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의 순간
원제 : Moment to Moment
1966년 미국영화
감독 : 머빈 르로이
음악 : 헨리 맨시니
진 세버그 의상 담당 : 이브 생 로랑
출연 : 진 세버그, 오너 블랙맨, 숀 개리슨
아서 힐, 그레고리 아슬란, 피터 로빈스
월터 리드
'애정의 순간'은 1966년 거장 머빈 르로이 감독의 작품으로 그의 사실상의 유작이지요. '애수' '마음의 행로' 푸른 화원' 등의 영화들로 우리나라에 촉촉한 감성을 전해준 감독이지만 거장의 후기작에 박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 일상화 된 당시라서 그런지 이 영화도 높은 평가는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장들의 후기작'에 대한 가치는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가족음모' 하워드 혹스의 '리오 로보' 스탠리 도넨의 '어린 왕자' 빌리 와일더의 '페도라' 줄리앙 뒤비비에의 '악마같은 당신들' 데이비드 린의 '라이언의 딸'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샷' 시드니 루멧의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헨리 코스터의 '노래하는 수녀' 이런 작품들은 결코 하찮은 영화들이 아닙니다. 거장의 최고 걸작들과 상대적 비교로 저평가를 받았을 뿐이죠.
'애정의 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달한 로맨스와 스릴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선사하는 작품이면서 곁들여 영화의 도시로 유명한 프랑스 칸과 프랑스 남동부 해안가 지방의 '관광' 영화로도 가치가 있습니다. 더불어 저는 최애 여배우 중 한 명인 진 세버그가 원톱 주연인 것만으로도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사람마다 입에 달라붙은 음식이 있듯 영화도 그런데 평단에서 선정한 걸작이라는 영화는 마치 숙제하듯이 억지로 봐야 하는 영화가 대부분인데 반하여 별로 유명하지 않은 작품임에도 이렇게 몸에 달라붙는 느낌을 주는 영화가 있습니다. 자신의 취향 선호도 최애배우 등등을 고려하여 각자 다를 수 밖에 없는데 '애정의 순간'이 저에게는 그렇게 몸에 달라붙는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앞의 절반은 유부녀와 해군 장교의 달달한 로맨스를 다룬 밀당 불륜극, 뒤의 절반은 시체유기 미수 사건을 파헤치는 스릴러 방식입니다. 앞과 뒤가 완전히 다른 영화같은 느김입니다. 돌발적인 사고가 터지면서 영화가 완전히 전환되지요.
친구에게 비명을 지르며 도와달라고 하는 한 여성의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녀의 이름은 케이 스탠튼(진 세버그), 칸에 장기 휴가차 와 있는 미국인으로 집 어딘가에 한 남자가 쓰러져 있습니다. 케이의 옆집 이웃이자 절친인 대프니(오너 블랙맨)를 간절히 부르며 도와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며칠전으로 거슬러 갑니다. 프랑스 칸 해변에 정박한 해군 소위 마크 도미닉(숀 개리슨)은 해변에서 그림을 그리던 중 자신에게 호기심있게 다가온 8살 꼬마 티미(피터 로빈스)와 정다운 대화를 나눕니다. 마크는 군인출신 아버지의 강요로 해군에 복무중이지만 건축가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 청년입니다. 티미는 그가 좀 더 가까이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엄마에게 부탁해서 언덕위 마을로 태워주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티미의 엄마 케이와 마크의 만남이 시작됩니다.
마크와 케이는 초면에 서로에게 끌립니다. 품위있고 미모를 갖춘 귀부인 케이, 젊고 잘생긴 장교 마크, 이런 선남선녀가 끌리지 않으면 이상하죠. 케이는 저명한 의학박사 닐(아서 힐)과 단란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너무 바빠서 외유가 잦은 닐 때문에 외로워 합니다. 마크 역시 배를 타는 젊은 해군으로서 타국에서의 외로움이 클 수 밖에 없죠. 특히 칸 지방은 정박한 해군을 초대해 파티를 열어주는 관습이 있었고 케이의 이웃에 사는 대프니는 그런 파티를 자주 엽니다. 약간 남성편력이 강한 대프니와 달리 정숙한 삶을 살던 케이, 하지만 마크가 케이의 가족을 초대하면서 운명이 바뀝니다. 마크가 초대한 날, 남편은 여전히 바쁘게 외국 출장중이었고, 티미도 소풍을 떠나서 결국 케이는 대프니를 대신 데리고 가지만 대프니가 자리를 피해주면서 자연스럽게 케이와 마크는 둘만의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자신의 현실을 잘 아는 케이는 마크에게 다신 만나지 말자고 선언하는데 이미 케이에게 푹 빠진 마크였고, 케이 역시 그에게 끌리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위험한 만남을 다시 갖게 되고 결국 뜨거운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된 불륜 로맨스로 전개되던 영화는 갑작스레 돌발사고가 발생하면서 시체유기 미수 스릴러로 변모합니다. 해군 장교의 시체를 유기한 사건, 파리에서 민완형사 드파르고 경감이 칸으로 파견되고 여기에 현지 경찰, 그리고 미 해군 함선의 수장 헨드릭스 중령까지 가세합니다. 이들은 케이를 시체 유기범으로 의심하고 집요하게 신문하고 그런 와중에 케이의 남편 닐이 귀국합니다. 닐은 오래만에 집에 와서 들뜬 기분으로 여행을 가자고 하는데 여권을 경찰에 빼앗긴 케이는 안절부절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죽은 줄 알았던 마크가 극적으로 살아 돌아오면서 사건은 더 흥미롭고 위태롭게 흘러갑니다. 딱 케이와 만난 순간부터의 기억을 모두 잃은 마크, 의사로서 그의 기억을 되살려 보려고 노력하는 닐, 다행히 한숨 돌렸지만 드파르고 경감의 집요함에 계속 가슴졸여야 하는 케이, 케이의 관점에서 영화에 몰입하면 아주 위태롭고 숨가쁜 스릴러로서의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거의 안 알려진 거장의 유작이지만 역시 로맨스 심리를 잘 다루는 머빈 르로이 답게 제법 흥미롭게 전개되는 영화입니다. 특히 진 세버그의 캐스팅은 아주 적역인데 그녀는 28살의 당시 나이보다는 살짝 많은 역할이었는데 30대 미모의 귀부인 캐릭터로서의 매력을 잘 발산합니다. 특히 불어에 능통한 장점 때문에 적역 캐스팅이었습니다. 주목할 부분은 이 영화에서 진 세버그가 입고 등장하는 의상은 이브 생 로랑이 담당했는데 그는 당시 불과 30살의 젊은 디자이너였습니다. 이후 그의 이름 자체가 브랜드가 될 만큼 전설적 디자이너가 되지요.
진 세버그 외에도 이웃 여자로 등장한 오너 블랙맨도 꽤 감초같은 조연으로 인상적인 캐릭터를 소화합니다. '007 골드핑거'에서 매력적인 본드걸로 등장했던 그녀는 다소 수다스럽고 문란한 듯 하지만 곤경에 빠진 절친 케이를 적극적으로 돕는 역할로 아주 중요한 비중입니다. 씬 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하죠.
마크 역의 숀 개리슨은 근사한 외모에 중후한 목소리가 매력적인데 거의 평생 TV에서만 활동하여 영화배우로서는 생소한 인물입니다. 케이, 마크, 대프니, 닐, 그리고 드파르고 경감등이 벌이는 치열한 심리전이 후반부로 갈수록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느낌입니다. 꽤 흥미롭지요. 위기를 간신히 넘기니 또 위기가 연속됩니다.
결말은 일반적인 예상과는 살짝 다릅니다. 대체적인 불륜영화의 결말인 비극적 파국과는 좀 다른, 나름 가장 합리적인 느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중요한 건 실수 이후의 대처입니다. 그 대처란 항상 진실을 다 만천하에 까발리는 것만이 최고는 아닙니다. 다 까발리고 여럿을 불행하게 하느냐 적당한 선에서 새 출발의 기회를 주느냐가 선택지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을 겁니다. 이 영화에서 주요 캐릭터 5명은 다 중요한 역할과 선택의 기로에 선 상황들입니다. 심지어 어린 티미까지도.
머빈 르로이의 필모에서는 그리 중요한 대접을 못 받은 영화지만 거장의 유작은 존중받고 기억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국내에 개봉 편수가 그리 많지 않은 진 세버그의 원톱 주연작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남다릅니다. 41세에 의문을 요절을 한 것 외에도 충분히 할리우드에서 경쟁력이 있음에도 프랑스로 건너가 활동한 점, 로망 가리와의 결혼과 파경, 정치적 문제 등 복잡한 삶을 산 진 세버그는 그리 다작 배우는 아니었고 유명한 대작 상업영화에 많이 출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슬픔이여 안녕'과 '네멋대로 해라' 두 편만으로도 기억할 가치가 있는 배우가 되었고 일명 세실커트를 유행시킨 장본이이기도 하지요. 두 편 외에도 저는 '애정의 순간'에서의 진 세버그의 모습이 참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로맨스 스릴러로서의 재미와 최애 배우를 보는 묘미가 남달랐던 작품입니다.
ps1 : '연애센터'가 로마 관광 홍보 영화였다면 '애정의 순간'은 칸 주변의 프랑스 남동부 지역 관광 홍보영화입니다. 피카소가 사랑한 마을 무쟁과 생 폴 드 방스, 니스 등에서 현지 촬영을 했습니다. 많은 영화에 등장한 파리는 어째 별로 끌리지 않고 과장 홍보된 도시처럼 느껴지는데 이 영화를 보고 프랑스 남부지역은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술의 도시란 느낌이 팍팍 드네요. 물론 벌써 거의 60여년전의 모습이었지만.
ps2 : 오드리 헵번이 지방시로부터 의상을 제공받은 걸로 유명한데 이브 생 로랑은 이 영화에서 진 세버그 의상을 전담했고 카트린느 드뇌브의 의상도 자주 당담했습니다. 이 영화가 개봉된 1966년에 파리에 첫 매장을 오픈했다죠.
ps3 : '애정의 순간'은 우리나라 개봉제이고 원제 Moment to Moment 매 순간 순간 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는데 극중 케이와 마크가 나누는 대사에 등장하지요. 마크에게는 케이와의 순간 순간이 '작별'을 하기 너무 아쉬운 순간이지요. 저라면 이 영화 제목을 '황금 비둘기(Gold Dove)' 라고 했을겁니다. 가장 어울리는 제목과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ps4 : 헨리 맨시니가 음악을 담당했습니다. 거물들이 많이 참여한 영화군요. 머빈 르로이 감독 외에도 이브 생 로랑, 헨리 맨시니 등.
ps5 : 국내에 1967년 상영한 후 76년과 81년 두 차례 방영한 이후 완전 잊혀진 영화이고 더구나 희귀작입니다. 해외 DVD가 나온 것도 그리 오래지 않았고 당시 4;3 비율이라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고진감래란 말이 어울리네요. 결국 1.85 : 1 원 비율 영상과 온전한 영자막이 등장했네요.
ps6 : 66년 작품임에도 40-50년대 영화처럼 세트촬영에 많이 의존한 것이 단점입니다.
ps7 : 진 세버그의 대표작 '슬픔이여 안녕'도 같은 지역이 배경인 것이 흥미롭네요. 참으로 진 세버그는 프랑스와 인연이 깊네요. 할리우드 영화 대표작 두 편의 배경도 프랑스였으니.
[출처] 애정의 순간 (Moment to Moment, 66년) 진 세버그의 매력|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