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이 땅을 샀어야 했는데”…한적한 농촌은 어떻게 ‘강남’이 됐나 [사-연]
한주형 기자 moment@mk.co.kr
매일경제 기사 입력 : 2023-09-27 19:00:00 수정 : 2023-10-06 15:20:01
강남 개발사를 따라 걷다 (1) [사-연]
지금은 고층 빌딩과 아파트로 빼곡한 강남은 불과 45년 전까지만 해도 소달구지가 다니는 논밭이었습니다. 이 시대를 겪지 않은 세대에게는 뽕나무 밭이 바다가 되었다는 말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낯설고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강남. 넓게는 한강의 이남 지역 전체를, 일반적으로는 강남구와 서초구를 의미합니다. 요즘은 ‘강남 3구’라는 말로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를 묶어 부르기도 합니다. 논밭이었던 땅은 지금 전국에서 최고가를 다툴 정도로 높은 땅값을 자랑하는 곳이 되었고 교통, 문화, 의료, 교육 등 모든 인프라가 부족함 없이 갖춰진 도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강남대로와 테헤란로로 이어지는 핵심축에는 대기업 본사 뿐 아니라 각종 IT기업과 스타트업의 사무실이 밀집해 있고, 서초대로 일대에는 법원, 검찰청과 함께 법무단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강남은 서울도성, 여의도와 더불어 서울의 3대 업무지구를 이루고 있고, 일자리 수로 따지면 서울 내 업무지구 중 최다입니다.
‘강남이 논밭이던 짓던 저 때 땅을 사 둬야 했는데.’ 아마 누구나 그 생각을 한번쯤은 해 보았을 것 같은데요. 위 사진의 농사꾼 아저씨는 후에 벼락부자가 되었을까요, 아니면 개발 정보를 모른 채 헐값에 땅을 팔았을까요. 그도 아니면 울며 겨자 먹기로 염가에 땅을 내놓아야 했을까요. 그 답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강남 개발의 신화 속에는 지금 이 땅을 채운 빼곡한 빌딩들과 아파트만큼이나 권력과 자본, 수많은 이들의 이해관계와 욕망이 점철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번 사-연에서는 ‘말죽거리 신화’로 불리는 강남의 개발사를 따라 걸어보겠습니다.
서울 밖 한적한 농촌
조선시대 한강 이남에는 경기 광주부 언주면, 대왕면 일대가 걸쳐 있었습니다. 당시 한강의 남쪽은 한양에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만 닿을 수 있는 곳으로, 인적이 드물고 대부분 별 볼일 없는 한적한 농촌이었습니다. 그나마 도성으로 향하는 물산들이 모이던 청담진(청담), 사평원(신사) 일대가 물류 중심지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한양에서 충청, 전라, 경상 등 지방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던 양재역(驛) 주변이 ‘역촌’으로 불리며 교통의 요충지로서 마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먼 여정을 달려온 말에게 죽을 먹이는 곳이었다고 해서 ‘말죽거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논고개마을’, ‘새마을’, ‘학마을’이라는 지명을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앞쪽부터 순서대로 논현, 신사, 학동의 순우리말 이름입니다. 이 이름들로 지금 강남의 주요 지역들이 농촌마을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강남은 ‘강북’에 한정된 서울에 사는 시민들이 먹을 벼와 채소, 과일 등을 재배하는 장소였습니다. 서빙고나 한강진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넘으면 달구지가 하나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이 있고, 길 양옆으로 논밭과 과수원이 펼쳐졌으며 얕은 구릉지에 초가집들이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압구정은 배, 도곡동은 도라지, 잠원동에는 뽕나무와 무를 재배하는 산지였습니다. 강남의 농민들은 수확한 농작물을 나룻배에 가득 실어 강북으로 넘어와 팔았고, 돌아가는 길에는 논밭에 거름으로 뿌릴 분뇨 등을 싣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서울은 만원이다
1963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서울의 행정구역은 동서남북으로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269㎢였던 면적이 605㎢를 넘게 되었으니 하루아침에 시 면적이 두 배가 넘게 넓어진 것입니다. 자세히 살펴보자면, 양주군 구리면과 노해면이 각각 동대문구, 성북구에 편입되어 훗날 중랑구와 노원구가 되었습니다. 김포군 양동면과 양서면, 시흥군 신동면과 동면, 부천군 소사읍 일부는 영등포구에 더해져 나중에 양천구와 강서구, 서초구, 관악구, 구로구, 금천구로 분리됩니다. 그리고 이번 화의 주제인 강남 일대를 살펴볼까요. 광주군 구천면과 중대면, 언주면, 대왕면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 성동구로 편입되었습니다. 이 지역이 지금의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에 이르는 지역입니다. 한강 이남의 서울은 영등포구와 성동구가 양분하고 있었고, 지금의 강남 지역을 전부 뭉뚱그려 성동구에 포함했던 것입니다.
서울의 면적이 크게 확장된 데에는 당시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서울 인구와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강북 도심지역의 과밀화는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1920년대 20만 명이었던 서울 인구는 도시화, 산업화와 이로 인한 이촌향도 현상까지 더해 1965년 35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폭증한 인구는 곧 강북 내 주거, 교통 등 수많은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필연적으로 서울의 테두리가 더 커져야만 했고, 사대문 바깥의 업무단지와 주거지구의 개발이 시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강남 개발의 밑그림
강남 일대의 개발계획을 처음으로 꺼내든 사람은 화신그룹의 박흥식 회장이었습니다. 지난 사-연 남촌 백화점 편에서 등장했던, 화신백화점으로 시작해 경성 제일의 부자로 등극했던 그 인물입니다. 1965년, 그가 경영하는 화신산업의 자회사인 흥한도시관광에서 한강 이남에 신도시를 만드는 ‘강남 신도시계획구상’을 세웠습니다. 이듬해 서울시는 화신의 신도시계획을 거의 그대로 인용해 ‘남서울계획’을 발표합니다. 강남, 서초 뿐 아니라 관악, 동작에 이르는 3,500여만 평의 방대한 지역에 택지와 함께 경공업지대를 구성하겠다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습니다. 이로서 12만호, 60여만 명의 사람들의 이주가 가능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해 4월, 김현옥 서울시장의 취임과 함께 또 다른 개발안이 발표됩니다. 바로 ‘새서울백지계획’이었는데요. 워싱턴DC를 모델로 하는 이 도시계획은 무궁화꽃잎 모양으로 된 5,000만평의 대지에 주택지구, 관공서를 비롯한 업무지구, 상업지구, 경공업지구, 녹지 등을 적절한 비율로 나누어 배치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을 실현할 장소는 강남의 드넓은 전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계획은 구상도만 보더라도 아주 엉성하고 초보적인 계획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우리는 한 번도 신도시나 신시가지를 계획하거나 건설해 본 경험이 없었고, 도시의 구성과 기반시설 등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의 강남의 모습은 2년 후인 1968년 발표된 영동지구구획정리사업을 시작으로 틀을 갖추게 됩니다.
<참고자료>
ㅇ「강남 40년 영동에서 강남으로」, 서울역사박물관
ㅇ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3」, 한울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