대로 그의 호흡과 맥박을 잡을 수 있을 것인지 내내 의구심은 따라올 것이다.
다음으로 나는 그의 ‘뒤’들이 지나가는 ‘문턱’을 눈여겨본다. 보편적이지 않은 독법이지만 그의 ‘뒤’를 바라볼 수 있는 n차의 ‘경계’들에서 공통분모로 찾아 ‘경계’들의 중심을 잡아주는 ‘문턱’을 읽기의 중심으로 잡아본다. 적절한 나의 ‘경계’이다.
사이는 멀어지고 그 사이 맨얼굴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방에선 선풍기가 돌아가고 두루마리 화장지로 가끔 콧물을 닦으며 지나간 사람을 지나온 사람처럼 불렀다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애써 웃어주는 사람과 그 웃음 뒤의 막막함에 숨는 일로 잠시 웃어 보였으나
여름은 발에 걸리지 않아 부를 이름이 없고 수제비 같은 맨얼굴은 수시로 뚝뚝 떨어졌다
간밤엔 기억에도 없는 일을 하였다가 기억에서 사라진 건 아닐까 마신 술에 속아 울면서
수용하였다
간신히 입 다문 정든 수용소와 그 너머 안부까지
한밤중에 일어나 물을 마시며 여름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도 속았다는 걸 모르는 거다
빌려 온 슬픔을 되돌려 보낼 수 있어 한여름은 없었다
그래서 안녕
- 「안녕」 전문
꿈을 꾸었지
나는 쉽게 죽었어 젊은 나이였는데 한순간에 죽었어 그렇다고 누군가가 죽인 건 아니야 짧은 꿈이라서 그들은 살릴 수 없었겠지 깨면서 칼같이 사라져버린
(중략)
칼은 줄줄이 흘러내리는 뒷모습이었지 뒷목을 잡고 거침없이 휘두르다 와장창 깨지는 내게서 떠나려는 캠핑카 같은 캠핑카에 걸린 백기 같은
(중략)
나를 철거한 자리에 다수가 둘러앉아 다 함께 캐럴을 부르네
- 「나를 철거한 자리에 다수가 앉아 있다」 부분
그는 ‘뒤’에 대한 어감이 남다른 시를 많이 써왔고 이번 시집에도 ‘뒤’에서 파생된 시어들이 주는 ‘뒤’의 이미지를 가진 시들이 적지 않다. 그가 우리에게 던져둔 ‘뒤’를 바라보고 수용할 수 있는 ‘경계’를 찾을 수 있는 단서는 시집 여기저기에 고루 흩어져 있다. 먼저 시 두 편을 무작위로 택해 읽어본다.
‘뒤’는 앞과 뒤 양면의 각 부분이면서 분리될 수 없는 전체다.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버릴 수는 없다. ‘뒤’는 그가 버리고 싶었지만 끝내 버리지 못한 선택불가의 갈애 덩어리라고 생각해본다. ‘말의 뒤편에서’ ‘깍지 낀 손이 풀릴 때까지’ 떼어내고 싶은 ‘선악’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켜켜이 쌓인 기억이고 미련이고 아쉬움이고 간절함이다. 미진한 결핍과 안타까운 미완의 상태로 남겨진 상흔이다. 뒤돌아보는 순간 지나온 것이 되지만 ‘기억에도 없는 일을 하였다가 기억에서 사라진 건 아닐까’ 조바심으로 다시 뒤돌아보아야 하는 것들이다. ‘푸릇했던 속내를 들킬까 끄덕’이는 순간 고스란히 들켜버릴까 애타는 속엣것, 가려운 ‘나의 뒷이야기’들이고 ‘웃으며 썼던 반성’처럼 어디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들이다.
‘듣다보면 어디서 들었던 이야기’ 같고, ‘이야기를 듣다보면 내가 했던 이야기 같은 이야기’들이 너무 많이 남은 까닭에 언제까지 뒤돌아보아야 하는 그는, ‘빌려 온 슬픔을 되돌려 보내’고 ‘안녕’을 고할 때까지, ‘슬픔이 슬픔을 두고 가면 영영 뒤돌아보지 않을’ 때까지, ‘뒤’를 뒤돌아볼 것이다.
그의 ‘뒤돌아봄’은 반성과 수용이다. 잊히기 위해 완전히 ‘지나온’ 존재가 되는 것이며 또한 ‘지나온’ 존재가 되어 완전히 ‘뒤’를 잊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수용이나 반성보다는 완전히 사라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를 철거한 자리에 끝까지 자리 잡고 앉은 다수들이 부르는 한때의 캐럴처럼 모든 것은 짧고 조만간 사라질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모두가 짧은 한여름의 밤처럼, ‘한계’도, ‘나’도, ‘철거’되고마는 ‘짧은 꿈’임을 당분간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이다.
주관적 소견이지만 그는 우리를 얽매는 번뇌의 족쇄에서 조금 벗어나 수행을 하듯 시를 써 온 것 같다. 나는 그에게서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유신견有身見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간절함을 느낀다. ‘만지며 믿었던 사람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될 때’를 믿고 기다리며, ‘오늘은 수국의 잎사귀를 만지며 믿었던 사람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될 때까지 흰색이길’ 서원한다. 그는 ‘싯다르타를 본 듯’ 이미 예류자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닐까.
좀 더 귀 기울여 ‘그의 반성과 고백과 의견을 경청’하고, 그가 짊어지고 가는 배낭을 열어 ‘빗소리와 염을 마친 마지막 음성과 끝낸 기도’의 정체를 뒤져보다가, 상흔으로 남아 있는 그의 고통과 간절히 원하던 위로 사이에서 어슬렁거려본다. 사랑하고 그리워하여 자신의 모두를 아낌없이 내주고 싶던 기억들과, 어떤 연유에서(주로 그의 노파심과 사양지심으로 인한 것이라 생각) 비롯된 어쩔 수 없는 수용과 자포자기의 상처들과, 쓸쓸한 소외의 기억들이 혼재하는 그의 ‘뒤’를 예류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나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네 영혼과 하룻밤 잤다
불빛을 죽이고 나서야 우리가 양 떼처럼 하얗게 몰려다니며 저지른 실패한 혁명들이 보였다
그러니까 쿵쿵거리는 심장소리가 검게 그을린 노래가 눈을 뜨지 않고도 사방을 돌아다니며 피를 뿌리는 것이다
네가 사랑한 날엔 내가 없었고 내가 사랑한 날엔 네가 없었으니 실패는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런 밤에
내 영혼은 한겨울 폭설 위를 뒹굴다 빗나간 생애처럼 손바닥을 비비다 눈앞에서 사라진 소도시의 거룩한 밤에 갇혀 있고
뜨거운 피가 식은 피에 가닿는 것이 추억인 것처럼 나는 네 영혼을 핥으며 뜨거운 몸을 식힌다
이불을 끌어 덮으며 네 영혼이 달아오르길, 오늘이 가고 내일이 가도 실패한 혁명이 끝나지 않길, 이 컴컴한 방의 문턱에 걸려 넘어지길
나는 네 영혼과 하룻밤 잤다
- 「문턱」 전문
‘불빛을 죽이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경계’가 있다. ‘양 떼처럼 하얗게 몰려다니며 저지른 실패한 혁명’이 지나가는 ‘문턱’이다. 그곳에서 그는 ‘오늘이 가고 내일이 가도 끝나지 않’을 실패한 혁명을 뒤돌아보고 있다. 그는 완전히 ‘지나온’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양 떼처럼 하얗게 몰려다니며 저지른 실패한 혁명들’, ‘한겨울 폭설 위를 뒹굴다 빗나간 생애’, ‘사라진 소도시의 거룩한 밤에 갇혀 있’던 내 영혼, 하룻밤을 잤다는 ‘네 영혼’, 모든 ‘뒤’엣것들은 ‘문턱’이라는 ‘경계’ 앞에 무더기로 모여든다. 그 위를 깊은 상흔들이 체위를 바꾸며 울렁울렁 굴러다닌다. 쓸쓸한 유년과 지난 기억의 편린들과 아버지의 밥상머리와 어머니의 눈곱 낀 망망한 눈과 어제를 견딘 방향으로 흐르는 강물이 뒤섞여 흘러가고, 바쁘게 앰블란스가 지나가고, 가끔 순조로운 첨잔 같은 시간들이 잠시 머물렀다 지나간다. 그는 ‘봄봄봄 하다가’ 놓쳐버린 봄의 몰락 앞에서 비로소 당신의 창공이 옳았다고 말하고 싶지만, 말로 하기 힘든 어떤 이유들이 더 많아서 ‘시간이 시간을 두고 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아예 말하지 않기로 한다. ‘끝나지 않은 실패’와 ‘그’ 사이의 ‘문턱’에서 파상적이고 돌발적인 실패들은 끝날 것 같지 않아 가늠하기 쉽지 않다.
‘문턱’을 그려본다. 언젠가 오랜 시간들이 지나간 그의 ‘문턱’은 닳고 닳아 한없이 낮아질 것이다. 잘 닳아가고 있는 ‘문턱’에서는 죽음도 담담한 일상처럼 툭, 오늘을 걸치고 있을 것이다.
내 기일을 안다면 그날은 혼술을 하겠다
이승의 내가 술을 따르고 저승의 내가 술을 받으며 어려운 걸음 하였다 무릎을 맞대겠다
내 잔도 네 잔도 아닌 술잔을 놓고 힘들다 말하고 견디라 말하겠다
마주 앉게 된 오늘이 길일이라 너스레를 떨며 한잔 더 드시라 권하고 두 얼굴이 불콰해지겠다
산 척도 죽은 척도 고단하니 산 내가 죽은 내가 되고 죽은 내가 산 내가 되는 일이나 해보자 하겠다
가까스로 만난 우리가 서로 모르는 게 많았다고 끌어 안아 보겠다
자정이 지났으니 온 김에 쉬었다 가라 이부자리를 봐 두겠다
오늘은 첨잔이 순조로웠다 하겠다
- 「기일」 전문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나만큼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일」을 읽으며 ‘미러링 효과’를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호감이 가는 사람의 말이나 행동 등을 거울 속에 비친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똑같이 따라 하면 상대가 나에게도 친근감과 동질감을 느끼고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일」에서 그는 거울 속에 비친 누군가를 사랑하듯이 그의 ‘뒤’를 향해서도 깊은 유대감과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생일처럼 기일을 자축할 수 있는 것일까. 거울 속 누군가를 바라보듯이 ‘이승의 내’가 ‘저승의 내’게 술을 따르며 마주하고 있다. 생일처럼 자축하고 기일처럼 위로를 건넨다. 어려운 걸음 하였다고 무릎을 맞대겠다고 술잔을 놓고 힘들다 말하고 견디라 말하겠다고 한다. ‘산 내가 죽은 내가 되고 죽은 내가 산 내가 되는 일’처럼 그는 마치 거울 속의 친밀한 누군가를 대하듯 그와 긴밀히 소통한다. 시 「기일」은 마치 그가 거울 속에 고스란히 비친 그의 모든 것을 수긍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미러링 효과’를 연상하게 한다.
「기일」은 그가 그를 들여다보는 ‘거울’ 속에 비친 그의 모든 ‘뒤’를 수용하는 일종의 ‘미러링 효과’ 같은 것이 ‘나’와 ‘나’의 관계에도 가능할 수 있음을 보인다. 잊히지 않아 뒤돌아보아야 했던 상흔들도 거울에 비친 누군가의 모습처럼 사랑하게 되는 날이 ‘기일’이다. 잊히지 않아 뒤돌아보던 것들을 완전하게 잊을 수 있는 술을 마시며 권하며 ‘내가 나를’ 위해 이부자리를 펴주고 끌어안아보는 날이다. 그런 ‘기일’에는 죽음도 따뜻한 축복이 될 수 있으리라.
그는 그를 뒤돌아보며(마치 거울을 보듯)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고 (거울 속)그에게서 위안를 얻는다. 그래서 순조로운 첨잔으로 그의 오늘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기일」은 그가 그를 사랑한다는 불립의 전언문이다.
언젠가 시인의 첫시집을 읽은 문우가 “그의 시는 중저음으로 노래하는 방어흔”이라고 한 적이 있다. 방어흔이라는 말 앞에서 나는 주저흔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떤 상흔이 더 치명적인가. 더 하찮은 것인가. 더 결정적인 것인가. 힘든 고통의 흔적인가 생각한 적이 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거두고 그보다는 어느 것이 더 완전하게 잊히는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잊히기 힘든 상흔도 거울에 비추어보고 마주보면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슬픔과 같은 내밀한 감정은 때론 가장 가까운 사람과도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럴수록 누군가의 위로와 공감이 간절해진다. 그는 ‘나’의 내밀한 감정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람으로 ‘거울에 비친 나’를 마주한다.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고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영역을 ‘나’와 나눈다.
어쩌면 그는 드러내고 싶지만 타인이 쉽게 알아차리지 못해 드러낼 수 없는 복잡한 그의 ‘뒤’를 뒤돌아보아 줄, 누군가를 그의 ‘문턱’에서 기다리는 것일 수 있다. 다시 시집의 문턱에 걸어둔 그의 처음으로 돌아가본다.
202001291505
그 끝이 덤덤하게 걸어가고 있다
있어서 없음이 있고 없어서 있음이 있으니
있고 없음의 뒤에 숨어도 되겠다
한 말과 할 말이 가벼워지게 나를 흘려야겠다
- <시인의 말>
‘202001291505’. 느닷없이 던진 그만의 기억이 연루된 숫자. 풀 수 없는 암호. 숫자 속에는 풀기 힘든 의미심장함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 의미심장함은 숫자를 꾹 꾹 눌러 쓴 순간 이미 그를 떠났을 것 같다. 감당하기 힘든 감정들은 암호화되는 순간 거짓말처럼 캄캄하게 암전된다. 그 끝이 덤덤할수록 의미는 무의미로 돌아갈 것이다. ‘202001291505’은 이제 시인에게도 시인의 말에도 시집 속의 시들 속에도 무의미의 의미가 되어 있으리라. ‘있어서 없음이 있고 없어서 있음이 있으니 있고 없음의 뒤에 숨어도 되겠다’는 그의 ‘뒤’마저도 무의미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뒤’는 ‘앞’이어도 ‘옆’이어도 ‘위와 아래’여도 상관없는 미완, 미정, 미숙, 미지의 환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잊고 싶은 것들을 잊게 하는 것. 슬프고 쓸쓸할 때 숨을 수 있는 것. 그를 힘들게 하는 것들을 몰래 지켜보며 감내하기에 유리한 고지인 것. 아니면 사랑하는 것들을 실컷 그리워할 수 있는 아지트 같은 것. 모든 것들은 다이고 다 아니라고 그는 ‘한 말’과 ‘할 말’을 흘리기로 한다.
그는 가끔 자신의 믿음조차 모른 척 시치미를 떼지만 삶을 경청하고, 반성하고, 속내와 의도와 의견과 기분들을 내색하지 않는다. 속으로만 저항하고, 끈질기게 끄덕이면서 성실과 올바름을 오래 사랑한다. 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빗물과 강물과 물때와 낚시의 녘들과 아버지의 손톱들을 잊지 못한다. 이 모든 부서진 조각들은 ‘뒤와 앞’처럼 분명 하나였고 전체였다는 걸 안다. 그리고 다시 조각조각 흩어질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딱 한번, 그것들을 ‘안부가 닿지 않는’, ‘너머’로 데려가려 한다.
TV속 폭포에서 물이 떨어진다
물이 물을 튕기면서 나를 끌어당기는 기분
저 물을 만날 수 있을까
물과 만나 걸으며 물속 지도를 펼쳐놓고 몸에 붉은 점을 찍어갈 수 있을까
넘어오면서 점점이 생기다 한꺼번에 사라진다는 점을 찍으며
물속이 투명해질 때까지 어쩌면 투명해서 나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내 사주에 水가 들어 있지 않다고 하였다
木이 많아 나무를 끌어안거나 나무에 올라가 사람나무처럼 바람을 탁발하거나
土가 많아 흙집을 짓고 들어가 한밤중에 눈을 떠서 폐허의 어둠을 탁발하거나
그건 다시 태어날 수 없는 일
점점이 붉은 점 너머로 나를 밀어내는 일
그래서
신체가 흘러간다는 기분
水없이 흘러간다는 기분
넘어오면서 태초의 물에 간신히 닿는다는 기분
너머엔 안간힘을 빼고 바라봐야 보이는 물론이 무리 지어 있어
- 「너머」 전문
나는 이번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너머」라는 시의 행간에서 오래 머물렀다. ‘너머’는 그가 살아오는 동안 그의 ‘한계’였던 모든 ‘문턱’을 넘어 마지막에 이를 ‘경계’인지도 모르겠다. 「너머」에는 ‘너머’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 단단해지고 유연해진 그의 고백이고 자백이 있다. 그의 ‘너머’를 바라보며 나도 잠시 나의 ‘너머’를 생각해본다.
<시인의 말>은 시집을 닫는 마음이고 「너머」는 시집을 열어 시들을 방생하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모든 것은 ‘너머’를 향해 ‘한 말’과 ‘할 말’이 되어 흘러갈 것이다. 나는 「너머」에서 미처 몰랐던 그의 운명적 고리를 발견하고 그가 비로소 털어낸 삶의 조각들을 어설프게라도 끼워 맞추어보며 물이 없고 나무와 흙인 그의 속내를 짐작해본다.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그를 뒤돌아본다. 시인으로서의 그는 시의 ‘한계’를 넘기 위해 적절한 시적 ‘경계’를 충분히 고심했을 것이다. ‘너머’를 향한 그의 시선 속에는 아직 시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그의 ‘문턱’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것이지만 그는 시가 주는 고립과 슬픔 앞에서 무작정 무릎 꿇지는 않을 것 같다. 시의 ‘문턱’에서 무작정 ‘뒤’만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베르그송은 인간은 과거를 등에 지고 미래로 도약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주어진 직선적인 시간을 살면서도 과거의 회귀와 미래의 도약을 경험함으로써 시간의 능동적인 주인이 된다고 했다. 그가 ‘뒤’를 뒤돌아보는 시간은 능동적인 시간의 주인이 되기 위한 몸풀기인지 모른다. 남은 막간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그는 모든 것들은 낱알처럼 흩어질 것을 예감하며 ‘끝낸 기도처럼 누워’ 비로소 ‘어린 마음과 늙은 마음을 달래’줄 시를 쓰게 될 것이다.
시를 읽으면 늘 시를 쓴 시인이 궁금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시가 시인과 별개의 존재로 보이기 시작한다. 한 시인이 한 권으로 엮은 시집은 늘 난수표 같아 셈법이 서툰 내게는 풀기 힘든 숙제 같았다. 작은 실마리라도 찾으려 애쓰는 동안 나만의 가설을 설정하는 버릇을 얻었다. 그것은 내게 시 읽기의 ‘뒤’이고 ‘문턱’이다.
시집을 덮으며 무엇이 ‘한계’인지 ‘경계’인지 최종적인 판단을 보류하기로 나름의 결론을 내린다. 동자승의 미소 속에 숨어 있는 ‘어떠한 것’이 그의 ‘너머’를 넘어 마지막 ‘경계’가 될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아직 시인은 너무 왕성하므로, 한참 진행형을 달릴 것이므로, 이르고 서툰 결론은 나의 ‘뒤’로 보내기로 한다. 아마도 그것들은 뒤섞여 있지만 무질서하지 않아 서로 비밀스러운 눈짓으로 연결된 고리를 물고 있을 것이다. 시인이 내게 던져 준 ‘한계’이고 ‘경계’라 생각한다. 수용은 백 번 고함쳐도 단 한 번 수긍이 필요한 거’라는 그의 말에 수긍한다.
어쩌다 서평이 아니라 인물평이 된 듯하다. 그만큼 그는, 시가 시인인, 시인이기 때문이리라. 첫시집부터 탄탄한 힘을 보여주었던 그는 두 번째 시집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에 이르러 자기류의 브랜드를 무사히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이전 시집과 이번 시집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도약의 ‘문턱’을 무사히 건너가는 시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그러고 나서 ‘체하기 전에 한술’ 뜨듯이 그를 뒤돌아보고 싶다. 오늘도 순조로웠는지, 지나온 안부를 건네고 싶다. 우리 모두는 뒤돌아보는 사람이므로.
지하세계의 시를 구하기 위해 오르페우스가 지켜야 할 새로운 금기는 ‘뒤돌아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