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빛 조명이 은은하게 비치는 음식점에 캐롤 키드(Kidd)의 '웬 아이 드림(When I Dream)'이 감미롭게 흘렀다. "딩동" 하고 차임벨이 울렸다. 권유아(22·
서울대 국악과)씨가 친구와 함께 카운터에 가서 주문한 음식을 받아 왔다. 튜나(참치 통조림)와 야채를 무친 샐러드에 시푸드 라이스(해산물 볶음밥), 멕시코 음식 케사디야와 포도 주스 등 두 사람의 점심이 식탁에 놓였다. 계산서를 보니 3만원이 찍혀 있다.
시내 식당이 아니라, 대학 캠퍼스 학생식당 풍경이다. 18일 오전 11시 30분, 서울대 동원생활관 1층에 있는 레스토랑 '더 키친(The Kitchen)'에서 만난 권씨는 "학생회관 식당은 밥값이 싸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친구들과 일주일에 3번쯤 이곳에서 점심을 먹는다"고 했다.
이곳에서 가장 저렴한 메뉴는 멕시칸 부리또(4000원)와 치즈 바게트(4200원)다. 가장 많이 나가는 메뉴는 고르곤졸라 피자(1만200원)와 카르보나라 스파게티(6300원)다. 2~3명 기준으로 식사에 음료까지 주문하면 3만원쯤 나온다.
학생식당(1700~3000원)보다 훨씬 비싸지만, 작년 4월 문을 연 뒤 매일 800~1000명의 손님이 찾는다. 더 키친의 최영일 서울대점장은 "교직원도 있지만 90%가 학생"이라며 "끼니 때는 80석이 꽉 찬다"고 했다. 오전 10시 30분부터 '브런치'(아침 겸 점심) 손님들이 오고, 오전 11시 30분부터 점심손님이 밀려든다. 오전 11시 50분에 도착해 20여분을 기다린 최연호(21·법학과)씨는 "'이왕 먹는 거 맛있는 걸 먹자'는 생각에 여길 자주 찾는다"고 했다.
옛날 대학생들은 값싼 음식을 찾았다. 어쩌다 돈이 생겨도 좋은 식당에 가려면 어쩐지 겸연쩍어 우르르 학생식당에 묻어갔다.
2009년의 대학생들은 다르다. "비슷한 메뉴가 돌고 도는 학생식당 밥에 물렸다. 한 끼를 먹어도 내 취향대로 먹겠다"는 사람이 많다. 이런 변화에 발맞춰 깔끔하고 세련된 상업시설들이 속속 캠퍼스에 들어섰다. 1990년대까지 학교 안 편의시설은 학생식당·간이식당·매점·구내서점·문방구 정도가 전부였다. 요즘 대학 캠퍼스에는 고급 레스토랑과 카페, 수면실과 옥상정원은 물론 영화관과 공연장까지 들어섰다.
값싼 학생식당도 꾸준히 명맥은 잇고 있지만 더 이상 식당 안이 미어지도록 꾸역꾸역 학생들이 밀려드는 일은 없다. 서울대에는 더 키친 외에도 10여곳의 외부 음식점과 카페가 들어서 있다. 학생들이 장사진을 치는 곳은 학생식당이 아니라 외부 음식점이다.
서울대 학생회관 제1식당에서 뚝버섯 불고기(3000원)로 점심을 먹은 신용환(20·지구환경과학부 1년)씨는 "외부 음식점에 가면 여기 밥값의 두세 배는 더 들지 않느냐"고 했다. 2001년 입학한 성모(27)씨는 "작년에 교수님을 따라 한두 번 외부 음식점에 가봤는데, 맛은 있지만 비싸서 자주는 못 가겠다"며 "군에서 제대해보니 저학년 후배들은 비싸도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술 사준다'고 하면 '와인바 가자'고 해서 놀랐다"고 했다.
2007년 3월 문을 연 서울대 안의 비빔밥전문점 '카페소반'은 '소고기나물죽 세트'(3800원)부터 '소반 샘플러'(1만7800원)까지 30여 가지 메뉴를 갖췄다. 이 업체 한혜진 서울대점장은 "'웰빙'을 추구하는 분위기와 맞물려 하루 300명 정도가 찾는다"며 "점심 시간엔 124석이 모자랄 정도"라고 했다.
작년 4월 문을 연
이화여대 ECC (Ewha Campus Complex) 지하 4층에는 예술영화 상영관인 '아트하우스 모모'를 비롯해 레스토랑·서점·헬스장 등 각종 편의시설이 밀집해있다. 커피·파스타 전문점인 '닥터 로빈(Dr. Robbin)'은 저칼로리 메뉴를 판매해 다이어트에 신경 쓰는 여대생과 교직원들이 즐겨 찾는다. 가장 값싼 메뉴는 해산물치즈떡볶이(학생 할인가 7650원), 가장 비싼 메뉴는 두부스테이크(학생 할인가 1만2150원)이다.
이날 오후, 친구 3명과 함께 온 김모(26·조형예술대 석사과정)씨는 베이컨과 날치알 크림소스 파스타와 오리엔탈 리조또 등 4가지 메뉴를 주문하고 3만2800원을 냈다. 김씨는 "재료가 신선한 편이고 이 정도면 가격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아 자주 찾는다"고 했다.
"ECC가 생긴 초창기만 해도 캠퍼스에 외부 프랜차이즈 업체가 들어오는 데 대해 학내에서 반발이 심했어요. 대학이 지나치게 상업화된다는 거였죠. 그런데 요즘은 별말이 없어요. 맛 좋은 음식을 가까운 곳에서 먹을 수 있는데 누가 마다하겠어요?"
서울 화양동
건국대 캠퍼스 안에는 강남의 야경을 바라볼 수 있는 스카이라운지가 있다. 새천년관 꼭대기 14층에 자리한 '카페 소프라'(160㎡·약 50평)다. 지난 3월 문을 연 이곳에서는 파스타와 폭찹 스테이크, 치킨 샐러드 등 간단한 양식을 판다. 식사 가격은 8000원부터 시작한다. 저녁 때는 맥주와 와인도 판다. 매출의 절반 정도가 학생들 지갑에서 나온다.
유인일(46) 매니저는 "저녁 무렵 창가의 바에 앉아 가볍게 맥주를 마시고 가는 학생 커플이 많고, 학과 파티 장소로도 애용된다"면서 "12월 주말 저녁 예약은 벌써 끝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