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함흥(咸興)의 옛 모습
조선후기 함흥지도( 1872년 지방지에 실린 함흥읍성)
함흥은 북쪽으로 반룡산이 우뚝 서있고 서쪽으로는 성천강이 흐르며 남쪽으로 내려가면 동해바가가 있다.반룡산은 1977년 동흥산으로 바뀌었다. 음성은 북쪽으로는 반룡산 끝자락의 능선을 의지하고 있고, 서쪽으로 성천강 가까이에 붙은 평지에 읍치를 형성하고 있다 평면의 정확한 형태를 알수는 없지만 윗쪽은 둥글고 아래쪽은 각이 진 대략 말바굽강은 형태를 하고 있다.
남문은 2층 문루를 돗서북 3문은 단층문루를하고 있다. 문옆으로 는 달려있는 누각이 보이는데 아마도 성문를 보호가는 공격시설이 아닐까 싶다. 남문은 2츹 문루를 , 동서북 3분은 단층 문루를 하고 있다. 문 옆으로 딸려 있는 누각이 보이는데 아마도 성문을 보호하는 시설이 아닐가 한다
함흥읍성은 웅대한 읍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4대문의 모습과 함께 수구문의 모습도 보이고, 치성과 암문처럼 보이는 문이 많은 것이 보인다. 남문인 남화문 아래에 이성계가 머물렀던 함흥본궁의 모습도 보인다.
함흥읍성의 경우 전체적으로 평산성의 구조로 북으로는 산의 지형을 이용하고 서측은 성천강의 자연적 해자를 이용했으며 동측과 남측은 자연하천을 이용함으로 방어에 유리하게 조성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으로 동해바다와 접해있어서 남과 동측으로 공격이 어렵고 서측은 강의 지류때문에 힘이 든다. 남은 곳은 북측뿐인데 북측을 중점적으로 방어를 하게 축성한 것을 알 수 있다. 북측에는 탕산루와 구천각이 방어의 중심아되었다
함흥읍성은 1453년(단종 원년)에 축성된 것인데 이후에 개축을 계속하여 1872년에도 문루와 성벽이 선명하게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남문 밑에 시장이 있으며, 함흥은 함경도 감영이 있었기 때문에 남문을 지나 중영과 객사가 보인다. 함경도의 경우 중국과 접한 관계로 병영이 두개나 있었으며 이를 통제하는 곳이 함흥의 감영이다. 함경 남병영이 북청이며 함경 북병영이 경성이었다.
중영을 지나고 포정문을 지나면 함경도 관찰사가 근무하는 선화당이있다. 선화당을 가기전에 보이는 영리청과 비장청, 진상청(지방특산물을 임금에게 올려보내는 일을 맡아보던 곳), 도리청(세무를 담당해보던 곳), 영고청(관찰사의 옷과 음식을 마련하던 곳), 심약청(관찰사의 보약을 마련하던 곳)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선화당이 남아있으며 북한의 국가지정문화재국보급 제109호로 지정되어있다
남문 밖에는 이성계의 생가로 퇴위후 머물던 함흥차사로 유명한 함흥 본궁의 모습이 보이고 남문인 남화문을 들어 서면 함흥 객사인 함성관이 있다. 관찰사가 머물던 선화당과 달리 함흥부사가 근무하는 함흥부 동헌은 서문 인접한 곳에 치우쳐져 있다, 선화당 좌측에는 향교가 위치하여 읍성 안에 향교가 위치하고 있다. 서문과 북문 사이에 낙민루가 있고 그 앞의 성천강에는 만세교가 놓여 있다
함흥읍도
남문의 경우 2층 누각이며 홍예문으로 남문 주위에 있는 치성이 돌출되어 그려져 있는데 일반적인 치성과 달리 작은 구멍이 뚤러져 있는 총안이 있어 수원화성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음을 알 수 있다. 함흥읍성 치성의 경우 수원화성의 축성(1796년)되고 나서 치성을 포루로 개축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개의 방어시설이 보인다. 하나는 서문옆에 있는 낙민루로 성천강을 건너는 유일한 다리(만세교)가 있는 곳을 막는 포루이고 다른하나는 북측에 있는 탕산루로 돌출되게 그려져 있다. 탕산루 뒤에 보이는 구천각의 경우 장대헌 건물로 현재도 남아있다(복원된것으로보인다)
함흥읍성은 산성과 같이 지형을 따라서 축성한 것을 알 수 있다. 객사와 동헌 선화당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남문 밑에 아주 많은 민가들이 형성되어져 있는데 당시에도 함흥의 규모를 알 수 있다
함흥내외십경도
장대와 치성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으며 4대문에는 옹성이 없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남문 주위에 적대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북측에 있는 탕산루의 경우 아주 길게 이어져 방어를 하는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함경남도 함흥시 지도
함흥 시가도
함응은 현재 인구가 대략 80만에 이르는 북한의 제 2도시이다 일제 시대 화학단지로 육성하여 공업도시로 발전했기 때문이다.전쟁중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나 재건되어 북한의 중요한 공업 도시이다 조선 창업군주 이성계의 본거지로 함흥 본궁이 있있는곳이기도 한다. 고려말까지만하여도 여진족 많이 살던 삭풍이 몰아치는 변방의 이미지가 강하나 북한에서 개성과 비슷한 온난한 지역이다.
서문 밖의 시장 모습(Macrae D.M)
함흥읍성의 서쪽 부분으로 오른쪽 잘린 부분은 성천강이 흐흐고 있었을 것이고 멀리 성벅 두개의 누각은 서문과 서문을 방어 하는 시설일 것이다. 북방이 국방에 중요하다보니 여러 성곽의 장잠을 수용하여 축성한 듯 하다.
성벽의 단면도도 특이한데 마치 일본성의 단면과 흡사하다. 그렇게 흔하지 않은 형태를 하고 잇다 성벽 바깥으로는 시장이 아주 커서 발디딜 틈이 없어보인다.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캐나다 출신의 맥레(Macrae DM) 선교사가 찍은 사진이다
1940년대 함흥시장 관북의 물산집산지로 우리나라 3대 정기시장으로 유명했다
1910년 경의 함흥 읍성 남문에서 바라본 함흥객사인 함산관과 시내 풍경
남문에서 바라본 객사인 함산관은 읍성에서 중요한 시설이다, 왕이 대리에 파견하는 관리가 머무는 곳이고 중앙에 솟은 부분에는 왕의 궐패를 모시놓고 음력 1일과 15일에 의식을 홀렸다. 앞의 2층 누각은 객사의 정문인 포정문이다 오른쪽 멀리 큰 2층 누각이 보이는데 함흥향교의 정문으로 추정된다
조선말의 함흥 읍성 남문인 남화문(南華門)과 종각 1910년 이후의 사진으로 보인다
함흥 읍성 남문은 2층 문루와 별도로 옆에 종각이 있었다. 체성은 4~5m정도로 성벽에 여장은 없는 상태인 것 같다, 옆의 종루는 남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오 보인다. 성벽 앞쪽으로 낮은 지붕의 상점들이 있었다. 일제가 병합후 통행에 불편을 준다고 하여 성벽을 부수고 도로를 내거나 집을 지었는데 함흥읍성도 같은 운명을 격어야 했다.
함흥 읍성의 북문-성천강의로 나가는 문이다
함흥읍도
위 왼쪽은 함흥감영의 정문인 포정문이다 감영은 함흥에 있다가 1600년에 영흥으로 이전하였다
오른족은 함흥향교의 정문인데 향교는 소실된 상태이다 아래는 선화당이다
함흥본궁(咸興本宮) 풍패루(風沛樓)와 정전으로 들어가는 삼문(1910년대)
누각 앞 연못에 비친 풍패루 그림자는 함흥의 대표적 절경으로 꼽혔다. 태조 이성계는 왕에 오른 뒤 조상들이 살던 집터인 이곳에 고조 할아버지 목조(穆祖) 등 조상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자신의 아들끼리 죽고 죽이는 ‘왕자의 난’을 겪은 그는 퇴위한 뒤 한때 이곳에 거주했는데, 이때부터 ‘본궁(本宮)’으로 불렸다.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도 여기서 시작됐다. 함흥본궁은 북한에서 보물 45호로 지정하고 있다
영흥본궁 정전
환조대왕(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살던 곳이며 태조고황제와 신덕고황후의 위폐를 종안한 곳이고 태조가 별을 제사한 곳이라고도 한다.서기 1666년부터 본궁이라 불렸다 함남 영흥군 순녕면 소재
함흥본궁 전경
함흥 본궁
함흥본궁 정전 전랑
함흥본궁 정전 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