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02
6월28일[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1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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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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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vy72Mj7rDQ8
[서울대교구 김준휘 토마스데 아퀴노(논현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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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은혜로운 만남>
직장생활, 수도생활을 위해 일찌감치 고향을 떠났던 저는 늘 합숙소, 내무반, 기숙사, 수도원 등 공동 생활시설에서 살아왔습니다.
요즘은 훨씬 덜한데 과거 집단 생활시설은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전염성 강한 병균, 특히 피부질환 병균 앞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한번은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기숙사에 원인도, 증세도 잘 파악되지 않는 강력한 피부병이 침입했습니다. 아마도 새로 입소한 아이를 통해 들어온 듯 했습니다.
당시 피부병이 지닌 특징은 신속한 전염성, 지독한 간지럼 증세이었습니다. 저도 예외 없이 전염되었는데, 정말이지 죽는 줄 알았습니다. 피부병은 즉시 온 몸으로 번졌습니다. 밤낮없이 긁어 댔는데, 특히 간지럼증세는 밤이 되면 더 심해졌습니다. 자다가 자신도 모르게 긁다 보니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습니다.
다양한 피부질환을 겪어왔던 저이기에,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 환자들의 심정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나병은 오늘날의 나병(한센병)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잘 치료되지 않는 악성 피부병들을 통칭해서 나병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에야 워낙 의술이 발달되어 아무리 강한 악성 피부병이라 할지라도 신속하게 치료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당시 악성 피부병은 치명적이었습니다. 마땅한 치료제가 없다보니 효능도 제대로 검증도 안 된 다양한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다 더 증세가 악화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습니다.
당시 나병 환자들이 겪었던 고통 중에 병의 증세가 가져다주는 고통도 큰 것이었지만, 더 큰 고통이 있었습니다. 율법규정에 따른 격리와 추방으로 인한 고통이었습니다.
당시 나병진단은 ‘추방명령서’ 혹은 ‘사망진단서’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나병 진단과 동시에 환자들은 즉시 집을 떠나 성 밖으로 나가 살아야했습니다. 그들은 인적이 드믄 숲속에서, 어두컴컴한 토굴 속에서 짐승처럼 살아갔습니다.
누군가로부터의 치료나 보살핌은 기대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살아있었지만 이미 죽은 사람들처럼 그렇게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던, 삶 전체가 우울한 회색빛이었던 한 나병환자가 오늘 기적적으로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 나병환자가 지닌 특징은 적극성이었습니다. 당시 수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습니다만 유독 이 환자 한명만이 강한 적극성을 지녔습니다.
동시에 그에게는 예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강렬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꼭 치유되어 제대로 된 인간으로 살아보고 싶은 강한 원의가 있었습니다. 그 강한 원의는 당시 나병환자들이 넘어서는 안 되는 한계선, 저지선마저 넘게 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율법의 규정 상 군중들 사이로 들어오는 것이 절대 금지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앞 뒤 정황이 살필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죽으면 죽지!’ 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희망을 안고, 체면도 다 던져버리고, 예수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습니다.
엎드려 절하면서 외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오 복음 8장 2절) 그를 대견스럽게 바라보시던 예수님께서 이윽고 행동을 개시하십니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오 복음 8장 3절)
하루하루 지옥과도 같은 삶을 마지못해 살아가던 나병환자였습니다. 치유, 회복, 귀향 같은 긍정적인 측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그의 일상이었는데, 비참하고 어두운 그의 삶에 한 줄기 강렬한 빛이 찾아온 것입니다.
은혜로운 예수님과의 만남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우리도 기억해야겠습니다.
나병환자의 적극성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꼭 치유되어 사람답게 살아보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그에게 구원을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꼭 자신을 치유시킬 능력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확신이 그를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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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gyCIFlrvA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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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것을 하늘도 원하게 할 수만 있다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치유해주시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나병 환자가 어떻게 끝까지 믿고 희망하며 주님 앞에까지 나아왔는지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는 치유되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그리스도께서도 원하시기를 바랐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무언가 좋은 것을 원하게 되는 것도 하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못 할 게 없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리스도교가 더는 로마에서 박해받지 않게 하였습니다. 바로 통일 전쟁에서 막센티우스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임박하자 콘스탄티누스는 태양 위에서 십자가 표징을 보았고 꿈에 이 표시를 하면 승리할 것이란 계시를 받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군사들의 방패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문양을 새기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승리하였습니다.
희망을 북돋아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북돋아 주시는 희망에는 성취의 믿음도 포함됩니다. 이때 그러한 희망을 품는 이들은 가슴이 뜁니다. 이것이 내가 희망하는 것을 끝까지 가지고 갈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어린 농부 소녀였던 잔 다르크도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도록 하느님이 자신을 선택했다고 믿었습니다. 천사에 의해 계시받았다고 믿는 그녀에게 프랑스 왕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셨다면 하느님께서 성취하십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성취될 것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허물어진 다미아노 성당에서 “내 교회를 재건하여라!”라는 목소리가 십자가에서 들려왔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가슴이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돌을 모아 무너진 성당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무리가 생겨났고 그렇게 가난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회의 창설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돈과 권력에 취해있던 교회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지는 탁발수도회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교황은 꿈에 라떼라노 대성전을 성 프란치스코가 어깨로 받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회의 회칙을 승인합니다. 이렇게 나중에야 예수님께서 하신 교회를 재건하라는 목소리는 작은 다미아노 경당이 아니라 물질주의로 허물어져가는 교회를 재건하라는 뜻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넣어주는 꿈은 주님께서 책임지십니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꿈을 꾸는 이는 정말로 성취될 그 기대감에 취해서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닥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켈리 최는 10억이 넘는 빚을 진 노처녀였습니다. 이때 ‘시크릿’이란 책을 60번 읽었습니다. 이 책은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그동안 성공한 모든 사람의 주장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믿지 않습니다. 이때 켈리 최는 꿈을 정하되 가슴이 뛰는 꿈을 정하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는 것이고 믿어지지 않는 것이면 하늘로부터 오는 꿈이 아니기 때문에 하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27년간 옥살이하였지만, 누구보다 건강하게 나온 넬슨 만델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끝까지 해보기 전까지는 늘 불가능해 보인다.” 그리고 어떻게 그 긴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난 견뎌낸 게 아니라 준비한 거라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감옥 안에서도 그는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믿고 있었습니다. 그 꿈이 하늘에 준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얻어내려면 하늘이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게 된 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게 되어 그 꿈으로 벌써 가슴이 떨려야 합니다. 가슴이 떨리는 꿈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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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98년 제기동 본당의 보좌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중고등부 학생들과 칠갑산 청소년 수련장으로 여름 캠프를 갔습니다. 둘째 날에 본당 신부님께서 사목위원들과 캠프장으로 방문 왔습니다. 먼 길인데도 더위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사목위원들은 학생들을 위해서 간식을 준비해 왔고, 본당 신부님은 필요한 데 쓰라면서 격려금을 주셨습니다. 신부님은 아이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보시고, 바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1시간 정도 머물기 위해서 왕복 8시간을 걸려서 왔습니다. 신부님에게 왕복 8시간 걸리는 거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당의 어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신부님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2024년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학생들이 부주임 신부님의 인솔 하에 오스틴에 있는 피정의 집으로 여름 캠프를 갔습니다. 저도 사목위원들과 함께 왕복 8시간이 걸리는 피정의 집으로 격려차 방문했습니다. 아이들은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본당 신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격려금을 주고, 1시간가량 머물다가 돌아왔습니다. 다행히 적당히 구름이 낀 날이어서 운전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한 가지 해프닝이 있었는데 제가 선글라스 케이스를 가져간다는 것이 서두르는 바람에 면도기 케이스를 가져갔습니다. 선글라스를 쓰려고 케이스를 열었는데 면도기가 나와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왕복 8시간을 길 위에 있으면서 ‘길’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길은 ‘길들이다.’라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길이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 걷다 보니 길이 되는 거라고 합니다. 대관령도 미시령도 새로운 길이 나면서 옛길은 차량 통행이 적어지고, 그러다 보니 길이 잊혀지는 걸 보았습니다. 산보할 때도 그렇습니다. 매일 같은 길을 걷다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니 덜 피곤하고, 덜 피곤하니 산보가 즐겁습니다. 인류는 살아오면서 가축을 길들였습니다. ‘개, 양, 소, 말, 낙타, 닭, 고양이, 돼지’는 인류가 길들여서 같이 지내는 가축입니다. 신발도 처음에는 발에 익숙하지 않지만 자꾸 신으면 길이 들어서 편하게 신을 수 있습니다. 사제복도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자꾸 입으면 사제복이 편하게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편하고, 기능이 좋은 것을 선택하지만 때로는 조금 불편해도 익숙한 것을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고 합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잘 키운 부부는 닮은 모습이 많습니다. 그만큼 서로에게 맞추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선한 눈빛이 비슷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말투가 비슷하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 비슷합니다. 제가 본당 신부님께서 격려 방문한 것을 배웠듯이, 부주임 신부님도 언젠가 그렇게 하리라 생각합니다. 따뜻한 마음은 서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나병환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나병환자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나병환자는 자포자기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였습니다.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만 보았습니다. 나병 때문에 영혼까지 병들고 말았습니다. 어떤 나병환자는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이 나병환자가 된 것은 부모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온 나병환자는 스스로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죄나 자신의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갈망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는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외모는 깨끗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외모와 건강만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깨끗하고 건강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허물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의 내면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부로 외면하는 때도 있습니다.
신앙은 어쩌면 하느님의 사랑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먼저 신앙의 길을 걸었던 성인, 성녀들의 삶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에 길들여졌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함께 하시지 않지만, 길들여진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주님을 찾아가서 자신의 갈망을 이야기했던 나병환자처럼 우리들 또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혼을 치유해 주시도록 주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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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8,1-4: 한센병 환자의 치유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2절) 한센인이 예수님께 드린 말씀이다.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 자신이 치유되든 안 되든, 모든 것은 예수께 달렸다. 치유의 권한은 주님께 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3절) 하시면서 치유를 해주신다. 이 말씀은 당신의 권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며 한센인의 추정을 확인해 주신다. 이 치유 사화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하여 가지신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이 어떤 경우에도, 어떤 상황에 부딪힌다고 하더라도 당신의 자녀로서 사랑하고 계시는 분이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여라.”(4절) 환자가 깨끗이 나으면 그 사실을 개인적 판단에 맡기지 말고 사제에게 몸을 보여야 하는 것이 율법이었다. 사제가 그것을 확인하면 깨끗한 삶이 될 수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가족들의 품으로 갈 수 있었다. 사제에게 그런 확인을 받는 것이 당신께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기적은 당신이 행하셨지만, 그에 대한 사실 확인을 사제에게 맡겨 당신이 행한 기적을 판단하도록 하셨다. 우리는 이 환자의 믿음을 볼 수 있다. 많은 소문을 통해 들었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간으로 받아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주님께 대한 이러한 믿음을 우리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께 말씀드린다. 강요도 하지 않고 요구도 하지 않았다. 다만,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린다.
이 한센병 환자와 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인정하는 가운데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 역시 이러한 은총을 체험할 것이다. 몸이 썩어가는 한센병이 아니라, 우리 전 인간을 모두 썩게 하는 무서운 죄 중에 있을 때에도, 우리는 오늘 복음의 한센병 환자처럼 주님께 나아가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분 앞에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은 내가 생각하듯이 어렵고 무서운 분이 아니라, 우리를 언제나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심을 생각하며,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사랑하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로 정립하고 그분 안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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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이스라엘의 위대한 점은 주님 말씀에 충실하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들은 계속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거슬렀고 주님의 사랑을 저버렸습니다. 그들의 위대함은 자신의 실패를 감추지 않고 드러냈으며, 신앙의 눈으로 실패의 역사를 바라보고 이를 끝까지 기억하며, 그 책임이 온전히 자신에게 있음을 고백하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유다 왕국이 바빌론에게 멸망한 역사를 들려줍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과 모든 집은 불태워지고, 임금과 남은 백성은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갑니다. 이스라엘은 패배하고 이방인의 포로가 된 이 치욕적인 역사를 낱낱이 기억하며 그 원인을 살펴보았습니다. 자신들이 율법을 따르지 않았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어겼다는 것을 인정하며 반성합니다. 그래서 다시 계약에 충실하고자 주님의 말씀 자료들을 정리합니다. 그렇게 바빌론 유배 시기에 구약 성경이 정립됩니다. 실패의 역사를 회피하지 않고 신앙의 눈으로 반성한 이스라엘은 주님의 말씀을 다시 정립하게 되었으며, 그 경전으로 이스라엘은 더 충실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느님께 더 가까워지는 때는, 하느님께 충실하다고 자신하기보다 자신의 잘못을 잘 알고 그것을 돌아보며 주님의 자비를 청할 때입니다. 흠 없이 주님 뜻을 따르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보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얼마나 죄인인지 절실하게 깨닫는 사람이 더 거룩하고 더 성숙하게 보입니다.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겸손하게 주님의 자비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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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태 8,1-4)
1) 여기서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는, “저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도,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말인데,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는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은 아직 부족하거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 합해져 있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병을 고쳐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계신 분”이라는 믿음과 “예수님은 나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모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권능만 믿고 자비를 안 믿는다면, 예수님에게 복종하기는 해도 사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이 아닙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자비는 믿지만 권능을 안 믿는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이 아닌 것이고, 그러면 그것 또한 믿음이 아닙니다.
2) “내가 하고자 하니”의 원문은, “나는 원한다.”인데, 그 병자가 청하지 않았어도 당신이 먼저 원하신 일이기 때문에 병을 고쳐 주신다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자비와 권능을 동시에 나타냅니다. <권능은 있지만 자비가 없다면 원하지 않았을 것이고, 반대로, 자비는 있지만 권능이 없다면, 원한다는 말이 빈말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신데,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당신이 원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요한 5,21)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요한 17,10)
이 말씀들은,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은 곧 하느님의 자비와 권능이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우리가 자비를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가엾게 여기셔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깁니다.
3) 누가 청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가엾게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들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2-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14,14)
4) “예수님께서는 왜 병 자체를 없애시지 않고, 병자들을 고쳐 주기만 하셨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뒤에도 여전히 인간들은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바뀐 것이 있기나 한 것인가?”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예수님께서 주신 ‘희망’이 보입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병자들에게 일시적인 진통제만 주시고 그친 일이 아니라,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묵시 21,4) 하느님 나라를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신 일이고, 그 나라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주신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상의 인생을 살면서 겪는 고통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 자체는 아직도 수수께끼, 즉 신비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되면 모든 것을 깨닫고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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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종섭 토마스 신부님]
‘저는 믿음이 약해서...’라고 말씀하시는 교우들을 자주 만납니다. 혹은 ‘신부님! 어떻게 하면 믿음이 강해질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게요~’라고 웃으며 넘길 때도 있지만 믿음을 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참 고민스러운 부분입니다. 과연 ‘믿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을까요?
무엇인가를 믿기 위해서는 우선 그 무엇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즉, 하느님을 믿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고, 공부하며, 배워야 합니다. 내가 믿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이 당신을 찾아 올 수 있도록 당신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계시’이고 성경과 성전이라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당에서 교리도 배우고 성경 말씀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느낌이나 나에게 와 닿지 않는다면 이것 또한 큰일입니다.
즉 믿음에는 감성 혹은 체험을 통한 느낌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감정을 통해 하느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통해 이 감성은 더욱 풍성해 집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일종의 작은 광야를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이때 우리는 온 힘을 쏟아야 합니다. 즉, 나의 의지를 통해 버티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나의 이성, 감성, 의지를 온 힘으로 사용할 때 하느님께서는 ‘은총’으로 우리의 믿음을 한층 더 성숙시켜 주십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믿음이란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병의 고통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한평생 받아온 사람입니다. 가족과도 생이별을 해야 했고 사람들에게는 하느님께 징벌을 받은 이라 하여 온갖 모욕을 다 당해야만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가진 것도 없고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 그가 우리에게 아주 큰 믿음을 보여 줍니다. 배울 수도 없고, 감성도 매말라 버렸고, 의지까지 하나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있는 힘을 다해 매달립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그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여기니 이 얼마나 크나큰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들 속에서 좌절하고 근심합니다. 믿음은 더욱 약해지는 것 같고, 돌파구는 어디에도 없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나의 이성과 감성, 의지를 총 동원하여 최선을 다 해 봅시다. 이 때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하루를 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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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와 예수님의 대화가 인상적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과연 예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은 왜 여전히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일까요? 왜 우리 삶은 아쉽고 부족한 것이 많을까요? 그분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다 채워 주실 텐데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소원을 예수님께서 들어주시느냐, 그렇지 않으시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과 우리의 관계가 가까워지느냐, 그렇지 않으냐입니다. 단순히 소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 우리가 만족한다면, 그분께서는 그냥 기도를 들어주는 기계나 부적에 지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당신과 가까워지고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단순히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에 우리는 만족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분께서는 만족하지 못하십니다.
부모와 자녀들만 보아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생일 선물을 주고, 용돈을 주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녀 가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모른 채 선물이나 용돈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 자녀는 아직 부모님의 마음을 모르는 철없는 자식일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시라, 우리의 소원을 정화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그렇습니다. 소원을 빌고 그에 대한 응답을 바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소원을 들어주시는 바로 그분과의 관계에 더 충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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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나병환자 한 사람이...” (마태 8,1-4)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 때에 나병 환자 한 사람이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5장에서 시작된 산상 설교를 마치신 후 이제 다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 중에 나병환자 한 사람이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마태오 복음은 5장에서 7장까지 한 묶음로 산상설교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마친 후 즉시 8장에서는 여러 병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 중에는 나병 환자, 중풍병자, 열병으로 드러누워 있는 병자 등 많은 병자들을 치유시켜 주시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왜 이런 병자들을 산상설교에 이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가? 왜냐하면 그 병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가 이런 병에서 치유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치유방법은 바로 앞에서 예수님이 산 위에서 가르쳐주신 산상설교의 내용을 사는 것이다.
진복팔단은 바로 우리가 이런 병에서 치유될 수 있는 방법이다. 진복팔단은 새로운 인생관, 가치관이다. 지금까지 살았던 인생관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법이다.
과거의 우리의 삶은 우리를 점점 병들어 가게 하는 삶이었고 결국 죽음으로 다가가게 하는 인생관이었다면 진복팔단은 지금까지 살았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관으로서 병든 우리를 치유시켜 줄 방법이다.
진복팔단은 더 이상 우리가 병들지 않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복팔단의 정신을 가르쳐 주면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이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고 말씀하셨고 끝으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분명 진복팔단은 정말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며 나병이나 중풍병등 모든 병들을 치유시켜 주실 수 있는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통해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대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처음에 "우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고 하셨던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죄로 일그러진 흉칙한 모습에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하느님 자신도 감탄하셨던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죄로 병든 우리의 모습이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셨던 대로 본래의 자리와 사명으로 복권시키시는 것을 말한다.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잃어버렸던 하느님을 다시 되찾는 것이요, 잃어버렸던 행복을 되찾는 것이다. 그 방법이 바로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즉 잃었던 행복을 되찾는 방법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루하루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완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오늘 예수님께 다가온 나병 환자는 어떤 병자인가? 그 당시 나병환자란 오늘날 불치의 병에 걸린 에이즈 환자 또는 암 환자와 같은 병이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치료 방법이 없는 병으로서 오직 죽음을 기다리고 살 수 밖에 없는 아주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이다.
나병은 하느님한테 죄를 지어 그 대가로 주어진 병이기 때문에 부정한 사람이라고 공개적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몸에 다으면 부정한 사람이 되고 또 나병 자체가 전염병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금하였다.
그래서 나병 환자는 늘 가족과 친척과 이웃 사람들로부터 격리된 외딴 곳에서 홀로 살아야 했다. 몸은 썩어가서 냄새나고 형체가 뭉그러지고 떨어져 나가 보기 흉한 모습으로 변해 간다. 마치 죽은 시체의 모습이다. 즉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나병 환자라고 선포되면 "당신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오!"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죽음만을 기다리는 사람, 죽음이라는 공포에 떨고, 죽어가고 있음으로 자기 눈으로 확인되고 있는 비참한 자신의 모습 그러면서도 어떤 치유 방법이 없이 절망 속에서 외롭고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다.
오늘 날 이 나병 환자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우리도 모두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다. 언제 죽을 지 날자만 정해져 있지 않을 뿐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죽음의 병에 걸린 사람들이다.
하루 하루 우리의 삶은 죽음을 행해 가고 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이 죽음의 행진을 막지 못한다. 너도 죽을 것이고 나도 죽을 것이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이 나병에서 치유될 수는 없을까? 어떻게 하면 죽음을 향해가고 있는 이 행진을 멈추고 생명의 길로 가게 할 수 있을 까?
그 길이 바로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진복팔단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고 죽음의 행진을 멈추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이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멸망의 길에서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완덕을 추구하는 길이며 그 자세는 오늘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애원하듯이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고 애원하는 자세로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
우리보다도 더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시어 죽음에서 살리고자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오늘도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길이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길에서 돌아서서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인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죽음의 행진을 멈추고 생명으로 나아가는 삶이다.
산 위에서 가르쳐 주신 산상설교를 통해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알아듣는 이는 참으로 복된 이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주님, 주님! 하고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이들은 더욱 복된 이들이다.
진복팔단의 정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죽음의 병인 나병에서 치유 받는 이가 바로 오늘 우리 자신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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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8, 2. 3)
「나는 치유되었다.」의 저자 밥슈츠는 이 책에서 예수님과 만남은 치유로 나아가는 여정의 첫걸음이라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건강해지고 온전해지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간 존재 구조 안에 낫고 싶은 강한 마음을 심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베네딕또 16세 교황의 말씀대로, 치유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목적을 위해, 곧 우리를 온전하게 회복시켜 아버지와 인간 상호 간의 충만한 친교 안으로 다시 데려오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믿습니다.』 성경의 수많은 사람, 곧 육체적인 여러 질병으로 죄인이라 불리고 손가락질받던 사람들, 부서지고 상처받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 후 인생이 달라지는 기적을 체험했다고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산에서 제자들과 당신을 찾아왔던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뿐만 나병 환자 또한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사실 구약, 특히 레위기에 의하면, 이는 결코 있을 수 없고 해서도 아니 되는 행동입니다. 나병 환자는 레위기 13, 45~46에 의하면,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치면서 사람들이 물러나 근접하지 않도록” 해야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 환자가 예수님과 사람들을 피하도록 소리를 외쳐대지도 않았고 오히려 예수님께 가까이 접근해 엎드려 절합니다. 이 짧은 맥락을 통해서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 간의 극명한 차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의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건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건강하지 않은 나병 환자이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예수님을 통해 치유 받기 위해 다가왔고, 엎드려 간청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8,2)
나병 환자는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 존재 깊은 심층 곧 영혼 안에 심어 놓은 ‘건강해지고 온전해지고 싶은 갈망’에 따라 간절히 애원했습니다. 이는 곧 아빠 하느님께서 그를 예수님께 이끌어 데려온, 치유 받아야 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님께 단지 자신의 바람을 들어주십사고 강요하지 않고, 온전히 그분의 뜻대로 하시도록 순명의 자세로 내어 맡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훗날 겟세마니에서 아빠 하느님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신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이 나병 환자 또한 자신의 바람보다 예수님의 의향과 의지에 전적으로 내어 맡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바람보다 불가능이 없으신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어떤 일도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하시고 하시기에 우리의 삶에서 매일 기적이, 치유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만 이 나병 환자처럼 주님께 온전히 신뢰와 의탁의 마음으로 ‘건강해지고 온전해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아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마음을 보시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닌 깨끗하게 되어라.”(8,3)하고 말씀하시자,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주님의 말씀은 용서와 치유의 말씀이며 생명과 사랑의 말씀임이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산에서, 곧 기도하고 내려오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의 치유 이야기를 통해 우리 또한 단순히 우리의 욕구 충족과 바람만을 청하지 말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뜻대로 그리고 하느님께서 ‘하고자 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바람은 이루어질 것이며 이루어진 일을 통해 하느님께서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병고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 짊어지셨네.”(마태 8,17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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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형제님께서 제 강의를 듣고 배우자인 아내에게 “사랑한다.”라는 말을 많이 하기로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 가자마자 “여보, 사랑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아내의 반응은 어떻게 돌아왔을까요?
“나 몰래 뭐 잘못했어? 그것도 아니면 뭐 잘못 먹었어? 무섭게 왜 그래?”
이런 아내의 반응에 남편은 깜짝 놀랐습니다. 진심 어린 자기의 사랑 고백을 이렇게 받아들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랑한다는 말은 남편이 평소에 잘 하지 않던 말이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니까 자기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다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사랑의 말, 따뜻한 말,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 특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말을 아끼지 않고 해야 상대방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말하는 것에 돈이 드는 것도 또 자기 체면이 깎이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말을 하면 자기에게 더 큰 이득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좋은 말은 아끼고 나쁜 말은 과감하게 토해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모습이 사람과의 간격을 더 멀게 만듭니다.
주님과의 간격도 좋은 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불평불만, 원망의 말만 하면서 과연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미사 때 이루어지는 응답에 전혀 진심을 담지 않으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도 ‘제 마음 다 아시죠?’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니었나요?
주님과의 기도 내용에 따라 주님과의 관계도 쉽게 파악됩니다. 전혀 믿음 없이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또 급할 때만 주님을 찾으면서 바치는 기도, 자신의 청원을 들어주시면 자기도 무엇을 하겠다는 협상의 기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자기는 의인이라면서 당연히 들어줘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협박의 기도 등등…. 모두 믿음 없는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를 오늘 나병 환자의 모습에서 발견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 앞에 다가간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나병 환자는 일반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도 자기 뜻이 먼저가 아니라 주님 뜻이 먼저였습니다. 이렇게 용기를 내어 당신 앞에 나아오고, 그리고 자기 뜻보다 주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그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어떤 모습일까요? 나병 환자의 용기 있고 주님의 뜻을 먼저 따를 수 있는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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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깨끗하게 되어라>
어떤 나병환자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며 깨끗이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병의 원인이 무조건 환자 자신의 죄나 부모의 죄, 드러나지 않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병자나 장애인은 그 자체로 죄인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이들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죄인이라는 낙인으로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나병환자는 격리되어 지내야 했습니다. 가족은 물론 사회에서도 소외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치의 병이고 전염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록도, 안양 나자로 마을, 경북 칠곡 등에 따로 모여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외면했습니다. 육체적, 종교적, 사회적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시면서 고쳐주셨습니다. 보통 사람이면 감염의 위험 때문에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결핵이 유행할 때 ‘폐병’이라고 해서 그의 곁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서로를 경계해야 했고,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서서 환자들에게 치유의 손길을 내밀어 고쳐주셨습니다. 한마디로 낫게 할 수도 있었는데 손을 대시며 마음을 쏟아주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을 거두어 준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종교적 단죄에서 그리고 사회적 소외에서 해방 시켜준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덕분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방법은 고통 중에 있는 그 사람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를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할 일도 생각합니다. 능력의 주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셨는데 그 바탕에는 나병환자의 믿음이 한몫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하고자 하시면’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에 예수님께서“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응답하시며 고쳐주셨으니, 나병환자는 자신의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린 것입니다. 믿고 구할 때 주님께서는 그 간절한 청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외적인 나병을 치유 받아야 하지만 우리 영혼의 치유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꼬이면 그것이 겉으로 드러납니다. 드러난 병보다 마음의 병이 더 무서운 것이고 그래서 그 병을 깨끗이 치유 받아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쌓여만 가는 교만함과 나태함, 이기적인 습성들을 인정함으로써 새로 나야 합니다. ‘하고자 하시면 낫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우리의 큰 기쁨이기를 바랍니다. ‘보통 의사는 병의 증세를 보고 그것을 다스리지만, 명의는 병의 뿌리를 다스린다.’고 합니다. 뿌리를 다스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으니, 죄의 용서를 통해 마음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길 희망합니다. ‘죄의식으로 말미암은 병은 죄의식을 없애서 고쳐야 하고, 잘못된 생활습성 때문에 생긴 병은 그것을 바로잡아서 고칠 일’(이현주)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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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기도>
마태오 8,1-4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참기도>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나조차
어찌 할 수 없는
나이오니
나에게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당신께서
내게서
하고자 하신 바를
이루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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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우리 성당에서는 매월 둘째 주 목요일, 성당에 나오실 수 없는 환우분들을 직접 방문해 성체를 드리는 봉성체를 거행합니다. 이 시간은 저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으로, 사제로서의 정체성을 느끼게 해주는 귀한 시간입니다. 병상에 누워계신 분들이 하시는 말씀들은 하나 같이, “신부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씀입니다.
몸소 예수님의 몸을 모시고 집까지 직접 찾아와 주시니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분들은 거동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와 배웅을 해 주시고 제 손을 쉽게 놓으려 하지 않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몸이 무한한 기쁨과 희망이 되는 상황에서 제가 거행하는 봉성체는 참으로 소중하고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저의 영성의 깊이 혹은 사제로써의 능력과 상관없이 성체를 통해 전달되는 예수님의 손길이 온전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를 통해 저는 사제의 귀중한 직무에 대해, 우리에게 마땅히 위로의 손길을 주시는 주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러한 주님의 손길은 비단 성사를 통해서 후대에 이루어지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병자들과 함께하고자 하셨고 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 시대에 있어서 나병에 걸린 사람은 사회 안에서는 기피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벌을 받은 것으로 취급되었고 그만큼 부정하다고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병환자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성 밖에 거주해야 했고, 일반인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조차도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나병환자가 2미터 이내로 가까이 오는 것을 허락한다면 불결하게 되어 죄를 짓는 것과 다름없다고 규정했던 것이 당시 유다인들이 따르던 법이었습니다.
이렇게 나병환자들은 몸이 썩어 가는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도 격리되고 소외되는 영적인 고통 또한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였습니다. 그것은 살아 있지만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로 그야말로 버림받은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나병환자에게 가까이 가셔서 손을 내미십니다. 가까이 가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는 사회적 법령을 무시하고 그저 마음만으로 다가가 그의 몸을 어루만져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또한 어떠한 처지에서도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심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나병환자의 자세입니다. 그는 병이 걸린 몸으로 군중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면 돌에 맞아 쫓겨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분명 많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기겁을 했을 것이고 이미 도망쳤을 것이며 어떤 이들은 황급히 돌을 집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갑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쫓아내지 않으시고 기꺼이 맞아 주시리라는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확실한 믿음과 함께 겸손한 태도 또한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야기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저라면 황급히 “주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 제 병을 고쳐주십시오” 라고 외치며 엉엉 울었을 것 같은데 그는 침착하게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이라고 말함으로써 온전히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는 곧, “주님,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보고 피해 버리고 상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당신께서는 저를 결코 피하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주님, 당신은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니 원하신다면 저를 깨끗하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병 혹은 상처에 대한 어떠한 미움도 원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와 겸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는 그의 몸에 기꺼이 손을 대시어 병을 낫게 해주십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기도 속에서 주님께 은총을 청하고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길 청하곤 합니다. 그런데 사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하느님께서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실까, 내가 뭘 잘못했나? 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 은혜를 청하는 올바른 방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즉,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인정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은총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뜻이 숨겨져 있을 수 있고 더 많은 은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주님 앞에서는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들이 모두 알 수 없는 뜻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가 가장 최우선적으로 견지해야 할 자세는 하느님께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맺어질 은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미사 중에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는 주님의 손길에 더 강한 신뢰와 겸손의 마음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미움도 원망도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의 아픔을 모두 알고 짊어지시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도움이 되어주시는 주님의 마음에 한 줄기 위로를 전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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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통하여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열 개의 기적 이야기를 통하여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이는 마치 이집트에 내린 열 개의 재앙(탈출기 7,14-12,36)과 대비하여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암시해줍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하여 가르치신 바를 몸소 성취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하산은 당신이 구원해야 할 하느님의 자녀들에게로 오실 수밖에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치유를 통해 예언자 ‘엘리사의 활동’을 완성함으로써(2열왕 5,1-27), 당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십니다. 나병환자는 <레위기>(13,45-46)에 따르면,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림으로써 자기가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내야 했고,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도 없었으며,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도 없었습니다.(민수 5,2-4)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자기에게 접근해 오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약의 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의 한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받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때문에 오히려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복음은 이처럼 규정을 제시하기보다 사랑과 호의를 제시합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이는 주님의 치유의 능력을 믿으며, 그 능력의 행사는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있음을 인정하고, 오로지 주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당신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마치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님께서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신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라고 하신 것처럼, 나병환자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 뜻에 순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한다면’ 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당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지요? 자신의 바람을 하느님께 원하고 있는지요? 아니면 하느님의 바람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혼자를 만지셨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를 만지거나 접촉하면 부정을 타게 됩니다.(레위 14,46)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구원의 힘을 드러내며, 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결한 나병환자를 직접 접촉하심으로써 그에게 사랑을 베푸십니다.
나병환자를 접촉하시지만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부정을 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져 깨끗하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규정보다도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더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리하여 당신께서는 불결함에 더럽혀지지 않는 '거룩하신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곧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시고, 당신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호렙산의 불꽃 속에서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탈출 3,2), 아기를 낳으면서도 동정성을 잃지 않은 성모님처럼, 불결한 이를 만지면서도 불결해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결한 이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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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 8,3)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죄인이기에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소서.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이루소서.
오, 주님!
당신이 원하신 것을 제가 원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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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중심>
-그리스도 예수님-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시편 23,1)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 삶의 중심임을 고백하는 시편 성구입니다. 말마디를 바꾸어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노라”, “주님은 나의 목자 걱정할 것 없노라”, “주님은 나의 목자 불안할 것 없노라”로 고백해도 그대로 통합니다. 35년 동안 수도사제로 살아오면서 강론 주제중 참 많이 이용했던 주제가 “삶의 중심, 그리스도 예수님”일 것이며 오늘 강론 주제도 똑같습니다.
삶의 중심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삶의 중심인 주님께 날로 깊이 뿌리 내릴 때, 안정과 평화요, 불안과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베네딕도의 평화도 바로 삶의 중심인 하느님께 깊이 뿌리내리는 믿음의 정주서원을 통해 이뤄집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입니다.
“어른이란 흔들릴 때마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존재다. 꾸미고 감추려는 마음을 덜어내야 진짜 어른이다.”<다산>
“어른은 예가 아닌 예와 의가 아닌 의를 행하지 않는다.”<맹자>
노인은 많아도 어른은 드물고, 선생은 많아도 스승은 참으로 귀한 시대라 합니다. 보고 배울 어른이, 스승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어른중의 어른이, 스승중의 스승이 주 예수님이요 이런 주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배우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히 보고 배울 스승이자 주님이 계신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무리 바쳐도 늘 새롭게 와닿는 우리 삶의 중심이신 스승이자 주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행복과 내적 힘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영원한 참 어른을 닮아갈 때 진짜 어른이요, 고맙게도 우리 가톨릭교회는 무수한 진짜 어른들이 있으니 바로 성인들입니다.
오늘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2년 그리스도인 일치주간중인 1월21일 리옹의 이레네요 성인을 ‘일치의 학자’로 공식 선언함으로 교회의 37번째 학자가 됩니다. ‘일치의 학자’ 참 멋진 호칭입니다. 문득 며칠전 주고받은 메시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내조의 여왕’이란 너무 멋진 호칭을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찬미 예수님! 신부님, 약 40여 명 시댁 가족들과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꽃바구니 상을 받았습니다.”
꽃바구니 사진을 확대해 보니 “내조의 여왕 제현 주님”이라 씌어 있었습니다. 시댁식구들에게 얼마나 인정을 받았기에 이런 칭호를 받았겠나 그 자매님이 존경스러웠고 즉시 답신을 보냈습니다.
“아, 오래만에 반갑습니다. 40여 명 시댁 가족들 모였다니 놀랍습니다. ‘내조의 여왕’ 참 멋진 호칭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늘 이렇게 사시고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레네오 성인을 교회학자로 선언하는 교령에서 말합니다. “위대한 스승의 교리를 통해 더욱더 많은 주님의 제자들이 완전한 일치를 향해 걷는 여정을 만들기를 바랍니다. 리옹의 이네네오는 동방에서 태어났고 서방에서 주교직무를 수행했으며, 동방과 서방의 그리스도인들을 영적 신학적으로 이어주는 다리가 됐습니다.”
이레네오 성인은 130년경 지금의 터키인 스미르나에서 태어났고, 요한 사도로부터 교육을 받은 성 폴리카포로 주교 순교자로부터 설교를 들은 뒤 사제품을 받습니다. 그가 리옹의 주교가 된 후 저술한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나는 소년시절 소아시아에 있으면서 성 폴리카르포 선생님의 슬하에서 배운 일이 있다. 나는 지금도 선생님께서 앉아계시던 곳, 그 가르치는 모습이나 가르치신 말씀, 그 걸어 다니던 모습이나 용모들을 뚜렷이 기억한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성 요한과 기타 주님을 친히 뵌 이들과 교제하던 말씀이나 주님에 대해서 즉 주님의 성덕, 그의 가르치심에 대해 그러한 사람들한테 전해들은 이야기등은 아직 나의 귀에 여전히 남아있다.”
사도교부들의 전통과 모범을 그대로 이어받은 성 이레네오 주교입니다. 성인은 170년경 현재의 프랑스 골 지역에 있는 리옹의 두 번째 주교가 된 이후 프랑스 지방에 만연된 영지주의 이단과 피나는 싸움을 전개했는데, 이때 쓴 저서가 <이단논박>에 이어 <사도적 선포의 논증>입니다.
성인은 이단사상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면서 동시에 초기교회의 정통신앙을 확립합니다. 가톨릭교회의 수호자로 불릴 정도로 2세기 신학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으며, 특히 영지주의 계통의 이단들에 대항하여 정통교리를 수호한 대표적인 자랑스러운 교부입니다. 말그대로 이단들과 치열히 싸워 영적승리를 거둔 주님의 용사 성 이레네오 주교입니다. 오늘 성무일도시 즈가르야의 노래 후렴이 성인의 삶을 요약합니다.
“성 이레네오는 평화라는 그의 이름대로 교회에 평화를 확립하고, 그 평화를 위해 용감히 투쟁하였도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빛나는 제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이레네오 주교입니다. 어제로서 마태5장-7장까지 산상설교는 끝나고, 오늘 8장부터 9장까지는 주님의 활약이 펼쳐집니다. 말씀의 권위가 이제는 행위의 권위로 들어납니다. 산에서 내려오자 맨먼저 다가온 이가 나병환자입니다. 참으로 삶의 중심이 되는 착한목자 예수님을 만나 치유 구원받은 복된 나병환자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역시 ‘연민의 마음’, ‘권위있는 말씀’, ‘사랑의 스킨쉽’이 치유의 삼박자 원리임이 드러납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예나 이제나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이 치유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삶의 중심인 주님을 만남으로 치유받은 나병환자는 이제부터 삶의 중심이신 주님 반석 위에 인생집을 짓게 되었습니다. 이어 예수님은 그에게 말합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예수님이 얼마나 구약의 율법을 존중하고 준수한, 살아 있는 전통의 사람인지 깨닫습니다. 율법에 대한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겠습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철저했던 우리의 주님이자 스승이신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수님이나 오늘 기념하는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와 비교할 때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의 유다임금 치드키야는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하느님을 중심한 지혜와 겸손의 사람이었다면 이런 참화는 결코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독서 앞에 나오는 대목 둘입니다.
"치드키야는 여호야킴이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2열왕 24,19)
"그런데 치드키아가 바빌론 임금에게 반역하였다."(2열왕 24,20ㄴ)
치드키야의 어리석음이 자초한, 자업자득의 화로 바빌론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은 초토화되며 두 아들은 살해되고, 그는 두눈이 뽑힌채로 청동사슬에 묶여 바빌론으로 끌려가니 비극의 절정입니다.
참으로 주님 중심의 삶에 충실함으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삶이 되지 않도록 늘 깨어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는 시간이요, 하늘에 보물을 쌓는 시간이자 우리 인생집을 주님 반석위에 짓는 복된 시간입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병고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 짊어지셨네.”(마태8,17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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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다 나에게 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 얘기입니다. 나병은 인간의 힘으로는 지금도 치유가 불가능한 병입니다.
물론 여기서 치유란 병에 걸리기 이전 상태로 돌리는 것을 말하기에 요즘도 병의 진행은 막을 수 있을지언정 치유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시대는 더더욱 치유가 불가능한 병인데
주님께서는 자기를 치유해주실 수 있다고 하는 그의 믿음은 대단한 믿음이고 인간의 능력 이상의 능력이 주님께 있다고 믿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치유가 어려운 병일수록 치유 가능성은 믿음의 영역이고, 불치병의 치유는 더 많은 믿음이 요구되는 영역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이고, 아주 드문 믿음의 소유자이지요.
사실 그 당시 그 말고도 나병환자가 수많았을 텐데 그들은 치유를 불가능한 것으로 믿고 고치려고 들지 않았고, 예수님께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믿고 치유를 청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여러 차례 얘기한 내용이지만 인간은 다 믿는 존재입니다. 가능을 믿는 존재와 불가능을 믿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한다고 믿는 존재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존재가 있을 뿐이고, 전능하시다고 믿는 존재와 그렇지 않다고 믿는 존개가 있을 뿐이며.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존재와 그렇지 않다고 믿는 존재가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믿는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선택입니다.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하느님도 불가능하다고 믿고, 하느님은 사랑이 아니라고 믿기로 인간은 선택할 수 있고, 그렇게 선택한 인간은 나병을 운명 또는 숙명으로 알고 살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능이 없으시고 사랑이신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나병은 운명(運命)도 숙명(宿命)도 아닌 하느님의 뜻 곧 신명(神命)이라고 믿고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 곧 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에 자기 나병을 맡길 것입니다.
나병을 주신 분도 하느님이시니 나병을 고쳐주실 분도 하느님이시며 고쳐주실지 말지는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과 순종으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았지만 사렙다 마을의 과부만 구해주시고,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나아만만 고쳐주셨다고.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도 이런 믿음으로 하느님 뜻 곧 처분에 자기를 맡깁니다. 나병을 주신 하느님이 나병을 고쳐주시는 것도 하느님 뜻이고 사랑이며, 나병을 주신 하느님이 고쳐주시지 않는 것도 하느님 뜻이고 사랑이라고 믿고 사랑이신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맡깁니다.
이렇게 믿는다는 그리고 맡긴다는 오늘 나병환자의 믿음에 주님도 배신하실 수 없으셔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맡길 것인가? 말 것인가? 다 나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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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8,3ㄴ)
<영지주의!>
오늘 복음(마태8,1-4)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ㄴ)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 8,3ㄴ)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구원자 예수님께 대한 '나병 환자의 큰 믿음'이 만들어낸 기적입니다.
오늘은 초대 그리스도교 이단 중 하나인 '영리주의'와 맞서 싸워 가톨릭 신앙을 지켜내신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영지주의'는 고대 철학자인 플라톤의 이원론 사상의 영향을 받아, 영과 육, 영혼과 육체(물질)를 갈라놓고, 신의 피조물인 '영혼'이 악마의 창조물인 '육체(물질)'에 갇혀 고통받고 있어서, '구원에 대한 영적인 지식(앎/그노시스)'을 통해서 탈출시켜야 한다는 '이단'입니다. 한 마디로 영혼은 선(善)이고, 육체는 악(惡)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영지주의자들의 이런 이단을 배격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영혼과 육체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믿음과 실천, 앎(지식)과 행동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하느님의 모상(닮음)이며, 성령이 머무는 궁전'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신망애(信望愛) 신앙'입니다.
오늘은 '저의 서품(2004.6.28) 2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루카복음 6장 36절의 말씀이 서품성구인데, 하느님의 자비를 말과 행동으로 살아내는 사제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오늘 미사(10시) 때 여러분을 기억하겠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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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C11HO8g7F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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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 8, 3)
우리의 모습
우리의 믿음을
보게 됩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곳은
언제나
우리 삶의
자리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실천이
건강한 인격으로
바꾸어줍니다.
믿음은
깨끗하지
않은 것을
밀어냅니다.
믿음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뛰어넘게 합니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 안에
치유가 있습니다.
주님께로
가야 할 믿음은
언제나 우리
자신입니다.
믿음이 썩으면
우리의 인격도
썩습니다.
예수님 마음에
비친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지요?
삶의 생명력은
다름아닌
감사와 기쁨의
믿음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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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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