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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의 직분
디모데전서 3:8-13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처음 나오신 여러분, 올 들어 우리 울산교회에서는 성경대학 가운데 중요하고도 새로운 과정이 하나가 신설되었습니다. 그것은 비젼공유반입니다. 이 비젼반에는 장로님들을 비롯해서, 그 동안 열심히 성경대학을 이수한 분들이 거의 다 참여하여 교회의 비젼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단순히 울산교회가 나아갈 방향 뿐 아니라 앞으로 21세기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같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새들백 교회의 담임 목사인 릭 워렌 목사가 쓴 "새들백 교회 이야기"라는 책으로 매 주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한 사람의 교인도 없이 시작해서 15년만에 자체 건물도 갖추지 않고 일만명이 넘는 건강한 교회로 성장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교회를 성장시키는 중요한 전략 가운데 하나는 단순합니다. "교회를 처음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도록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핵물리학적 두뇌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우주 로켓을 발사하는 사람들의 연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처음 오는 사람들이 교회에 계속 출석하도록만 하면 교회는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주 처음 나오는 사람의 입장에서 모든 배려를 하라고 충고합니다. 매주 화요일 밤과 수요일 오전 이 공부를 함께 하면서 우리는 그의 논지에 설득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주부터 갑자기 처음 오시는 분들을 일으켜 세우지 않았습니다. 처음 오시는 분들이 부담스러워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우리 입장에서 그들을 억지러 세우려 한 것이 사실입니다. 옳다는 것은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 하기에 지난 주부터 새로오신 분들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우리는 예배를 어떻게 처음 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조정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일낮 설교가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지를 저는 고민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을 붙들고 '만약 당신이 교회에 나간다면 일요일 오전, 아니면 낮에 출석하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일요일 밤이나 수요일 밤에 나오시길 원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대답은 주일낮을 택할 것입니다. 같은 질문을 여러분에게 물어도 답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자신이 기도해 온 태신자를 기회를 잡아서 교회에 데리고 나온다면 언제 데리고 나오기를 원하는지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아마도 대답은 동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주일에 세 차례 예배 가운데 주일낮 예배 설교가 처음 나오는 구도자를 겨냥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지금껏 우리 교회는 아니 대부분의 교회들이 그러한 분석에 근거한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주일낮 예배 설교나 주일밤, 수요예배 설교는 내용상 거의 구분이 없이 의례껏 신자들을 향해서 선포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처음 오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알아 듣지 못하는 말들이 수두룩한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에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입니다. 저는 요즘 "처음 나온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없을까"하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제가 설교를 할 때면,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라 부르고 사작했습니다. 즉, 저의 설교는 이미 예수를 믿고 잘 출석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 자리에 처음 나오신 여러분!"하고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처음 온 사람을 주 대상으로 해서 주일 설교를 새롭게 작성하려는 저의 결심입니다. 지금까지 익숙한 관점을 바꾸는 일은 제게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설교하는 것이 아주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건 제게도 쉽지 않는 일입니다. 여러분 역시 듣기에 처음에는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설명을 제가 미리하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변화에 대해서 최소한 의아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만약 교회를 다니지 않는 더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려면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고 그들의 삶에 실제적으로 연관된 설교를 해야한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읽은 부분으로 돌아갑시다. 디모데 전서 3장 8절에서 13절을 읽었습니다. 오래 다니신 분들은 디모데 전서하면 누가 누구에게 쓴 것인지를 다 알고 있습니다. 처음 나오신 분들은 디모데 전서라고 하는 말조차도 사실 어렵습니다. 디모데 전서는 바울이라는 사람이 디모데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입니다. 그러니까 디모데 후서가 틀림없이 있을것입니다. 예수님은 열 두제자를 세상에 있을 때에 훈련을 시켰는데 훈련된 열 두 사람 보다도 더 탁월하게 사역을 잘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의해서 특채된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라 다닌 제자 열 두 사람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만 그들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서신은 그가 개종시키고 지금 함께 사역을 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것입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목사가 되어있습니다. 말하자면 디모데가 목사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때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기록하여 보낸 편지입니다. 그래서 디모데 전서, 후서, 디도서 세 편지는 소위 목회를 하는데에 필요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고 해서 목회서신이라고 분류합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핀 디모데 전서 3장에서는 교회의 직분자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를 언급합니다. 달리말해 어떤 자격을 갖춘 사람을 장로로, 집사로 세울 것인지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어떤 단체든지 그 단체마다 꼭 있어야 하는 직책이 있습니다. 학교를 예를 들면 교장이 있고 교감이 있고 평교사가 있습니다. 가정에도 어머니, 아버지, 아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중에 한 분이 없으면 결손가정이라고 부릅니다. 교회도 정상적인 조직을 갖추기 위해서는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필요합니다. 만약 장로가 없는 교회는 미조직 교회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가 됩니까?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소명이 있는 사람이 신학을 하게 됩니다. 수년간의 신학 수업을 마치고 나서 그를 청하는 교회가 있으면 목사와 장로들의 모임인 노회에서 안수를 받아 목사직을 수행합니다. 자기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불렀다고 생각을 하는데 공부를 마쳤지만 아무도 청빙하는 교회가 없으면 목사 안수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을 목사 안수하면 교회가 고생하고 본인과 그 식구들이 고생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속에 신학을 하도록 소명을 주셨으면 공부 마칠 때 쯤에 하나님께서 길을 여셔서 청빙하는 교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노회가 안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장로와 집사는 개 교회가 선택을 하고 6개월간의 교육과 훈련을 받고나서 장로는 (목사와 장로들의 모임인) 노회에서 시험을 보고 집사와 권사는 개 교회 당회에서 시험을 치룹니다. 합격하면 임직식을 하고 나서 그 직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장로 10인, 그리고 집사 20인, 권사 20인을 뽑기 위한 투표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밤에는 장로 후보 20인을 두고 2차 투표를 하고 바로 이어서 집사 20인 선출을 위해서 1차투표(어쩌면 예선투표)를 합니다. 물론 세례를 받은 울산교회 교인이라야 투표권을 행사합니다. 세례 받은 교인들은 모두 투표권을 행사하셔야 합니다. 기권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오늘 설교는 "집사의 직분"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우리 사회는 서양처럼 서로 이름을 부르는 문화가 아닙니다. 대신 직책을 가지고 부릅니다. 구멍가게를 해도 '사장님'이라고 불러주기를 좋아하고 또 사범학교 문턱도 가보지 못해도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면 좋아합니다. 한국문화의 특징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12년전에 개척교회할 때 집사를 시키라는 압력을 제일 가까운 어머니로부터 받은 적이 있습니다. '김 아무개씨는 호칭이 없으니 부르기 미안해서 집사로 시켜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청탁에 대해서는 귀가 먹은 것 처럼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문화에 있어서는 '아무개씨' 붙여도 '김집사'하고 불러주는 것 보다 좋아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없는 집사를 난발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는 집사라는 호칭과 기독교인이 동일시 되는 지경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집사들은 사실은 '서리집사'입니다. "서리"라는 말만 들어도 왼종일 기분이 나쁜 충청도 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자기에게 "서리"라고 하는 말이 붙어있는지 없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리"라는 꼬리표가 떨어지지 않아서 속상해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서리란 직책은 본래부터 한시적이고 임시직인 성격을 갖습니다. 계속되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서리집사"를 처음 불렀던 것은 이해가 됩니다. 선교사가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사람을 모아 놓고 설교를 일주일 동안하면 틀림없이 그 중에는 하나님이 마음을 열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15-20명 정도 모이면 다음 주일되면 선교사는 떠나 가지만 교인들은 모여야 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그 일을 주관해야 하니까 그중에 직분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두 믿음의 동기생들입니다. 1주일 2주일밖에 안된 사람들을 집사로 시키기는 곤란하니까 "서리집사"로 임명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다가 "서리"를 떼고 집사가 되는 것이 본래 시작이었는데 그 역사가 120년 정도 넘었는데도 아직도 "서리집사"는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처럼 1,2년 정도면 충분한 "서리집사" 칭호를 평생 사용해야 하는 것은 생각해 볼 관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다루는 집사는 "서리"라는 형용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소위 '안수'집사를 말합니다. 장로는 그 다른 이름인 감독이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성도들의 신앙생활 전반을 감독하는 것이 주임무입니다. 그리고 집사는 교인들의 생활형편을 살피고 교회의 살림살이를 위해 봉사하는 직책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특채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사람을 집사의 직분에 세워야 하는지를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자격 기준을 살펴봅시다. 어떤 자격 기준을 본문은 제시합니까? 그리고 8절과 9절이 제시하는 자격기준은 어떻게 서로 다릅니까? 잘 살펴보면 8절은 한 사람의 일상적인 삶에 대해서 말한다면 9절은 그 사람의 영적인 자격을 논하고 있습니다. 12절은 가정적인 자격을 각각 논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도덕적인 자격을 영적인 자격에 앞서 논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은 집사의 자격 기준을 논할 때 영적인 자격보다 도덕적인 자격을 먼저 살피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참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교회에 직분자를 세울 때에 신앙을 먼저 묻지 말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집사"라는 직분을 갖게되면 그 직분에 불리우는 것은 교회에서만 일상적인 삶은 누구나에게 드러나는 것이고 신앙은 내면적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영역에서 하자가 없는 사람 가운데서 신앙적인 척도를 드러 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뽑은 집사는 교회에서만 집사로 통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그렇게 소개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눈에 비친 교회의 직분자의 삶이 모범이 되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이 과연 교회의 문을 들어서려고 하겠습니까? 자격이 부실한 사람에게 직분을 주는 것은 바깥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만날 기회의 문을 닫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그러면 한 절씩 그리고 한 구절씩 살펴봅시다. "이와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라고 8절은 시작합니다. 맨먼저 "이와같이"라는 접속사로서 말을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한 자 한 자가 의미가 있습니다. 한 자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이와같이"라는 접속사는 집사 직분이 앞에서 말한 감독(장로)의 직분과 관련을 갖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만듭니다. 말하자면 장로의 자격에 준해서 집사의 자격을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이란 사회는 과거 500년동안 유교가 정신적인 버팀목 구실을 해왔습니다. 그러므로 알게 모르게 유교 문화의 영향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적인 가치라고 생각하는 상당부분이 사실은 성경적이라기 보다는 유교적인 것이 많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 바탕에 유교문화의 유산은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아래 관계는 우리에게는 익숙한 체제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집사의 자격을 장로보다 열등한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와같이" 말하자면 "장로의 자격에 준해서" 지금 바울은 지금 집사의 자격을 논하고 있습니다.
집사나 장로나 영적 성숙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다만 다른 것은 하는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집사와 장로는 다만 그 일의 성격에 따라서 다른 것입니다. 집사는 결코 인품이나 신앙에 있어서 한 단계 낮은 사람이 하는 직책이 아닙니다. 어떤 분이 지난 주간에 제게 말했듯이 본인의 소원이나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따라서 장로가 될 사람은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될 사람은 집사가 되어야 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다만 지금껏 우리 울산 교회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반이 행해 온 관습에 따라 안수집사 중에서 장로를 뽑고 서리집사 가운데서 안수집사를 뽑는 식으로 이번 선거는 일반적인 관행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만 성경적인 원리하고는 부합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성경적인 정답을 찾아 가야할 것입니다.
그러면 집사의 도덕적인 자격으로 8절에서 바울은 무엇을 제시합니까?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다른 자격은 들어보면 바로 이해가 되는 것들입니다만 "단정하고"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지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어떤 번역은 그 말 대신 "근엄하고"라고 하지만 이해가 안되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또 다른 번역은 "신중하고"라고 하지만 썩 잘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특정한 기질의 사람은 기질적으로 신중한 처신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보고 신중하라고 하면 잘되지 않을것입니다. 결코 이 말은 옷매무새나 차림새를 말하거나 한 사람의 표정이나 태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특정 기질의 사람을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은 인품이나 사람됨을 전체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더 나은 번역은 "존경할 만하며"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이 교회의 직분을 맡고 다른 사람 앞에서 활동을 하면 공동체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수긍이 가지 않습니까? 구청장은 구민으로부터, 시장은 시민으로부터,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그 직책에 걸맞는 존경을 받아야 직무수행을 무리없이 해나갈 수 있습니다. 교회에 없어서는 안되는 직분의 하나인 집사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그는 성도들 뿐만 아니라 그와 이웃해서 사는 사람들의 존경과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존경할 만한 사람입니까? 8절의 나머지 구절들이 설명해 줍니다. 먼저 존경할 만한 사람은 자신의 말에 신실해야 합니다. 그래서 맨먼저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사람이 고상한 사람인지 속된 사람인지 모릅니다. 입을 열때에 그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일구이언을 하면 그사람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일구이언'이란 실제 상황에서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사람 만나서는 이 말하고 저 사람 만나서는 저 말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이 다르고 아침에 한 말과 저녁에 한 말이 서로 다른 경우도 해당합니다. 또 사실과는 다르게 과장하는 것도 해당합니다. 소위 '침소봉대'라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말하는 것과 의미하는 바가 같지 아니한 것도 해당합니다. 존경받기 위해서 우리는 말한 것을 의미해야 하고 의미한 바를 말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라고 본문은 대표적인 자기 통제가 어려운 한 영역을 지적합니다. "술에 인박힌다"는 것은 말하자면 알콜 중독을 말합니다. 알콜 중독이 된 사람은 술 한잔 하지 않고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중독된 본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절대 자기는 알콜 중독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술없이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은 중독된 사람입니다.
집사의 직무는 사실 유대교 전통을 따라서 가난한 사람 돌보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집사가 술에 인박혀 있다면 교회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보내는 구제금이 제대로 전달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특히 우리 울산교회당처럼 나서면 술집이 즐비한 곳에는 더욱 위험합니다. 딱 한잔만 하고싶은 유혹을 이겨내기란 알콜 중독된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잔 마시면 한 잔만 더 마시고 싶고 그러다보면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술이 술을 마시고 결국 술이 사람을 마시게 됩니다. 술이 들어가면 똑바로 걷는 것도, 운전도 제대로 안될 뿐 아니라 바른 판단이 어려워집니다. 몇 년전에 서울 남산에서 폭파시켜 해체한 건물이 어떻게 남산경관을 헤치고 들어섰는지 아십니까? 술이 한잔된 박 대통령이 술김에 싸인한 것입니다. 폭탄주 좋아하는 사람은 집사직 뿐 아니라 시장 도지사직에도 뽑아서 안됩니다. 기초의회나 시의회 의원자격도 없습니다.
하긴 알콜 중독도 문제지만 그보다 벗어나기 어려운 것은 니코틴 중독입니다. 담배 끊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담배는 마약과 같습니다. 담배맛 들인 후에 예수 믿은 사람치고 대개는 술보다 담배 끊기가 어려워 고생들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문필가 마크 트웨인을 아시지요? 톰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쓴 작가로 유명합니다. 모여 앉은 친구들이 모두 담배 끊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참 나누는데 마크 투웨인 왈 "이 사람들아, 남자들이 담배하나를 못끊어서야 되겠는가? 나는 200번도 끊어봤네. . ."라고 했답니다. 얼마나 담배를 끊기가 힘든지 새겨 들을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알콜이나 니코틴이 중독시키는 것의 전부는 아닙니다. 불건전한 중독성의 취미생활들도 많습니다. 화투에서부터 컴퓨터 게임까지 줄을 지어 있습니다. 바둑이나 낚시 등산등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도 중독될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좋은 것도 얼마든지 중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애중독, 관계중독, 성 중독, 음식중독, 권력중독, 종교중독, 활동중독, 심지어 일도 중독이 될 수 있습니다. 하여간 무엇에든지 중독이 되면 정상적인 생활을 어렵게 만듭니다. 컴퓨터 오락에 빠져든 초등학생부터 일중독에 빠져든 어른까지 마찬가지입니다.
세 번째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은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지난 번 설교에도 언급했듯이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편리하게 살 수 있습니다. 좀 으시댈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집사의 주임무와 관련해서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돈을 밝히면 존경을 받을 수 없고 집사가 돈을 좋아하면 직무수행에 차질이 생깁니다. 가난한 사람 돌보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장사를 하든지 직장에서 일을 하든지 노력한 대가를 받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부정직한 이득을 탐내는 것은 성경이 금합니다. 이득을 남기는 것은 정당합니다. 다만 부정직한 이득을 탐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어디만큼이 정당하냐 하는 것은 업종에 따라서 기준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술이나 자격, 아니면 종사한 연도에 따라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부정직한 이득을 탐하는 것은 자기의 영혼을 팔아 넘기는 도박입니다. 특히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에 불명예를 끼쳐서는 집사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집사가 아니라 잡사입니다.
이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의 영적인 혹은 신앙적인 자격을 살펴봅시다. 9절이 말하고 있습니다.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라고 말합니다. 우선 집사직이 교회가 주는 직책이기에 믿음을 따지는 것은 수긍이 갑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양심과 믿음이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말하는 것을 들어보셨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도 오늘 이 자리에 나오기 전에 그런 말을 해본 적은 없습니까? "신앙 말하기 전에 양심을 바로 가져라" "양심을 바로 써야 복을 받는다" 등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모든 도덕적인 판단을 바로 할 수 있도록 양심을 주셨습니다. 이 양심이 제 기능을 발휘할 때 믿음이 제 구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양심이 깨끗한 양심입니까?
사람들은 모두 자기 양심은 바르다고 내세웁니다. 문제는 양심이 바르지 못한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보배로운 피로서 죄용서를 받아야만 "깨끗한 양심"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 깨끗한 양심이라야 믿음이 자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서 죄용서함을 받지 못한 심령은 아주 교만한 양심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그것이 교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입으로 교만한 양심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왜 하필 믿음이라고 하는 대신 "믿음의 비밀"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믿음의 본질이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공개적으로 선포해도 알아듣는 사람만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비밀을 소유하면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집니다.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이전에는 살았지만 이제는 지나가는 세상임을 압니다. '나는 이세상에 정둘 수 없도다'고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영혼의 큰 암초와 같다는 것을 압니다. 믿음의 비밀을 소유하면 천국의 문이 보입니다. 믿음의 비밀을 간직하면 내세의 영광이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자는 예수님이 귀한 분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생사간에 유일한 위로는 예수님의 이름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건강할 때 예수의 이름 찬양할 뿐만 아니라 죽음을 바로 앞 둔 순간에도 주의 이름에 자기를 의탁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업이 잘될 때에 감사헌금을 주일날 마다 할 때뿐 아니라 사업이 잘되지 않아 기도할 만한 용기 조차도 잃어 버린 그때에도 신앙인은 예수 이름에 소망을 두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자는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관심이 가기 시작합니다. 한 때는 부러워했던 사람들이 불쌍해집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돌보게 됩니다.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자는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합니다. 그들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구역을 심방해 보면 구역장들이 구역 식구들을 사랑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제가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나 우리 주님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 못지 않게 서로간에 자랑을 합니다. 이것이 집안이 될 징조입니다. 부흥하는 교회는 목사가 성도를, 성도들이 목사를 자랑합니다.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사람은 각 사람의 땅에 사는 성도들을 소중한 자로 여기고 특별한 관심을 가지며 자신의 기쁨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너는 나의 기쁨이요 자랑이요 면류관'이라고 고백합니다. '나는 널 위해 준비된 축복 그릇'이라고 고백합니다.
11절은 다음 주일에 권사의 직분을 말할 때 집중적으로 살피도록 하고 12절에 나오는 집사의 또 하나의 자격 규정으로 눈을 돌려 봅시다.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며, 자녀와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여기는 가정에서 그의 모습을 살피도록 합니다. 첫째로 장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다른 여자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소극적인 의미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멋있는 남편 노릇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이해를 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좋은 남편은 결혼 전과 신혼 초에 보였던 관심과 사랑이 일생동안 변치 않는 사람입니다. 결혼 기념일, 아내 생일 기억해서 선물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아내의 옷차림과 외모에 관심을 나타내어 아내를 아름답게 가꾸는 정원사입니다. 결혼하고 10년, 20년이 되었는데 밥상을 받을 때마다 어머니에게 밥상을 받을 때의 투정을 아직도 하고 있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아내에게 무례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음식중에서 한 두가지 칭찬을 해 주십시오. 그러면 10년, 20년 뒤에는 식탁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해 지는지. . . 복은 자기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칭찬에 인색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모든 일에 아내와 의논하고 결정하는 사람입니다. 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농담이나 행동은 삼가하십시오. 살다보면 티격태격 하기도 하지만 한걸음 먼저 양보하는 너그러움을 나타내는 미덕의 사람입니다. 아내의 개성과 취미를 존중하고 키워주는 사람입니다. 집안 살림, 가정 경제는 아내에게 일임하여 아내로 하여금 보람을 느끼게 합니다.
부부사이가 나쁜 사람은 직분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아내조차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내조차 만족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만족하게 섬길 수 있을까요? 가장 기본적인 관계에서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면 교회공동체에서 직분을 감당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다음은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자녀를 잘 다스리는 자"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십대의 자녀로부터 존경을 받는 아버지는 하나님의 집에서 봉사할 자격이 구비된 사람입니다. 십대의 자녀와 대화를 나누는 아버지는 하나님의 권속을 보살필 자격을 갖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자녀와 말이 통하는 아버지라야 "자녀를 잘 다스리는 자"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어린 자녀들과 시간을 함께 가져 주는 그런 아버지라야 합니다.
가정적인 자격, 마지막으로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라고 규정합니다. 자기 집을 다스린다는 말은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는" 것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본래적인 의미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고대 사회에서는 오늘처럼 핵가족 제도가 아닌 것을 염두에 두고 살펴야 합니다. 자기 아내와 자녀들로서 가정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외 식솔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남녀 종들이 식솔로서 있었던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처신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족 구성원이 단순해진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남을 고용하고 있는 경우에 과연 고용인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지를 물어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남의 집에 일을 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때 주인에게 어떤 신뢰를 받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동료직원들로부터 어떤 인정을 받는지를 살펴야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몸된 교회에서 직분자로 세움을 입는다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집사나 장로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일은 신중히 처리되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 주위에 이런 자격을 완벽하게 갖춘 직분자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해서 되는대로 처리해서는 안됩니다. 이제부터라도 말씀의 기준을 살펴보면서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한 사람씩 세워나갈 때, 훈련해서 밀어주면 교회가 주님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지도력은 키워주는 것입니다. 아내가 인정해 주면 남편이 기가 삽니다. 저도 부임한지 3년이 채되지 않습니다. 울산교회가 발전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좀 못하는 것이 보여도 위해서 기도해 주고 잘하는 것은 칭찬해 주면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말씀의 기준을 살펴 보아야 되겠습니다. 말씀은 아주 명백하게 단순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집사, 어떤 사람이 선출되어야 합니까? 먼저 그 삶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존경받습니까? 첫째 언어생활이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자기 통제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술 담배등 중독성 기호품에 빠져있는 사람은 안됩니다. 존경받기 위해서 세 번째로 더러운 이익을 탐해서는 안됩니다. 부정한 이익을 절대 탐내서는 안됩니다. 울산교회 집사라고 하면 울산사회가 인정하는 양심가들 정말로 믿을수 있는 사람들로 통해지기를 바랍니다.
집사, 어떤 사람이 선출되어야 합니까?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자"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서 사죄함을 경험한 자이야 합니다. 믿음의 비밀을 간직했기에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비밀을 간직했기에 예수님이 귀한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라고 춤이라도 출 수 있는 하늘의 기쁨을 체험한 자이어야 합니다.
집사, 어떤 사람이 선출되어야 합니까? 집안에서 아내와 자식, 그리고 함께하는 식솔들, 직장의 동료들까지 존경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스무명 골라보십시오. 삼백명 가까운 남자 서리 집사 가운데 그 정도는 있습니다. 미리 답안을 준비해 오셔서 투표하는 성숙한 모습의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뿐만 아니라 남자 성도로서 여러분도 이 정도 목표를 세우시고 후보에 상관없이 이런 신앙생활의 모습을 갖추어 가겠다고 결단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