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아나 팔라치가 태어난 이탈리아 피렌체는 르네상스시대에 인류문화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한 도
시였다. 그녀는 매일 레오나르도 다빈치‧프라 안젤리코‧미켈란젤로‧치마부에‧보티첼리 등 유명 예술
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며 성장했다. 어린 시절의 풍성한 예술적 체험은 모두 그녀가 쓴 훌륭한 작품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부모님은 학교는 다니지 않았지만 풍부한 독서 경험을 바탕으로 그녀를 엄격하
게 키웠으며, 덕분에 오리아나는 온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명작들을 읽으며 문학적 꿈을 키웠다.
부모님은 오리아나가 소설을 출간할 때마다 가장 열렬한 독자가 되어 전문적인 평가를 보내주기도
했다. 그녀의 가장 값진 소장품도 장서였다.
오리아나는 아홉 살 때 장차 소설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아울러 언젠가는 미지의 나라 미국에서 살
기로 마음먹었다. 열두 살 때는 영국 소설가 키플링의「Kim」을 읽고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아
시아 각 지역을 반드시 찾아가보겠다고 결심했다. 대영제국의 식민지정책을 열렬히 지지한 키플링은
인도‧중국‧아프가니스탄 등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많이 썼는데, 오리아나는 소설에 등장하는 지역
을 찾아다니며 주인공들의 신념과 자취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녀는 기자가 되어 이 지역을 답사하
면서 훌륭한 취재를 해냈고, 어린 시절의 결심대로 소설가가 되어 명성을 드날렸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독학으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익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역사‧문학 등을 깊
이 있게 공부했다. 특히 오리아나가 즐겁게 읽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주인공 아가멤논‧
아킬레스‧헥토르‧파리스‧율리시즈‧페넬로페‧메넬라오스‧헬레네‧아이이스 등은 평생을 두고 그녀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단테의 서사시 「신곡」도 이 시기에 심혈을 기울여 읽은 작품이었다. 이러
한 지적 체험은 평생을 두고 그녀의 삶에 지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때 아버지는 총 쏘는 법, 사냥하는
법, 낚시하는 법 등을 가르쳐주며 딸을 강하고 지혜롭게 키웠다. 덕분에 오리아나의 성격은 매우 공
격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형성되었다.
어머니도 오리아나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오리아나가 대여섯 살 때였다. 어머니는 어렵게 구
한 거친 모직으로 조끼를 만들어 딸에게 입혀보았지만, 천이 모자라서 너무 꼭 끼었기 때문에 도저히
입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오리아나를 껴안고 말했다.
“너는 절대로 누구의 마누라나 엄마가 되지 마. 그건 무식한 노예생활이야. 너는 일을 해. 일로 성공
해서 남자 없이도 멋지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세상에 보여줘.”
이 말은 어린 오리아나의 가슴에 낙인처럼 찍혔고, 그녀는 반드시 결혼해서 남편에게 복종하고 아이
를 많이 낳아 훌륭하게 기르라는 아버지의 명령 대신 어머니의 이 조언을 따랐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오리아나는 중학생 신분으로 레지스탕스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어
릴 때부터 反파시즘적 사고방식을 지닌 가문에서 성장한 영향이었다. 오리아나는 직접 총을 쏘는 대
신 총을 쏘는 사람들에게 총과 총알을 날라다주었으며, 레지스탕스와 지하신문 발행자 간의 연락을
담당했다. 틈이 나면 미군과 영국군 부상병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아버지의 일을 돕기도 했
다. 열세 살에서 열네 살에 이르는 시기에 용감하고 애국적인 영웅들과 어울려 치열하게 활동한 체험
은 그녀를 더욱 강인하게 만들었다. 기자시절의 오리아나가 미국에 항전하는 베트콩의 편을 든 것도
이때 형성된 저항정신 덕분이었다.
1943년 9월 8일 이탈리아가 독일에 항복한 직후의 일이었다. 독일군은 점령지 주민들에게 ‘누구든 연
합군 포로를 도와주면 총살에 처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어느 날 한밤중에 아버지가 미군 포로
두 명을 집으로 딜고왔다. 부엌에 있던 어머니는 오리아나에게 그들이 배가 고픈지 물어보라고 보냈
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는 고전을 읽을 정도로 유창하지만 영어는 극히 서툰 그녀는 ‘Are you hungr
y?’라고 물어보는 대신 ‘Are you angry?’라고 물었고, 두 미군은 당연히 ‘No, I`m not.’이라고 대답했
다. 어머니는 준비하던 접시를 치웠는데,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두 미군은 직접 부엌으로 찾아와 손
짓발짓으로 겨우 빵 한 조각을 얻어먹었다.
전쟁이 더욱 격렬해지자 나치의 앞잡이가 된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앞장서서 레지스탕스들을 잡
아 학살했다. 오리아나의 가족은 활동을 중단하고 깊은 산속에 있는 수도원으로 피신하여 1944년 8
월 피렌체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숨어 지냈다. 레지스탕스 활동 체험은 사리사욕을 위해 지
위를 악용하는 권력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키웠다. 독일군과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에게 맞서 싸운 용
기와 경험은 평생을 두고 그녀의 긍지를 드높여주었다. 이때 사귄 레지스탕스들은 종전 후 다양한 분
야에서 국가 재건의 일익을 담당하면서 오리아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전쟁이 끝난 뒤 복학한 오리아나는 두 학년을 월반하여 열여섯 살에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
업했다. 그녀는 수학에서만 C학점을 받고 나머지는 모두 A학점을 받았을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거두
었다. 오리아나는 학교에서 받은 기념메달과 함께 우수한 성적표를 아버지에게 내밀며 칭찬을 기대
했지만, 아버지는 냉정하게 ‘너는 할 일을 한 것뿐이야’ 하면서 성적표를 돌려주었다. 아버지는 딸이
소설가가 되고싶다고 말했을 때도 ‘흥, 작가는 아무나 되는 줄 알아?’ 하면서 콧방귀만 뀌었다. 작가
인 숙부는 한술 더 떴다.
“상굿도 인생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슨 소설을 쓴단 말이냐!”
오리아나는 아버지의 강권에 의해 피렌체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녀는 의사가 되는 것도 작
품을 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생각과 함께 언젠가는 반드시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버
리지 않았다. 실제 이때 배운 의학지식은 많은 작품에서 좋은 소재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
지는 학비를 대주기가 너무 벅차다고 통보했고, 오리아나는 신문사에 임시직 기자로 일하여 스스
로 학비를 벌었다. 그녀는 다른 학생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어 친구를 사귀지는 못했지만, 전혀 개의
치 않고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학업과 일을 병행했다. 그러나 상급생들에게 돈을 바치고도 수시로 얻
어맞는 소위 ‘통과의례’에 환멸을 느낀 데다, 아버지가 끔찍한 교통사고로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대학
을 그만두고 정규직 신문기자로 취업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미동부는 우리와 거의 비슷한 날씨로 대한 절기에 걸맞는 20인치(50cm) 이상 의 폭설이 내려 겨울다운 풍광을 자아 낸다고 합니다. 소한, 대한도 지난 우리의 날씨 역시 큰 추위는 물러난것 같지만 봄의 징조는 아직 입니다. 활기찬 한주 시작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