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20일(수)
* 시작 기도
(시 73:16-17)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님...
시인은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이 세상에 왜 악인들이 득세하고 의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부조리한 일들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크게 고민하며 호소합니다.
하지만 그 결론은 이 세상에 살 동안에는 알지 못하나 결국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하나님의 집, 아버지 품)에 그들의 종말을 깨닫게 됩니다.
나 역시 이 땅에서의 부조리함을 보면서 탄식과 애통을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탄식은 만물 안에서는 그치지 않는 것이며 오직 만물 위 곧 아버지 품속에 들어갈 때에 비로소 선명하게 알 것을 믿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믿음으로 이 땅에서 무언가를 이루려 하지 말고 주님의 뜻 안에서 그 나라를 날마다 보게 하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고전 6:1-11
제목 :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 나의 묵상
오늘 본문인 6장은 고린도 교회 내의 도덕적 무질서와 관련한 책망과 권면을 보도하고 있는 5-6장의 후반부에 해당한다.
그 중 본문은 이 6장의 전반부로서 교회 안에서 발생한 문제를 세상 법정까지 끌고 가서 소송한 것에 대하여 엄히 책망한다.
무엇보다 성도간의 분쟁에 대한 올바른 신앙적 태도를 제시한 내용이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다툼이 있을 때, 성도들에게 해결해 달라고 하지 않고 왜 그것을 세상 법정에 고소하려고 하는가?(1절).
여러분은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가? 여러분들이 바로 세상을 심판해야 할 사람들인데, 이처럼 사소한 문제조차도 여러분이 직접 심판할 능력이 없다는 말이냐?(2절).
여러분은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한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하물며 이 세상의 사소한 일들이야 어떻겠는가?(3절).
그런데 이런 일상적인 문제로 다툼이 일어날 때, 여러분은 왜 교회의 성도들의 판단을 받아야 할 세상 사람들을 재판관으로 앉히는가?(4절).
나 바울은 여러분을 좀 부끄럽게 하고자 이 말을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 중에는 성도들 사이의 문제를 해결해 줄만큼 지혜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말인가?(5절).
여러분은 지금 성도가 다른 성도를 고소하는 것도 부족해서,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재판을 받겠다는 말인가?(6절).
여러분들이 서로 고소를 하는 것은 이미 여러분의 허물이 그대로 드러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또한 차라리 속임을 당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7절).
여러분들의 모습은 여러분들 스스로가 불의를 행하는 것이요 속이는 것이다. 그것도 형제인 성도들끼리 말이다(8절).
여러분은 불의한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이런 것에 속지 말 것이다.
음행하는 자, 우상 숭배하는 자, 간음하는 자, 남자로서 몸을 파는 자, 동성연애를 하는 자, 도둑질하는 자, 탐욕이 가득한 자, 술에 찌들어 사는 자, 모함하는 자, 남을 속여서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9-10절).
여러분 중에 이런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을 받고 거룩해졌으며 의롭다 함을 받았다(11절).
교회는 비록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 내에서 분쟁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교회 내에서 성도들간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교회 내에서 말씀으로 판단하는 등 신앙적으로 해결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것을 세상 법정에까지 끌고 가서 세상의 기준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세상의 판단을 받아야 할 자들이 아니라 세상을 판단할 자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며 이 세상과 타락한 천사들을 심판하게 될 자들인 것이다.
이처럼 성도들이 지극히 작은 일 하나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 간의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그들 간의 문제를 세상 법정에 가지고 갔다.
이에 바울은 일단 그러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호되게 책망하였다.
이어서 바울은 성도들 간에 발생한 분쟁의 해결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성도간의 분쟁에서는 차라리 손해 볼 것을 감수하면서라도 성도에게 사랑과 미덕으로 양보할 것을 권면한다.
나아가 바울은 만약 타인에 대해서 사랑으로 하지 않고 끝까지 불의를 저지르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기업을 얻지 못할 것임을 경고함으로써 송사에 대한 권면을 마무리한다.
사실 성도간의 소송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에 위배되는 처사이다.
(요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또한 성도간의 소송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교회를 멸시하게 하는 처사이다.
따라서 세상 법정에까지 가서라도 끝까지 송사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물질이나 명예 그리고 권세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체재로 작용한다.
하나님이 없는 자들은 물질을 통해서 안정감이나 만족감 그리고 자존감을 향유한다.
그것들이 있으면 행복하고 없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하여 행복을 위하여 이런 것들을 탐닉한다.
하여 세상 사람들은 손해보는 것이나 불이익 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불의한 자로서, 참되고 영원한 복인 하나님 나라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손해를 요구하신다.
그것은 곧 시간적 손해, 사람의 손해, 그리고 경제적 손해이다.
시간적 손해란 믿는 자들은 주일을 하나님께 드린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날을 휴일이라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쓴다.
하지만 믿는 자들은 그 시간을 포기하고 하나님께로 드리는 손해를 감내한다.
사람의 손해란 하나님께 나 자신을 드리는 헌신이다.
이는 얼마든지 나 자신으로 내게 오는 유익을 누릴 수 있지만 그 유익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 손해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곧 헌금을 나를 위해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큼 나는 경제적 손해를 감수한다.
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물질이나 명예 그리고 권력 등으로 얻는 행복을,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 누리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너무나 많다.
그것은 곧 영원한 복인 하나님 나라이다.
그리하여 장차 영원히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누릴 자이다.
따라서 세상 것으로 당하는 손해나 불이익까지도 즐거이 감수한다.
우리가 우리의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하는 것은 더 낫고 영원한 소유가 있기 때문이다.
(히 10: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이는 날마다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 나아가는 파레시아를 통해서 확증된다.
(히 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파레시아)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나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순하고 유약한 자였다.
그래서 무엇이든 남들에게 양보하고 손해를 보는 자였다.
그런데 신학을 하고 부교역자로 사역을 할 때는 무서우리만치 내 성격이 돌변하였다.
다른 사역자들에게 지고는 못 배기는 성격의 소유자로 변한 것이다.
내가 맡는 부서가 항상 앞서 나가야 했고, 담임목사나 성도들에게도 늘 칭찬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곤 하였다.
하늘의 상급까지도 내가 다 받을 것이라는 거룩한(?) 욕심으로 인해서 숫자적으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얼마나 각고의 열심을 다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었을까를 생각하면 이는 아니올씨다, 이다.
나는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기에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평가 받는 줄 알았던 것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것은 그저 막연한 관념에 불과하였고, 나의 삶속에는 전혀 실제가 되지 않았다.
이런 모든 것이 곧 내 안에 깃들어 있는 탐욕과 음란이며 우상 숭배였던 것이다.
내가 바로 도둑이요 술 취한 자이며 형제를 모욕하고 속여서 빼앗는 약탈자였음을 고백한다.
이런 나는 하나님 나라를 기업을 받을 수 없는 죄인 중에 괴수였다.
그러나 이런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와 무덤 그리고 부활을 믿는 복음으로 말미암음이다.
이 복음을 통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새 생명으로 오늘도 살아간다.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님의 은혜임을 믿는다.
그동안 내가 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주님께서 하셨음을 믿음으로 고백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겉으로 볼 때는 온순하고 겸손해 보였지만, 정작 겸손해야 할 때는 나 자신을 드러내기 원했고, 나의 나 됨을 자랑하던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무엇을 해도 남들에 비해서 앞장서기 원했고, 사람들의 눈에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원하여 겸손한 척 했던 괴악한 자였나이다.
이런 나는 지옥의 아랫목이 딱 맞는 자리임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날 위하여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그 귀한 보배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그 은혜 앞에 머리를 조아립니다.
날 구원하신 우리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기 원하여 나도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지며 주님이 장사되신 무덤에 연합하기 원합니다.
나를 받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