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친일파 이광수를 위한 변명
2015-01-03 (토)

고등학생들에게 이광수를 아느냐고 물으면 ‘친일파’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들 누구도 이광수의 대표소설인 ‘무정’의 새로운 ‘연애’라거나, ‘흙’의 허숭의 희생적 삶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이광수라는 뛰어난 한 작가가 친일로 향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내면적 고통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단지 그들에게 이광수는 ‘친일파’이기 때문에 나쁜 사람일 뿐이다. 민족주의라는 이념이 선과 악, 좋은 작가와 나쁜 작가를 가늠하는 판단의 기준이 되어 있다. 이념이 문학에 앞서 있고, 삶에 앞서 있는 것이다. 36년간의 지독한 일제식민치하를 겪었고, 그 상황이 여전히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본다면 이들 고등학생의 반응은 당연하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그처럼 단순하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일까. (사진/1920년대의 춘원 이광수)
이광수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사의 부탁을 받고 조선 탐방에 나선 것은 1917년의 일이었다. 이 결과로 발표된 취재탐방기가 ‘오도답파여행기’(五道踏破旅行記`1917)이다. 당시 이광수는 스물여섯 살의 와세다대학교 유학생이었고, 첫 장편소설 ‘무정’(1917)이 매일신보에 발표되어 대대적 성공을 거둔 직후였다. 매일신보사 입장에서는 신청년들의 ‘스타’였던 이광수를 취재기자로 활용하여 일제 조선 지배의 성과를 홍보하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렇다면 이광수의 입장에서는 이 취재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유학생 출신 청년 선각자 이광수에게 이 취재여행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그 고통은 한여름의 지독한 더위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한 발을 내디디면 내디딜수록 이론으로만 접했던 조선의 황량한 현실이 그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관리는 부패했고, 민중은 게을렀으며 신문은 방의 도배지나 장판지로만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이 여행에서 이광수는 일본 대학 강의실에 앉아 외쳤던 조선 개혁의 이상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절절하게 체험하였다. 방문하는 지역이 달라도 그가 매일 매일 적어 타전한 취재탐방기의 내용은 언제나 동일하였다. 조선인의 무능함과 전근대성을 뼈저리게 체험하면서, 일본인의 근대성과 우수성을 절감하였다. 이 불편한 진실과 맞닥뜨리면서 이광수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극도로 쇠약해져 갔다.
이 쇠약한 정신의 끝에서 이광수가 선택한 것이 친일의 길이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정신적 지도자로서 이광수가 차지했던 무게감을 고려할 때 그의 친일은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현재진행형의 상처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광수의 친일 그 자체는 단죄되어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사회도 친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지식인의 내면적 갈등 과정을 되짚어 볼 만한 심적 여유도 어느 정도는 가져도 좋지 않을까. 그 과정을 조용히 따라가다 보면 역사의 거대한 회오리바람 속에 휘말린 나약한 인간들의 삶의 실존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친일’에 대한 비판은 그 모든 과정의 마지막에서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정혜영 대구대 기초교육원 강사
출처 / [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친일파 이광수를 위한 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