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사태 김신조 심문관 이명산의 회고
"김신조와 같이 왔다가 돌아간 자
있다"
이명산 대북전문가/자유기고가
1. 1965년에 서울시경이 북한간첩 한 사람을 체포했는데 이 사람이 전향하여
대북 역공작에 적극 협조했다. 그는 북한에 계속 암호통신을 보내며 남한에서 그가 성공적으로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고를 했고,
서울 북방 송추유원지 금수장 앞에서 1965년 7월 18일 북한이 파송하는 3인조 무장간첩들을 접선하도록 공작을 추진했다.
이때
서울시경의 대공요원들이 잠복해 있다가 저들을 덮쳤다. 그때 북한간첩들이 저항하여 교전이 벌어졌고 서울시경 대공요원 두 사람이 전사했으며 3인조
간첩들 중에 한사람이 생포되고 두 사람은 몸에 심한 총상을 입은 채로 도주하여 북한으로 돌아갔다. 생포된 자의 이름은 조장 대위
<노성집>이고 도주한 자들은 조원 대위 <이재영>과 대위 <우명훈>이다. 이 두 사람은 북으로 돌아간 후에
병원치료를 받고 소위 <공화국 전투영웅> 칭호와 각각 육군 대좌와 상좌의 계급을 받았으며 그들이 2년 후에 평양시 근교 상원군
공포리에 <124군부대>를 창설하였다.
2. 이 124군부대는 전국 군부대 내에서 사상이 투철하고 신체 강인한 2400명의 병력을 차출하고 각
300명씩 8개 기지로 분리하여 위에서 말한 평양 근교 상원군과 황해북도 연산군에서 대남공작 특공대로 비정규전 유격훈련을 실시하였다. 그 후
북한에서는 대대적인 대남 기습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이 작전계획에 참여한 인물들은 김창봉 민족보위상, 최광 인민군 총참모장, 오진우 인민군
총정치국장, 허봉학 노동당 중앙위원회 대남사업총국장, 김정태 총참모부 정찰국장, 이재영 124군부대장, 그리고 우명훈 제6기지장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황해북도 연산군에 있는 제6기지를 일차적으로 남파할 것을 결심하고 대원 76명을 뽑고 그들을 5개조로 구성하여 제1조는
청와대, 제2조는 미 대사관, 제3조는 육군본부, 제4조는 서대문 교도소, 그리고 제5조는 서빙고 보안사 분실을 기습하기로 계획을 세웠다가
상부지시로 취소하고, 김신조를 포함한 31인조로 축소하여 청와대 기습작전만을 실시하기로 최종 결심하였다. 그 후 이 31인조는 즉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세우고 실전 예행연습을 하였는데 사리원에 있는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청사를 사전예고 없이 기습하여 12명을 사살하고 남조선 간첩들의
소행이라고 위장하였다.
3. 소위 <김신조 특공대> 31인조 무장공비는 1968년 1월 13일 정찰국장 김정태의
명령을 받고 황해북도 연산군 제6기지를 떠나 1968년 1월 17일 밤중에 비무장지대(DMZ)를 통과하고 미2사단 전방 고랑포 부근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의 철조망을 공병가위로 절단한 후 남한 땅에 침투했다. 그들은 국군 복장을 하고 야간에만 이동을 계속하여 1968년 1월 19일 오후
2시에 삼봉산에 도착했을 때 법원리 부락민 나무꾼 네 사람을 조우했는데 저들을 죽일까 살릴까 토의하다가 얼어붙은 땅을 파고 시체를 매몰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저들에게 “곧 남조선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고 공산주의가 승리하는 세상이 된다”고 말하고 절대로 경찰에 신고하지
않겠다는 조건부로 저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저들은 하산하자마자 법원리 창현경찰서에 신고를 했고 경찰과 국군25사단이 동원되어
수색작전을 개시했다. 그 후 31인조 공비들은 노고산을 넘어 20일 아침 7시에 비봉산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는 공비들이 2인조 3인조로
분산하여 이동하다가 승가사에서 재집결하고 1월 21일 저녁 8시에, 청와대에서 불과 800미터 떨어진 청운동 세검정 고개까지 접근했다. 그때까지
도중에서 경찰과 군인들을 만났어도 공비들이 국군복장을 했고 특수훈련을 마치고 귀대하는 방첩대라고 속여 아무 마찰이 없었다. 공비들이 세검정고개
자하문을 지나려고 할 때 신고를 받은 종로경찰서 수색대가 도착하여 저들을 불심검문하게 되었다.
4. 그때 경찰수색대를 진두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국군복장을 한 공비들의 소속과 신분을 확인하려고 할 때 공비들이 뻣뻣하게 대답하며 소속과 신분이 궁금하면 자기들의 부대까지 동행하자고
하여, 직관적으로 저들이 수상하다고 느낀 최규식 총경이 권총을 빼 들었고, 그때 마침 77번 노선 시내버스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세검정 고갯길을
올라오고 있었는데 공비들은 그것을 수색대 지원병력으로 오인하고 순간적으로 소지하고 있던 기관단총을 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여 최규식 총경과 옆에
있었던 정종수 경사가 전사하고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들 중에 여러 사람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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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공비소탕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초전에 공비 5명이 사살되었으며 나머지 인원들은 흩어져 인왕산, 비봉산, 의정부 일대로 도주하였고 국군 6사단 병력이
동원되어 저들을 추적하던 중에 1월 22일 새벽 3시에 <김신조>가 인왕산 근처 민가에 숨어 있다가 생포 되었다. 그는 수색대원들에게
발각되자 수류탄으로 자폭하려고 했으나 수류탄이 불발했다. 그 후 소탕작전이 서울북부 경기도 일대에서 1월 31일까지 계속되었는데 31명 공비들
중에 생포된 김신조 외에 1명이 자폭했고 28명이 사살되었으며 한명은 살아서 북으로 도주하였다.
5. 이때 31인조 공비들이 소지한 무기는 기관단총 31정, 실탄 9,300발, TT권총 31정, 대전차
수류탄 252발, 방어용 수류탄 252발, 그리고 단도 31개 이었다. 남한 측 피해자는 군경민 합해서 26명 사망과 6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사망자 중에는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과 15연대장 이익수 대령이 포함된다. 그리고 소탕작전에 동원된 병력은 군경 합해서 총
19,213명이었다. 김신조는 생포되던 날 1월 22일 오후 7시에 수갑을 채운 채로 기자회견에 나왔고, 기자들이 묻는 질문에, “나는 박정희의
목을 따러 왔수다”하며 기세 등등하였고, 자기는 26세, 생년월일은 1942년 6월 2일, 본적은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동, 소속은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정찰국 124군부대 제6기지 육군소위, 부모는 직조공장 노동자 김중엽과 이분옥이고, 아래로 세 명의 여동생이 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이 공비소동 기간 중 1월 23일에는 원산 앞바다 공해 상에서 미국해군의 정보수집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Pueblo>호가 북한에 납치 되었다. 이 사건 이후에 남한에서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하여 1968년 4월 1일에
250만의 향도예비군이 창설 되었고, 155마일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전역에 새로운 철책이 설치되었으며, 미국공군의 최신예기
<팬텀>이 한국공군에 배치되었고, 미국정부는 한국정부에게 군사원조 1억 달러를 추가로 긴급지원 하였다. 그 당시 한국의 연간수출총액이
3억2천만 달러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6. 생포된 김신조는 공비소탕작전이 끝난 후에 대방동에
위치한 미502군사정보단 수용소에 후송되었고 그곳에서 내가 그를 4개월간 심문 하였다. 그는 북한에서 교육받은 그대로 철두철미하게 남한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고 있었으며 매사에 반항적이었고 비협조적이었다. 그는 체포될 때 자폭에 실패한 것을 원망스럽게 생각했고 청와대 기습작전에 실패한
것을 <위대한 수령 김일성>에 대한 무한한 불충으로 생각했다. 그의 반항적인 태도 때문에 나는 그를 1주일간 이상 정상적으로 심문을
할 수가 없었으며 그를 회유하고 설득하는 일에만 신경을 썼다. 그는 자결하겠다고 식사를 거부했고 수용소 감방 벽에 머리를 부딪뜨리고 손목의
혈관을 이빨로 물어뜯고 온갖 소동을 벌리고 있을 때 수용소 측에서는 그의 자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그의 감방 바닥과 사면 벽을 모두
<매트리스>로 덮고 24시간 수갑을 채운채로 특수 감시 장비를 통하여 그를 감시했다.
그가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반항할
체력이 없게 되었을 때 나는 침착하게 그에게 접근하여 “자네가 죽기는 왜 죽어” 하면서 인간생명의 존엄성과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꼭 하나
남아 있다고 말하고 그것은 “진실을 알아야 하고 또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것”이며 그 다음엔 죽던지 말던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사람이
사내자식으로 태어나서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왔으며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위인지 알기도 전에”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가장 비겁하고 무책임한 일이라고 설득했다. 이 말에 수긍이 가는지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문채로 내 말을 계속 듣기만 했다.
7. 김신조가 수그러진 다음에 나는 그의 수갑을 풀게 하고 식당에 특식을 주문하여 먹이게 하고 본격적인
심문에 들어갔다. “김군, 자네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나도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다음에 무엇이 바른 길인지 판단을
하자.” 이때 김신조는 북에서 배우고 들은 이야기와 자기가 아는 진실이 무엇인지 나에게 설득하려는 마음으로 나와의 대화에 응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날이 가고 그와 나와의 인간적인 냄새를 서로 맡으면서, 남북한의 건국과정과 가짜 김일성의 정체와 자유세계의 실정을 이야기하고 들으면서,
그는 서서히 새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약 3주 후부터는 수용소를 거쳐 간 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협조적이었던 사람의 하나가 되었고 가장
많은 분량의 정보를 제공했다.
그리고 심문 도중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며 그가 출소하면 꼭
교회에 가갰다고 약속을 했다. 한국정부는 그가 전향하여 최대한으로 협조를 했고 역사의 산 증인으로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1970년에 합법적인
남한주민으로 정착하게 하였고 불행히도 북에 있는 그의 가족은 모두 처형 되었다. 그 후 김신조는 영등포구 신길동에 있는 성락교회의 김기동 목사
밑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침례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남양주 성락교회에서 2009년까지 시무했다. 그가 생포 되었을 당시 자폭하려고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이 불발한 것은 김신조의 선택도 아니었고 수색대원들의 선택도 아니었고 하나님의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비록
무장공비였지만 그를 살려놓고 사용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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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김신조가 대방동 수용소에 도착하고 1주일 후에 미8군 G-2 <오란도> 준장과, 나와,
보안사 서빙고분실 보안과장 이학봉 소령이, 김신조를 앞세우고 헬리콥터로 전방에 가서 김신조 31인조가 통과한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철조망을
조사했다. 철기둥 북쪽에서 공병가위로 수직 약 1미터가량 자르고 통과한 후 다시 내려놓으면 철 기둥 남쪽 밖에서는 순찰대나 조사관들의 눈에 띄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때 우리들은 김신조로부터 침투 당시의 상황과 이동과정과 아군경비태세의 허점을 구체적으로 듣고 나는 그 모든 것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그 지점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미군 GP로 이동했고 쌍안경으로 비무장지대 반대쪽 북한초소의 동향을 감시했다.
그때 또 예기치 못한 참사가 발생했다. 우리가 헬리콥터로 그 초소를 떠난 약 10분 후에 북한 초소에서 발사한 포탄에 의하여
우리가 방문했던 바로 그 초소의 근무자 미군들이 폭사하고 부상을 입었다. 참으로 아찔한 사건이었다. 우리가 그곳에 10분만 더 머물렀더라면
우리도 그 참변을 당했을 것이 아닌가. 그때 동행했던 이학봉 소령은 육사 18기생으로 1980년에 국군 보안사령부 (보안사) 대공처장을 역임했고
육군준장으로 예편했으며 1986년에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2차장을 했고 후에 13대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9. 세월이 많이 지난 후 2004년에 김신조는 놀랍고 새로운 사실을 증언했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작전을 실패한 후 31인 공비들 중에 살아서 북으로 돌아간 사람이 한 명 있었다고 들었는데, 2000년 9월 11일에 김정일의 특사로
서울을 방문한 노동당 대남담당비서 김용순을 수행한 박재경 대장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박재경 대장은 그 당시 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이었으며 김정일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사람들 중에 하나라고 했다. 그는 서울에 왔을 때 신라호텔에서 남측 인사들을 만나고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김하중에개 칠보산 송이버섯을 전달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청와대 기습작전을 실패하고 북으로 도주할 때 노고산에서 추격하는
국군수색대와 교전을 하고 15연대장 이익수 대령을 사살한 장본인이다.
10. 그리고 한국정부가 발표한 내용과 상이한 새로운
사실을 증언한 한 사람이 또 있었다. 2012년 초에 탈북자중 한 사람이 전 인민군 상좌 홍은택(가명)인데 그가 124군부대의 후신인
711군부대에서 5년 이상 근무하면서 지득한 내용이라며 김신조와 대면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작전에
파송된 공비는 총 33명 이었다는 것. 그러니까 김신조가 모르는 두 명이 더 있었다는 말이 된다. 김신조는 분명히 처음부터 31명이 떠났고
31명이 같이 행동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 추가적인 두 사람은 동일한 임무를 위하여 별도로 침투했고 별도로 행동했다는 말이 된다. 홍은택의 말에
의하면 그가 711군부대에서 분명히 문헌에서 보았고 부대 역사 강의에서 들은 바 그 두 사람의 이름은 임태영과 우명훈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공비들이 서울 청운동 세검정에 도착했을 때 인근 옥상에서 공비들의 후미를 감시하고
주위를 살피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작전이 실패하는 것을 보고 도주하다가 생포되었고, 수색대원들이 그들에게 자수하고 전향하여 국군을 협조하라고
강요하자 거절하니까 수색대가 생포된 다른 공비 한 사람을 작두로 목을 참수하는 현장을 보여주고, 그래도 거절하겠느냐 하니까 두 사람이 겁에 질려
대한민국에 충성할 것을 서약하고 대북역공작 임무를 받은 다음 북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북에 돌아가서 김일성에게 직접
접근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으로 충성을 다하고 승진하고 있다가 적절한 시기에 남한의 지령을 대기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말
그대로 북에 돌아가서 충성을 다 했고 각각 상장과 중장까지 진급했으나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 1998년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으나, 1968년 1월 25일 오후, 수색대의 추격 중에 사살된 공비들의 시신을 경기도 송추초등학교 교정에 모아놓고 김신조가
확인을 할 때 거기에 목이 잘리어 나간 시신이 하나 있었다. 그런 점으로 보아 위에서 말한 홍은택의 증언에 신빙성이 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이
문제는 아직도 한국정부가 확인해야할 숙제로 남아있다.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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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산 대북전문가/자유기고가 | |
첫댓글 대한민국의 귀중한 35명의 국군 및 경찰관의 전사,순직자를 낸 저 악독한 김일성 공산주의 괴뢰군 도당을 위시한
모든 북괴군 폭도들은 발견 즉시, 대한 민족의 이름으로 극형으로 처단 멸살시켜야만 할 것이며,
극단좌파 종북 정치 모리배 용공분자 무리(이석기 등등)들 또한 남김없이 색출, 포박하여
그 미치광이들이 밤낮없이 북한 괴뢰집단을 찬양하고 갈망하는 38선 이북으로 축출함이 지당할 것입니다.
6.25남침을 북침이라고 생떼쓰며 남남갈등을 조장하고 국가를 전복시키려 혈안이 되어 날뛰고 있는
정당, 국해의원, 국정원, 정부 및 청와대, 검경, 민변, 전교조, 민노총, 전공노, 교수, 지자체공직자,용공시민단체 등등...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괴뢰집단, 주적에게 충성맹세하고 이적행위를 일삼아 광분하고 있는 모든 별종들을
조기에 척살함으로써 6.25남침전란으로 인한 전사, 순국한 수십 만의 영영들과 수백 만의 가족들을 위로하고,
자유 대한민국의 안보와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고 세계 만방에 국위를 떨칠 수 있도록 일치단결해야만 할 것입니다.
오호통재라!!!~~~어찌 필설로서 오늘의 통탄 자복할 극한 상황의 국민적 분노를 피력할 수 있으리오............&&&
이런일이 있었는데 까맣게 모르고 지냈지요. 잘 보고 갑니다.