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붓다가 되는게 아니고 우주의 본성(본체)을 보는 것
지금까지의 불교, 그러니까 지금까지 그 많은 나라의 불교,
우리나라만 봐도 많은 종파가 있지요.
역사적으로 볼 때 많은 종파가 생겼다가 없어졌다가 생겼다가 없어졌다가
해왔습니다. 그 많은 종파 모두 다 수행법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선불교(禪佛敎)는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
저기 남방의 태국이나 미얀마 쪽은 위빠사나라 해가지고 지관수행(사념처수행),
그리고 티베트불교는 밀교로서 다라니(진언)를 위주로 하는 삼밀수행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어떤 종파의 수행법도 자력입니다.
다만 정토종에서는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에 의지해서 칭명을 하지요.
그러나 우리 영산불교와 비교해 볼 때 상당히 다릅니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불교는 깨달음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 말도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깨달으면 곧 붓다가 된 줄로 압니다.
혹은 깨달아서 보림을 완성하면 붓다가 된 줄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거의 많은 불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산불교에서는 ‘그것은 시작이다’고 주장합니다. 시작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우주의 본성(본체)을 보는 것입니다.
마음자리를 보는 것입니다.
공(空), 그 본연의 모습을 보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깨닫는 것은 이제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겁생으로 다겁생으로 살아오면서 지은 업이 있잖아요.
그것이 장애가 되어서 업장이 됩니다. 업을 짓는 원인이 있잖아요.
탐진치 삼독번뇌라든지, 또 지으면서 쌓인 탁한 기들이 있습니다.
악을 행하고, 그것이 또 습이 되어서 삼업으로 살아오는 도중에
그 많은 양의 탁한 기가 우리의 영혼체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탁한 기와 탐진 삼독 번뇌의 뿌리인 업장을 털끝만큼도 남김없이 정화하고
진멸해야 거기가 붓다의 자리랍니다.
그래가지고도 안 됩니다. 거기까지 가도 붓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우주적인 구원력에 의해서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됩니다.
그러니까 깨달으면 다 되는 줄로 알고 있는데 절대로 그것이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깨달은 사람들이 ‘이제 나는 궁극에 도달했다.
구경의 목표에 나는 왔구나’해가지고 법상에 올라 부처인 양 법을 설하고,
이것을 모르는 눈먼 많은 신도 분들이 부처님처럼 대접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인연에 빠져서 음계(婬戒)를 파하기도 합니다.
슬픈 일입니다. 내가《21세기 붓다의 메시지Ⅰ》권에
“청정수 한 컵에다가 똥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깨달음은 이제 시작이오. 음계를 선지해야 됩니다”
하는 말을 대한일보, 현대불교신문 지상을 통해서, 또 책에다가 많이 강조했지요.
그런데 간과(看過)합니다. ‘깨달아버렸는데, 부처가 다 되어버렸는데
계율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경전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라고 하거든요.
현실은 이렇습니다.
‘깨달은 후에 진짜 공부를 해야 된다. 나(我)없는 수행을 해야 된다.
그래서 두타행이 제일이니라.
그리해서 나(我)라고 하는 착(着), 이 몸뚱이에 대하여 나(我)라고 하는 착을
떼어버려야 거기가 이제 비로소 아라한이니라.’
그런데 그 아라한까지 가는 길도 대단히 어렵습니다.
자력으로는 대단히 어려워. 깨달음까지도 가기 어려워.
우리 영산불교 신도 분들은 많은 법문을 들어서 아시겠지만,
오늘 처음 스님이 이 나라 불자를 향해, 세계 불자를 향해서
법문을 하기 때문에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출처:2010년 자재 만현 큰스님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