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하고 녹음 짙은 5월이다. 여행은 언제나 설레게 하는 환상의 낭만이다. 집에서 8시 10분에 나와 인천공항에서 낮 1시 10분 SU 251 러시아 항공 모스크바행을 탑승했다. 코카서스 3국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 이번 여행은 구소련의 통치를 받던 국가들이다. 러시아의 남은 문화와 접목된 새로운 문화를 보는 여행이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틱 3국인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여행에서도 그랬다. 중후함과 중세의 고풍스런 역사 유적과 그리고 코카서스 산맥의 웅장한 자연환경을 보기 위해서, 우리 부부가 선택한 세계여행 코스다. 행복하고 보람된 여정이 될 것이다.
* 인천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기내 모니터 항로
정시에 이륙한 러시아 항공 비행기가 베이징 상공을 날아 바이칼 호수를 지나 모스크바로 힘차게 날아간다. 모스크바에서 다시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로 갈 것이다. 모스크바까지는 9시간 30분 소요된다. 긴 비행이다. 우리 부부는 34A, 34B 창가 좌석이다. 음악, 영화, 남편이 가져온 나의 시집'별 하나 꽃불 피우다'를 보며 간다. 한낮의 창공 태양 빛이 비행기 차창을 휘감아 창문 셔터를 내렸다. 영화 '캡틴 필립스'를 보았다. 한국어로 번역 되어서 좋았다. 2008년 미국 화물선이 오만을 출항하여 케냐 뭄바사로 가는데 소말리아 부근 바다에서 소말리아 해적을 만나 바다에서 사투를 벌이는 영화다. 선장 필립스의 지혜로 모두 소탕된다. 인질로 잡힌 위험한 순간에 선장은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쓴다. 감명 깊은 대목이다. 소말리아 해적 4명 중 3명은 총살 당하여 죽고, 1명만 살았는데 그는 미국 재판에서 33년 구형 받고 복역 중이란다. 선장은 회복 되어 2010년에 다시 바다로 돌아갔단다. 그렇게 막이 내렸다. 말로만 듣던 소말리아 해적과 미국 화물선과의 피말리는 사투의 생생한 순간들을 보았다. 아주 리얼하게 잘 된 영화다. 기내식 2회를 하고 모니터 항공 안내 자막을 보니 비행기에 모스크바에 거의 왔다. 영화로 인해 지루하지 않게 흘러간 긴 비행시간이다.
* 러시아 모스크바 상공
비행기가 러시아 상공에 진입했다. 온통 울창한 침엽수림 나무 군락이 황홀할 만큼 비경을 선사한다. 나는 러시아 모스크바 공항에 여러 번 왔다. 모스크바에 올 때마다 저런 짙푸르고 광활한 나무 숲 풍경에 황홀했다. 모스크바 공항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자 나무 숲과 모스크바 시가지가 만나고 있다. 아름다운 정경이다. 비행기는 모스크바 공항 활주로에 정시에 착륙했다. 낮익은 모스크바 공항 건물 앞으로 이동한다.
* 모스크바 공항에서 아제르바이잔 바쿠행 환승
모스크바 공항에 현지시각으로 오후 6시경 도착했다. 한국과 시차가 -5시간이다. 한국시각은 오후 11시다. 한국에 있는 우리 두 아들네 가족들은 자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우리 귀여운 세 명의 손주들도 새근새근 꿈속이겠구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여기서 아제르바이잔 바쿠행 새벽 1시 비행기를 탑승한단다. 우리 부부는 이런저런 행복한 이야기로 대화를 나누며 창가에서 기다렸다. 러시아 항공 상징 색인 주황색 공항 건물이 보인다. 모스크바 공항은 여러 차례 와서 공항 건물도 공항 안도 낮익은 풍경으로 정감이 서린다. 러시아 SU 항공 에어로보트 비행기가 공항에 많다. 활주로에서 이륙하는 비행기도 많다. 활주로에서 질주하던 비행기가 순식간에 창공으로 차고 오른다. 백야로 북국의 일몰은 밤 9시 40분이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하늘에 석양이 드리운다. 이런 풍경도 세계여행에서보는 기막힌 선물이다. 준비해온 간식을 먹으며 아제르바이잔 바쿠행 비행기를 기다렸다. 캄캄한 공항의 어둠을 사르고 바쿠행 SU 항공은 정시에 이룩했다.
2014년 5월 28일 수요일 아제르바이잔 바쿠공항 도착, 고부스탄
* 아제르바이잔 바쿠 공항 도착
이곳 시각으로 새벽 5시에 아제르바이잔 바쿠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과느 -4시간 시차다. 모스크바와는 +1시간 시차다. 날씨가 포근하다. 공항이 아담하다. 공항직원들도 많고, 사람들도 많다. 운동선수들로 보이는 청년들이 낯선 아시아의 이방인인 우리를 신기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우리도 낯선 이방인인 그들을 신기한 시선으로 마주하여 바라보았다. 세계여행은 명소만이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와 사회, 그리고 이국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큰 몫을 차지한다. 현지 가이드와 미팅하여 공항 밖으로 나오니 새벽 여명에 밝아오는 아침이다. 새로 지은 바쿠공항 건물이 이색적이다. 사원처럼 쌓아올려 지은 독특한 건축양식의 건물이다. 호텔로 이동했다. 바쿠의 메인 도로를 주행하여 간다. 유럽 게임을 준비하며 신축하는 올림픽 경기장도 지나간다. 바쿠 도시의 우람한 건물들을 보면서 간다. 먼 나라 코카서스 3국의 여행은 이제 시작된 것이다. 피곤하지만 세계여행은 항상 신비로운 기대 속에서 행복하다.
* 아제르바이잔 호텔에서 본 바쿠 시가지
바쿠 호텔에 도착하여 먼저 여장을 풀었다. 한국에서 집을 떠난 지 거의 30여 시간만에 숙소에 들어왔다. 우리 부부의 방은 708호실이다. 긴 비행으로 피곤한 몸을 잠시 호텔 방에서 편안한 쉼으로 추스르고, 7시 30분에 호텔 부페식으로 조식을 했다. 식당은 11층이다. 식당 창문으로 카스피해와 바쿠 시가지를 조망했다. 아제르바이잔Azerbaijan은 소련을 구성했던 15개 공화국 중 하나다. 코카서스 산맥 남동부의 나라로 북쪽으로 러시아, 서쪽으로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남쪽으로 이란과 접해 있다. 동쪽은 카스피해와 접해 있다. 아르메니아를 사이에 두고 나히체반 자치공화국과 분쟁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가 있다. 코카서스 3국 주에서 가장 동쪽 국가다. 카스피해의 바쿠 만이 넓게 구부러져 있다. 바쿠 만의 항구는 바쿠 군도가 잘 가려주어 카스피해에서 가장 훌륭한 항구다. 혹독한 북풍도 막아낸다. 바쿠는 '바람이 심하게 부는'이라는 뜻을 지닌 페르시아어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석유산업과 행정을 담당하는 중요한 도시다. 역사기록에 언급된 것은 885년이지만 기원전 수세기 전에 사람들이 정착했다. 바쿠 시의 중심부는 이체리셰헤르라는 구시가지의 성곽 요새도시다. 성벽 대부분이 1806년 러시아의 정복 후 강화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구릉 경사면을 따라 자리한 바쿠는 해안을 따라 아름다운 공원이 있다.갇힌 바다지만 카스피해 바다와 만나는 도시 풍경이 비경이다. 고층 건물과 낮은 건물의 잔잔한 조화다. 건물 위로 솟구치는 불꽃 같은 푸른 빛의 독특한 타워가 있다. 나중에 안 것인데 불꽃 타워로 바쿠 상징 타워다. 모두 아름다운 정경이다.
* 아제르바이잔 바쿠 호텔 주변 풍경
아침 식사를 마치고 호텔 주변을 산책했다. 호텔 앞 거리에는 좁다란 길이지만 우람한 나무들이 가로수로 솟구쳐 오른다. 방에서도 바쿠 시가지를 조망했다. 바쿠는 지금 건설 붐이다. 높고 큰 덩치의 건물도 있고, 신축하는 공사 건물도 있다. 한국 건설 업체도 들어와 있다. 생각보다 훨씬 웅장한 도시 풍경이다. 오늘은 오전에 왕궁과 구시가지, 처녀탑으로도 불리는 메이든 탑을 관람할 것이다. 처녀탑은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바쿠를 조망할 것이다. 그리고 오후에는 고부스탄으로 간다. 바쿠 도심 숲 공원을 지나 오늘의 첫번째 여행지 왕궁으로 간다.
* 아제르바이잔 바쿠 미니어처 북 박물관
구시가지에 진입하여 왕궁으로 가는 길에 이 나라 시인의 동상도 보고 미니 책 박물관에 들렀다. 정말 아주 작은 책들이 유리창 안에 전시되어 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미니 책들이다. 여러 종류의 책들이 많지만 종교서적 종류가 많다. 너무 작아서 돋보기로 보아야 책이라는 것이 판명되는 크기의 책도 있다. 책장 위에는 알리예프 대통령 사진과 여러 나라의 국기가 걸려있다.
* 아제르바이잔 바쿠 쉬르반샤 궁전
아제르바이잔은 이슬람 국가다. 이웃 나라인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는 정교회 종교국가인데 코카서스 3국 중 아제르바이잔은 유일한 이슬람 종교국가다. 아제르바이잔 바쿠 쉬르반샤 궁전도 이슬람 양식이다. 궁전은 도심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있다. 궁전 입장 문은 주거지역과 접해 있다. 궁전 앞은 아름다운 공원이다. 아름다운 색상의 찻잔과 접시를 쌓아올린 탑도 있다. 공원의 찻잔 탑 뒤로는 바쿠 시가지의 불꽃 타워가 보인다. 투명한 푸른 색 불꽃 상징 모양의 타워가 아름답게 솟구친다. 3개로 된 불꽃 모양의 건물인데 겹치면 2개로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는 2개로 보인다. 두바이 호텔 건물과 비슷한 모양이다. 현재는 방송국으로 사용한다. 궁전 안에서도 간간이 보인다. 쉬르반샤 궁전은 오늘날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11세기 건축물이다.9세기부터 1538년까지 존재했던 쉬르반Shirvan은 지금의 아제르바이잔 바쿠 구시가지 성곽 도시다. 몽골족, 오스만투르크,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기도 했다. 1806년 러시아가 바쿠를 차지했고, 1920년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쉬르반샤 궁전ShirvanshahPalace은 수도를 바쿠로 옮긴 15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쉬르반 샤호프칸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이다. 아제르바이잔 건축물의 진주다. 그 만큼 역사적 가치가 높은 궁전이다. 바쿠의 가장 큰 명소다. 2000년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궁전 문 안으로 들어갔다. 돔 지붕의 이슬람 모스크 양식의 규모가 큰 궁전이다. 궁전에는 주거지역과 회의와 연회 장소, 쉬르반샤의 묘, 첨탑 회교 사원, 목욕탕, 점술사의 묘, 회교 사원 등이 있다. 18세기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많이 파괴되어 다시 복구했다. 궁전의 내부에는 그림과 오래된 왕궁과 왕족의 사진, 생활용품 등이 전시되고 있다. 화려한 색상의 이슬람 생활 풍경이 시선을 집중시킨다. 궁전의 보물들은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톱카프 궁전에 전리품으로 이전되었다. 정원 바닥에는 그 옛날의 에어컨 역할을 하던 환기 구멍도 아직 그대로 있다. 목욕탕도 허물어졌지만 형태가 남아 있다. 이 나라의 글자가 새겨진 돌판도 전시해 두었다. 건물 앞에는 아담한 꽃과 물 정원이 있다. 궁전을 비롯한 구시가지 모형도도 있다. 러시아의 지배국이었던 아제르바이잔이 자국의 종교인 이슬람 양식의 쉬르반샤 궁전을 지금까지 잘 보존해온 것은 훌륭한 국가 정신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 아제르바이잔 바쿠 구시가지
바쿠 구시가지는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Baku 중심부에 있는 성곽 도시로, 7세기부터 12세기 사이에 점차적으로 형성된 도시다. 쉬르반샤 궁전에서 나와 궁전 성벽을 타고 걸어서 구시가지로 갔다. 구시가지 거리는 바닥과 건물이 모두 중세 풍의 고풍스런 자취를 그대로 담고 있다. 구시가지 안에는 6천 명이 거주한다. 이 나라의 특산품인 카페트를 파는 가게가 도로변에 화려하게 들어서 있다. 미로의 좁은 골목과 붙어 있는 옛 건물들, 작은 정원 등 그림같이 아름다운 중세 도시의 특징을 보존하고 있다. 12세기에 건설된 구시가지 요새의 성벽 주위로 현대적인 바쿠 시의 잘 정돈된 도로와 거대한 건물들이 원형극장처럼 바쿠 만을 둘러싸고 있다. 구시가지는 차리 샤하르IchariShahar로도 불린다. 조금 전에 본 쉬르반샤 궁전을 비롯한 12세기의 요새 성벽과 탑, 시니그칼라 사원첨탑, 15세기에 건립된 메이든 탑MaidenTower, 물타니 쉼터 및 목욕탕, 등이 있다. 이외에도 중고서적을 많이 파는 서점, 2차 세계대전 중 드골이 머물던 드골하우스도 있다. 구시가지 거리를 걸으며 오래 된 건물들을 살펴보았다. 구시가지로 진입하는 성문 2개가 있다. 정말 외부와는 차단되었다는 것이 실감난다. 성문 앞에는 기념품 상가들이 즐비하다. 바쿠 올드시티는 2000년 쉬르반샤 궁전 및 메이든 탑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지구목록에 등재되었다. 아제르바이잔 지폐에도 그려져 있다.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던 역사 깊은 도시다. 11세기부터 쉬르반샤족, 몽골족, 러시아인, 페르시아인들이 번갈아 가며 점령했다. 이러한 역사를 거치면서 사산왕조, 아랍, 페르시아, 오스만, 러시아 등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아제르바이잔이 1806년 러시아에 합병되면서 성벽이 재건되고 요새가 확장되었다. 바쿠 원주민들이 올드 시티의 가게나 회교사원을 중심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곳이 크게 발달했다. 지금도 아주 다부지고 탄탄한 건물들이 구시가지를 빛내고 있다. 러시아의 점령으로 올드 시티의 전통적인 구조양식이 변화했고, 19세기와 20세기 초 사이에는 바로크 양식과 고딕양식의 유럽형 건물들이 세워졌다. 오랜 역사를 머금고 있는 바쿠 구시가지를 실제로 거닐어 본 것은 소중한 체험이다.
* 아제르바이잔 바쿠 구시가지 메이든 탑
바쿠 중심 구시가지에 있는 메이든 탑은 정복할 수 없는 성역이라는 탑이다. 12세기에 건설한 메이든 탑은 처녀의 탑, 소녀의 탑이라고도 부른다.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겠다는 당시 사람들의 투지를 나타낸다. 결코 범할 수 없는, 결코 침략 당하지 않은 처녀의 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높이 27m, 직경 16.5m의 우람한 원통형 탑이다. 높이가 아득하여 한참을 올려다보아야 전경이 잡힌다. 건물의 형태도 웅장하다. 메이든 탑은 아제르바이잔 건축의 독특한 기념물로 두 시대에 걸쳐 건설되었다. 자세히 보면 메이든 탑은 위와 아래가 다른 건축이다. 12세기에 지어진 메이든 탑은 기원전 6~7세기에 구축된 초기 구조물 위에 세운 것이다. 아래의 3층은 기원전 7세기와 기원전 7세기에 지어진 것이다. 천체 관측소나 조로아스터교의 예배소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탑의 위층은 12세기의 재건축을 기념하는 고대 아라비아 명문이 있다. 육안으로 보아도 아래와 위는 확연히 다르다. 아래 부분이 더 고풍스런고 위 부분이 조금 현대적이다. 메이든 탑 주변에는 좁은 길들을 따라서 18세기 후반에 건설된 집들이 연결되어 있다. 또한 12세기에 건설한 방어용 성곽도 있다. 바쿠의 상징인 불꽃 타워도 건물 3개 모두가 시가지 위로 뚜렷하게 잘 보인다. 한낮의 태양이 바쿠 구시가지와 메든 탑을 비경으로 조명한다. 원통형 구조의 메이든 탑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8층까지 올라가는 계단 설치되어 있다. 우리 부부도 입장하여 힘겹게 올라가 보았다. 각 층은 중간에 작은 구멍이 있는 낮고 둥근 천장으로 덮여 있다. 좁은 창을 통해 빛이 들어온다. 층마다 바쿠의 역사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벽면의 좁은 틈으로 카스피해와 바쿠 시가지 거리가 보인다. 모두 메이든 탑이 베풀어 주는 아름답고 소중한 진풍경이다.
* 아제르바이잔 메이든 탑 전망대에서 본 바쿠 시가지
메이든 탑 전망대에 올라왔다. 이곳은 바쿠 시가지를 조망하는 메이든 탑 전망대다. 높이 27m의 8층까지 올라온 것이다. 바쿠 시가지 전경이 한눈에 담긴다. 크고 작은 건물들이, 높고 낮은 건물들이 고전과 현대를 머금고 바쿠를 빛내고 있다. 카스피해가 드넓게 전개된다. 해변 항구에는 아제르바이잔 국기가 높이 솟구쳐 오른다. 유전설비도 보인다. 거리에는 행사 행렬 물결이 아름답다. 무엇을 먼저 보아야 할 지 혼돈될 만큼 아름다운 풍경들이 사방에 가득하다. 그래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쿠를 상징하는 불꽃 타워다. 3개의 건물로 구성된 불꽃 타워는 3개 건물의 높이가 약간 다르다.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의 투명한 푸른 빛이 찬란하다. 아제르바이잔은 '불의 나라'란 뜻이다. 아제르가 불이라는 뜻이다. 카스피해 연안에 위치한 아제르바이잔은 예전부터 땅 곳곳에서 불이 올라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불을 숭배하는 고대 종교인 배화교가 탄생했다. 불꽃 타워 곁에는 방송탑이 또한 높이 솟아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는 '바람의 도시'란 뜻이다. 바쿠는 카스피해에 인접한 도시로 바람이 심하다. 센 바람으로 카스피해변의 나무들은 비스듬히 자라고있다. 바쿠 성곽 도시는 구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살던 오래된 곳이다. 도심 지역은 12세기에 축조된 방어벽도 보존되어 있다. 성곽 도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얼마 남지 않은 중세 도시 중 하나다. 19세기와 20세기 초 바쿠는 석유를 생산하는 세계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구시가지 외곽 지역에 있는 도시는 이 시대에 건설된 건물들이다. 석유로 인해 상당한 부를 축적하여 건물을 지었다. 그런 역사의 영토, 불과 바람의 땅, 아제르바이잔 바쿠와 마주하고 있다. 이곳 시민과 어린이들도 많이 올라와 있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카스피해 바다와 접한 신비로운 바쿠의 비경을 가슴에 담는다. 우리 부부의 정원에 하얀 바람이 고일 때, 오늘 메이든 탑 전망대에서 본 뜨거운 저 카스피해와 바쿠의 비경을 회억하며 행복하리라.
* 아제르바이잔 카스피해 유전지대
아제르바이잔은 유전이 많은 나라다. 세계 3위 유전국이다. 기름보다 물값이 비싼 나라다. 예전에는 개인이 산유하기도 했다는데 현재는 국가에서 관리한다. 개인이 산유하여 억대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1848년 유전을 개발했다. 바쿠는 19세기 오일 붐 때 지어진 건물들이다. 바로크 양식 등 다양하다. 바쿠에서 시가지 외곽 지역을 거쳐서 고부스탄으로 이동한다. 야트막한 산 위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산정 마을은 부자 마을이다. 카스피해를 조망할 수 있는 값비싼 지역이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도 카스피해를 조망하며 간다. 카스피해 물빛이 장관이다. 카스피해변의 유전이 많은 유전지대를 지나간다. 크고 작은 유전지대가 즐비하다. 마을처럼 구성된 유전단지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도로 양편으로 유전지대는 계속 보인다. 바쿠의 경제기반은 석유다. 석유가 있다는 것이 알려진 것은 8세기부터이며, 15세기에 들어서자 지표면 유정에서 등불용 기름이 채취되었다. 근대 상업적인 탐사가 시작된 것은 1872년으로 루마니아에 이어 2번째다. 20세기 초 이곳의 유전은 세계 최대였고, 1940년대까진 그 최대 규모를 지켜왔다. 그러나 석유 매장량이 상당히 고갈된 오늘날은 유정 일부가 도시 내에 남아 있다. 지하 5090m까지 시추작업을 하거나 압셰론 반도를 가로질러 카스피 해까지 시추작업을 벌여야만 석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바쿠 만에는 많은 유정탑이 도시를 향해 세워져 있다. 보다 작은 규모의 도시 대부분은 시추 중심지로서, 여러 정유공장 및 가공처리공장과 송유관으로 연결되어 있다. 석유는 바쿠에서 흑해를 끼고 있는 바투미로 송유관을 통해 보내지거나, 유조선으로 카스피 해를 가로지른 뒤 볼가 강을 거슬러 운송된다. 그밖에도 석유산업에 필요한 장비 제조업의 중심지로 20여 개의 공장이 가동중이다. 다른 기계공업으로 조선업·선박수리업·전기기계류 제조업 등이 있다. 또한 화학제품·시멘트·직물·신발류·식료품 등도 생산된다. 진풍경으로 스쳐지나가는 유전지대가 부러운 시선으로 가슴에 담긴다. 도로변의 건물에는 모두 가스관이 밖으로 설치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땅속에 매설하는 가스관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지상에 설치한다. 아제르바이잔은 석유와 가스 매장량이 아주 많은 나라다. 가스 매장량이 화폐로 환산하면 3조원이나 된단다. 아제르바이잔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천연자원이다. 가스 공장과 높은 장치의 시멘트 공장도 보인다. 1년에 4천여만 톤의 석유를 배관으로 이동한다. 커다란 배관이 들녘 곳곳에 놓여있다. 조지아 트빌리시까지 연결된 가스관이다. 터키를 거쳐 유럽까지도 들어간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런 유전 산업으로 연간 1백억 불의 외화를 벌어 들인단다. 건조한 땅으로 농사 짓는 땅은 없다. 예전에는 말이나 당나귀가 석유를 운반했는데 배관이 발달하여 그들의 직업도 잃었다. 들녘은 온통 사막화 된 건조한 땅다. 저런 땅에서 사람이 어찌 살까 싶은데 지구는 참으로 공평하다. 땅속에 지하자원을 풍부하게 묻어주어 살아갈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지상은 살벌한 풍경이지만 자하는 넉넉한 자원이 매장된 축복의 영토다.
* 아제르바이잔 고부스탄 박물관
고부스탄 암각화 유적지로 가기 전에 박물관을 먼저 들러 관람했다. 입구에는 경찰초소가 있고 남자 경찰이 나와서 차량을 안내한다. 버스에서 하차하자 바위 앞에 원시인 세 명이 돌과 막대기를 들고 선사시대의 생활상을 나타내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박물관 진입로에는 인공으로 물을 주어 기른 꽃과 식물들이 화사하게 길손을 맞이 한다.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아담한 박물관 건물이 있다. 이곳에는 옛날 그 당시의 여러가지 생활상을 전시해 놓았다. 울창한 숲의 동물들, 사냥하는 모습, 가죽옷을 입은 사람, 춤추는 모습, 암각화 등 소증한 역사적 자료가 많다. 박물관을 관람하고 암각화가 있는 유적지 산으로 향했다.
* 아제르바이잔 고부스탄 암각화 유적지
고부스탄Gobustan 암각화 유적지는 바쿠 남쪽 65km 지점에 있는 사막건조기후의 사암지대에 있다. 기원전 8세기 선사시대 사람들이 거주했던 지역이다. 석유, 천연가스 등의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기도 하다. 고부스탄은 돌을 뜻하는 고부gobi와 땅을 뜻하는 스탄stan이 합성된 ‘바위 지역’이란 뜻이다. '텅 빈 땅'이라는 뜻도 품고 있다. 고부스탄에는 암각화 유적지 산이 3개가 있다. 우리는 그 중에서 가장 큰 산에 온 것이다. 박물관 입구에 잇는 작은 산은 지나쳐서 왔다. 걸어서 산으로 올라가니 중턱에 'QOBUSTAN'이라는 안내 문구와 함께 자세한 설명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고부스탄 주립 보호구로 선사 청동기 시대의 유적지다. 바위에는 약 5천 년에서 2만 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약 6,200여 점의 암각화가 있다. 바위 곳곳에 가늘게 또는 굵게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암각화에는 그 당시 사람들이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며 새긴 생활상이 담겨 있다. 사냥, 전쟁 그리고 낙타, 사슴, 소, 10명이 손을 잡고 추는 춤, 황소싸움, 배 승선, 창을 든 전사, 해와 별 등이 그려져 있다. 암각화 보존을 위해 암각화마다 번호가 부여되어 있다. 49번 암각화가 가장 대표적이다. 암각화는 기원전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0기의 무덤과 10여 점의 유물도 있다. 고부스탄은 1966년에 아제르바이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고부스탄의 암각화는 2007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지진과 바람에 의한 풍식작용으로 일부 훼손된 것도 있다. 산에서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면 건조한 평원과 카스피해가 보인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기막힌 비경의 풍경이다. 지금 나는 과거의 땅을 걸으며 현세의 땅을 조망하고 있다. 바닥의 바위에는 그 당시의 부엌이었던 자리도 있다. 빗물을 받아 사용하던 구멍도 있다. 물이 흘러드는 물길도 바위에 내어 놓았다. 하산하여 길손을 위해 마련해 놓은 하얀 천막의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했다. 휴게소 마당에에서 석관과 무덤의 비석도 보았다. 오래 전 인류의 역사가 보존된 신비로운 영토다에서 값진 유적과 유물을 본 소중한 여정이다.
* 아제르바이잔 고부스탄 암각화
고부스탄 암각화 유적지 산을 오르며 바위에 새겨진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당시의 생활상을 나타내는 그림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곳 고부스탄 주립 보호구에 있는 암각화 그림들은 약 5천 년에서 2만 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한다. 고부스탄의 3개 산에 약 6,200여 점의 암각화가 있다. 이곳 암각화는 그 당시 사람들이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며 새긴 것이다. 수렵 및 채취를 하는 그림, 전쟁 장면, 낙타, 사슴, 소 등과 같은 동물들이 새겨져 있다. 10명이 손을 잡고 춤추는 얄리얄리 춤그림도 있다. 황소 싸움 장면, 무장한 사람이 배를 타고 노를 젓고 있는 장면, 창을 쥐고 있는 전사, 낙타, 해와 별 등도 그려져 있다. 해산하는 여인 모습도 새겨져 있다. 암각화 보존을 위해 암각화마다 번호가 부여되어 있다. 어찌하여 이런 유물이 현세까지 보존되어 있는지 신비롭다. 아마도 건조한 가막기후가 지켜준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어딘가의 산에도 이런 유적지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부러움이 솟구쳤다.
* 아제르바이잔 고부스탄에서 바라본 카스피해 주변 풍경
고부스탄 암각화 유적지의 산에서 카스피해가 멀리 보인다. 해변에는 고부스탄 시가지가 있다. 온통 건조한 들녘 평원이다. 건조한 들녘에는 스탈린 감옥이었다는 긴 담장의 건물도 보인다. 고부스탄 암각화 유적지 산은 3개가 있는데 조금 전 이곳에 오기 전에 본 고부스탄 작은 산이 멀리 보인다.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테이블마운틴 처럼 산정이 평평하다. 바위와 흙만이 나뒹구는 영토다. 손님을 위해 하얀 대형 천막 휴게소가 있다. 그곳에 올라가서 카스피해를 바라보니 더욱 잘 보인다. 천막 곁에는 파란 나무 한 그루가 힘겹게 생명을 유지하여 싱그러운 풍경이다.
* 아제르바이잔 고부스탄 마을 풍경
고부스탄 암각화 유적지 산에서 내려왔다. 진흙화산으로 이동하는데 도중의 길에서 이곳 지역 택시 3대가 달려와 있다. 우리가 탄 대형 버스로는 좁은 길의 진흙화산 지대에 올라가지 못하여 우리를 태우고 가겠다는 의사를 나타낸다. 손님을 위한 배려심이 크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봉고차를 섭외한 관계로 그냥 지나갔다. 마을 입구에 고부스탄 암각화 유적지를 선전하는 돌비가 세워져 있다. 들녘에는 유조 기차가 끝없이 길게 지나간다. 조지아행 유조 기차다. 터키를 거쳐 유럽까지도 간다. 유조 기차로 운반하는 것이 배관보다 저렴만 비용이 든다. 옛날에는 말이나 당나귀에 싣고 운반했다. 온통 사막화 된 건조한 영토에 긴 호흡으로 살아 움직이는 유조 기차다. 신기한 이색 풍경의 땅이다.
* 아제르바이잔 고부스탄 진흙화산 가는 길 분출된 석유
고부스탄 암각화 유적지에서 나와 진흙화산으로 가기 위해 마을 주유소에서 하차했다. 진흙화산 가는 길이 좁아서 대형버스는 운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봉고버스로 바꾸어 타고 진흙화산으로 향했다. 오래 된 낡은 차인데 안에 고운 장식을 많이 해놓았다. 차의 앞 유리창에는 아제르바이잔의 국기도 걸어두었다. 점점 진흙화산 지대로 가까이 다가가자 들녘에 검은 색 기름이 있다. 지하에서 자연적으로 분출된 석유다. 얼마나 많은 양의 유전지대인지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저 멀리에서는 높은 기둥에서 불꽃이 춤춘다. 가스 회사인 것 같다. 예전에는 개인도 산유하기도 했는데 오늘날은 국가에서만 산유할 수 있다. 물값보다 기름값이 더 싼 나라라는 것이 실감나는 현장이다. 건조한 땅에서 물은 볼 수 없는데 땅에서 솟구친 기름을 보고 있으니 말이다. 부러운 시선으로 눈길이 떼어지지 않는다.
* 아제르바이잔 고부스탄 진흙화산
고부스탄 암각화 유적지를 보고 인근의 진흙화산으로 왔다. 온통 사막화 된 건조한 땅이 우뚝우뚝 솟은 작은 산봉우리들이 벌거벗은 진흙 살점으로 서 있다. 더 가까이 산 둔덕을 올라가 보니 진흙탕 물이 솟아 흐르는 곳도 있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곳도 있다.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가스로 인해 진흙이 분출하는 진흙화산이다. 석유, 천연가스 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다. 오일과 가스가 함유된 진회색의 진흙화산도 있다. 분출된 진흙의 기포가 터지면 가스냄새가 난다. 조금 큰 구멍에서는 팥죽을 끓이는 것처럼 진흙물 방울이 커다랗게 솟아올랐다가 푹 꺼지곤 한다. 폭발한다면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제르바이잔의 신비로운 영토 한자락이다.
* 아제르바이잔 고부스탄 진흙화산 주변 건조한 땅
고부스탄 진흙화산을 보고 내려오는데 온통 사막화 된 땅이다. 산자락도 모야만 산이지 사막이다. 미국 서부 모하비 사막 같은 형상이다. 건조한 땅에 마른 풀 포기만 있다. 그래도 마을이 있다. 이렇게 건조한 땅에서 어찌 살까 싶은데 가축들도 떼지어 다닌다. 이제 다시 고부스탄을 떠나 바쿠로 간다.
* 아제르바이잔 바쿠 카스피해 유전시설
고부스탄에 갈 때도 보았던 유전시설이다. 카스피해 해변 여러 곳에 크고 작은 규모로 설치되어 있다. 어려운 나라에서 석유가 저리도 많아,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보물이 아제르바이잔의 경제를 큰 몫으로 담당하고 있다. 부러운 풍경이다.
* 아제르바이잔 바쿠 올림픽 경기장
아제르바이잔이 2015년 제1회 유럽피안 올림픽을 개최하기 올림픽 경기장을 건설하는 중이다. 한국 기업도 참여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하계올림픽 등 국제스포츠 행사유치를 위해 스포프 인프라 구축에 힘쓰고 있다. 바쿠 올림픽 경기장은 그 중 하나로 2015년 2월 완공 예정이다. 카스피해 해변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 아제르바이잔 바쿠 카스피해 해변 공원 풍경
카스피해는 세계 최대의 내륙 바다다. 해안선의 대부분이 러시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과 접해 있다. 지금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로 들어기면서 카스피해를 보고 있다. 평균너비가 320㎞, 길이는 북에서 남으로 약 1,200㎞ 뻗어 있다. 면적은 약 39만 제곱킬로미터로 한반도 거의 2배 크기다. 어마어마한 큰 규모의 바다가 유럽 남동쪽 끝, 카프카스 산맥 동쪽, 중앙 아시아 서부 평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육지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남쪽으로는 이란의 산맥과도 접해 있다.
카스피해로 흘러드는 주요강은 볼가강, 우랄강, 테레크강으로 유입 강물량의 88%다. 카스피해에는 50개의 매우 작은 섬들이 있다. 북부 카스피해의 평균 깊이는 4~6m로 가장 얕다. 중부 카스피해는 가파른 경사와 비탈로 기복이 심하다. 남부 카스피해는 저지대로 최대깊이가 1024m다. 카스피해에는 오래 전부터 철갑상어가 살았다. 그러나 최근 수십년 간 해수면이 낮아지고 산란장이 메말라 철갑상어의 수가 크게 감소하였다. 1940~1950년대 지질탐사로 지금은 석유와 천연가스가 카스피해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또한 교통의 중심지로 매우 중요하며, 항구로서도 중요한 구실을 담당한다.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카스피해Caspian Sea 해변에는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다. 국립공원이다. 갇힌 바다지만 드넓은 카스피해 해변에는 바쿠 시가지가 접해 있다. 해안 도로를 따라 길게 공원이 전개된다. 자전거 도로도 있고 선착장도 있다. 영국 템즈강변에서 보았던 니들아이 같은 둥근 놀이 기구도 있다. 현대풍의 바쿠 도시와 낭만이 서린 카스피해 바다와 하늘과 만나 비경을 선사한다.
* 아제르바이잔 바쿠 국립 카페트 박물관
아제르바이잔은 카페트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세계 7대 카페트 생산지 중 하나다. 이란에 1개 생산 지역, 이곳에 6개 생산 지역이 있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결혼하기 전에 여자가 카페트를 짜서 남자에게 선물로 준다. 남자는 카페트를 잘 짜는 여자를 배우자로 선택한다. 카페트 박물관 곁에 있는 건물 옆으로웨딩 드레스를 입고 걷는 모습의 남녀 한 쌍이 보인다. 결혼하여 걸어가는 남녀다. 결혼하면 저렇게 걷는 것이 이 나라의 결혼 풍습이다. 카페트 박물관이 바로 곁에 있다.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중심부에 있는 이 박물관은 국가카페트 박물관이라고 부른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카페트는 국가가 다룰만큼 경제적으로 소중한생산 품목이다. 아제르바이잔 카페트와 실용미술 국가박물관이라고도 한다. 그 만큼 예술이 부여된 카페트라는 뜻이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 다양한 기술과 재료의 카페트와 양탄자가 전시되어 있다. 세계에서 아제르바이잔 카페트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세계 최초이며, 세계 최대의 이곳 카페트 박물관은1967년에 설립되었다. 카페트를 둘둘 말아 놓은 듯한 굉장한 크기의 건물이다.아제르바이잔의 특산품이며, 이곳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카페트 박물관은 카스피해 해변에 있어서 더욱 아름다운 경관이다.
* 아제르바이잔 바쿠 카스피해 해변 베네치아 공원
바쿠로 시가지로 진입하는 도로변에 베네치아 공원이 있다. 카스피해와 접하여 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본 떠 만든 공원이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처럼 물로 둘러싸인 건물도 있고, 분수로 솟구치는 물기둥도 있다. 이런 공원의 조성이 가능 한 것은 오일 머니 덕이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생산되는 오일은 이 나라 경제의 큰 힘이다.
* 아제르바이잔 바쿠 카스피해 불바르 공원 산책
저녁 무렵 바쿠로 진입하여 카스피해 해변 불바르 공원Bulvar Park에잠시 들러 산책했다. 바쿠 카스피해를 따라 조성된 공원이다. 주변에는 카페트 박물관, 기념품 상가, 식당 등이 많다. 바쿠의 시민들이 즐겨 찾는 중심지로 붐비고 있다. 도로에서 공원으로 들어서자 고운 꽃들이 먼저 반긴다. 카스피해 연안의 도로를 따라 공원이 길게 조성되어 있다. 바쿠 도심의 불꽃 타워가 우뚝 솟구쳐 오른다. 석양에 바다와 만나 비경으로 뜬다. 비가 간간이 내린다. 나무가 울창한 길을 따라 가니 대형 쇼핑몰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백화점 격인 곳이다. 건물 앞에는 현대풍의 조각 작품이 설치되어 있고, 건물도 현대적인 세련된 구조다. 숲 공원에는 공중에 떠 있는 기이한 수도꼭지 작품도 있다. 갇힌 바다지만 드넓은 카스피해 해변에서 멋진 낭만을 만나는 황홀한 여정이다.
* 아제르바이잔 바쿠 구시가지 카라반 전통식당 석식
카라반 전통식당에서 전통 쇼를 보며 먹는 석식이다. 바쿠 구시가지 메이든 타워가 있는 근처의 카라반 전통식당이다. 실크로드 교역시절의 카라반들이 머물던 식당이다. 어두운 조명의 아늑한 공간에서 먼저 식사를 하였다. 식사 후에는 바깥 마당에서 쇼를 관람했다. 작은 무대에 중년 남자가 나와 불쇼를 먼저 한다. 막대기에 불을 붙여 내게로 와서 손에 쥐어준다. 불이라는 것을 확인시키려는 것 같다. 그리고는 손으로 불을 끈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진부한 쇼인데 이곳 사람들에게는 신기한 쇼인 것 같다. 여자 무용수가 나와서 관객 중 한 명을 불러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고풍스런 카라반 식당에서 중세의 음식을 먹으며 카라반의 생활상을 잠시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 아제르바이잔 바쿠 구시가지 야경
저녁식사를 하고 나오니 밤이다. 바쿠 구시가지의 메이든 타워가 불빛 조명에 그윽하다. 바쿠 도심의 불꽃 타워는 그야말로 불꽃처럼 붉은 불꽃의 형상이다. 아름다운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야경이다.
2014년 5월 29일 목요일 아제르바이잔 바쿠, 쉐마크, 쉐키
* 아제르바이잔 바쿠 호텔 출발
오전 6시 30분 모닝콜, 7시30분 조식, 8시 출발이다. 오늘은 쉐키로 이동한다. 가는 길에 구왕궁이 있던 작은 도시 쉐마키에도 들를 것이다. 쉐마키는 아제르바이잔의 수도가 있던 지역인데 지진으로 수도를 바쿠로 옮겼다.버스 안에서 현지 가이드가 한국의 아리랑 격인 노래를 불러준다. 바쿠 시내의 국제버스터미널을 지나서 간다. 난민촌도 지난다. 카스피해를 따라 간다.
* 아제르바이잔 목축 마을 풍경
목초지를 재배하여 동물을 기르는 목축 마을이다. 사막건조기후로 황폐화 된 영토에 초지를 인공으로 만들어 가축을 기르는 것이다. 마을에는 목장도 있고 소들이 많다. 무슬림 공동 묘지도 있다.
* 아제르바이잔 디리바바 영묘 모스크
이곳 디리바바 무슬림 모스크는 디리바바Diri Baba 성자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아제르바이잔의 북서쪽 조그만 도시 마자라Maraza시에 있다. 수도 바쿠에서 101Km 떨어진 위치다. 사막건조기후의 사암지대인 고부스탄에 있다. 고부스탄은 아제르바이잔어로 '텅빈 땅'이란 뜻이다. 마자라Mazara 마을은 고부스탄의 행정 중심지다. 해발고도 800m의 지역이다. 바쿠에서 쉐마키로 가는 도중에 들른 곳이다. 고부스탄에는 디리바바 영묘 모스크 외에 라비린스 동굴도 있다. 어머니가 죽은 아들에 대한 진한 눈물의 사랑이 서린 동굴이다. 전설이겠지만 바위에서는 아직도 어머니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고부스탄에서 바위에 새긴 암각화와 진흙화산을 보았는데 이곳 디리바바 영묘도 고부스탄의 명소다. 차에서 내려 계곡 곁의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서 만났다. 모스크는 바위 벽에 바짝 붙어있다. 둥근 돔의 하얀 지붕과 아치형 문이 이슬람 모스크임을 알리고 있다. 하지만 바위벽에 붙은 아주 작은 규모여서 소슬하다. 모스크 지붕 위 둔덕에는 동물들이 풀을 뜯고 있다. 가파른 계단을 걸어서 모스크로 올라갔다. 문 앞에는 디리바바Diri Baba의 묘이며 1402년에 건립되었다는 문구가 부착되어 있다.디리바바는 이란의 이슬람 수피파 성자다. 실크로드 전성기에 이곳에서 수행하던 압바스 쉐이크 두주라는 성인다. 디리바바는 평생 종교적으로 신비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기행과 언행으로 기적을 많이 일으켰다. 그래서 지금도 살아있는 기행 성자로 추앙받고 있다. 그가 행한 기적으로 인해 살아있는 할아버지로 불린다. 디리바바의 영묘와 모스크가 함께 있는 조촐한 이곳 건축물은 순례자들의 성지다. 벽면 굴속에서 거주하는 기도원 용도의 모스크다. 지금도 영묘와 모스크를 지키는 수행자가 있다. 모스크 안은 다듬어지지 않은 협소한 공간인데 벽면에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낮은 책상 위에는 성서가 있다. 디리바바의 묘가 있던 곳이라 하니 서늘한 기분이 든다. 바위에 구멍을 뚫고 디리바바의 시신을 넣고는 구멍을 막았던 장소다. 그의 무덤이 놓인 바로 앞에는 바위 절벽을 타고 모스크 형태로 암벽에 사당을 지은 것이다. 이슬람식 묘지다. 마자라 마을에는 무슬림 공동묘지도 있다. 이곳 모스크에 오기 전에 보았다. 이 나라는 무슬림 신앙인이어도 돼지고기와 술을 먹는다. 여성해방으로 히잡도 벗는다. 모스크에서 나와 다시 가파른 계단을 따라 위로 나가니 마자라 마을이 전개된다. 주변은 드넓은 마자라 고원이다. 건조한 땅이지만 파릇하게 보이는 목초지에서는 소들이 풀을 뜯는다. 모스크 곁에 목장 건물도 있다. 이곳은 실크로드 교역의 카라반들이 왕래하던 길목의 요충지였다. 저 아래 보이는 마자라 마을에는 아직도 그 당시 중세의 여관터가 있다. 아슬한 계단을 따라 다시 내려왔다. 큰 가스관이 모스크앞으로 지나간다. 초라하지만 사람의 흔적이 고인 수도와 화장실도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작은 도시 마자라에서 무슬림 성자의 영혼을 만난 소슬한 성지다.
* 아제르바이잔 디리바바 모스크에서 본 시골 풍경
디리바바 무슬림 모스크를 보고 위로 가파른 언덕을 올라오니 아제르바이잔의 시골 풍경이 전개된다. 계곡 위 바위 절벽 아래에는 디리바바의 묘지가 있는 모스크 지붕이 보인다. 이곳에 오면서 목초지를 재배하여 가축을 기르는 풍경을 종종 보았는데 디리바바 모스크 바로 곁에서도 목장과 동물들을 본다. 크게 지어놓은 목장 안과 주변에 소들이 먹이를 먹고 있다. 목부도 구릉진 언덕 아래의 동물에게로 간다. 우리 부부가 차에서 내려 걸어온 길 근처에는 아담한 도시 마라자Maraza 시골 마을이 있다. 이곳 마자라 마을에는 무슬림 공동묘지가 있다. 디리바바 영묘 모스크 가까운 거리에서 보았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건조한 지역만 보았는데 북쪽으로 가면서 푸른 지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도 건조한 풍경이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풍경에 비하면 파란 들녘이다. 시골 마을 주택 사이로 푸른 나무들도 보인다. 파란 하늘의 하얀 구름도 고운 풍경을 선사한다.
* 아제르바이잔 건조한 들녘 동물들
과거 수도였던 쉐마키 마을의 왕조 무덤 유적지로 간다. 쉐마키는 지진 지역이다. 이곳 지역들은 실크로드의 무역중개 요충지다. 와인 생산지역이기도 하다. 도로변 건조한 들녘에는 가축들이 많다. 풀이 많지 않은 힘겨운 목축지다. 목장의 경계로 키운 소나무 군락도 있다. 지금까지 보아온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는 대부분 사막화 된 건조지대였는데 동물과 풀이 약간 보이는 정겨운 풍경이다.
* 아제르바이잔 들녘 국장 문양과 국기
아제르바이잔 들녘을 달리는데 언덕진 능선에 국가를 상징하는 문장이 있다. 언덕 위에 국장 문양과 국기가 세워져 있다. 대통령 이름도 새겨져 있다. 독특한 풍경이다.
* 아제르바이잔 쉬르반 왕조의 묘지
쉐마키Samaxi 마을에 있는 쉬르반 왕조의 묘지에 왔다. 쾌나 큰 공동묘지에는 외부로부터 들어갈 수 있는 차도가 놓여있어 쉽게 도착했다. 여기저기 비석들이 지진으로 기울어지고 쓰러져 있다. 쉐마키의 쉬르반 왕조의 돔형 가족 묘지는 허물어진 것도 있지만 남아있는 것은 매우 웅장하다. 높은 신분의 가문은 조상 대대로 무덤을 잘 관리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지역별로 왕조가 있었다. 쉐마키는 중세의 쉬르반 왕조시대에 아제르바이잔 수도였던 곳이다. 종교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곳 묘역은 9~16세기 쉬르반 왕조의 집안 무덤이다. 왕족 무덤은 3명씩 묻힌 7개의 큰 돔형 무덤이다. 일반인 무덤은 낮은 평무덤으로 비석만 세워져 있다. 돔형 왕조 무덤은 얼핏보면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로 보일 만큼 큰 규모다. 문이 열려있어 안으로로 들어가 보니 가족 무덤이 3개 있다. 바닥에 대리석 관이 3개 있고 관 뒤로는 문양이 새겨진 비석을 세워 놓았다. 천장도 돔형 벅돌 구조다. 12세기에 지진이 크게 나서 쉐마키 도시가 대부분 허물어졌다. 왕조 묘지도 지진이 나서 마을 밖의 이곳 높은 언덕으로 이동했다. 쉬르반 왕조는 수도 기능이 마비된 쉐마키에서 바쿠로 천도했다. 지진으로 인해 왕조의 유적은 남아있지 않고, 마을 높은 언덕지대에 왕조의 묘역만 남아있다. 오래된 왕조의 묘역이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중세의 장례문화와 묘역으로 역사적인 가치가 크다. 아래로는 쉐마키마을이 있다. 나무 사이로 주택들이 줄지어 있다 .현대의와 과거 중세가 만나고 있다. 산자와 죽은 자가 상면하고 있다. 죽은 자의 곁에는 대형 버스가 산자의 이동을 돕기 위해 들어와 있다. 세월을 초월하여 넘나드는 경이로운 묘역에서, 타국이지만 삶과 죽음의 영토를 소슬하게 밟아보는 여정이다.
* 아제르바이잔 쉬르반 왕조묘지 마을 쉐마키
쉬르반 왕조의 묘역을 가기 위해 지나가는 쉐마키 마을이다.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130Km 떨어진 곳이다. 인구 32000명의 작은 시골 도시 마을이다. 예술인 거리가 길게 이어져 있다. 이곳 지역의 시인 등 예술인 조각상을 많이 세워 놓았다. 왕조묘역에 갈 때도, 나올 때도 훈훈한 정경의 거리를 지나서 왕래했다. 쉐마키는 아제르바이잔의의 수도였던 곳이다. 왕조묘역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니 아름다운 마을이 전개된다. 마을 가운데 주택들 사이로 코카서스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살색 건물의 모스크가 보인다. 태양신 '주마'를 모시던 자리였다. 저곳 마을 안의 살색 건물 모스크는 쉐마키의 11번 지진에서 8번 무너지지 않았다. 그 만큼 잘 보존된 모스크다. 쉐마키는 지진으로 많이 허물어진 도시다. 지진 떄문에 이곳에서 바쿠로 천도할 만큼 아픔이 서린 도시다. 마을에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이 그대로 방치된 것을 보았다. 중학교로 보이는 학교와 경찰서도 보았다. 현대의 문명 도시에서 중세의 왕조 묘지가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쉐마키 마을이 조금은 흉칙해 보이지만, 역사를 존중하는 위대한 마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아제르바이잔 전통 중식
휴게소에 들러 현지 전통식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메뉴가 충실하다. 3공주라고 부르는 음식으로 피망, 가지, 토마토 속에 고기 다진 것을 넣어서 찐 요리가 일품이다. 맛도 참 좋다. 과일, 음료까지 아주 정성껏 차려서 대접하는 손길이 아름답다. 몇 종류의 과일을 썰어 유리병에 담아 우려낸 음료가 상큼하게 맛있다. 장미 정원과 연못도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쉐키로 이동한다. 여기서 4시간 소요. 휴게소를 한번 더 거쳐서 갈 것이다. 잠시 들렀지만 고운 뜨락과 정성이 담긴 손길의 대접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휴게소다.
* 아제르바이잔 마른 강
산자락과 들녘이 만나는 곳에 강이 있다. 그런데 강물은 아주 조금 흐르고 돌멩이만 구른다. 이 나라 말로 악스 강이다. '하얀 물'이란 뜻이다. 비가 안 올 때는 마른 강이다. 겨울에만 물이 흐른다. 코카서스 산맥에서 발원한다. 아제르바이잔 북쪽으로 갈수록 푸른 들녘이다. 우리는 지금 조지아로 넘어가기 위해 북쪽으로 가고 있다. 초지에는 가축도 보이고, 말을 타고 가는 목부도 보인다. 농사 짓는 사람들도 있다. 산이 울창한데 강물이 없다는 것이 우리나와는 다른 풍경이다.
* 아제르바이잔 도로변 과일가게
아제르바이잔 도로변에서 노천 과일가게를 만났다. 과일, 야채, 잼 등을 판다. 과일을 잼처럼 만들어 둥근 모양으로 말려 비닐에 포장한 건과일을 매달아 놓은 것이 이색 풍경이다. 그 건과일은 시고, 떫고, 쓰고 묘한 강한 맛을 낸다. 체리, 복숭아, 사과, 토마토 등 다양한 과일들이 많다. 도로변에는 호두나무가 가로수로 심겨져 있다.
* 아제르바이잔 코카서스 산맥 풍경
코카서스 산맥의 우람한 풍경을 보며 계속 산길을 넘어서 간다. 스키 타는 지역이기도 하다. 높은 산에는 눈이 많고 스키대가 있다. 이곳 지역의 최고 높은 산은 4600m다. 코카서스 산맥은 3000~6000m다. 이곳은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경계 산맥이다. 저 산 너머는 러시아다. 설봉이 비경이다. 산자락 아래에는 마을이 있다. 호두산지 마을이다. 뒤로는 코카서스 산맥과 설봉 그리고 목장이 비경이고. 우측은 코카서스 산맥이 비경이다. 좌측에는 낮은 산과 밀 재배 지역이 있다. 이곳은 난민들 마을이다. 도로변에서 난민들이 빵을 구워서 판다. 그들의 생활상이기도 하다. 코카서스 산맥은 하얀 구름이 더욱 고운 풍경을 그려낸다. 점점 해발 고도가 높아지고 있다.
* 아제르바이잔 쉐키 칸 궁전
쉐키는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의 접경도시다. 아제르바이잔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의 인구 6만3천여 명이 거주하는 작은 도시다. 역사도 깊고 울창한 나무 숲이 비경이다. 아제르바이잔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다. 다게스탄으로 이어지는 무역 중심지였다. 18~19세기에 이 지역을 다스리던 쉐키 칸 왕조의 수도였다. 쉐키Sheki 칸 궁전은 칸 왕조의 여름 별궁이다. 칸 사라이, 쉐키 칸 팰리스 등으로도 불린다. 쉐키 칸은 쉐키의 영주를 말한다. 사라이는 숙소를 뜻한다. 그러니까 쉐키 왕이 사는 궁전이다. 1968년까지의 이 지역 옛 이름은 누카Nukha였다. 구소련 시절인 1960년대 누카에서 쉐키로 지명이 변경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은 11개 기후대의 나라인데, 쉐키는 9개 기후대가 지나는 지역이다. 그런 기후 영향으로 쉐키는 대홍수 침수가 잦았다. 1716년 쉐키 마을 대홍수로 지금보다 윗쪽에 건설했던 소왕국이 사라졌다. 1740년 하시세라비 칸이 이곳에 와서 다시 성을 축성했다. 그러나 1772년 다시 대홍수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때 언덕으로 이주하여 현재의 이곳 지역에 다시 성채를 건설하여 쉐키 칸 왕국의 수도를 이전했다. 지금의 궁전은 1752년부터 1762년까지 10년 간 지은 것이다. 2년 동안은 외부 건설, 8년 동안은 내부 그림 제작을 완성했다. 그림의 85%가 오리지널이다. 15%만 복원한 것이다. 그래서 일체 사진촬영 금지다. 18세기 건축 당시에는 40여개 동의 건물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여려 차례의 홍수를 거치면서 이동하며, 왕궁 건축을 거듭하며, 지켜온 쉐키 영토를 1805년 러시아에게 침탈했다. 유물도 러시아에서 많이 가져갔다. 마지막 칸은 1819년에 사망했다. 칸 왕조가 사라진 후에는 실크 견직물과 무역상 교역도시가 되었다. 트빌리시와 바쿠를 잇는 도시이며 주요 통상로의 중간 지점으로 카라반이 머물던 곳이다.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쉐키까지는 380km다. 쉐키는 해발고도가 1200m 이상의 고지대 마을이다. 코카서스 산맥에 인접하여 자연환경이 좋아 장수촌이기도 하다. 쉐키에 도착하여 좁은 언덕길로 인해 버스가 가지 못하여 작은 차량으로 바꾸어 타고 올라갔다. 쉐키 궁전 안에는 지금도 집무실. 휴식처. 접견실 ,궁궐, 모스크, 목욕탕 등 역사적 건물이 많다. 입구의 건물에 들어가서 그 당시 발달했던 스테인드 글라스 공예품을 보았다. 기념품을 파는 가게도 있다. 조금 더 걸어서 올라가니 아담한 2층 건물의 궁전이 있다. 건물 외부의 벽면이 모두 기하학적인 스테인드 글라스 공법으로 치장되어 있다. 우람한 나무와 꽁 정원이 매우 아름답다. 내부에도 기하학적 모자이크의 스테인 글래스나 장식이 화려하다. 입장할 때는 덧신을 신었다. 이곳 쉐키애서는 아주 자랑스럽고 아끼는 유적지다. 영어로 해설하는 여자 안내원이 나와 안내한다. 화려하고 세련된 문양의 슽테인드 글라스 문양과 고운 그림들이 그 당시의 상당히 발달된 문화를 드러낸다. 아제르바이잔의 작은 궁전에서 중세의 문화를 체험하였다.
* 아제르바이잔 쉐키 칸 궁전 박물관
쉐키 칸 궁전을 관람하고 다시 아랫 쪽으로 걸어 내려와서 박물관으로 갔다. 칸 궁전 안에 있는아담한 박물관이다. 박물관 주변에는 대포와 석조 관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그 당시 궁전에서 사용하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당시의 숲과 동물들, 도자기 그릇, 가구, 의류 등 다양하다. 쉐키는 견방직 공업이 발달한 도시여서 그에 관련된 물품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 아제르바이잔 쉐키 거리의 동물들
쉐키 칸 궁전에서 알바니아 사도 교회로 가는 도로에서 동물 떼를 만났다. 말을 탄 목부와 튼실한 소떼가 거리를 활보하여 간다. 버스의 앞 유리창문으로 뽀얀 먼지와 함께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버스는 그들이 놀라지 않도록 완전 서행이다. 양떼도 도로변에서 풀을 뜯는다. 아제르바이잔의 작은 도시, 역사 깊은 도시인 쉐키에서 큰 선물로 주는 진풍경이다.
* 아제르바이잔 쉐키 마을 풍경
쉐키 칸 궁전을 보고 알바니안 교회로 간다. 교회가 있는 마을에 들어서니 노르웨이 사람의 동상이 있다. 이곳 교회가 그의 증언으로 짓게 되어서 기념 동상을 세워 놓았다. 노르웨이 다음으로 지은 교회가 있는 이곳은 그 만큼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쉐키는 2,500년 전에 남 코카서스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지였다. 18~19세기에는 실크로드의 전성기로 카라반 대상들이 많 드나들던 곳이다.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조지아의 트빌리시, 터키 등으로 오고 가는 카라반들의 요충지로 그들이 머물던 숙소도 있었다. 지금은 6만3천여 명 인구의 아담한 도시다. 알바니안 교회를 보고 마을을 나오는데 한 여인이 대문 밖으로 나와 나를 보고는 화사하게 웃는다. 정다운 미소로 화답하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아제르바이잔 쉐키의 여인과는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따스한 미소 하나만으로도 포근한 인간의 정을 교류했다. 오래도록 기억될 고운 추억이 될 것이다.
* 아제르바이잔 쉐키 알바니안 교회
아제르바이잔 초기 기독교 유적지다. 1세기에 세운 달의 신전이었던 곳이다. 카톨릭 4세기 공인 이전 건물이다. 알바니안 교회는 4~6세기에 건설되었다. 1세기~7세기까지는 이곳 지명이 코카서스 알바니아였다. 알바니아라 해서 발칸반도의 국가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곳 나라와는 상관이 없다. 그저 이곳 지명일 뿐이다. 아담한 건물과 아름다운 장미 정원이 길손을 맞이한다. 교회는 외형에서부터 내부까지 아주 고풍스런 흔적 그대로다. 교회 건물 주변에는 기독교 성인들의 묘지가 그대로 있다. 유리 바닥 아래로 해골과 뼈의 잔재가 보이는 것도 있다. 교회 내부 입구의 벽면에는 그 동안의 변천사를 기사화한 지면을 붙여 놓았다. 벽돌 벽면에 호롱불을 켜두어 밝히고 있다. 동전을 벽면에 붙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홈이 파인 둥근 구멍도 잇다. 밖에도 교회 건물의 발전상을 초기부터 순서대로 모형을 전시해 두었다. 코카서스 산맥의 우람한 산자락이 아제르바이잔 쉐키 알바니안 교회를 하늘 아버지처럼 보듬고 있다.
* 아제르바이잔 쉐키 카라반 호텔
쉐키 카라반 호텔에 투숙했다. 실크로드의 교역길에 낙타 상인들이 자던 숙소다. 18세기 이곳 왕국의 칸에 의해 건축된 건물이다.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온 실크로드 카라반들이 지친 몸을 누인 곳이다. 우리는 오늘밤 카라반이다. 옛날 그대로인 숙소에서 잠을 잘 것이다. 벽돌로 지은 건물이 입구에서부터 범상치 않다. 실크로드 동서무역 전성기에 대상과 낙타 그리고 물건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두터운 옹벽구조의 요새 형태로 지어졌다. 카라반사라이KARVANSARAY라는 상호가 걸려있는 아치형 문으로 들어갔다. 호텔 입구의 문은 두터운 목재를 사용했고, 내부는 사각 구조의 방 건물과 정원이 빙 둘러쳐져서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말은 호텔이지만 호텔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로비의 벽돌 벽면에는 호롱불이 은은하게 빛을 발한다. 조각상들도 부착되어 있다. 좁은 계단으로 걸어서 2층의 방으로 갔다. 카라반이 자던 그대로의 방이다. 방의 벽면도 모두 돌이고, 구조도, 장식도 모두 예전 카바반이 사용하던 그대로에 가깝다. 화장실도 불편하고 현대의 생활과는 차별된 숙소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는 행복한 여행객이다. 앞으로 이곳 카라반사라이가 유네스코에 등재될 예정인데, 그렇게 되면 일반인이 투숙을 하지 못한다. 카라반사라이를 개조하지 못하는 것도 문화재 유산으로 보존하기 위해서다. 유네스코에 등재 되기 전에 우리는 실크로드 교역길의 낙타 대상이 되어 그들의 안식처였던 숙소에서 체험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정원은 네모진 구조로 옛날 낙타가 잠자던 마당이다. 고운 장미가 만발하여 그날의 향기를 발한다. 바깥 정원도 아름답다. 나무와 꽃이 아름다운 정원에서 저녁만찬 시간을 가졌다. 아제르바이잔의 마지막 밤, 참 행복한 여정이다.
* 아제르바이잔 쉐키 카라반 호텔 주변 풍경
쉐키Sheki 카라반 호텔 주변을 거닐어 보았다. 도로 바닥에서부터 건물들이 아주 옛스런 풍경 그대로다. 마른 강에서 채취해온 이곳 지역의 돌로 쉐키의 주택 짓는다. 호텔 입구 건너편의 건물 앞에 아제르바이잔 대통령과 국기가 커다랗게 걸려 있다. 이런 풍경은 아제르바이잔 곳곳에서도 많이 보았다. 호텔 주변에 기념풍 상가가 많다. 이 나라의 독특한 상품도 많다. 여행객들의 숙소가 곁에 있어서 식당이나 공예품, 실크 등의 관광물품 상점이 있다. 실크로드의 길목이어서 낙타 인형이 곱다.
2014년 5월 30일 금요일 아제르바이잔 쉐키, 조지아 시그나기, 트빌리시
* 아제르바이잔 쉐키 카라반 호텔 아름다운 정원 조식
오늘은 쉐키 카라반 호텔을 출발한다. 조지아로 이동한다. 날씨가 싸늘하다. 새벽 4시에 기상했다. 7시 30분에 조식을 하고 8시 출발이다. 약간의 비가 온다. 구름층이 내려온 듯하다. 아름다운 정원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코카서스 산맥의 비경을 보며 맛있게 먹었다.
* 아제르바이잔 운무서린 코카서스 산맥
코카서스 산맥의 운무서린 풍경이 비경이다. 산자락 아래 낮게 깔린 하얀 구름 띠가 산 허리를 감싸고 있다. 도로변까지 하얀 구름이 내려온다. 지금 아제르바이잔을 떠나는 길인데 아제르바이잔의 코카서스 산맥은 마지막 고운 풍경을 선사한다.
* 아제르바이잔 호두나무 가로수
아제르바이잔에서 조지아로 가는 중 휴게소 화장실에 잠시 들렀다. 화장실이 유료다. 할머니가 지키고 있다. 화징실 앞에는 하얀색 오디가 달린 뽕나무와 버찌 같은 붉은 열매가 달린 나무가 있더니, 도로변에는 호두나무 가로수가 있다. 도로변에 줄지어 선 호두나무 풍경이 독륵하다. 아제르바이잔에는 호두나무가 많아 여행 중 곳곳에서도 보아왔다. 도로변에는 젖소떼가 풀을 뜯는다. 모두 정겨운 풍경이다.
* 아제르바이잔 국경 마을
아제르바이잔 국경마을 도착했다. 나무가 울창한 마을이다. 길가 풀밭에 벌통을 여러기 놓고 양봉을 하는 풍경이 보인다. 허름한 병에 담아 판매도 한다. 코카서스 산맥의 꽃이 많은 지역이어서 양봉을 많이 한다. 아제르바이잔을 아쉽게 떠나며 이제 조지아로 가는 국경사무소로 가고 있다.
*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 국경선
아제르바이잔 국경선 사무국에서 출국심사를 했다. 비자표와 여권 그리고 얼굴 사진을 카메라에 입력한다. 긴 계단을 따라 담벼락 사이의 길을 따라 걸어서 조지아 국경사무국으로 간다. 큰 가방도 끌고 가야 한다. 이곳은 아직 여행객들이 많지 않아 여행자를 위한 시설이 구비되어 있지 않다. 계단 턱으로 인하여 대형 여행가방이 힘들게 오른다. 조지아 국경사무국에서 입국 심사를 마치고 조지아로 넘어갔다.
* 조지아 국경 통과
아제르바이잔에서 국경을 넘어 조지아 사무국에서 입국심사를 하고 넘어왔다. 조지아 국경을 통과한 것이다. 날씨가 화창하다.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는 시차가 1시간이다. 한국과 아제르바이잔은 시차가 4시간이고, 한국과 조지아와는 시차가 5시간이다. 그러니까 조지아가 아제르바이잔보다 1시간 늦다. 국경사무소 앞에서 우리를 태우고 갈 버스를 기다리는데, 조지아 현지 중년남자들이 우리에게로 와서 도와주려고 한다. 버스를 기다린다고 하니 전화번호를 알려주면 연락해보겠단다. 인솔자가 전화번호를 보여주자 한 남자가 핸드폰을 꺼내어 전화한다. 지금 오고 있다고, 거의 왔다고 한단다. 타국의 낯선 이방인에게 참으로 친절한 조지아인들이다. 배워 가야할 덕묵이다.
* 조지아 진입
조지아 영토에 진입하여 시그나기로 간다. 여기서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시그나기에서 중식을 하고 성벽을 걸어서 이동할 것이다. 조지아 인구는 450만 명이다. 그 중에서 150만 명이 도시에 거주한다. 그래서 시골에서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다. 도로변에 조지아의 농토가 있다. 조지아 들녘을 달려서 높은 고지의 시그나기로 향한다.
* 조지아 시그나기 성벽 앞에서 본 코카서스 산맥 비경
산길을 타고 오른 시그나기 산정이다. 이곳에서 중식을 한다. 절벽 위에 식당이 있다. 식사를 기다리면서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절벽 아래로는 시그나기 마을이 있고, 가운데로는 푸른 지대와 농토의 평원이 있고, 그 끝자락에 코카서스 산맥이 길게 뻗어있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데 산맥 정상 부분에 하얀 구름 띠가 산맥 전체를 길게 띠를 이루며 감싸고 있다. 산맥도 비경이지만 하얀 구름무리도 비경이다. 생애 동안 참으로 보기 힘든 코카서스산맥을 목전에서 보는 것도, 화창한 날에 하늘과 맞닿은 산맥의 전경을 보는 것도 큰 축복이다. 조지아 시그나기에서 본 오늘 오늘의 광경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세계여행에서 얻는 가슴 속 명화로 자리하여 나를 행복하게 지켜줄 것이다.
* 조지아 시그나기 성벽 앞 중식식당
아제르바이잔에서 국경을 넘어 조지아로 와서 이곳 시그나기에서 중식을 한다. 시그나기는 800m 고지의 아담한 중세시대 유적이 있는 마을이다. 중식식당이 있는 곳도 절벽 위 높은 지대에 있다. 아치형 성문과 성벽이 길게 산정을 타고 오른다. 기막힌 비경은 코카서스 산맥이다. 드넓은 평원 끝자락에 하얀 구름 띠를 두른 코카서스 산맥이 시선을 놓지 않는다. 조지아의 전통식사를 하면서도 여전히 눈앞에서 비경을 선사한다.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코카서스 산맥의 비경을 먹고 있다.
* 조지아 시그나기 천진한 어린이들
시그나기 성벽 앞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성벽에 오르려는데 조지아의 어린이들이 우리를 바라본다. 차를 타고 이곳 역사유적지를 탐방온 것 같다. 교사와 학부모도 함께 왔다. 우리와 함께 사진을 찍자고 손을 잡아 이끈다. 학보모들이 더 좋아 한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천진한 어린이들은 동양의 다른 민족을 본다는 호기심에 마냥 기뻐한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데도 눈빛만으로도 정이 들어 헤어지기 서운했다. 한참을 함께 있다가 서로 손을 흔들어 주며 이별을 고했다. 우리는 조지아 어린이를 보고 행복하고, 조지아 어린이들은 우리를 보고 행복하고 세계기행에서 체험하는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 조지아 시그나기 성벽
아제르바이잔에서 조지아에 진입하여 시그나기 산정 높은 지대의 성벽 앞에서 중식을 마치고 성벽을 따라 걸었다. 시그나기Signagi 는 해발 800m 고지의 아담한 도시다. 도시라기보다 인구 2천여 명이 사는 아담한 시골 마을이다. 18세기에 세워진 중세도시다. 성곽을 타고 걸으며 아래를 바라보니 드넓은 평원과 병풍처럼 서 있는 코카서스 산맥이 비경이다. 성벽은 중세시절 이 마을을 외부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마을 전체를 지키는 4Km 정도의 성곽을 만들었다. 이곳은 조지아 실크로드의 중심도시였다. 시그나기는 쉼터라는 의미다. 코카서스 산맥을 힘겹게 넘어온 카라반 대상들에게 쉼터였던 곳이다. 카라반들은 지친 몸을 휴식하며 장터를 열기도 해다.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시그나기 마을 주민들과 대상을 지켜주는 성벽을 도시 전체에 둘러쌓았다. 지금도 큰 유적지다. 망루도 23개 있었다. 성벽을 오르는 중에도 곳곳에 망루가 있다. 시그나기는 조지아 카케티 주의 아주 작은 도시다. 카케티 왕국의 왕이 거주하던 조지아 동부의 역사적인 주이다. 소규모 산악 지방이다. 카케티는 8세기의 봉건공국이었다가 12세기에 조지아의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1801년에 는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다. 1991년 조지아 독립 후부터는 조지아 공화국의 지역이고 주도는 탈레비다. 카케티 주는 여행자가 많이 찾아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텔레비와 시그나기는 조지아에서 가장 방문객이 많은 도시다. 시그나기는 3년 전에 역사 유적지 보수공사를 마쳤다. 최근에는 여행객을 위한 호텔도 지었다. 시그나기는 성벽만이 아니라 시그나기 도시 전체가 중세의 향기가 그윽한 큰 관광명소다. 산자락을 타고 흐르는 성벽은 계속 이어진다. 마주 보이는 산능선의 성벽도 길게 보인다. 산속에는 민가의 주택들도 있다. 우리 부부는 지금 조지아의 오랜 역사가 담긴 시그나기 성벽을 걸으며 중세의 낭만과 코카서스의 비경을 눈과 가슴에 아름답게 저장하고 있다. 날씨도 화창하여서 축복의 시그나기 여정이다.
* 조지아 시그나기 마을 풍경
시그나기 성벽을 넘어서 시그나기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아담한 마을은 산과 접해 있어서 아름답다. 중세의 돌길을 따라 마을을 둘러보았다. 성조지 교회가 중세향기를 머금은 채로 마을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두 곳의 조지아 정교 교회가 이 마을에 있다. 시그나기는 조지아의 가장 동쪽 카케티Kakheti주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옛날에는 카케타의 왕이 이곳 시그나기에 거주할만큼 번창한 도시였다. 시그나기는 카케티 주의 행정 중심지로 인구는 약 2천여 명이다. 조지아에서 가장 작은 규모의 마을 중 한 곳이다. 코카서스 산맥과 가까운 곳으로 일교차가 심한 기후지역이어서 포도주 생산량이 많다. 전통 방식의 카페트도 생산한다. 지역 특산물로 시그나기의 경제에서 큰 몫을 담당한다. 코카서스 산맥이 둘러쳐져 있어 자연 환경이 매우 아름다운 지역이다. 중세의 역사 유적들도 잘 보존되어 있다. 1975년부터 시그나기와 주변지역을 역사 지구로 지정하여 정부에서 보호하고 있다. 18세기에 지어진 시그나기 요새의 유적은 역사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마을 근교에 9세기에 건축되고 17세기에 재건한 보드베Bodbe 수도원도 있다. 성녀 니노의 유골이 안치된 보드베수도원은 종교역사의 오리지널 성화가 많다. 1762년에 조지아의 왕인 헤라클리우스 2세의 지원으로 세워진 마을이다. 외부의 침략을 막고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건축하였다. 실크로드의 길목으로 상업과 무역이 발달한 지역이었는데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마을이 작아졌다. 오늘날은 농업 중심의 작은 마을로 변해버렸다. 1991년 조지아 독립 이후부터 정부에서 시그나기 마을을 관광산업단지로 육성하고 있다. 시그나기 마을에 아직도 성문이 있다. 웅장한 성문을 지나서 이동했다. 코카서스 산맥과 중세풍의 주택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 조지아 시그나기 코카서스 산맥 비경
코카서스 산맥은 조지아의 어느 곳에서 보아도 비경이다. 그런데 이곳 시그나기 마을 조금 높은 높에서 바라보니 그야말로 장엄한 비경이다. 드넓은 평원의 끝에 하얀 구름 띠를 머리에 두르고 길고 장대한 품사위로 앉아있다. 붉은 색 지붕 중세 도시의 풍경과 어우러져 한폭의 명화로 뜬다.
* 조지아 시그나기 마을 중앙공원
조지아 시그나기 시청사 아래에는마을의 중앙공원이 있다. 나무가 울창하다. 조지아의 철학자 솔로몬의 동상도 있다. 책을 들고 커다란 몸집으로 우람하게 서 있다. 벽면에는 2차세계대전 때 활약하던 병사들의 부조 조각상이 있다. 희생된 전몰자들의 추모탑도 있다. 공원을 거쳐서 상큼한 걸음으로 이동했다.
* 조지아 시그나기 시청사
시그나기 시청사 건물이 우람하다. 곁에는 극장이 있다. 경찰 두 명이 서 있다. 그리고 시청사 앞에는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있다. 작은 마을의 시청사인데 아주 큰 2층 건물이고 중앙의 시계탑 지붕 위에는 국가 휘날린다. 아치형 문들이 아름답다. 모두 평화로운 정경이다.
* 조지아 시그나기 포도주 항아리와 분수
시그나기 시청사를 지나 조금 내려오니 포도주를 숙성시키는 항아리와 분수가 있다. 그리고 맨 꼭대기에는 사슴이 서 있다. 분수는 쉼없이 물을 분무하여 포도주 항아리에게로 쏘아 올린다. 시그나기는 아담한 시골 마을이다. 울창한 산언덕이 곁에 있다. 나무 사이로 들어선 민가도 보인다. 바로 곁에는 웨딩 홀과 카지노 건물도 있다. 가녀린 사슴은 산언덕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먹겠다는 생각으로 훈훈한 정경이다. 조지아는 세계 최초의 포도주 생산국이다. 그 중에서도 시그나기는 포도주 생산을 많이 한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지아가 포도주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 시켜주는 대목이다.
* 조지아 시그나기 보드베 교회
시그나기Sigmagi 마을에서 2km 거리에 있는 보드베 교회에 왔다. 편백나무가 우람하게 솟구쳐 깊은 역사를 읊조린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하차하니 말을 몰고 온 마부가 있다. 관광지로 손님을 받으려는 것이다. 보드베 교회로 갔다. 보드베 교회는조지아 정교회다. 조지아의 주요 성지 중 하나다. 또한 조지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종교서적 보관소 중 하나다. 종교 작가와 문인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 교회에는 4세기 조지아의 여성 복음 전도자 성녀 니노의 유적과 성골함이 안치되어 있다. 포도나무 가지를 머리카락으로 엮어 십자가를 만든 성녀 니노가 잠들어 있는 보드베 교회는 성녀 니노와 아주 깊은 관계가 있다. 성녀 니노는 조지아의 종교를 기독교로 바꾼 성자다. 그녀는 약 338~340년 조지아인들이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하는 것을 보고, 이곳 카케티의 보드베 계곡으로 와서 죽음을 맞이 했다. 9세기에 성녀 니노가 묻힌 곳에 작은 수도원을 세웠다. 카케티 왕들이 즉위식 장소로도 사용했다. 교회의 본 건물 곁에 종탑이 우람하게 서 있다. 단독 3층 종탑 건물은 1885년에 세워졌다. 17세기에는 외부와 내부 벽에 회반죽을 칠하여 재건축했다. 성녀 니노의 묘소 뒷편에 건축된 소형 교회도 있다. 1615년 페르시아에게 강탈당했다가 다시 복원되기도 했다. 조지아가 1801년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고 난 후에도, 보드베 수도원은 계속 유지되었다. 1823년 벽화로 장식하며 대대적인 수리를 했다. 자수와 미술을 가르치는 신학교도 설립했다. 1924년 소비에트 정부는 수도원을 폐지했고 병원으로 개조시켰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 되면서 보드베 수도원은 다시 복원되었고 2003년 수도원은 재개되었다. 수도원 안으로 들어갔다. 엄숙한 내부 공간에는 오리지널 성화가 많다. 소년소녀들이 모여 지도자의 인솔에 따라 종교의식을 하고 있다. 교회 건물 주변에는 나무와 꽃들이 많다. 시그나기는 800m 절벽 위에 세워진 중세도시다. 보드베 수도원은 알라자니 계곡이 보이는 언덕 높은 곳에 세워져 있다. 교회 건물에서 나와 드넓은 조지아 시그나기의 경관을 조망했다. 절벽 바로 아래에는 텃밭이 있고 농작물이 심겨져 있다. 멀리 코카서스 산맥이 구름 띠로 장식되어 비경이다. 곁에는 도 한 채의 교회를 짓고 있다. 이제 트빌리시로 이동한다. 1시간 30분 소요된다. 깊은 산중의 보드베 교회는 중세의 향기를 그대로 머금고 있어 잠시 중세 역사의 현장에 머물다가 가는 느낌이 든다.
* 조지아 들녘 포도와 감자 농장
조지아 들녘 드넓은 농토에 포도 농장과 감자 농장이 있다. 옥수수도 재배한다. 조지아의 와인 생산은 세계 최초로 시작되었다. 조지아에서 포도나무는 성스런 나무다. 포도나무 종류가 350~400여 종이다. 중세 때에는 1천여 종이었다. 성스런 나무라서 품종을 자꾸 개발해서 그렇다. 소련에서 분리 되면서 유럽으로의 와인 수출길이 막혔으나 2년 전부터 할발해졌다. 코카서스 지역은 언덕지대라서 포도나무 재배에 아주 좋은 조건이다. 일교차도 커서 더욱 좋은 기후다. 일교차가 크면 껍질이 두꺼워서 포도주를 다량 생산할 수 있다. 포도나무는 배수가 잘 되어야 하는데 언덕지대라서 배수 조건까지도 좋다. 배수가 않되면 뿌리가 썪는다. 조지아는 육상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도시였다. 실크로드 길을 따라 가고 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가장 짧은 길이다. 그 시절에는 화폐가 없었다. 그때는 물물교역했다. 조지아 들녘을 보며, 역사의 한 단면이 서린 길을 따라 가며 조지아를 배운다.
* 조지아 들녘 방목하는 동물들
조지아 들녘에 방목하는 동물들이 많다. 4월부터 눈이 녹아 5월인 지금은 풀이 많이 자라서 가축을 방목한다. 소떼도 있고, 양떼도 있다. 푸른 초지 위에서 평화로은 정경을 선사한다. 조지아는 치즈를 가정에서 만들어 먹는다. 포도주도 만들어 먹는다. 도로변에 노란 꽃이 많다. 조지아의 목가적인 풍경들이 아름답다.
*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 시가지 풍경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 진입한다. 유니온 조각상이 높이 솟구쳐 오른다. 소련시절에 세운 것이다. 소비에트는 하나라는 의미로 세운 동상이다. 트빌리시에는 아직도 구소련 시절 건물이 많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노상에서 이란 수박을 판매하는 사람도 있다. 조지아는 아랍과 투르크의 지배를 받아오나가 1801년부터는 소련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다가 1918년에 독립했고, 1991년에는 소련연방에서 완전 독립했다. 오늘날은 구소련 시절의 건물을 없애고 다시 새로이 건설을 많이 한다. 청색 건물의 기차역을 지나간다. 산능선이 트빌리시를 감싸고 있다. 산정에는 방송 송신타워가 높이 세워져 있다. 산자락 아래 나무 사이로 아담한 트빌리시가 들어난다. 긴 독특한 건물도 있다. 다리를 건너서 간다. 구부러진 현대풍의 아름다운 도 있다. 구소련 시절에 지은 아파트가 있다. 구소련 시절의 대중교통 수단인 자그마한 노란 버스도 많이 있다. 다른 차량들도 많다. 우리는 지금 호텔로 가고 있다. 트빌리시의 저녁 무렵의 여러가지 풍경을 보는 소중한 시간이다.
* 조지아 트빌리시 자유의 광장과 성조지 기마상
트빌리시 구시가지 자유의 광장Freedom Square에 진입하자 우람한 기마상이 시선을 집중시킨다. 성조지St.George 기마상이다. 또는 성게오르기 기마상이라 부르기도 한다. 영어로는 성조지 기마상이다. 조지는 조지아의 기독교 성인이다. 조지아인들이 가장 숭상하는 인물이다. 조지아가 2010년도에 국명을 그루지야에서 조지아로 바꾼 것도 성인 조지를 본떠 지은 것이다. 그 만큼 조지아에서는 저 황금빛 찬란한 기마상이 큰 자부심을 부여하는 사람이다. 자유의 광장은 조지아의 메인 광장이다. 주변은 18~19세기에 지은 건축물들이 많다. 시청사 위로 솔로라키 언덕 정상에 있는 조지아의 어머니상도 보인다. 원래 자유의 광장은 레닌 광장이며 조지 기마상이 있던 자리에 레닌 동상이 있었다. 레닌 동상을 없애고 성조지 동상으로 바꾼 것이다. 광장의 중앙에 세워졌던 레닌 상은 조지아가 독립하던 1991년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2006년 완공된 자유를 상징하는 탑이 세워져 있다. 대리석 둥근 기둥 탑 위의 동으로 만들어진 말 탄 성조지 기마상이다. 기마상은 진짜 금으로 도금되어 있다. 서유럽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레닌동상만 없어진 것이 아니다. 광장에 접한 루스타벨리 대로의 국회의사당 지붕 소련 문장도 패어져나갔다. '안녕하세요'의 조지아 인사말은 '까마르조바'다. 외침이 잦아서 무사건승을 기원하는 인사다. 그루지야와 조지아는 같은 나라다. 한국에서도 그루지야로 통용되지만 조지아의 대통령인 미하일 사카슈빌리가 2010년에 ‘조지아’로 호칭해주도록 국제사회에 공식 요청했다. 그 후부터는 조지아로 부르고 있다. 미국에 조지아라는 주가 있어 인터넷에 검색하면 미국의 조지아 주가 함께 뜬다. 미국의 주 지명인 사실을 알면서도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과감하게 그루지야를 조지아로 바꿨다. 그루지야는 러시아 명칭이고 조지아는 영어 명칭이다. 그루지야는 ‘늑대의 땅’이란 의미이고, 조지아는 '농업'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맨 처음 이름은 예레반 광장이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잠시 등장했던 조지아 공화국 시기에는 자유의 광장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 뒤 소련 시절에는 비밀경찰국장 베리아의 이름을 딴 광장이었다가 바로 레닌 광장이 되었다. 이름이 여러번 바뀐 광장이다. 1907년 트빌리시의 옛 이름인 티플리스에서 은행 강도 사건이 일어났다. 20명의 행동대원에 의한 거액의 은행털이 사건이다. 행동대장은 스탈린의 동지였다. 혁명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거사였다. 러시아 제국은행 티플리스 지점을 털었다. 광장에 마차가 진입했을 때 수류탄이 투척되었고 총알이 날아들었다. 광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돈 자루는 행동대장의 마차로 옮겨졌다. 350만 달러, 약 40억원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행동대장이며 스탈린의 동지였던 카모는 1922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묘는 자유의 광장 옆 푸시킨 공원에 기념비와 함께 마련되었지만 스탈린 시대에 어디론가 옮겨졌다. 조지아의 아린 역사를 머금고 있는 자유의 광장이다. 이제는 조지아를 다부지게 지키겠다는 선언이라도 하듯 높이 솟구쳐오른 성조지 기마상이다. 기마상 너머로 솔로라키 언덕 위에 선 조지아의 어머니상도 동일한 상념으로 다가온다. 하얀 입상의 아릿다운 여인은 오른손엔 검을, 왼손엔 포도주잔을 들고 있다. 검은 조지아의 국방수호를, 포도주잔은 외부 손님에 대한 따뜻한 대접과 더불어 동포애와 통일을 상징한다. 자유의 광장과 성조지 기마상은 조지아 역사의 많은 것들을 내포하고 있다.
* 조지아 트빌리시 자유의 광장 호텔 도착
아제르바이잔에서 조지아로 넘어와 수도 트빌리시의 매리어트 호텔에 도착했다. 오늘 밤 유숙하고 또 내일은 카즈베기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유숙하고, 모레 다시 이곳 호텔로 와서 머물 것이다. 그러니까 하루 걸러지만 이 호텔에서 두 밤을 잔다. 내부도 매우 웅장하고 외부도 대단한 경관이다. 주변은 트빌리시의 구시가지 중심지로 자유의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성조지 기마상이 자유의 광장 중앙에서 높이 솟아올라 빛난다. 호텔 주변은 도심의 주요 도로가 있다. 그리고 한국의 삼성전자 광고간판도 있다. 모두 가슴을 설레게 하는 풍경들이다.
* 조지아 트빌리시 자유의 광장 저녁 풍경
조지아 트빌리시에 도착하여 자유의 광장Freedom Square 바로 곁의 배리어트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석식을 하기 전 잠시 자유의 광장에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유의 광장에는 석양의 그림자가 내린다. 햇살이 내리는 곳은 탱탱하게 푸른 하늘과 맞닿아 화사하고, 바닥쪽으로는 진한 어둠이 서린다. 이곳은 트빌리시 구시가지의 중심지며 명소다. 금빛 성조지St.George 기마상이 40m의 높이로 아득하게 솟구쳐 오른다. 기마상 아래는 둥근 바탕에 잔잔한 분수의 물이 흘러내린다. 구소련시절에는 레닌동상이 있던 곳에 성조지상을 다시 세운 것이다. 그때는 광장 이름도 레닌 광장이었다. 자유의 광장은 러시아 혁명의 주역들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털이를 한 곳이기 하다. 2003년 장미혁명으로 정권이 무너지면서 트빌리시가 새로이 단장된 것이 많다. 조지아 국기가 휘날리는 시청사 위로 조지아 어머니상도 떠오른다. 매리어트 호텔도 트빌리시 구시가지에서 주요 건물로 손꼽힌다. 자유의 광장 한 블럭을 차지한 매우 웅장하고 우람한 호텔이다. 호텔 건물을 돌아가보니 오랜 연륜의 큰 가로수와 도심 중심도로가 길게 뻗어있다. 행인과 차량이 많이 왕래한다. 조지아의 십자가 국기도 걸려있다. 모두 아름다운 트빌리시 자유의 광장 저녁 풍경이다.
* 조지아 트빌리시 라이브 음악 석식
오늘은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먹는 첫날의 저녁식사다. 라이브 음악을 들으며 전통식사를 했다. 중년 여인이 조지아 노래를 선사한다. 남편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피아노늘 친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고 피아노 연주를 좋아한다. 내가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는 음악담당교사였다. 내가 피아노를 치며 독창과 합창을 지도하여 시군대회에 나가 연이어 수상하며 모범표창도 연이어 받았다. 그리고 피아노 지도교사도 했다.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음악 앞에서 나는 행복했던 교사 재직시절의 환상으로 전율한다. 조국을 떠나 먼 타국에서도, 지금 음악 앞에서 동일한 감정이다. 라이브 음악과 연주가 식사보다 좋다.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나는 지금은 조지아의 음악을 먹고 있다.
한국에서 잘 알려진 '백만 송이 장미' 노래가 조지아의 트빌리시와 관계가 있다. 원래는 라트비아의 가요 '마라가 준 인생'이다. 이 곡을 러시아어로 가사를 붙여 '백만 송이 장미'로 만들었다. 백만송이 장미의 원곡인 '마라가 준 인생'은 1981년 라트비아 방속국 마이크로폰사가 주최한 가요 콘테스트에 출전한 아이자 쿠쿠레가 불러 우승한 노래다. 작곡은 레이몬든 폴, 작사는 레온 브라이디다. 본래의 가사 내용은 백만송이 장미와는 전혀 다르다. 강대국 구소련에 나라가 흔들리는 라트비아의 슬픈 운명을 암사한 것이다. 마라는 라트비아 신화의 여신이다. 최고의 신 중 하나다. 우리에게 알리진 것은 러시아 국민가수 알라 푸카초바의 노래이며, 한국가수 심수봉 노래다. '백만 송이 장미'는 나의 애창곡 중 하나다. 알라 푸카초파는 '마라가 준 인생'의 멜로디에 러시아 시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의 가사 '백만 송이 장미'를 붙여 불렀다. 그 내용은 더 슬프고 아름답다. 라트비아 '마라가 준 인생' 원곡 가사의 내용은 이렇다. 조지아의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는 트빌리시역에서 일하는 짐꾼이었다. 힘들게 짐꾼 생활을 하여 번 돈으로 미술용구를 사서 시간나는대로 그림을 그렸다. 실력을 인정받아 간판도 그렸다. 짐꾼에서 조지아의 유명 화가로 알려져개인전도 열었다. 그 무렵 프랑스 출신 여배우가 트빌리시에 왔다. 그녀의 공연 모습을 본 피로스마니는 첫눈에 반하여 홀로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을 고백해도 여배우는 들어주지 않았다. 자신이 모은 전 재산을 투자해서 백만송이 장미를 샀다. 그녀가 머무는 집 문앞에 갖다 놓고 그의 사랑을 받아주길 간절히 빌었다. 그녀는 끝내 피로스마니의 구애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프랑스로 가버렸다. 실연의 깊은 상처로 화가는 절망의 세월을 보냈고다. 전 재산을 잃었기 때문에 다시 역전의 짐꾼 생활을 시작했다. 그후 유명했던 화가는 세상 속에서 잊혀졌다고 한다. 이런 비극이 담긴 '백만송이 장미' 노래를 조지아 사람들은 아직도 그들의 사랑을 믿고 있다.
러시아어로 된 원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그만 집과 그 외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화가가 여배우를 사랑했다네/ 사랑하는 그녀에게 장미꽃을 주고 싶어/ 어느 날 동네의 장미꽃을 다 샀다네/ 백만송이 장미꽃을/ 그대에게 그대에게 그대에게 드립니다/ 붉은 장미꽃으로 가득 메우고/ 어느 날 아침 그녀는 붉은 장미꽃 바다를 보고/ 어딘가의 부자가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지/ 조그만 집과 캔버스 모든 것을 팔아 장미꽃을 산/ 가난한 화가는 창 아래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 백만송이 장미꽃을/ 당신은 당신은 당신은 보고 있네/ 창으로 창으로 보이는 광장은/ 새빨간 새빨간 장미꽃 바다/ 만남은 그것으로 끝나고 여배우는 다른 곳으로/ 붉은 장미꽃 바다는 화려한 그녀의 인생이지/ 가난한 화가는 고독한 나날을 보냈지/ 그렇지만 장미의 추억은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았지.
한국의 심수봉 가수가 부른 '백만 송이 장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만송이 장미 / 심수봉 노래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때만 피는 꽃 백만송이 피워오라는 진실한 사랑을 할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할 때 수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할 때 수 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진실한 사랑은 뭔가 괴로운 눈물 흘렸네 헤어져간 사람 많았던 너무나 슬픈 세상이었기에 수많은 세월 흐른 뒤 자기의 생명까지 모두 다 준 빛처럼 홀연히 나타난 그런 사랑 나는 알았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할 때 수 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할 때 수 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이젠 모두가 떠날지라도 그러나 사랑은 계속될거야 저 별에서 나를 찾아온 그토록 기다리던 이 있네 그대와 나 함께라면 더욱더 많은 꽃을 피우고 하나가 된 우리는 영원한 저별로 돌아가리라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할 때 수 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할 때 수 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할 때 수 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나는 라트비아 여행에서도 '백만 송이 장미'에 대한 전설을 들었다. 러시아 여행에서도 '백만 송이 장미'에 대한 애련한 전설을 떠올렸다. 어떤 나라의 노래든 가슴을 울리는 가사와 곡이다. 내가 사랑하며 즐겨 부르는 '백만 송이 장미'에 대하여 다시 진하게 배우고 간다.
* 조지아 트빌리시 시가지 석양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트빌리시 시가지가 석양에 물들고 있다. 원통의 기다란 하얀 건물은 상가와 극장이 있는 건물이다. 푸른 빛을 발하는 곡선 구조의 므츠바리 강 평화의 다리가 매우 아름답다. 강다리와 상가 건물 사이에 트빌리시 기차역도 있다. 기차역 뒤로는 대통령이궁이 높은 언덕 위에 있다. 맞은 편으로는 산이 있고 산정에는 조지아의 어머니상이 오롯하다. 케이블카로 오르내린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는 조지아에 대하여, 트빌리시에 대하여 잘 몰랐던 곳이다. 이번에 와서 보니 참으로 아름다운 나라고, 매우 아름다운 도시다. 촉촉하게 잦아드는 트빌리시 시가지의 석양을 오래도록 기억하리라. 남은 내 정원에 아름다운 목록으로 들어서서 지치는 날이 올 때 훈훈한 낭만을 선사하리다. 세계여행은 참으로 많은 것을 보답해준다.
2014년 5월 31일 토요일 조지아 트빌리시, 구다우리
* 조지아 트빌리시 자유의 광장 아침 풍경
자유의 광장은 호텔 바로 앞에 있어서 호텔 문만 나오면 만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자유의 광장에 나왔다. 어제 저녁 무렵에 본 풍경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자유의 광장에서 가장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성조지 동상이다. 조지아 이름으로는 성게오르기다. 투명한 하늘은 아니지만 우람한 구름 사이로 나오는 아침 햇살에 성조지 기마상이 밝게 빛난다.
* 조지아 트빌리시 매리어트 호텔 주변 풍경
우리 부부가 유숙한 호텔은 구시가지 자유의 광장 바로 옆에 있는 매리어트 호텔이다. 상당히 크고 규모가 우람한 호텔이다. 구시가지에서 유명한 건물에 속한다. 오늘은 호텔을 출발하여 카즈베기를 향해 갈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유의 광장에 성게오르기 기마상이 높이 솟구쳐 오른다. 트빌리시에는 최초로 수도를 트빌리시로 천도한 왕 등 기마상들이 많다. 메테헤 교회에도 천도한 왕의 기마상이 있다. 자유의 광장 도로는 아침 출근하는 차량들로 분주하다. 구소련 시절의 노란색 자그마한 봉고 버스가 대중교통 수단으로 사람을 실어나르며 왕래한다. 시청사 건물 앞에는 교통단속하는 경찰도 있다. 호텔 건물을 끼고 잠시 돌면 우람한 가로수들이 늘어선 대로가 있다. 조지아 국기도 걸려있고, 도로변에 선거벽보가 많이 붙어있다. 이곳은 트빌리시의 중심지여서 항상 붐비는 거리인데 지금은 아침 이른 시간이어서 조용한 거리다.
* 조지아 트빌리시 도심 므츠바리 강변 풍경
므츠바리 강, 또는 므트크바리 강, 또는 쿠라 강이라 부르는 강은 터키에서부터 시작되어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카스피해로 흘러가는 아주 긴 강이다. 트빌리시 도심을 가로지르며 흐른다. 므츠바리 강다리를 건너서 간다. 강변에 있는 하얀 둥근 지붕의 건물은 법원이다. 최신식 현대풍의 아주 독특한 건물이다. 이탈리아 건축가가 설계하여 지은 건물이다. 강변에는 우람한 나무들도 많다. 주변에는 구소련시절에 지은 고층 아파트 단지도 있다. 아파트 앞에는 우람한 분수가 물을 분무한다. 아파트 앞에는 우람한 분수가 물을 분무한다. 므츠바리 강변에는 아름다운 거리와 웅장한 건물들이 많다.
* 조지아 트빌리시 사메바 성당
트빌리시 사메바Sameba 성당은 므츠바리Mtkvari 강 왼쪽의 엘리야 언덕Elia Hill에 있다. 조지아 정교 대성당이다. 입장하는 문에서부터 아주 높고 웅장하다. 성당에 들어서니 중앙에 본당으로 이르는 길이 길게 있고 양쪽 정원에는 아름다운 꽃이 가꾸어져 있다. 종탑 건물도 높이 솟아있다. 본당은 100m 높이로 웅장하고 매우 아름다운 조형의 3층 건물이다. 주로 조지아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상층의 금빛 돔 지붕이 찬란하게 빛난다. 돔 지붕 위에는 7.5 m의 황금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사메바는 성삼위일체란 뜻이다. 카즈베기 스테판츠민다 사메바 교회도 마찬가지로 성삼위일체 교회란 뜻이다. 조지아에는 사메바라는 이름의 교회가 많다. 트빌리시 사메바 성당은 홀리 트리니티 Holy Trinity 성당, 밀레니엄 빌딩으로도 불린다. 조지아 정교회 독립 1500주년과 조지아 독립공화국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성당이다. 1989년 국제건축설계대회를 열어 건축가 아킬 마인디아스빌리의 설계도를 선정했다. 하지만 구소련연방 해체와 러시아와 조지아의 전쟁 등 복잡한 문제로 건축이 6년간 보류되는 시련을 겪었다. 1995년에 와서야 공사가 진행되어 2004년에 완공되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탄생된 사메바 성당은 조지아의 국제적, 정신적 부활 상징이란 의미가 담겨있다. 기업가들과 시민들의 후원성금도 보태졌다. 본당과 종탑 이외에도 대주교 사택, 수도원, 신학대학교, 휴게실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예배당은 지하 5개를 포함하여 모두 9개다. 여자들은 머리에 모자나 스카프를 써야 입장이 가능하다. 나는 모자를 쓰고 입장했다. 벽면에 성인의 부조상이 많다. 성당 내부의 성화는 아미란 고글리즈Amiran Goglidze가 이끄는 예술가 단체가그렸다. 성당 본당은 높은 지대에 있어서, 상당 밖으로 나오니 신성한 산이란 이름의 므타츠민다 산 중턱에 있는 다비드 교회가 보인다. 그곳 교회에서도 사메바 성당이 보인다. 이곳 사메바 교회도 그곳을 바라보도록 지었다. 그러므로 트빌리시의 저 산을 신성한 산이라는 뜻을 지닌 므타츠민다 산이라 부른다. 므타츠민다 산정에는 구소련 시절 설치한 방송 수신탑이 높이 솟구쳐 오른다. 조지아 국기도 휘날린다. 저 멀리 조지아 어머니상도 보인다. 현대풍의 찬란한 트빌리시 사메바 성당에서 조지아의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 트빌리시 사메바 성당에서 본 조지아의 어머니상
조지아의 어머니상인 카르틀리스 데다Kartlis Deda 기념비는 솔로라키 언덕 산 높은 곳에 있다. 1958년에 건립된 동상이다. 그래서 트빌리시 시가지 곳곳에서 보아왔다. 그런데 이곳 사메바 교회에서는 산 중턱에 조지아의 어머니상이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멀리 있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푸른 산속에 하얀 입상의 여인이 서 있다.
* 조지아 사메바 성당에서 본 트빌리시의 므타츠민다 산
트빌리시의 므타츠민다Mtatsminda 산은 서울의 남산과 같은 야트막한 산이다. 산능선을 타고 정면으로 바라볼 때 왼쪽으로 나리칼라 요새와 조지아의 어머니상이 있다. 므타츠민다는 '성스러운'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므타츠민다 산은 성스러운 산이란 뜻이다. 6세기에 선교사로 온 다비드가 이 산의 동굴에서 수도생활을 하며 지은 교회다. 다비드는 한국어로는 다윗이다. 그때의 교회는 14세기에 파괴되었다. 오늘날 돔지붕의 성 다비드 교회는 19세기에 건축된 것이다. 마마 다비드 교회로 부르는데, 아버지 다비드라는 뜻이다. 다비드 교회 옆에는 조지아의 예술인들이 묻힌 므타츠민다 묘지도 있다. 산밑에는 안치스카티 성당이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에 티브이 송신탑 루스타비 타워가 높이 솟아 있다. 산정 송신탑 근처의 므타츠민타 공원에는 최신식 어린이 놀이사설이 설치되어 있다. 구소련시절 위락시설이던 것을 20세기 초에 봄보라Bombora의 꿈이라는 테마공원으로 다시 개조했다. 케이블카도 운행되고 있다. 사메바 성당에서 정면으로 므타츠민다 산이 보인다. 높은 방송 송신탑도 보이고, 산 중턱의 다비드 교회도 보인다. 므타츠민다 산의 다비드 교회에서도 이곳 엘리야 언덕의 사메바 성당이 보인단다. 성스러운 두 개의 기독교 제단이 마주보고 있다. 조지아의 신실한 기독교 정신을 짚어주는 대목이다.
* 조지아 트빌리시 사메바 성당에서 본 국기
사메바 성당에는 조지아Georgia 국기 2개가 걸려있다. 하얀 바탕에 빨간색 큰 십자가 하나인 것과 하얀 바탕에 빨간색 십자가 큰 것 하나와 사방에 빨간색 십자가 작은 것 4개가 있는 것이다. 국기 한가운데와 각각의 4면에 새겨진 십자가 문양은 모두 기독교를 상징한다. 큰 십자가 하나인 것은 조지를 상징하는 종교 국기다. 종교 국가로 공인된 조지아를 나타내고 있다. 조지아의 기독교 성인 성 게오르그의 십자가St. George's Cross다. 큰 십자가와 작은 십자가로 구성된 것은 조지아 국가 상징 국기다. 조지아의 공식적인 국기는 흰색 바탕 중앙에 빨간색 큰 십자가 하나와 사방의 네 면에 빨간색 작은 십자가 네 개로 구성된 것이다. 조지아의 국기는 2004년1월 14일에 새로 제정되었다. 과거 조지아 왕국의 국기를 다시 부활시켜 만들었다. 큰 십자가는, 하나님, 구세주 예수그리스도, 조지아 기독교의 성인 게오르기George의 십자가, 예루살렘 십자가를 상징한다. 작은 십자가 네 개는 4명의 복음 성인, 십자가의 못 4개를 상징한다. 1990년부터 2003년 12월까지 사용된 국기는 갈색 바탕으로 왼쪽 위에 검정과 하얀색 가로 줄무늬가 있었다. 현재의 국기는 2003년 11월 장미혁명 때 조지아 야당의 국민운동 당기로 사용했던 것이다. 13세기 조지아 국기를 새로운 형태로 디자인한 것이다. 1999년 조지아 의회가 현재의 국기로 채택하는 안을 가결하였지만, 당시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이 부결하여 채택되지 못했다. 그러나 장미혁명으로 미헤일 사카시빌리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2004년 1월 14일 조지아 의회가 다시 가결하여 약 500년 만에 부활하였다.
조지아 공화국은 구소련 연방국 중 하나였다. 국가명을 2010년에 그루지야에서 조지아Georgia로 개명하여 세계에 공포했다. 그루지야는 러시아어 명칭이고, 조지아는 영어 명칭이다. 흑해와 코카서스 산맥에 위치해 있다. 북으로 러시아, 남으로 터키,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를 국경으로 접한다. 조지아 내에는 3개의 민족 자치공화국이 있다. 북서쪽의 아브하지야, 주도는 수후미다. 남서쪽에 아자르, 주도는 바투다. 북쪽에 남오세티아, 주도는 츠힌발리다. 복잡한 민족 구성 국가로 분쟁도 잦다. 조지아는 면적 6만9700㎢로 한반도의 1/3, 인구는 약 5백만 명, GDP 약 4천달러, 수도는 트빌리시다. 그루지야인들의 역사는 깊고 문화유산 역시 풍부하다. 중세에 강력한 그루지야 왕국을 건설했다. 최고의 번영 시기는 10~13세기다. 그 후 터키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19세기에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었다. 1918~1921년에 그루지야 독립국을 유지했다가, 1921년 다시 소비에트 연방에 포함되었다. 1936년 그루지야는 소련의 위성연방공화국으로 편입되어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될 때까지 관계가 지속되었다. 소비에트 연방기에 그루지야 경제는 현대화되고 다양화되었다. 가장 독립적 성향이 강했던 연방공화국 가운데 하나였던 그루지야는 1989년 11월 19일 독립적 주권을 선언했고, 1991년 4월 9일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다.1990년대는 그루지야에 있어 불안정하고 사회적 혼란이 고조된 시기였다. 독립 후 최초로 구성된 정부가 전복되었고, 아브하지야 자치공화국 및 남오세티아 내의 분리주의 운동들이 등장했다.
사메바 성당에서 바라본 조지아의 국기는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그 동안 구소련의 지배로 힘든 시기를 넘어온 조지아다. 국가명을 2010년에 러시아어 이름 그루지야에서 영어 이름 조지아로 바꿨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2004년부터 2013년까지의 조지아 대통령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수여한 사람이어서 가능했다. 2014년부터는 다시 러시아 성향의 대통령이어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 내가 본 조지아는 특히 트빌리시에서 자유의 물결을 넘실거리는 현장을 분명히 보았다. 우리나라의 서울보다 규모는 작지만 트빌리시 신시가지는 현대풍의 수려한 건물과 밝고 투명한 색상으로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의 아픔과는 또 다른 아픔이겠지만, 조지아가 저 국기의 바램대로 기독교 국가를 잘 이끌어 번영하길 빈다.
* 조지아 사메바 성당 앞 거리 풍경
사메바 성당의 문은 상당히 높고 우람하다. 사메바 성당의 높은 문 앞은 주택과 상가가 있는 평범한 시가지 거리다. 와인 판매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포도나무 덩쿨을 올린 건물도 있다. 성당 관리자와 일반 시민들도 있다. 성당을 떠나오면서 조지아의 경찰차도 만났다. 므츠바리 강변을 달리며 대통령궁도 보았다.
* 조지아 메테히 교회에서 본 트빌리시 신시가지
메테히 교회는 높은 언덕 위에 있어서 트빌리시 시가지가 다 보인다. 기마상이 있는 곳에서는 구시가지가 잘 보이고, 교회의 문 앞에서는 신시가지가 잘 보인다. 트빌리시는 므츠바라 강 다리를 경계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구분 된다. 므츠바리 강의 평화의 다리가 독특한 구조로 설치되어 있다. 구부러진 허리를 강 위에 늘이고 있어 빼어난 비경이다. 강변의 하얀 둥근 지붕의 건물은 법원이다. 독특한 법원 건물은 이탈리아 건축가가 디자인했다. 300여 가지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법원이다. 스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외국에서 와서 배워간다. 복합상가 건물도 둥근 원통형의 기이한 구조로 눕혀 놓았다. 조지아는 구소련 연방국이어서 소련의 흔적이 많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상보다는 그 잔재가 적다. 2004년부터 2013년까지 통치한 조지아의 대통령이 미국에서 유학하며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어서 친미 성향이다. 구소련시절의 건물을 의식적으로 많이 허물고 다시 건축했다. 그런저런 사유로 트빌리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자유와 평화의 도시다.
* 조지아 트빌리시 메테히 교회
트빌리시 언덕 높은 곳에 위치한 교회다. 메테히라는 이름은 12세기에 붙여졌다. ‘왕궁 주위에 있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곳 지역 이름도 메테히다. 메테히 승천교회로도 불린다. 5세기에 건축한 조지아 정교회다. 어제 저녁식사도 이곳 근처 식당에서 해서 그때도 보았다. 교회 앞에는 기마상이 우람하게 서 있다. 조지아 수도를 므츠헤타에서 트빌리시로 천도한 5세기 이베리아 왕국의 왕 바크탕 고르가사리Vakhtang I Gorgasali 1세 동상이다. 1961년에 조각가 아마슈켈리가 제작하여 세웠다. 바크탕 고르가사리 1세는 왕궁을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지었는데, 교회도 그때 함께 지었다. 17~18세기에는 이슬람 왕이 교회 주위에 약 3000명의 군사들을 수용할 수 있는 튼튼한 요새를 건립했다. 1801년에는 러시아 군대의 장막으로 사용하여 종교적인 역할을 상실했었다. 또한 구소련 시절 새 건물로 복원하여 감옥으로 사용되는 시련도 겪은 교회다. 이곳에 구소련의 통치자 스탈린이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38년에는 완전 폐쇄되었다. 1980년대에 교회의 복구를 위해 노력한 결과 공산주의 통치자의 반대를 꺾고, 1988년에 다시 교회의 기능을 회복했다. 교회는 중세시대 건축양식으로 지었고 벽돌만 사용하여 복원시켰다. 조지아 정교회로서는 특이한 돔 형태다. 동쪽 정문의 기둥 4개는 구양식 그대로다. 교회 안마당에는 세 개의 종이 있다. 동굴 같은 허름한 교회의 문으로 들어가 보았다. 교회 내부는 동쪽 창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화사하다. 구소련 통치기간 중에는 이 교회가 극장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성화가 없다. 성모 마리아만 있다. 5세기 아르메니아의 성녀가 매장되었다는데, 1235년 몽고군 침입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문밖으로 나오니 트빌리시 시가지가 아름답게 전개된다. 대통령궁도 보인다. 슬픈 역사를 딛고 일어선 메테히 교회에서 평화로운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까지 조망하는 뜻깊은 여정이다.
* 조지아 트빌리시 메테히 교회 기마상
트빌리시 메테히 교회 앞에는 큰 기마상이 있다. 조지아 왕의 동상이다. 이 기마상은 조지아의 수도를 므츠헤타에서 트빌리시로 천도한 5세기 말의 이베리아 왕국의 바크탕 고르가사리Vakhtang Gorgasali 왕이다. 여기서 이베리아는 오늘날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이베리아 반도가 아니고, 그 당시 이 지역 이름이다. 천도에 얽힌 전설이 있다. 그 옛날 이 지역은 숲이었다. 어느 날 고르가사리 왕이 사냥에 나섰다. 그런데 숲 속의 뜨거운 연못에 떨어져 죽은 줄 알았던 새가 살아서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본 왕은 숲의 나무를 모두 베고 도시를 세웠다. 그때 트빌리시가 탄생했고 수도를 므츠헤타에서 트빌리시로 천도했다. 뜨거운 연못은 온천이다. 트빌리시는 뜨거운 믈이란 뜻이다. 오늘날에도 트빌리시에는 오랜 역사의 이슬람풍 유황온천이 있다. 우람한 기마상은 트빌리시 므츠바리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말과 왕을 곱게 조각하여 조형미가 수려하다. 우직한 면모의 왕은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를 아직도 끈질기게 붙들고 있다.
* 조지아 메테히 교회에서 본 나리칼라 요새
조지아 메테히 교회 바로 앞 산정에 긴 성곽의 요새가 있다. 외침 잦아서 건설한 나리칼라 요새다. 4세기의 고대 요새다. 조지아 트빌리시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외침에 망가지면서도 수세기 동안 보수하여 지켜온 요새다. 1827년 대형 지진 폭발로 흔적만 남던 아픔도 있다. 1900년대에 옛 모습을 재현하여 일부 복원시켰다. 조지아를 지켜온 오랜 역사의 한 마디를 조망하는 것이다. 산정 능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조지아의 어머니상도 서 있다. 나리칼라 요새와 조지아의 어머니상 사이로는 케이블카가 오르내린다. 아래로는 트빌리시의 구시가지 붉은 기와지붕 물결이 장관이다.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 트빌리시 메테히 교회에서 본 조지아의 어머니상
조지아의 어머니상인 카르틀리스 데다Kartlis Deda 기념비가 솔로라키 언덕 산정 높은 곳에 오롯하다. 1958년에 건립된 동상이다. 하얀 입상의 여인은 오른손에는 칼을, 왼손에는 와인잔을 들고 있다. 조지아를 정의로운 칼로 지키고, 조지아에 온 손님에게 와인을 선사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조지아는 세계 최초의 와인 생산국이라는 것을 드러내기도 한다. 트빌리시 곳곳에서 애련하게 보였던 조지아의 어머니상이 눈앞에서 보인다. 산정을 오르내리는 케이블카도 보인다. 구가지의 붉은 기와지붕과 푸른 나무 물결 위로 뜨는 평화로운 정경이다.
* 조지아 메테히 교회에서 본 트빌리시 구시가지
조지아 트빌리시는 므츠바라 강을 중심으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뉜다. 메테히 교회에서 강 건의 구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메테히 교회가 높은 지대에 있어서 그렇다. 바라 눈앞의 산정에 있는 나리칼라 요새와 조지아의 어머니 상, 므타츠민다 산 그리고 산자락을 타고 오른 구시가지의 붉은 기와지붕 물결이 비경이다.
* 조지아 트빌리시 메테히 교회에서 본 대통령궁
메테히 교회는 높은 지대에 있어서, 이곳에서 트빌리시 신시가지 쪽 언덕 높은 곳에 있는 대통령궁이 아주 잘 보인다. 트빌리시 시가지 이동 중에도 자주 보았는데 이곳에서는 푸른 색 지붕의 돔 건물과 국기가 선명하게 보인다. 2004년 37세에 취임하여 2013년 10월까지 미하일 사카 쉬 빌리 대통령이 거하던 궁이다.미하일 사카쉬빌리조지아대통령은 2012년 3월 우리나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행사에도 참석했었다.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하위를 받은 사람으로 조지아 법무장관을 거쳐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집권 초기부터 친미 서구 성향의 정책으로 이끌었다. 조지아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다. 현재 조지아 대통령은 2013년 11월부터 기오르기 마르그벨라슈빌리이다. 미하일 시카쉬빌리보다는 2살 아래다. 그는 친러파로 야당에서 당선 된 대통령이다. 그 동안 친미의 미하일 시카쉬빌리 대통령이 구소련 잔재의 건물들을 많이 허물고 새로이 건설한 신시가지의 현대풍 독특한 건축물들이 대통령궁과 함께 비경이다.
* 조지아 구시가지 므츠바리 강 메테히 다리
메테히Metekhi 교회를에서도 보고 지금은 메테히 교회에서 내려와 구시가지로 가는 길에 건너는 므츠바라 강 다리다. 트빌리시는 므츠바리Mtkvari 강 다리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나누기도 한다. 이곳 지역 이름이 메테히다. 메테히 다리를 건너가서 바라보니 절벽 위에 메테히 교회와 기마상이 오롯하다. 절벽 위의 시가지 풍경도 아슬하다. 강물은 탁하지만 트빌리시 사기지를 휘감아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 조지아 트빌리시 유황온천 지역
조지아 트빌리시 구시가지에 있는 유황온천 지역이다. 이곳에 들어서니 유황냄새가 난다. 곳곳에 온천 목욕탕이 많다. 하루에 300만톤의 물이 나온다. 구소련 시절에는 수력발전소까지 만들었다. 조지아의 명소로, 그리고 대중 목욕탕 요금이 비싸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트빌리시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 이란 뜻이다. 트빌리시가 조지아 왕국의 수도가 된 것도 이곳 유황온천과 연관되어 있다. 5세기 바크탕 고르가사리 왕이 이곳으로 사냥 나와서 활로 새를 맞혀 떨어뜨렸는데 온천에 빠졌고, 죽어야 할 새가 온천 물에서 상처를 치유해 날아갔다는 전설이 있다. 이 광경을 본 왕은 유황온천의 약효가 뛰어난 것을 알았고 수도를 므츠헤타에서 이곳 트빌리시로 옮겼다. 그때부터 현재까지 따뜻한 땅이란 의미의 트빌리시는 조지아의 수도로 이어져 온다. 유황온천이 밀집해 있는 광장에는 그 당시 전설의 새 동상도 있다. 주변에는 터키 이슬람식 둥근 돔 지붕의 온천탕 하맘Hammam이 있다. 이슬람 문양의 목욕탕 건물과 주택도 있다. 푸른 색 유황온천 하맘Hammam은 알렉산더 듀마와 푸시킨 등 유명인들도 목욕을 자주했던 명소다. 오늘날에도 치유 효능이 탁월한 물이다. 온천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위로 계속 올라가 보았다. 도로변 구멍에서 유황물이 흘러 나온다. 윗쪽 산에서 물이 폭포로 떨어진다. 폭포의 물은 온천수가 아니고 강물이란다. 매우 넓은 자락의 유황온천 지역은 조지아 트빌리시가 받은 신의 축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 조지아 트빌리시 아제르바이잔 알리예브 대통령 방문기념 공원
트빌리시 구시가지 유황온천 지역에는 아제르바이잔 헤이다르 알리예브Heydar Aliyev 대통령 방문 기념 헌정 공원이 있다. 조지아 방문을 기념하여 공원을 조성해준 것이다. 대통령 흉상도 세워져 있다. 꽃과 나무를 잘 가꾸어 놓아 아름답다. 공원 위로는 유황온천 하맘 건물이 늘어서 있어 더욱 고풍스럽고 우아한 조경이다. 헤이다르 알리예브는 1969년 소비에트 연방시절부터 2003년까지 활동해온 아제르바이잔의 정치인이다. 1993년~2003년까지 10년 동안은 강권적인 통치로 아제르바이잔의 제3대 대통령직을 역임했다. 그는 터키와 친했다. 2003년 병을 얻자 장남인 일한 알리예프에게 권력을 세습하고 2003년12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저 흉상은 아제르바이잔의 현재 대통령인 일한 알리예브의 아버지다. 트빌리시에는 이런 외국 대통령 방문 기념 헌정 장소가 3군데 있다. 이곳 공원과 함께 미국 대통령 부시 거리, 폴란드 대통령 카친스키 공원이다. 폴란드 카친스키 대통령은 2010년 정부 인사들과 함께 러시아 카틴 숲 방문길에 나섰다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은 사람이다. 1940년 옛 소련 비밀경찰이 폴란드인 2만 2천 명을 처형한 '카틴 숲 학살 사건' 추모 행사에 참석하려고 러시아를 찾았다가 비행기 탑승자 전원 87명이 사망했다. 조지아에서는 아제르바이잔, 미국, 폴란드 대통령의 고운 족적을 새겨놓았다.
* 조지아 트빌리시 구시가지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Tbilisi의 구시가지는 고풍스런 옛 건물이 많아 올드 트빌리시로도 부른다. 5세기부터 20세기의 고대 유물과 기독교 건물이 보존되어 있어서 트빌리시 역사지구로 지정되었다. 19세기 이전의 건물은 1795년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많이 손실되었지만, 남은 유적들은 세계 유적지 관리목록에 등재되었다. 트빌리시의 므츠바리 강 다리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눈다. 신시가지에는 현대식 빌딩이 많다. 구시가지에는 유황온천, 나리칼라 요새, 조지아의 어머니상, 식물원, 시오니 대성당, 므타츠민다 산, 교회, 박물관, 목조 주택 등이 있다. 우리 부부가 머문 매리어트 호텔도 구시가지 자유 광장Freedom Square 바로 앞에 있다. 곁에는 트빌리시 시청사도 있다. 시오니 성당 근처의 카페거리에는 기원전 7세기부터 행해져 온 것으로 알려진 건배의 원조 타마다Tamada 동상이 있다. 조지아어로 '타마다'는 '건배'란 뜻이다. 최초로 건배를 제안한 사람이다. 귀여운 남자 동상인데 깐지라는 소뿔잔을 들고 돌의자에 앉아 있다. 소뿔로 만든 잔이라서 끝이 뾰족하여 세울 수는 없다. 조지아의 술 문화는 2명 이상만 모이면 '타마다'를 외치며 건배를 하고 마신다. 독특한 전통의 건배 문화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젊은이들은 이곳 타마다 동상 앞에서 그런 의식을 하고 마시기도 한다. 구시가지에서 나무 사이로 보이는 트빌리시 산정 조지아의 어머니상도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지만, 왼손에는 와인잔을 들고 있다. 조지아는 와인의 최초 생산국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그날을 외치듯 구시가지 건물과 건물을 잇는 오랜 연륜의 포도나무 덩쿨도 있다. 신학대학 건물도 우람하다. 대중교통 수단으로 사용되던 오래된 전차를 카페로 장식한 풍경도 아름답다. 빵집을 견학했다. 진흙에서 빵을 구워낸다. 정성껏 구워서 타국의 손님을 대접한다. 담백한 조지아의 빵을 맛있게 먹었다. 실크로드의 역사를 간직한 카라반 사라이도 있다. 조지아 도심에서 유일하게 남은 대상의 숙소다. 겉으로 보아서는 보통의 주상복합상가인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훵 뚫린 독특한 건물이다. 건물 아래에서는 물건을 판매하고 위에는 개인 사무실이다. 그 옛날의 모습은 아니지만 고풍스런 분위기다. 구시가지 대로에서 어미 고양이가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훈훈한 정경이다. 아름다운 풍경의 노천 카페 사이로 걸으며 트빌리시 구사기지의 향수에 젖었다. 구시가지 도보체험을 마치면 므츠바리 강 다리를 건너 신시가지로 이동할 것이다.
* 조지아 트빌리시 시오니 대성당
시오니Sioni 대성당은 트빌리시 구시가지 한복판에서 만난 성당이다. 트빌리시의 시오니 쿠차Sioni Kucha라는 거리에서 지은 이름이다. 시오니 안식성당 또는 시오니 성모 마리아 안식교회로도 부른다. 구소련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도 교회의 역할은 이어졌다. 6~7세기 경에 건축된 조지아의 대표적 정교회 성당이다. 그리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이다. 이곳에는 2가지 보물이 있다. 성녀 니노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인 토마스의 해골이 있다. 한국 성경에서는 '도마'라고 나오는 사람이다. 제단 왼쪽에 성녀 니노Nino의 포도나무 십자가가 있다. 이 포도나무 십자가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십자가에 포도나무 덩쿨이 감겨 있고 탐스러운 포도가 달려 있다. 성녀 니노의 모습도 함께 있다. 4세기 초 성녀 니노는 꿈속에서 성모 마리아로부터 조지아에 가서 기독교를 전파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니노는 마리아가 그녀에게 준 포도나무 십자가를 들고 조지아로 와서 조지아의 기독교를 전파한 사람이다. 오랜 역사의 성당은 아랍과 몽골, 페르시아 등 외세의 침략으로 많이 파괴되었지만 13세기부터 꾸준히 복원해왔는데, 1668년 지진으로 인해 다시 폐허가 되었다. 다시 19세기까지 보수를 거듭하여 오늘의 모습이 된 것이다. 조지아인의 기독교 정신이 대단하다. 허술해 보이는 성당인데 깊은 기독교 역사가 서린 성소다.
* 조지아 트빌리시 므츠바리 강 평화의 다리
트빌리시 구시가지에서 므츠바리 강 다리를 건너간다. 곡선 모양의 강 다리 조형이 현대풍으로 매우 아름답다. 자유의 다리, 평화의 다리로 불리는 이 다리는 2010년에 건설했다. 보행자 전용다리로 차량 통행이 없어 낭만적이고 여유로운 물 위의 공간이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하는 의미 깊은 다리다. 다리 위에서 도심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므츠바리 강물을 눈앞에서 보았다. 또한 강변 높은 지대에 우뚝 솟은 대통령궁도 보았다. 우람한 구조물 품속의 강 다리를 건너 오니 강변에 아름답게 조성한 리케Rike 공원이 있다. 트빌리시 시가지에서, 산정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독특한 아름다움이 서린 므츠바리 강 다리를 건너본 것은 조지아 여행에서 소중한 체험이다.
* 조지아 트빌리시 므츠바리 강 다리에서 본 대통령궁
트빌리시 구시가지에서 므츠바리 강 다리를 건너오며 강변의 고지대에 오롯하게 솟은 대통령궁을 보았다. 푸른 색 돔 지붕에는 국기가 걸려있다. 트빌리시 시가지에서 목마르게 살짝 보이던 대통령궁이 이곳 강 다리 위에서는 전경을 드러내며 우람한 풍채를 다 보여준다. 대통령궁은 트빌리시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정겨운 풍경이다.
* 조지아 트빌리시 시가지 케이블카
트빌리시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조지아의 어머니 상이 있는 산정으로 오른다. 케이블카가 오르내리는 풍경은 트빌리시를 이동하며 곳곳에서 보아왔다. 한 대의 케이블카에 3명씩 마주보며 6명이 승차했다. 긴 줄을 오르면서 트빌리시 산정의 풍경과 시가지를 보았다. 산정에는 조지아의 어머니 상이 오롯하게 서 있다. 산자락을 타고 오른 붉은 지붕의 시가지가 나무 숲 사이로 아름답게 전개된다. 저 아래로는 트빌리시 전경이 한폭의 수채화로 곱게 뜬다. 도심을 가르는 므츠바리 강과 강변 절벽 위의 시가지도 아슬하게 다가온다. 긴 줄을 타고 오른 케이블카가 우리를 산정에 내려준다. 산정에서 트빌리시 시가지를 조망했다.
* 조지아 케이블카로 오른 산정에서 본 트빌리시 시가지
케이블카로 산정에 올라 트빌리시 시가지를 조망했다. 산정에는 조지아의 어머니 상이 있다. 아래로는 구소련 시절의 잔재를 많이 허물고 새로이 건설한 현대풍의 트빌리시 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트빌리시는 코카서스 산맥 남쪽 해발 500m의 구릉과 므츠바리 강 계곡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다. 므츠바리 강 다리의 조형이 빼어난 비경으로 뜬다. 강변에는 하얀 지붕의 법원도 나비의 날개처럼 사뿐히 앉아있다. 대통령궁도 보이고, 복합 상기로 지은 원통 모양의 독특한 건물도 보인다. 트빌리시 시내 곳곳에서 보았던 건물들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기막힌 비경이다. 뒤로는 트빌리시의 보타닉 가든 식물원이 있다. 전망대에서 울창한 식물원을 조망했다. 트빌리시는 수도로써 지하철과 철도,·도로 교통의 요지로 조지아 정치, 문화의 중심지다. 최초의 트빌리시는 5세기에 세워졌고, 아랍인과 투르크인들에게 침략당해왔다. 1801년부터 러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1991년 조지아가 독립하면서 트빌리시는 수도가 되었다. 트빌리시 종합대학이 있고, 므츠바리 강변의 구시가지에는 성과 사원, 고고학박물관 등의 유적이 있다. 외곽에는 므타츠민다 산 전망대와 트빌리시 저수지 등의 관광시설이 있다. 트빌리시 국제공항도 있다. 세계여행에서 시가지를 조망하는 것은 그 나라의 단면을 보는 것이다. 오늘 보는 조지아의 트빌리시는 생각보다 훨씬 화사하고 발전된 모습이다. 조지아 대통령이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 당선되어 서구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일군 도시다. 그래서 코카서스 3국 중에서는 가장 구소련의 잔재가 많이 사라진 나라다. 의식적으로 구소련의 잔재를 허물고 다시 현대풍으로 건설하고 있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극히 정상인데 코카서스 지방에서는 이색적으로 화려한 도시 풍경이다. 케이블카는 연속으로 오르내린다. 좁다란 길을 따라 산정을 내려올 때 우리나라의 성황당 같은 무속 헝겁천이 매달린 나무도 있다. 길가에 핀 양귀비와 들꽃도 아름다운 풍경을 더해준다.
* 조지아 트빌리시 나리칼라 요새
나리칼라 요새는 조지아 트빌리시에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트빌리시 식물원과 하맘Hammam 유황온천 사이의 가파른 언덕 위에 양쪽 벽을 쌓아 만든 4세기 중반의 고대 요새다.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보수되어 지켜온 요새다. 1827년에 큰 지진 폭발로 흔적만 남았다가 1935년에 일부 복원시켰다. 구소련 시절에는 화약 저장고였던 곳이기도 하다. 조지아의 오랜 역사가 담긴 요새의 성곽 구멍 뚫린 공간으로 들어갔다. 조지아의 포도나무가 이곳에도 있다. 빨간 석류꽃이 곱다. 석류꽃 사이에 커다란 항아리도 장식해 놓았다. 나리칼라 요새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뜰이 있고 12세기에 건립된 성 니콜라이 교회가 있다. 교회 안에는 성화와 조지아의 역사를 담은 프레스코 벽화가 있다. 4~19세기까지 1500년 동안 트빌리시의 주요 상징물이었던 탑들이 있다. 한켠에는 침례를 주던 장소로 우물과 십자가도 있다. 성곽이 길게 남아있고 종도 걸려있다. 요새 꼭대기에는 외부의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직사각형 모양의 망루 탑이 있다. 최초의 뼈대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상부요새와 하부요새가 있는데 이곳은 산등성이의 높은 곳에 있는 성채인 상부요새다. 상부요새는 트빌리시 주변을 다 조망할 수 있게 만들었다. 외침에 대비한 마지막 보루다. 성곽 너머로 트빌리시 시가지 전경이 내려다 보인다. 산비탈 경사진 곳의 하부요새는 므츠바리 강을 가로 막고 있다. 나리칼라 요새는 이란, 아랍, 비잔틴 제국 등 외침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7~8세기 아랍인들의 건축양식이다. 요새의 형태는 16~17세기 건축 모습이다. 트빌리시의 고대 유적지인 성 므츠타민다 산에 고대 나리칼라 요새의 파편들이 남아있다. 요새의 큰 방이 왕궁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파괴와 복구를 반복하며 그 흔적조차 사라졌다. 오늘은 화창한 날씨로 파란 하늘이 탱탱하다. 고풍스런 산정 요새는 하늘과 맞닿아 있다. 성곽 위에 올라서면 새로운 신세계를 만난듯 조지아 트빌리시의 도시가 화사하게 열린다. 두려운 요새였지만 오늘날 여행객에게는 평화로운 트빌리시의 비경을 선사하고 있다.
* 조지아 나리칼라 요새에서 본 트빌리시 시가지
트빌리시Tbilisi 시가지는 케이블카로 오른 산정에서도 보았는데 이곳 나리칼라 요새에서도 본다. 현대와 과거가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시 풍경이다. 므츠바리 강이 트빌리시의 도심으로 가르며 길게 흐른다. 현대풍의 므츠바리 강 다리가 아름답다.
* 조지아 트빌리시 시가지 중식
나리칼라 요새에서 언덕길을 따라 트빌리시 시가지로 내려왔다. 산정 전망대에서 보았던 보타닉 가든 식물원과 조지아의 어머니상 안내판도 보고, 노란 야생화가 핀 길목에서 트빌리시의 아름다운 시가지 풍경도 보았다. 시가지에 내려와서도 긴 성곽의 나리칼라 요새가 산정어 오롯하게 보인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트빌리시 시가지 식당으로 갔다. 식당 건물 앞에는 울창한 나무와 함께 동상 조각품이 세워져 있다. 구소련의 흔적을 연상케 한다. 현지식으로 중식을 맛있게 하고 카즈베기로 향했다.
* 조지아 트빌리시 변두리 므츠바리 강 다리
므츠바리 강 또는 므트크바리Mtkvari 강으로 불리는 강 다리를 지나간다. 므츠바리 강은 트빌리시 시가지를 관통하는 강이다. 트빌리시 도심 시가지에서도 므츠바리 강과 아름다운 다리를 보고 건너도 보았는데, 지금은 트빌리시에서 카즈베기로 가는 길에 트빌리시 변두리에서 만나고 있다. 터키에서 발원한 강으로 쿠라 강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강이다. 강변에는 우람한 산이 고운 주택들을 품고 있다.
* 조지아 산녘 노란 꽃 야생화
즈바리 교회에 가기 위해 산길을 오르는데 노란 꽃 야생화가 아주 많다. 노란 미모사 꽃이란다. 도로변에, 산중에 샛노란 꽃들이 비경이다. 한국의 개나리를 연상케 하지만, 색상은 같으나 모양은 개나리와는 다르다. 즈바리 교회를 관람하고 산 언덕길을 내려가자 들녘에는 보라 색 야생화가 아름답다. 이번 여행국인 코카서스 3국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에서 여정의 큰 몫을 차지하는 야생화 풍경 중 하나다.
* 조지아 므츠헤타 산정 즈바리 교회
트빌리시에서 카즈베기로 가는 도로에서 산 위에 오롯하게 앉은 즈바리Jvari 교회 먼저 보았다. 즈바리 교회는 6세기에 지은 것으로서 아라크비 강변 산 위에 있다. 성녀 니노가 므츠헤타에서 가장 높은 이곳 산정에 최초로 포도나무 십자가를 세웠다. 그래서 '십자가'란 뜻의 즈바리 교회가 여기에 세워진 것이다. 즈바리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정말 그때의 큰 포도나무 십자기가 내부 중앙에 높다랗게 세워져 있었다. 기독교의 거룩한 표상이다. 성녀 니노가 꽂았다는 십자가와, 성녀 니노가 묻힌 즈바리 교회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처음에는 십자모양 평면의 작은 건물이었으나, 후에 사방에 반달모양의 공간을 두어 좀더 큰 규모로 다시 세웠다. 건물 중앙에는 8각형 돔이 솟아 있다. 외벽 윗부분에는 세로로 긴 창을 5개 설치하였다. 사암 재료로 지었고 오랜 연륜으로 낡아진 건물이다. 즈바리 교회 곁에는 므츠헤타를 바라보는 곳이 있다. 아래로는 아찔한 절벽이고 강변을 따라 자리한 붉은 도시 므츠헤타가 눈앞에 전개된다. 성녀 니노가 이베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게시를 받고 맨 처음 온 곳이 므츠헤타다. 즈바리 교회는 므츠헤테 시가지 속의 교회와 함께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자작한 초지의 푸른 언덕 길을 따라 내려왔다. 이제 아나누리 상당으로 간다. 여기서 아나누리 성당까지는 1 시간 소요된다.
* 조지아 즈바리 수도원에서 본 므츠헤타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서 카즈베기로 가는 길에 본 도시다.트빌리시에서 북서쪽으로 20km 떨어져 있다. 계획된 일정은 아닌데 므츠헤타Mtskheta의 산 정상에 위치한 6세기의 즈바리 교회를 보고, 그곳 교회에서 절벽 아래 강 건너의 므츠헤타 도시를 조망했다. 쿠라 강과 아라그비 강의 합류점에 있다. 아라그비 강은 조지아 코카서스 산맥 북부 경사지 주변에서 흐른다. 아라그비 강 길이는 112km다. 아라그비 강은 므츠헤타에 있는 댐의 몇 Km 하류에서 므트크바리 강과 만난 것이다. 터키어로 부르는 쿠라 강이 조지아어로는 므트크바리 강이다. 쿠라Kura는 '느리다'라는 뜻인데 조지아어에서 므트크바리 Mtkvari라는 단어와 같다. 쿠라라는 명칭은 러시아에서 최초로 사용했고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일부 지리학계에서는 쿠라 강을 러시아 이남 지역에서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나누는 경계로 보기도 한다. 터키 동부에서 발원한 강줄기는 조지아를 거쳐 카스피해로 흘러 들어간다. 쿠라 강 길이는 1364 km다. 코카서스에서 내려오는 아라그비 강물과 터키에서 내려오는 쿠라 강물이 만나 조지아로 흘러간다. 그 강변에 아담한 옛 수도 므츠헤타가 있다. 산정의 즈바리 교회에서 바라다본 므츠헤타는 붉은 지붕의 물결로 푸른 나무 군락과 함께 비경이다. 므츠헤타는 5세기에 조지아가 수도를 트빌리시로 옮기기 전까지이베리아의 수도였던 곳이다. 오늘날 이베리아 반도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역을 말하지만 여기서 이베리아는 그 당시의 이곳 지명이다. 조지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에 하나로 한국의 경주 같은 도시다. 이베리아 왕국의 수도였던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에는 페르시아와 지중해를 잇는 동서 교역로로 번창했었다. 수도를 트빌리시로 옮긴 뒤 인구가 줄면서, 오늘날은 인구 1만여 명의 작은 시골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고대와 중세 유적들, 특히 초기 기독교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기독교 유적이 많은 이유는 조지아에 기독교가 전파되던 시기인 4세기 초로 317년인데, 그때 이곳이 왕국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이곳에 남아 있는 교회들은 코카서스 지방의 중세 종교건축의 걸작품들이다. 므츠헤타 도시의 중심에 위치한 11세기의 중세교회인 스베티츠호벨리Svetitskhoveli 교회가 오롯하다. 예수 사망시 입은 옷, 성의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성의를 가져온 여인 묻힌 교회다. 예루살렘이 첫번째 성지이고, 므츠헤타는 두번째 성지다. 므츠헤타 교회스베티츠코벨리 대성당은 ‘살아있는 기둥 교회’라는 뜻으로 이곳에 기독교가 전파되던 4세기에 최초로 건립된 성당으로 조지아 정교회의 총본산지다. 조지아 총주교가 살던 곳에 세운 건물로 과거에는 왕궁이자 왕묘 역할까지 겸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왕의 대관식이나 장례식도 거행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010년∼1029년에 건축한 것이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재건하였다. 현재도 종교적인 위치는 변함이 없어서 므츠헤타와 트빌리의 대주교이자 조지아 정교회 총주교가 이곳에 머물고 있다. 조지아를 기독교로 개종시킨 성녀 니노St. Nino가 아라그비 강과 므츠헤타가 만나는 이 지점에 조지아 최초의 교회를 세울 장소로 택했다. 11세기에 재건된 건물은 중앙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계단형 구조다. 중앙에는 약 40m 높이의 원통형 돔이 있다. 멀리서 보아도 뾰족한 중앙의 돔 건물이 계단식으로 솟구쳐 올라있다. 건물 외벽은 크고 작은 아치로 장식되어 있다. 교회 내부에는 16~17세기에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있다. 므츠헤타는 종교 중심지로 1994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시간 관계로 가까이 가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지 역사 깊은 성지 므츠헤타를 조망한 것은 뜻깊은 여정이다.
* 조지아 구소련 군용도로 진입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를 떠나 므츠헤타를 거쳐 카즈베기로 가고 있다. 오늘의 일정은 군용도로를 달려서 간다 것이 가장 기대되는 여정이다. 버스가 드디어 군용도로에 접어 들었다. 조지아에서 러시아까지만 가는 213Km의 도로다. 구소련 시절 건설한 군사 목적의 도로다. 러시아에서 코카서스로 넘어오기 위해 건설했다. 1783년부터 건설하였다. 우람한 가로수가 오랜 역사를 읊조리고 있다. 도로변에는 방목하는 가축들도 평화로이 풀을 뜯는다. 군용도로는 산녘으로, 들녘으로, 호수변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조지아에는 분쟁지역이 있다. 내일 갈 고리 부근 지역이다. 이곳 분쟁지역에서는 자치권을 요구한다. 1783년 조지아와 러시아 조약에서 자치권 보장을 약속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이 군용도로 건설을 허용했다. 구소련의 역사가 서린 길을 달리는 체험은 신비로운 여정이다.
* 조지아 진발리 호수 수력발전 댐
트빌리시에서 카즈베기로 갈 때 보았던 호수다. 진발리 호수ZhinvaliLake는 상당히 넓다. 산길을 돌 때마다 곳곳에서 큰 진발리 호수가 보인다. 코카서스 산맥에서 빙하가 녹아 흘러드는 아라그비 강이 만들어낸 호수다. 1986년에 진발리 저수지의 형태로 댐이 건설되었다. 조지아의 전력 중 상당량을 생산하는 수력발전 댐이다. 또한 호수 곁에 있는 아누나리 상당이 비경이다. 조지아는 미국에서 유학한 사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래서 조지아는 구소련 연합국이었으면서도 현재는 친미, 반러 정책 성향의 국가다. 조지아 대통령은 저주지와 댐을 곳곳에 건설했다. 진발리 호수에도 댐을 건설하여 수리시설을 발전 시켰다. 긴 둑이 호수의 물을 가두고 있다. 산과 호수가 어우러져 진풍경이다. 내일 카즈베기에서 고리로 갈 때도 보는 호수다.
* 조지아 잔빌리 호수변 아나누리 성당
드넓은 진발리 호수변에 아나누리 성당이 있다. 중세풍의 벽돌로 지은 성당이 호수와 함께 웅장한 풍채로 서 있다. 도로쪽에서 보면 성당이라기보다 성벽과 망루로 둘러친 요새 같다. 실제로 이 건물은 16~18세기의 공작이 살던 성이다. 전쟁시에는 요새로도 사용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촛불과 성화로 다른 성당과 동일한 정경이다. 진발리 호수변의 성채에도 가 보았다. 5천 명까지 수용 가능한 피난처에 물공급을 위해 진발리 호수와 연결된 비밀통로도 있다. 2채의 건물로 된 이 성당은 2007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었다. 조금 전 지나온 군용도로에는 구다리와 신다리 두개가 있다. 성당 앞에는 군용도로가 길게 전개된다. 구소련 시절의 소슬한 군용도로에 발을 딛고 서 보았다. 주변에는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이 많다. 평화로운 정경이다. 이제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고지대 구다우리로 떠난다. 여기서 숙소가 있는 구다우리까지는 1시간 10분 소요된다.
* 조지아와 러시아를 잇는 구소련 군용도로
조지아 산녘의 군용도로를 달리다가 아나누리 성당 앞에서 군용도로에 발을 딛고 서 보았다. 조지아와 러시아를 잇는 구소련시절에 건설한 도로다. 1768년부터 러시아가 터키와의 전쟁을 위해 건설하기 시작했고, 1783년부터는 코카서스 산맥을 넘는 군사도로로 건설하였다. 전체길이는 213Km다. 가장 높은 곳은 해발 2300m의 산길 도로다.이 길은 러시아가 최대의 영토를 확장했던 시기에 건설했고, 조지아와의 합병을 계기로 본격적인 공사를 했다. 지금은 러시아와 조지아를 연결하는 교통과 물자수송의 큰 역할을 하는 조지아의 산업도로다. 러시아가 조지아에서 수입하는 와인은 대부분 이곳 군용도로를 통해 운반된다. 조지아가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는 물자들도 이곳을 통해 운반된다. 코카서스 여행객들에게는 군용도로 주변의 비경을 선사한다. 코카서스 군사도로를 타고 카즈베기 산으로 가는 코카서스 산맥에사 가장 아름다운 산길도 있다. 나도 이번 코카서스 3국 여행으로 한국을 떠나기 전 조지아의 군용도로애 대한 기대가 상당히 컸었다.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아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훌륭한 코카서스의 비경을 선사하는 군용도로다. 세상은 조지아에게 그만큼 너그러워졌고, 해맑은 평화를 선사한 축복의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 조지아 코카서스 산맥 두 강 합류점
조지아 군용도로를 달리다가 잠시 하차하여 코카서스 산맥의 물과 또 다른 강의 물이 합류하는 진풍경을 보았다. 오른 쪽 강이 코카서스 산맥에서 내려오는 아라그비 강이다. 두 강이 합류하고 있다. 하얀 강과 검은 강이다. 산이 달라서 물의 색깔이 다르다. 검은 빛이 도는 강이 코카서스 산맥애서 흐르는 아라그비 강이다. 합류지점에서도 일정 구간까지는 검은 물과 하얀 물이 나뉘어져 힘차게 흐르는 물살이 비경이다. 강 다리를 건너서 왔다. 봉수대도 있었다. 불을 켜서 위험을 알리던 곳이다. 모두 조지아의 군용도로변에서 보는 이색 풍경들이다.
*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로 가는 가스관
러시아에서 아르메니아로 가는 가스, 석유관이 산녘 강을 건너 가고 있다. 조지아에서 사용하는 가스관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랐다. 조지아는 러시아와 사이가 나빠서 러시아의 가스와 석유를 사용하지 않는다. 조지아는 아제르바이잔의 가스와 석유를 수입하여 사용한다. 단지 러시아와 아르메니아를 잇는 가스관이 이곳을 지나가는 요금만 받아 돈을 번다. 코카서스 지방 국가들은 가스관이 모두 지상에 설치 되어 있다. 자국 내에서 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가는 가스관도 지상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국경을 넘어가는 처연하고 평화로운 가스관이 우리의 시각으로는 그저 부러울 뿐이다.
* 조지아 코카서스 산맥 스위스 풍경
산언덕 위의 집들이 스위스와 동일한 풍경이다. 스위스 여행에서 보던 고즈넉한 산마을이 차창가로 스쳐 지나간다. 양떼들도 있다. 아그라비 강변의 고운 산마을을 지나간다. 코카서스 산맥에서 흐르는 아라그비 강물은 매우 맑다. 다리도 건너간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깊은 산중의 아름다운 정경이다.
* 조지아 코카서스 산맥 구다우리 전망대
구다우리Gudauri 전망대는 코카서스 산맥을 보는 전망대다. 구다우리 산마을 절벽에 난간을 설치해 놓았다. 그곳에 서니 주변 풍경이 아찔한 비경으로 시야에 담긴다. 이곳은 해발 고도 2천 미터 이상의 고지대다. 여행객을 위한 배려로 깊은 산간 지역에 설치해 놓은 구다우리 전망대다. 코카서스 산맥의 긴 능선이 구비구비 하늘과 맞닿아 흐르고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는 코카서스 산맥에서 내려온 아라그비 강물이 흐른다. 우리 부부가 지나온 코카서스 산맥 능선도 보이고, 우리 부부가 가야 할 코카서스 산맥 카즈베기 산 설봉도 보인다. 모두가 기막힌 조지아 여행의 선물이다. 코카서스 산맥의 고요한 절경을 감상하며 잠시 휴식하고 구다우리 호텔로 향했다. 호텔까지는 10분 정도 소요 된다. 조지아 군용도로가 줄기차게 이어지며 우리를 이끌고 간다.
* 조지아 카즈베기 산 조망 호텔에서 본 구다우리 산마을
호텔 주변은 가정집은 없고, 모두 호텔이거나 리조트만 있다. 아름다운 색상의 목조 건물들이다. 코카서스 산맥의 아름다운 풍광으로 구소련 시절에는 러시아인들의 별장이 많던 곳이다. 요즈음은 자국민과 외국인들이 카즈베기 산 관광을 위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스키장도 있다. 구다우라 산마을을 찾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증명하듯 호텔 주변의 구다우리 산마을은 온통 고운 색상의 호텔이거나 리조트 건물이 즐비하다. 우리가 유숙할 호텔도 규모가 아주 크고 우아한 회색 목조 건물이다. 구다우리 산마을의 크고 작은 규모의 리조트 건물들이 코카서스 산맥과 함께 진풍경이다 .
* 조지아 구다우리 호텔에서 카즈베기 산 저녁 풍경
저녁 무렵 구다우리 호텔에 도착했다. 이곳 호텔에서 카즈베기 산이 보인다. 구름이 산을 덮어 높은 곳은 잘 보이지 않지만 코카서스 산맥의 웅장한 산줄기가 호텔을 감싸고 있다. 이곳 구다우리 산마을의 호텔은 이미 해발 2003m 고지에 있다. 구다우리 산마을은 온통 호텔과 리조트의 물결이 산능선 곳곳을 타고 흐른다. 그만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국민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카즈베기 산을 보기 위해 오는 관광지다. 더 가까이 보기 위해서는 카즈베기 산마을로 가야 한다. 우리도 카즈베기 산마을로 가는 길에 유숙한 호텔이다. 내일 카즈베기로 떠난다. 어스름 빛이 스며드는 카즈베기 산 저녁 풍경이 소슬한 비경이다.
2014년 6월 1일 일요일 조지아 구다우리, 카즈베기, 고리
* 조지아 카즈베기 조망 호텔 주변 풍경
우리가 유숙한 구다우리 호텔은 회색 톤의 건물이다. 실내도 회색으로 장식하여 아주 고상한 정경이다. 이곳 구다우리 호텔 주변 마을은 모두 아름다운 색상의 목조 호텔과 리조트 건물이 들어서 있다. 카즈베기로 가는 사람들이 유숙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도 오늘 아침 식사 후 카즈베기 산을 가장 가까이서 조망하는 스테판츠민다 사메바 교회로 간다. 카즈베기와 같은 곳이다. 과거에는 카즈베기로 불렀는데 오늘날은 마을 명칭을 스테판츠민다로 변경했다. 정부의 지원금으로 생활하는 곳이다. 호텔 방에서도 조망되는 카즈베기 산이 비경이다. 이곳 호텔 벽면에 2003m라는 해발 고도가 적혀 있다. 고지역의 구다우리 산마을이다. 이토록 높은 지대에도 자작한 풀과 보라 색, 하얀 색 등 고운 색상의 야생화가 영토를 지키고 있다. 카즈베기 설봉 반대편을 바라보니 저 아래로 구다우리 산마을의 주택들이 곱다. 어제 우리가 지나온 마을이다. 화창한 날씨로 호텔 주변 풍경은 한폭의 수채화 명화로 뜬다.
* 조지아 구다우리 호텔에서 본 카즈베기 산 아침 풍경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을 여니 카즈베기 산의 설봉이 전개된다. 우리 부부가 유숙한 호텔 방에서도 카즈베기 산이 조망되는 것이다. 기막힌 각도로 지은 객실이 우리 부부에게 배정된 것이다. 큰 축복이다. 지난 밤에는 어둠으로 설봉이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 아침에는 확연히 드러난다. 아침 식사를 서둘러 마치고 호텔 밖으로 나갔다. 구름을 머리에 이고 선 카즈베기 설산이 그야말로 비경을 선사한다. 고도가 낮은 곳은 푸른 색 산줄기가 장관이고, 고도가 높은 곳은 파란 하늘과 경계선을 그으며 하얀 산줄기가 장관이다. 카즈베기 산은 코카서스 산맥의 가장 높은 산이다. 코카서스 산맥에는 높은 산이 6개 있는데, 카즈베기 산은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산으로 해발 5047m다. 이곳은 구다우리 산마을이다. 호텔 주변에 가정집은 없다. 아름다운 구조의 목조 호텔과 리조트들이 카즈베기 산과 함께 고운 풍경을 그려낸다.
* 조지아 코카서스 산맥 산마을 풍경
카즈베기 산이 잘 보이는 구다우리 호텔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고 카즈베기로 떠나면서 본 구다우리 산마을 풍경이다. 해발 고도가 2천 미터 이상의 높은 곳이어서 코카서스 산맥 산정이 바로 눈앞에서 보인다. 지금 가고 있는 카즈베기 산의 만년설 설봉도 아주 가까이 보인다. 카즈베기 산은 코카서스 산맥의 산 중에서 가장 높은 해발 5047m의 산이다. 그 비경의 설산을 보듬고 사는 산마을이다. 민가 주택도 있고, 리조트 호텔 건물도 있다. 이곳 산마을에 사는 사람에게는 고독이 서릴지도 모르겠지만 여행객의 시선으로는 모두 시리도록 아름다운 낭만의 산마을 풍경이다.
* 조지아 코카서스 산맥 구소련 군사도로
조지아 코카서스 산맥의 구소련 군사도로는 코카서스 여행에서 큰 비경을 선사한다. 군사도로는 조지아와 러시아를 잇는 군사용 도로였는데 주로 독일 죄수들이 건설했다. 건설 도중 사람들이 죽기도 했다. 이 길은 러시아가 최대의 영토를 확장했던 시기에 건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아들 파벨 1세가 1799년 착공하여 2년 후인 1801년 알렉산더 1세 때 러시아가 조지아를 정식으로 합병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공사를 했다. 그후 1세기가 흐른 뒤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보수했다. 지금은 러시아와 조지아를 연결하는 교통과 물자수송의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코카서스 여행객들에게는 군사도로 주변의 비경을 선사한다.
* 조지아 코카서스 산맥 양떼들
우람한 코카서스 산맥의 줄기를 보며 군사도로를 달리는데 산비탈을 타고 걸어가는 양떼들이 푸른 초지에 하얗게 수를 놓는다. 조지아 나라의 표현으로 출근하는 양떼들이란다. 선두에는 우두머리가 길 안내를 하고 많은 양들이 따러서 간다. 맨 뒤에는 목부가 안전하게 몰고 간다. 퇴근도 저렇게 한단다. 이곳은 코카서스 산맥 중에서도 동물들이 먹기 좋은 풀들이 많이 자라는 지역이다. 그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양떼들이 오늘 하루의 먹이를 찾아 나온 것이다. 언덕 위에는 조지아와 러시아의 우정 기념비가 있는데 그 주변으로 모여들어 두 나라의 평화를 그려내고 있다.
* 조지아와 러시아의 우정기념비
트빌리시에서 카즈베기로 가는 군사도로변에 아름다운 그림의 원형 조형물이 있다. 조지아와 러시아의 우호적인 관계를 다짐하며 세운 우정기념비다. 주변에는 하얀 양떼들이 증명이라도 하듯 많이 모여 평화롭게 풀을 뜯는 장면을 연출한다. 이곳은 해발 2395m인 즈바리 고개Zvari Pass다. 우리말로 십자가 언덕이다. 조지아와 러시아를 잇는 군사도로가 1783년에 건설되었고, 1983년에 군사도로 건설 200주년 기념으로 이곳에 우정기념비를 세웠다. 1983년은 조지아가 구소련의 연방국으로 있던 시절이다.이 군사도로는 조지아와 러시아가 남오세티아 전쟁을 벌였던 2008년 이후 잠시 폐쇄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개통되었다. 이 군사도로에 대한 매력으로 세계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다. 나도 이번 코카서스 3국 여행으로 한국을 떠나기 전 조지아의 군사도로애 대한 기대가 상당히 컸었다.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아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훌륭한 코카서스의 비경을 선사하는 군사도로다. 오늘날은 러시아가 조지아 와인의 최대 수입국이고, 러시아가 수입하는 와인은 대부분 이곳 군사도로를 통해 운반된다. 조지아가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는 물자들도 이곳을 통해 운반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조지아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군사도로다. 우정기념비는 돌과 콘크리트로 쌓아올린 거대한 기념탑이다. 아랫부분에는 열두 개의 아치형 문으로 조성되고, 둥근 기념비 안쪽 벽면에는 조지아와 러시아 역사의 벽화로 가득 채우고 있다. 타일로 장식한 화려한 색상의 모자이크 벽화가 시선을 집중시킨다. 중앙 부분에 러시아 예카테리나 여제가 있고, 여제의 양편에는 1783년과 1983년의 숫자가 적혀 있다. 1783년은 러시아 군사도로가 착공된 해이고 1983년은 군사도로 건설 200년이 되는 해로 이곳 우정기념비를 세운 해다. 1783 아래에는 십자가를 상징한 조지아의 교회가 있고, 1983 아래에는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있는 바실리 성당을 상징한 그림이 있다. 기념탑 주변에는 철제 난간을 설치해서 아치형 문으로 나가면 뒤편으로 코카서스 산맥이 우람하게 전개된다.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코카서스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 카즈베기 산의 설봉이 눈앞에서 장엄하게 비경을 선사한다. 코카서스 산맥의 양떼와 함께 조지아와 러시아의 고운 우정이 담긴 우정기념비가 아름다운 명화를 그려낸다. 걸음을 붙드는 멋진 풍경에 자꾸 뒤돌아보며 아쉬움으로 내려왔다.
* 조지아 코카서스 산맥 설봉
점점 깊은 산맥의 길로 접어든다. 코카서스 산맥의 설봉이 비경이다. 우리 부부는 지금 5047m의 카즈베기 산을 향해 가고 있다. 카즈베기 산 곁에 있는 카즈베기 스테판츠민다 사메바 교회까지 오를 것이다. 코카서스 산맥에는 높은 봉우리의 산이 6개 있다. 지금 바라보는 설봉이 그 중의 하나인 카즈베기 산이다. 초여름의 하얀 만년설 설산이 육중한 자태로 이방인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한다.
* 조지아 카즈베기 십자가 묘지와 십자가 길
깊은 산녘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군사도로를 건설하던 중에 사망한 사람들의 묘지다. 여기는 2395m 고지의 산악지대다. 이곳 사람들은 즈바리 고개라고 부른다. 즈바리는 조지아 말로 십지가다. 도로변에 이 지역의 해발고도를 알리는 2395란 숫자를 써서 세워둔 하얀 표지석이 있다. 1697이란 숫자는 있다. 이 고개가 개통된 연도로 보인다. 검은 제복을 입은 성직자가 십자가 옆에 서서 우리를 바라본다. 그리고 십자가 묘지 곁에 위성 안테나 같은 물체가 세워진 것으로 보아 이곳 주변에 사람이 거주하는 것 같다. 십자가 길도 있다. 조지아 현지 가이드는 이곳이 마지막 십자가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러시아, 터키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통행하던 도로다. 지금은 조지아와 러시아 관계가 나쁘다. 2010년부터 그루지아에서 조지아로 국가명도 개명했다. 2010년 이전에는 지도에 그루지아로 나오지만, 2010년 이후부터는 지도에서도 조지아로 나온다. 조지아 대통령이 세계에 조지아로 부르도록 선포했다. 뒤를 돌아보니 구부러진 십자가 길이 애련하다. 조금 더 달려갔을 때 산줄기를 타고 흐르는 유황 폭포가 노랗게 비경을 선사한다.
* 조지아 산녘 유황 폭포
군사도로의 터널을 지나자 산녘을 타고 흐르는 노란 유황 폭포가 보인다. 철분이 다량 함유된 물이 만들어낸 유황 폭포다. 이곳은 고비라는 산중 마을인데 추워서 아무도 살지 않는다. 막대기에 하얀 양털 모자를 걸어두어 이곳이 추운 마을임을 알게 해준다. 도로변에 여행객들에게 산에서 생산한 꿀 등 여러가지 기념품을 판매하는 상인이 있다. 주로 손으로 짠 털실 뜨개질 소품이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사라진 물건인데 조지아에서는 특별한 기념품으로 생각한다. 구경도 하고, 더러는 사기도 하고 유황 폭포 앞에서 보낸 잠시 휴식이 소중한 여정으로 남는다.
* 조지아 산마을 풍경
코카서스 군사도로를 타고 카즈베기 산으로 가는 도중에 본 산마을 풍경이다. 코카서스 산맥에사 가장 아름다운 산길이다. 1768년부터 러시아가 터키와의 전쟁을 위해 건설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가 조지아를 지배하던 1783년부터 산맥을 넘는 군사도로로 건설하였다. 전체길이는 213Km다. 가장 높은 곳은 해발 2300m의 산길 도로다. 건설 직후에는 군사용으로만 사용해오다가 1799년에 민간인의 통행도 병행했다. 그 당시에는 산을 넘어가는 상인들을 약탈하는 산적들이 많았다. 이런 산적들을 차단시키기 위해 정부에서 산 계곡마다 민간인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산 곳곳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조성한 것이다. 테레기 강이 산을 타고 내려온 물을 모아 산마을 곁으로 흐른다. 카즈베기까지 가도록 길게 이어져 산길을 휘돌아 흐른다. 산물이라서 아주 깨끗하다. 우람한 산자락과, 멀리 보이는 만년설 설봉의 카즈베기 산정, 그리고 산을 따라 곱게 자리한 산마을 풍경이 스위스와 유사하다.
* 조지아 산마을 동물과 목부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서 군사도로를 타고 카즈베기로 가는 동안 여러가지 신비로운 산 풍경을 많이 보았다. 점점 카즈베기 산에 가까이 다다르자 동물과 목부가 종종 보인다. 이곳은 코카서스 산맥의 산자락으로 동물들의 먹이가 풍부해서다. 양떼가 이동할 때는 앞에서 개가 동물을 인도한다. 뒤따라 동물떼가 걸어가고, 맨 뒤에는 긴 막대기를 든 목부가 동물들을 안전하게 몰고 간다. 우리가 탄 버스가 달리는 도로변에 소떼의 무리가 마주하여 온다. 버스도 동물도 놀라지 않는 기색으로 처연하게 교행한다. 조지아 산마을의 정겨운 풍경이다.
* 조지아 카즈베기 산마을 스테판츠민다
카즈베기 산마을 스테판츠민다Stepantsminda에 도착했다. 국경마을로 러시아 국경에서 약 10Km 떨어져 있다. 카즈베기는 트빌리시에서부터 달려온 구소련 군사도로의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도시다. 군사도로는 조지아와 러시아를 가로지르는 코카서스Causcasus산맥 중앙을 관통하는 도로다. 트빌리시에서 블라디카프스까지 연결되는 213Km 구간의 도로다. 우리 부부도 지금 군사도로를 타고 이곳 카즈베기 산마을에 도착했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Tbilisi에서 북쪽으로 테렉 계곡을 따라 157km 정도 거리다. 조지아 북동쪽의 므츠헤타다 미티아네티주에 있다. 카즈베기에서는 행정 중심지로 테르기Thergi 강변에 있다. 이 마을은 해발 1700m의 고지대에 위치해 있다. 어느 곳에서 보아도 코카서스 산맥의 줄기가 마을을 감싸안고, 카즈베기 산이 우람하게 솟구쳐 있다. 만년 설봉의 육중한 카즈베기 산 앞에는 해발 2200m의 고지에 14세기에 지은 츠민다 사메바 교회가 오롯하다. 카즈베기 산은 얼음을 머리에 이고 있는 산이란 뜻이다. 아담하고 소박한 도심에는 고운 주택과 소규모의 상가들이 있다. 목조 장식으로 산마을의 향수를 그윽하게 머금고 있다. 시가지 조그만 광장에 알렉산더 카즈베기(1848~1893년)라는 사람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알렉산더 카즈베기는 스테판츠민다, 구소련 시절의 카즈베기 마을인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러시아에서 공부했고 트빌리시에서 작가활동을 했다. 외국 작품을 조지아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알렉산더 카즈베기는 19세기 조지아의 대문호다. 그의 소설 '부친 살해'의 주인공 코바는 임꺽정 같은 의적이다. 훔친 재물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지만 코바의 행동은 잔인하다. 스탈린은 소년시절 이 소설을 읽고 코바에게 몰두했다. 스탈린은 볼셰비키 혁명 시절 코바라는 이름으로 지하활동을 했고, 일생 동안 자신을 코바라고 자칭했다. 카즈베기 역사 박물관에 알렉산더 카즈베기에 대한 자료가 있다. 구소련의 통치 때 그의 이름을 따서 이곳 마을을 카즈베기Kazbegi로 바꿔 불렀다. 그러다가 2006년에 본래의 지명을 되찾아 조지아 정교의 수도사였던 스테판의 이름을 따서 스테판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카즈베기 마을과 스테판츠민다 마을은 같은 곳이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정부의 지원금을 받아 생활한다. 러시아 시인 푸쉬킨도 이 마을에서 3년 정도 살았다. 카즈베기 산마을은 해발 1700m에 위치한 소도시로 카즈베기 산 등정의 시작점이며 전문 산악인이나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의 베이스캠프다. 카즈베기에서 출발하여 해발 2200m의 츠민다 사메바 교회를 거쳐, 고산목장과 해발 4500m의 고원을 지나, 해발 5047m의 카즈베기 산 정상에 오른다. 구소련 시절인 1988년 카즈베기 마을, 지금은 스테판츠민다로 불리는 이곳 마을에서 산정 교회까지 쉽게 오르도록 케이블카를 설치하였으나 조지아인들의 반대로 바로 철거되었다. 오늘날 츠민다 사메바 교회는 조지아 정교회의 관할로 조지아인들의 중요한 성지다. 츠민다 사메바 교회가 있는 게르게티는 외국인에게는 조지아의 상징적인 관광명소다. 우리 부부가 여기에 온 것도 카즈베기 마을의 츠민다 사메바 교회에 가기 위해서다. 스테판츠민다 마을에서 사메바 교회로 가는 강변에는 노란꽃이 곱다. 테르기 강 다리를 건너 산마을을 지나간다. 산자락을 타고 마을을 이루고 산다. 마을 곳곳에 가스관이 높고 낮게 연결되어 있다. 동네에는 아이들이 종종 보인다. 방목하는 가축도 있다. 카즈베기 산마을의 고즈넉한 정경이 애련한 잔상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 조지아 코카서스 산맥 카즈베기 산
카즈베기Kazbegi 산은 코카서스 산맥에 있는 산이다. 러시아어로는 카프카스 산맥의 산이다. 코카서스 산맥은 해발 5천미터가 넘는 산이 6개나 있다. 아주 웅장한 산맥으로 조지아의 지붕이다. 카즈베기 산은 코카서스 산맥에서 가장 아름답고 높은 산으로 해발 5047m다. 러시아와 조지아의 경계에 있으며, 흑해에서 카스피해까지 북서에서 남동으로 뻗은 코카서스 산맥 중앙에 위치한 산이다. 트빌리시에서 카즈베기 산마을에 오면서 서서히 그 위용을 드러낸 풍경을 보아왔다. 장엄한 줄기의 코카서스 산맥이 줄기차게 이어져 이미 비경을 선사했다. 카즈베기는 조지아어로 얼음산이란 뜻인데 그것은 정상에 연중 만년설이 덮여 있어서다. 카즈베기 스테판츠민다 산마을에서 출발하여 정상까지 등정하는 사람도 있다. 스테판츠민다 마을은 해발 1,700m에 위치한 소도시다. 육로교통으로 이곳 마을까지 오면 이미 해발 1700m에 오른 셈이다. 영국인 더글러스 프레시필드가 1868년 최초로 등정에 성공하였다. 등정하기 좋은 시기는 6월∼9월이다. 우리는 카즈베기 산을 등정하려는 것은 아니고 카즈베기 산이 가장 잘 보이는 해발 2200m 고지의 츠민다 사메바 교회로 가고 있다. 4륜 구동차에 6명씩 타고 완만하게 올라간다. 그리 위험하진 않지만 울창한 산길이 좁고, 거칠어서 차가 많이 흔들리는 구간이 많다. 보수를 하여도 다시 눈이 녹아내려 도로를 파이게 해서 길은 여전히 이렇게 험하단다. 고지대라서 조금 두려웠는데 버스기사는 능란한 솜씨로 운전하여 우리를 카즈베기 산 위의 츠민다 사메바 교회 앞에 내려준다. 카즈베기 산이 최고의 근경으로 바라다보이는 카즈베기 사메바 교회에 올라가서 산 풍경을 조망했다. 교회 주변의 산은 평평한 초지로 방목하는 동물들이 있고, 교회 절벽 아래로는 게르게티 산마을이 있고, 교회 정원에서 눈을 하늘 향해 들면 웅장하고 아득한 고산 설봉의 카즈베기 산이 근엄한 자태로 서 있다. 모두 시리도록 아름답고 엄숙한 비경이다. 또한 이곳 카즈베기 산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의 전설이 담긴 산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신이 감추어 둔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사했다. 인간에게 문명을 최초로 선사한 것이다. 그 죄몫으로 제우스신은 중형을 선고했다. 프로메테우스를 코카서스 산맥의 험악한 산 중 하나인 카즈베기 산 위의 바위에 묶어 놓았다. 독수리가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 먹게 하는 고통을 주었다. 프로메테우스는 밤에는 간이 회복되지만 낮이면 다시 간을 쪼아 먹히는 영원한 고통을 겪는다. 오늘날에도 실제로 카즈베기 산 위에는 공중을 맴도는 독수리들이 많다. 조지아인들은 그 전설을 지금까지 믿어오고 있다. 땅도 하늘도 다 포용하는 깊은 뚝심의 산, 신의 손길로 빚은 거룩한 산, 기막힌 전설의 산 앞에 나는 지금 서 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죄 짓지 않고, 더욱 참되게 살 것을 다짐하는 무아의 경지다. 살면서 넘기 어려운 산을 만났을 때, 오늘 이 순간의 회억으로 코카서스 카즈베기 산을 부르리라.
* 조지아 카즈베기 츠민다 사메바 교회
카즈베기에 온 것은 어쩌면 이곳 산정의 츠민다 사메바 교회Tsminda Sameba Church를 보기 위해서다. 츠민다는 성스럽다는 뜻이고, 사메바는 삼위일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곳 카즈베기 츠민다 사메바 교회는 카즈베기의 성 삼위일체 교회란 뜻이다. 카즈베기는 스테판이라고도 불리는 이곳 마을 이름이다. 구소련 시절에는 카즈베기라고 불렸고 오늘날은 스테판으로 부르기도 한다. 스테판츠민다 마을에서도 높은 산정의 교회가 오롯하게 보인다. 한여름에도 눈이 올 때가 있는 추운 지역이어서 방한복을 준비하여 입고 간다. 스테판츠민다 마을에서 4륜 구동차에 6명씩 승차하여 마을을 지나 산길을 오른다. 약 30분 정도 소요된다. 산 언덕 길을 따라 걸어서 오르는 사람도 있다. 카즈베기 츠민다 사메바 교회는 게르게티 성 삼위일체 교회라고도 부른다. 츠민다 사메바 교회는 카즈베기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해발 2200m 고지에 있다. 스테판츠민다 마을이 해발 1700m 고지의 마을이어서 산정 사메바 교회까지는 해발 500m만 오르면 된다. 4륜 구동차의 운전기사는 노련한 운전으로 산길을 돌고돌아 완만하게 서서히 올라간다. 산정 주차장에서 내렸다. 멀리 코카서스 산맥의 만년설 설봉이 병풍처럼 우람하게 서 있다. 그 앞의 낮은 산 봉우리에 카즈베기 츠민다 사메가 교회가 오롯하게 서 있다. 주변은 푸른 초지로 소떼가 돌아다니며 풀을 뜯는다. 사람을 만나도 무서워 하지 않는다. 이 외롭고 험한 산에서 동물과 인간의 만남은 서로에게 필요한 공존이다. 교회로 들어가는 길이 뽀얗게 나 있다. 그 길을 따라 교회로 향했다. 이 교회의 이름은 여러가지로 불린다. 게르게티 사메바, 츠민다 사메바, 게르게티 츠민다 사메바 교회 등으로 부른다. 교회 밑에는 약수터가 있다. 시원한 물을 한잔 마시고 다시 언덕길을 올라 교회로 갔다. 교회에서는 여자들에게 치마를 준비해 놓고 입도록 한다. 검은 색 치마를 입고 교회를 관람했다. 이 교회는 조지아의 자존심이 걸린 조지아 정교회로 소중하게 지켜오는 성지다. 교회 뜨락에 서니 코카서스 산맥의 카즈베기 산이 마주하여 소슬한 비경이다. 절벽 아래로는 카즈베기의 산마을 게르케티 마을이 보인다. 붉은 제복을 입은 교회 남자가 줄을 당겨 종을 친다. 중세의 향기가 물씬 배인 교회다. 츠민다 사메바 교회는 두 개의 성채로 14세기에 세워졌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코카서스 산맥의 카즈베기 높은 산에 위치해 있다. 외부로부터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다. 그래서 전쟁 같은 위험한 상황이 오면 다른 교회의 소중한 물건들을 이곳 교회로 옮겨와 보관하기도 했다. 트빌리시 므츠헤타 성니노 성당의 십자가도 이곳으로 가져와 안전하게 보관 했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검은 색 얼굴의 예수님이 있다. 구소련 시절 화재로 탔는데 목재였던 예수님상이 탄 것이다. 마을 사람이 소지하고 있다가 기증한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는 신앙의 자유가 없어 예배가 금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성지순례로, 또는 여행으로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교회 사방 어느 곳에서도 보이는 것은 해발 5천 미터 이상의 코카서스 산맥이다. 저녁에 불을 켜면 교회는 카즈베기의 횃불로 떠오른단다. 우리의 버스 기사가 우리를 기다리는 동안 고운 야생화 한 다발을 꺽어 우리에게 선사한다. 진한 코카서스 산맥의 향기가 이방인의 마음을 낭만으로 가득 채운다. 다시 버스를 타고 카즈베기 산길을 따라 하산하였다. 깊고 깊은 산중의 마을, 비경으로 솟구치는 코카서스 산맥의 카즈베기 산자락, 오롯한 산정의 교회는 오래도록 가슴속에 간직될 것이다. 흔들림 없는 육중한 삶의 자태로 남아 노을진 석양이 내릴 때 우뚝 솟구치는 그리움으로 노년의 그늘을 지울 것이다. 이곳에 온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며 행복한 여정이다.
* 조지아 카즈베기 산마을 생활 풍경
카즈베기 츠민다 사메바 교회를 탐방하고 하산하는 길에 본 산마을 풍경이다. 좁은 산마을의 산길에 말고삐를 쥔 한 여자가 있다. 배낭을 멘 것으로 보아 아마 카즈베기 츠민다 사메바 교회를 가려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츠민다 사메바 산정 교회에 오르는 길은 도보, 4륜 구동차 등이 있다. 산마을에는 가스관이 위로 아래로 연결되어 있다. 노란 꽃이 아름답다. 카즈베기 산의 거대한 품자락에서 아버지 같은 큰 산에 기대어 사는 정겨운 마을이다.
* 조지아 카즈베기 가정집 중식
카즈베기 츠민다 사메바 교회를 보고 하산하여 가정집에서 중식을 했다. 카즈베기 마을의 골목을 따라 들어간 곳에서 만난 가정집이다. 아시아의 먼 나라 한국에서 온 우리들을 큰 손님으로 정성껏 맞이한다. 대문에 들어서니 입구에서 남자 아이와 개가 반긴다. 사람도 개도 한결 같이 정다운 표정이다. 덩치 큰 시베리안 허스키 개가 꼬리를 치며 나에게 다가와서 애정을 선사한다. 집안 식당에는 우리를 위해 풍성한 메뉴의 식단이 차려져 있다. 빵, 버섯요리, 과일, 쇠고기, 버섯밥, 야채, 스프, 감자만두 등 푸짐한 음식을 계속 제공해준다. 이방인에게 베푸는 최대의 식사대접이란다. 특히 한국인을 위해 산에서 딴 버섯을 넣고 지은 버섯밥이 별미다. 산약수를 식수로 내온다. 포도로 직접 만든 4.5도의 술도 대접해준다. 정원에서는 후식으로 커피와 차를 제공한다. 집 앞에는 조금 전 다녀온 카즈베기 츠민다 사메바 교회와 카즈베기 웅장한 산이 솟아 있고, 집 뒤에도 카즈베기 산줄기가 큰 품으로 보듬도 있다. 넉넉한 인심으로 길손을 대접하는 손길이 참으로 아름답다. 호텔이나 상가식당이 아니고 조지아 카즈베기 마을의 일반 가정집에서 이 나라 주민들이 먹는 일상의 식단으로. 그보다는 조금 상위겠지만, 점심식사를 하며 조지아의 가정집과 식사문화를 접해본 소중한 체험이다.
* 조지아 카즈베기 산길
카즈베기를 떠나 고리로 이동한다. 여기서 3~4시간 소요된다. 고리에서 스탈린 박물관과 생가 그리고 그의 전용열차를 볼 것이다. 카즈베기 산길은 대단히 웅장하고 조지아의 많은 것을 보여준다. 이곳은 코카서스 산맥 줄기인 해발 5천 미터가 넘는 카즈베기 산 능선의 한 부분이다. 계속 카즈베기 산길을 돌아서 간다. 꺽어지고 휘어진 구소련시설에 건설한 군사도로다. 하늘과 맞닿은 우람한 설산 고봉이 눈앞에 있어 거의 산정과 동일한 선상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때로는 초지의 산줄기가 장엄하기도 하다. 그런 곳에는 방목하는 소와 양떼가 있다. 양떼를 이끄는 큰 개도 있고, 초지의 산능선을 타고 양떼들이 하얗게 떼지어 다니며 풀을 뜯는다.카즈베기 산길의 우람하고 고운 서정의 낭만이다.
* 조지아 진발리 호수 풍경
트빌리시에서 카즈베기로 갈 때도 보았던 호수다. 지금은 카즈베기에서 고리로 가는 길에 보고 있다. 어제 보았던 풍경의 드넓은 진발리 호수ZhinvaliLake가 산길을 돌 때마다 곳곳에서 비경으로 다가온다. 코카서스 산맥에서 발원한 아라그비 강과 코카서스 산맥 곳곳에서 빙하가 흘러들어 물빛이 청청하다. 1986년에 건설된 진발리 저수지의 댐도 다시 자세히 보았다. 구소련 시절 잔재로 보이는 우람한 조형물도 있다. 호수의 물과 산이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 조지아 고속도로
카즈베기에서 군사도로를 타고 오다가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어제 보았던 진발리 호수의 수력발전 댐과 아나누리 성당도 지나서 왔다. 군사도로까지는 어제 카즈베기로 갈 때와 동일한 도로였다. 고속도로는 구소련시절의 군사도로보다 훨씬 잘 닦아진 도로다. 중앙분리대를 안정감있게 설치했고 도로바닥도 훨씬 안락하여 빠른 속도로 달린다. 지금 스탈린의 고향인 조지아 고리로 가고 있다. 고속도로변에 노란 꽃들이 곱다. 아름답고 멋진 길이다.
* 조지아 난민촌
카즈베기에서 고리로 이동 중에 본 난민촌이다. 여기서 30분 정도 가면 고리다. 붉은 색 지붕의 주택들이 들녘을 가득 채우고 있다. 조지아 정부가 지어준 난민촌이다. 이곳 난민촌은 남오세티아와 압하지아 지역 분쟁으로 생긴 난민자들의 생활 터전이다. 난민들은 국가보조금과 농사로 살아간다. 남오세티아는 조지아의 중북부 러시아와 접경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자치공화국이다. 수도는 츠힌발리다. 면적 3900㎢의 영토에 인구 7만 명 정도다. 2008년 8월 전쟁을 비롯한 그 이전부터 여러 차례 남오세티아의 지배문제로 러시아와 조지아의 전쟁이 발생했다. 전쟁 결과로 조지아가 독립국가연합에서 탈퇴했다. 압하지아 전쟁은 1992년에서 1993년까지, 1998년에도 6일간 발생한 조지아 지역에서의 러시아 전쟁이다. 압하지아는 독립을 원했으며 러시아가 압하지아군을 지원하여 조지아군과 전쟁을 치렀다. 압하지하는 법률상으로는 조지아의 일부로 다뤄지고 있지만 사실상은 독립국이 되었다. 국제연합에서는 압하지아를 여전히 조지아 영토의 일부로 보며 평화적으로 분쟁이 종결되기를 촉구하고 있다. 압하스는 사실상 미승인 국가 상태의 독립국으로 러시아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는다. 수도는 수후미Sukhumi다. 압하지아 자치공화국은 조지아 북서부 흑해와 접하고 있다. 우리나라 충청남도와 비슷한 면적이다. 러시아는 조지아에 속한 압하지아 공화국과 남오세티아 공화국의 독립을 계속 지원하고 있다. 아직도 남오세티아와 압하지아 지역은 테러나 전쟁 가능성으로 외부인 방문이 위험하다. 우리나라 외교부에서도 이곳은 여행자제 지역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주한조지아 대사관에서도 제3국 사람이 남오세티아 및 압하지아를 방문할 경우 조지아 정부의 허가를 받고 방문해야 한다고 밝혔다. 만약 허가 없이 방문할 경우 안전을 책임질 수 없으며, 조지아 기피인물로 지정되어 조지아 입국이 불허된다는 것이다. 조지아는 테러가 자주 발생하는 국가는 아니지만 아직도 남오세티아와 압하지아에 대한 러시아와 조지아의 분쟁이 끝나지 않았고, 조지아 내에서도 민족분쟁이 발생하는 나라다. 조지아의 치안은 양호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여행자 대상의 범죄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 조지아는 1992년 한국이 조지아를 국가로 승인한 이후 그해부터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러나 조지아에 우리 대사관은 없다. 조지아에 거주하는 한국 교포는 2008년 기준으로 약 10명 정도다. 우리 부부도 이런 문제로 이번 코카서스 3국 여행에 대하여 망설였었다. 조지아 뿐만 아니라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의 분쟁도 자주 발생하여서 사실 이번 코카서스 3국 여행은 큰 용기를 내어서 왔다. 난민촌을 보며 안타깝기도 하고, 또한 왜 이곳 코카서스 3국 나라들이 여행자제국가인지 이해가 되었다. 속히 분쟁이 해결되어 평화로운 삶이 되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 조지아 들녘 야생화
조지아 들녘 드넓은 평원의 야생화가 곱다. 노랑, 보라 색의 화사한 꽃들이 들녘을 빛내고 있다. 목초지로 재배하는 초지인 것 같다. 스프링 쿨러가 돌아가는 곳도 있다. 아름다운 들녘이다.
* 조지아 고리 시가지 진입
조지아 카즈베기에서 군용도로를 타고, 고속도로를 타고 달려 고리 시가지에 진입했다. 고리란 조지아어로 산, 언덕을 뜻한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북서쪽으로 76㎞ 떨어져 있는 아담한 산업도시다. 쿠라 강과 리어프비 강의 합류점에 위치한 휴양도시이기도 하다. 시가지 입구에 핀 노란 꽃이 아름답고 정겹다. 구소련풍의 큰 아파트도 보인다. 여기는 소련의 옛 향기가 물씬 배어 있는 구소련연방국의 한 도시 고리다. 이곳 고리에 온 것은 구소련의 독재정치가였던 스탈린 박물관을 가기 위해서다. 고리는 스탈린의 고향이다. 이곳 도시에서 스탈린에 대하여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갈 것이다.
* 조지아 고리 스탈린 박물관
조지아 고리 시가지에 진입했다. 아담한 도시다. 구소련 정치가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1879∼1953)의 고향이다. 그의 본명은 이오시프 주가슈빌리다. 1913년 무렵부터 레닌의 권유로 '강철 인간'이란 뜻의 스탈린으로 개명한 것이다. 15세까지 고리에서 거주했다.박물관은 고딕양식의 웅장한 2층 건물로 고리 도심 중앙광장에 있다. 박물관에는 스탈린 동상, 스탈린 기념 박물관, 스탈린 생가, 스탈린 전용열차가 있다.스탈린은 조지아 고리에서 농민 출신의 구두수선공 아들로 태어났다.스탈린은 가정환경이 불우하였다. 그로인해 난폭해졌다. 모친의 권유로 트발리시의 신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신학교 재학 중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고 직업혁명가의 길로 진로를 바꿨다. 15세에 혁명운동에 참가하여 신학교에서 추방되었다.1901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위원이 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1903년 유형선고를 받았지만 탈출했다. 러시아 제1차 혁명시기인 1905년~1907년에는 자카프카즈에서 활동하였다. 1912년 레닌의 볼셰비키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러시아 사회민주당 볼셰비키파로 활동하며 체포, 유형, 탈주를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와 오늘날은 독립국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지만 그 당시에는 구소련 연합국에 속해있던 바쿠 등에서 지하활동을 했다. 바쿠에서 1907년 스탈린의 아내가 죽었다. 약 2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남편에게 시달리다가 숨을 거둔 것이다. 스탈린은 아내가 없는 46년 동안 참혹한 비인간성으로, 수없이 많은 인민의 피 위에, 강철의 제국을 건설했다. 강철 인간 스탈린은 1953년 3월 5일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스탈린 박물관에는 기념 전시관 외에 그의 생가와 그의 전용열차가 있다. 1951년 건립 당시에는 역사박물이었으나, 1953년 스탈린 사후에는 그를 기념하기 위한 전시관으로 건립했다. 오픈은 1957년에 했다. 박물관 정원에 들어서니 녹색의 스탈린 전용열차 한 량이 나무 아래 세워져 있다. 조금 더 박물관 가까이 다가가자, 건물 바로 앞 정원에 그의 동상이 있다. 아치형의 긴복도를 따라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 융단이 깔린 계단 위에 스탈린의 동상이 서 있다. 구소련 공산당의 근엄한 분위기가 감돈다. 박물관 해설사를 만나 여러 개의 방을 관람했다. 전시된 방은 천장이 상당히 높고 크다. 방에는 그의 흉상과 입상을 세워놓아 스탈린을 만난듯 실감이 난다. 스탈린의 어린시절부터 공산당 활동 사진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의 생시 생활용품들도 유리관 안에 놓여 있다. 그가 살던 집도 눈이 덮힌 채 재현되어 구소련의 스산한 풍경을 자아낸다. 트빌리시에서 살았던 집도 있다. 스탈린이 공산당 활동하던 시절 비밀 문서를 작성하던 곳도 있다. 열렬히 공상당 활동을 하던 사진을 대형화보로 장식했다. 그가 쓴 책들, 책상, 의자, 의복 등 개인 소장품이 잘 보관되어 있다. 사진, 그림, 편지, 신문 기사 등 풍부한 자료가 정치가 스탈린을 그 이름값 만큼 충분히 대변하고 있다. 스탈린이 소장했던 세계 각국인사들의 기념선물도 전시되어 있다. 스탈린 데스마스크가 12개인데 그 중 하나가 이곳 박물관에 있다. 스탈린은 1922년부터 당서기장, 인민위원회의 의장, 국방위원회의장, 소련군최고사령관을 겸하였다. 1924년 1월 레닌이 죽자 그는 가장 충실한 레닌의 후계자라고 선언했다. 레닌은 죽기 직전 스탈린을 후계자로 삼은 것에 불안을 느끼기도 했다. 스탈린은 당의 뛰어난 활동가지만 자신에 대한 과잉 권력을 행사해 왔다. 서기장이 되어 권력을 손에 쥔 스탈린이 신중하게 행사할 수 있을지 염려된 것이다. 스탈린을 해임하고 인내심이 있고, 친절하고, 흥분하지 않는 인물을 임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스탈린은 결국 최고지도자 자리에 올랐다. 1945년에는 대원수가 되어 국민을 집결시켜 전쟁에서 전승하며 권력을 집중시켰다. 연합국 수뇌와도 외교를 추진하여 전후 세계질서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던 사람이다. 그가 죽자 1956년 소련 공산당대회에서,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 제기 되었다. 그에 대한 개인숭배의 해악, 그의 정치적 과오나 이론적 결함이 공개되었다. 그후 스탈린에 대한 평가가 그 전에 비해 다른 각도로 조명되고 있다. 소련연방이 무너진 오늘날에도 스탈린에 대해서는 정확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박물관은구소련연방이 몰락 되면서, 또한 조지아의 독립운동으로 1989년에 잠시 폐쇄되기도 했었다. 박물관을 둘러본 후 밖으로 나와서 그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데 정원이 아주 넓다. 이 나라의 학생들이 제복차림으로 모여 행사를 하기도 하고, 시민들이 많이 있다. 오늘날 스탈린 박물관은 자국민은 물론 세계인들의 걸음이 모여드는 곳이다. 그의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흑백사진이지만 살감나게 조명해 본 뜻깊은 탐방이다.
* 조지아 고리 스탈린 생가
스탈린 박물관을 관람하고 근처에 있는 구소련 공산당 독재자였던 스탈린의 생가로 갔다. 주변에는 아주 넓고 우람한 나무들이 많다. 이곳은 조지아의 산업도시인 고리의 중심부에 있는 스탈린 공원이다. 스탈린 광장에는 구소련소연방 시절의 스탈린 동상 중 하나가 아직도 서 있다. 고리 도심 시가지에는 이곳 스탈린 광장으로 향하는 스탈린 대로도 있다. 그의 생가는 스탈린 공원 한적한 곳에 있다. 스탈린이 1879년에 태어나서 1883년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생가다. 원래는 목재로 지어진 작은 오두막집이었다. 폐허를 방지하기 위해 그리스 이탈리아 양식의 대리석 건물로 감싸서 보존하고 있다. 그래서 집의 외형이 큰 직사각형 모양이다. 지하 1층과 지상 1층의 건물이다. 왼쪽 옆 지하에는 스탈린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임대 구두수선 가게도 있다. 구소련연방국의 독재자이며, 1920년에서 1953년 사망할 때까지 혹독한 정치가로, 세계에서 가장 강했던 남자가 탄생한 집이다. 스탈리을 연상케 하는 검정 개 한 마리가 서성이며 길손을 맞는다. 덩치 큰 검정 개가 이제는 다 내려놓은 온유한 스탈린으로 다가온다. 집 안을 공개하고 있다. 그의 방에는 생시에 사용하던 침대와 책상 그리고 집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벽면에는 흑백사진도 걸려 있다. 강철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떨치던 스탈린도 세월 앞에서는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조지아의 고리 시민들 90%는 스탈린을 좋아하지는 않는단다. 고향인 고리에 대해서 해준 것이 별로 없어서란다. 하지만 오늘의 고리는 스탈린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유명한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고리는 스탈린 공원, 스탈린 광장, 스탈린 대로, 스탈린 박물관과 생가, 전용열차, 동상 등 그의 족적을 새겨놓고, 그의 생애에 대한 보답을 하고 있다.
* 조지아 고리 스탈린 전용열차
스탈린 박물관과 생가 곁에 녹색 스탈린의 개인 전용열차가 있다. 무게 83톤의 우람한 기차 한 량이 담장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비행기를 싫어한 스탈린이 1941년부터 전용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칠과 루즈벨트가 참석한 얄타 회담에 갈 때 이 기차를 타고 갔다. 테헤란 회담에도 이 기차를 타고 갔다. 방탄장치가 장착되어 있는 안전한 객차다. 기차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좁은 통로의 복도가 있고 곁에는 여러 용도의 객실이 있다. 특히 안락한 침대와 책상이 놓인 특별 객실도 있다. 조지아 학생들이 견학와서 우리와 함께 사진을 찍으며 흥겨워 한다. 한때는 무서운 인물이었던 스탈린의 전용열차까지 오픈하여 탑승 체험을 허락하는 것은 참 보드라운 세상의 흐름이다.
* 조지아 고리 시가지
스탈린 박물관에서 우플리스치케 사원으로 이동한다. 약 40분이 소요되는 거리다. 고리 시가지를 거쳐서 간다. 고리는 조지아 중부 시다카르틀리 주의 주도로 아담한 도시다. 스탈린의 출생지가 이곳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고리는 원래 조지아어로 언덕, 산을 의미한다. 1089년에서 1125년까지 재위한 다비트 4세에 의해서 도시가 건설되었다. 시로 승격된 것은 1801년이다. 조지아 고리시의 행정 중심도시다. 1917년 혁명 전에는 행정, 상업 중심지였지만 작은 마을이었다. 혁명 후에 산업이 발전하여 현재는 식품가공업과 아제르바이잔에서 수입한 면화로 섬유공업이 발달한 도시다. 시가지에는 아직도 구소련 잔재의 아파트와 건물들이 남아있다. 중세풍의 소박한 교회 건물도 보인다. 과거의 현대가 공존하는 시가지 풍경이다.
* 조지아 고리 요새
스탈린 박물관을 관람하고 우플리스치케 동굴도시로 가는 길에 본 고리Gori 시가지의 요새다. 중세의 요새 고리스치다. 고리 시내의 중앙에 위치한 아담한 산정 능선을 타고 오롯하게 서 있다. 폐허로 많이 허물어졌지만 요새의 형상은 그대로 남아 있다. 포효하는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승리의 상이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은 전진방향으로 용감하게 뻗고 있다. 상가였던 곳에 세워져 있다. 고리는 조지아 중부에 있는 역사적인 도시다. 7세기 초에 형성되었다. 고리는 철도의 분기점이며, 구소련의 정치가 스탈린의 출생지로 잘 알려져 있다. 역사·민족박물관 등 오래 된 도시를 상징하는 기념물이 많다. 2008년 조지아와 러시아가 5일간의 전쟁을 치르면서 러시아군은 고리를 점령했지만 철군했다. 현대풍의 법원 하얀 건물도 근처에 있어 과거와 현대의 조화로운 풍경이다. 주변에는 차량이 많이 주차되어 있다. 일부러 온 곳은 아니지만 고리의 역사 유적지 한 곳을 탐방한 소중한 여정이다.
* 조지아 고리 시가지 독특한 건물
고리 시가지에서 우플리스치케 동굴도시로 가며, 고리 시가지의 독특한 건물들을 보았다. 고리 요새를 지나자 하얀 법원 건물이 둥근 울타리 모양으로 비경이다. 초현대풍의 건축물이다. 주변에는 차량도 많고, 사람들도 많이 왕래한다. 관청 같은 크고 긴 큰 건물도 지난다. 고리 기차역도 보았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 사용하던 기차역을 약간 보수한 것이다. 구소련식 아파트와 주택도 호사스럽지 않은 소박한 정경이다.
* 조지아 들녘 방목 동물들
소련 스타일의 가정주택에는 포도나무가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다. 철도가 들녘을 가로지른다. 러시아와 연결된 철로다. 학교인듯한 폐건물에 소 한마리가 풀을 뜯는다. 초지의 들녘 야생화가 곱다. 소떼들이 들녘에서 방목되어 풀을 먹는 모습이 평화롭다. 므크트바리 강이 들녘을 가르며 흐른다. 강변 언덕 위에 우플리스치케 동굴도시가 보인다. 우플리스치케 동굴도시로 가며 본 조지아의 들녘 방목 동물들이다.
* 조지아 우플리스치케 고대 동굴도시
스탈린 고향인 고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고대 동굴도시 우플리스치케Uplistsiche로 왔다. 우플리스치케는 기원전 6세기에 쿠라 강변에 동굴을 뚫고 도시를 세워 외침에 저항하던 거대한 암벽도시다. 사암지대로 동굴 파기가 수월했던 지역이다. 입구에는 안내판도 있다. 바위에 설치한 긴 계단을 걸어서 동굴도시에 올랐다. 바람이 온몸을 흔든다. 온통 바위로 뒤덮힌 고대 동굴도시 마을이 전개된다. 동굴도시 앞에는 무트크바라Mtkvari 강이 흐르고, 뒤로는 산이 있다. 므트크바리 강은 터키에서 발원하는 1364㎞의 장대한 강이다. 강이다. 조지아 트빌리시를 통과하고, 므츠헤타에서 코카서스 산맥의 아그라비 강과 합류하여,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카스피해로 흘러간다. 조지아어로는 므트크바리 강, 터키어로는 쿠라 강이다. 일반적인 명칭은 쿠라 강이다. 산과 강이 적들의 공격을 막아준다. 맨 먼저 본 곳은 극장터다. 후일엔 거주지로 사용 되었다. 모두 바위 동굴을 뚫어서 만든 생활터전으로 5천 명 정도 거주했다. 어떻게 바위를 저토록 깊이 팠을까 탄성이 절로 나온다. 바위 절벽 아래로는 므트크바리 강이 흐르고, 강 건너의 고리 시가지와 코카서스 산맥이 비경이다. 강변에는 동물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는다. 다음으로 간 곳은 조지아 여왕 타마르 대제의 홀이다. 이동할 때마다 가파른 바위를 타고 오르는 길이 아찔하다. 바위를 깎아서 만든 돌문을 지나 타마라 여왕의 홀로 들어가니 바위 기둥들이 우람하고 넓다. 벽면에는 글씨가 많이 새겨져 있다. 홀을 지나 약국으로 갔다. 큰 규모의 약 저장고로 구멍을 내어놓은 공간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포도주를 만들어 저장하는 장소도 있다. 조지아는 그 옛날부터 최초의 와인 생산지라는 것을 알게하는 대목이다. 죄수를 처형하던 장소로 철창의 둥근 구멍이 소슬하게 남아있다. 엎드리게 하고는 목을 베어 땅속으로 떨어뜨려 죽였다. 감옥도 있다. 소 잡는 곳도 있다. 소를 잡아 죄인들에게 속죄의 피를 묻혀 주었다. 고대 동굴도시의 여러가지 시설을 보며 소름이 돋기도 하고, 철저한 질서가 보이기도 했다. 바위 길 건너 높은 곳에 성 조지 성당이 오롯하다. 10세기에 세워진 성당이다. 동굴도시의 암벽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성당 건물이 현대풍으로 복원한 흔적이 드러나지만 아직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교회가 세워지면서 기독교인들의 항쟁지이기도 했다. 이곳 동굴도시가 처음에는 태양신을 모시는 종교도시였다. 코카서스 지역은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는 태양을 숭배하는 종교였다.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태양신 종교 흔적은 서서히 사라졌다. 이곳에 기독교인들이 들어와 살았지만 동굴은 그대로 보존되었다. 4세기경 조지아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이곳 교인들은 트빌리시 근처 도시 므츠헤타로 많이 이동했다. 바위로 물 탱크를 만들어 놓고 빗물을 저장하여서 썼던 흔적도 있다. 견고하고 완벽한 동굴도시다.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약 1천년 동안 번창하던 요새 같은 곳을 3세기에 몽고 징기스칸에 의해서 첫 침략을 받았다. 13세기 파괴 되기 전까지는 몽골로 가는 실크로드이기도 하다. 실크로드의 교역로였던 시기에는 2만명이 거주하기도 했으나 아랍과 몽골의 잦은 침략으로, 지진으로 쇠퇴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후보지 목록에 올랐다. 내려올 때는 가파른 인공터널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동굴도시의 사람들이 드나들던 쿠라 강쪽 비밀 통로를 복원한 것이다. 적군이 침입할 때는 비상 탈출구로, 강물을 퍼 나르던 통로로 사용하던 동굴터널이다. 두려운 걸음으로 아득한 터널을 내려오니 눈앞에는 쿠라 강이 반갑게 맞이하고 강변에는 푸른 나무와 야생화가 평화를 선사한다. 거센 바람과 함께 가파른 바위 길을 오르내리며 우플리스치케 고대 동굴도시를 체험한 오늘의 여정은 조지아의 역사 한 단면을 오래도록 각인시키는 소중한 현장으로 오래도록 남아 기억될 것이다.
* 조지아 고리 시가지 아파트
고리에서 스탈린 박물관을 관람하고, 우플리스치케 고대 동굴도시의 사원을 보고 트빌리시로 이동한다.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고리를 다시 지나간다. 아파트. 초지 들녘. 산. 구름 . 보라색 꽃. 마을 등이 아름답다. 고리 시가지의 아파트가 구소련식으로 베란다가 돌출되어 있다. 베란다 색상도 푸른색이거나 붉은색으로 원색이다. 트빌리시에서도 그랬다. 세계여행 중에 보는 조지아의 생활상 중 하나여서 뜻깊은 정경이다.
* 조지아 들녘 야생화
조지아는 아제르바이잔에서 본 들녘 풍경과는 많이 다르다. 물론 아제르바이잔도 푸른 지대가 있겠지만 내가 본 아제르바이잔 들녘은 삭막한 땅으로 나무와 풀이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땅에 식물 대신 유전시설이 곳곳에서 보이곤 했었다. 그런데 조지아에서는 나무와 풀이 잘 자라는 풍경이다. 우리나라의 들녘과 유사하다. 다만 농토가 한국과 같이 많지 않고 다양한 야생 식물들이 들녘을 채운다. 멀리 자리한 우람한 산이 들녘을 보듬는다. 야생화도 색색으로 피어서 유년의 회억을 부른다. 트빌리시로 들어가는 조지아의 들녘이 내 조국의 향수를 선사한다.
* 조지아 산정 즈바리 수도원 원경
트빌리시 가까이 다가왔을 때 어제 이곳을 지나가며 보았던 므츠헤타 도시와 산정 즈바리 교회를 또 본다. 하늘과 맞닿은 산정 교회 원경이 어제 교회로 들어가며 보았던 원경보다는 더 가까이 오롯하다. 저곳 산정에서 내려다 보았던 므츠헤타 도시도 도로변 강 건너에 있다. 모두 석양에 아름다운 풍경이다.
* 조지아 트빌리시 영웅광장
조지아 고리에서 달려온 버스가 수도 트빌리시 시가지에 진입했다. 퇴근 무렵이다. 차도에 아기를 안고 들어와 차량 곁에서 구걸하는 소녀가 있다. 조지아의 힘든 생활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구소련식 베란다의 고층 아파트도 보인다. 조지아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코카서스 산맥 남쪽과 흑해 동쪽에 있는 나라다.면적은 한반도 1/3 크기로 인구는 460만 명 정도다. 북쪽은 러시아, 남쪽은 터키와 아제르바이잔, 남동쪽은 아르메니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1936년부터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었고,1991년에독립하였다. 현재 조지아에는 친러 편으로 조지아에서 독립하려고 하는 압하스와 남오세티야 지역이 있다. 이 두 지역은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승인 받았지만 대다수 국가들로부터 독립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당 서기장으로 국가원수였던 스탈린이 조지아 출신이다. 조금 전 스탈린의 고향 고리에 있는 그의 박물관에 다녀왔다. 트빌리시 시가지에 있는 영웅광장도 지나간다. 하얀 색 높은 탑이 솟구쳐 오른다. 남오세티아South Ossetia 전쟁 전몰자 위령탑이다. 남오세티아 전쟁은 2008년 조지아가 남오세티아를 공격하여 일어난 전쟁이다. 남오세티아는 러시아 남부와 조지아 사이에 있으며 조지아의 16% 정도에 해당하는 영토다. 광장에 사람들이 많다. 행사를 하는 것 같다. 종종 행사로 많은 사람이 모이곤 한다. 트빌리시 영웅광장에 세워진 전사자 기념비 앞에서 2010년에는1990년대 남오세티아 전쟁에 참여했던 퇴역 군인들이 처우개선을 요청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인 적도 있다. 1991년~1992년에 조지아와 남오세티아는 민족적 정치적 충돌이 시작되었다. 조지아에서 탈퇴한 오늘날 남오세티야 공화국에서 일어난 충돌로 수 천명이 죽고, 2만 명의 오세티야인들이 러시아로 피신하는 난민이 되었다.평화적 노력에도 충돌은 해결되지 않고 계속되다가 결국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을 초래한 것이다. 2008년 8월 2~9일의 충돌 기간 동안 34,000명의 피난민들이 남오세티야를 떠나 러시아로 갔다.조지아군이 남오세티야의 수도인 츠힌발리에 진군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러시아가 남오세티야에 진군하여 전투가 본격화되었다. 러시아 대통령은 남오세티야에 있는 러시아 국적의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하고, 조지아 대통령은 러시아의 침략하여 조지아의 민간인을 폭격하는 것에 대한 방어를 한다고 하였다. 8월 12일유럽연합 의장국인 프랑스가 중재했다. 그리하여 2009년 러시아는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영웅광장을 지나며 조지아의 아픈 마디 한도막을 보았다. 세계 여행에서 보고 배운 것 중 하나가, 이웃한 국가와 국가, 지역과 지역 간의 전쟁은 어느 나라에서든지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내 조국의 슬픈 상처가 보이는 순간이기도 하다. 다시는 지구상에서 이런 끔찍한 전쟁이 없기를 소망한다.
ყოველივე ზემოაღნიშნულიდან გამომდინარე, მოვითხოვ დაიწყოს სისხლისამართლებრივი დევნა პოლიციის იმ თანამშრომლების მიმართ, ვინც მონაწილეობდა ამ დანაშაულში [..] და დაისაჯოს უკლებლივ ყველა, კონსტიტუციით აღიარებული ნორმების ფეხქვეშ გათელვის გამო, [..] ან გამოდით და თქვით, რომ თქვენი ხელდასმით მოხდა ეს ყველაფერი და ბიჭებს საშობაო პრემიები ჩამოურიგეთ.
* 조지아 트빌리시 공연 석식
저녁 8시부터 조지아 전통 공연을 보며 석식을 했다. 고리에서 시간을 맞추어 오느라 우리의 버스 운전기사가 많은 수고를 했다. 식당에는 우리의 식단이 차려져 있고 종업원들이 서서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맞아들인다. 구소련의 근엄함이 배인 자세다. 메뉴가 참 좋다. 치킨, 쇠고기 스프, 화이트 와인, 많은 과일 등 풍성한 대접이다. 조지아에서는 식당에서 꼭 이 나라 특산물인 와인을 대접해 준다. 무대에서는 남녀가 번갈아 나와 음악과 춤을 공연한다. 청년들의 구소련 군대식 춤에 한바탕 웃기도 했다. 조지아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다. 고운 추억을 담아 가라고, 조지아 사람들은 먼 아시아에서 온 이방인들에게 최고의 식사와 최고의 공연을 선사하는 것이다. 참으로 고맙고 아름다운 순간순간이다.
2014년 6월 2일 월요일 조지아, 아르메니아
* 조지아 트빌리시 호텔 출발
오늘은 조지아 트빌리시를 떠나는 날이다. 이 호텔에서는 두 밤을 유숙했다. 우리 부부의 방은 320호실이다. 트빌리시의 중심지 대표 광장인 프리돔 스퀘어 자유광장 바로 옆이다. 호텔 방에서 자유광장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높게 솟구쳐 오른 성 조지 기마 동상도 뚜렷하게 전체가 다 보인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호텔 주변 거리를 산책했다. 시가지에 삼성광고가 곳곳에 많다. 이국에서 바라보는 내 조국의 기업체 광고가 아름다운 향수로 다가온다. 거리에 선거 벽보도 많다. 조용한 아침 거리다. 오늘은 아르메니아로 이동한다. 국경까지는 1시간 소요된다. 조지아 트빌리시는 과거와 현대의 공존으로 아름다운 도시다. 과감하게 구소련 잔재의 건물을 허물어 현대풍의 세련된 건물도 많이 지었고, 구소련의 육중한 건물도 많이 남아 고풍스런 분위기를 잘 살려놓은 도시다. 두고두고 그리울 조지아 트빌리시다. 이제 아르메니아로 간다.
* 조지아 트빌리시 변두리 풍경
조지아 트빌리시를 떠나 아르메니아로 가는 길이다. 트빌리시의 도심을 떠나 변두리 지역을 지나간다. 둥글게 설치한 분수가 아침 출근길을 화사하게 분무한다. 가정집 정원의 뜨락에 당나귀가 풀을 뜯고 있다. 그 곁에는 구소련을 연상케 하는 우람한 남자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노란 꽃 야생화가 곱게 핀 도로를 지나간다. 포도나무 정원의 주택도 보인다. 조지아 북쪽 지방보다는 포도나무가 적은 편이다. 이제 2박 3일 동안 머물렀던 정든 조지아 트빌리시와 이별을 고할 시간이다. 언제 또 여기 오겠는가. 시간과 여건이 허락한다면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겠지. 역사와 현대의 많은 것을 보고 배운 트빌리시는 오래도록 내 뇌리에 저장되어, 먼 후일 어둑한 내 노년의 정원을 화사하게 밝힐 것이다.
* 조지아 남부 밀 재배 지역
조지아 남부는 밀 재배 지역이다. 북부는 코카서스 산맥이 가까워 포도 재배 지역이 많았는데 아르메니아로 넘어가는 이곳은 광활한 들녘에 밀밭이 많다. 초여름인 지금 누렇게 익어가고 있어 황금 물결이다. 멀리 긴 산 능선이 길레 늘어서 있다. 풍요로운 들녘이다. 밀 재배 들녘 사이에 공동묘지도 있다.
*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로 가는 국경
조지아의 시골 아담한 국경마을에 진입했다. 학교, 경찰서, 주택 등이 있다. 푸른 들녘을 조금 더 달려 조지아 국경 사무소에 도착했다.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로 넘어가기 위해서다. 두 나라를 왕래하는 차량이 그리 많진 않다. 조지아 국경 사무소에서 출국심사를 마치고 출국했다. 국경 내의 거리를 각자의 짐을 가지고 걸어서 아르메니아 국경 사무소로 향했다. 이제 아르메니아로 들어간다. 구소련 연방국가들로 근엄할 것 같은데 이웃한 나라로 쉽게 넘어가는 절차가 그리 까다롭지 않다. 참으로 부러운 국경선이다.
* 조지아에서 넘어온 아르메니아 국경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 국경을 넘어 입국했다. 한국 말을 잘 하는 아르메니아 현지 여자 가이드가 마중나와서 입국을 도와준다. 우리 일행 중 한 부부가 아르메니아 입국심사 과정에서 직원으로부터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왔냐고 물어 그렇다고 하니 순순히 보내주지 않았다. 결국 현지 가이드가 직원과 얘기하여 해결해 주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1988년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 시작된 분쟁이 국가와 국가 간의 분쟁으로 확대되어 현재까지도 서로 왕래하지 않고 국경은 아예 폐쇄해 버렸다. 소련연방 해체 후 아제르바이잔 내의 영토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머문 기독교인 아르메니아인들이 그들의 자치권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무슬림인 아제르바이잔은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군사가 충돌하여 아르메니아인의 승리로 끝났지만 여전히 분쟁은 남아있다. 그래서 그 지역의 여행은 신중해야 한다. 아르메니아에서 나고르도카라바흐 공화국에 갈 때는 반드시 비자를 받아야 한다.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의 비자가 여권에 있으면 아제르바이잔의 입국이 허락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입국 스탬프가 있으면 이슬람 국가를 여행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으로 살고 아제르바이잔과 대부분의 세계 나라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도 조지아를 거쳐서 들어온 것이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반드시 터키나 조지아 같은 이웃 나라를 거쳐서야만 출입이 가능한 국가다. 우리들의 현지 여자 가이드는 아르메니아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했고 서강대학교에서 1년간 연수 받았단다. 현재 아르메니아 대학에서 한국어 강사로 재직 중이란다. 한국말을 잘 하는 편이다. 아르메니아 학제는 초등에서 고등까지 12년으로 이어진다. 따로 분리가 안 되어 있다. 15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세에 대학을 졸업한다. 이제 아르메니아에 왔으니 아르메니아 대하여 많은 것을 보고 배울 것이다.
* 아르메니아 산길 수로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로 넘어오니 산이 우람하게 겹겹이 싸여 있다. 산길 도로를 달린다. 산길 도로변에 수로가 있다. 산에서 물 폭포가 세차게 흘러내린다. 아르메니아는 물이 없고 지금 더운 날씨다. 한국과 비슷하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온다. 스키 선수들이 이 나라로 많이 온다. 99%의 물은 먹어도 된다. 호텔에서 수돗물을 먹어도 된다. 계속 산길 도로를 타고 달린다. 높은 산 아래 물길 수로가 시원하게 흐르고 있다. 수리시설을 설치한 풍경도 보인다. 모두 사람의 손길이 닿은 인공적인 산길 수로다.
* 아르메니아 산마을
조지아에서 넘어와 아르메니아 영토에 진입하여 곧바로 우람한 산길 도로을 타고 간다. 산은 갈수록 더욱 깊어진다. 때로는 무서울 정도로 높은 산중 도로를 타고 간다. 옛날 학창시절 고향 대천에서 공주사대부고와 공주교육대학교 학업을 위해 우리나라의 청양 칠갑산 가파른 산 고갯길을 넘던 회억이 떠오른다. 강원도 어느 깊은 산중에 온 것 같기도 하다. 아르메니아는 남한의 1/3 크기로 경상남북도를 합한 면적의 아주 작은 나라다. 국토가 대부분 고지대에 있다. 인구는 공식적으로는 약 300만 명 정도란다. 정확하지는 않단다. 이동하며 산단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정확한 인구는 1천 1백만 명으로 본단다. 감자, 밀, 포도를 각 가정에서 재배하여 먹는다. 가스관이 지상으로 설치되어 있다. 고장시 수리하기 편리해서 그렇게 설치한단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더 위험하고 불편할 것 같은데 말이다. 아르메니아 산마을을 지나며 이색 풍경을 많이 본다.
* 아르메니아 알라베르디 하그파트 수도원
아르메니아 북쪽 조지아 접경지역 하그파트라는 오래된 마을에 있는 수도원이다. 알라베르디 마을이 산악지대인데 하그파트 수도원은 높은 고원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산과 계곡, 산마을 등이 한눈에 들어와 고풍스런 수도원 건물과 함께 비경을 선사한다. 하그파트 수도원은 12세기에 지은 건축물이다.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교회가 많아야 나라가 오래 유지 된다고 믿는 나라다. 아르메니 어떤 지역에 가도 교회가 많다. 수도원을 산 위나 바위 밑에 많이 지었다. 적이 찾아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전쟁시에는 그곳에서 탄생하여 그곳에서 생활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수도원 뜨락에 석관 무덤이 많다. 귀족 무덤도 있고, 가족들 무덤도 있다. 건물 벽면에는 수도원을 건립할 때 돈을 낸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수도원 안으로 들어가 보니 대단히 웅장한 규모다. 벽면 구석에는 제비집도 있고, 실제로 제비가 새끼를 키우며 먹이를 물고 드나든다. 아르메니아는 고유의 아르메니아 문자가 있는 나라다. 하그파트 수도원을 비롯하여 역사가 상당히 깊은 나라임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수도원 주변에는 야생화도 곱게 피어 이방인을 반긴다.
* 아르메니아 알라베르디 마을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우리나라의 강원도를 연상케 하는 산골 마을이다. 조지아의 국경을 넘어 계속 이런 산중으로 달려 왔다. 아르메니아 북부의 산악지대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계곡물이 마을을 휘감아 흐른다. 구 소련시절 큰 단지의 공장이 있다. 이곳 알라베르디는 철광석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다. 그때 세운 공장 건물로 소련 잔재다. 지금은 소련이 떠나고 그대로 방치하여 폐허가 된 공장들이다. 한때는 저 공장들로 알레바르디 사람들이 풍요로웠을 텐데, 텅 빈 공장들, 흉물스런 건물들만 앙상하게 서 있어 허허로운 풍경이다. 산길 도로와 나란히 산길 철도도 있다. 산속에는 늑대가 산다. 동물을 잡아 먹고 산다. 위험한 지역이어서 알라배르디에서는 저녁에 돌아다니면 안 된다. 이곳 사람들은 계곡 시냇물을 따라 집을 짓고 살거나, 산 중턱 평평한 곳에 집을 지어 민가를 이루며 산다. 산줄기를 타고 늘어선 주택들이 아름답다. 산길 도로변 식당에서 중식을 했다. 양고기를 구워서 푸짐한 식단을 차려준다. 후식으로 딸기와 아이스크림까지 맛있게 먹었다. 아르메니아 여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모자란 메뉴는 충분히 보충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식당에 앉아있다. 시간을 좀 기다려 지루했지만 아르메니아 전통의 음식들로 행복한 중식이었다.
* 아르메니아 지진 지역 마을
이곳은 큰 지진이 났던 지역 마을이다. 지금은 평온해 보이는 마을이지만 가끔씩 버스가 지나가는 길목에서도 폐허가 된 건물이 보인다. 아직도 복구가 되지 않아서다. 정확히 1988년 12월 7일 현지시간으로 오전 11시 41분 터키 북동쪽에 있는 아르메니아 스피타크, 레니나칸, 키로바칸, 이 세 지역에서 강도 7.0의 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체감 지진 강도는 9.0 정도였다. 이 지방은 아라비아 판과 유라시아 판이 만나는 곳으로 강도 5.0∼7.0의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지진지대다.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어서 사상자가 9만 명 정도이고, 사망자는 2만 5천 명 이상이었다. 스피타크에서는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고 인구 2만 명 중 약 80%가 사망하였다. 아르메니아에서 두 번째 큰 도시인 인구 29만 명의 레니나칸에서는 건물이 200동쯤 붕괴되었다. 고층 아파트와 사무실에 수백 명씩 갇히고, 수천 명이 붕괴 건물에 깔려 생매장 된 엄청난 비극의 현장이었다. 피해가 적었던 인구 약 17만 명의 키로바칸에서도 10동 이상의 건물이 붕괴되었다. 전체 사망자의 대부분이 붕괴된 건물에 깔려 압사하였다. 마침 지진이 발생한 그해인 1988년부터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로인해 지진 복구가 지연되고, 또한 이곳은 산악지역으로 산길도로가 붕괴 되고, 구조 비행기도 쉽게 내리지 못하여 피해가 더욱 컸다. 그 당시 구소련의 고르바쵸프 대통령도 미국 뉴욕 방문 중 지진 보도를 듣고 일정을 축소하고 지진 지역으로 돌아왔다. 아르메니아 지진연구소 건물도, 오랜 역사의 성당 돔 건물도 산산이 무너져내렸다. 지진 직후 국제적으로 세계 곳곳에서 구조활동이 벌어졌지만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곳곳에서 보인다. 지금 지나가는 마을도 아름다운 마을이었는데 그때의 지진으로 많이 망가졌다. 건물뿐만 아니라 도로에도 파인 구멍이 그대로 있다. 버스가 덜컹거리며 힘겹게 지나간다. 마을 입구를 지나가는 철길이 옛 상처를 치유하듯 산길도로와 나란히 놓여 있다. 아르메[니아 기차는 조지아까지만 운행되고 있다. 구 소련시절 철도길을 이용한다. 이곳 주변에서 붉은 돌이 생산 되어서 붉은 색 건물이 많다. 붉은 색 교회가 아름답다. 예레반도 붉은 건물이 많아서 장미의 도시로 부르기도 한다. 부조상들로 벽면을 장식한 우람한 현대식 건물도 있다. 비극을 딛고 일어선 아름다운 마을을 지나며, 아르메니아의 처참했던 지진에 대하여 잠시나마 함께 아픔을 나누고 위로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이었다. 지구상에서 더 이상 지진이 발생하지 않기를, 지진으로 인한 슬픔이 없기를 빈다.
* 아르메니아 들녘 야생화
조지아 들녘에서 참 많이도 보아온 야생화를 이곳 아르메니아에서도 본다. 코카서스의 여름은 나무와 울창한 숲, 그리고 평원의 들녘 야생화가 매우 아름답다. 하얀 색, 노란 색 등 천연의 고운 자태로 들녘을 가득 채운다. 이런 풍경도 이번 여행이 주는 큰 선물이다.
* 아르메니아 딜리잔 마을
딜리잔Dilijan은 아르메니아의 스위스로 불리는 산악 녹색 마을다. 현지 가이드는 딜리잔은 어머니라는 뜻이리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어머니를 딜리잔이라 부르지 않는단다. 해발 1200m의 고지 마을로 추운 도시다. 울창한 나무가 많고, 건물도 벽돌과 나무로 고풍스럽게 지었다 .딜리잔 국립공원도 있다. 휴양지가 많은 도시로 리조트 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미국으로 이주하여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업가가 자신의 조국에 투자하여 큰 호텔을 짓고 있다. 사람들이 와서 한 달씩 머물다 가기도 한다. 특히 병자들이 병 치유를 위해 그렇게 한다. 딜리잔 광장도 지난다. 하얀 타워가 있고 시민들도 있다. 구 딜리잔 마을에 잠시 내려서 화장실에 들리고, 딜리잔 마을의 오래 된 목조 건물과 마을을 살펴보았다. 목조 화장실은 천연의 향기가 가득하여 매우 상쾌한 분위기다. 목조 건물도 진한 나무의 천연 향기가 배어 있고 고풍스런 자태다. 목각 기념품을 파는 상인도 있다. 딜리잔 마을의 붉은 지붕의 주택이 우람한 산과 아름다운 조화다. 조그만 교회에도 들어가 보았다. 목사님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다. 비가 내리다 그쳤다를 반복하며 운무서린 낭만의 날씨다. 여기서 세반까지는 40분 소요 된다. 다시 버스에 올라 세반으로 향했다. 내일은 코비랍에 가서 아라랏산을 조망한다. 예레반에서도 보인다. 에치미아진에 가면 노아의 방주 배 조각이 있다고 전한다.
* 아르메니아 세반 호수와 세반 반도
아르메니아 알라베르디에서 세반 호수가 있는 세반으로 왔다. 약 3시간 소요 되었다. 해발 1900m 고지에 있는 호수다. 그러나 아주 서서히 오른 고도여서 그리 높은 곳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르메니아 고원은 서아시아에 있는 고원이다. 코카서스 고원과 코카서스 산맥의 일부를 포함한다. 대부분 터키가 해당되고, 아르메니아 동부 약간,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서부가 약간 해당된다. 남한의 1/3 정도인 아르메니아는 대부분 국토가 고지대에 속해 있다. 아르메니아 고지대에는 세반 호수, 반 호수, 우르미아 호수 등의 여러 호수가 있다. 여기서 아르메니아는 오늘날의 아르메니아 국가명이 아니고 예전 광활한 땅을 소유했던 드넓은 아르메니아를 뜻한다. 아르메니아 고원은 철기시대의 중심으로 불려왔으며에덴동산의 위치 중의 하나로 믿어져 왔다. 세반 호수의 길이가 60km로 장대하다. 면적은 아르메니아 국토의 5%를 차지하며 제주도보다 조금 작다. 바다 같은 호수다. 버스가 세반 호수변 도로를 달릴 때 아주 육중하고 깊은 뚝심으로 다가온다. 세반 호수 가까이 오자 날이 어둑해지며 검은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운다. 호수는 더욱 비장한 다짐을 하는 사내처럼 검푸른 빛으로 속살을 물들이고 있다. 세반 호수가 예전에는 수위가 지금보다 높았다. 호수 안으로 세반 반도의 땅이 길게 뻗어 있다. 소련시절 산악터널 공사로 물이 빠지면서 섬이던 땅이 육지와 이어진 것이다. 호수의 면적이 좁아지면서 성, 고택 등 문화유적이 많이 훼손 되었다. 세반 호수 위에 걸쳐있는 세반 반도 언덕 위에는 9세기에 지은 두 개의 세반 수도원이 아직도 남아있다. 세반 호수에는 전설이 있다. 이 섬에 처녀가 살았는데 섬에 사는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처녀가 밤마다 불을 지피고 육지의 남자가 오기를 기도했는데 그때 육지의 남자가 헤엄을 쳐서 섬에 왔다. 둘은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그후부터 밤마다 처녀는 섬에 불을 피우고, 육지의 남자는 그 불빛을 따라 헤엄쳐서 건너왔다. 그러던 어느 날 섬의 청년이 처녀가 피운 불을 꺼버리고 처녀를 덮쳤다. 그떄 처녀는 '악'하고 소리 지르고 헤엄쳐 오던 육지의 남자는 불이 꺼지지 방향을 잃고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이 호수를 처녀가 지른 비명의 '악'에서 유래한 '악타미르' 로 부르기도 했다. 악타미르는 '악, 호수여'라는 뜻이다. 세반의 정확한 뜻은 '여기가 반 호수'라는 의미다. 현재 반 호수는 터키에 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가 아주 넓었던 시대에는 지금의 터키에 있는 반 호수도 아르메니의 영토 안에 있었다. 그래서 아르메니아에서는 반 호수를 그리워하며 이 호수를 세반 호수라 부른다고도 한다. 호수변 주차장에 내리자 세찬 바람과 고지대의 기후로 여름이 갑자기 증발한 초겨울 날씨다. 버스 바닥에 넣었던 대형가방을 꺼내어 모두 두터운 옷을 여러 겹 끼어 입었다. 준비를 단단히 하고 계단을 따라 세반 반도 언덕으로 올라갔다. 세반 호수와 세반 반도를 동시에 보는 소중한 여정이다.
* 아르메니아 세반 호수
아르메니아 세반 호수에는 바람이 심하게 분다. 날씨도 상당히 춥다. 두터운 옷을 입고 쇼울을 둘렀는데도 한기가 파고든다. 세반 호수를 조망하기 위해 계단을 걸어서 올라갔다. 언덕 위에 오르니 세반 수도원으로 교회 두개가 있다. 20세기 이전에는 섬이었던 세바나반크 반도는 역사지구로도 유명하다. 배를 타야 들어왔던 이곳 세반 호수에 버스를 타고 들어와 쉽게 조망 언덕에 오른 것이다. 언덕 계단을 오르며 본 세반 호수는 울창한 나무와 함께 비경이다. 빙 둘러 전개되는 호수가 바다로 보인다. 멀리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많은 물이 넘실거린다. 검은 구름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세반 호수는 검은 빛이 도는 푸른 물을 지상에 가득 채우고 있다. 세반 호수Lake Sevan는 아르메니아 최대이며 흑해와카스피해사이에있는 캅카스, 영어로 코카서스Caucasus지역 최대의 호수다. 북쪽은러시아, 남쪽은터키와이란의국경과접한지역으로, 많은강과호수가 있어 수력자원이풍부하며광물자원도많다. 다양한 지층구조로, 구리,·금, 철, 암염 등이 다량 매장되어 있다. 물은 관개 및 수력발전에 이용된다. 아르메니아에는 100개 이상의 자연 호수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호수가 세반 호수다. 28개의 강과 하천이 흘러들어 저토록 광활한 호수를 키우고 있다. 세반 호수는 해발고도 1900m의 고지에 있다. 민물호수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 중 하나다. 세반 호수는 반 호수와 우르미아 호수와 함께, 고대 아르메니아 왕국의 3대 호수였다. 이 호수들은 아르메니아의 바다로 불려왔다. 세반 호수는 이들 중 유일하게 아르메니아 국경 안에 남아있다. 세반은 검은 반이라는 뜻이다. 즉 세반 호수는 검은반 호수다. 오래전에 아르메니아인들은 반 호수 주변으로부터 세반 호수로 왔다. 그 때 그들은 호수가 검은 색을 띄어서 세반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이 호수의 수면은 해발 1916m, 수심은 95m, 면적은 아르메니아 국토의 5%에 해당하는 면적이었다. 그러나 소련연방 시절 스탈린 시대 주변공사로, 호수의 수면은 19m 내려가고 면적도 줄었다. 스탈린 사후 건설계획이 재검토 되어1980년대 이후에는 원래의 호수로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2001년부터 시행되어 온 세반 호수 정비 법률에 따라 노력한 결과 호수의 수면이 380cm 상승하여 수면은 지금의 해발고도 1900m가 되었다. 호수 주변에는 여러 곳의 호수욕장도 있다. 호변을 따라 관광시설이 들어서 있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바다가 그리울 때 이곳 세반 호수에 오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먼 나라에서 본 아름다운 세반 호수는 심히도 불어대던 바람과 함께 고운 추억이 될 것이다.
* 아르메니아 세반 호수 수도원
아르메니아 세반 호수는 그 자체도 아름답지만 호수 언덕 위에 세반 수도원이 있어 더욱 아름답다. 원래는 세반 호수 속 섬이었던 곳에 위치한 작은 수도원이다. 세반 호수에 유입되는 강물의 양이 줄오, 공사로 인해 물이 빠지면서 지금은 육지와 연결되어서 세반 반도라는 뭍에 있는 수도원으로 변해버렸다. 이 수도원은 9세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그외 성, 집 등 여러가지 유적이 있었으나 수위가 낮아지면서 발굴되어 예레반 역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계단을 따라 세반 호수 언덕 위에 올라가니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분다. 그 바람부는 언덕에 교회 두 개가 오롯하게 세워져 있다. 오늘은 사람이 별로 없어 더욱 쓸쓸해 보인다. 아래에 있는 것은 성모마리아 교회이고, 위에 있는 것은 12사도 교회다. 벽도로 지은 두 개의 교회 모두 아담하고 고풍스럽다. 아래에 있는 성모 마리아 교회 안에 들어가 보았다. 성모 마리아의 성화가 걸려있다. 아르메니아의 기독교 정신이 이곳 세반 호수에까지 서려 엄숙한 풍경을 자아낸다.
* 아르메니아 세반 호변 현지식당 석식
세반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 구이 요리로 저녁식사를 했다. 세계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호수 중의 하나인 세반 호수에서 자란 송어다. 이름은 세반 송어Salmo ischchan지만, 사실은 연어과에 속한다. 구운 송어를 접시 가득 담아온 정성스런 식단이다. 아르메니아의 아름다운 세반 호수가 키운 생선은 매우 크며 아주 맛있다. 분홍빛이 도는 살이 많고, 뼈가 별로 없다. 민물 물고기인데 전혀 비린내가 나지 않고, 깊고 고상한 풍미의 독특한 맛이다. 우리나라에서 즐겨 먹는 구운 고등어 맛이 난다. 처음에는 고등어로 착각할 정도로 동일한 맛에 놀랐다. 아르메니아는 내륙 국가라서 바다가 없다. 그런 아르메니아에서 세반 송어는 생선의 왕자다. 머리에 왕관 같은 반점이 있어서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세반 송어를 석쇠에 굽거나 끓여 먹는다. 호두 소스, 말린 자두나 살구 같은 과일을 넣어 오븐에서 굽는다. 오늘 날 세반 호수에 도나우 가재, 발트해 흰물고기 등이 유입되면서 세반 송어는 안타깝게도 위기에 처해 있다. 그래서 세반 송어를 양식하기도 한다. 1970년대에 벌써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의 호수에도 이식되었다. 토마토, 오이, 호박, 완두콩 등과 함께 세반 송어 요리의 푸짐한 현지식당 석식으로 행복한 여정이다. 후식으로 나온 파이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아쉬움으로 아름다운 세반 호수 주변 마을을 다시 한번 더 둘러보고 예레반을 향해 떠나왔다.
* 아르메니아 세반 호수 주변 마을 풍경
세반 호수와 세반 수도원을 보고 다시 마을로 내려왔다. 어느 바닷가 해변 마을을 연상케 한다. 아까 세반 호수 언덕에 오를 때는 험상궂은 날씨로 온통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었는데, 저녁 무렵인 지금은 햇살이 화사하다. 세반 호수욕장도 있어 이곳은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곳이다. 기념품을 파는 상가도 있고, 외부 손님을 위한 깨끗한 식당도 있다. 이곳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세반 호수 주변 마을 풍경은 매우 아름답다.
* 아르메니아 들녘 풍경
구름이 많던 하늘이 서서히 벗겨지고 햇볕이 나서 경치가 좋다. 세반에서 예레반으로 가는 길이다. 세반 호수가 들녘 깊숙히 들어와 있다. 호수 주변에는 마을이 있어 가스관도 높고 낮게 설치되어 있다. 초지의 들녘이 지나가고 구릉진 산언덕이 보인다. 아르메니아의 들녘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여러 종류의 풀들이 자라는 초지는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잔잔한 풀들의 구릉진 언덕은 저녁 햇살을 받으며 연둣빛 능선으로 독특한 풍경이다. 뉴질랜드 북섬에서 보았던 들녘 풍경과 유사하다. 아르메니아는 작은 나라인데 조지아에서 넘어올 때는 울창하고 우람한 산 풍경을 보았고, 지금은 그와는 많이 다른 들녘과 산언덕 풍경을 본다. 하늘의 구름도 우람하게 산언덕에 걸쳐 있다. 모두가 아름다운 아르메니아 들녘 풍경이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에서 본 아라랏산 봉우리들 원경
아르메니아의 수도는 예레반이다. 예레반 시가지 외곽에 들어서자 예레반 여행에서 주요 명소인 아라랏산이 멀리 보인다. 4개의 봉우리가 연결되어 장관이다. 큰 아라랏산과 작은 아라랏산 2개의 봉우리가 더욱 오롯하다. 주 봉우리는 대아라랏과 소아라랏 2개다. 그것도 잘 구분되어 보인다. 하늘에는 구름이 끼었지만 설봉은 그래도 선명하게 드러낸다. 터키령에 있어 원경이지만 비경이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 시가지 도착
예레반은 아르메니아의 수도다. 계획된 도시다. 아르메니아는 지진이 많이 나는 땅이고 또 지반이 약해서 높은 건물은 안 짓는다. 예레반 시가지에 들어서자 아라랏산 원경도 보인다. 봉우리 두 개가 크고 작은 것이 구별되어 보인다. 아르메니아 시가지 건물의 가게 상호에 쓰인 아르메니아의 고유문자가 독특하다. 러시아의 알파벳과는 많이 다르다. 아르메니아도 우리나라처럼 그들만의 고유 문자가 있다. 국회의원이 살고 있는 노란 담장의 부잣집도 지난다. 입구에는 사자상까지 아주 드넓은 저택이다. 워터파크를 비롯한 고급 식당, 시계탑의 시청 건물, 검은 색 술 제조공장 등 예레반 시가지의 여러 건물들을 보며 호텔로 갔다. 생각보다 훨씬 세련되고 아름다운 도시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예레반 여행이 시작된다. 내일 아침 모닝콜은 6시 30분, 조식은 7시 30분부터, 출발은 8시 30분이다. 붉은 색 장식의 고풍스런 호텔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했다. 참으로 행복한 여정이다.
2014년 6월3일 화요일 아르메니아 예레반, 코비랍, 코타이크
* 아르메니아 예레반 호텔 주변 풍경
아침 일찍 일어나서 호텔 밖을 산책하며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 시가지를 둘러보았다. 두 개의 큰 술 제조 공장 건물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노아방주가 머물렀다는 성스러운 아라랏산의 이름을 딴 ARARAT이라는 상호를 크게 설치한 붉은 색 건물의 술 제조공장도 있고, 호텔 바로 건너편에는 회색 크고 긴 건물의 술 제조공장도 있다. 도로변 다리에는 지금 스위스 대통령이 방문 중이어서 환영하는 의미의 스위스 국기가 많이 걸려있다. 아르메니아는 세계은행이 다 들어온 곳이다. 그래서 스위스라고 불릴 정도다. 아르메니아는 해외거주자가 많다. 전 세계 60여 개국에 걸쳐 약 90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분포되어 있다. 그 중 공식적인 이민자는 대략 50만명 정도다. 아르메니아 본국에는 380만 명의 인구가 남아있다. 해외거주자가 더 많은 나라다. 터키 대학살과 독립 그리고 주변국의 전란으로 세계 각국으로 이주해서 그렇다. 미국과 러시아에 각각 100만 명 정도 거주하고, 조지아, 프랑스, 이란, 레바논, 시리아, 아르헨티나, 캐나다 등에 다수가 실고있다. 해외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해외거주자들이 송금하는 돈으로 아르메니아의 경제가 가동될 정도다. 총면적 29,800㎢로 한국의 경상남북도를 합친 남한의 1/3 정도 크기의 작은 나라다. 수도인 예레반은 라즈단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구 120만 명의 도시다. 소련을 구성했던 공화국 가운데 하나로 서남아시아의 역사 깊은 지역에 위치한 국가다. 국경선의 변화가 상당히 심했던 지역이다. 고대 아르메니아는 지금의 아르메니아와 터키 북동부 지방에 넓게 걸쳐 있었다. 반면 오늘날의 아르메니아는 코카서스{자카프카지예) 지역의 3개 국가인 아르메니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가운데 가장 좁은 면적 국가다. 터키령 아르메니아는 아르메니아와 달리 정치적으로 독립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아르메니아인들은 현재의 아르메니아 영토에 거주하고 있다. 터키령 아르메니아에는 소수만이 살고 있다. 고대 아르메니아는 한때 로마 제국에 대항할 정도로 강성했다. 많은 외세의 지배와 독립투쟁으로 혼란하기도 했다. 1916년 러시아에 지배당한 후에는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과 함께 자카프카지예 동맹을 맺었으나 몇 달 후 해체되었다. 1920년 아르메니아 공화국으로 잠시 독립했지만, 여러 차례의 정치적 혼란 끝에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과 함께 소비에트 공화국연방으로 재통합되어 1922년 소련에 흡수되었다. 1936년 소련 헌법에 따라 독자적인 소비에트 공화국이 되었다. 1980년대 말 아제르바이잔의 관할권인 산악지대 나고르노카라바흐에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어 정치적 지위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아직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문제는 미해결이며, 아제르바이잔 영토 속에 아르메니아가, 아르메니아 영토 속에 아제르바이잔이 부분적으로 속해 있어 분쟁이 일고 있다. 코카서스 3국은 주변과의 혼란한 관계로 난민들도 많이 있다. 조지아에서도 난민촌을 보았다. 조지아는 옛날의 국가명인 그루지아다. 2010년부터 세계 각국에 그루지아를 조지아로 부르도록 아르메니아 대통령이 요청했다. 자신의 국가명을 개명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그루지아의 정식 국가명은 조지아로 불러야 한다. 이번 여행은 코카서스 3국의 이해관계도 알게 되고,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얻는 소중한 여정이다. 아르메니아뿐만 아니라 조지아에서도 포도를 이용한 술이 많았는데 이곳 아르메니아에서도 포도를 이용한 많은 술 제조공장을 본다. 예레반 시가지는 붉은 지붕의 낮은 주택이 많고 파란 나무들이 도시를 채워 조화롭고 매우 아름다운 정경이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 시내 무너진 건물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온다. 초여름인데 서늘한 날씨로 한기가 스민다. 오늘 일정은 예레반에서 코비랍 교회 아라랏산 전망대를 보고, 코비랍에서 다시 예레반을 거쳐 코타이크 게르하트 수도원 탐방 후, 예레반으로 다시 돌아와 시티 투어를 할 예정이다. 코비랍으로 이동 중이다.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 시내에서 무너진 건물을 보았다. 아르메니아는 소련 연방국이었기 때문에 독립 후 소련이 떠나면서 많은 건물을 남겼는데 지금은 거의 폐허로 남아 있다. 또한 아르메니아는 지진이 잘 일어나는 국가로 그 피해가 크다. 그리고 1988년부터는 수년간 아제르바이잔과의 분쟁으로 수많은 아르메니아인이 사망했다. 그런데 1988년 12월에는 큰 지진이 일어나 아르메니아의 몇 군데 시가 파괴되었고 2만 5천여 명이 사망했다. 지금 바리보는 무너진 건물은 아마도 지진 피해거라 소련시절 남은 잔재의 폐허로 보인다. 어떤 이유든 처참하고 안타까운 광경이다.
* 아르메니아 아라랏 계곡 포도재배 지역
아르메니아 아라랏 계곡이라 부르는 포도재배 지역을 지나간다. 아라랏 계곡 아래 평원지대에 끝없는 포도재배 농장이 전개 된다. 포도는 일교차가 큰 곳에서 최상의 포도가 생산되는데 코카서스 산맥을 타고 있는 아르메니아나 조지아에서는 기후 조건이 잘 맞는 것이다. 특히 높은 아라랏산이 있는 이곳 계곡은 포도재배의 조건이 더욱 잘 맞아서 온통 들녘이 포도밭이다. 아르메니아에서는 이곳 포도로 술을 제조한다. 포도즙을 발효시켜 만든 포도주는 구약, 신약시대를 거쳐 교회의 중요한 음식물의 하나로 여겨왔다. 구약시대에는 제물과 함께 사용되었고, 중요한 식품이었다. 신약시대에는 치유제로 사용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가 포도주를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흘리는 자신의 피라고 말한 후부터 포도주는 인류를 위한 예수의 극진한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포도주를 나눠 마심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다.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로 상징한다. 이물질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포도로 빚어 발효, 산화시킨 것으로 포도주와 물의 비율을 2대 1로 섞어 사용한다. 포도주에 물을 섞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인 물과 그리스도의 피의 상징인 포도주를 혼합함으로써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일치를 추구한다는 의미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의 가슴으로 흐르는 피와 물로도 암시된다. 그리스도의 단성론을 주장하는 아르메니아 교회에서는 포도주에 물을 섞지 않는다. 성서에서 포도밭은 하나님의 교회로, 포도나무는 그리스도로, 포도덩굴은 그리스도교 신자들로 비유되는 되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로 국교를 기독교로 공인한 나라다. 나는 그 사실을 이곳에 와서 알았다. 소련 연방국이란 선입견으로 바라보았던 예상과는 매우 다른 종교국이다. 코카서스 산맥의 국가로 포도재배에 알맞은 조건도 있지만, 그런 종교적인 영향으로도 포도를 많이 재배하는 것이 아닐싶은 생각이 든다. 먼 나라에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보고, 듣고, 배운다.
* 아르메니아 들녘 농토
아르메니아 들녘의 기름진 농토를 보며 코비랍을 향해 달린다. 포도와 밀 농사가 대부분이다. 파란 포도나무와 노랗게 익어가는 밀밭이 장관이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저리도 푸르고 , 놀놀한 기름진 농토를 보지 못 했다. 조지아에서는 저런 농토를 보았다. 코카서스 3국은 서로 이웃해 있는데 들녘 풍경은 다르다. 아제르바이잔의 삭막한 산과 들녘과는 매우 상반된 풍경이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은 석유와 가스 매장량이 많아 풍요로운 들녘이다. 조지아는 울창한 산과 들녘의 목장 야생화, 그리고 약간의 농토가 있었다. 아르메니아도 조지아에서 넘어올 때는 아주 깊은 산이 많았다. 원래 아르메니아는 고원지대다. 지금 가는 코비랍 들녘에서 저토록 광활하게 전개되는 농토를 보게 된 것이다. 세상은 참으로 조화로운 자연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 아르메니아 들녘 방목 동물들
코카서스 3국 여행에서 방목하는 동물들을 그리 많이 보진 않았다. 조지아 카즈베기 산에 갈 때, 산을 타고 다니며 풀을 뜯는 양떼가 가장 많았다. 그리고 간간이 소나 염소, 당나귀, 양 등의 가축을 보아왔다. 오늘은 아르메니아 들녘에서 방목하는 소와 염소를 본다. 살찌고 기름진 동물들이다. 어린 시절 고향 들녘에서 방목하던 동물들이 떠오른다. 50여년 전 내 조국의 풍경을 보는 순간이다. 평화로운 정경이다.
* 아르메니아 들녘 가스관
아르메니아는 가스를 러시아에서 수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과 지역분쟁 이후, 아제르바이잔은 소련시절에 구축된 아르메니아로의 가스 수송망을 봉쇄해버렸다. 그래서 아르메니아로 들어오는 모든 수입 가스는 조지아를 경유하는 러시아산으로 바뀌었다. 조지아 여행에서 아르메니아로 수송하는 러시아의 가스관을 보았다. 조지아는 러시아 가스를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사용요금을 받고 러시아에서 아르메니아로 가는 가스관 설치를 허락한 것이다. 이곳 코카서스 3국,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는 모두 가스관이 지상에 설치되어 있다. 지금 바라보는 가스관도 아르메니아의 들녘 곳곳에 있다. 민가의 마을 근처에는 더욱 많은 가스관이 놓여 있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익숙치 않은 풍경이어서 조금 위헝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상 설치가 고장 났을 때 수리하기 편리하다고 하지만 국가의 재정상으로, 또는 지진이 많이 나는 지형의 영향이 더 큰 것 같다. 옆으로, 위로, 내려갔다, 올라갔다 놓여진 들녘의 가스관은 세계여행에서 보는 독특한 풍경이다.
* 아르메니아 코비랍 들녘 풍경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서 흑해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타고 코비랍에 왔다. 이란, 아르메니아, 조지아, 터키, 흑해까지 연결된 도로다. 아르메니아는 코카서스(카프카스) 산맥을 가로지르는 이란, 터키, 조지아(그루지야)와 접경하는 삼각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코비랍에 온 것은 코비랍 교회와 아라랏산을 조망하기 위해서다. 교회가 있는 산 언덕에 오르니 광활한 코비랍 들녘이 푸르게 전개된다. 코비랍은 포도재배 지역이다. 그래서 들녘 농토에 포도나무가 줄지어 심겨져 있다. 멀리 자리한 우람한 산과 함께 평화로운 정경이다.
* 아르메니아 코비랍 교회
아르메니아 코비랍이라는 지역에 있는 교회에 왔다. 주차장에서 바라보니 높은 산 언덕에 올라앉아 있다. 계단을 따라, 산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서 올라왔다. 저 아래로는 드넓은 코비랍 들녘이 전개된다. 교회는 높고 긴 성벽으로 둘러쳐져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입구에는 기독교 상징의 십자가 돌비와 그레고리 부조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이곳 코비랍 교회 안에는 그레고리 감옥이 있다. 그레고리는 아르메니아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사람이다. 코비랍은 깊은 감옥이라는 뜻이다. 또한 교회 건물 앞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매우 신성시 여기는 아라랏산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서 많은 것을 보는 여정이다.
* 아르메니아 코비랍 교회 아라랏산 전망대
코비랍 교회 전망대에서 아라랏산을 조망했다. 아라랏산의 이름이 지어진 것에 관해서는 대홍수가 끝나고 노아방주가 머물렀다는 성경 창세기 8장 4절에 나오는 산의 이름이라는 설, 아라Ara 왕의 이름에서 지었다는 설, 아르메니아의 아리라랏Ayrarat 지방을 아라랏으로 부른 것에서 나왔다는 설 등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력한 설은 성경의 노아방주가 머물렀다는 산으로 본다. 아라랏산은 5,137m의 대아라랏트산Greater Ararat 과 3,896m의 소아라랏트산Lesser Ararat으로 나뉘어져 있고, 11㎞ 정도의 거리에 두 봉우리가 우람하게 서 있다. 두 봉우리 모두 화산이 분출하면서 생긴 것이다. 아라랏 큰 산의 지름은 약 40km로 매우 장대하다. 산세가 높고 험준한 지형의 휴화산이다. 바사인들은 노아의 산을 뜻하는 ‘구이누’로, 터키인들은 험한 산을 뜻하는 ‘아리다기’ 산이라고 부른다. 산 정상의 30% 정도는 만년설로 뒤덮여 있다. 오늘은 흰구름이 설산 고봉을 덮어 하나의 덩이로 이어진 긴 허리만 보여주고 있다. 산 전체가 화산암이고, 용암과 화산 조각들로 덮여 있다. 주변은 완만한 경사의 평원을 이룬 고원지대로 초원이 많아 유목민들이 목축생활을 하며 살고 있다. 아라랏산에 노아방주 배 조각이 남아있다고 전해지며, 종교계와 고고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 부부도 아르메니아 여행에서는 저 산을 본다는 것에 큰 비중이 실려 있다. 아라랏산을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 성경 속 어느 마디에 선듯 가슴 벅찬 감동이다. 저 장엄하고 우람한 아라랏산 앞에서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구별되지 않는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들이 노아의 홍수 이후 세상에 출현한 최초의 인종이라고 믿으며 아라랏산을 매우 신성시 여긴다. 아르메니아 신화에서는 아라랏 산이 하나님의 집으로 나온다. 원래 아라랏은 아르메니아지방에 있던 나라의 이름이다. 아르메니아가 독립한 1991년에는 아라랏산을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상징물로 지정했다. 페르시아 전설에서 이곳은 인류의 발상지로 나타낸다. 아라랏산 마을에 노아가 제단을 쌓고 포도원을 가꾸었다는 것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그 마을의 노아방주를 찾아 아라랏산에 오르려 했으나 실패한 성야코브스를 기념하여 수도원을 세웠다. 그러나 1840년 지진으로 성야코브스 수도원과 마을은 전체가 무너졌다. 아르메니아에서는 방주는 아직 아라랏 산정에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믿지 못하는 대목에서는 하느님이 아무도 볼 수 없도록 했을 뿐이라고 전설처럼 전해진다. 아르메니아의 신처럼 여기는 저 거룩한 산을 보기 위해 우리 부부가 서 있는 이곳 코비랍은 아르메니아와 터키의 국경이 아주 가까운 곳이다. 아라랏산은 터키 영토에 있지만 이곳에서는 아주 가까이 보인다. 아르메니아 여행 중 여러 곳에서 보았지만 여기서 보는 아라랏산이 가장 가까이 다가온다. 정확히는 아르메니아, 터키, 이란 이 세 나라의 국경에 위치한 산이다. 아라랏산으로 가는 길은 주로 터키의 호수도시 반Van을 통해 가거나,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Yerevan을 통해 가거나, 이란북부를 통해 가는 길이 있다. 1829년 9월 독일인 요한 야코프 폰 파로트가 최초로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아르메니아인도 등정했다. 차츰 여러 탐험가들이 등정하면서 노아방주의 조각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다. 그 노아방주 조각이 아르메니아 에치미아진 성당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우리는 그곳도 방문하여 볼 예정이다. 오늘은 셩경 역사의 생생한 현장을 보며 노아방주의 정지된 시간과 마주하는 매우 뜻깊은 여정이다.
* 아르메니아 코비랍 교회 그레고리 감옥
코비랍 교회 안에 있는 감옥으로, 아르메니아 기독교를 전파한 그레고리가 13년간 갇혔던 감옥이다. 코비랍Khor Virap은 깊은 감옥이란 뜻이다. 겉 모양은 고운 황토색 벽돌로 지어져서 아름답다. 건물 외벽에는 기독교 상징 십자가 문양 등이 새겨져 있고, 건축 헌금자 명단도 적혀 있다. 감옥 건물 바로 곁에는 아라랏트산 전망대가 있다. 아라랏트산을 조망하고 그레고리 감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교회인데 입구와 안쪽으로 두 곳에 감옥으로 내려가는 철제 계단이 있다. 캄캄하고 아찔한 수직 계단으로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아 모두 고개를 내젖고는 돌아서 나온다. 그레고리는 아르메니의 기독교를 최초로 전파하고 왕이 국교로 공인 선포하도록 기여한 성자다. 그는 아랍계 혈족의 귀족이었던 아버지에게서 탄생했다. 그의 부친은 이슬람 왕의 사주를 받아 아르메니아의 왕과 왕비를 죽였다. 그 사건으로 그레고리의 부친과 그의 가족 대부분은 아르메니아에서 처형 당했다. 그때 그레고리만 터키 카파도키아로 도주하여 살아남았다. 그레고리는 터키에서 착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결혼까지 하여, 후일 아르메니아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당시의 아르메니아 왕은 부친이 암살했던 왕의 아들이었다. 선대 왕이었던 아버지를 암살한 원수의 아들 그레고리를 죽이려 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그 당시 그레고리를 죽이려고 이곳 코비랍 교회 안의 6m 지하 감옥에 가둔 것이다. 아르메니아 왕은 음식은 물론 물도 주지 않은 채 땅 속 깊고 좁은 곳에 가두었으니, 그레고리가 죽었으리라 믿었다. 그후에도 아르메니아 왕은 계속 기독교인을 탄압했다. 그러던 중 아르메니아 왕은 시름시름 앓고, 그의 여동생은 그레고리가 살아있다는 꿈을 꾸었다. 왕은 그레고리를 가둔 이곳 코비랍 교회의 감옥으로 사람을 보냈는데 정말 13년 동안 갇혀 지낸 그레고리가 살아있음이 확인되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왕은 그레고리를 왕궁으로 불러 만났다. 그러자 기적 같이 병이 낫게 되었다. 그로인하여 왕은 301년 속죄의 심정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국교로 공인 선포했다.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한 나라다. 로마 기독교는 아르메니아보다 늦은 313년에 국교로 공인 선포했다.코비랍 교회 입구 출입문에도 기독교가 공인된 지 1700년이 되던 해인, 2001년에 세운 그레고리 부조 돌비가 서 있다. 곁에는 그레고리의 예수에 대한 꿈을 듣고, 왕이 지은 에미치아진 성당도 새겨져 있다. 먼 나라에서, 그것도 소비에트 연방국이었던 나라에서 기독교가 세계 최초로 전피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죽음을 감수하며 지켜낸 그레고리의 독실한 기독교 정신에 의해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된 것이라는 대목에서는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제는 잠잠히 평화가 서린 온유한 감옥 건물이다.
* 아르메니아 코비랍 교회 주변 풍경
코비랍 교회는 바위산 언덕 위에 높게 앉아 있다. 교회와 그레고리 감옥, 그리고 전망대에서 아라랏트산을 조망하고 하산하는 길이다. 빙그르 산길을 돌아 내려왔다. 오르내리는 자국민들이 사람들이 많다. 들녘에는 포도밭이 많다. 산자락 아래 코비랍 마을도 아름답게 전개된다. 주차장에는 눈물나무라고 부르는 우리나라의 버드나무 같은 나무도 있다. 하얀 비둘기를 판매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코비랍에서 코타이크로 이동한다. 1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다. 나는 세계여행에서 버스로 이동하며 보는 그 나라의 풍경도 아주 소중한 여정으로 여긴다. 아르메니아의 생생한 풍경을 보며 가슴에, 눈에, 두뇌에, 그리고 사진에 담아갈 것이다.
* 아르메니아 들녘 공동묘지
아르메니아 들녘 공동묘지가 아주 큰 자락으로 자리하고 있다. 아까 예레반에서 코비랍으로 갈 때도 보았던 묘지다. 도로변에 크고 작은 무덤이 많다. 담장을 치고 아담한 십자가를 세워둔 묘지도 있고, 집처럼 커다란 묘지도 있다. 공동묘지는 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을이나 들녘에 주로 있다. 주변에는 민가도 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아름다운 공존이다.
* 아르메니아 푸른 들녘 위 아라랏산 원경
예레반에서 코비랍으로 이동하여 코비랍 교회 전망대에서 아라랏트산을 조망하고 돌아가는 길인데, 지금 또 아르메니아 푸른 들녘 위 아라랏트산 원경을 보고 있다. 푸른 초지와 농토 위로 뜨는 구름 속 해발 5,165m의 아라랏트산은 비경이다. 장대하고 웅장한 품사위로 앉았는데 만년설이 덮힌 설봉은 쉽게 드러내지 않는 도도한 자태다. 노아의 방주가 걸쳤던 아르메니아의 상징적인 산이다. 아르메니아 여행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산이다. 신성시 여기는 성지의 저 산을 보기 위해 이 나라를 찾는 사람이 많다. 나 또한 아르메니아에 오기 전, 아라랏트산에 대한 동경이 컸다. 예전에는 아르메니아의 영토가 광범위하여 아라랏트산이 아르메니아에 속해 있었지만 오스만 투르크 및 외세의 침략으로 아르메니아의 영토가 축소되어 현재는 터키령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 곳곳에서, 그리고 수도인 예레반에서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다. 그것은 아라랏트산이 워낙 높아서 잘 보이는 영향도 있다. 오늘은 날씨가 쾌청하여, 구름이 감싸고 있어 설봉은 보이지 않지만 장엄한 아라랏트산을 보는 축복의 날이다.
* 아르메니아 푸른 들녘
아르메니아의 6월 초순 들녘이 매우 짙푸르다. 산지가 많아 고산기후 등 다양한 기후의 영향인 것 같다. 아르메니아의 날씨는 흑해와 카스피해 그리고 건조한 이란과 아나톨리아 고원의 영향을 받는다. 평야는 무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거치면서 다부진 모양새다. 7월 평균기온이 25도, 더운 날은 42℃까지 올라간다. 연강수량은 200∼400mm이며 봄철에 비가 많다. 초여름인 지금도 약간 덥기도 하고, 촉촉히 비가 내릴 때도 있다. 아르메니아의 식물군은 3,000종 이상 분포한다. 우리나라 들녘의 다양한 식물군처럼 다양한 식물들이 들녘을 채우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고도에 따라서 반사막, 스텝·삼림, 고산성초지, 고산툰드라 등의 5개의 식생지대가 있다. 저지에는 엉겅퀴 등의 식물이 자생하고, 1400m 고원지역에는 쑥 종류가, 산에는 가시덤불이 자란다. 삼림지대는 국토의 10 %이다.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로 넘어올 때는 우람힌 산악지대였다. 그때도 다양한 식물들이 산을 채우고 있었다. 아르메니아의 푸른 들녘이 아제르바이잔에서 보았던 건조한 들녘과는 매우 대조적인 풍경이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 소련연방 시절 공장
코비랍 교회 전망대에서 코타이크 게르하트 수도원으로 가는 길인데 다시 예레반 외곽지역을 거쳐서 가고 있다. 도로가 거칠어서 약간 덜컹거린다. 예레반 시가지에 접어들자 소련이 떠난 후 소련시절의 공장들이 폐허로 방치되어 있다. 아르메니아가 소련의 연방국이던 때에는 소련에서 가스, 철광석 등의 공장을 세워 번창했던 건물들이다. 아르메니아가 1991년 소베에트 연방국에서 독립하면서 소련이 떠난 흔적이 저 건물 잔해 속에 쓸쓸히 묻혀 있다. 더러는 녹슬기도 하고, 더러는 무너지기도 하고 아르메니아 곳곳에서 보아온 풍경이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 시가지 주택 포도나무 정원
이번 코카서스 3국 여행에서 인상 갚은 것 중의 하나는 포도나무를 많이 본 것이다. 들녘에서 재배하는 포도나무 뿐만 아니라, 시가지 주택 정원에서 기르는 포도나무까지 수없이 보아왔다. 시골 농가주택에서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예레반 도심의 주택 정원에 심겨진 포도나무는 독특한 풍경이다. 아르메니아의 가정집 정원은 농촌과 도시 거의 모두가 포도나무로 단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손바닥만한 땅이라도 있으면 채소를 가꾸듯, 아르메니아에서는 손바닥만한 땅이라도 있으면 포도나무를 가꾼다. 포도나무가 꽃이고, 정원수이고, 주택마다 동일한 정원 풍경이다. 쇠막대기를 얼키설키 이어주어 포도나무 덩굴이 타고 오르도록 잘 가꾸어져 있다. 아르메니아의 아름다운 정경이다.
* 아르메니아 산녘 가스관
아르메니아 산녘에서 가스관을 본다. 산 언덕에 가스관이 놓여 있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조지아에서 수없이 보아온 가스관이다.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에서 가스를 공급받아 쓴다. 그런데 러시아와 아르메니아 사이에는 조지아라는 나라가 있다. 조지아는 러시아의 가스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르메니아의 편리를 위해서 일정 금액의 사용요금을 받고 러시아 가스관이 아르메니아로 가도록 허락하고 있다. 저 가스관은 러시아에서 수입해 오는 가스가 흐르는 관이다. 조지아 여행에서, 아르메니아로 넘어가는 가스관이라고 보고 들었던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이곳 아르메니아에서까지 참으로 많이 보아오는 지상의 가스관이다. 코카서스 국가들은 지반이 약하여 가스관을 떵에 묻지 않고 자상으로 연결하여 사용한다. 보수할 때도 지상의 가스관이 더 쉽게 수리할 수 있어서란다. 우리 한국과는 많이 다른 광경이다.
* 아르메니아 호두 재배 지역
아르메니아는 호두를 많이 재배하는 나라다. 코타이크 게하르트 수도원으로 가는 길에 호두 재배 지역을 지나간다. 비탈진 산 언덕에 많이 심겨져 있다. 이곳 마을은 지반이 약하여서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 지역이기도 하다. 허물어진 건물이 그대로 방치된 것도 있고 보수하는 장면도 보인다. 들녘에는 색색의 야생화가 비경이다. 아르메니아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이 순간 참으로 행복하다.
* 아르메니아 코타이크 게하르트 수도원
게하르트 수도원Monastery of Geghard은 아르메니아 중부에 위치한 예레반 외곽의 코타이크 주에 있다. 아르메니아에서 유일하게 외국 영토와 맞닿아 있지 않은 주다. 산길을 달려온 버스가 수도원에 다다르자 우람한 산자락이 비경이다. 산속 우뚝 솟은 바위에는 하얀 색 십자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주차장 주변에는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이 많다. 수도원으로 오르는 입구에는 독특한 문양의 무덤 석관이 서 있다. 수도원은 가파른 절벽을 등지고 아자트 계곡Azat Valley으로 둘러싸인 산허리에 넓은 자락으로 앉아있다. 아자트 계곡의 바위를 파서 깎아 만든 게하르트 수도원의 교회와 묘지는 중세 아르메니아 건축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아주 웅장하고 큰 규모의 기독교 수도원 성지다. 중세 아르메니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게하르트 수도원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게그하드 수도원으로도 불린다. 게하르트, 또는 게그하드는 아르메니아어로 창이란 뜻이다. 설립 당시 이름은 동굴사원을 뜻하는 아이리방크Ayrivank였다. 후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로마 병사가 찌른 창을 뜻하는 게하르트로 바꾸었다. 유대 사도였던 타데우스가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로마병사의 창을 아르메니아로 가져왔다. 그 창이 실제로 이곳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었다. 현재 이 창은 예치미아진 교회 박물관으로 이전하여·보관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아이리방크 또는 게하르다방크Geghardavank로 불린다. 수도원의 입구와 외벽에는 아르메니아 전통 문양의 석조 십자가인 카츠카르Kachkar 십자가들이 세워져져 있다. 연꽃 문양과 아치 문양의 이슬람교를 상징하는 조각이 공존하여 종교의 화합을 상징한다. 수도원 전체 건물은 4세기경 그레고리Gregory가 신성한 샘이 있던 동굴을 파서 만들었다. 바위를 손으로 깎아 만든 첫 번째 아바잔 동굴 밀실이다. 안으로 들어가니아직도 내부의 건물에는 그날을 증명하듯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옛날의 바닥을 연상케하는 다듬어지지 않은 돌바닥과 돔 천정이 소슬하다. 교회 본당만 1215년 조지아의 타마르 여왕을 호위했던 병사의 도움으로 지어졌다. 예배장소, 교육장소 및 회의장소로 사용되었다. 교회 기둥에는 성경구절이 새겨져 있으며, 돌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벽면에는 성화가 걸려있다. 기부자들의 이름을 기록문도 새겨져 있다. 일부 암석 교회는 절벽의 바위를 직접 파서 만들었거나, 동굴을 그대로 이용한 것도 있다. 전쟁시에는 은신처로 사용했다. 바위 벽을 사람이 겨우 들어갈만 구멍을 뚫어 놓은 동굴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는 생생한 체험도 했다. 수도원에는 여러 개의 홀이 있는데, 홀마다 중앙 천정에 환기와 채광을 위한 둥근 창이 있다. 최초의 모습은 9세기경 아랍인들의 침입으로 완전 파괴되었다. 이후 복구되었으나, 아랍 통치 때인 923년 사원 건물들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 필사본, 고문서 등 주요 문화재들이 약탈당하거나 지진으로 일부 파괴되었다. 평탄하지 않은 역사을 거쳐 왔지만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 많이 살아 있어 중세종교의 어느 마당에 선듯한 환상이다. 전망 좋은 위치로 올라가니 초입에서 보았던 산 중턱의 하얀 십자가가 아주 가까이에서 성스럽게 보인다. 수도원 밖은 울창한 나무들이 많다. 아르메니아의 특산인 호두나무도 많다. 계곡물이 흐르는 아치형 조그만 다리가 멋진 낭만을 선사한다. 바쁜 일정으로 분주히 움직일 때 이곳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아시아의 이방인인 나에게 함께 사진을 찍자고 요청하다. 정이 많은 사람들이다. 함께 사진을 찍으며 서로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우리나라의 어느 깊은 사찰에 온 착각이 들 만큼 고즈넉한 절벽 언덕의 수도원은 오래도록 가슴에 저장될 것이다. 내려오는 길목에서 선홍빛 화사한 양귀비가 아르메니아의 고운 얼굴로 배웅한다.
* 아르메니아 코타이크 게하르트 수도원 양귀비
게하르트 수도원 탐방을 마치고 나오는데 입구 언덕에 양귀가 많다. 빨간 꽃이 파란 풀밭에 고운 자태로 피어 있다. 코카서스 3국 여행 중 곳곳에서 보아온 양귀비다. 들녘에서도 많이 보았는데 지금은 산녘에서 아름다운 양귀비를 본다.
* 아르메니아 코타이크 가르니 신전
조금 전 탐방한 아르메니아 코타이크 게그하드 수도원에서 15분 거리에 위치한 신전이다.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서 남동쪽으로 32km 떨어져 있는 코타이크Kotayk 지방에 있는 신전이다. 성벽으로 이어진 신전 입장문을 통하여 들어갔다. 높은 지대라서 산이 눈앞에 전개되고 야생풀과 야생꽃들이 반겨준다. 한참을 걸어 들어간 곳 끝에서 우람하게 선 신전을 만났다. 기원전 3세기에는 부족 왕들이 기지로 사용했던 요새로 건립되었다. 아르메니아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로마의 지배를 받던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 네로황제의 후원을 받아 태양신 신전으로 건축했다. 아르메니아가 로마의 영토라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서였다. 전략적으로 언덕 꼭대기에 재건축된 신전이다. 신전 안에는 로마 황제의 상도 세웠다.태양신 미트라에게 바치는 성소로 지어졌다. 지중해 동부의 태양신인 미트라는 로마의 군사적으로 종교 숭배 신이었다. 그리스 아테네 신전보다는 훨씬 작지만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유럽 풍의 건물이다. 그리스·로마식 신전 디자인을 변형해 만들어서 그렇다. 그리스 로마 사원처럼 둥근 기둥으로 둘러싼 이오니아 양식의 건축물이다. 하지만 건축자재는 대리석이 아닌 현무암을 사용했다. 아르메니아의 학생들이 견학 와서 함께 호흡하며 관람했다. 헬레니즘 문화 유물과 신석기 시대 거주 흔적이 남아있는 유적지다. 신전 안으로 들어가니 아담한 공간이다. 우리를 환영하는듯 아르메니아 남자가 악기를 연주한다. 신전에서 기둥 사이로 바라본 아르메니아 코타이크 지방의 산능선 풍경은 비경이다. 아르메니아 왕조 시대에는 신전 근처에 2층 여름 궁전을 지어 별장으로 사용했다. 신전 바로 옆에는 아르메니아가 301년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후에 지어진 교회터였던 자리도 있다. 다 허물어져 바닥의 흔적만 드러낸다. 건너편에는 양철 지붕의 긴 목욕탕 건물도 있다. 교회와 목욕탕이 추가로 건립되면서 거대한 단지가 되었다. 신전 부근은 극히 작은 그 일부일 뿐이다. 신전 아래 가르니 계곡은 뚝 끊어진 절벽의 주상절리 지역으로 장엄한 비경이다. 우리는 신전을 보고, 교회터를 보고 주상절리의 계곡을 본 후 목욕탕으로 갔다. 온돌로 만들어진 목욕탕이다. 바닥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과 바다의 신 등을 모자이크로 장식했다. 그리스어로 '우리는 무보수로 일했다'라는 문구도 있다. 그 당시 예술가들이 대가를 받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1679년 지진으로 거의 파괴되었다. 소련이 1970년대에 실행했던 재건축 실행으로 1975년까지 복원하여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쾌청한 날씨로 파란 하늘에 두둥실 뜬 하얀 구름이 신전과 함께 장관이다. 곳곳에 핀 야생화도 코카서스 국가의 향수를 그대로 선사한다. 고전 속의 아련한 낭만에 젖어 떠나기 싫은 명소였다.
* 아르메니아 가정집 정원의 포도나무
가르니 신전 관람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가는 길에 본 아르메니아의 가정집 포모나무다. 코카서스 3국 여행에서 참으로 많이 보아온 포도나무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가정집 주택 정원에는 항상 포도나무가 심겨져 있었다. 시골과 도시 모두 그렇다. 작은 땅만 있으면 집 안에, 집 주변에 포도나무를 심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옛날에 집 주변에 심던 감나무 격으로 보인다. 코카서스 산맥의 영향으로 일교차가 커서 포도재배가 잘 되고 당도가 높아서 우수한 포도가 생산 되기 때문이다. 중식식당에서도 입구에서부터 포도나무가 반긴다. 포도나무를 쇠막대기 틀에 올려 지붕을 만든 낭만적인 풍경이다. 아르메니아 곳곳에서 본 포도나무는 정겨운 추억이 될 것이다.
* 아르메니아 전통식당 중식
아르메니아의 아담한 마을을 걸어가서 만난 식당이다. 식당 입구에서부터 포도나무를 올려 매우 낭만적인 식당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정원이 나온다. 한쪽 집에서 빵을 굽는 장면을 공개하고 있다. 두 여인이 밀가루를 반죽하여 늘여서 불화덕에 빵을 굽는다. 손님으로 온 우리 일행에게 마음껏 먹으라고 한다. 아르메니아 전통식당의 식사용 빵이다. 조금씩 나누어 먹고 나왔다. 우리를 맞이하는 테이블에는 온갖 음식이 차려져 있다. 계속 음식을 날라다 정성껏 대접해준다. 그 중에서 가장 주 메뉴는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감자와 함께 구운 음식이다. 큰 접시에 한 가득 담아온 넉넉한 인심이다. 야채와 토마토, 빵과 함께 맛있게 잘 먹었다. 그리고 과일 체리를 많이 준다. 아르메니아에서 곳곳에서 보아온 체리다. 붉게 익은 싱싱한 체리를 사과와 함께 많이 갖다준다. 상큼한 체리를 실컷 먹었다. 정원에는 체리나무가 있고 붉은 체리가 주렁주렁 달렸다. 파란 하늘에 붉은 체리가 한폭의 수채화로 뜬다. 식사를 마친 후 식당을 나오려는데 식당 주인인듯한 아르메니아 여인은 내게 정원의 장미꽃 앞에 서라고 하더니 사진을 찍어준다. 먼 후일 따스한 인정이 서린 식당의 추억 한 장면으로 저장될 것이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 시가지 동상들
아르메니아는 구 소련 연방 국가 중 하나다. 그래서 소련의 영향을 받은 잔재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 부부가 이곳 코카서스 3국 여행을 택한 것 중 일부는 구 소련의 역사와 문화를 보기 위해서다. 그 동안 여행한 소비에트 연방국이었던 국가에서 육중한 구 소련의 역사와 문화를 본 것이 아주 큰 소득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 중에 하나가 동상이다. 예레반 도심에 시가지에 기마상이 높이 솟구쳐 오르는 동상이 보인다. 아르메니아를 지킨 자의 동상이다. 또 도심 시가지 로터리 꽃밭 중앙에 서 있는 동상도 보았다. 그는 아라랏산에 최초로 올라간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행방을 모른다. 아라랏산을 등정은 했으나 하산 여부는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국기가 꽂힌 예레반 의과대학 건물도 지나간다. 나는 세계여행에서 명소뿐만 아니라 이러한 풍경을 보는 것도 아주 뜻깊은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 아르메니아 마테나다란 고문서 박물관
아르메니아 예레반 도심에 있는 마테나다란 고문서 박물관 앞에는 이곳을 방문한 차량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다. 그 만큼 이곳 고문서 박물관은 아르메니아에서 꼭 보아야 하는 주요 명소임을 입증하고 있다. 박물관 건물 바로 앞에는 커다란 동상이 앉아있다. 405년 아르메니아 알파벳을 창제하고 아르메니아 학교를 창립한 메스로프 마슈토츠 Mesrop Mashtots의 동상이다. 박물관도 그의 이름을 따서 마슈토츠 마테나다란Mashtots Matenadaran 고문서 박물관이다. 고문서에 관한 학술연구기관이다. 동상 주변 벽면에는 아르메니아 알파벳들이 쓰여 있다. 아르메니아 알파벳은 원래는 36개였는데 오늘날은 3개를 추가하여 39개다. 아르메니는 고유한 자신들만의 문자를 사용한다는 자부심이 대단한 국가다. 우리나라의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여 지금까지 고유한 한글을 사용한다는 자부심과 동일한 것이다. 고문서 박물관은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예레반Yerevan 북서부에 있는 아름다운 경관의 높은 구릉 지역에 있다. 이곳에는 약 17,000점의 필사본이 있다. 아르메니아 고대에서 중세의 문학, 수학, 과학, 역사, 지리, 문화, 의학, 문법, 철학, 법률, 채식화 등 거의 모든 영역의 필사본이 있다. 라틴어, 그리스어, 아랍어, 에티오피아어, 페르시아어, 인도어, 시리아어, 일본어 등으로 쓰여진 필사본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아르메니아의 필사본은 '무슈의 설교집Homilies of Mush'으로 가로 55.3cm, 세로 70.5cm의 책이다. 책의 무게는 27.5kg다. 이곳 고문서 박물관에서 외관은 사진 촬영이 가능한데 고문서가 진열된 실내 전시관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 되어 있다. 전시실에 입장하여 맨 처음 본 책이 바로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고문서다. 사진으로 저장하여 가지 못하고 눈으로만 담아가야 하는 여건이 안타깝다. 이것은 1200년~1202년에 수도원에서 필사되었다. 필경사는 바르단, 삽화가는 스테파노스다. 603장의 양피지로 되어 있고 반씩 나뉘어 따로 보관되어 있다. 그 반의 분량만 전시하여 보여준다. 아르메니아의 해설사 여직원이 설명해 주었다. 전쟁 중에 어떤 여인이 품어 와서 보관이 가능했던 아주 소중한 책이다. 내용은 성경 역사가 담겨 있다. 한장, 한장 모두가 양피 가죽이어서 오늘날까지 상하지 않고 지탱해온 책이다. 나는 그 책 앞에서 놀라운 시선을 떼지 못했다. 크기도 장대하고, 무게도 육중하고, 재질까지 가죽이었다니 그 옛날 아르메니인의 지혜가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아르메니아의 필사본 중 가장 작은 것은 1434년의 교회 달력으로 가로 3cm, 세로 4cm, 무게는 19g다. 이 필사본은 104장의 양피지로 되어 있다. 아주 작은 기막힌 고문서다.
이 귀중한 필사 기록물들은 에치미아진의 대교구 마테나다란 Matenadaran에 의해 필사본의 핵심들이 구성되었다. 필경 역사가 100년에 이른다. 에치미아진 마테나다란은 5세기부터 있었고, 17세기에는 에치미아진의 수도원에서 수백 점의 필사본 작업이 시작되었다. 에치미아진 마테나다란은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많은 필사본을 소장한 곳 중의 하나가 되었다. 18세기에 에치미아진은 외부 세력의 공격을 많이 받았다. 그로 인해 일부 필사본만 남았다. 1828년에 동아르메니아가 러시아에 합병된 후 새로운 필사본들을 정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4,060점을 확보했다. 1929년 에치미아진 마테나다란은 국유재산으로 선포되었다. 안전한 보관을 위해 1915년 모스크바로 옮겼던 4,060점의 필사본들은 1922년 에치미아진 마테나다란으로 반환되었다. 1939년 에치미아진 마테나다란은 필사본의 안전과 차후의 연구를 위해서 예레반으로 이전되었다. 1959년 마테나다란은 학술연구소로 재조직되었으며, 여러 부서가 설립되었다. 끈질긴 노력 끝에 학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필사본의 목록도 발간했다. 고대 문화의 귀중한 보물을 지키고, 그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서 복원 및 제본 부서를 만들었다. 현지와 외국의 활용 방안도 마련되었다. 이곳의 고문서 및 필사본은 역사가, 학자,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연구가들이 중세 문화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스어나 시리아어로 된 초기 기독교의 저술이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초기 기독교 역사 등 세계적 고유성, 대체 불가능성의 중요성을 간직한 고문서 박물관이다. 1959년 이후 마테나다란의 전문가들은 과학 정기간행물, 마테나다란의 소식지, 아르메니아의 작품 등이다 200여 권의 서적을 출판했다. 지난 20년 동안 마테나다란은 아르메니아의 기념비적인 옛 문헌들을 수없이 많이 출판하였다. 먼 나라 아르메니아에서 전설 같은 고문서의 훈훈한 향수에 젖어본 소중한 여정이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 도심 거리 풍경
예레반 도심 거리에는 나무가 많다. 울창한 가로수들이 건물과 함께 솟구쳐 올라 걸음을 상쾌하게 해준다. 중후한 유럽풍의 건물이 나오면 더욱 낭만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많다. 그 사이에 전철로 다닌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진 전철이라서 신비로운 풍경이다. 도로변 가로수 나무 아래 벤치에서 휴식하는 시민들도 있다.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은 이방인인 우리를 바라본다. 그들에게는 낯선 여행객이고, 우리에게는 낯선 외국인이다. 그래도 인간의 정은 소통되어서 서로의 눈빛이 곱다. 가로수 나무에 기대어 놓은 사람을 형상화한 듯한 철제 조각품도 있다. 그 사이로 우리는 걸어간다. 모두가 예레반 도심 거리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 캐스케이드
예레반 도심에서 만난 캐스케이드다. 캐스케이드Cascade는 작은 폭포, 계단폭포, 인공폭포로 해석되며 계단으로 흘러내리는 폭포를 뜻한다. 이곳 캐스케이드 언덕 계단은 6개의 폭포 형상으로 길고 높게 뻗어 있지만 물은 흐르지 않는다. 캐스케이드는 소비에트 연방 50주년을 기념하여 조성한 것이다. 아르메니아의 경제적 어려운 상황으로, 해외 이주민들의 성금으로 거의 조성되었다. 아름다운 공원과 함께 계단형 구조로 만들어진 미술, 문화 공간이다. 광장 주변에는 주상복합 건물이 오붓하게 둘러싸여 있다. 캐스케이드 광장 입구에는 건축가이며 도시계획가였던 알렉산드르 타마니안 동상이 크게 세워져 있다. 원래는 예레반 북쪽의 언덕과 도심을 연결하고자 계획했는데, 타마니안은 착공도 하지 못하고 구상한 계단형 구조물로 1936년 사망했다. 설계도만 남아있는 미완의 유작이 되었다. 한참 후에서야 타마니안의 유작을 부활시켜 내부에 공간을 만들어 연결하고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했다. 광장에는 아르메니아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예술품들로 장식한 정원이 추가되었다. 물이 흐르는 분수 정원에 설치된 조형물들이 수려하다. 아직도 그는 바닥에 새겨진 자신의 예레반 설계도면을 내려다보는 동상으로 서서 캐스케이드를 지키고 있다. 타미니안은 예레반을 조성한 예레반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다. 러시아 출신 건축가인 그는 45세에 아르메니아로 이주하여 반생을 보냈고 또 예레반에서 생을 마감하여 아르메니아의 건축가로 기록되고 있다. 오페라하우스, 공화국 광장과 주변의 건물 등 아르메니아 예레반 도시 설계 건축에 기여했다. 캐스케이드는 아르메니아 현대 조형예술, 문화적 자부심의 완결판이다. 5층 높이의 계단식 건물의 외부에 층마다 분수와 조형물, 정원들을 조성해 전망대 역할을 한다. 각 층의 계단 아래 실내 공간은 갤러리와 공연장이다. 위로 올라가면 전망대가 있어 예레반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다. 1980년대 말 착공되었지만 1988년 대지진과 1991년 독립, 전쟁 등으로 중단되었다. 그 후 2002년 아르메니아 출신 미국의 사업가가 재산을 기부하여 2009년 미술관으로 개관했다. 캐스케이드 광장과 계단 아래 실내공간의 미술전시품 그리고 전망대에 올라가 예레반 시가지까지 아르메니아의 많은 것을 보았다. 아르메니아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지만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한 역사 깊은 나라다. 또한 4세기에 만들어진 문자와 언어를 지금껏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뿌리 깊은 나라다. 그들의 자랑스런 역사와 문화가 캐스캐이드에 서려있다.한때는 소련 연방국이었고, 남한의 1/3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에서 다부진 내면의 충실함을 보는 생생한 현장이었다.
* 아르메니아 캐스케이드 전망대에서 본 예레반 시가지
캐스케이드 전망대에 오르는 길은 긴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다. 우리는 시간 관계로 전망대로 오르는 에스컬레이트를 탔다. 내부에는 층별로 전시실이 있다. 1층 전시실에는 아르메니아 역사를 대형 벽화로 그린 프레스코화가 있다. 층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며 공간에 전시된 예술공예품은 참으로 차원 높은 작품들이다. 건물 밖 야외 공간에 한국인 폐타이어 조각가 지용호의 작품인 사자상도 있다. 먼 나라에서 한국을 만난듯 반가워서 잠시 나가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맨 끝 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에는 곳곳 구멍에서 흐르는 물과 조각작품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전망대에서 예레반 시가지를 조망했다. 아르메니아는 남한의 1/3 정도의 작은 나라다. 예레반은 아르메니아의 수도다.높고 낮은 건물들과 아름다운 색상의 도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예레반은 소비에트 연방국이었지만 지금은 소련식 건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스만과 페르시아, 아랍이 거쳐간 나라이며 실크로드 도시지만 고풍스런 것만도 아니다. 계획적으로 설계된 신고전주의 풍의 아름다운 도시다. 캐스케이드 앞에는 현대 도시 예레반의 아버지로 예레반을을 설계한 알렉산드르 타마니안의 작품인 오페라하우스가 둥근 건물로 우아하게 앉아있다. 멀리 하늘과 마주 선 아라랏산도 아련히 보인다. 노아의 방주가 마지막 머물렀다는 종교적으로 성스러운 명산이다. 터키령에 있지만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역사의 출발점으로 신성하게 여기는 산이다.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고 터키 공화국이 탄생하자 열강들의 조정으로 지금의 국경이 만들어졌다. 예레반은 카프카스 산맥의 남부 고원 900m∼1300m 고지에서 라즈단강을 끼고 있는 도시다. 남쪽에는 아라랏산이 있고, 북쪽에도 산들이 감싸고 있다. 이 도시는 7세기부터 문헌에 나타나고, 8세기에는 돌로 지은 요새가 기록되어 있다. 1826∼1828년에는 러시아령이 되었다. 1918년아르메니아 공화국이 선포되면서 아르메니아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1920년 러시아군에 함락되었고 소비에트 연방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예레반은 도시계획이 적용된 소련의 도시들 중 첫 번째다. 유럽과 인도를 연결하는 교역로의 중계지로도 번창했다.1991년 독립과 함께 다시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아르메니아는 인구 380만 명인데 외국 거주자 900만으로 더 많다. 터키 대학살로 외국으로 나간 거주자들이다. 아르메니아는 코카서스 3국 중 경제적으로 가장 낙후된 나라다. 기간 산업과 경제적 기반이 없어 해외 이주자들이 외국에서 경제활동에 성공하여 송금한 돈이 거의 아르메니아 경제를 지탱하고 있다. 유태인과 유사한 현상이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은 깨끗하고 세련된 도시다.1961년 처음 건설된 즈바르트노츠 국제공항도 있다. 이웃 나라인 아제르바이잔과 터키와는 국경선을 서로 넘지 못한다. 조지아를 거쳐서 이곳 나라에 들어올 수 있다. 우리도 아제르바이잔에서 바로 이웃에 있는 아르메니아를 조지아를 경유하여 넘어왔다. 기차도 국제선으로는 조지아로 가는 것만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고원의 도시 예레반 캐스케이드 전망대에서 아르메니아의 애련한 역사를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오늘은 아주 화사한 예레반 시가지가 시원하고 고운 풍경으로 전개된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 대사관 거리
예레반 도심 한 복판에서 만난 대사관 리는 울창한 나무들로 싱그럽다. 높은 담벽의 각국 대사관 앞에는 국기가 펄럭이고 경비원이 곳곳에 서 있다. 도로에는 많은 자동차 행렬이 이어지며, 정류장에는 시민들의 발걸음으로 복잡하다. 한국과의 관계는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자적인 외교권을 갖게 된 아르메니아는 이듬해인 1992년 2월 21일 우리나라와 수교에 합의했다. 북한과는 이보다 며칠 앞선 2월 13일에 외교관계를 맺었다. 주 아르메니아 한국 공관장은 러시아 대사가 겸임한다. 예레반에 거주하는 한국교민은 1997년 기준으로 30명이었으나 현재는 5명 밖에 없다. 예레반에서뿐만 아니라 코카서스 3국 여행 중 한번도 교민을 만나지 못했다. 먼 나라에서 걸어보는 대사관 거리는 긴장되면서도 뜻깊은 체험이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 시가지 건물
아르메니아 예레반 시내를 여행하며 본 건물 중에는 고풍스런 것도 있고, 현대적인 우람한 건물도 있다. 구 소련 잔재로 남은 건물은 도심 건물이 진한 벽돌 색상으로 육중한 느낌이다. 아치형 창문은 고전미를 자아낸다. 우리가 유숙한 호텔 바로 곁을 지나간다. 지금은 스위스 대통령이 이 나라에 와 있어서 다리 난간을 비롯한 곳곳에 스위스 국기가 나부낀다. 예레반 시가지 외곽의 건물 중에는 우람하고 아주 큰 현대풍의 아파트와 세련된 모양의 백화점 쇼핑몰이 인상적이다. 이곳은 부자 동네다. 예레반 학살 기념관으로 가면서 본 풍경이다.
*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기념관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기념관은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 시내의 야트막한 산에 세워져 있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 추모공원 길 양편에는 이곳을 방문한 프랑스, 러시아, 폴란드 국가 등에서 심은 기념식수가 많다. 기념관 입구에 다다르자 대학살 위령탑이 높게 세워져 있어 바라보는 시선이 소슬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은 소련 연방 시절이지만 아르메니아를 상징한다. 100여년 전의 아픈 역사를 드러내는 학살 추모 공원은 라잔 강 건너 서쪽 언덕 위의 기념공원은 아라랏산이 있는 남쪽을 향해 있다. 이곳은 터키 무슬림에 의해 학살당한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 추모 기념관이다.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아르메니아인들이 터키의 적국인 러시아를 도울 것 같은 기미를 보이자 오스만 제국의 강제 이주와 집단 학살이 실행되었다. 그 때 삶의 터전을 잃고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던 아르메니아 난민들이 아직도 외국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1965년 4월 24일 학살 50주년을 맞아 예레반에서 10만 명의 시민이 모여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의 공식적 인정과 위령탑 건설을 요구하여 세워졌다. 추모 공원의 위령탑은 1966년 착공되어 1967년 완공되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두 차례에 걸쳐 오스만 제국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을 대규모 학살했다. 터키의 다수파인 무슬림에 의해 터키 변두리 지역에 거주하던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들이 살해당했다. 한밤중에 조직적으로 터키 군대가 아르메니아인을 집단 학살했다. 이 사건을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이라고 부른다. 첫번째 학살은 1894년에서 1896년에 행해졌다. 오스만 제국에 있던 아르메니아인은 농민들과 상인들 구성체를 결성했는데 상인들은 무역이나 금융업으로 성공해 부유한 상인층이다. 건축가나 조폐관 등 중앙행정에 근무하는 사람도 많았다. 19세기에 접어들어 아르메니아 기독교인과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교인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아르메니아 일부 부유층은 외국과 교류하며 서구화 되어 갔기 때문이다. 1877년 러시아와 투르크 전쟁으로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대를 점령하면서 아르메니아인게 큰 변화가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아르메니아인 권리 향상을 위한 개혁을 약속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 안에서는 아르메니아인 민족운동이 시작되었고, 제국 밖에서는 아르메니아인 민족주의자들이 아르메니아인의 독립을 목표로 정당이 결성되었다. 일부는 비밀 지부를 설립하고, 오스만 관리를 노린 폭탄테러 활동을 했다. 러시아와 투르크 전쟁이 한창일 때 러시아 점령지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한 무슬림 난민들로부터 아르메니아 기독교인이 러시아 군대와 협력하면서 무슬림을 몰아낸다는 소문이 퍼졌다. 아르메니아인과 터키인 사이에서 적개심이 높아졌다.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들이 아르메니아인을 외국과 내통하고 테러를 벌이는 위험 분자로 여겼다. 1870년대의 러시아와 터키의 전쟁으로 터키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들은 결국 민족말살 정책으로 수십만 명이 학살 당한 것이다. 두번째 학살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에서 1916년에 걸쳐서 일어났다. 제1차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이 발생한 1894년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과 대규모 충돌이 일어나면서 터키는 아르메니아인을 강제 이주시켰다. 오스만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충돌을 진압했고 수많은 아르메니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아르메니아인 민족주의 정당은 국제사회에 호소했고, 유럽의 여러 나라는 오스만 제국의 대응을 비판했다. 1895년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은 공동으로 행정 개혁안을 제시하고, 그 이행을 오스만 제국에 통보했다. 1896년 아르메니아인 혁명 조직이 이스탄불의 은행을 습격했다. 결국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의 충돌이 다시 재연되었고, 제2차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로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군은 오스만 제국의 동부 국경을 점령했다. 이때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수천명은 러시아군으로 참가하거나, 게릴라 활동을 했다. 아르메니아인 게릴라로 인해 무슬림 마을이 습격당했었다. 아르메니아인 게릴라의 행동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반아르메니아인 감정을 일으켰다. 혼란에서 살아남은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럽이나 미국으로 이주했고, 오스만 제국 동부에 있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런 박해에 의해 사망한 아르메니아인의 수는 가장 적게 추산하는 터키 측 집계로 20만 명이고, 제일 많게 추산하는 아르메니아 측의 집계로 200만 명으로 추정한다. 19세기 말 오스만 제국 동부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 인구는 약 150만 명이라고 하는 통계가 있으며, 20년 후에 제1차 세계 대전 때 인구도 거의 같은 수로 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20세기 최초 현대의 첫 조직적 집단 학살사건으로 기록된다. 하지만 터키 정부에서는 강제 이주에 따른 희생이라고 주장할 뿐, 집단 학살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사망자 수도 두 나라가 다르게 말한다. 터키 측에서는 50만 명으로 주장하고, 아르메니아 측에서는 150만 명으로 주장한다. 통일과 진보위원회 통일파, 즉 청년 투르크당 정권이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이 전쟁 기간 동안 러시아에 동조할 것을 우려해 150만 명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특히 두번째 학살 사건에서는 조직적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이라고 하면 대개 두번째를 말한다. 1923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면서 성립한 터키 정부에서는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사건을 전쟁 중 강제 이주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즉 살해된 사람은 아르메니아 과격파의 테러로 전투원이나 러시아와 내통한 스파이뿐이라는 것이다. 반아르메니아 감정의 결과로서 발생한 현대적 민족문제라고 주장한다. 아르메니아 민족에 대한 탄압이 아니라, 대전 중에 오스만 제국 전체에서 희생된 사람들 중에서 아르메니아 민족도 일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집단 학살이 나치 독일이 유대인과 집시들을 탄압한 것과 같은 조직적 학살이었다고 주장하면서, 터키 국가가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 사건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터키의 대학살로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이곳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기념관이 설립된 것이다. 4월 24일은 1915년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이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일이어서, 매년 터키를 비판하는 국제적인 캠페인이 행해지고 있다. 미주에서는 아르메니아인을 동정하는 사람이 많다. 또한 프랑스 등 유럽 각국에서도 비난 결의를 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한 아르메니아는 터키령으로 되어 있는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사건은 영토 문제를 포함한 정치 문제로 번졌다. 2012년 프랑스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부인 금지법을 통과시키켰다. 이 법은 공개적으로 아르메니아 학살을 부인하는 행위에 대해 1년의 실형과 4만5000유로의 벌금을 부과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결국 아르메니아에 대한 정치 군사 문제를 중단했다. 우리 부부가 방문한 그날은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더욱 슬픔을 머금고 있었다. 바람도 심히 불어 모자와 옷깃이 펄럭인다. 긴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길 옆에는 무덤도 있다. 독립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1988년 아제르바이잔에서 살해된 아르메니아인들, 전쟁 중 학살된 양민을 추모하는 묘비다. 묘비이기도 한 12개의 석판이 원형으로 둘러싼 둥근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12개 석판은 지금은 터키 영토지만 예전 아르메니아의 12개 지방을 상징한다. 이곳을 탐방한 자국민과 외국인이 함께 서서 슬픈 영혼의 불꽃을 바라본다. 1991년 독립 후 만들어진 2층 박물관의 지하 전시실에는 그 참혹상이 잘 드러나 있는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을 증언하는 사진과 도서 등이다. 암매장 터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처절한 장면도 있다. 프랑스 가수가 노래로 아르메니아의 이 슬픈 역사를 알리기도 했다. 아르메니아는 그에게 감사 표시를 했다. 아르메니아의 슬픈 역사 한 단면을 본 현장이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 시가지 풍경
학살 기념관에서 아르메니아 공화국 광장으로 이동하며 본 예레반 시가지 풍경이다. 저녁 무렵이어서일까. 하늘에 검은 구름이 걸쳐 있다. 도로변에 스위스 국기가 펄럭인다. 그것은 지금 스위스 대통령이 아르메니아 방문 중이어서 그렇다. 예레반Eerevan은 아르메니아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다. 1981년 이래 아르메니아의 수도가 되었으며, 아르메니아 역사상 열세 번째 수도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인간이 살아온 도시 중 한 곳이기도 하다. 큰 아파트 건물 곁을 지난다. 깊은 역사의 도시라서 그런지 육중한 느낌이 드는 건물도 보인다. 예레반은 흐라즈단강을 끼고 발달한 도시이며, 아라쿠스 강의 지류가 시내를 흐른다. 계곡 절벽에 기대어 늘어선 건물도 있다. 예레반은 아르메니아의 행정, 문화, 산업의 중심지다. 기계 제조나 금속업, 포도주, 브랜디 제조, 담배 제조업이 발달해 있다. 2011년 년 통계로 예레반은 106만 0138명의 인구로 이는 아르메니아 공화국 인구의 35%에 해당하는 인구다. 우리가 유숙한 호텔 곁을 지난다. 호텔 앞에서는 다 보이지 않던 우람한 호텔 건물이 그 앞을 지나며 전경을 보여준다. 호텔 앞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분주히 왕래한다. 그 곁에는 술 생산 공장도 길게 자리하고 있다. 술 공장 앞에는 프랑스 대사관도 있다. 도심의 잔디 광장이 아름답다. 소련 시절 아르메니아를 위해 공이 컸던 동상도 건장하게 세워져 있다. 세계여행에서 명소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나라의 시가지 풍경을 보는 것도 내게는 아주 유익한 여정이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 공화국 광장
아르메니아 예레반 공화국 광장Republic Square of Yerevan은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 있는 중앙 도심 광장이다. 규모가 상당히 크고 넓다. 광장도 크고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이 웅장하다. 1924년 아르메니아의 건축가 알렉산더 타마니안이 설계하고 건축하여1929년에 완공되었다. 1952년까지 개발·확장되었다. 이 광장은 원래 구소련 지배 당시 공산주의 지도자였던 레닌의 이름을 따서 레닌 광장으로 불렸다. 광장에는 레닌 동상도 세워져 있었다. 아르메니아 독립 이후 동상은 철거되고, 그 자리에 큰 TV 모니터가 설치되었다. 오늘날은 아르메니아 예레반 시민들의 휴식처이며 또한 정치적인 집회, 기념행사, 문화행사 등이 개최되는 수도 예레반의 중심지다. 제일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역사 박물관 및 국립 미술관 건물이다. 바로 앞에는 춤추는 분수가 있어 장엄한 비경이다. 박물관 오른쪽에는 시계탑이 세워진 오각형 모양의 정부청사 건물이 아르메니아 국기를 휘날리며 우람하게 세워져 있다. 청사 건물을 양분하고 있는 시계탑은 모스크바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1941년 7월 예레반으로 옮겨 왔다. 지름은 4m, 큰 바늘의 길이는 188cm, 작은 바늘의 길이는 170cm, 매우 커서 광장 어느 곳에서든지 시간을 볼 수 있다. 그외 박물관 왼쪽의 외무성 건물, 오른쪽의 국토관리부, 중앙우체국, 메리어트 호텔, 에너지 천연자원 공사 건물 등이 광장을 에워 싸고 있어 더욱 아름다운 조형을 그려낸다. 이 건물들은 모두 현무암으로 된 기반 위에 다공질 탄산석회 침전물인 붉은 색 아르메니아 석회화로 만들어져서 고운 색상이다. 광장은 타원형 모양으로 되어 있다. 중앙에는 돌로 만든 타원형 모양의 무늬가 있다. 하늘 위에서 아르메니아 전통 융단이 내려온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만든 것이다. 고상한 문양과 색상이 아름답다. 광장을 중심으로 아보비안거리, 날반디안 거리, 티그란 메츠 거리, 바즈겐 자르샨 및 아미랸 거리가 뻗어 있다. 거리마다 노천 카페, 기념품 상가, 식당 등이 즐비하여 방문객을 맞이한다. 공화국 광장 주변의 유럽식 카페와 식당은 유럽의 향수를 자아낸다. 보는 것만으로도 낭만이 흐르는 거리 풍경이다. 우리 부부도 아름다운 광장 주변의 거리를 거닐었다. 아시아에서 온 우리는 이방인이다. 이곳 사람들은 우리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 보고, 우리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눈웃음으로 인사하며 때로는 영어로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매우 친절하고 소박한 사람들이다. 광장 근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어둔 밤 시간에 광장을 지나는데 우리의 버스 기사는 잠시 광장에서 멈추어 분수쇼를 보라고 한다. 얼마 전에 설치한 것인데 저 분수쇼를 보기 위해 아르메니아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화려한 조명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그리 낯선 것이 아닌데 순박한 삶의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저 분수쇼가 아주 신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역사 박물관을 배경으로 색색의 조명과 함께 물이 높이 솟구쳐 분무하며 춤춘다. 아르메니아 운전기사에게, 덤으로 보여준 풍경에 감사의 박수를 보냈다. 이국의 정겨운 밤 풍경이 가슴 깊이 훈훈하게 새겨지는 순간이다.
2014년 6월 4일 수요일 아르메니아 예레반, 에치미아진, 모스크바 공항
* 아르메니아 예레반 호텔에서 본 아라랏산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 방 창문을 열고 밖에 나가보니 멀리 아라랏산이 보인다. 구름 사이로 살짝 얼굴을 드러낸다. 아르메니아의 여행은 저 아라랏산을 보는 것이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어느 곳에서든 아라랏산이 보일 때는 대단히 반갑고 기쁘다. 호텔 베란다에서 예레반 시가지 건물 사이로터키령에 있는 5200여 미터의 고산 설봉을 본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오늘은 아르메니아 예레반 호텔을 떠나는 날이어서 이 아침 예레반 호텔이 주는 더욱 큰 선물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예레반을 떠나 에치미아진으로 향했다. 예레반 시가지를 달리는 동안에도 아라랏산이 보인다. 하늘 높이 솟구쳐 있어 비경이다.
* 아르메니아 에치미아진 시가지
아르메니아의 도시에치미아진EchmiadzinEčmiadzin은 아르메니아에서 네 번째 큰 도시다. BC 7세기경 세워졌다. 2~4세기에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였다. 140년경 파르티아의 왕 블로가세스 3세가 이곳을 수도로 정하고 바가르샤파트Vagarshapat로 이름 지었다. 1945년부터는 에치미아진으로 개명했다. 4세기에 창건한 에치미아진 대성당을 보기 위해서 이곳 도시에 왔다. 예레반에서 서쪽으로 20㎞ 떨어져 있으며 아락스 강이 흐르는 평원에 자리잡고 있다. 예레반에서 멀리 아라랏산의 설봉 원경을 보며 에치미아진에 왔다. 아르메니아 교회 주교좌의 소재지다. 300년 경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이곳은 아르메니아의 총대주교관구가 되었다. 344년 아르메니아의 수도는 바뀌었고 453년 대주교관구도 타지로 옮겨졌다가 1441년 총대주교 키라코스가 대주교좌를 에치미아진으로 되돌려 예전의 아르메니아 총대주교관구로서의 지위를 이어왔다. 과수원과 포도밭으로 이루어진 풍요로운 지역의 중심지이며 플라스틱, 포도주·통조림 등을 생산한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본 에치미아진 주변 들녘에는포도나무가 많았다. 그리고 아라랏산의 설봉이 우뚝 솟아 도시를 빛내고 있다.
* 아르메니아 에치미아진 성당
에치미아진 성당Echmiadzin Cathedral은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Yerevan에서 서쪽으로 20㎞ 떨어져 있는 에치미아진 시에 있다. 이 도시의 첫 교회 자리에 오늘날의 성당이 7세기에 세워졌으며 1441년 이후 많은 부분이 개조되었다. 예치미아진은 아르메니아의 바티칸으로 불리우며 2~4세기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였다. 5세기 경의 아르메니아 문서에 의하면, 성 그레고리Saint Gregory는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가 금 망치로 땅을 치는 환상을 본 신비로운 체험을 한 후 왕에게 알렸고 왕은 왕궁 옆인 그 자리에 성당을 설립했다고 한다.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제정한 301~303년에 성 그레고리가 게시를 받은 것을 계기로 건립된 것이다. 그레고리는 아르메니아에 그리스도를 전한 아르메니아 귀족의 후예다. 카파도치아에서 자라고 280년경 고국으로 돌아가고, 같은 무렵 아르메니아에 귀국한 국왕 티리다테스 3세의 개종에 성공하였다. 그레고리에 의해서 아르메니아는 4세기 초기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서 수용된 것이다. 아르메니아 성당 최초로 국가가 합법적으로 공인하여 세운 세계 최초의 성당이다. 성당 이름도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곳獨生子’을 뜻하는 에치미아진 성당으로 지었다.1945년까지 바가르샤파트로 불렸던 이곳 도시 이름도 에치미아진 성당 이름을 따서 에치미아진으로 변경되었다. 아르메니아 그레고리 정교회의 본산이다. 6세기에 설립되어 10세기 이래로 에치미아진이라 불려온 수도원은 여러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10m 높이의 벽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당은 입구에서부터 매우 웅장한 자태다. 입장문의 높은 벽면에 그레고리와 왕이 마주하여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부조상이 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상당히 넓은 자락이다. 지금은 이 수도원에 대학과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중앙 통로의 넓은 길 양편으로 곳곳에 부속 건물이 많다. 검은 의상의 성직자 신부도 보았다. 아침 햇살이 내려 더욱 성스러운 빛이 감도는 성역이다. 성당 건물 사이로 보이는 아라랏산 설봉이 장관이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덤으로 보는 비경이다. 지금까지 아르메니아 곳곳에서 보았던 아라랏산의 그 어떤 경관보다 아주 뚜렷하게 보인다. 안으로 깊숙히 걸어들어 가니 성당 본당 건물이 있다. 고대 건축의 정수이자 기독교 건축양식의 원형으로 꼽히며, 성당 건축발달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성당이다. 종탑으로 우뚝 솟은 본당 건물은 공사 중이서 쇠막대기로 둘러싸여 있다. 성당 문 바로 옆에는 성작자들의 무덤 석관도 몇 개 있다. 최초 설립 당시 중앙부가 돔으로 되어 있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건립되었으나, 480년 바실리카 양식의 건축물이 철거되고, 십자가형 모양의 성당으로 신축되었다. 618년에는 목조 돔이 석조 돔으로 개조되었다. 석조 돔은 4개의 거대한 기둥에 의해 떠받쳐져 있으며, 이 기둥들은 아케이드를 통해 외부 벽과 연결되어 있다. 17세기 중반 건립된 3단으로 된 성당 종탑이 있다. 성당 동쪽 끝에 있는 반원형 건물은 지붕이 둥글고 화려하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2001년에는 아르메니아 건국 700주년을 기념하여 대성당에 조형물을 건립하였다. 성 그레고리 신부도 조각되어 있다. 지하실에는 역대 아르메니아 성직자들의 무덤이 있다. 성당 바로 서쪽에는 총대주교 사택 도입을 주도했던 성 티리다테스의 이름에서 유래한 성 티리다테스 문이, 북동쪽에는 영성 아카데미가, 북쪽에는 아르메니아 특유의 돌 십자가상인 카츠카르가 여러 개 세워져 있다.성당 박물관에는 아르메니아 중세시대의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었으나, 최근 예레반에 있는 고문서 박물관인 마테나다란Matenadaran으로 이전되었다.노아방주 배 조각과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로마 병사의 사모창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보기 위해 왔는데 아침 이른 시간이어서 잠시 에치미아진 고고 유적지를 보고 다시 이곳 박물관으로 오기로 했다. 아르메니아 기독교 역사가 깊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알리는 위대한 성지다.
* 아르메니아 에치미아진 성당에서 본 아라랏산
에치미아진 성당 안에서 본당으로 가는 길에 본아라랏산Mountains of Ararat은 아주 장엄했다. 노아의 방주가 머문 산으로, 구체적으로 어느 산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지만 이곳 아르메니아에서 저 산은 매우 성스러운 산이다. 그래서 저 산을 조망하는 것은 성경역사의 한 단면을 보는 것으로 큰 의미가 있다. 터어키 반호의 북동 100km에 위치해 있다. 연중 눈을 덮고 있는 쌍봉의 사화산다. 대 아라랏은 5200여m, 소 아라랏은 3000여m로 두 봉우리는 약 10km 떨어져 있다. 터어키인은 이 산을 아그리 다그, 즉 괴로운 산이라 하여 봉우리 정복이 어렵다고 한다. 사실 창세기 6장에서 9장에 걸친 노아의 홍수 설화는 일관성 있는 이야기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배에 있던 모든 들짐승과 집짐승들 생각이 나서 바람을 일으키시니 물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땅 밑 큰 물줄기와 하늘 구멍이 막혀 하늘에서 내리던 비가 멎었다. 그리하여 땅에서 물이 줄어들기 시작한지 150일이 되던 날인 7월17일 배는 마침내 아라랏산 등마루에 머물렀다. 방주에 실려진 짐승들 이야기도 홍수의 원인이나 기간 등도 중복과 모순이 있다. 구약성서가 전해진 뒤로 많은 사람들이 홍수 설화를 읽고 노아의 방주에 관심을 가졌다. 이 설화를 테마로 그린 화가도 많고 교회당의 장식으로 노아의 방주와 비둘기를 조각한 조각품도 많다. 노아의 방주가 최후로 도착했다고 하는 아라랏산은 흑해와 카스피해의 두 바다 사이에 아르메니아지방이라고 하는 고원지대에 있다는 것이다. 높은 봉우리가 많고, 이것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강이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이 되어 이라크 평야를 적셔주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아르메니아 지방에 있는 어느 높은 산이 아라랏산이라고 한다. 아르메니아 지방은 소련, 터키, 이란의 세 나라로 갈라져 있는데, 아라랏산은 이 3국 국경에 솟아있는 화산이며 터키령에 있다. 그 최고봉은 5,156미터다. 아르메니아 지방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옛날부터 이 산마루에 노아의 방주가 남아 있다고 믿고 있으며, 이 산에는 아무도 오를 수 없는 신성한 산으로 여겨 왔다.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전설의 아라랏산에 오르려 고 했다. 1929년에는 독일 의학자이며 등산가인 파로트가 이 아라랏산에 올라가서 산마루에서 노아의 방주가 앉을만한 넓은 대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방주를 실제로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오늘 에치미아진 성당을 보러 온 것인데, 성당 안에서 아라랏산의 설봉을 아주 뚜렷하게 본 것은 큰 선물을 받은 것이다. 아르메니아에 와서 예레반을 비롯한 곳곳에서 아라랏산이 조망 되었지만 지금처럼 저렇게 잘 보이진 않았다. 구름을 깔고 앉은 높은 매우 설봉이 웅장하여, 성경에서의 노아방주가 머물렀다는 함성을 외치듯 거룩한 빛을 품고 있다.
* 아르메니아 즈바르트노츠 고고 유적지
즈바르트노츠Zvartnots의 고고 유적지는 수도원이 있던 곳이다. 수도원 건축은 7세기 중반 성 네르세스 3세가 시작했으나, 652년 동방교회의 지배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658년에 지배권을 회복한 네르세스 3세는 부속 건물과 성벽을 쌓아 662년에 수도원을 완공했다. 즈바르트노츠는 전사란 뜻이다. 10세기에 지진으로 붕괴되어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고 수도원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즈바르트노츠의 고고 유적지는 아르메니아에 정착한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건축 당시부터 아르메니아의 교회정신과 예술작품의 혁신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뛰어난 건축 양식은 수백 년에 걸쳐 주변 지역의 교회 설계와 건축을 하는 데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건물 중앙에 돔이 있고, 십자형 홀이 나 있는 건축 양식은 에치미아진Echmiatsin의 성당과 교회와 함께 고고학적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20세기 초 건축가 토로스 토라마니안이 발견하여 첫 번째 재건 작업을 시행했다.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어 함부로 복원을 하지는 못 한다. 앙상한 기둥 뼈대만 곳곳에 세워져 있다. 비록 허물어진 형상이지만 아주 아름다운 미적 조형이다. 이곳에서 성 그레고리와 트리다테스 3세 왕이 만났다. 트리다테스 3세 때에는 성그레고리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였다. 기독교를 전파했다는 죄목으로 그레고리가 15년 간 갇힌 지하 감옥도 있다. 캄캄하고 가파른 계단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또한 고고 유적지에서는 아라랏산이 잘 보인다. 노아의 방주가 멈추었다는 산이다. 고산 설봉의 아라랏산과 함께 그윽한 풍경의 유적지다.
* 아르메니아 에치미아진 고고 유적지에서 아라랏산 조망
아르메니아 에치미아진 고고 유적지에서 본 아라랏산 조망이다. 아르메니아에 와서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저 산을 조망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아라랏산은 그 어느 곳에서 본 아라랏산보다 선명하고 자세히 조망된다. 아라랏산 유적지 입구에서부터 하늘 높이 솟구친 아라랏산 설봉이 장관이다. 큰 아라랏산Greater Ararat은 5,137m, 작은 아라랏산은 3,896m이고, 두 봉우리는 약 10km 떨어져 있다. 대아라랏과 소아라랏 산정에서부터 흐르는 시냇물은 티그리스와 유브라데강으로 흘러 들어 간다. 아라랏은 아르메니아 지방에 있는 나라 이름인데, 성경에서는 아라랏을 아르메니아 땅The land of Armenia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던 산이라 하여 관심 받고 있는 산이다. 아르메니아 지방은 소련, 터키, 이란의 세 나라로 갈라져 있는데, 아라랏산은 이 3국 국경에 솟아있는 화산이며 현재는 터키령에 있다. 터어키인은 이 산을 '아그리다' 즉 '험한 산'이라 부른다. 그 만큼 이 산에 오르기가 어려움을 암시한다. 연중 눈 속에 파묻힌쌍봉의 사화산이다. 원래 산의 중앙에는 알굴이라는 동네가 있었는데 지진으로 일부가 파괴되어 매몰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노아가 그 동리에서 살았고, 그 아래에 노아의 분묘가 있다고 전해진다. 아르메니아 지방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옛날부터 이 산마루에 노아의 방 주가 남아있다고 믿고 있으며,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전설의 산 아라랏에 오르려고 했지만 이 산에는 아무도 오를 수 없는 신성한 산으로 여기고 있다. 1929년에는 독일 의학자이며 등산가인 파로트가 이 아라랏산에 올라가서 산마루에서 노아의 방주가 앉을만한 넓은 대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방주를 실제로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경에서 보았던 노아의 방주가 저 산에 걸쳐 멈추었다고 하니 진실 여부를 떠나서 매우 가슴 벅찬 광경의 산이다. 고고 유적지 앞에서도 보고, 뒤뜰에서도 보며 성경역사의 한 단면을 고스란히 담아왔다. 에치미아진 시가지를 달려 다시 에치미아진 성당으로 갔다. 이곳에서 조망한 아라랏산에 멈춘 노아 방주의 배 조각이 성당 박물관에 있기 때문이다. 성경 속을 오가듯 오래 전의 시간 여행이다.
* 아르메니아 에치미아진 성당 박물관
조금 전에 이곳 성당에 왔을 때는 너무 이른 아침 시간이어서 박물관을 입장하지 못 했다. 그래서 고고 유적지를 둘러보고 지금은 박물관을 보기 위해 다시 이곳 성당에 온 것이다. 고고 유적지에서 아라랏산을 조망했다. 노아의 방주가 멈추었다는 그 산이다. 박물관에는 아라랏산에 걸쳐 있던 노아의 방주 배 조각과 예수님을 찌른 실제의 창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에 꼭 보아야 되어서 오픈 시간을 기다렸다가 다시 에치미아진 성당에 왔다. 아라랏산에 있는 노아의 방주에서 떼어온 배의 조각을 돌판 위에 붙여 놓은 십자가가 있다. 노아의 방주였던 배의 조각이 나무 화석이 되어 유리 안에 전시되어 있다. 또한 로마 병사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사모창도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성직자들이 행사 때 착용하는 모자, 의상, 지팡이, 액세서리 등이 진열된 보관실도 있다.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성 그레고리의 성해 가운데 손 부분이 조각되어 보관한 것도 있다. 지하실에는 역대 아르메니아 성직자들의 무덤이 있다. 이곳에는 또 아르메니아 중세시대의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었으나, 최근 예레반에 있는 고문서 박물관인 마테나다란Matenadaran으로 이전되었다. 나는 여기 오기 전 마테나다란 고문서 박물관에서 그런 것들을 실제로 보았다. 이곳에도 오래된 성경과 성경그림책이 약간 남아 있어서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사진을 못 찍게 하더니 나중에는 박물관 담당자가 와서 사진을 찍도록 허락한다. 아시아 먼 나라에서 온 여행객들에게 큰 배려를 해준 것이다. 눈으로 보고, 가슴에 새기고, 사진에까지 담아온 노아의 방주 뱃조각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 죽음을 확인까지 하던 잔인한 창은 성경 역사의 산 증거물로, 내게는 훌륭한 소장자료가 될 것이다.
* 아르메니아 현지 중식
아르메니아에서 먹는 마지막 식사다. 식당 앞에 체리나무가 몇 그루 있다. 푸른 나뭇잎 사이로 붉게 맺힌 체리가 시선을 끈다. 이곳 여행 중 참 많이 먹은 과일이다. 우리부부는 포도주를 주문하여 일행과 함께 마지막 이별 건배를 했다. 이 식당은 장애인들이 운영하는 식당이어서 모든 것을 손수 만들어 사용한다. 포도주도 직접 담근 것이란다. 지금까지 먹어 본 그 어느 포도주보다 향이 진하고 맛이 좋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아르메니아 국기가 걸린 정원을 바라보며 맛있는 아르메니아 현지 식사를 했다. 장애인들이 만들어 장식해 놓은 정원의 작품들도 아름답다. 코카서스 3국 여행은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들이지만 우람한 자연과 순박한 들녘, 그리고 아낌없이 정성껏 베풀어주는 인정으로 훈훈한 여정이다. 마음 깊이 품고 가리라. 공항으로 가는 길에 본 마지막 아르메니아의 하늘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파란 하늘과 맞닿은 우람한 코카서스 산맥 위에 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올라 먼 나라에 온 아시아의 이방인에게 뜨거운 풍경을 선사한다. 먼 후일 우람한 산이 그리울 때, 소박한 들녘이 그리울 때, 인정 많은 사람들이 그리울 때, 나는 오늘을 회억하며 행복하리라.
* 아르메니아 예레반 공항 출발
아르메니아 예레반 공항 외형이 참 아름답다. 곡선 조형과 색상이 곱다. 1961년 처음 건설된 즈바르트노츠 국제공항이다. 공항 앞에는 푸른 잔디가 융단처럼 깔려 있어 싱그럽다. 예레반 시가지가 훤히 보이고 상공에는 하얀 구름이 비경이다. 예레반 공항은 아담하고 예쁘다. 한국어를 전공했다는, 예레반 대학에서 한국어를 강의한다는 아르메니아 현지 여인 가이드와 작별 인사를 했다. 정성껏 최선을 다해 안전하게, 친절하게 운전해주던 남자 현지인 기사와도 작별인사를 했다. 가슴 훈훈한 정이 서려 고운 추억으로 남을 사람들이다. 공항 창가에 앉아서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기다렸다. 낮 2시 50분 SU 1861, 러시아 항공을 탑승할 것이다. 장엄한 코카서스 산맥 능선에 흰구름이 길게 드러누워 있다. 이것이 코카서스 산맥이라고 외치듯 진풍경을 선사한다. 비행기는 정시에 이륙했다. 힘차게 솟구쳐 오를 때 아르메니아 예레반 상공은 나무와 푸른 들녘,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집들이 고운 풍경을 자아낸다.
* 러시아 모스크바 공항에서 인천행 환승
아르메니아 예레반에서오후 2시 50분에 탑승한 비행기가 모스크바 공항에 오후 5시 45분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와 아르메니아수도 예레반은 시차가 없다. 이곳 모스크바 공항에서 오후 9시 40분, Su 250 러시아 항공으로 인천행 비행기를 환승할 것이다. 날씨가 화창하다. 공항 주변은 울창한 숲이다. 낯익은 공항이다. 우리 부부는 6번 째 오는 모스크바 공항이다. 환승 대기로 공항 창가에서 이륙 풍경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짧은 간격으로 연이어 이륙하여 날아가는 비행기들이 진풍경이다. 자국기 러시아 항공 AEROFLOT 비행기가 많이 들어오고 나간다. 공항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오리는 D 터미널 25번 게이트에서 탑승한다. 여기는 북국이다. 저녁 9시가 되어도 해가 지지 않고 있다. 석양이 약간 드리울 뿐이다. 겨우 노을만 하늘을 물들인다. 우리나라는 저녁 9시면 캄캄한 밤인데 말이다. 신비로운 이국의 풍경을 본다. 정시에 비행기에 탑승했다. 저녁 9시 55분 비행기가 공항 활주로로 이동할 때 모스크바의 일몰이 비경이다. 푸른 숲 위로 붉은 태양이 내려앉는 순간이다. 저녁 10시가 되어서야 해가 떨어졌다. 비행기가 힘차가 날아서 창공으로 차오르고 하늘에는 길게 석양을 드리워 있다. 내 조국 인천공항으로 밤새 날아갈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인천까지 8시간 30분이라는 긴 비행시간이지만 길을 내어주는 하늘에게, 날아가는 비행기에게, 나를 기다리는 내 조국에게 감사하여서 행복한 시간이다.
2014년 6월 5일 목요일
* 인천공항 도착
비행기 모니터에 인천공항에 가까워짐을 알리는 항로가 뜬다. 둥근 지구의 한 도막을 길게 날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대한민국 인천공항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오전 11시 10분 비행기는 정시에 착륙했다. 서둘러 짐을 찾고 나왔다. 언제나 외국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올 때면 포근하게 반겨주는 내 조국이 참으로 고맙다. 코카서스 3국,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이지만 카스피해를 눈앞에서 본 것, 우람한 코카서스 산맥을 마주 서서 호흡한 것, 예수가 오기 전 기독교가 전파 되었다는 유적을 본 것 등은 세계여행이 주는 아주 보람되고 뜻깊은 선물이다. 순박하고 천진한 나라들, 아직 안정되지 못하여 더러는 힘들지만 열심히 일어서는 모습에서 찬연한 빛을 본 여정이다. 낯선 국가들이어서 우리나라에서는 잘 선택받지 못하는 여행국가들이다. 나는 문학기행 탐방록으로, 기행시로 써서 코카서스 3국을 알릴 것이다. 그것이 시인의 행복한 사명이다. 두 아들에게 귀국을 알리고 집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